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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협상술
2011/10/18   전사와 상인(3) [81]
전사와 상인(3)

원래 전사의 외교, 상인의 외교…라는 포스팅을 할 때, 이것이 추가적인 해설을 계속 필요로 할 것이라고 별로 예상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 그 이야긴 이해하기 쉬운 것이이어서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측면도 있고, 또 이와 비슷한 이야길 이미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소개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짧게 답변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 가만히 지켜보자면 크게 두 가지 유형의 의문이 제기되는 듯하다.

첫번째는 외교를 전사와 상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두 가지 경향으로 크게 나눈 다음, 북한을 그 중 전사 범주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의문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래서 북한을 상대함에 있어 구체적인 대안이 무엇인가? 전사적 대안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연상되지 않는다는 의견이다.

글이 길어지니까 두번째는 다음 글로 넘기고, 이 글에서는 첫번째 문제만 다루기로 하자.



Commented by marialove at 2011/10/12 13:47
외교를 전사와 상인으로 딱 떨어지게 이분화 시켜서 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만에 하나 이분화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북한을 전사- 한국을 비롯한 여타 국가를 상인으로 딱 맞춰 넣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내용은 둘째치고, 이 분의 글에서 드러나는 글쓰기의 전략은 나눌 수 있는 모든 단계마다 의문을 제기해 보는 것인 듯하다. 그 목적은 최대한 많은 반론 기회를 확보하려는 것일 터이고. 즉 제1방어선에서 일단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그게 뚫리면 제2, 제3의 방어선에서 다시 의문을 제기하는 식으로 대응하는 전략이다.

이런 의문은 살면서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자체는 별로 탓할 일은 못 된다. 다만 그런 글쓰기는 한 가지 함축하는 바가 있다. 글쓴이가 반론을 제기하는 이유는 대개 각 단계에서 거론되는 쟁점 때문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방어하고자 하는 것은 각 단계의 방어선 뒤에 따로 있는 것이 보통이다.

즉 이분법이 문제라든가, 어떤 범주에 북한이 들어가는 것이 적절하냐는 오히려 핵심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의문을 제기하는 핵심적인 이유라면 그것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거론하면서 반박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하나씩 짚어보기로 하자.


우선 범주를 쓰는 이유에 대해서.

세상은 복잡하기 때문에 모든 논의는 세상의 문제를 사람이 이해하고 다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적당히 나누고 대조할 필요가 있다. 이때 나누기만 하지 않고 대조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특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또 그런 특징을 잣대 삼아 나누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삼라만상은 삼라만상이다"라고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 서술로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이해가 하나도 증진되지 않는다.

가끔은 '전체를 전체로 보는 것'이 중요할 때도 있으나 그것은 평소에 나누어 보고 있음을 전제로 한 이야기다. 시종일관 전체를 전체로 보려고만 해서는 문제를 풀어나갈 수가 없다.

이렇게 범주를 전혀 나누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반대로 한 번에 너무 많이 나눠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2~4가지 대신 100가지로 나눈다고 해서 더 자세한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보기가 너무 많으면 혼란스럽기만 한 법이다.

그런데 이번에 의문이 제기된 '전사와 상인'이라는 외교의 구분법은 내가 보기에 둘로 나누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2분법 대신 3분법(이를테면 '전사와 상인 그리고 은둔자')이라면 문제가 달라졌을까? 4가지나 그 이상의 분류는? 아마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범주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불만인 사람이라면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범주를 제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아주 구체적이진 못하더라도 대략적이라도 말이다.


다음으로 비유는 크던 작던 언제나 적실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원래의 것을 이해를 돕기 위해 (사실은 다르지만) 비슷한 특징을 가진 것에 견주고 있기 때문에 다소의 차이는 불가피하다. 따라서 비유가 성공적이냐 아니냐는 그 둘이 얼마나 닮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하나의 비유로서 '전사와 상인'이라는 이름은 연속되는 스펙트럼을 편의상 임의의 지점에서 자른 경우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불연속성이 있거나 차이가 크거나 물과 기름처럼 궁극적으로 하나로 수렴될 수 없는(되기 어려운) 이질적인 두 가지 경향을 묘사하는 데 어울리는 비유다. 내가 보기에 '전사와 상인'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걸리는 것 같다.

이 차이점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두 가지 대조적인 명제로 기술해 보자.

1)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협상을 통해 풀 수 있다.
2) 이 세상에는 궁극적으로 협상을 통해 풀 수 없는 문제도 존재한다.

여기서 '풀 수 있다'는 말이 다소 막연하다면 다음과 같이 써도 괜찮겠다.

