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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7   영변폭격안과 미국인 소개 계획 [8]
영변폭격안과 미국인 소개 계획
1994년의 영변 북폭 계획과 그 준비에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에게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잘못 알려졌다기 보다도 그 사건에 관련해서 센세이셔널한 부분만 강조되고, 훨씬 중요한 계획의 세부내역, 준비상황 및 그 실현가능성, 실무자들의 의견, 그 장단점에 대한 평가 등이 거의 무시되었다.

그렇게 알려진 데 일부의 책임은 김영삼이 "미국이 제멋대로 북폭을 하려고 했는데, 내가 막았다"라고 주장한 데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가 이해할 수 있고, 보고 싶은 내용만 선별적으로 받아들인데 따른 측면이 훨씬 크다.


다음에 소개하는 갈루치 회고록의 묘사는 좀 길지만 놓치기 쉬운 측면들을 잘 부각시키고 있다. 관련 서류들이 대거 기밀해제되는 시점이 오기 전까지는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튿날인 (1994년) 6월 14일 장관급 회의가 새로 열려 군사력 증강, 제재안 의결, 그리고 대결상황을 돌리기 위한 최후의 외교적 노력 등에 대해 논의했다. 그런데 여기서 "오시라크(Osirak) 옵션"이라고 불린 새로운 대안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오시라크는 1981년 이스라엘이 공중폭격을 통해 파괴한 이라크의 원전시설을 의미했다. 그 방안을 시행하는 것은 기술적, 정책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복잡했다. 부시 전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이었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Brent Scowcroft)와 국무부 차관 아놀드 캔터(Arnold Kanter)가 한 신문에 보낸 기고문에서 북한이 IAEA의 지속적인 사찰 및 감시 활동을 보장하지 않을 경우 그러한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서 당장 결정해야 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하더라도 미군사력의 증강이 완료된 ‘후’에만 가능하다고 의견을 같이 했다. 또 한국정부와도 사전에 상의를 해야 했다.

논리적으로 따져 미국이 영변의 핵시설을 공격하려면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는 영변의 재처리 시설만 공격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재처리 시설과 함께 5-메가와트급 원자로와 사용후 연료봉 저장고와 같은 영변에 있는 다른 핵시설도 함께 파괴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앞에서 말한 모든 핵시설과 동시에 보복행동을 취할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북한의 주요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는 모두 북한이 모종의 대응을 할 가능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세 가지 방안은 각자 장단점이 있었다. 첫째, 재처리 시설을 폭격하면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몇 년 후퇴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북한이 재처리 시설을 다시 건설하려면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사능 누출의 가능성도 낮고 무엇보다 북한이 전면전에 나설 가능성이 그중 낮았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이미 추출했다고 여겨지는 핵탄두 한두 개 분량의 플루토늄이 재처리시설에 남아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역으로, 북한이 이미 추출한, 후일 클린턴 대통령이 음료수 캔 크기라고 한 플루토늄 덩어리 한두 개를 미국이 폭격에 나설 경우 최우선 표적이 될 재처리 시설에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폭격을 해봤자 문제를 완전 해결하기 보다는 몇 년 연기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봐야 했다. 그나마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이 지지할지도 의문이었다.

둘째 방법, 즉 영변의 모든 핵시설을 파괴하는 것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보다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여 그것을 회복하려면 제한폭격 보다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그러나 제한폭격에 비해 위험도 컸다. 곧 방사능 물질이 유출될 확률도 높고 북한이 보복에 나서 전면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높았다. 그래서 전면전의 가능성이 높은 이 방법이 선택된다면 자연히 셋째 방법, 즉 북한의 군사시설까지 폭격하는 방법으로 연결되는 것이 논리적이었다. 즉 전면전이 불가피하다면 혹은 그 가능성이 높다면 그 전에 북한의 전쟁수행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당연한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반대의 의견이 높아질 것이었다.

좌우간 이는 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급한 것은 유엔을 통한 제재였고 그에 따라 참석자들은 유엔에 제출할 초안을 상의하고 곧 합의에 이르렀다. 합의가 이처럼 쉽게 이루어진 것은 의외였다. 점진적 확대전략에 대한 초기의 합의는 깨어진 지 오래고 그에 따라 부처간에 심각한 이견이 표출되었었기 때문이다. “안전조치 우선론자”들은 포괄적인 내용을 담은 단일한 결의안을 선호했다. 대신 북한이 안전협정에 따른 의무를 수행할 경우 제재를 해제하는 “구제방안”을 같이 담기를 원했다. 반면 “해체 우선론자”들은 단계적 접근을 원했다. 즉 3단계에 걸쳐 단계적으로 제재수위를 높여가되 구제방안은 영변 핵시설의 동결 등 플루토늄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조치에 초점을 두었다.

