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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프랑스
2011/04/13   튀니지 난민과 유럽 연합 [47]
2008/11/26   이행의 문제 [41]
2007/09/22   미국-프랑스 애증의 핵협력 관계 [28]
2006/10/23   프랑스, 이스라엘 공군에 도전? [21]
튀니지 난민과 유럽 연합
튀니지 '보트피플' 伊.佛 갈등 비화 (연합, 2011년 4월 8일)
난민유입 우려 獨, 국경통제 부활 검토 (연합, 2011년 4월 11일)
튀니지 난민들, 伊 남부 섬에서 폭동 (연합, 2011년 4월 12일)


트윗에서 이미 간단히 소개한 적 있지만, 이 문제가 유럽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모양을 보니 좀 더 자세히 써볼까 한다.

올해 초부터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연안지역을 따라 정변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이들과 지중해를 끼고 마주보고 있는 이탈리아는 걱정이 태산이다. 난민들이 대거 넘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람페두사 섬 등 이탈리아 남부 도서지역에 넘어온 '보트피플'이 2만 5천명에 달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튀니지인이라고 한다. 사실 튀니지는 정변이 이미 일단락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들이 진짜 정변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난민인지, 아니면 기회가 왔을 때 부유한 유럽에 넘어가 보려는 경제적 동기로 움직이는 불법이민자 무리인지는 다소 불확실한 부분도 있다.


람페두사 섬의 난민캠프는 이미 포화된 상태고 이탈리아 본토의 난민캠프에 수용된 난민들은 캠프를 탈출해 불법체류 굳히기에 들어감으로서 이탈리아 정부를 곤경에 빠트리고 있다.

난민 유입에 쩔쩔매던 이탈리아는 유럽연합 형제국들에게 분담을 요청했으나, 다들 이탈리아가 알아서 잘 처리해야 한다고 말할 뿐 난민을 나눠받겠다고 나서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이에 이탈리아는 의리 없는(?) 유럽 형제국들에게 자기들 방식대로 이 문제를 떠넘기기로 결단을 내린다.

그 방법이란 난민들에게 이탈리아 정부가 공식 서류(단기체류증)을 발급해 줌으로서, 이 서류를 갖고 유럽의 다른 나라로 넘어갈 수 있게 방조하겠다는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폭탄돌리기에 분개한 유럽 각국들은 드디어 침묵을 깨고 목청을 높이기 시작한다.

클로드 게앙 프랑스 내무장관은 7일 RTL 라디오와 인터뷰에서 "프랑스는 경제적 이유로 인한 튀니지 이민자 유입을 감내할 의사가 없다"며 "이탈리아 정부의 서류가 있다고 프랑스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EU 법령에 의거, 해당 서류는 적법한 신분증을 가지고 있고, 경제력을 입증할 수 있어야 유효하다"며 "소득을 입증할 수 없다면 이탈리아 정부가 발행한 단기 체류허가증을 가진 이민자들을 모두 추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스-페터 프리드리히 독일 내무장관은 이날 일간지 벨트와 인터뷰에서 이탈리아는 자신의 문제를 다른 나라에 떠넘기지 말고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면서 EU 규정은 2001년 당시 구 유고연방의 분쟁 과정에서 발생한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다.


프랑스 측의 입장이 전해지자 마로니 장관은 이탈리아 국영TV 인터뷰 녹화에서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프랑스는 솅겐조약에서 탈퇴하거나 조약을 유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현지 안사 뉴스통신이 전했다.

로베르토 마로니 이탈리아 내무장관은 이날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EU 내무장관 회의에서 "이탈리아만 홀로 남았다"며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가 EU의 일원으로 남아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사실 이 모든 문제는 리비아 사태의 전개에 대한 전초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위 지도에서 보듯이 리비아, 특히 카다피 진영의 본거지인 트리폴리 인근은 이탈리아 입장에서 볼 때, 튀니지와 비슷한 정도의 거리에 불과하다. 이탈리아는 리비아 봉기가 일어난 직후부터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있는 중이다. 이탈리아 외무장관 프랑코 프라티니는 이미 2월에 카다피 정부가 무너질 경우 20~30만 명 정도의 난민이 넘어오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한 바 있다.

유럽은 유럽통합, 특히 euro 화폐통합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경을 넘은 노동력의 이동을 쉽게 만든 바 있다. 유럽통합의 축인 독일-프랑스는 재정위기 때문에 남부의 환자 PIGS 국가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불유쾌한 선택에 직면해 있는데, 이제 지중해에 면한 PIGS를 통해 난민도 넘어올 판이다. 여러 모로 유럽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고난을 함께 질 수 있는지를 시험받는 중이라 하겠다.




관련뉴스 추가:
적십자委 "유럽에는 난민 아닌 이민자 유입"(종합) (2011년 4월 17일)
佛ㆍ伊, 이민자탑승열차 단속으로 갈등 (2011년 4월 18일)
네덜란드도 튀니지인 입국 통제 강화 (2011년 4월 18일)
유로폴 "보트피플 속 테러리스트 잠입 가능성" (2011년 4월 19일)
"튀니지 난민 문제로 `국경없는 유럽' 꿈 흔들" (2011년 4월 20일)
"佛, 솅겐협정 효력 일시 중단 검토" (2011년 4월 23일)
by sonnet | 2011/04/13 07:46 | 정치 | 트랙백 | 핑백(3) | 덧글(47)
이행의 문제
글을 읽다 생각난 의문 (밀리네스) 에서 트랙백

이 글에서는 우선 트랙백 해온 글의 의문에 간략화된 형태로 답한 다음, 그와 연관된 문제 한 가지를 다룬다. 보통은 일반인들이 익숙한 예를 들려고 하는 편인데, 트랙백 해온 분께는 SW개발의 비유가 익숙하리라고 예상되어, 본문 중에 그러한 예를 일부 사용하였다. 가능한 쉽게 쓰려고 하였으나 이 점에 대해서 읽는 다른 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1. 문제의 간단한 검토

왜 왕정시대에서 민주주의시대로 바뀌었을까? 왕정에 근원적 모순이 있어서 민주주의로 바뀐것일까? 아니면 왕정을 지키고자 하는 그 모든 보수주의적인(sonnet님 말을 빌자면 과거의 진보를 지키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여 왕정시대가 무너진 것일까?

인간의 이성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사회구성원들의 지식 평균량이 많아지는것은 가능하다. 지식 평균량이 늘어나는 속도는 처음에는 느리지만 어느 임계점을 넘게 되면 급격하게 높아진다.

금속활자가 발명되고 일어난 르네상스 혁명
증기기관등으로 인해 지식의 전파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자 일어난 산업혁명

그럼 그 이전의 시대에 근원적인 모순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시스템이 근원적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스템이 사회구성원의 평균지식량을 못따라잡음에 따라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 생각한다.