1)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협상을 통해 [이해/합의/실천]을 이뤄낼 수 있다.
2) 이 세상에는 협상을 통해 끝내 [이해/합의/실천]을 이뤄낼 수 없는 문제도 존재한다.

'전사와 상인'은 2)와는 잘 어울려도, 1)의 신념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비유다.

여기서 '신념'이란 단어를 사용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형식상 1)은 2)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간 주장이다. 2)는 최대한 물러날 경우, 단순히 경우의 수를 나열하고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1)은 풀 수 없는 문제가 왜 없는지를 적극적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풀 수 없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이기는 어렵다. 그래서 1)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이를 일종의 신념으로 견지하는(즉 믿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1)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입증하지 못하는 대신, 2)의 계열에 속하는 주장이 이런저런 논증이나 역사적 근거, 비유 등을 통해 강화되는 것을 방해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보호할 수는 있다.

그럼 2)는 어떤가? 2)도 일종의 신념과 결부되어 있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2)는 몇 가지 반례를 중심으로 주장을 뒷받침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순수 신념으로 남을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사족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1)에 끌리느냐 2)에 끌리느냐 하는 것은 심정적으로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 것에 끌리느냐와 비슷한 이야기다. 또 1)은 니콜슨이 말한 상인적 세계관의 기본가정 -합의를 통한 상호이익의 도모- 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자 이제 정말 이런 차이가 중요하게 작용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사와 상인'과 약간 다른 제2의 이분법을 도입해 보자.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은 일정한 공통점(“정통적인” 국제 질서)을 공유하는 국가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며, 여기서 벗어난 국가와는 협상이 불가능해진다는 주장을 펼친 거물이 있다. 그는 키신저다.

협상을 통해 이견을 조절한다는 고전적인 감각의 외교는 오직 “정통적인” 국제 질서 하에서만 가능하다.

한 강대국이 국제질서나 국제질서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방식을 억압적이라고 간주하기 시작하면, 그 나라와 다른 강대국들 간의 관계는 혁명적인 것이 된다. 그러한 경우, 주어진 체제 내에서 이견을 절충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 절충은 가능하지만 그러한 절충은 필연적으로 찾아들 결전을 대비해 유리한 입지를 다지기 위한 전술적 행동 또는 적대세력의 사기를 꺾기 위한 수단으로서 구상된 것이다.

물론 혁명적 세력의 동기는 방어적인 것일 수도 있다. 자신들이 위협받고 있다는 주장은 솔직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혁명적인 세력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그들이 위협을 느낀다는 점이 아니다. 그런 인식은 주권국가들로 이루어진 국제관계의 본질상 당연히 따라오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안심시킬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들에게는 오직 절대적인 안전 -적대세력의 무력화- 만이 충분한 보장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절대적 안전을 추구하는 한 세력의 욕망은 모든 다른 세력에게 절대적인 불안전을 뜻하게 된다.

힘의 행사를 절제하는 기술로서, 외교란 그러한 환경에서는 동작할 수 없다. “선의”와 “합의를 도출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외교가 언제나 국제 분쟁을 타결지을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실수이다. 혁명적 국제 질서 하에서 각 세력들은 상대에게 정확히 그런 특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게 된다. 외교관들은 여전히 서로 만날 수 있으나, 그들은 더 이상 동일한 언어로 대화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를 설득할 수 없게 된다. 무엇이 정당한 요구를 구성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외교 회담은 자신의 기본 입장만 무의미하게 되풀이하고, 상대의 불성실함을 규탄하거나 상대의 “부당함”과 “타도”를 주장하는 자리로 변한다. 그런 회담은 대립하는 체제들 사이에서 아직 편을 정하지 못한 세력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교한 공연을 펼치는 무대가 된다.

오랜 평온에 젖어든 채 재앙을 겪어보지 않은 세력들에게 있어, 이러한 교훈은 어지간해선 체득하기 힘든 것이다. 영원할 것만 같이 느껴졌던 안정의 시대에 마음을 놓은 나머지 그들은 기존의 틀을 때려 부수겠다는 혁명적 세력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현상유지를 원하는 사람들은 혁명적 세력의 이의제기가 그저 전술적인 것인 양, 마치 혁명적 세력이 기성 질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만 협상력을 키우기 위해 사안을 과장하는 양, 혁명적 세력이 제한적인 양보로 달랠 수 있는 특정한 불만거리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인 양 혁명적 세력을 다루려는 경향이 있다. 위험을 적시에 경고하는 이는 공연히 인심을 흉흉하게 하는 사람으로 간주될 뿐이다. 반면 상황에 적응하기를 권하는 자는 균형감각을 갖춘 분별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들 또한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그럴듯한 “이유들”을 갖고 있다. 이들의 주장들은 기성 질서의 틀 아래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유화정책”이란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유화정책은 혁명적 세력의 무제한적인 목표를 파악할 수 없었던 데 따른 당연한 귀결일 뿐이다.

