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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3   김정일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뒤따를 수 있을 것인가? [83]
김정일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뒤따를 수 있을 것인가?
"다자이에서 배우자", 화궈펑, 개혁개방의 말미에서 간단히 언급했었던 중국과 북한의 비교에 관한 보론. 앞선 글이 중국의 사례를 설명하는 글이었다면, 이번 글에서는 북한을 중심으로 각 사례에 중국을 대비하는 방식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의 글을 읽지 않으신 분은 가능하면 이 글을 보기 전에 앞의 글을 먼저 읽어주시는 것이 이해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1. 비판과 수정 가능성

앞선 설명을 본 분이라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겠지만, 김정일이 주체사상과 기타 김일성 시대의 유산들을 다루는 방식은 덩샤오핑이 아니라 화궈펑이 마오쩌둥 사상을 다루는 방식과 흡사하다. 돌아가신 주석님이 말씀하신 것은 '뭐든 옳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아무리 선의에서 출발한 것이라 하더라도 김일성의 유산을 수정하려는 시도는 어떤 것이든 즉각 대역죄로 몰릴 위험을 무릅써야만 하는 결과가 되었다. 현재 북한 사회나 제도에 김일성의 교시나 유산과 연관되지 않은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개혁안은 어떤 것이든 대역죄가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김정일은 자기 아버지의 어록을 해석할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교황과도 같은 존재여서, 그가 직접 나선다면 어떤 부분에 대한 수정은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일이 관심을 갖고 해당 분야를 직접 들여다 보기 전까지 개혁이 이루어지기란 아주 어렵다.

예를 들어 어떤 실무 조직이 회의 끝에 자신들이 담당한 사안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옛날 김일성의 교시를 폐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해 보자. 이들은 우선 이 결론을 김정일에게 보고해 승인을 얻어야만 한다. 그런데 만약 김정일이 이 결론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 화를 낸다면, 이들은 모두 큰 재앙을 각오해야만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의 교시를 비난한 '반당음모'를 꾸민 '종파분자들'이 되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실무 조직이 내린 결론에 불만을 갖거나 그 구성원 중 어떤 이를 미워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꼬투리를 잡기에 절호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김정일이 이들에 대해 받아 본 것은 정상적인 보고가 아니라, 신랄한 고발장과 그 '음모'의 증빙자료 뭉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족과 일신의 안위를 걱정한다면 어지간해선 이런 보고를 하느니 복지부동하게 살아가는 편이 훨씬 현명한 선택인 셈이다. 그럼 이제 이런 평가를 뒷받침할만한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 농업과학원 연구원으로 지내다 숙청되어 탈북한 이민복은 1980년대 중반의 '박철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85년 당시 과학원 지질학연구소 실장이었던 박철은 식량난 타개책으로서 ‘농장포전 개인책임관리제’라는 논문을 작성하여 중앙당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인 즉 간부를 포함한 전농장원의 개개인에게 논밭을 맡겨서 생산관리를 행한다는 것이다. 이 제안은 중앙당의 과학담당비서 김환, 농업담당비서 서관히, 정무원총리 강성산 등을 비롯하여 북한 지도부 내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군급 이상 농업간부들의 토론에서도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철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련의 움직임은 김일성의 주체 농법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혹독한 비판을 받고 주요 관련인사가 처분되거나 사상투쟁의 대상이 되어 사라진다. 이후 누구도 감히 자영농 지향의 농업개혁을 건의하지 못하였다.

박철 사건 직후 김일성은 본인 명의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여기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제도는 섰으나 사회주의건설이 완성되지 못하였으며 착취제도는 청산되었으나 자본주의 복구의 위험이 남아있는 그런 사회는 완전히 승리한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면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한 처방으로 ‘협동적 소유의 전인민적 소유로의 전환’, ‘인민정권의 강화’, ‘사회주의 제도의 공고화’ 등의 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박철과 같은 제안을 봉쇄함과 동시에 당시 중국이나 소련의 농업개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김일성의 이 선언은 과거 마오쩌둥의 주장과 흡사한 구석이 많다. 사회주의화 이후의 자본주의의 귀환에 대한 경고는 마오쩌둥의 단골메뉴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협동적 소유의 전인민적 소유로의 전환'은 농업합작사에서 인민공사로의 전환, 즉 대약진운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약진운동이 대재앙으로 끝나고 그 피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류샤오치나 덩샤오핑, 천윈 등 실용주의자들은 '경제법칙'이나 '객관적 조건'을 강조하며 삼자일포(三自一包) 정책, 즉 농가의 텃밭(自留地), 농가부업, 자유시장을 확대해 농민들의 '자본주의적 성향'을 활용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집단화된 토지를 재할당해 각 농가가 알아서 경작하게 하는 단간풍(單幹風) 등도 심하게 단속하지 않았다. 이를 부르주아 수정주의 노선, 즉 자본주의의 부활로 본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숙청한다. 마오쩌둥 사후에 돌아온 덩샤오핑 등이 이 정책을 다시 추진했을 때는 천융구이 같은 화궈펑파들이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로 가기 위해서는 집단농업을 고수 강화해야 한다고 반대했던 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이다.