결국 참석자들은 제재는 두 단계에 걸쳐 시행하되 하나의 결의안에 모두 담는 방안에 합의했다. 첫 번째 결의안이 통과되고 나면 추가 행동에 대한 압력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 결과였다. 첫 번째 단계의 제재조치는 북한이 안전협정관련 의무를 수행하고 IAEA와 전적으로 합의하지 않을 경우 결의안 통과 후 30일이 지나면 실행에 옮겨지게끔 되었다. 제재의 내용은 북한의 핵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교역의 금지, 대량살상무기 및 재래식 무기와 관련된 수출입의 금지, 상업적 목적과 인도적 사업, 기타 경제적 및 개발목적의 지원용을 제외한 모든 항공운송의 금지를 포함했다. 그리고 각국에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축소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뜻에 반하는 추가적 행동을 취할 경우, 예컨대 NPT를 탈퇴하거나 재처리를 시작하고, 기타 안전조치를 방해하는 활동을 할 경우 두 번째 단계 제재조치를 위하기 위해 안보리가 “긴급회의”를 연다는 것도 내용에 포함됐다. 그리고 나면 북한의 금융자산의 동결, 대북송금의 금지 등이 실행에 옮겨질 것이었다. 미국의 계획에 따르면, 러시아가 주장하는 국제회의는 북한이 안전협정 관련 의무 이행에 동의하고 IAEA와 전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한 다음에 열기로 되어있었다. 이렇게 합의된 초안은 곧바로 한국과 일본에 보내졌다. 그리고 주유엔 대사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는 기자들에게 최초의 초안이 “향후 며칠 내에” 배포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짐 레이니 대사와 주한미국 대사관 직원들은 이와 같은 한국 내 동향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대사관의 주요임무는 한국의 분위기를 워싱턴에 정확히 전달하는 것 말고 또 있었다. 곧 적대행위가 임박하면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을 안전하게 소개(疏開)할 책임도 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모든 대사관은 「비전투원 소개 작전」(Noncombatant Evacuation Operation; NEO)에 관한 계획서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 계획서는 파일박스 깊숙한 곳에서 먼지만 뒤집어 쓴 채 처박혀 있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경우는 달랐다. 자국민간인을 대피시키는 것은 곧 전쟁계획의 일부였다.

찰스 카트만(Charles Kartman) 주한 미국부대사가 이 계획의 담당자였다. 1993년 뉴욕의 북미회담에 참석했던 그는 그 후 서울주재 미대사관 부대표로 발령받았다. 차분하고 분석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원래 일본전문가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지만 서울에 두 차례 근무하고 국무부 한국과장을 지낸 터라 한국을 잘 알고 있었다. 서울에 배속된 후 그는 20년 동안이나 손보지 않은 NEO를 재검토했다. 그 계획에 따르면 민간인들을 소개할 항공기는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후 증원군을 싣고 온 수송기였다. 카트만은 이 계획은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20년의 세월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한국이 그랬다. 그동안 한국경제가 성장을 거듭한 결과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의 숫자도 급격하게 늘어 1990년대 초 10만 명에 육박했다. 대부분은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서울도 물론 20년 전의 서울이 아니었다. 서울을 빠져나가는 몇 안 되는 도로는 항상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았다. 부산이 되던 인천이 되던 집결지로 가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울이 북한의 포격을 받거나 외국인들의 탈출에 놀란 한국인들도 서울을 빠져나가려고 들면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카트만은 주한미군과 협조하여 새로운 NEO 개발에 착수했다. 수개월의 작업 끝에 거의 완성단계에 들어간 이 계획에 따르면 무엇보다 주한 미국인들을 북한의 장사정포 사정거리 밖으로 소개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군인 가족, 국방부 소속 민간관리와 그들의 가족, 기타 미국시민권자들은 가용한 상업운송수단을 이용하여 출발할 것이었다. 나머지는 정부가 나서야 했다. 미국정부는 이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절차를 마련해 두었고 그것을 활용할 것이었다. 그래서 국무부가 요청하면 국방부가 나서서 나머지 민간인들을 열흘 이내에 소개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전형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은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유사시 미국시민들은 대중매체나 미상공회의소 등의 조직을 이용한 비상연락망인 “워든시스템”(warden system)을 통해 대피에 대해 통고를 받는다. 한국정부가 열차편을 제공하여, 남쪽, 예컨대 부산과 같은 집결지로 이동한다. 거기서 해상이나 항공편을 이용 일본으로 대피한다. 북한이 공항시설을 파괴하면 해상로를 이용한다.