Kissinger, Henry A., A World Restored: 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 of Peace 1812-22, Boston: Moughton Mifflin Co., 1957, pp.1-3 (번역은 필자, 조금 더 상세한 버전은 여기)

키신저의 주장은 얼마간 다른 범주를 채택했다는 점에서 '전사와 상인'과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앞서 내가 말했던 1)모든 것은 합의가 가능하다와 2)세상엔 합의가 불가능한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라는 두 입장의 대립구도를 동일하게 갖고 있다.

자 이제 질문을 던져보자. '전사와 상인'에 어딘지 모르게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은 키신저의 글에서도 비슷한 불만을 느끼게 되지 않는가? 나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니콜슨과 키신저의 이야기를 비교해보면 매우 닮았다는 것이 금방 확인된다.

예를 들어, 니콜슨이 묘사하는 전사는 "협상의 목표는 승리이며 완전한 승리를 얻지 못한다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한다고 하는 확신이야말로 외교 개념의 본질"이라고 믿으며 "완전한 전사적 제압을 지향하는 무한한 행동"으로서 외교를 구사한다.

한편 키신저가 묘사하는 정통과 혁명질서의 충돌 상황에서 혁명세력은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안심시킬 수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 결과 "절대적 안전을 추구하는 한 세력의 욕망은 모든 다른 세력에게 절대적인 불안전"으로 작용하게 된다.

또 협상이 진행되어도 그 내용이 진정한 합의와 실천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문제도 비슷하다.

"양보라든가 조약의 체결은 한 특정한 분쟁의 최종적인 해결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약화와 퇴각의 증거요 더 완벽한 승리를 준비하기 위한 … 하나의 이점"(니콜슨)이며, "절충은 가능하지만 그러한 절충은 필연적으로 찾아들 결전을 대비해 유리한 입지를 다지기 위한 전술적 행동 또는 적대세력의 사기를 꺾기 위한 수단"(키신저)이기 떄문이다.


물론 둘의 글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아서, 상보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니콜슨의 경우 전사와 상인이 만났을 때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하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키신저는 이 상황을 좀 더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들은 기존의 틀을 때려 부수겠다는 혁명적 세력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현상유지를 원하는 사람들은 혁명적 세력의 이의제기가 그저 전술적인 것인 양, 마치 혁명적 세력이 기성 질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만 협상력을 키우기 위해 사안을 과장하는 양, 혁명적 세력이 제한적인 양보로 달랠 수 있는 특정한 불만거리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인 양 혁명적 세력을 다루려는 경향이 있다. 위험을 적시에 경고하는 이는 공연히 인심을 흉흉하게 하는 사람으로 간주될 뿐이다. 반면 상황에 적응하기를 권하는 자는 균형감각을 갖춘 분별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이들 또한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그럴듯한 “이유들”을 갖고 있다. 이들의 주장들은 기성 질서의 틀 아래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유화정책”이란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유화정책은 혁명적 세력의 무제한적인 목표를 파악할 수 없었던 데 따른 당연한 귀결일 뿐이다.


이와 비슷한 문제, 즉 상인이 전사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해 삽질을 거듭하는 현상을 꼬집은 사람이 또 있다. 바로 조지 케넌이다.

러시아가 우리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그들 정책의 하나 둘 쯤은 일시적으로 뒷방에 쳐넣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미국인들은 벌떡 일어나 "러시아가 변했소"라고 신나게 선언한다. 그리고 그 중 어떤 이들은 그러한 "변화"를 가져온 데 대한 공적을 챙기려고 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전술적인 행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소비에트 정책의 그런 특성들은 그들이 기원한 공리처럼 소비에트 권력의 내적 본질로 볼 때 당연한 것이며,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든 뒤로 감추어져 있든 간에 소비에트 권력의 내적 본질이 바뀔 때까지 우리와 계속 함께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러시아를 상대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해진 날까지 우리 사회를 전복시키기 위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식 사업에 이미 뛰어든 상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Kennan, George F., The Sources of Soviet Conduct, Foreign Affairs, July 1947