[…] 따라서 내가 지지하는 것은 다음의 방식이다.
컨텍스트가 서서히 변화 하는 곳에서는 과거의 방식을 존중해 가며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는 보수주의자의 방식을 따른다. 하지만 컨텍스트가 급격하게 변화 하는 곳에서는 컨텍스트의 변화를 최대한 파악하려 노력하며 그 컨텍스트에 맞는 새로운 모델을 찾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는 진보주의자의 방식을 따른다. (밀리네스)

서유럽에서 왕정에서 민주정으로의 변화는 두 가지 유형, 즉 혁명 등으로 신속히 왕정을 폐지한 후 공화정을 수립한 유형과 국왕이라는 껍데기를 놔둔 채 점진적으로 권력을 의회로 옮겨나간 끝에 입헌군주정 형태로 정착된 유형을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첫째 유형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와 둘째 유형의 대표인 영국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기술 진보가 가속화된 중요한 사회현상이었던) 산업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영국이 프랑스보다 앞서면 앞섰지 뒤쳐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앞서 제기된 가설과는 잘 맞지 않는 현상이다. 즉 '컨택스트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산업혁명의 선도국가인 영국이 가장 진보적인 대책을 택해야 할 것 같은데, 실은 가장 보수적인 방법을 택했으며, 결과적으로도 원만히 민주정으로의 전환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례 하나로 일반화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적인 접근법으로도 큰 변화의 필요에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는 충분하다.

어쨌든 컨택스트의 변화가 크다면 그만큼 더 큰 진보가 요구된다는 것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관점이며, 아마도 어떤 "다음 단계"(*1)에 도달한 후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면 그 말이 옳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양적으로) 큰 진보가 요구된다고 생각되더라도 (속도 면에서) 빠른 진보를 추구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전략이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사실 빠른 진보의 추구가 나쁜 전략이 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하는 근거가 몇 가지 있다. 그렇다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은 언제 설득력을 갖게 되는가?


2. 이행의 문제(1): 중단 없는 서비스

살던 집을 재건축하기로 했다고 생각해 보자. 이럴 경우 두 가지 대조적인 접근법을 취할 수 있다. 우선 낡은 집을 허물어 버린 후, 바닥부터 출발해 완전히 새 집을 짓는 방법이 있다. 반면 집의 일부를 수리한 후 그 일이 끝나면 다음 부분을 수리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방법을 취할 수도 있다.

낡은 집을 허물고 바닥부터 새 집을 짓는 방법은 옛 집의 문제점들을 신속히 일소할 수 있다는 굉장한 장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이 방법을 더 매력적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왜 옛 집의 단점을 더 오래 겪어야 하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가 필요할까?

낡은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을 경우, 거기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숨은 가정이 하나 있다. 즉, 그 집에 살던 가족은 새 집이 완공될 동안 어딘가 딴 곳으로 이사를 가 당분간 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딴 곳에 가서 살 데가 없다면? 온 가족이 철거한 집 옆에서 몇 달 동안이나 노숙을 하게 되지 않을까? 노숙 기간 동안 환경이 양호, 즉 날씨가 맑고 따뜻하다면 텐트를 치고 버텨 볼 수도 있겠지만, 폭풍우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면?

재건축 때와는 달리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구조나 체제를 손볼 경우, 대부분의 사회구성원은 그 기간 동안 자신이 속해 있던 사회를 떠나 안정적인 다른 사회에 피신해 있을 수가 없다. 다소 불만족스러운 점이 있더라도 어느 정도 우리를 지켜주던 기성 체제는 철거되었는데,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새 체제는 아직 동작하지 않을 경우, 사회구성원 다수는 예측불가능한, 그리고 위험한 환경에 장기간 무방비로 노출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집의 일부를 조금씩 수리해 나가는 보수적 방법을 택하는 중요한 이유가 드러난다. 그것은 새 집(혹은 부분적인 수리를 여러 차례 거쳐 새롭게 거듭난 집)이 완공될 때까지, 즉 이행의 시기 동안에도 그 집이 제공하는 기본기능(주거)를 계속 제공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3. 이행의 문제(2): 개발 상의 난점

이제 SW 개발의 비유를 통해 다른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당신은 정치체제™ 2.0(혹은 '사회체제™ 2.0'라도 좋다) 개발을 새로 맡게 된 프로젝트 매니저(PM)이다. 노련한 PM답게, 즉각 현황파악에 착수한 당신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우선 정치체제™의 기존 시스템(ver.1.7.3pl39)은 낡아빠진(legacy) 시스템 답게 프로그램 소스코드가 남아있지 않다. 지금까지 거쳐간 시스템 관리자들이 대를 이어 전수해 온 자료란 것을 넘겨받아 검토해본 결과, 시스템의 대략적인 동작원리와 구조 정도는 알 수 있지만, 그 조차도 완벽과는 거리가 먼 것임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최근 몇 년간 적용된 패치에 대해서는 소스코드가 남아 있지만, 바이너리 패치가 적용될 각 서브시스템의 소스코드가 남아있지 않아서 그 가치는 그리 높다고 할 수가 없었다.

혀를 차면서도 "이 정도 쯤… 예상 못한 바는 아니야"라고 생각한 당신이지만, 다음 문제를 듣게 되자 안색이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체제™는 특수한 메인프레임 호스트에서 실행되기 때문에, 별도의 개발용 호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새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면 기존의 프로그램을 내리고 그 자리에서 작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새 실행파일을 컴파일하기만 해도, 기존 프로그램의 실행은 중단된다.(*2) 전임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일을 했냐고 묻자, 그들도 지금까지 모두 그렇게 일했다는 답이 당연하게 돌아온다. 예상되는 문제점은 종이 위에서 이루어지는 기획단계에서 잡아야 마땅한 것 아니냐면서.


자, 이 일을 어떻게 한다??

SW개발자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사회과학을 기반으로 한 대부분의 정책 기획과 구현은 이런 수준으로 집행된다. 이론적 지식, 도구, 경험 축적의 수준이 모두 SW개발자들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게 열악하다.

자, 어찌 되었든 주어진 현실은 현실이다. 당신에게 이 일이 맡겨진다면 이 일, 정치체제™ 2.0개발을 어떤 식으로 진행하고 싶은가?

이런 -테스트베드가 전혀 없는- 개발환경이 주어지고, 게다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구 시스템의 서비스를 최대한 계속 제공해야 할 필요가 중요하다면, 그 개발방법은 필연적으로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SW의 예가 잘 와닿지 않는 사람이라면, 제약회사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다. 제약회사가 실험실 수준에서 연구된 어떤 신물질을 생산해 엄격한 신약시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전 국민에게 먹인다면, (설령 그 약이 큰 해를 끼치지 않는다 해도) 맞아죽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책은 대개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고 집행된다. 학계에서 말로 하는 논의와 전국적인 집행 사이에 체계적인 임상시험에 해당하는 것이 존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보수주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가 국가의 결함을 다룰 때, “삼가 아버지의 상처를 치료하는 심정으로, 경건한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을 품고”(to the faults of the state as to the wounds of a father, with pious awe and trembling solicitude) 접근해야 한다라고 목청을 높였던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4. 이행의 문제(3): 정보와 학습 측면

이 논점은 스티글리츠가 공산권 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함에 있어서 중국의 점진적인 이행이, 러시아의 급격한 이행보다 성공적이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잘 정리한 바 있다.

