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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토머스쿤
2009/05/02   경제학에서 교과서의 역할 [71]
경제학에서 교과서의 역할
요즘은 경제학에 대해 무슨 이야기가 좀 나오면 "『맨큐의 경제학』이라도 한 번 읽어보고…"라는 표현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것 같군요. 이 책은 오늘날 아주 인기있는 경제학원론 교과서이죠. 그런데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 전에도 폴 사뮤엘슨의 교과서가 반세기 동안 베스트셀러였고, 그 전에는 마셜의 교과서가 표준적인 교과서였던 식으로 경제학 교과서의 역사는 깊습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가도 거시, 미시, 화폐금융, 재정 이런 식으로 분야별로 계속 교과서들이 있지요.

정리하자면 경제학도들은 교과서를 갖고 공부를 합니다. … 아니 그렇게 당연한 이야길 왜 하느냐고 반문하고 싶은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중요한 이유는 교과서를 갖고 공부한다는 것은 비교적 새로운 방법론이며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학습방법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경제학도들은 기본적으로 '원전'을 읽는 방식으로 공부하지 않습니다. 폴라니, 하이에크, 베블런 이런 사람들은 주류경제학에 속하지 않으니 백 명에 한 명도 읽지 않거니와, 심지어는 주류경제학의 직계 선현들인 아담 스미스나, 리카도, 케인스 같은 기라성같은 경제학자들의 책조차 읽는 사람이 드뭅니다.

반면 유학을 공부한다고 생각해 보지요.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를 했다 한들 공자나 맹자의 책을 직접 읽지 않은 사람은 명함도 내밀 수 없습니다. 이런 학문은 원전강독이 학문을 습득하는데(그리고 학계의 일원이 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심지어 이런 분야는 번역도 허용되지 않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원래 쓰여진 언어로 읽어야 진짜 읽은 거라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교과서를 통해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 학문을 배우는 것과 아주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문제를 예민하게 인식한 사람이 토머스 쿤입니다.

이 에세이에서, ‘정상 과학’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과거의 과학적 업적들에, 즉 어떤 특정의 과학 사회가 그 사회의 향후 연구를 위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일정 기간 인정하는 업적들에 확고히 기반을 둔 연구를 말한다. 오늘날 그러한 업적들은 과학 교과서에서 상술된다. 이런 교과서들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유명한 많은 과학 고전들이 이와 비슷한 기능을 수행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Almagest)』, 뉴턴의 『프린키피아』와 『광학』, 라부아지에의 『화학』과 다른 많은 저작들이 두 가지 중요한 특성을 공유했다. 이들의 업적은 과학 활동의 경쟁적 양식을 멀리하는 집단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할 만큼 신선한 새로움이 있었다. 이와 동시에, 새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에게 모든 종류의 문제들을 허용할 만큼 충분히 개방되어 있었다.

이 두 가지 특징을 공유하는 업적들을, ‘정상 과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용어로서, 이제부터 ‘패러다임’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실제 과학 활동의(법칙, 이론, 응용, 기구를 포함하는) 몇 가지 사례들이 과학 연구의 일관된 전통을 창출하는 모델들을 제공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이런 실례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혹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혹은 뉴턴의) 역학’, ‘입자 광학’(혹은 파동 광학) 등과 같은 틀 아래에서 역사학자들이 기술하는 전통들이다.(10쪽)

패러다임에 대한 쿤의 이 첫 설명은 과학의 ‘문헌적’ 측면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왜냐하면 쿤은 [과학의] 고전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서 현재 교과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자연과학자들도 자신들의 분야를 정의하기 위해 고전을 읽지는 않는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교과서들, 기록물들이 패러다임이 되는 과학적 업적이 무엇인지 그것이 또한 어떻게 이해되고 수용되어 사용되는지를 규정한다.

Sharrock, Wesley W., Read, Rupert J., Kuhn: Philosopher of Scientific Revolution, Cambridge:Polity, 2002
(김해진 역, 『과학혁명의 사상가 토마스 쿤』, 사이언스 북스, 2005, pp.53-54)

이렇게 고전이 교과서에 수용되어 사용되는 현상을 코페르니쿠스를 예로 들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합시다.

다들 잘 아시듯이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 분야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체제를 대신하는 지동설 체제를 제기한 인물이지요.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라는 표현이 혁명적 변화를 뜻하는 상용구로 쓰일 정도로 이 변화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을 기리며 그의 지동설(?)을 배우고 있지요.