박철 사건이 이미 좀 오래된 사건이라고 느낄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제 2009년에 일어난 함흥화학공대 토질조사 연구소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연구소는 환경오염 문제를 조사하고 대책을 세울 목적으로 설립된 연구기관이었다. 이들은 과거 이 대학에서 근무한 바 있는 최태복 노동당 교육과학 및 국제담당비서가 방문하자 그 동안의 연구조사 논문과 세포당원 명의의 편지를 직접 전달했다. 그 내용인 즉 '사실상 우리나라(북한)가 중국의 산업물 쓰레기장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평양시 수돗물조차도 먹는 물로는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최태복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장군님께 직접 전달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이 편지를 전달받은 노동당 중앙위는 10여 일 후 '토질조사 연구소'를 해산하고 연구소 당세포에 대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검열을 진행했다. 편지를 올린 간부들과 주동자들은 함경남도 보위부에 체포되었다. 이들에게 씌워진 죄목은 종파행위였다.

이 사건은 북한이라는 사회에서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최고지도부에 건의를 한다는 행위가 여전히 인생을 걸어야 하는 일임을 잘 보여준다. 그 건의가 선의의 뜻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었다. 박철 사건 이후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북한의 이런 측면은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의 유산을 비판하고 수정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 전 국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중간관리나 관련 전문가들 같은 광의의 지배층연합 내부에서만이라도 그런 길이 열려야 한다.

다시 중국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업적을 재평가해 공적이 70%, 과오가 30%이며, 전반 20년은 좋았으나 후반 20년은 과오가 많았다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기준을 김일성에게 적용한다면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한 것에서부터 북한을 건국하고 1960년대 전반까지 빠른 전후복구와 경제성장을 보인 데까지를 업적으로 잡고 그 이후 북한의 몰락에 대한 책임 대부분은 과오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게 가능하겠는가?

중국에선 개혁개방 초기 단계에서 적어도 이정도 평가는 들을 수 있었다.
… 특히 마오쩌둥 동지를 비롯한 중앙과 당의 적지 않은 지도자들이 승리 앞에 오만해지고 우쭐해지고, 공을 서두르고 [인간의] 주관적 의지와 주관적 노력의 작용을 과대 평가하여, 진지한 조사연구와 시험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총노선이 제출되자 곧 경솔하게도 ‘대약진’운동과 농촌의 인민공사화 운동을 일으켰던 때문에 높은 지표, 마구잡이 지휘, 허풍, ‘공산풍’ 등을 주요한 특징으로 하는 좌경적 착오가 심각하게 팽배하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묻겠는데 이게 가능하겠는가? 한 북한 연구자는 이렇게 논평한다.
통상적으로 정책의 변화는 새로운 통치권자의 독자성, 전임자와의 차별성을 강조할 때 나타나는 것인데 김정일은 줄곧 계승성을 주장해 왔을 뿐 한번도 차별성을 강조해본 적이 없다. 북한당국은 김정일이 당총비서에 추대된 이후에도 김일성의 모든 정책노선을 수정함이 없이 승계, 추진할 것이라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여 왔다. 북한의 관영 평양방송은 1997년 10월 5일 <영광넘쳐라 조선노동당> 제하의 정론에서 “서방 언론들은 어버이 수령님 서거 후 김정일 장군이 선행노선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개혁과 개방의 정책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분분하였지만 김정일동지의 정치는 김일성주석의 정치철학 그대로이며 노선 또한 김일성주석 시대의 그것과 0.001mm의 편차도 없는 수평선상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정현수,1999:122]


2. 대중동원운동의 위상

공산주의 국가, 특히 중국과 북한에서 대중동원운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기본적인 방법론이다. 그들은 위로부터의 제시되는 혁명적 목표를 쟁취할 수 있는지 여부가 사회구성원들의 혁명역량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동원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다룬 바 있는 '다자이(大寨)에서 배우자' 운동도 그렇고, 대약진운동이나 홍위병도 전형적인 대중동원운동이라 할 수 있다. 「운동」의 목표는 매우 다양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이슈가 표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약진운동은 경제발전을 목표로 한 운동이고, 신민가운동은 문예 창작을 목표로 한 운동, 문화대혁명은 당 관료들을 공격하는 운동이라는 식이다.

