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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헬무트슈미트
2009/08/20   동방정책의 배경 [66]
2006/10/14   한국이 경계해야 할 중장거리 미사일 협상 [10]
동방정책의 배경
1950년대 서독 기민당의 핵정책 분위기는 앞서 소개한 바와 같습니다만,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에 맞선 서독 사민당의 핵정책에 대해서도 좀 소개해 볼까 합니다. 주지하다시피 냉전시대 내내 유럽의 안보정책은 핵전략이 핵심이었고, 1950년대 말~1960년대 전반에 일어난 사민당의 핵-안보 정책에 있어서의 일대 노선변화는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동방정책의 중요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독 사민당(SPD)은 1950년대 내내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진영에 밀착해야 한다는 집권 우파 기민당(CDU)의 노선에 반대하면서 소련을 잘 달래 양 진영의 외국군을 모두 철수시키고 비핵 비무장 중립화 통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평화주의적 정책을 표방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민당은 서독의 핵무장이나 NATO의 핵방위정책에 대해 계속적인 반대를 주장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재래식 전력을 강화하자는 주장을 편 것도 아니었지요. 사민당의 반대는 기본적으로 오스트리아식 중립통일을 인정받기 위해 소련의 비위를 직접적으로 건드리게 될 일은 하나도 하지 말면서 선처를 바라자는 읍소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1950년대 중반 서독연방군 재창설에 즈음해서 사민당은 프리츠 에를러의 주도 하에 징병반대운동을 합니다. 명분은 신설되는 독일군 12개 사단은 NATO의 원자탄 총알받이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 1958년 초 사민당은 반핵투쟁(Kampf dem Atomtod)을 승인하고, 독일전노련(DGB)이 여기에 조직적 지원을 제공해 세를 불립니다. 이들의 목표는 서독연방군의 핵무장을 막고, 서독에 주둔중인 연합군의 핵무기를 철수토록 하는 것이었지요. 이들은 1958년 4월 함부르크에서 15만 명을 동원한 반핵 데모를 주도했는데, 이 반핵시위에 15만이란 숫자는 전후 최대 규모로 이 기록은 그 이후 20여 년간 깨지지 않고 남을 정도로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사민당은 자신들이 장악한 함부르크, 브레멘, 프랑크푸르트 등의 지방정부를 통해 해당 지역에 비핵지대를 설치하는 법안을 상정하기도 했습니다. 집권 기민당은 이는 외교/국방 정책을 담당하는 연방정부의 고유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헌법재판소에 제소해 승리함으로서 사민당의 투쟁은 물 건너가게 됩니다.

이런 연이은 투쟁은 당시 사민당이 당시 냉전 상황 하에서 유권자들에게 안도감을 줄 안보정책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심지어는 당내 고위층으로부터도 이 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됩니다.

연방하원 부의장 카를로 슈미트(SPD)가 1957년 선거를 분석한 것을 보면, SPD의 고민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해가 되고, SPD가 그 후 어떤 변모의 과정을 밟게 될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선거 패배의 원인에 대해 당내에 서로 상반되는 의견들이 있다. 많은 분들이 아데나워가 파렴치한 네거티브 캠페인을 벌인 탓이라고……
내 생각으로는 CDU가 SPD를 “무경험”(집단)으로 몬 선거운동 슬로건은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짚었다는 것이다. 유권자들이 그동안 얻은 것이 별 것 아니라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는 유권자들이 일단 알고 있는데 반해, 진보적 개혁이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안심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절대 다수 유권자들이 콘라트 아데나워에게 정권을 맡긴 가장 깊은 이유이다. 그는 서독 유권자들이 실험대상이 되는 것으로부터, 또한, 미국의 지지를 받는 그의 “힘의 정책”을 통해, 동쪽의 붉은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유권자들을 보호했다.
(Schmid, Erinnerungen, 619-20)

Bark, Dennis L., Gress, David R., A History of West Germany 2nd. Ed., Blackwell, 1993
(서지원 역, 『도이치 현대사 2: 변화와 모색』, 비봉출판사, 2004, pp.139-140)


하지만 소련/동독에 대한 유화정책을 주장하던 SPD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은 다름 아닌 소련이었습니다. 1958년부터 1961년 사이에 소련이 베를린 위기를 재연시키고 베를린 장벽을 건설하자 SPD는 아주 난감한 상황에 빠집니다.