따라서 일본의 협조도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국무부와 일본 외무성이 함께 작업했다. 서울에 합동위원회를 조직하여 함께 계획수립에 임하는 한편, 일본에 도착한 미국인들을 수용하는 문제는 일본에서 최종적으로 정리했다. 문제는 외국인들의 철수를 돕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는 것이 미국의 오랜 방침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유엔사령부 자체가 다국적군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모든 외국인들은 미국이 자신들도 책임질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소개작전에 동참한 일본인들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서방국가 국민들도 해당됐다. 6월 중순이 되자 서울에 있는 외국대사관들은 언제 자국민들의 대피작전에 나서야 하는가를 생각하느라 거의 업무가 마비되었다.

NEO 자체는 많이 개선되었지만, 그래도 긴장이 고조되고 그래서 외국인들이 대사관의 지령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대피에 나설 경우가 있을 수 있었다. 처음에 그 숫자는 많지 않겠지만 긴장이 고조되어 공황(恐慌)상태가 닥치면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이라도 전투가 임박했다는 느낌만으로도 사람들은 공항으로 시외로 치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대사관도 수송수단 마련을 위해 NEO발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었다.

카터 전대통령 일행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일부 외국인들은 서울을 떠나기 시작했다. 임직원의 가족들에게 출국을 종용하거나, 특별한 경우가 아닐 경우 서울방문을 금지하거나, 자체 철수계획을 검토하는 외국기업들이 속출했다. ‘서울외국인학교’의 일부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즉각 귀국시키기로 결정했다. 각국 대사관들은 만약을 대비하여 항공편을 예약해두었다. 그리고 날마다 카트먼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아직 한국에 있는지 확인했다. 6월 13일부터 시작된 일주일 동안 미국대사관은 비정상적으로 많은 전화를 받았다. 대부분 한국체류중임을 등록하기 위한 미국인들로, 등록과 동시에 대피계획에 대해 문의했다.

그러나 워싱턴에서 위기감이 증대될 경우 나타날 사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 확실치 않았다. 20년 전에 마련된 소개계획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일단 미국인들이 대피에 나서면 이는 곧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것을 본 북한이 경계태세를 높이거나 최악의 경우 선제공격에 나설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한국에서 공황사태가 발생하여 수만 명이 공항으로 몰려가는 사태가 일어날 것이었다. 곧 NEO 자체가 “작용-반작용”의 악순환을 불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계획은 군사력 증강이 시작된 이후까지, 즉 최후의 순간까지 철수를 미루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휴전선 부근에 엄청난 양의 장사정포 진지를 구축하고 있고 서울이 그 장사정포의 사정거리에 들어가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그 계획으로는 미국시민들의 생명을 지킬 수 없었다.

이에 주한미대사관은 워싱턴에 이 문제를 알리려고 노력했다. 철수가 엉망이 될 가능성이 너무나 높기 때문에 철수착수에 대한 재가를 요청하는 시점이 예상보다 훨씬 앞당겨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대사관 직원은 그에 대한 본부의 응답을 “100퍼센트 예스는 아니지만 문제를 이해했으니 최선을 다 하겠다”로 요약했다. 실로 국무부는 외교관 중 아시아 문제에 가장 밝다고 하는 고참외교관 윌리엄 브리어(William Breer)를 팀장으로 하는 태스크포스를 구성했다. 브리어의 임무는 대피준비상태를 관찰하여 피터 타노프(Peter Tarnoff) 국무부차관에게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일이었다.