(이) 주장은 학습에 초점을 둔다.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개인적 차원과 조직적 차원의 학습이 이루어진다. 개인들은 시장의 신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사회는 어떠한 기구가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는지 알아야 하고, 조직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점진적 이행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이러한 학습과정을 용이하게 한다. 첫째, ‘정보의 과부하’ 문제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체제에 과도한 요구가 부과될 때 효율성이 저하되게 된다. 모든 교사들에게 친숙한 일반적 원리가 있다. 학습 재료는 소단계별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 오늘 배운 것은 내일 체화된다는 것, 앞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다음 단계의 문제를 푸는 것은(적어도 쉽게 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둘째, 점진적 이행은 급격하고 급속한 변환에 의해 불가피하게 조직이 파괴될 때 나타나는 정보의 손실을 피할 수 있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진화는 혁명보다 낫다. 조직은 개인들이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보이는 상대적 역량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다. 이행의 과정에서 업무 분담이 바뀌더라도, 앞 단계에서의 정보는 다음 단계에서도 유용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정보를 지니고 있는 것이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보다 낫다.

Stiglitz, Joseph E., Whither Socialism?, MIT Press, 1994
(강신욱 역, 『시장으로 가는 길』, 한울 아카데미, 2003, pp.383-385)

이것은 사회제도의 설계(구현)자가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본 관점이라는 점이 좀 다르다. 사회에 변화가 일어날 경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1) 변화에 맞추어 자신의 지식과 업무수행방법을 학습하고 바꿔야 한다.
(2) 변화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을 바꿀 것인지 적절히 예측해야 한다.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나면 일단 나의 학습이 불충분해 따라가는데 문제가 생기기 쉽다. 두번째로는 다른 사람들도 같은 문제를 겪기 때문에, 남들의 행동을 예측한다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러면 사회가 돌아가는데 문제가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5. 속담: "급할수록 돌아가라"

기술발전이나 사회진보 같은 진보의 개념들이 사용될 경우, 그 진보는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atomic operation처럼 다루어질 때가 많다. 즉 논의의 편의를 위해 '진보 이전'과 '진보 완료'라는 두 상태를 비교하거나 둘 사이를 징검다리를 건너뛰듯 옮겨다님으로서 그 두 상태 사이에는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생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상태 사이에 존재하는 이행과정에는 진보의 폭에 상응하는 시간과 여러 가지 실무적인 난점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이행의 문제를 진지하게 붙잡고 씨름할 경우, 급한데 멀리 돌아가는 길처럼 보였던 보수적인 접근법의 장점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1. 이 예에서는 영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정, 즉 여성과 저소득층을 포함한 전 성인 인구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한 입헌군주정에 도달한 단계라고 임의로 정의해볼 수 있다.
2. 예를 들어 solaris(sparc)에서 실행 중인 바이너리 파일을 overwrite해 보기 바란다.
by sonnet | 2008/11/26 23:54 | 정치 | 트랙백 | 덧글(41)
미국-프랑스 애증의 핵협력 관계

핵실험까지의 험난한 길

2차대전 중 미국은 「맨하탄 프로젝트」를 통해 당대의 초병기 원자폭탄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고 이로 인해 세계는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달라진 정치군사적 환경을 맞이하게 된다.
이 때 연합국으로서 이 프로젝트에 동참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당연히 기술이전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물론 같은 연합국이던 소련에게는 비밀이었지만 그것은 공산국가이니까 그런 것이고 자신들은 서방 국가인 만큼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착각에 불과했다.
우선 미국은 전후 국제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전시협력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를 동등한 강대국으로서 취급하지 않음으로써 이들 국가들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게다가 1946년 8월 미 의회는 핵물질과 핵기술의 해외 이전을 금지하는 맥마흔 법안을 전격적으로 통과시켜 핵무기를 독점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미국의 오만한 태도와 일방적인 조치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큰 충격과 굴욕을 안겨주어 이들이 독자적 핵개발을 자극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사실 영국의 경우 처칠 수상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직접 만나 ‘전후의 핵협력’을 약속받았던 터여서 루스벨트 사후에 일어난 이런 배신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결국 영국은 치를 떨며 독자핵개발에 나선 끝에 1952년 원폭실험에 성공해 핵보유국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우리는 미국인들과 협력을 할 수 없었다. 그 어리석은 맥마흔 법안은 우리가 그들과 협력하는 것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그들은 자기들은 어른이고 우리는 어린아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만 잘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영국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

“우리는 이걸(핵무기) 가져야만 한다. 나야 상관없지만, 나는 방금 내가 당한 것처럼 이 나라의 다른 어떤 외상이 미 국무장관에 의해 농락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 아무리 엄청난 비용이 들더라도 우리는 지금 당장 이걸 가져야 한다.” -영국 외상 어네스트 베빈-

한편 프랑스의 경우는 상황이 훨씬 나빴다. 프랑스는 2차대전 중 독일에 패해 본국이 점령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맨하탄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고 3류 취급을 받았다. 즉 핵개발 전 과정에 참여한 영국 과학자들과 달리 프랑스 과학자들은 핵폭탄 제조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중수로와 플루토늄 분리 업무에만 부분적으로 참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망명정부를 이끌던 드골은 핵개발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있어 영미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았고, 힘없는 설움을 곰씹으면서 앵글로-색슨의 차별대우에 대한 반감을 키워 나갔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10월, 드골은 수상 직속으로 프랑스 원자력위원회(CEA)를 설립해 핵기술 확보에 나서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전후복구가 절실했고 영미에 비해 뒤쳐져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주로 기반기술과 핵물질 확보에 주력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큰 장애물이 다가왔다. 미국-영국-캐나다 3국이 워싱턴에서 회동을 갖고 전 세계 우라늄 공급을 통제하는 협정을 맺은 것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핵개발 능력은 큰 타격을 받을 뻔 했지만, 다행히 국내에서 대규모 우라늄광을 발견하는데 성공해 한숨을 돌리게 된다.

1956년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영국과 프랑스가 합작으로 운영하던 수에즈 운하 회사를 이집트가 전격적으로 몰수해 국유화해 버린 것이다. 분노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되찾기로 결심하고 이스라엘을 끌어들인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하면, 뒤이어 수에즈 운하 통항의 보호를 명분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군대를 진주시켜 이를 되찾는다는 계산이다. 허약한 이집트군을 상대로 작전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나 소련이 뒤늦게 뛰어들어 공개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위협했다. 즉각 휴전하든가 핵로켓을 맞을 각오를 하라는 것이었다.