원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체제는 각종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주원(deferents), 주전원(epicycles), 대심원(erratics), 이심점(equants) 같은 복잡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었습니다. 실제 상황을 잘 반영하지 못하는 모델이었기 때문에 결과를 보정하기 위한 땜질식 요소를 많이 갖고 있었던 것이죠.

코페르니쿠스는 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체제를 보다 간단명료하게 고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지구가 움직일 수 있다"는 가정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주 주전원과 이심점을 제거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체제에도 주전원과 대심원은 그대로 있었으며, 30여 개에 달하는 보조적 원들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지동설과 크게 다릅니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의 원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 설명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배우는 게 아니라, 현대 천문학이 확립한 지동설, 즉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현대의 표준적 재해석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현대적 재해석이 볼 때 틀린 것, 필요없는 것 따위는 뭉텅이로 날아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경제학 교과서에서 아담 스미스나 리카도, 케인스에 대해 배울 때 우리는 주류경제학에 수용된 아담 스미스, 리카도, 케인스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과서를 통해 배운다는 것은 원전강독을 통해 배우는 것과는 달리 표준적인 해석, 즉 주류 학계의 해석으로 수렴되는 경향을 훨씬 강화합니다.

게다가 표준적인 교과서로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원전을 교과서 삼아' 공부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교과서라는 책의 특징 중 하나는 배운 것을 훈련시키는 연습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 과학 교육의 성격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미 분명해진 사실로서 과학자들은 결코 개념, 법칙, 이론을 추상적으로 그리고 그것들 자체로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지능적 수단들은 당초부터 과학자들에게 그 적용과 더불어 또는 적용을 거쳐서 드러나는 역사적·교육적 선행 단계에서 접하게 된다. 새로운 이론은 언제나 자연 현상의 어떤 구체적 영역에 적용시킴과 더불어 발표된다. 그런 적용들이 없었다면 수용할 만한 후보 이론조차 없었을 것이다. 일단 수용된 뒤에는 그런 똑같은 응용 또는 여타의 적용 예는 미래의 과학자들이 그것으로부터 자기 할 일을 배우게 될 교과서에 이론과 함께 실린다. 그것들은 단순히 장식이라든가 또는 심지어 증거 문서로서 교과서에 실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의 이론을 깨우치는 과정은 응용 연구에 의존하며 여기에는 연필과 종이를 갖고 또는 실험실에서 기기에 의해 실제 문제를 푸는 것이 둘 다 포함된다. 이를테면 뉴턴의 역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힘’·‘질량’·‘공간’, 그리고 ‘시간’과 같은 용어의 의미를 깨우치는 경우, 대개 이들 개념을 문제-풀이(problem-solution)에 적용시켜 관찰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지, 교재에 실린 불완전하지만 때로는 도움이 되는 정의들로부터 터득하는 것은 훨씬 적다.

실제 계산이나 실습을 통해 배우는 그런 과정은 전문화의 전수 과정을 통틀어 지속된다. 학생이 대학 신입생 과정으로부터 박사 논문 과정까지 밟아 감에 따라 그에게 주어지는 문제들은 점점 복잡해지며 전례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것들이 생긴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은 그 뒤에 따르는 독자적인 과학자의 생애에서 정규적으로 다루게 되는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전에 이루어진 성취에 바탕하여 가깝게 계속 모델화된다.

Kuhn, Thomas S.,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2nd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김명자 역, 『과학혁명의 구조』, 두산동아, 1992, pp.79-80)

즉 수학 교과서는 눈으로 아무리 읽어도 아는 것이 아니요. 빡세게 문제를 풀어보고 시험에 임해 문제를 풀어 맞출 수 있아야 진짜로 아는 것입니다. 경제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경제학 교육과정에서 원전에 대한 추상적이고 독창적인 해석 따위를 묻는 문제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문제를 풀 줄 알게 훈련시키는 것이 바로 교과서를 학습하는 것입니다.

