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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합영법
2010/05/28   개혁개방을 권해본 중국 [202]
개혁개방을 권해본 중국

1980년대 전반 중국은 자국의 개혁개방을 진행하면서, 동맹국 북한에게도 개혁개방 노선을 따를 것을 여러 차례 권했다. 북한은 점차 소련 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며, 양국 지도부는 자주 정상회담을 가졌다. 중국은 북한 지도자들과 회담을 가질 때마다 응분의 원조를 제공하여 양국 관계에 기름칠을 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대화는 동상이몽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김일성: 우리도 중국의 개혁개방을 배워서 실시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호요방: 현 시대에서는 어떤 나라도 쇄국정책을 실시하고서는 발전할 수 없다. 하루 빨리 개방정책을 실시하되, 당신들의 실정에 맞도록 적절히 하라.
김일성: 중국은 현재 남조선과 직접 접촉을 하는데, 앞으로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호요방: 간접교역이나 국제적 체육행사 등 비공식 관계만을 유지하려고 한다. 우리가 남조선과 비공식 접촉을 한다고 해도 당신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김일성: 중국은 서울올림픽에 참가할 것인가.
호요방: 아직 검토 중이다.
조자양: 당신들이 개방정책을 실시한다고 말했듯이, 우리는 이를 하루 빨리 실시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본다. 현 정세 하에서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경제건설에 치중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김일성: 우리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남조선이 먼저 북침을 한다면, 중국은 우리를 지원해 주겠는가.
조자양: 남조선은 미국의 동의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다. 우리가 미국과 손을 잡고 있는 한 북침은 없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만약 남조선에서 먼저 북침한다면, 지원군을 보내겠다.
김일성: 우리가 제안한 3자회담에 대해서 미국과 협의해 보았는가.
조자양: 미국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3자 회담에 응하도록 종용했으나 미국이 응하지 않고 있다. 우선, 남북 직접대화를 하는 것이 좋으리라 보는데, 당신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김일성: 평양에 돌아가 충분히 검토하겠다.

‘김일성 중국방문시 호요방-조자양과의 대담기록’, 1984년 11월 27일 [오진용,2004:152-3]

이처럼 중국은 북한보고 개혁개방을 하라고 거듭 권하지만, 북한은 개혁개방보다도 남북경쟁이나 안보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이 역력했다. 이런 분위기는 반 년 후의 다음 정상회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최근에 와서, 우리가 소련과 교류비행(상호방문비행)을 하고, 소련의 고위층이 북한을 방문하는 등 소련과의 관계 긴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중국에 대한 혈맹관계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으니, 이 점 이해하기 바란다. 또 나진항을 소련에 조차해 주었다고 하는데, 유사시에 사용하도록 한 것이지, 평상시에 소련군을 주둔하도록 한 것은 아니다.
호요방: 우리는 오해도 우려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소련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환영하고 있다. 북조선도 군사비를 축소하고, 경제건설에 힘써 줄 것을 우리는 바라고 있다.
김일성: 우리도 중국 측 의견에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미국에 의해서 남조선에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고, 북침 준비훈련(팀 스피릿 훈련)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군사력 증강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남조선에서 북침 준비훈련을 아니하고, 군비를 먼저 축소한다면 우리도 병력을 감축할 용의가 있다.
호요방: 미국에 의한 북침은 없을 것이다. 경제건설에 치중하도록 하라. 그래야 앞으로 남북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호요방의 신의주 방문시 김일성-김정일과의 대담”, 1985.5.4. [오진용,2004:185]

김일성이 소련 카드를 슬쩍 흔들어 보이지만, 중국은 꾹 참고 그런 건 괜찮다며 계속해서 개혁개방과 경제건설을 주문하고 있다.