“모든 유형의 근대적 (대량)파괴병기를 보유한 더 강력한 나라로부터 공격받게 될 경우 영국의 입장은 무엇인가? 우리는 침략자를 분쇄하고 동방에서 평화를 재수립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결의를 굳혔다.” -영국 총리 이든에게 보내는 소련 총리 불가닌의 라디오 성명-

공개적인 모욕을 받았지만 핵능력에서 소련의 상대가 안 되는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호의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국도 이들의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 불장난을 돕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뒷짐만 진 채, 파운드화에 가해지는 외환공격을 방치해 영국을 괴롭혔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굴욕적인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이익이 자국의 이익과 배치될 때는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핵공갈에 굴복하거나 미국의 정책결정에 순종하도록 강제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었다.

“영국은 본토에서 (발사해) 스탈린그라드와 모스크바 지역에 있는 12개의 도시를, 그리고 사이프러스 기지에서 크리미아 지역에 있는 또 다른 12개의 도시를 초토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2년 전인) 수에즈 위기 당시에는 이런 능력을 갖지 못했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주요 강대국이 된 것이다.” - 한 영국 보수당 하원의원 -

이듬해인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리자 이들의 위기감은 커져만 갔다. 소련이 대륙간탄도탄으로 미국을 협박할 수 있게 된 이상, 미국이 동맹국을 위해 스스로 핵공격을 뒤집어쓸 희생정신을 발휘할 것 같지가 않았다. 영국은 수폭실험을 성공시켜 다시 한번 프랑스를 떼어 놓았다.
점점 더 뒤쳐진다는 초조함, 무시당하는 굴욕, 핵개발에 드는 막대한 자금 사이에서 골머리를 썩이던 프랑스는 상상하기 힘든 행동에 나선다. 비밀리에 숙적 서독에게 접근해 핵무기 공동개발을 제의한 것이다. 서독이 프랑스의 핵개발 프로젝트에 자금과 기술을 지원하면, 완성된 핵무기에 대한 지분을 보장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서독은 전범국의 굴레 때문에 핵무기에 대해 군침만 흘리던 터라 즉각 이 떡밥을 물게 되고, 1958년 국방예산에 유럽미사일연구소에 제공하는 서독의 분담금으로 위장한 20억 마르크의 비자금을 계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극우파의 쿠데타에 이어 집권한 드골은 이 프로젝트를 취소해 버린다. 드골이 보기에 독일에게 핵폭탄을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힘은 군사력이며, 군사력은 오늘날 핵력이다. 핵무장 없는 서독은 다른 동맹국의 군대를 위한 취사병이나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독의 운명은 그것으로 결판날 것이다.” -서독 국방장관 프란츠 스트라우스-

한편 미국은 1958년 맥마흔 법을 개정하면서 수폭까지 완성한 영국의 핵개발을 기정사실로 인정해 포괄적인 핵협력을 보장하는 이른바 ‘영·미 특수관계’를 허용한 반면 프랑스에게는 핵무기 개발에 실질적인 진전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핵협력을 거부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프랑스가 이를 자국을 물먹이려는 앵글로색슨의 야합으로 받아들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드골은 NATO를 개편해 미-영-불 3두 체제로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미국은 프랑스 같은 2류 강대국 따위와 권력을 나눠가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드골은 다시 한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력으로 핵무장을 달성하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결과적으로 명백한 점은 우리 프랑스는 전적으로 프랑스의 국가이익을 위해 어디에서나 즉각 동원될 수 있는 군사력, 즉 독자적 핵타격력이 필요하고, 이것을 수년 내에 반드시 달성하여야 한다. 군사력의 기본이 핵무장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제조하든 혹은 돈으로 구입하든 간에 그것은 우리 수중에 있어야 한다. …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독자적 핵전력을 갖추지 못하면) 더 이상 유럽의 강대국도 주권국일 수도 없고 통합된 위성국에 지나지 않게 된다.” -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 -

드디어 드골 치하에서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 의지가 공개적으로 표명되기 시작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다른 나라들의 외교적 압력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소련의 반대는 물론이고, UN총회에서 프랑스의 핵실험 추진 포기를 종용하는 결의안이 채택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셈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핵무기를 기필코 보유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나라를 저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60년 2월, 마침내 드골 정부는 전세계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제리에서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하게 되었다.

“위대한 프랑스 만세! 오늘 아침 이후로 프랑스는 더욱 강력하고 자랑스런 국가가 되었다” -핵실험 성공 소식을 발표하며,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

이리하여 프랑스는 드디어 핵보유국 클럽에 발을 딛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베트남에서의 패배와 식민제국의 점진적 해체, 2류 강대국으로의 추락과 미소 양대 초강대국으로부터의 무시, 영미 앵글로-색슨 동맹으로부터의 차별 등 프랑스가 겪고 있는 온갖 문제들에 대한 즉각적인 탈출구를 제공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프랑스의 핵전략

여기서 비례억지전략이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핵전략에 대해 조금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프랑스의 핵무장을 둘러싸고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독자적 핵무장 그 자체보다도 프랑스 정도의 소규모 핵전력으로 과연 미국이나 소련 같은 초강대국을 상대로 어떻게 억지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란 점에 있었다.
이에 대한 프랑스, 특히 드골주의자들의 대답은 간단하다.
프랑스가 상대의 대도시 한두 군데를 물귀신처럼 붙잡고 지옥에 떨어질 만큼 독종이라는 것을 상대가 믿게만 할 수 있다면 상대국은 자국이 입을 손해를 고려하면 프랑스를 멸망시켜 봐야 남는 게 없다고 여겨 전쟁을 꺼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빈약한 핵전력의 위협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단 핵전쟁이 시작되면 즉각 보유한 핵무기를 몽땅 상대의 대도시에 쏟아 부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죽일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일단 전술핵무기처럼 아무리 사소한 규모로라도 일단 핵이 사용되기 시작되면 협상으로 전쟁을 멈출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배수진을 치는 전략이다. 즉 유사시가 되면 프랑스 민족과 국가의 확고한 자살은 기정사실인 셈이었다.

