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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체르노빌
2011/03/19   원전 사고 관련자료 [6]
2011/03/17   체르노빌의 교훈 [47]
2011/03/16   소비에트의 기상 [65]
원전 사고 관련자료

국제원자력기구: 체르노빌 보고서
Chernobyl Forum Expert Group 'Environment'. “Environmental Consequences of the Chernobyl Accident and Their Remediation: Twenty Years of Experience.” 2006

쓰리마일섬 사고 조사위 보고서
Kemeny, John G. et al. “Report of The President's Commission On The Accident At Three Mile Island.” Oct. 1979.



by sonnet | 2011/03/19 19:43 | 과학기술 | 트랙백 | 덧글(6)
체르노빌의 교훈
체르노빌의 교훈
필자: David E. Hoffman
날자: 2011년 3월 14일

일본에서 일어난 무시무시한 사건들의 전개 - 엄청난 지진, 그리고 해일 - 는 이번 핵위기를 1986년의 체르노빌 사건과 구별 짓는다. 체르노빌 사고는 자연재해의 결과가 아니라 사람의 손에 의해 일어났다. 그 원자로는 보호용기가 없게 설계되어 있었고, 일단 폭발하게 되자 방사능 잔해가 공기 중으로 흩뿌려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번 일본의 핵위기는 이 정도의 위험에 도달한 것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다른 이유에서, 여전히 체르노빌은 숙고해볼 가치가 있다. 체르노빌 사고는 이와 같은 순간에 완전한 투명성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체르노빌은 혼란과 비밀로 점철된 소련의 총체적 체제에 대한 반면교사였다. 체르노빌은 소비에트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마음속에 글라스노스트(공개)의 가치를 굳게 만들었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몇 달 동안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되물어야만 한다. 우리는 체르노빌에서 교훈을 얻었던가?

체르노빌은 1986년 4월 26일 오전 1:23에 폭발했다. 나는 내 책 “The Dead Hand"에서, 이 재앙을 만들어냈던 사건들과 그 여파를 상세히 다룬 바 있다.

이 폭발은 원자로 4호기의 지붕을 관통하는 구멍을 냈고, 뒤이어 화재가 발생했다. 몇몇 방사성 잔해는 현장 근처에 떨어졌지만, 방사성 물질들은 바람을 타고 유럽 전역으로 흘러갔다. 초기 오염만 해도 하나의 악몽이었지만, 그 뒤를 이어 후속타가 밀려들었다. 흑연 노심에 불이 붙었고 10일 동안 쉬지 않고 타면서 더욱 위험한 물질들을 대기 중으로 뿜어냈다.

이 재난이 발생한 후 여러 시간 후, 흑연 노심이 여전히 불타는 동안, 에너지성 차관 알렉세이 마쿠킨으로부터 모스크바의 중앙위원회에 “긴급 보고”가 제출되었다. 그는 체르노빌이 처음 건설될 당시에 우크라이나 에너지성 장관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이 보고서는 4월 26일 오전 1시 21분 원자로 상부에서 폭발이 일어나 화재를 일으키고 지붕 일부를 파손시켰다고 언급했다. 그리고는 “3:30, 이 불은 꺼졌다.”, 이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이 원자로의 활성구역을 냉각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으며 주민들의 철수령은 필요치 않다고 이 보고서는 말했다. 마쿠킨의 보고서 거의 모든 곳이 잘못되어 있었다. 원자로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으며, 냉각은 되고 있지 않았고, 주민들은 당장 철수시켜야만 했다. 이 보고서가 말하지 않은 것은 더욱 나빴다. 방사능 탐지기가 고장났으며, 소방관과 다른 사람들은 적절한 보호 장비 없이 현장에 투입되었고, 관리들이 철수에 대해 논의를 하긴 했지만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


고르바초프의 첫 반응은 느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보가 결여된 원인은 소비에트 체제 그 자체에 있었다. 이 체제는 반사적으로 진실을 묻어버렸다. 각급 당국은 지휘체계를 따라 거짓말을 올려 보내고 또 내려 보냈다. 인민들은 무지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희생양들을 찾아냈다. 고르바초프는 이 노쇠해진 체제의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그의 가장 큰 잘못은 진실을 은폐하는 그런 관행을 당장 깨버리지 않은 데 있었다. 그는 느리게 반응했고, 이 정력적인 사나이로서는 놀랍게도 한동안 마비상태에 있었다. 그는 그가 진실을 필요로 할 때, 재난 현장이나 원자력 발전에 책임을 진 관리들로부터 자신이 필요로 하는 진실을 얻어낼 수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스웨덴이 방사능의 징후를 잡아냈고, 4월 28일 정오에 소련에게 이 문제를 들이댔다. 이때까지, 모스크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날 저녁 9시, 소련 언론들은 이 사태의 파국적인 본질을 전혀 전달하지 못할 정도로 간단명료한 크레믈린의 성명을 배포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해 원자로 1기에 손상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발생한 결과들을 수습하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으며, 부상자는 치료를 받고 있다. 정부 [대책]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다음날인 4월 29일, 고르바초프는 다음 정치국 회의를 소집했다. 이날은 외부세계에 뭐라고 말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더 있었다. 정치국은 새로운 성명을 발표하기로 결정했는데, 역사가 드미트리 볼코고노프의 말을 빌리자면 이 성명서는 “창고에서 일반적인 화재가 발생했을 때 사용되었을 법한 말투”로 되어 있었다.