쿤은 이런 것을 표준예(examplar)라고 부르며, 이것이 공유된 예제로서의 패러다임(Paradigm as Shared Examples)의 역할을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 요소에 대해서는 ‘패러다임’이란 술어가 언어학상으로나 자전적으로 꼭 들어맞을 것이다. 이것은 당초 내가 그 단어를 택하도록 이끌었던, 한 그룹의 공유된 공약의 성분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그 자체의 수명을 다한 것 같으므로, 여기서 나는 ‘표준예(examplar)’라는 말로 대치할 것이다. 이 용어의 사용에서 내가 의미하는 내용은, 실험실에서든 시험 문제에서든 또는 과학 교재의 장(章) 말미에서든 간에, 과학교육의 시작에서부터 학생들이 직면하게 되는 구체적인 문제풀이들이다. 그러나 이들 공유된 실례에는 최소한도 정기 간행물에서 볼 수 있는 기술적 문제-풀이의 일부가 추가돼야 하는데, 그것들은 과학자들이 교육 과정을 밟은 뒤의 연구 생활에서 당면하는 것들이며, 또한 과학자들에게 그들의 연구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를 실례로서 보여주는 것들이다. 전문분야 행렬의 다른 어떠한 성분보다도, 여러 벌의 표준예 사이의 차이는 그 과학자 사회에 과학의 미세 구조(fine-structure)를 제공해 준다.
[…]
공유된 예제로서의 패러다임은 이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새롭고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라 여기는 핵심 요소이다. 따라서 표준예는 전문분야 행렬의 어느 유형의 성분보다도 지대한 관심을 요구한다. 과학철학자들은 실험실이나 과학교재에서 학생들이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논의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으며, 그 까닭은 그런 것들은 학생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응용에서 실습만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학생이 우선 이론과 그것을 응용하는 몇몇 규칙을 익히지 않는 한, 학생은 문제를 전혀 풀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과학지식은 이론과 규칙 속에 내장되어 있다. 문제들은 그것의 적용에서 숙련되도록 제공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학의 인식적 함의를 그렇게 편재화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논지를 펴 왔다. 학생들이 문제를 많이 풀고 난 뒤에는, 더 많이 풀어내는 것에 의해 능란한 솜씨만을 키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 시작에서 그리고 그 뒤 얼마 동안, 문제를 푸는 것은 자연에 관한 일관성 있는 사항들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 표준예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학생들이 이미 배운 법칙과 이론은 경험적인 내용을 거의 지니지 못할 것이다.
[…]
과학도와 과학사학도 양쪽에 모두 친숙한 현상이 여기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과학도는 으레 그들 교재의 한 장(章)을 독파했고 완전히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章)의 끝에 실린 문제들을 푸는 데 있어서는 여러 군데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한다. 통상적으로 그런 난점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해결된다. 학생은, 자기 교수의 도움을 받든 받지 않든 간에, 그의 문제를 이미 그가 부닥쳤던 문제처럼 다루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유사성을 파악하고 구별되는 두 가지 이상의 문제들 사이의 유비 관계를 파악하게 되므로, 학생은 기호를 서로 관계짓고 그 것들을 이전에 효과적이라고 증명된 방식으로 자연에 적용케 할 수 있다.
[…]
어느 정도의 문제-풀이를 완결하고 나면, 학생은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그에게 닥치는 상황을 그 전문가 그룹의 다른 구성원들과 같은 경험 형태로서 다루게 된다. 그 학생에게는 그런 상황들이 그의 수련이 시작되었을 때 당면했던 것과는 더 이상 동일하지가 않다. 그 기간 동안에 그는 사물을 보는 데 시간의 흐름과 그룹이 승인한 방식에 동화된 것이다.

Kuhn, 같은 책, pp.262-263

이처럼 잘 확립된 교과서와 연습문제에 의한 학습을 성공적으로 거친 학생은 주류 학계가 해당 분과 학문을 대하고 연구하는 방법론에 자연스럽게 동화됩니다. 많은 경제학원론 교과서들은 서두에 "외부인들은 경제학자들의 의견이 크게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많은 핵심적 부분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는 이야길 언급하곤 합니다. 경제학을 공부한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비중이 늘어나며, 그리고 특히 경제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 더 그렇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어떤 주류 학계의 패러다임 내지는 컨센서스에 동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패러다임 이야기가 나왔으니 쿤이 컬쳐쇼크를 받고 패러다임 개념에 착안하게 된 계기를 본인의 입을 빌려 들어 보도록 하지요.