SPD 지도자들은 소련의 요구를 거부하긴 했지만 소련과 협상의 문은 열어놓는 정책을 주장하면서, 일단 독일의 비무장지대화와 NATO의 핵방위전략 거부라는 구태의연한 자신들의 정강정책을 지켜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베를린 위기 기간 내내 소련과 동독에 대한 그 어떠한 양보도 안 된다고 격렬하게 외치며 친미-반소-반공 노선을 위해 투쟁한 사민당의 당내 우파 진영의 지도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빌리 브란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브란트는 소련/동독에 포위되어 있는 서 베를린 시장이었던 것입니다. 서 베를린은 10년 전에 소련의 봉쇄를 겪어본 적이 있어서 소련에게 함부로 양보하는 날에는 자신들은 그대로 공산진영의 손에 떨어질 것임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지역입니다.

결국 사민당은 1950년대의 실패한 노선에서 탈피를 모색하게 됩니다. 그 시발이 된 것은 1959년의 고데스베르크 전당대회입니다. 여기서 “사회민주당은 자유와 민주적 질서의 방어 결의를 천명한다. 당은 조국의 방어를 승인한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이전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뉘앙스지요.

후에 수상이 되는 헬무트 슈미트 또한 이 때 쯤에는 “사민당은 전술핵 사용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재래식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당의 차세대 주자들이 동서 냉전의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다른 사민당 지도자 헤르베르트 베너 또한 1960년 6월 30일 연방하원 연설에서 사민당을 대변해 서방세계와의 결속과 NATO 가맹이 어떠한 동방정책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전제라고 선언합니다.

한편 1956년부터 1961년까지 SPD의 반핵노선에 동참했던 또 다른 야당 자민당(FDP) 또한 에리히 멘데의 주도 하에 노선을 뒤집어 이러한 추세를 강화합니다.

그 결과는 수 년 후 이렇게 나타납니다.

1964년 여름은 SPD 지도자들과 미국의 지도자들 사이에 협조가 최고조에 달한 때가 아닐까 싶다. SPD 내의 미국 지지자들은 브란트와 슈미트같이 떠오르는 스타들이었다. 그들은 끈질긴 당내 투쟁을 통해 NATO 안에 다국적군(MLF)을 두자는 미국 제안에 대한 지지를 확보했다. 이 제안은 NATO 안에 후일 “유럽의 기둥(European Pillar)"으로 알려지게 되는 독-불-영이 지휘권과 통제권을 나누어 갖는 유럽 핵무장 군대를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많은 SPD 당원들에게 있어 MLF 구상은 놀라운 것이었다. 칼스루에(Karlsruhe)에서 1964년 11월에 열린 SPD 전당대회에서 프리츠 에를러는 서독의 MLF 참여를 공식 승인받음으로써 최대의 정치적 승리를 마지막으로 거둔다. 1960년까지만 하더라도 서독 군대의 핵무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잘라버리던 정당이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같은 책, p.292-293