“물론, 우리가 발사할 수 있는 핵무기의 파괴력은 미국과 소련이 발사할 수 있는 핵무기의 파괴력에 비해 수적으로 동등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 사실, 어떤 인간도, 어떤 국가도 단 한 번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잠재적 적에게 치명적 손상을 가할 수 있고, 그렇게 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러한 의지가 (잠재적 적에게) 충분히 인식된다면, 억지는 그 즉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1964년 프랑스의 핵전략을 공표하며, 샤를 드골-

게다가 핵공격을 받아 수도를 위시한 주요 대도시가 파괴되기 시작할 경우, 그 초강대국은 살아남은 핵전력을 총동원해 마찬가지 방법으로 상대방 진영에 속하는 모든 나라의 대도시를 공격할 것으로 믿어졌다. 즉 프랑스의 핵전략은 일단 발동될 경우 프랑스 민족의 옥쇄는 물론이요, 인류의 파멸을 가져올 최종전쟁의 방아쇠를 당기는 효과를 갖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조금 극단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당시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전면핵전쟁에 대한 견해는 오늘날 대중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재래전이든 핵전쟁이든, 어떠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 만일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에 대해 전쟁을 시작한다면, 아마 3억 명 이상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 세월은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아기들을 낳으며 일할 것이다.” - 마오쩌둥, 1957년 -

“우리는 1천 2백만 명밖에 없다. …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모두 다 죽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사람들은 한 명도 남지 않을 것이다.” -마오의 연설을 듣고, 체코공산당 서기장 안토닌 노보트니-


이어지는 불화

프랑스는 핵실험을 성사시키면 미국으로부터 라이벌 영국과 대등한 대우와 기술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사실 핵실험을 성사시킨 후에도 실용적인 핵전력을 완성하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절실한 문제였다. 그러나 물론 그런 기대는 오판으로 드러났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뒤를 이은 케네디-존슨 행정부 내내 미국은 프랑스와의 핵기술 협력을 거부했다. 새 행정부의 핵심 참모들부터가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프랑스처럼 작고 허약한 초기단계의 핵전력을 보유한 제3국은 실질적인 도움도 못되면서 위기가 고조될 때 소련으로 하여금 선제공격을 가해 미리 제거해버리도록 할 유혹만 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프랑스처럼 이판사판식 핵전략을 가진 나라는 미소간의 전면핵전쟁의 방아쇠를 당길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외국과의 핵기술 협력에 대해 대통령에게 자문을 제공하도록 되어 있는 미국원자력위원회(AEC) 또한 프랑스와의 협력에 부정적인 분위기였다. 그들은 프랑스는 정권이 불안정하고, 프랑스 원자력위원회(CEA)에는 소련 첩자들이 침투해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영국이 핵기술 뿐 아니라 스카이볼트나 폴라리스 탄도탄 같은 핵탄두 운반수단까지 미국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드골에게 이런 논리는 명백한 차별을 가려보자는 얄팍한 술수일 뿐이었다.

게다가 케네디 행정부가 기존의 대량보복전략을 대체할 새로운 핵전략으로 유연반응전략을 들고 나오면서 갈등이 한층 깊어졌다. 유연반응은 대량보복이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킬 파멸적인 핵전쟁을 피하기 위해 재래식전쟁은 재래식으로, 전술핵무기는 전술핵무기로 맞서면서 각 단계마다 협상으로 전쟁을 종결시킬 기회를 엿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볼 때 유연반응전략이란 소련 핵전력의 성장과 대륙간탄도탄의 실용화에 따라 미국 본토도 핵공격을 받을 수 있게 되자, 미국이 몸을 사리며 파리나 본을 위해 뉴욕을 희생시킬 생각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에 불과했다. 미국은 초반에 서유럽의 미국 동맹국들과 동유럽의 소련 동맹국들이 핵공격을 대신 뒤집어쓰는 동안은 버티다가 미소 양국의 본토에 전화가 옮아 붙을 때쯤 되면 휴전을 모색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새로운 미국의 핵전략이 곧 NATO의 핵전략이 되는 것이 당연시되는 상황에서 유연반응전략은 프랑스의 핵전략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앞서 설명한 대로 프랑스의 핵전략은 기본적으로 대량보복전략의 변형으로 프랑스의 소규모 핵공격이 미소 양국의 대량보복 핵공격의 방아쇠를 당기는 뇌관 역할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소량의 핵무기만 갖고도 프랑스는 초강대국의 의사결정권을 탈취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의 핵협력 거부와 서유럽 방위보장에 대한 불신은 프랑스의 돌출행동으로 나타났다. 프랑스는 1966년 NATO통합군에서 탈퇴하고 NATO사령부와 외국군을 프랑스 영토에서 축출하며, 미국의 지원 없이 완전히 독자적으로 핵전력을 확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한 중공을 승인하고, 모스크바를 방문하며, 소련의 영향권 안인 폴란드 및 루마니아에 러브콜을 보내는가 하면,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해 원조를 제안하는 등 제3세력으로서의 독자행보를 활발히 펼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행보는 미소 양대 초강대국의 영향을 배제하고 동·서유럽을 아우르는 「유럽인의 유럽」을 만들어 미국과 소련에 필적하는 제3의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는 드골의 야심과 관련이 있었다. 물론 이 제3세력의 두목 역할이 「위대한 프랑스」에게 주어진 천명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NATO는 프랑스의 독립과 국익에 배치된다. 우리가 NATO 회원국이 된 것은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소련이 공격해 올 것으로 믿지 않는다. … NATO는 이제 더 이상 동맹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종속체제이다. 프랑스가 독립성을 회복한 이후에 가서는 프랑스가 서방국가들의 어떤 동맹에 참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책임져주는 미국과 같은 상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샤를 드골-


비밀핵협력 관계

1969년 정권을 잡은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과 그의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는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소모적인 미국-프랑스 관계를 개선해 볼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닉슨과 키신저도 미국의 핵전략에 대해 유럽의 2류 동맹국들의 간섭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프랑스의 핵무장을 방해하려는 것은 아니며 서구진영의 안보에 기여하고 있음을 인정해 줄 용의가 있었다.
사실 프랑스 정당 치고 프랑스의 핵보유를 반대하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는 공산당조차도 그랬다. 미국이 뭐라고 한들 프랑스가 핵을 포기할리 없는 이상, 프랑스의 핵전력이 가능한 빨리 생존성을 갖추어 더 이상 소련의 선제공격을 유혹하지 않고, 너무 많은 자금을 소요해 프랑스의 통상전력을 약화시키지 않도록 돕는 것이 서방 전체의 안보를 증진시키는 길이라고 그들은 판단했다.
1974년 오타와에서 열린 NATO 외무장관 회담에서 회원국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핵전력이 연합국의 억지능력을 전반적으로 강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 합의했다. 미국이 프랑스의 핵전력이 쓸모있다고 처음으로 인정해준 순간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동맹국들에게 더 큰 안보책임을 맡기는(괌 독트린) 것인 동시에, 소련과의 데탕트, 중미수교, 베트남전의 종결 등과 맞물린 닉슨 행정부의 새 세계전략의 일부였다.

1973년 6월, 닉슨-브레즈네프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 키신저는 프랑스 외무장관 미셸 조베르를 초청해 운을 띄웠다. 프랑스가 잠수함발사탄도탄(SLBM)을 다탄두(MIRV)화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프랑스는 미국 기술자들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혹시 관심이 있는가?
조베르는 즉각 미국이 어떤 문제든 도움을 준다면 환영할 것이라고 답했다.