1983년 후계자로 공인된 김정일이 처음으로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덩샤오핑이 직접 나서서 젊은 김정일에게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얻은 경험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중국의 특성은 낙후되고, 가난하고, 지방은 넓고, 인구는 많아서 매우 복잡하다는 점이다. 어떤 한 가지 문제를 처리할 때, 어떤 경우에도 최소한 천만 명 이상 1억의 인구가 관련이 된다. 예를 들면, 1978년 11월 우리가 우선 농촌 문제를 처리하려고 할 때, 농민 문제는 전국 인구의 80% 이상이 관련된 문제였다(그러니 얼마나 복잡했겠는가). 그러나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실천을 통해서 증명이 됐지만, 우리가 처리한 농촌 문제는 거의 완벽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같은 의미에서 노동자 문제, 간부 문제, 지식인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노선이나 정책적인 문제에서 좌우의 주장이 서로 부딪히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떤 때는 서로 싸우기까지 했다.
이번 인민대표대회에서 보고한 정부공작보고에서도 기본건설 투자항목 문제도 처리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우리는 지방의 입장만을 고려할 수만은 없다. 단지 지방의 입장만을 생각한다면, 국가가 계획적으로 추진하려는 큰 사업들은 모두 돈이 없어서 추진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여러 분야에서 많은 문제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지속적으로 정책을 조정해야 하고 이들 정책들의 결과가 다른 연관분야에 미치는 영향을 잘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지금 우리의 노선, 방침, 정책은 모두 정확하게 추진되고는 있지만, 아마 이후에도 우리는 실수를 할 것이며, 다시 한번 과오를 저지르는 일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두 가지 큰 일에 모든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하나는 경제계획을 잘 처리해서 4개 현대화의 핵심 문제를 ‘실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간부들을 점차 청년화(靑年化)하고 지식화(智識化)하는 문제이다.

등소평은 이처럼 중국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겪는 문제들을 얘기했다. 등소평의 말 속에는 젊은 김정일에게 하고 싶은 간곡한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개혁·개방에 관한 문제보다는 중·북한 양국관계에 더 관심을 보였다. [오진용,2004:103-4]


좋든 싫든 간에 북한은 대규모 원조를 제공하는 주요 동맹국 중국의 거듭되는 요구를 딱 잘라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북한은 개혁개방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합영법을 만들고, 중국에 개혁개방을 따라하기 위한 대규모 시찰단을 보내기 시작했다.

1983~85년 동안 북한에서는 중국의 개방정책 현장 학습을 위한 대규모 시찰단을 계속해서 파견했다. 그 규모는 대단했다.[65] 중앙의 당·정부 차원은 물론이고, 각 도(道) 그리고 시(市)와 기업소의 행정간부들에게까지 ‘중국을 배우자’는 열기가 확산되었다. 심지어 청년 친선참관단 500명을 세 팀으로 나누어서, 중국의 11개 도시를 돌며 기업의 현장을 참관했다.[66] … 1985년까지 이런 식의 ‘중국 따라배우기 운동’은 계속됐다. 그러나 실제 북한의 개혁 조짐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고, 대외개방은 계속 겉돌고 있었다.

[65]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1983~85년의 기간 동안 북한의 각 분야 실무자들 5천 명 이상이 중국의 개혁·개방 도시와 기업의 현장을 시찰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66] 1985년 8월 23일부터 9월 10일의 기간 동안 북경방송과 평양방송은 연일 이 참관단의 활동을 보도했다.[오진용,2004:110]


이처럼 언뜻 보기만 해도 북한의 움직임이 상당했기 때문에 외부 관찰자들은 북한이 중국을 따라 개혁개방을 시도할 지 많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 움직임을 끌어내기 위해 공을 들였던 중국은 북한 지도자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중국은 일찍부터 북한이 중국식 ‘개방’을 따라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북한의 젊은 지도자 김정일의 행동에 대한 평가와도 관련이 있었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의 경직된 ‘주체사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점과 개방 이후 나타나는 북한 사회의 다양한 변화에 대해서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의 지도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호요방은 1984년 7월 5일 중국을 방문한 미야자와 기이치 전(前) 일본 외상을 면담한 자리에서 북한의 개방을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큰 노력을 하지 않는 한, 발전은 없어 보인다. 김일성, 김정일이 다같이 중국이 취하는 개방정책과 경제활성화정책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부터 찬양하고 있다. 그 예로 북한은 각 도(道)의 최고 책임자 50명을 중국에 보내 상해 등 주요 도시를 시찰시킨 바 있다. 그러나 중국의 개방정책을 북한이 자국 내에서 실시할지 여부는 솔직히 호요방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평가했다.[67]

