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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파레토효율성
2008/10/30   논쟁의 포지션 [72]
논쟁의 포지션
앞선 글을 쓰면서 거기서 밝힌 포지션은 좌 우 양쪽의 견해와 대립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과연 그렇게 되는군요. 이런 구도는 폴 크루그먼이 묘사한 케인스를 둘러싼 3파 진영의 입장과 흥미로울 정도의 오버랩을 보여줍니다.

다른 주요 지적 공헌들처럼 케인스의 사상도 심하게 비판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뿌리 깊은 원인이 있기에 대규모의 경제 침체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경제 침체는 본질적으로 신호 혼선의 문제에 불과하며 이는 돈을 약간 더 많이 찍어냄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는 케인스의 주장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집권 초기에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대공황 극복을 위해 통화 증발 계획을 제안한 메모를 받았다고 한다. 이 때 그는 “너무 쉽군”이란 말 한 마디로 기각했다고 한다).
좌파들 역시 오랫동안 케인스와는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마르크스 이래로 그들은 경기 순환을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성과 궁극적인 붕괴의 증거로 간주해 왔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기 순환이 제도상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도 해결될 수 있는 기술적인 문제라는 견해에 적이 실망하였다.
그러나 케인스에 대해 가장 큰 적개심을 보인 쪽은 언제나 우파였다. … 더욱 심각한 것은, 케인스가 정부 역할의 확대를 정당화한 것 같았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이 케인스를 싫어하였다는 점이다. 케인스의 경기후퇴이론은 경기 후퇴를 민간 시장이 일종의 교통 혼란에 빠져 버린 상황, 즉 정부의 조치만이 풀 수 있는 그러한 상황으로 본다. 케인스 자신은 결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고, 그의 친구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자본주의가 더욱 잘 돌아가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았지 자본주의를 대체해야 할 근거로 보았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항상 케인스의 경제학을 정부의 대대적인 시장 개입을 노린 미끼로 간주하여, 다른 대안을 모색하면서 케인스 주의를 거부해 온 것이다.

Krugman, Paul., Peddling Prosperity: Economic Sense and Nonsense in an Age of Diminished Expectations, W. W. Norton, 1994
(김이수, 오승훈 역, 『경제학의 향연』, 부키, 1997, pp.52-53)

제기된 논점 각각을 살펴보는 건 분량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이니까 순차적으로 이후의 포스팅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구도를 보는 큰 틀에 대해 조금 다루어 볼까 합니다.


우선 왼쪽에서 제기된 견해를 살펴보지요.

전후 자본주의는 그 기간 동안 정상적으로 잘 작동하였다기보다는 주로 임시변통적인 변수에 의해 "예외적으로" 작동하여왔다고 할 수 있다. 과도할 정도의 저유가(低油價), 이를 위한 침략전쟁, 이를 지원하는 군사력과 방위산업, 노동운동 해체/비정규직 확산 등을 통한 소득양극화, 이에 따른 소비침체를 이연시키는 모기지와 같은 대부(貸付)경제, 기축통화인 달러의 발권력을 이용한 과소비, 중국 등 신흥국으로부터의 저가상품 유입 등 몇몇 특수한 변수가 운 좋게도 그때그때 시장의 위기를 지연시켜왔다. 그리고 그 모순은 지금 폭발한 것이다. 이건 쓰나미가 아니라 화산폭발이다. 오랜 동안 마그마가 내부에서 응축되어 왔던 산에서 터진.

“결국 시장은 복구되어야 한다” (foog)

이 견해는 결국 '전후 자본주의에는 (근원적인) 모순이 존재하며 그것이 이제야 폭발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는데, 이를 위 글의 녹색 강조 부분과 비교해 보면 그 유사성이 잘 드러납니다.

무엇이 근원적 모순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은 그것을 규정하는 방법에 따라 상당히 자의적이 될 수 있음을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꽤 쓸만한 반론이 제기되어도 원래의 주장을 고수할 수 있을 때가 적지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근원적 모순 대 신호혼선 논쟁의 핵심은 그것이 근원적이냐 아니냐 하는 개념적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냐 혹은 지금 수술이 필요하냐 같은 증상이나 처방의 부분에 달려 있습니다.

요컨대 내가 궁금한 점은 그것이다. 현재의 시장위기를 해결한 후 그것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을 만큼 시장은 절대적으로 보존할 가치 있는 것인가? 또는 적절한 통제장치만 마련되면 시장은 다시 순수한 시장예찬론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상태의 시장으로 순화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만 되면 시장은 공산주의자들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는 경기변동 및 공황의 두려움으로 해방될 수 있는 것인가? (같은 글, foog)

제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저는 순수한 시장예찬론자가 아니기 때문에 전혀 저런 입장을 갖고 있지 않지요. 저는 "경기변동 및 공황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같은 만병통치약 약장수 놀이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저 뿐 아니라 제가 가끔씩 의견을 소개했던 조지프 스티글리츠, 폴 크루그먼,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앨런 블라인더는 『Hard Heads, Soft Hearts』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의 시각을 재치있게 묘사합니다.