사실 키신저는 미국 법이 핵기술 이전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법을 우회하기 위한 Negative Guidance라는 편법을 만들어냈다. 이 수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구체적인 핵무기 설계에 관련된 문제일 경우, 일단 프랑스 기술자를 미국 기술자와 만나게 해 준다. 그럼 프랑스 기술자가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하려 하는지에 대한 구상을 묘사한다. 그러면 미국 기술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 측이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짚어준다. 이런 방식으로 구체적인 기밀 정보를 언급하지 않은 채 기술지도를 함으로서 미국 측 기술자는 범법자가 되는 위험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의회가 법을 제정한 의도를 어기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이 사업에 관계했던 미국 측 관계자들은 이 방식을 「스무고개 방식」이라고 불렀다.
「스무고개 방식」은 핵물리학 패키지에 관련된 것에만 적용되었다. 미사일 같은 핵무기 운반체제에 관련된 기술 이전은 법적 규제가 아니라 정책 판단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소련 미사일방어 체제와 표적정보 같은 첩보자료의 공유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종류의 정보든 간에 그것을 프랑스 측에 제공하려면 미국 정부의 다양한 관료와 전문가 집단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내야 했다. 닉슨과 키신저는 자신들의 정책에 대한 관료조직의 소극적인 대응이나 반대로 애를 태우곤 했다.

죠르쥬 퐁피두 대통령은 미국 측의 제안을 크게 환영했다. 사실 그 자신이 오래전부터 미국과의 협력관계를 추구해 오고 있었던 차였다. 그는 미국이 이미 개발한 기술과 중복되는 것을 프랑스가 다시 개발하기 위해 돈과 시간, 그리고 재능을 퍼부어야 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한 미국 측 관련자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드골 집권기에 프랑스 지도부에 속한 여러 사람들, -물론 드골 본인은 빼고- 즉 그들이 하려고 하는 일의 진정한 비용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지름길을 찾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퐁피두는 실무 문제를 타진하기 위해 그 해 9월 국방장관을 미국에 파견했다. 그러나 그는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기밀이 철저하게 준수된 탓에 프랑스 국방장관이 만난 펜타곤 사람들은 키신저와 조베르 간의 비밀대화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조베르는 이듬해 4월 퐁피두가 죽은 후 사임하면서 키신저가 단지 립 서비스를 한 것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핵협력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 양 측의 모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사업의 진행에 대해 알고 있었다. 프랑스 측은 미국 측에게 이 사업에 대해 가르쳐 주어도 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지정했다. 심지어는 외무장관인 조베르의 이름도 거기 오르지 못했다.
이 사업이 시작될 때, 퐁피두의 심복인 자크 코슈스-모리제가 워싱턴 주재 프랑스 대사였다.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앙드레 지로나 병기조달본부장 장-로랑 델페치가 이끄는 사절단이 워싱턴을 드나들었지만, 대사 외에 대사관에 그 내용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후 역대의 프랑스 대사들도 핵문제에 관련된 모종의 일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몰랐다.

양 측에서 이 사업의 초점은 양국 대통령과 그 심복들 -워싱턴의 NSC와 파리의 엘리제궁- 이었다. 따라서 이 사업은 양국 정상 간에 강력한 유대를 만들어 냈지만, 실무적으로 많은 문제를 발생시켰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일이 느리게 진행되었습니다. NSC가 펜타곤을 두들겨 패서 일을 시킬 수는 없었거든요.” 미국 측 담당자의 이야기다.

이 사업에 관계된 사람들도 극소수였지만, 전체를 아는 사람은 훨씬 적었다. 프랑스 과학자들은 자신이 맡은 부분을 빼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모든 지시사항은 원자력위원회의 병기본부장이 독대를 통해 하달했다. 그나마 사업의 전체상을 아는 사람들은 사업의 정치적 측면을 다루는 간부들이었지만, 이들은 기술적 세부에 대해서는 아주 피상적인 것 밖에 몰랐다.

전면적인 기술협력이 이루어졌던 영국과의 핵기술 협력과는 달리 프랑스와의 비밀핵협력은 구체적인 핵무기 설계를 주고받거나 하지는 못했다. 법적 뒷받침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스무고개 방식」을 통해 많은 정보가 전해졌다.
프랑스측은 핵탄두의 소형화와 전자기차폐에 대해 지도받았다. MIRV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핵탄두를 소형화하는 기술이 필수적이었다. “MIRV를 위한 초소형 핵탄두를 만드는 데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여섯 가지 접근방법이 있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이 돌아가고 어떤 것이 돌아가지 않는 것인지 미리 말해준다면 큰 도움이 되지요.”
전자기차폐는 먼저 폭발한 핵탄두로부터 방사되는 전자기파를 맞고 다른 탄두가 망가지지 않게 하는데 필요했다. 이는 실제 핵실험의 경험을 통해서만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예에 가까웠다. 따라서 프랑스 과학자들은 미국이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실제로 지하핵실험을 할 때, 그 근처에 그들의 부품과 장비를 갖다놓을 수 있는 비밀 허가를 받았다.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프랑스가 실제 핵실험 횟수를 줄임으로서 얻는 개발비를 절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프랑스의 핵실험이 가져올 정치적 악영향을 줄일 수 있다고 보았다.

프랑스는 대기권 핵실험을 금지하는 「부분핵실험금지조약」에 가입하지 않았다. 미국, 소련, 영국은 지하핵실험을 할 예정이었지만, 후발주자인 중국과 프랑스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방사성물질이 대기권에 흩어질 수밖에 없지만 프랑스는 사하라사막에서 그냥 지상 핵실험을 계속했다.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이 쇄도했다. 미국은 프랑스의 핵실험 때문에 모든 핵보유국이 싸잡아 욕을 먹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리는 모두 프랑스가 땅속에서 핵실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우리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게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심지어 미국은 네바다에 지어놓은 지하 핵실험장에 와서 실험을 하고 가라고 제안했다. 영국은 진작부터 네바다 핵실험장을 빌려 쓰고 있었다. 프랑스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유를 밝힌 적은 없었지만 핵실험장을 빌려 쓰는 것은 프랑스의 핵무기의 완전한 독립성이란 이미지에 타격이 되기 때문일 거라고 미국 측은 추측했다. 물론 정확한 핵실험을 위해 제공해야만 하는 핵폭탄에 대한 상세 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꺼려서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프랑스가 네바다 핵실험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함에 따라, 미국은 핵개발을 담당하는 리버모어와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의 인력을 파견해, 프랑스가 남태평양 무루루아에 건설하는 핵실험장에 기술지원을 제공했다.

또한 미국과 프랑스는 핵무기의 안전과 보안에 관해서도 상호 협력했다. 안전은 핵폭탄이 사고로 폭발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보안은 합법적인 지휘계통을 통하지 않고 누군가가 핵무기를 훔치거나 발사, 폭발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 과학자와 관리들은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라든 그런 식으로 불법적으로 핵폭탄을 터트리는 사건이 발생하는 날에는 미국 핵무기의 이동과 배치를 치명적일 정도로 제한하는 규제가 만들어질 것으로 걱정했다. 따라서 그들은 핵무기에 관련된 안전장치와 지휘통제체제에 대한 기술을 공유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미국은 핵탄두 운반체제에 대해서도 도움을 제공했다. 미사일의 유도와 추진체제, 구조재, MIRV, 로켓용 고체연료 등에 대한 기술지원이 제공되었다. 60년대 중반과 80년대 초에는 핵개발에 사용될 것이 분명한 고성능 컴퓨터를 판매하기도 했다.
또한 소련에 존재하는 표적들에 대한 정보, 특히 해당 표적의 방어에 관련된 정보도 제공했다. 또한 고에너지 레이저에 대해서도 서로의 기술을 교환했다.