[67] “1984년 7월 6일자, 교도통신의 보도. 1984년 7월 5일 북경발 지지통신의 보도. 북한이 계속 대규모 시찰단을 중국의 주요 개방 도시로 파견해서 많은 기업현장을 직접 시찰하도록 하고 있으나, 북한이 중국식 개방을 답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중국의 대다수 실무자들도 상당히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호요방의 이런 의문은 중국 측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오진용,2004:110-1]


북한의 개혁 시도(혹은 시늉)은 오래 가지 않았다.

호요방의 북한에 대한 이런 평가는 정확했다. 김일성은 일본잡지 《세카이》(世界)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절대로 외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외자를 받아들여 경제를 건설하면, 예속경제가 되고 맙니다. 나라의 정치 독립뿐만 아니라, 경제 독립도 중요합니다.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에 예속되면, 정치적으로 예속됩니다. 우리는 경제건설에서 외자를 받아들여 단번에 높이 뛰어오르려 하지 않으며, 자체의 힘으로 한 단계 한 단계씩 톱아(높이) 오르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68]

[68]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일본 정치리론 잡지 《세카이》(世界) 편집국장이 제기한 질문에 주신 대답”, (1985.6.9) 《근로자》, 1985년 8월호, pp.15-16.[오진용,2004:111]

이 수령의 선언이 '합영법'을 만들고 1년 만에 나온 이야기라는 것을 기억해 두자.


일전에 김정일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뒤따를 수 있을 것인가?란 글에서 '박철 사건'이란 것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사건이 바로 이 때 벌어진 일이다.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북한 농업과학원 연구원으로 지내다 숙청되어 탈북한 이민복은 1980년대 중반의 '박철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85년 당시 과학원 지질학연구소 실장이었던 박철은 식량난 타개책으로서 ‘농장포전 개인책임관리제’라는 논문을 작성하여 중앙당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인 즉 간부를 포함한 전농장원의 개개인에게 논밭을 맡겨서 생산관리를 행한다는 것이다. 이 제안은 중앙당의 과학담당비서 김환, 농업담당비서 서관히, 정무원총리 강성산 등을 비롯하여 북한 지도부 내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군급 이상 농업간부들의 토론에서도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철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련의 움직임은 김일성의 주체 농법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혹독한 비판을 받고 주요 관련인사가 처분되거나 사상투쟁의 대상이 되어 사라진다. 이후 누구도 감히 자영농 지향의 농업개혁을 건의하지 못하였다.

박철 사건 직후 김일성은 본인 명의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여기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제도는 섰으나 사회주의건설이 완성되지 못하였으며 착취제도는 청산되었으나 자본주의 복구의 위험이 남아있는 그런 사회는 완전히 승리한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면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한 처방으로 ‘협동적 소유의 전인민적 소유로의 전환’, ‘인민정권의 강화’, ‘사회주의 제도의 공고화’ 등의 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박철과 같은 제안을 봉쇄함과 동시에 당시 중국이나 소련의 농업개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박철이 이런 제안을 내놓고, 북한 간부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소개한 시대적 배경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전국에서 5천여 명의 간부를 중국에 보내 개혁개방을 시찰시키면서 뭔가 개혁에 대해서 말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일시적으로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다음과 같이 이 싹을 잘라버렸다.