케넌의 말인즉 미국을 당혹케 하는 「소련 행동의 원천」은 바로 소비에트 권력의 내적 본질에서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이 바뀌지 않으면 겉을 아무리 꾸며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니콜슨의 '전사와 상인'이 대조적인 두 캐릭터로 비유되는 어떤 본질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자 이 정도 이야기를 했으면, 서두에 던져진 의문, 즉 "외교를 전사와 상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두 가지 경향으로 크게 나눈 다음, 북한을 그 중 전사 범주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한가" 중 전반부에 대해선 충분히 설명한 것 같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외교를 '전사와 상인'같은 이질적인 경향으로 나눌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면 그렇게 나눠서 이해하기를 거부하고 상대도 우리와 동질적이라는 가정을 고수하면, 혁명 프랑스,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소련 같은 나라들을 상대할 때 끊임없는 실패와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 의문의 후반부, 북한이 그런 '전사' 범주에 속하냐는 문제가 남는다.

북한의 건국과정이나 이념적 기원, 또 후견국이던 스탈린 소련과 마오쩌둥 중국으로부터 외교의 기술을 전수받았다는 점(예를 들면 한국전쟁 휴전협상) 등을 고려할 때, 그들의 뿌리가 '전사' 범주에서 기원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북한은 흔히 최후의 스탈린적 전제국가라는 별명으로 불리듯이, 소련의 붕괴나 중국의 개혁개방 같은 체제전환의 과정을 겪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국가이다. (북한이 개혁개방 분야에서 중국과 얼마나 대조적인지는 이 블로그에 공개된 두 편의 글, "다자이에서 배우자", 화궈펑, 개혁개방김정일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뒤따를 수 있을 것인가?을 참조)


북한을 이렇게 보는 분석가들은 많다. 예를 들어 척 다운스의 『북한의 협상전략』을 보자.

북한의 협상전략이 독특한 이유는 그것이 정권의 속성에 의해 정의되고 북한이 처한 독특한 환경과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국가들의 협상전략과 아주 다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민의 충성심에 대한 미약한 통제력, 인민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국가 경제정책의 실패, 그리고 다른 국가들에 대한 적대적 자세 등 정권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서방세계가 북한과 협상을 벌이는 이유 중 하나는 전쟁 공포증 때문이다. 북한은 비이성적이고 예측불허의 존재라고 인식되어 있으며, 전쟁의 결과는 참혹할 것이므로 서방세계에는 협상만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북한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즉, 그들에게 있어 협상 자체는 또 다른 전쟁인 것이다. 북한은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서방세계가 무장 해제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한편, 전쟁 가능성을 연기하는 방식으로 매우 교묘하게 협상 과정을 조작하고 있다. 서방 세계가 볼 때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무기 개발을 완성하고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전쟁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Downs, Chuck., Over the Line: North Korea's Negotiating Strategy, AEI press, 1999
(송승종 역, 『북한의 협상전략』, 한울, 1999, pp.401-402)

이건 대놓고 북한은 '전사' 유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송종환의 『북한 협상행태의 이해』의 경우엔 아예 본문 첫 페이지를 니콜슨의 '전사와 상인'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 북한과 협상을 해본 대부분의 서방과 한국의 협상 전문가들과 관계 학자들은 북한측의 적대적이며 공격적인 협상 행태를 증언하면서 북한이 협상에서 전사적 이론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송종환, 『북한 협상행태의 이해』(개정판) , 오름, 2007, p.16

그의 결론은 이렇다.

김정일이 1999년 6월 자강도 장강군 소재 김일성 혁명사적지를 둘러보는 자리에서 “아무리 어려워도 수령님께서 내놓으신 혁명적 원칙에서 절대로 탈선하지 않을 의지를 다시금 다졌다”고 말한 것처럼 혁명적 협상관과 독특한 북한의 정치문화는 북한의 김정일체제가 건재하는 한 변하지 않을 것이나, 환경변화에 따른 북한의 국가목표 및 대내외 정책 조정과 협상형태의 변화는 임시변통적이며 단속적인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북한이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변화의 면모를 보일지라도 북한의 혁명적 협상관과 ‘수령’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문화가 지속된다면 ‘수령’을 보위하고자 하는 체제 내부의 속성이 변화를 제약할 것이기 때문이다.

송종환, 같은 책, p.275

이는 앞서 소개했던 조지 케넌의 「소련 행동의 원천」과 동일한 결론임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큰 틀에서의 평가 뿐 아니라 구체적인 협상기술에서도 전사 특유의 기법이 수없이 발견된다. 예컨대 앞서 키신저는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혁명적 국제 질서 하에서 … 외교관들은 여전히 서로 만날 수 있으나, 그들은 더 이상 동일한 언어로 대화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를 설득할 수 없게 된다. 무엇이 정당한 요구를 구성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외교 회담은 자신의 기본 입장만 무의미하게 되풀이하고, 상대의 불성실함을 규탄하거나 상대의 “부당함”과 “타도”를 주장하는 자리로 변한다. 그런 회담은 대립하는 체제들 사이에서 아직 편을 정하지 못한 세력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교한 공연을 펼치는 무대가 된다.