물론 프랑스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가 요청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한 분야 하나가 바로 대잠전 기술, 특히 소련 헌터-킬러의 추적을 어렵게 하기 위해 탄도미사일 잠수함의 소음을 줄이는 방법이었다.
미 해군은 그런 지원은 뭐든지 단호하게 반대했다. 해군의 입장 뒤에는 그들 자신의 반-대잠전 체계의 극도의 민감성이 있었다. "우리 포세이돈-트라이던트 전력의 안전이 너무나 중요하기에,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기법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느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을 겁니다." 한 민간 고위관리의 말이다.
다른 이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건 해군이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 보물입니다"

프랑스의 핵개발 사업은 미국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기 때문에 수비범위는 좁았지만 질은 우수했다. “프랑스인들은 세계 최고의 인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미국 인력보다도 낫다고 봅니다.” 프랑스와의 기술협력에 직접 참여했던 전문가의 말이다.
이는 미국의 기술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는데 급급했던 영국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국방비의 25%를 핵개발에 쓰는 프랑스와 3%를 핵개발에 쓰는 영국은 질적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자금난에 시달리는 영국 핵개발사업과는 대조적으로 프랑스 핵개발사업은 우수한 젊은 인력들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또한 프랑스 측의 한 담당자는 재미있는 회고를 했다. 프랑스 핵개발 사업의 간부들은 하나같이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사실 미국이야말로 우리의 적이다”라는 감정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프랑스 군사력의 성장을 훼방 놓을 궁리만 하면서 국제사회에서 프랑스가 차지해야 할 정당한 지위를 가로막아 왔다는 거다.
그 반동으로 CEA는 대놓고 말은 않았지만 핵기술 확산에 동조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는 미국이 사사건건 우리 앞길을 가로막았던 데 대한 나쁜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 그래서 남들의 앞길을 가로막기 위한 카르텔에 동참하기를 꺼렸던 것이지요.”
실제로 프랑스는 핵확산의 가능성이 큰 기술과 시설의 수출에 적극적이었다. 사담 후세인이 핵개발에 사용했던 오시라크 원자로를 비롯해 남아공과 이란 등에 원자로를 판매했으며, 파키스탄과 대한민국에는 플루토늄 재처리시설 판매를 추진하였다.
“미국으로부터 기술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 이후, (미국에 대한 편견을 접고) 우리는 전 세계적 핵확산 현상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 좀 더 합리적이고 개방적으로 대화에 나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랑스가 반대급부로 미국에 제공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주로 군사/정치적인 것이었다. 프랑스는 미국이 유럽에 중거리 핵전력 -퍼싱II 탄도탄과 지상발사 토마호크- 을 배치할 때 이를 지지했다. 또한 공식적으로는 NATO에서 뛰쳐나간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게 될 경우 자국군이 NATO군, 구체적으로는 미군과 긴밀히 협조하는 작전계획을 마련했다. 프랑스군은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NATO 사령부 밑으로 들어가 싸우게 될 것이었다. 미 본토에서 보내오는 증원군은 프랑스 항구, 비행장, 병참선을 이용해 전개된다. 그리고 프랑스 핵전력은 프랑스의 핵전쟁교리가 선언하는 것처럼 소련 도시를 향해 이판사판의 일제공격을 가하게 되는 대신, NATO 핵전력과 협조된 타격을 가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협약의 결과는 놀랍고도 중요한 것이다. 프랑스의 핵전력은 과거 미국이 제공한 지원 덕분에 전시에 훨씬 더 효과적일 터였다. 또한 동시에 프랑스 핵전력은 아마게돈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훨씬 낮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재래식 작전계획을 통합함으로서 NATO는 프랑스군을 이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프랑스 영토가 제공하는 훨씬 더 깊은 종심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론

우선 프랑스 측에서 볼 때 100% 순수 독자기술에 의한 핵타격군force de frappe는 강하고 위대한 프랑스의 상징이었다. 또한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 어느 쪽에도 줄서기를 원치 않는 제3세력의 선봉장 노릇을 하는데 필수적인 프랑스 외교정책의 담보물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실은 미국의 기술지원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프랑스의 국력이 신통찮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막강한 드골주의자 세력이 포진해있는 상황에서 그런 행동은 국내 정치적으로도 자살행위였다.
게다가 퐁피두, 데스텡, 미테랑으로 이어지는 냉전시대 후반 15년 동안 미국과의 비밀핵협력을 지속해 오다 보니 좌파 혹은 우파 어느 쪽이든 이러한 비밀교류에 대한 책임을 상대방에게만 전가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럼 미국은 왜 사실상 의회가 만든 법을 어겨가면서 비밀리에 프랑스를 지원했던가?
미국은 오랫동안 프랑스에게 핵보유를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해 왔지만 적대감만 키웠을 뿐 건진 게 거의 없었다. 결국 닉슨과 키신저에 이르러 미국은 중요한 정책 판단을 내린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자존심 부분에 관한 한 프랑스에게 굴복을 강요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큰 손해를 보더라도 이 점에 관한 한 프랑스는 확고하였다. 그렇다면 비밀거래를 제안하면 어떨까? 자존심은 지켜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 판단은 곧 정확한 것으로 드러났다. 비밀이 보장되기만 하면 프랑스는 매우 적극적으로 거래에 응했고 종종 큰 양보도 할 의향이 있었다. 심지어 프랑스는 자국의 핵전략을 뜯어고쳐 미국의 핵전략과 조화되도록 만들기까지 하였다.

냉전이 끝나자 이 모든 것에 변화가 왔다. 더 이상 맞서야 할 소련은 없었다. 프랑스는 정식으로 NATO에 복귀하고 냉전시대 미국과 비밀리에 군사협력을 했음을 보도한 언론들에게 짧은 성명으로 그 사실을 인정하였다.

필자 주: 이 글은 월간 Platoon 2007년 8월, pp.82-89에 기고했던 것이다. 전재를 허락해 주신 월간 Platoon 편집부께 감사드린다.
by sonnet | 2007/09/22 23:23 | 정치 | 트랙백 | 핑백(5) | 덧글(28)
프랑스, 이스라엘 공군에 도전?
프랑스 출신의 알랭 펠레그리니 레바논 주둔 유엔잠정군(UNIFIL) 사령관은 19일 "이스라엘의 레바논 영공 침범을 용인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 뒤 외교적인 방법으로 이를 막을 수 없을 경우 다른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며 요격을 가능한 대안으로 거론했다.