이 점은 1985년 중국식 가족도급제와 농가생산책임제 도입을 주장하다 비판받고 숙청된 농업연구사 ‘박철 사건’에서 드러났다. 당시 박철의 행동을 제때에 저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 경제 담당 비서였던 김환은 정무원 부장으로 강등되었고, 비슷한 견해를 보인 당선전선동부 부부장도 비판을 받고 전보조치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북한 문헌들은 박철이 일부 사회주의 나라의 ‘개량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난하고 있다.
1980년대 중엽 일부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는 … 경제분야에서부터 개혁·개편하는 길로 나갔다. 농촌경리부분에서는 가족을 단위로 하여 생산수단을 나누어주고 세대도급제를 실시(하였다) … 우리의 일부 일군들 속에서도 다른 나라에서 실시하는 경제개혁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세우지 못하고 그에 동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주체의 사회주의 경제관리방법을 옹호관철하는 문제는 단순한 경제실무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제도를 고수하는가(하는) … 심각한 정치적 문제였다. 김정일 동지께서는 1986년 7월 15일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하신 력사적인 담화에서 … 가족단위로 생산수단을 나누어 주고 도급제를 실시하게 되면 그것이 자본주의적 요소를 낳게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고 확언하시었다. … 농촌기술혁명이 진척되어 농업생산력이 높아진 우리나라에서 가족을 단위로 도급제를 실시하려는 것은 … 봉건말기의 분산적인 소농경리에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시며 우리는 사회주의적 농업협동경리로부터 소규모적인 개인경리로 뒷걸음 칠 것이 아니라 농촌경리를 집단주의적 경리에로 진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시었다.

이상의 인용문은 당시 경제개혁 의제가 단순히 효율성과 생산성 등 경제실무적 시각에서만 고려할 수 없는 정치적 문제임을 시사한다. 사회주의를 고수하기 위해 중국발 경제개혁 의제가 여전히 정치적 통일·단결의제에 종속되었음을 의미한다.[한기범,2009:92]

위 인용문의 출처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김정일동지 전기 2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3), 468-469쪽. 즉 박철을 때려잡은 것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업적으로 홍보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북한이 2004년에 북한이 몇몇 협동농장에서 분조담당제를 실험한 것을 갖고 북한이 "개혁 개방을 할 의지가 그들에게 확실히 있었다"며 "햇볕의 통찰과 같이 북이 행동해 오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이런 것은 1980년대에 북한이 보여준 시도의 재탕이거나 그보다도 못한 사소한 제스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떡밥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는 풍조는 끊이지 않고 있다. 조지 케넌은 60여 년 전에 이미 이런 문제점을 통렬하게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러시아/소비에트만 북한/북한정권으로 바꿔 읽으면 변한 게 하나도 없음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가 우리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그들 정책의 하나 둘 쯤은 일시적으로 뒷방에 쳐넣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미국인들은 벌떡 일어나 "러시아가 변했소"라고 신나게 선언한다. 그리고 그 중 어떤 이들은 그러한 "변화"를 가져온 데 대한 공적을 챙기려고 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전술적인 행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소비에트 정책의 그런 특성들은 그들이 기원한 공리처럼 소비에트 권력의 내적 본질로 볼 때 당연한 것이며,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든 뒤로 감추어져 있든 간에 소비에트 권력의 내적 본질이 바뀔 때까지 우리와 계속 함께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러시아를 상대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해진 날까지 우리 사회를 전복시키기 위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식 사업에 이미 뛰어든 상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Kennan,1947]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도자가 중국을 시찰한다거나, 몇몇 해외시찰단을 보내고 교육을 받는다든가 하는 에피소드들은 북한이 진짜로 개혁개방에 나선다는 것을 전혀 담보해주지 못한다. 이런 노이즈를 걸러내고 진정한 추세 변화를 포착하려면 좀 더 장기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전례를 돌이켜 볼 때, 보다 믿을만한 증거는 중기적(4~6년)인 변화 추세인 것 같다. 북한이 돌이킬 수 없는 개혁개방을 궤도에 올렸다는 것을 확인하려면 이 정도 기간을 잡아 덩샤오핑의 중국, 혹은 고르바초프의 소련 등이 추진한 변화와 비교하는 방법을 통해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Kennan, George F., The Sources of Soviet Conduct, Foreign Affairs, July 1947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서울: 나남, 2004.
한기범. “북한 정책결정과정의 조직행태와 관료정치 : 경제개혁 확대 및 후퇴를 중심으로(2000~09).”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경남대학교 , 2010년 2월
by sonnet | 2010/05/28 10:48 | 정치 | 트랙백(2) | 핑백(3) | 덧글(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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