"이성적인 개인으로서 우리는 두통 감기를 치료하기 위해 뇌수술(lobotomy)을 자청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전체로는 툭하면 … 감기를 치료하기 위해 … 전두엽절제술에 맞먹는 처방을 내리고 있다. 왜인가?" (p.51)

우리가 제대로 된 수술법을 모르고 또 그렇기 때문에 감으로 진행되는 그 수술이 아주 위험한 것이라고 예상된다면, 그래도 수술을 해야 할까요? 감기약 좀 먹고 좀 지나면 평소처럼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면 어떨까요?

이러한 생각이 적절한 대증요법으로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여전히 끌고갈만 하지 않은가라는 시각을 낳게 됩니다. 크루그먼이 말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자본주의가 더욱 잘 돌아가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았지 자본주의를 대체해야 할 근거로 보았던 것이 아니"라는 입장은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즉 이들은 이상적인 목표에 눈높이를 맞추는 대신, 현재 가능한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왜 '순수한 시장예찬론자'가 아닌 게 분명한 사람에게 저런 질문을 던졌나란 의문이 남습니다. 우선 이것은 전형적인 허수아비치기 전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참 쉽죠. 그러나 전술 보다 한 단계 높은 배경도 있음직합니다. 근원적 모순을 강조하는 논법의 주요한 용도는 사람들에게 본격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OO의 근원적 모순"을 성토하는 대부분의 주장들을 돌이켜 보면 그것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수술(개혁이든 혁명이든)론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듯이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저는 근원적 모순론자들의 견해에 회의적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에 대한 보론을 한 편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제기된 한 견해를 살펴보지요. 이쪽은 기본적으로 번지수를 잘못 잡은 비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이 믿는 일종의 '리버태리언 신조'를 설파하는 방식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지요.

전의 글도 그렇고 시장과 국가에 대한 오개념의 전형입니다. '시장'은 국가와는 달리 기구, 조직, 체제가 아닙니다. '시장'은 개인들 간의 자유로운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소일 뿐이고, 자유주의자들이 시장을 믿는다는 말은 각 개인들이 자신에 관한 것을 타 개인보다 더 잘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국가에 대립하는 시장이라는 조직을 믿는 것이 아니죠. 그러므로 '시장'과 '국가'의 대립은 허구적인 것이며, 대립이 있다면 개인의 자유와 국가 권력의 대립이 있을 뿐입니다. (산마로)

이 문단에는 반박의 여지가 아주 많지만, 그건 다음 글로 미루기로 하고 리버태리언에 대해 좀 더 주목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자유지상주의'라고 번역되곤 하는 libertarianism은 경제학의 사조라기 보다는 정치철학에 가까운 물건입니다. 이들은 무정부주의를 제외하면 주요 정치 사상들 중에서 정부의 역할에 가장 비판적이며, 그 논거들 또한 주로 윤리학이나 철학에서 출발한 것들입니다. 물론 이런 것이 규범경제학에 영향을 줄 때가 있긴 하지요.

리버태리언의 규범경제학을 좀 살펴보는 것은 이 집단의 성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우월성과 적합성이란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파레토 개선의 성취 여부를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님이 시장원리주의자들이 시장을 금송아지 모시듯 한다고 묘사했듯이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개인 자유 침해의 최소화'를 중요한 목적으로 두고 정책 수단을 모색합니다. (산마로)

후생경제학의 핵심개념 중 하나인 파레토 효율성(Pareto efficiency) 또는 파레토 최적(Pareto optimal)을 거론하니 이것을 예로 들어 보지요. 파레토 개선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누군가의 경제적 후생을 개선하는 행동이고, 파레토 최적이란 파레토 개선이 극한에 이른 상태, 즉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어떤 사람의 경제적 후생을 더 이상 향상시킬 수 없는 데까지 끌어올린 상태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파레토 최적이 정책논의를 위한 좋은 준거점이라고 생각하며, 파레토 개선을 달성할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여기까지는 별 이견들이 없지요.

파레토의 기준은 쉬운 말로 바꾸면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열심히 일해 더 나은 삶을 살자" 쯤 된다고 할 수 있는데, 개인의 소박한 행동윤리로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문제가 되면 어떨까요?

파레토 최적이란 기준에는 중요한 숨겨진 특성이 있습니다. 즉 이 기준은 개인 복지의 절대수준만을 평가할 뿐, 서로 다른 개인 간의 상대적인 복지수준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유시장 완전경쟁의 결과로 부유층의 소득은 1년에 10%씩 성장하고, 빈곤층의 소득은 1년에 3%씩 성장한다고 한다면 이것도 엄연한 파레토 최적이라는 점입니다.