이렇게 「운동」이라 함은 많은 사람들이 집단행동을 통하여 일정한 정책을 실시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러한 운동에는 대체로 공격의 대상이 있다. 자연을 정복하거나 통제하는 것도 대상이 되고 권력구조나 자본주의사상 또는 태도도 대상이 된다. 이 후자의 경우 「군중운동」도 교육적인 효과를 갖고 때로는 반대자들을 숙청하는 효과도 갖는다. [안병준,1984:69-70]

이런 운동을 실시하려면 운동에 어울리는 간부가 필요하다. 운동의 지도이념을 깊이 학습하고, 상징과 조작, 선전선동에 능하며 대중을 조직해 운동의 지향점을 향해 다그치고 몰아가는 그런 적극분자들 말이다. 운동이 추진되고 힘을 받는 시기에는 이들이 득세한다. 중국에서는 이런 간부들을 「홍(紅)」이라고 부르며 실무지향적 관료집단인 「전(專)」과 구별했다.

문제는 경험적으로 볼 때 「홍」과 「전」은 상극이고, 개혁개방은 바로 「전」이 대표하는 노선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전이 홍을 철저하게 두들겨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도록 짓밟아 놓고 나서야 개혁개방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었다. 반대로 홍 노선이 강성하던 시절에는 아주 사소한 개혁을 추진하는 것도 힘들었고, 「전」 노선을 지지했던 개개인들을 종종 파멸로 몰아갔다.

북한 연구자들은 주체사상을 비롯한 김일성노선 전반에서 마오쩌둥을 모방한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특히 "인간중심론", 즉 물질적인 조건이나 동기부여 대신 사상개조와 정신력을 강조하는 마오쩌둥식 군중노선과 북한의 대중운동은 판박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약진운동」과 김일성의 「천리마 운동」간의 유사성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김일성은 늘 물질적 욕구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 생산의 진정한 자극제라고 주장해왔다. "영웅적인" 노동자들의 역량을 불신하는 "보수주의와 소극주의"에 의하여 대중의 "무진장한 창의력과 재능"이 억압되어 왔기 때문에 이것을 풀어놓기만 하면 "대중의 창의력과 열성과 재능"이 발휘되어 생산이 급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잠재력'을 동원해서 써먹겠다는 정책은 천리마운동 뿐 아니라 청산리정신, 속도전, 3대혁명 소조운동 등 북한의 각종 대중동원운동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핵심요소이다.



그럼 앞서와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이미 죽은지 오래고 천리마운동은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2000년대 들어서도 북한의 신년사에서 천리마운동 이야기가 계속 발견된다(예를 들어 2005년, 2009년)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겠다. 대중동원의 홍 노선은 여전히 북한의 주요노선으로 남아있다는 증거이다.

이번에는 김정일을 중심으로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김정일은 1961년에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이래 황태자답게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는데, 이때 그는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의 핵심보직들을 타고 올라갔다. 김정일이 북한의 후계자로서 자리를 굳힌 1974년 경, 그는 당 중앙의 조직비서 겸 선전선동 비서였다.

김정일은 이제 경제분야에도 손을 뻗게 되는데, 이 때 자신이 당의 조직, 선전 부문을 장악하고 있었던 탓인지 '경제 선동'이라는 분야를 개척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김정일의 경제지도를 상징하는 「속도전」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사회주의 노력경쟁운동이었다.

김정일이 속도전을 지휘하기 시작한 것은 1974년 2월의 「70일 전투」였다. 『조선중앙연감』 75, 76년도판은 70일 전투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영광스러운 당 중앙'(김정일의 별칭)의 지도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김정일이 간행을 주도한 『조선전사』제33권에는 이를 김정일의 중요한 업적이라고 강조하였다.

70일 전투는 공업생산량을 70% 늘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많은 문제를 빚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공식문헌에서 한동안 '당 중앙'의 활동에 대한 서술이 사라진다. 2차 7개년 계획이 시작된 78년에 김정일은 다시 '경제선동' 분야에 복귀해 「1백일 전투」 「수송혁명 200일 전투」 등을 지휘한다. 이 운동들도 단기적인 성과는 올렸으나 설비 혹사, 원료나 자재 공급의 불균형 등 극심한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이 100일 운동에 대해서는 김일성도 『김일성 저작집』 제 36권에서 비판을 가하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김정일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정무원의 경제 간부들을 비판하는 등 책임전가이긴 하지만 말이다.