이 성명은 사고가 원자로 건물의 일부와 원자로 그 자체를 손상시켰고, 일정량의 방사성 물질의 유출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두 명이 사망했으며, “현재, 발전소와 그 인근의 방사선 수준은 안정되어 있다.”고 하였다. 사회주의 형제국들에게 제공된 판본에는 한 문단이 추가되었는데, 소련 전문가들이 체르노빌로부터 서쪽, 북쪽 남쪽을 향해 방사능 물질이 퍼져나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오염의 수준은 허용된 기준치보다 다소 높다, 그러나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조치가 취해져야 할 정도는 아니다.”


체르노빌의 소방관들과 다른 사람들이 현장에서 영웅적으로 싸우고 있는 동안, 소련의 국가 지도자들은 어리둥절한 채 있었다. 인근 프리퍄트 시의 주민 소개는 폭발 발생 후 36시간이 지나서야 시작되었다. 최종적으로 116,000명이 소개된 더 넓은 지역에 대한 제2단계 철수는 5월 5일까지 개시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바람이 자신들을 향해서 불어오는 데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에서 메이데이 퍼레이드가 평소처럼 진행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는 크레믈린 문서고에서 블라디미르 구바레프라는 한 언론인의 놀라운 보고서를 찾아냈다. 그는 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의 과학면 편집자였다.

구바레프는 핵분야 간부들 사이에 좋은 연줄을 갖고 있었기에, 체르노빌 사고가 발생한 직후 이 사고에 대해 듣고는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측근이자 신사고의 대표자였다. 하지만 야코블레프는 그에게 “그 일은 잊으시오. 쓸데없이 끼어들지 마시오.”라고 말했다고 구바레프는 회고했다. 야코블레프는 그 어떤 기자도 현장을 보지 못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구바레프는 끈질겼고, 매일같이 야코블레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코블레프는 결국 구바레프를 포함한 일군의 기자들이 체르노빌에 갈 수 있도록 허가했다. 구바레프는 물리학 학위를 갖고 있었으며 희곡과 책도 썼다. 그는 5월 4일에 도착했다가 5월 9일에 돌아왔다. 야코블레프에게 제출한 그의 개인적 보고서는 무질서와 혼란을 충실히 묘사했다. 폭발이 일어난 한 시간 후, 방사능이 퍼져 나오고 있음은 분명했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어떤 비상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개인방호장비도 없이 병사들이 위험 지역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그런 걸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헬리콥터 조종사들에게도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상식이 요구된다, 그릇된 용기 말고.”라고 그는 썼다. “전체 민방위 체제가 통째로 마비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심지어는 동작하는 방사능 측정기도 없었다.” 구바레프는 말했다. “현지 관헌들의 굼뜬 대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피해자들을 위한 옷과 신발, 속옷 등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모스크바로부터의 지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에프에서 정보의 결여는 공황을 일으켰다. 인민들은 외신 보도를 전해 들었지만 자기네 공화국 지도자들로부터는 단 한마디의 안심시키는 말도 듣지 못했다. 이러한 침묵은 며칠 후 당 지도자들의 자녀와 가족들이 도망쳤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더 큰 공황을 만들어냈다.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구바레프는 자신이 쓴 보고서를 야코블레프에게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고르바초프에게 올라갔다.