이 에세이의 최종 단계는 행동과학연구소(Center for Advanced Studies in the Behavioral Sciences)의 초청을 받아 1958~59년을 보낸 것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이제 말하고자 하는 문제들에만 온통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로 사회과학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생활을 함으로써, 그런 사회와 내가 쭉 훈련받아 온 자연과학자들의 사회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미처 예기치 않았던 문제들을 겪게 된 것이었다. 특히 정당한 과학적 문제와 방법의 본질에 대해 사회과학자들 사이의 공공연한 의견 대립이 대단한 것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과학의 역사와 그러한 인식은 둘 다 나로 하여금,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회과학 분야의 동료들보다 그런 질문에 대한 보다 확고하고 영속적인 답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천문학, 물리학, 화학 또는 생물학의 과학 활동은 오늘날의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이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게 보통이다. 이러한 차이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말미암아 나는 ‘패러다임(paradigm)’이 라 그 때부터 불러 온 것이 과학적 탐구에서 지니는 역할에 관해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들 패러다임은 어느 일정한 시기에 전문가 집단에게 모형 문제와 풀이를 제공하는 보편적으로 인식된 과학적 성취들이라고 간주한다. 내 수수께끼의 조각이 이렇게 잡히게 되자, 이 에세이의 줄거리는 대번에 뚜렷해졌다.

Kuhn, 같은 책, pp.12-13


그런데 과학자들은 어떻게 "정당한 과학적 문제와 방법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생략하고 그냥 연구를 할 수 있을까요?

효율적 연구는 과학자 사회(scientific community)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었다고 생각하기 이전에는 개시되는 일이 거의 없다 :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적 실체(entity)들은 무엇인가? 이들 실체들은 서로 간에 어떻게 작용하며 인간의 지각과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러한 실체에 대해서 합법적으로 어떤 질문이 제기되며 풀이를 찾는 데 있어 어떤 기술이 적용되어야 하는가? 적어도 성숙 단계의 과학에서는 이들 질문에 대한 해답[또는 해답의 바람직한 대리 격(格)]이 전문적 활동을 위해 학생들을 준비시키고 자격을 갖추게 하는 교육적인 전수(傳受)에 확고하게 내재해 있다. 그런 교육은 철저하고도 확실하기 때문에, 이 해답들은 과학 정신(scientific mind)에 심각한 위력을 나타내게 된다. 그것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상과학 연구 활동의 특유한 효율성에 대해서 그리고 어느 주어진 시기에 그것이 진행되는 방향에 대해서 양쪽 다 잘 설명해 준다. III절과 IV절 그리고 V절에서 정상과학(normal science)을 검토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그러한 연구를 가리켜, 자연을 전문 교육에 의해 제공된 개념의 상자들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격렬하고도 헌신적인 시도라고 묘사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것들의 역사적 기원에서 그리고 그 뒤에 따르는 발전에서의 임의성의 요소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런 상자들 없이 연구가 과연 진행될 수 있는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의심하게 될 것이다.

[…] 정상과학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필연적으로 그들의 시간을 거의 모두 바치는 활동인데 이것은 세계가 무엇인가를 과학자 사회가 알고 있다는 가정에 입각한 것이다. 과학 활동에 있어서 성공의 대부분은, 필요하다면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 사회가 그 가정을 기꺼이 옹호하려는 의지로부터 나온다.

Kuhn, 같은 책, pp.23-25

쿤이 제시하는 답은 교과서와 연습문제 풀이로 집약되는 빡센 도제교육 과정을 통해 차세대를 주류 학계의 패러다임에 동화시킴으로서 그런 문제를 갖고 처음부터 다시 왈가왈부할 필요를 없앤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추상적이고 아무리 토론해도 결정적인 답이 잘 나오지 않는 종류의 질문이기 때문에, 이것을 방치하면 맨날 원론적인 논쟁을 하느라 학문 연구가 크게 방해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에 대해 학계의 주류설을 확고히 한 다음에 모든 멤버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디테일한 심화연구들을 추진하는 거대한 분업을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공통된 기반에 입각한 딴 사람들의 연구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연구효율이 비약적으로 향상됩니다. 쿤은 이것이야말로 성숙한 과학의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쿤이 ‘정상’ 과학이란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하는 일이라고 말했을 때(10쪽), 그것은 ‘기반들에 대한 동의’가 이미 이루어진 환경 안에서의 작업과, 그러한 기반들에 대해 동의하는 일이 성숙한 과학의 특질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패러다임’과 ‘정상 과학’의 개념은 ‘정상’ 과학을 ‘비정상(extraordinary)’ 과학(예를 들어 혁명적 과학)과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이런 기반들에 대한 동의가 있는 과학과 그렇지 못한 과학 간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명심해야 할 첫 번째 차이는,

(a) 상당히 많은 문제가 해결되어 있는 연구 영역, 자연, 주요 과제, 과업에 대한 지배적인 방법론에 대한 일종의 광범한 합의가 존재하는 영역과
(b) 문제에 대한 해법이 있다고 해도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과업 간의 차이다.