82년 들어 김정일은 다시 김책제철소의 궐기모임을 시작으로 「80년대 속도 창조 운동」을 추진해 "천리마 대고조의 기세로 80년대 속도를 창조하자", "모두 다 80년대의 김혁·차광수가 되자"는 구호를 앞세워 경제발전을 위한 대중동원운동을 펼친다. 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는 「공화국 창건 40돌을 맞으며 사회주의 건설에서 새로운 대고조를 일으킬 2백일 전투」를 벌이는데, 이때 북한 언론들은 이 2백일 전투 발기를 김정일의 지도에 의한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2백일 전투가 끝나자 이번에는 「전국영웅대회」를 개최하여 다시 한 번 2백일 전투를 강행할 것을 호소한다.

이런 게 잘 될 리가 없었다. XX일 전투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단기간에 아주 높게 설정된 목표를 수행하도록 다그치는 운동이다. 필연적으로 운동이 끝난 후 참여자들은 탈진상태가 되고, 각종 후유증이 크게 남기 마련이다. 그런데 100일도 아니고 200일 전투를 한 다음 200일 전투를 또 한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400일이면 1년도 넘는 긴 시간이다.

이제 시계를 최근으로 돌려 보자. 작년(2009년)에 북한은 150일 전투를 대대적으로 추진했고, 150일 전투가 끝나자 바로 이어서 100일 전투를 거듭 진행했다. 그리고 새해 들어서도 김정일의 「속도전」행보는 계속되고 있다. 김정일의 새해 첫 공개활동은 자강도의 희천발전소 건설장을 시찰하고 '희천속도'를 강조한 것이었다.
노동신문은 '희천속도는 오늘의 대고조 진군의 위력한 추동력'이라는 제목의 개인 필명 논설을 통해, 희천발전소 건설장에서 군인들이 창조했다는 '희천속도'는 "선군천리마를 타고 강성대국으로 비약해 나가는 오늘의 대고조 시대를 추동하는 위대한 사회주의 건설속도"라고 주장했다.

'희천속도'라는 말은 지난해 9월 김정일 위원장이 이 발전소를 시찰하면서 군인 건설자들의 공사 속도를 "선군정치의 기초인 혁명적 군인정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천리마속도, 희천속도"라고 평가한 데서 비롯됐다.

150일전투는 김정일판 「천리마운동」임을 잘 보여주는 포스터


이 외에도 김정일의 대중운동은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다자이에서 배우자"의 천융구이나, "레이펑(雷鋒) 동지에게서 배우라"처럼 모범적 행동을 하는 숨은 영웅을 찾아내 이를 모방하자는 것으로는 정춘실 운동을 들 수 있다.

각급 정부와 사회조직에 청년 전위대를 투입해 조직을 장악하고 당 정책을 침투시킨다는 3대혁명소조운동은 또 다른 유형의 대중운동이다. 3대혁명소조운동은 김정일이 사회 요소요소에 김정일 친위대를 박으면서 권력세습의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운동이기 때문에, 앞으로 김정일이 3대 세습을 추진한다면 이에 상응하는 모종의 운동을 벌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김정일 본인이 대중동원의 홍 노선과 깊게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한 사회에서 대중동원노선을 비판한다는 것은 죽은 김일성을 비판하는 정도가 아니라 살아있는 김정일을 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럼 이를 다시 중국과 비교해 보자. 덩샤오핑은 자신이 집권(11기 3중전회)하기 조금 전에, 벌써 이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치고 있었다.
…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보수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 이익도 중시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소수의 선진[혁명] 분자들은 그뿐이겠지만 광범위한 군중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한동안은 그것으로 되겠지만 장기간은 통하지를 않는다. 혁명정신은 아주 귀중한 것이어서, 혁명정신이 없으면 혁명적 행동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혁명정신은 물질적 이익을 기초로하여 생겨나는 것이므로, 희생정신만을 강조하고 물질적 이익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관념론이다.

개혁개방을 위해서는 우선 김정일이 공개적으로 이런 주장을 펼쳐 전 사회에 보급해야만 한다. 김정일이 이런 주장을 펼치면서 동시에 150일 전투를 다그칠 수 있을까?


3. 관찰가능성

조금 다른 문제를 생각해 보자. 혹시 이러한 변화들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을 것인가? 즉 북한은 지독한 폐쇄사회이므로 북한 권력 핵심부는 이미 조용히 개혁개방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지만, 겉으로는 알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선례도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80년 7월부터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이나 혁명역사박물관에 있던 마오쩌둥의 거대한 초상들이 조용히 철거되고 천안문 위의 초상 한 장만이 의례상 남게 되었다. 전국 도처의 모택동 어록비니 각종 초상화들도 차츰 광고판으로 바뀌었다. 이는 만인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우상파괴였다.