고르바초프는 마침내 전국에 방영된 TV 연설을 통해 이 재난에 대해 직접 이야기했다. 5월 14일, 사건 발생 후 2주일하고도 반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의 연설은 이 재난의 원인을 비켜갔다. 그리고 “우리가 신뢰할 만한 초기 보고를 받는 즉시” 인민들에게 경고를 전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고르바초프는 크레믈린이 정보를 틀어막고 있는 동안 수만 명에 달하는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초기보고 같은 황당한 비난이 서방으로부터 쏟아지는 데 대해 참을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는 또한 개혁가로서의 그의 진정성에 대한 비판을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체르노빌 사건 후 몇 달이 지나서, 고르바초프는 드디어 그가 초기에 취했던 타성적인 태도를 떨쳐버리기 시작했다. 7월 3일의 정치국 회의에서, 그는 핵분야 간부들에게 분노를 터트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30년간 당신들은 우리에게 모든 게 안전하다고 말해왔소. 그리고 당신들은 우리가 그것을 하늘의 말씀인양 받아들이게 했소. 이것이 바로 우리 문제의 뿌리요. 각 성청과 연구소들은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고, 그들이 재앙을 이끌었소. 그리고 여태까지도 나는 당신들이 이번 사태에서 교훈을 배웠다는 어떤 징후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소. … 모든 것이 중앙위원회에게 비밀로 숨겨지고 있소. 당 간부들은 이 분야를 들여다본 적이 없소. 원자력 발전소를 어디에 지을지에 대한 결정조차도 우리 당 지도부에 의해 정해진 적이 없소. 혹은 어떤 원자로를 채택할지에 대한 결정도 말이요. 이 체제는 맹동주의, 아첨꾼, 겉치레, …, 비판자 박해, 과장, 정실주의, 종파적 관리체제로 가득 차 있소. 체르노빌이 일어났는데, 그 누구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소. 민방위도 보건부서도, 심지어는 최소필요량의 방사능 측정기도 없었단 말이오. 소방대는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소! 이튿날, 인민들은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결혼식을 가졌소, 어린이들은 밖에서 뛰어놀고 말이오. 이 경보 체제는 좋지가 못해! 그 폭발 후에 구름이 생겼었소. 그게 어디로 움직였는지 관측한 사람 있었소?


이 책에서 내가 결론내린 것처럼, 체르노빌 참사가 일어난 후 고르바초프는 격노했지만 당이나 체제 자체에 비난의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고 원자로 운전요원들 같은 희생양을 찾았다. 그들은 후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체제의 정통성에 도전하지 않으면서도 이 체제의 무기력증을 털어버리고자 했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진실은 체르노빌이 소비에트 연방이 어떻게 안에서부터 썩어들어 갔는지를 엿볼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 재앙을 이끌어낸 실수들, 무관심, 잘못된 설계는 [소련의] 다른 많은 것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볼코고노프는 “제4 블록에서 불타는 거대한 크레이터는 이 나라의 깊은 상처를 드러냈다”고 썼다. 그는 체르노빌을 “소련 체제를 위해 울리는 조종”이라 묘사했다.

마침내 체르노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게 되면서, 글라스노스트, 또는 [정보의] 공개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강조는 무게를 더해갔다. 7월 3일의 정치국 회의에서, 그는 선언했다. “사고의 원인을 설명할 때나 실무적인 문제를 다룰 때를 막론하고,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인민들에게 진실을 감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우리는 답을 회피할 수 없소. 사안을 비밀로 유지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해치게 됩니다. 공개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이익이요.”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든지 간에, 그에 대해 [숨기지 않고] 공개를 계속해 나가는 것은 커다란 진전이다. 사반세기가 흐른 지금에도.
by sonnet | 2011/03/17 23:39 | 정치 | 트랙백 | 덧글(47)
소비에트의 기상
Last Defense at Troubled Reactors: 50 Japanese Workers (NYT, 2011년 3월 15일)
이 기사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현장요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 끝부분에 나오는 체르노빌의 사례가 매우 흥미로와서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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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원전측이 제일원전의 각 노동자들의 피폭량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렇게 해서 수백명의 자원자들이 교대로 언제나 현장에 50명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체르노빌은 약간의 위안을 제공할 것이다.

체르노빌 현장을 치우기 위해서, 소비에트 연방은 [연방 산하의 15개] 공화국 각각에 인구비례로 노동자를 차출시켜 노동자 개개인의 피폭량을 제한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들은 60만 명을 투입해 체르노빌 현장에 흩어진 방사능 폐기물들을 치우고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을 지었습니다."라는 것이 이 주제를 연구한 밴더빌트 대학 의대의 존 보이스 박사의 설명이다.

"해체자"liquidators로 알려진, 그 노동자들은 제한된 시간동안만 오염지역에 투입되었다가, 그들의 피폭량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퇴각했다.

"오늘날까지도 부작용의 증거는 별로 없습니다."라고 보이스 박사는 말한다.

"그건 상당히 영리한 결정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투입해 각각 조금씩만 피폭되게 하는 것 말입니다. 백혈병이 걸릴 위험성이 좀 있긴 합니다만, 그것도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으음… 아무리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어도 저런 데 가겠다는 자원자를 60만 명이나 모집할 수 있는 나라는 민주주의 체제 중에선 없을 것 같은데. 역시 동원의 강자 소볘트 연방.
by sonnet | 2011/03/16 19:43 | 과학기술 | 트랙백 | 핑백(1) | 덧글(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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