지난 300년 동안의 물리학과 사회학 간의 대조적 차이는 쿤이 마음에 두고 있는 좋은 사례다. 물리학에는 ‘혁명적인’ 대격변이 있어 왔지만 이런 혁명들 사이에는 절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을 아우르는 안정되고 폭넓게 공유된 거점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사회학의 경우는 달랐다. 200년 전 혹은 그 이전에도 사회학은 통일된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패러다임’의 개념은 우선 17세기 이후 물리학과 같은 과학과, 사회학 같은 자칭 과학 간의 대조를 보여 주는 데 사용하려고 의도된 것이다.(『구조』, 15쪽)

쿤이 과학 실제(practice)라는 관점에서 볼 때 과학과 다른 학문과 가장 큰 차이가 날 때는,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의 정당성이나 합리성을 주장할 필요에 관심을 돌리지 않고 경험적인 연구에 모든 시간을 쏟을 수 있도록 과학의 전제와 실제에 대한 광범위한 동의가 있을 때 뿐이다.

Sharrock & Read, 같은 책, pp.47-48

그럼 주류설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반문이 들어올 수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쿤은 기존 주류설에 모순이 너무 많이 쌓이게 되면 가끔 한 번씩 뻥 터트려 주고 주류설을 업데이트하는 게 보통이다라고 답합니다. 이것이 쿤이 말하는 소위 '과학혁명'입니다. 즉 맨날 원론적인 논란을 벌이면 소모적이니까 몰아서 가끔씩만 한다는 이야기이지요.


이제 한 가지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쿤의 논의는 성숙한 자연과학, 즉 '정상과학'(normal science)에 해당되는 것인데 사회과학에 속하는 경제학에 적용하는 데는 문제가 있을 수 있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쿤 본인도 자연과학만 하다가 사회과학과 부딪혀 보고 컬쳐쇼크를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으니까요.

경제학이 정상과학에 도달했느냐 하는 평가는 꽤 까다로운 질문이고 논란의 소지가 많은데, 짧게 말하면 저는 그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아직 도달하진 못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정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과학은 자연과학보다는 패러다임(내지는 패러다임까지는 못 갔더라도 학계 내부의 컨센서스)이 약할지 몰라도, 전반적으로 철학 같은 다른 학문분야보다는 훨씬 잘 조직된 컨센서스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학은 정치학이나 사회학 같은 사회과학의 다른 분과학문에 비해서도 이러한 조직이나 내적 일관성이 발달된 편입니다. 즉 경제학 산하의 세부 분과학문들 간에 방법론 상의 공통점은 정치학이나 사회학보다 훨씬 큽니다.

둘째로 경제학은 앞서 길게 살펴본 교과서와 연습문제 풀이에 입각한 학습법이 사회과학 중에서 제일 깊게 진행된 편에 속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는 뒤집어서 정치학이나 사회학이 경제학보다 원전강독을 보다 많이 할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 교과서-연습문제 풀이 학습법이야말로 패러다임을 공고화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학파의 역할에 대해서도 잠깐 짚어 보겠습니다.

이들 성격 가운데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과학 분야의 발달에서 패러다임-이전 시대로부터 패러다임-이후 시대로의 이행이라고 내가 앞에서 지칭했듯이 그러한 이행은 II절에서 간략히 설명했던 바로 그런 변환이다. 천이가 일어나기 전에, 여러 갈래의 학파들은 주어진 분야의 지배를 놓고 겨루게 된다. 이후 몇몇 주목할 만한 과학적인 성취의 자취를 따라서 다수의 학파는 대폭 줄어들어 보통 하나로 수렴되며, 보다 효율적인 양식의 과학 활동이 시작된다. 효과적 방식의 과학 활동이란 일반적으로 비전(秘傳)의 성격을 띠며 수수께끼-풀이(puzzle-solving)를 지향하는데, 이는 그 구성원들이 그 분야의 기초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때에만 가능하게 되는 한 그룹의 연구를 뜻한다.