위기의 진행속도가 빨라지고 워싱턴의 고위간부들이 중요 결정을 내리기 시작하면서 레이니 대사와 럭 사령관의 우려는 커져만 갔다. 서울에서 수천 마일 떨어져 있는 워싱턴의 고위층들은 아마 군사적 조치와 외교적 조치를 잘 조합하면서 위기를 관리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움직일 것이었다. 그러나 현장에 있는 이들 둘이 보기에 그 같은 전제는 별로 신빙성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백악관 상황실에서 내린 결정은 한국에 주재하는 외국 민간인들의 공황을 불러 일으켜 레이니 대사로 하여금 철수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을 수 없게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인들도 탈주에 나서고 북한의 경솔한 행동도 초래하는 등 워싱턴의 의도와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6월 16일 백악관에서 최고위급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럭 사령관은 레이니 대사에게 급히 만나자는 전화를 했다. 대통령이 한국에 병력을 증파하기로 결정할 참이라는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그는 급히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대사관저로 차를 몰았다. 거기서 두 사람은 유래가 드문 대사-군사령관 합동건의문을 작성해 워싱턴으로 보냈다. 이 건의문에서 그들은 지금 워싱턴에서 내리려는 결정은 수만 명 미국인의 안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고려와 준비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앞으로 두 사람과 사전 협의 없이 추가적인 조치는 취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제언했다. 그럼으로써 이들이 바란 것은 상황의 위중함을 알리는 것만은 아니었다. 의사결정과정의 속도를 늦추어 외교적 해결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었다.

정확이 어느 정도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이 둘도 몰랐다. 럭 사령관의 부관들은 사령관의 애견인 “버드”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면 위기의 정도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애완견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던 장군이었기에 사태가 위급해지면 자신의 개를 미리 피난시킬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레이니 대사가 더 소심했다. 그는 마침 자신을 찾아와 있던 딸과 손자들에게 귀국하라고 미리 말해 두었다. 그리고 대사관도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NEO 시행 재가를 요청하는 공문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한국정부가 이와 같은 움직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한국과 미국, 정확히 말해 한국 외무부와 대사관 및 한국 국방부와 주한미군 사이에는 상설 채널이 있어 민간인 소개 계획에 대해 서로 밀접히 협력해 왔던 것이다. 특히 군사적 채널의 경우 양국은 미국인들을 수송할 열차마련 등과 관련하여 밀접한 협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사관의 경우 민간인 대피계획에 한국 정부를 관여시킬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외교관의 입장에서 자국민의 보호는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소환 공간의 고위간부 한 명은 한국 외무부의 상대역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6월 6일 주한미군이 정기적으로 잡힌 일정에 따라 NEO 훈련을 시작하자 한국정부가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북한은 예외 없이 이것을 “북침” 준비라고 비난했다. 청와대도 우려를 표명했다. “그들은 준비와 실천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 청와대 관리가 말했다. “사람들은 베트남을 기억한다. 미국대사관 지붕에 헬리콥터가 앉고 뜨는 것은 바로 베트남과 똑같다.”

한국정부의 걱정은 미국이 갈수록 강경한 입장을 취함에 따라 더욱 커졌다. 한국정부는 이미 미국의 제재노력에 동참하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도 제재를 협박하거나 취하면 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불러올 수 있다고 믿고 제재를 지지해왔다. 그리고 제재를 취하기 전에 미국이 군사력 증강에 나설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군사력 증강 계획 수립에는 럭 사령관과 그 부관들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들이 한국 국방부와 밀접한 협조 하에 그 일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국방부가 대통령에게 그 진전과 상황을 보고하는 것은 더욱 당연했다. 한승주 외무장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강경책이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측은 미국이 협의는 하면서도 모든 군사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한 미국관리의 표현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의 비핵화정책의) 제단에서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김영삼 대통령은 후일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미국은 가장 가까운 한국과도 상의하지 않은 채 자국민을 철수하고 북한과의 전쟁에 막 나설참이었다. 그래서 그가 레이니 대사와 클린턴 대통령에게 연락하여 제때 중단시켰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회고는 틀린 부분이 많다. 첫째, 미국 대사관측에서 청와대에 철수계획에 대해서 상세히 알려준 것은 사실이지만, 자국민 철수에 막 나설 참은 아니었다. 실제로 레이니-럭의 공동건의문을 수령한 미국정부는 레이니 대사를 워싱턴으로 불러 최고위급 간부들에게 직접 브리핑을 하라고 했다. 만일 철수가 임박했더라면 그가 워싱턴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둘째, 한국정부는 미국이 취한 조치는 물론이고 백악관 회의에서 논의 중인 조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셋째, 백악관에는 문제의 기간 중 김영삼 대통령이 민간인 철수나 임박한 전쟁에 대해 클린턴 대통령과 통화했다는 기록이 없다.