1981년 1월 관영통신 『신화사』는 문혁 시기의 아비규환을 그리며 마오쩌둥 초상의 먼지를 털던 한 노동자가 초상의 목을 잡은 것이 '암살혐의'를 받아 '반혁명현행범'으로 투옥된 사례, 다섯 살 짜리 어린이가 마오쩌둥 배지를 강아지 목에 걸고 놀던 것이 목격되어 모자가 '혁명적' 처벌을 받은 사례, 마오 어록 글자 한 자를 틀린 식자공, 마오쩌둥 구호를 틀리게 부른 빈농, 마오쩌둥의 사진이 실린 낡은 신문지를 휴지통에 넣은 공무원 등 당에 대해 "악랄한 공격을 가한 … 계급의 적"으로 몰린 사례 등을 고발했다. 이 또한 전 국민이 보는 아래 진행된 명백한 우상파괴였다.

1980년대 초 중국 대중들이나 외국 관찰자들은 이런 현상을 통해 중국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좋은 예는 '진리표준논쟁' 같은 당 기관지와 관영언론을 통한 노선투쟁이나 신노선홍보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핵무기 개발 같은 것은 대중에게 숨겨서 몰래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회내부의 변화를 추진하면서 일반대중들이 모르게 일을 벌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대중이 지도부가 시키는 대로 하고 싶어도 일단 알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노선전환 자체는 권력층 내부에서 비밀리에 정해졌더라도 일단 정해진 것은 관영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새 노선을 교육하고 그 방향으로 대중을 몰아가는 것이 공산국가들의 전형적인 운영방식이다. 공산권 연구의 기본이 관영언론 모니터링인 것도 그때문이다. 북한 또한 그간의 행태로 볼 때, 중요한 결정이 지도부에서 내려졌다면 이를 어떤 형태로든 선전할 것이다.



4. 끝으로

마지막으로 환기해 두고 싶은 점은 우리는 이미 김정일 통치를 충분히 오래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북한의 후계자로 지명된 것은 1974년의 일이다. 이후 아버지로부터 점진적으로 권력을 이양받아 1980년대 후반이 되면, 이미 연로한 아버지를 대신해 북한 통치의 실무 대부분을 관장하고 있었다. 김일성이 사망(1994)한 뒤로만 세어도 17년, 그리고 그 이전의 실질적인 통치 기간을 더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25년 이상 김정일 통치를 관찰해 온 것이다.

그러니 김정일이 그간의 추세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노선을 취할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이 주장을 뒷받침할 아주 강력한 증거, 되돌리기 힘든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경제개혁 노선 1단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조치는 농업개혁이었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에 대기근을 겪었고, 2000년 이후로도 거의 매년 기근에 대한 경고가 계속되는 나라로서 농업개혁에 대한 필요성은 중국보다도 더 크다. 그리고 농업개혁, 즉 집단농업을 포기하는 것은 공업부문의 개혁보다 상대적으로 쉬우며, 북한이 외부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실천할 수 있는 조치이기도 하다. 자력으로 실천할 수 있는 조치는 미루면서 외부의 도움을 먼저 달라고 하는 행동은 그 자체로 개혁의지를 의심케하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중국의 농업개혁은 대중동원의 홍(紅) 노선을 폐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니 북한이 농업개혁을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이들이 과거의 유산을 버리고 개혁개방의 전(專) 노선으로 돌아섰는지를 판단할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사실 김정일과 북한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식 개혁개방은 하지 않겠다고 명확히 선언해 왔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 혹은 이 글을 참조) 김정일은 80년대부터 중국을 여러 차례 시찰했고, 중국 또한 그에게 여러 차례 자신들의 경험을 전수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내가 보기에 김정일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하는 이유는 그가 중국식 개혁개방의 내용과 그 어려움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어서, 북한 사회의 근본적인 부분에 메스를 대는 그런 본격적인 개혁은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이미 내렸기 때문인 것 같다.

참고문헌

정광민. 『북한기근의 정치경제학: 수령경제·자력갱생·기근』. 서울: 시대정신, 2005.
정기환, 고재모, and 김운근. 『사회주의국가의 농업개혁』.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92.

서동만. “속도전에서 개혁개방까지, 김정일식 경제지도의 양면성.” 월간말 1997년 11월호, 12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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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net | 2010/01/23 07:06 | 정치 | 트랙백(1) | 핑백(6) | 덧글(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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