Kuhn, 같은 책, p.252

즉 패러다임이 정립되면 학파가 하나로 수렴되거나 적어도, 공통의 가정들을 공유하는 주류학파 속의 소분파처럼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약

결국 ‘확립된 교과서에 의한 비역사적 교육과 연습문제 풀이’는 학계가 신입을 어떤 특정 방향으로 집중적으로 훈련시켜 학계의 역량을 한 방향에 결집시켜 심화연구능력을 확보하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서로 상충되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주제의식, 방법론도 제각각)를 하는 고전을 다양하게 읽고, 학생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학파에 소속될 수 있어서는 이런 식의 광범위한 동의라는 것은 형성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동의를 전제로 좁고 깊은 연구를 집중적으로 해나가는 것도 불가능하겠지요.

쿤은 이런 심화연구능력을 만들어내는 도구로 교과서의 역할에 주목하는데, 교과서와 연습문제 풀이가 그러한 통일된 패러다임을 전수하는 매개체로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은 이런 방법론을 깊숙히 받아들인 학문입니다.




보론 1.

자 이제 leopord 씨가 의문을 제기했던 '왜 그렇게 주류경제학을 강조하는가'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럼 이제 주류경제학에 대한 오스트리아 학파, 특히 하이에크의 스스로 자초한 고립에 대해 좀 보충을 해 보겠습니다.

20세기 전반의 중요한 경제학 논쟁 중 하나였던 사회주의 계산 논쟁 시절에 하이에크는 신고전파의 완전정보모형이 현실을 잘 모사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내놓습니다. 이는 오늘날 주류경제학 내부에서 각광받는 분과 중 하나인 정보경제학의 표준적인 사고방식과 흡사한 것입니다. 대단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계승이 되었다면 말이지만...

그런데 오스트리아 학파는 이 생각을 발전시킨 경제적 모형을 만들어 연구하자는 제안을 거부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시장경제는 유기적 과정이라 단순한 수식으로는 묘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것을 끝까지 이빨추상적인 묘사로만 다루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모델의 정교화도 실증연구도 하지 않습니다.

이러다보니 오스트리아 학파의 생각은 모델이 없으니 생각이 정교화될 수도 없고, 검증될 수도 없게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류경제학의 교과서-연습문제 풀이 교육과정에 들어갈 방법이 없어져 버립니다. 한편 주류경제학계은 후에 이와 비슷한 생각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모델도 있고 보다 정교화된, 그리고 압도적인 쪽수를 바탕으로 방대한 실증연구를 덧붙인 오늘날의 정보경제학으로 키워 냅니다.

오스트리아 학파가 적어도 주류 학계와 연구결과를 호환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일을 했더라면 그들의 위상은 지금과는 크게 달랐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측면에서 세상이 그들을 왕따시켰다기 보다는 그들이 세상을 왕따시킨 거라고 봅니다.


보론 2.

주류경제학 일부의 그런 태도는 정치철학 분야에서 '조잡한 공리주의'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성공'의 기준 자체가 해석자의 가치관에 따라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롤스 정도는 아실테니 묻지요. 어떤 것을 '정책의 성공'이라고 봐야 하는지요? 효용 극대화? 파레토 개선? 최소극대화? 효용은 뭘로 측정합니까? 순전히 경제적 소득? 평등의 정도에 따른 주관적인 행복도? '시장주의'라는 일반론을 주제로 삼으면서 이런 쟁점에 침묵하고 자의적으로 선택된 가치관을 전제하는 것은 자기 성찰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산마로)

제가 위에서 설명한 대로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논쟁이 잘 벌어지지 않는 것"은 주류경제학계에서 훈련받은 전문가들끼리 논쟁하는 경우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학계의 컨센서스를 깨고 각 개념의 정의부터 새로 논쟁하자 식으로 나오면 논쟁이 산으로 가서 디테일한 분석은 시작도 못하고 끝나게 되니까요.

앞서 예시를 들었던 은행부실자산의 처리방법 논쟁 같은 것을 실제로 관찰해 보시면 그렇게 정의부터 새로 정하고 출발하자는 식의 접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반면, 제가 말한 것 같은 실용적인 이유에 대한 논란이 대부분임을 쉽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건 주류경제학 일부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견해는 틀린 겁니다.
by sonnet | 2009/05/02 12:36 | 경제 | 트랙백 | 핑백(1) | 덧글(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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