이렇게 보면 분명해 지는 것이지만,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사민당의 중대한 노선전환이라는 배경이 있습니다. 서독 사민당은 집권 전 수 년에 걸쳐서 과거의 몽상적인 평화주의 중립 통일 방안을 내던지고 친서방 우경화의 길을 걷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우파 기민당과 똑같아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은 당시의 냉전 상황을 반영할 수 있을 정도로는 현실적인 노선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외교 안보 문제에 대해서 핵시대에 믿고 정권을 맡길 수 있는 정당임을 어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유권자들은 처음엔 대연정을 통해서 사민당의 변화된 모습을 안전하게 체험할 수 있었고, 다음 번에는 사민당에게 정권을 맡기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사민당은 집권 후에도 NATO로 대표되는 서방진영의 군사동맹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우파와 차별되는 독자적인 핵전쟁 전략도 제시할 수 있었고, 1970년대 후반에는 동독은 물론, 동유럽 전역과 배후의 보스 소련까지 위협하는 신형 핵미사일(GLCM)을 국내에 배치하겠다는 구상도 내놓을 수 있는 사민당판 '힘의 정책'을 선보일 수 있는 정당으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by sonnet | 2009/08/20 09:50 | 정치 | 트랙백 | 덧글(66)
한국이 경계해야 할 중장거리 미사일 협상
1970년대 말, 소련의 중거리 탄도탄 SS-20의 배치에 대항해, NATO가 서유럽에 퍼싱2와 지상발사 토마호크(GLCM) 미사일로 구성되는 중거리 핵전력 INF를 배치하려 할 때, 당시 서독 총리 헬무트 슈미트는 과달루페에서 다른 나토 지도자들과 회담을 갖고 서독 INF 배치 5대원칙을 천명하게 된다.

이중 하나가 "INF는 독일 영토에만 배치되어서는 안 된다."란 것이었다. 이 조항은 핵전쟁이 발발하는 the day에 INF무력화를 노리고 핵 선제공격이 가해질 경우 "누구 좋으라고 우리만 얻어맞는단 말인가? 결코 서독 혼자서 몸빵할 수는 없다. 그러니 니들도 같이 해야 된다!"란 서독의 비장한 각오를 피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전방국) 서독을 위해 같이 핵폭탄 맞아주겠다는 의리있는 친구는 쉽게 나서지 않았고, 서유럽은 한동안 이 문제로 시끄러워졌다. 결국 이탈리아가 독일과 함께 '그 날' 핵세례를 같이 얻어맞는 역할을 떠맡겠다고 나서면서 이 문제는 수습된다. 유럽 정치판에서 늘 2류 국가 취급을 받던 이탈리아는 유럽핵정책의 골격을 새로 짜게 될 과달루페 정상회담에 초청받지 못했고, 이에 충격을 받은 이탈리아는 서독과 대등한 대접을 받아야겠다는 일념에 이 배역을 떠맡기로 약속한다. 안습의 이탈리아...


자 이제 우리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가능한 여러 나라, 특히 일본 및 미국을 사정거리 안에 넣어, 가능한 많은 인질을 확보함으로서 미국의 군사적 옵션을 제약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미-북 혹은 일-북 간의 개별 협상 끝에 상당한 대가를 주고 노동 미사일 등 중장거리 탄도탄만 감축하는 협상이 타결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그런 협상은 미국이나 (특히) 일본이 내놓은 "남한만으로 인질은 충분하지 않은가. 이런 대가를 치를테니 우리는 빼 달라"는 식의 제의 하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즉 일본과 한국이 같이 인질이 되어 있다가 한국만 남고 일본은 먼저 풀려나는 거다.

이런 협상은 기본적으로 한국을 희생시켜 일본이 이익을 보는 내용이며, 특히 피해가 한반도에 국한될 수 있다면 미국은 한국을 희생시켜서라도 북한을 군사적으로 제거할 용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악몽일 수밖에 없다.


어짜피 한국은 지상전력, 공군, 단거리 탄도탄 등 다양한 수단으로 인질로 잡혀 있는 상태고, 북한이 이 모든 옵션을 다 포기하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중거리 미사일을 이용해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 그거 아니라도 다른 방법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중요하지가 않다.

따라서 한국은 핵과 미사일, 한반도 안보 문제를 포괄하는 본격적인 협상이 아니라, 중장거리 미사일 문제만 떼어서 별도의 협상 의제로 삼는 것은 필사적으로 막아야 한다.

평범한 일본인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 혼자 몸빵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by sonnet | 2006/10/14 21:31 | 정치 | 트랙백 | 핑백(1)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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