한국과 미국의 지도자들이 서로 충분히 논의하지 않은 문제가 한 가지 있기는 하다. 바로 북한이 IAEA 사찰단을 추방할 경우 영변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 가능성에 대해서다. 서울과 워싱턴에서는 그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고, 미국 국방부가 그에 대해 자세히 검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부처간 합동회의가 열린 것은 북한이 IAEA로부터의 탈퇴를 선언하고 사찰단의 추방을 협박함에 따라 열린 최고위급 회의 이후의 일이었다. 또 당시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 안을 추진하려면 한국과 협의해서 구체적인 방법을 논의해야 한다는 데 전혀 이의가 없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논의는 불과 이틀 후 카터 전대통령이 평양에서 북한이 협상에 다시 나올 용의가 있으며 핵시설의 동결에도 합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옴에 따라 그냥 사그라졌다. 그리고 일단 그 상황이 되자 굳이 한국과 선제폭격 문제를 가지고 협의할 이유가 없었다.

6월 16일 워싱턴 시각, 미행정부의 고위간부들이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백악관 서쪽 건물에 모였다. 중대한 문제를 논의해야 했다. 증원 병력의 규모를 결정해야 했고 「오시라크 옵션」에 대한 논의도 계속해야 했다. 병력을 증강하게 되면 이는 곧 민간인 철수를 위한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을 논의하는 배경에는 바로 북한에 대한 제재 결정이 임박했다는 사실이 있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한 미국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1점에서 10점까지 점수를 매기고 10점이 공황상태를 의미한다면 당시 서울은 “6점 정도였고 그 점수가 급격히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Witt, Joel S., Poneman, Daniel B., Gallucci, Robert L.,
Going Critical: The First North Korean Nuclear Crisis, Brookings Institution, 2004
(김태현 역, 북핵위기의 전말: 벼랑 끝의 북미협상, 서울, 모음북스, 2005, pp.257-260,264-270)


예를 들어 1994년에 이미 한국 거주 미국인이 10만명에 가깝고 그들 대부분이 서울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2007년의 서울에 그보다 적은 미국인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민간인 10만명을 소개시키는 계획은 그야말로 엄청난 과업이고, 성공적으로 해내기는 극히 힘들기 마련이다.

또한 이 계획은 한국정부와의 긴밀한 사전조율 및 전폭적인 협조 없이는 실행이 불가능하다. 한국정부가 열차편 및 경찰병력 등을 제공해 협조하지 않으면 한 줌의 대사관 직원을 갖고 10만명을 후방으로 대피시킨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일본으로 미국인들을 대피시키는 대가로 일본인들에 대한 고려도 해 주어야 한다. 일본이 자국민은 내버려두고 미국인들만 탈출시키는 계획에 협조할 리가 있겠는가?

소개계획의 발동이 원치 않는 전면전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러면 대피시키려던 10만의 미국시민들을 오히려 위험에 몰아넣게 될 가능성이 큰 것이었다. (본문 중에 북한이 소개계획인 NEO 훈련이 시작되자 이를 비난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북한도 미국의 소개계획을 면밀히 모니터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레이니 대사와 럭 주한미군사령관이 본국에 '현지에 있는 우리와 협의없이 결정하지 말아달라'는 이례적인 합동건의문을 보내게 된 배경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지에 있는 이들이 보기에 (위에서 무조건 까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까긴 까야겠지만) 이 계획은 아무리 잘 준비해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힘든 그런 류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비상사태대응계획 중에는 이런 것들이 종종 있기 마련이다. 계획이 없는 것 보다는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대비 차원에서 준비를 하지만, 적극적인 정책선택으로서는 절대로 고르고 싶지 않아지는 전면핵전쟁 계획 같은 것 말이다.


또한 이는 미국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현지 실무진(미국대사, 주한미군 사령관) 등은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기에는 너무 워싱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너무 하위직이었다. 반면 대통령이나 장관들은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현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게 분명했다. 결국 미국 정부의 그 누구도 전체를 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제한폭격계획은 서울에 거주하는 약 10만명의 미국인(및 일부 미국의 우방국민)을 성공적으로 대피시키는 작전과 연계될 수 밖에 없고, 그 말은 한국정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미국은 서울에 사는 한국인이 아니라 서울에 사는 미국인들을 걱정할 의무가 있다. 이 계획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음먹으면 아무때나 할 수 있는 계획은 결코 아니다.
by sonnet | 2007/01/17 11:48 | 정치 | 트랙백(2) | 핑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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