이스라엘 군은 지난 8월14일 유엔 안보리의 휴전 결의에 따라 헤즈볼라와의 전투를 중단한 후에도 수시로 무인항공기(UAV) 등을 레바논 영공으로 들여보내 정찰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 펠레그리니 사령관은 영공 침범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고한 뒤 이스라엘 측에 항의하고 있다면서 "현재로서는 외교적인 방법 외에 이를 막을 수단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레바논 주둔 프랑스 군이 대공미사일을 갖추고 있지만 현행 교전규칙으로는 방어 목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며 이스라엘 항공기에 대한 요격이 가능해지려면 유엔이 승인한 새로운 교전규칙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같은 날 레바논의 집권연정 지도자인 사드 알-하리리는 파리를 방문해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에게 이스라엘의 레바논 영공 침범을 막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다음 날, 프랑스 국방장관 미셸 알리오 마리가 자위를 명분으로 이스라엘 항공기를 공격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다.

"저는 (레바논) 영공에 침입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 우선 이를 위협으로 느낀 UN군이 자위를 위해 반격을 가할 수 있으며, 이는 심각한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France Hits Israeli Flights Over Lebanon (AP, 10월 20일)
레바논 유엔군 사령관, 영공 침범 이스라엘機 요격 거론 (카이로=연합, 2006년 10월 20일)


프랑스의 무리수
프랑스 외교의 최대 문제는 자국의 원대한 야망과 그저그런 실력 사이의 괴리를 결코 납득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엘리제궁을 찾아가 이스라엘 공군을 막아달라고 부탁하는 레바논 지도자 사드 알 하리리. 옛 식민지에서 나를 찾아와 굽실거리는 것까지는 기분 좋은 일이겠지만...


중동의 실력자 이스라엘이 결심만 한다면 이스라엘-레바논 국경에 자리잡은 한 줌의 프랑스군을 몽땅 바다에 쳐 넣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스라엘이 국제사회의 비난 같은 것을 크게 두려워하는 나라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스라엘은 3차 중동전 때 동맹국인 미 해군의 군함 USS Liberty를 묵사발냈고(사망 34명, 부상 173명), 올 여름의 레바논 전쟁에서는 UN군 감시초소를 폭격으로 날려버린(사망 4명) 바 있다.

기관포와 로켓탄에 맞아 벌집이 된 미 해군 정보수집함 USS Liberty

폭격으로 주저앉은 키암의 UN정전감시초소


이스라엘 항공기를 향해 프랑스군이 미사일을 발사하는 날엔 정말 "천백배로 피값을 치르는" 상황이 발생할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스라엘은 왜 레바논 영공에 침입하는가?
이스라엘은 히즈불라가 시리아-레바논 국경을 통해 무기, 특히 이스라엘 내부를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로켓을 반입하는 것을 탐지하여 파괴하길 원한다.
이스라엘 당국자들도 카츄샤 같은 단거리 로켓은 너무 작기 때문에 소형 차량이나 당나귀 등에 싣고 산길로 반입하는 것까지 막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인 하이파나 텔 아비브를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로켓이나 탄도탄은 덩치가 크기 때문에 대형 트럭을 이용하지 않으면 운반이 곤란하며 이스라엘의 정찰기에 쉽게 탐지된다.
히즈불라 로켓의 사정권

레바논 정부군이나 UN군이 국경을 통제해 이러한 무기 밀반입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관측통은 거의 없다. 이스라엘도 당연히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 손으로 그 일을 하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떠도는 괴소문
게다가 최근 이스라엘의 몇몇 뉴스 사이트에선 기묘한 소문이 돌고 있다.

로마의 소식통에 따르면, 로마노 프로디 이탈리아 총리가 레바논 정부와 Aster-15 대공미사일 포대를 긴급 판매하는 협상을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Aster-15는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5:5로 합작해 만드는 최신형 대공미사일로 해외판매를 위해선 양국이 동의해야 한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도 이미 이 판매계획에 동의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판매되는 아스터 미사일 포대에는 레바논 군에게 미사일 운용을 지도하기 위한 이탈리아 교관이 딸려갈 것이라고 한다.

Italy to sell Lebanon sophisticated ground-to-air Aster 15 missiles... (DEBKAfile, 10월 17일)
Italy aids Lebanon against Israel (Jerusalem Newswire, 2006년 10월 18일)

기술적으로 이 기사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아스터는 단거리용의 Aster-15와 장거리용의 Aster-30이 있는데, 위 기사에서 언급되는 지상발사형 아스터(SAMP/T)는 Aster-15가 아니라 Aster-30을 사용한다. 또한 SAMP/T는 올 하반기에 야전시험에 들어간 상태로 개발이 완전히 끝난 장비가 아니다.

지상형 아스터, SAMP/T


솔직히 나는 처음에 이 소문을 무시했다. 하나면 또 몰라도, 어떻게 프랑스와 이탈리아 두 나라가 동시에 그렇게까지 멍청할 수 있단 말인가? 기술적인 문제를 도외시하더라도 정치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뒤이어 쏟아져 나온 프랑스 정부의 발언들은 이 소문을 간단히 무시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완전한 사실이 아닐지라도 이스라엘 공군의 정찰행위를 둘러싼 UN군측(프랑스/이탈리아)과 이스라엘 간의 알력 때문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흘린 이야기일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레바논이 방공망을 갖춘다면?
만에 하나 실제로 아스터 포대가 레바논군에 판매된다면 어떻게 될까? 지난 여름의 이스라엘-히즈불라 전쟁에서 레바논은 공군과 방공력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스라엘 공군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졌다. 히즈불라가 이스라엘군을 상대로 용전감투하는 동안 정부군은 패배를 겁내 싸우러 나가지도 않았고, 정부군에 대한 국민의 환멸은 깊어만 갔다.

그러나 설령 몇 개 대대의 대공미사일을 구입해 방공망을 갖추더라도 제대로 붙으면 이스라엘 공군 같은 압도적인 전력을 상대로 오랫동안 버틸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한번 싸워는 봤다 정도의 체면치례는 되겠지만.

그러나 아스터는 서방의 최신 기술을 적용한 아주 정교하고 생존성이 높은 방공체제다. 일단 그러한 방공망이 갖춰지면 히즈불라의 소규모 도발에 대응해 이스라엘이 마음대로 공군력을 동원해 제한적인 보복을 가하기는 무척 어려워질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그러한 방공망이 깔리도록 내버려둘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끝으로 한국군
한국에도 이미 레바논의 UN평화유지군에 파병해 달라는 요청이 와 있고, 정부에서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긴 사무총장까지 배출해 놓은 이상 UN활동에서 뒤로 빠지기도 뭣하긴 하다.
그러나 머나먼 레반트까지 가서 모난 놈 옆에 있다가 불벼락을 맞는 사태가 발생하면 참으로 난감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프랑스가 옆에서 사고를 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고 싶다.
by sonnet | 2006/10/23 07:10 | 정치 | 트랙백(2) | 핑백(1) | 덧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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