이런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가 있다. 의사협상(pseudo-negotiation). 이는 북한의 전형적 협상술로 늘 거론되는 기술이기도 하다.

1971년 8월 이후 남북대화에 참가하였던 대부분의 남측 대표들도 북측이 협상에서 양보와 타협을 통하여 상호 공동이익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진의협상(眞意協商)을 하지 않고 회담을 다른 목적에 이용하는 의사협상(擬似協商, pseudo-negotiation)을 하며 그들의 협상행태는 공세적이며 전사적(戰士的) 협상행태를 취하기 때문에 서방권 국가나 한국의 협상행태가 구별(distinctive)된다고 평가하였다.

송종환, 같은 책, p.17

상인의 협상은 "상호 공동이익"을 도모하는 진의협상인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전사는 상인처럼 살지 않는다. 전사와 조우한 상인은 종종 스스로의 선입견에 속아 넘어간다.

스콧 스나이더는 북한은 '끝없이 반복되는 협상'을 한다고 지적했다.

협상 서명을 한 이후에도 북한의 협상자들은 협상 이행 과정에서 논점이 되었던 문제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이에 반하여 미국은 양측 모두가 합의하고 비준된 합의 내용에 대해서는 문제제기 없이 지켜주기를 기대한다. 미국인들은 협상의 과정을 시작과 중간 단계와 끝이 분명하여 각 단계의 진전을 확실히 평가할 수 있는 일직선상의 과정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협상을 순환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전보다 더 자세한 전문적인 검토를 재차 요구하는 것을 협상의 과정으로 생각하는 북한의 태도는 미국인의 입장에서는 협상의 진전도 없이 같은 문제에 다시 돌아가는 실망스러운 일이겠지만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 의미는 협상 이행 과정에서도 북한인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얻지 못했던 상대방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합의문의 가장 민감한 부분들에 대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합의 내용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 경우에도 합의 원안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확고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아마도 북한이 협상을 순환으로 보는 입장에서 보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협상 과정에는 게임의 끝이 없다는 것이다.

협상 이행을 위한 다음 차례의 협상이 기다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Snyder, Scott. Negotiating on the Edge: North Korean Negotiating Behavior.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1999.
(안진환, 이재봉 역, 『벼랑끝 협상 : 북한의 외교전쟁』. 서울: 청년정신, 2003. pp.114-115)

여기서 스나이더가 기술한 미국의 입장, 즉 '합의된 것은 문제없이 지켜야 마땅'하다는 관점은 전형적인 상인의 그것이다. 그러나 북한에게 있어 하나의 합의란 고지를 정복하기 위해 거쳐가는 제1, 제2, 제3의 베이스캠프 같은 것이기에 합의도장을 찍자마자 그 자리에서 딴 소리를 시작하며 새로운 흥정을 시도한다. 전형적인 전사의 관점이다.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북한이 과거 제네바 합의로 경수로를 받기로 하자마자, 송전선도 추가로 달라고 딴소리를 시도한 사례만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결국 그의 결론은 이렇다.

북한 협상자는 이전 토론에서 분명히 합의가 이뤄져야 했을 문제에 대해 다시 거론할 수도 있다. 모든 문제가 타결되고 최종 서명된 문서로 제출되면 마침내 합의가 이뤄진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Snyder, 같은 책, p.163


그러나 … 이게 다가 아니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그러한 태도는 남한의 군 수석대표단인 육군소장 박용옥과 그의 북한 측 협상 상대인 육군소장 김영철 간에 있었던 사적인 대화에서 드러난다. 이 만남은 기본합의서가 기록적인 시간 내에 이루어졌는데, 놀랍게도 남한이 제시한 원안에서 거의 바꾸지 않은 채 서명한 지 얼마 안 되었다. 북한이 왜 합의서를 수용했느냐고 질문을 받자, 김영철 소장은 박용옥 소장에게 “그것은 당신의 합의서이지 우리의 합의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Don Oberdorfer, 『The Two Koreas』, 264, 그리고 박용옥 장군과의 인터뷰, 1996년 6월).

Snyder, 같은 책, p.180

아예 지킬 생각이 없는 합의서에 서명했던 것이다.


사례는 더 들 수도 있지만,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by sonnet | 2011/10/18 06:51 | 정치 | 트랙백 | 핑백(1) | 덧글(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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