대개 이런 상황에서 진짜 리버태리언들은 당당하게 말하곤 합니다. "맞습니다. 점점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있지요. 그게 뭐 어떻단 말입니까. 그것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파레토 최적이라면 (리버태리언의) 윤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파레토 최적이란 개념이 언제나 이런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빈부격차가 줄어들면서도 파레토 최적인 결과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안 그런 경우도 많지요. 앞에서 든 예는 모든 간단한 준칙에 따르는 한계, 즉 간단한 준칙은 간단하기 때문에 거기 포함되지 못한 중요한 것들이 많이 남아있기 마련이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까지 오면 리버태리언들이 파레토 최적이란 개념에 집착하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것은 그 개념이 리버태리언들의 개인자유지상주의적 덕목이나 윤리관, 예를 들어 신성한 재산권 옹호를 위한 부의 재분배 반대 같은 것과 잘 맞기 때문입니다.

이제 리버태리언과 시장과의 관련성을 점검해 보겠습니다. 후생경제학에는 기본정리(fundamental theorem)라고 불리는 정리가 두 개 있습니다.

1. 완전정보 하의 완전경쟁시장은 파레토 최적이다
2. 모든 파레토 최적의 자원배분은 적절한 초기분배를 갖는 경쟁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


이 후생경제학의 기본정리는 한 사회의 파레토 최적인 자원분배를 경쟁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즉 이제 리버태리언들은 정부의 개입이 없더라도 경쟁시장 메커니즘만 있으면 파레토 최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결과에 어떤 변화를 주고 싶다면 제2정리가 말하는 것처럼 정부가 적절한 초기세팅을 한 다음 뒤로 빠지고, 나머지는 경쟁시장에게 맡겨서 다시 파레토 최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국민경제에 있어 정부의 역할을 아주 작게 축소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후생경제학의 기본정리란 아주 강한 이론적 가정들, 즉 완전정보니 완전경쟁 같은 이상적 조건 위에서 성립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불완전 정보나 불완전 경쟁은 현실경제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파레토 최적 상태가 아니고, 여기에는 파레토 개선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게 됩니다.

자 이제 앞선 논쟁으로 돌아가 보지요. 제 글이 하는 이야기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시장은 완벽하지 않으며 때때로 시장 실패 상황이 발생한다.
2) 시장 실패가 일어난 상황에서는 정부 개입 같은 대안들이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잠재적인(potential) 가능성이 있다.
3) 1)과 같은 시장 실패 상황에서도 '시장이 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는 모든 일은 시장이 가장 잘 할 수 있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2)의 가능성을 사전 봉쇄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시장원리주의자라 부름직하다.

그 글은 기본적으로 시장실패를 전제로 논하는 글입니다. 우리가 중대한 위기나 시장실패에 직면했는데도, 평소와 동일한 기준으로 시장 이용을 옹호해야 할까요? 시장이 잘 돌아갈 때야 시장을 이용하는 메커니즘이 설득력이 있겠지요. 그러나 모기지 기반 채권에서 보듯이 시장이 사실상 소멸되거나, 은행들 사이에서 서로 돈을 빌려주지 않고 몸을 사리는 shadow bankrun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교조적으로 그런다는 건 앉아서 죽자는 소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순간에도 시장을 활용할 여지는 좀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시장 실패에 대응하는 정부 실패도 존재한다는 비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위기시에는 기준이 변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Kenneth Rogoff나 Gary Becker같은 사람들도 정부의 전액예금보호나 MMF 보장에 대해 '모랄 해저드 문제가 있다. 그러나 신경끊어라. 지금은 위기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즉 시장실패를 전제로 하는 글에 대해 반론이라고 리버태리언의 교리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야길 들고나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기와 다른 의견을 상상하지도 못하는 광신도들이 자신의 가치 판단을 의식하지 못하곤 합니다." 같은 이야길 들이밀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고 말해줄 수 밖에요.

어찌 되었든 리버태리언이 발끈하는 현상은 크루그먼이 묘사한 "정부의 대대적인 시장 개입을 노린 미끼로 간주하여, 다른 대안을 모색하면서 … 거부"라는 바로 그런 상황이지요. 사실 이런 식의 거부를 너무나도 많이 보았기 때문에, 불필요한 분란을 피한다는 차원에서라도 앞선 글의 마지막 부분에다가 장기적으로 시장에서 이탈해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상황이 해소되면 시장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재확인차 넣었던 것입니다.

리버태리언 사상과 관련된 철학적, 윤리적 논쟁은 깊이도 상당하고 쉽게 끝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만, 윤리/철학 논쟁을 피하고 시장실패와 관련된 지금 제기된 수준의 이야기에 대해서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짚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이에 대한 보론도 한 편 쓰도록 하지요.
by sonnet | 2008/10/30 23:16 | 정치 | 트랙백(1) | 핑백(1) | 덧글(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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