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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통화주의
2009/05/07   세 경제학자의 이야기 [21]
세 경제학자의 이야기
이 글에서는 세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글을 갖고 이야기를 풀어나가 볼까 한다.

우선 로널드 코스.

「사회비용의 문제」라는 논문에서 내가 추구한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접근이었다. 그 논문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정책에 관한 만족스런 관점들은 실제로 시장과 기업, 정부들이 정책에서 비롯되는 악영향을 어떤 식으로 해결하는지를 끈질기게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야 얻을 수 있다……. 경제학자들과 정책입안자들은 대체로 정부의 규제에서 나올 수 있는 이점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그러나 이 신념에는 정부의 규제를 줄여야 한다는 그 이상의 뜻은 담겨 있지 않다. 그것은 경계선을 어디다 그어야 하는지를 우리들에게 일러주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정부의 규제 정책은 그에 따르는 악영향을 실제로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하면서 얻은 결과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나와야 한다.” [1]


그리고 조지프 스티글리츠.

그린왈드-스티글리츠 정리 및 관련 정리들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방식이 있다. 첫째,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정리들은 몇몇 경우에 대해 잘 정의된 후생증진적(welfare-enhancing) 정부개입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이 정리들은 후생경제학의 기본정리가 제시하는 방법을 통한 효율적 분권화가 불가능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 셋째, 가장 중요한 점으로, 이 정리들은 시장이 자원을 배분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통념을 불식시킨다. 다시 말해 그러한 결론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일반적 정리란 없다는 것이다. …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린왈드-스티글리츠 정리가 정부개입이란 처방의 근거인 양 간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정리가 정부개입이란 처방의 근거가 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는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에 대한 더욱 세밀하고도 엄밀한 모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정부도 -아무리 자비롭고 합리적일지라도- 시장보다 나을 수 없다는 것이 경제학의 핵심적 정리라면 우리는 정부에 대한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그러나 그린왈드-스티글리츠 정리는 정부의 잠재적(potential) 역할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2]


재미있지 않은가.

이렇게 보면 코스도 자기 신념이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고, 스티글리츠도 비슷하다. 만약 그런 것이 있었다면 세상은 훨씬 간단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완전히 빈털털이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나름의 카드가 있다. 단 그들이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의 승리를 보장하는 카드라기 보다 각각 자신의 반대 진영의 약점을 찔러 궁극적 승리를 거부하는 반증에 보다 가까운 것이어서 문제일 뿐이다.

다른 한 편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는 흡사한 구석이 많다. 이들은 모두 일반론에서 출발해 각론을 재단하는 방식을 거부한다. 시장/정부의 경우 디테일을 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똑같이 조잡한 자기 진영 논리와 일선을 긋고, 그들에게 악용당하지 않기 위해 부연설명을 덧붙인다. 이번 사례에서 코스의 경우 그것은 "경계선을 어디 그어야 할지 알 수 없다"이고, 스티글리츠의 경우는 내 정리는 "정부 개입이란 처방의 근거로 간주되어선 안 된다"이다.

신념 그 자체를 갖고 입씨름을 벌이는 것은 굳이 하자면 언제든지 가능은 하겠지만, 전적으로 시간낭비이다. 믿음이나 신념을 어쩌란 말인가? 그건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개종의 대상일 뿐이다. 규범경제학이라는 범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범 자체에 대한 논쟁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런 탓이 크다. 사실 그런 분류는 많은 경우 어떤 답 없는 논의가 나왔을 때 아 그건 규범이잖아 하면서 한 켠으로 치워두고 실증으로 돌아올 때 아주 유용하게 활용된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경제학자인 밀튼 프리드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가 친구로 지낸 오랜 기간 동안, 앨런 그린스펀과 나는 대부분의 통화정책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였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빼 놓는다면. 나는 오랫동안 통화량 증가를 통제하는데 엄격한 준칙을 적용하는 것을 선호해 왔다. 그린스펀은 내가 틀렸다며 재량권이 더 바람직하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제 그가 연방준비은행 의장으로 18년간 재직하고 물러난 지금에 와서 보면 그의 실적으로 볼 때 그가 옳았다는 것에 내가 설득되었다는 것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다. 그의 경우엔 말이다. [3]

정부 재량권에 맞서 평생 투쟁한 밀튼 프리드먼의 인정인 만큼 이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 만년에 그는 자신의 통화주의가 잘 동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몇 차례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통화주의를 주창하게 만든 한 가지 배경이 된 프리드먼의 신념이 바뀌었을까? …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것의 좋고 나쁨이 실증적으로 검토될 수 있고 경제학의 내부 논리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처럼 비판을 통해 물리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의 본체가 경제학 밖에 존재하고 종교나 신념과 같은 방식으로 옹호되는 것이라면 프리드먼의 신념처럼 그래도 끄떡없을 것이다.

그래도 주의 깊게 세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 세 사람 사이를 묶어주는 공통적인 측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경제학의 논리이고, 코스가 역설했던 '문제에 대한 접근법'이다.



[1] Breit, William., Hirsch, Barry T.(Eds), Lives of the Laureates: Eighteen Nobel Economists (4th Ed.), MIT Press, 2004 (김민주 역, 『노벨 경제학 강의』, 미래의 창, 2008년, p.331)
[2] Stiglitz, Joseph E., Whither Socialism?, MIT Press, 1994 (강신욱 역, 『시장으로 가는 길』, 한울 아카데미, 2003, pp.68-69) (굵은 글씨 강조는 원저자)
[3] Friedman, Milton., "He Has Set a Standard", Wall Street Journal, 2006년 1월 31일
by sonnet | 2009/05/07 08:33 | 경제 | 트랙백 | 덧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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