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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지아울하크
2011/05/22   지아 장군의 마드라사 건립 전략 [33]
지아 장군의 마드라사 건립 전략
후에 탈리반을 키워내는 곳으로 유명해진 파키스탄의 마드라사는 그저 종교교육을 하기 위해 탄생한 곳이 아니고, 지아 장군의 국가전략에 따라 대대적으로 신설된 것입니다. 파키스탄은 건국 후 자기보다 훨씬 큰 인도와 싸워 3전 3패를 하고 영토의 커다란 부분[방글라데시]까지 잃게 되면서, 도저히 세속적인 방법만 갖고는 인도와 맞설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믿음의 힘을 빌려 모자라는 국력을 보충해보겠다는 구상을 하게 된 것이죠.

이 나라는 이슬람의 이름으로 건국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자국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파키스탄의 건국자, 모하메드 알리 진나는 세속적인 도시 무슬림 지식인 운동 출신이었다. 그들은 이슬람을 문화의 한 원천으로 보았지만, 신앙의 개종이 필요하다거나 정치질서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진나는 파키스탄에 이슬람적 가치의 색채를 더한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헌법이 자리 잡게 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이 나라가 너무 어렸을 때 죽고 말았고, 그의 후계자들은 파키스탄의 산적한 문제 - 분단된 영토, 취약한 중산층, 다양한 종족 전통, 아프가니스탄에 접한 통치불가능한 서부 국경, 적대적인 인도, 엄청난 빈부 격차 -를 극복하지 못했다.

지아가 군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면서 그는 개인의 종교적 믿음을 군대에 있는 다른 동료들에 비해 더 강조했다. 그는 또한 파키스탄은 정치 이슬람을 조직원리로 수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이슬람에 기반해 세워졌소.” 또 그는 자기 나라를 이스라엘에 비견했다. “그들의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그 나라의 힘의 원천이오.” 이슬람이 없다면, “파키스탄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오.”

(…) 또한 지아는 파키스탄군 장교단이 개인적으로 경건한 신앙심을 가질 것을 강력히 장려했는데, 이는 과거와는 크게 달라진 점이었다. 그는 젊은 아프간인과 파키스탄인들에게 이슬람 정신을 가르치고 그들 중 일부를 반공 지하드를 위해 준비시키기 위해, 아프간 국경을 따라 수백 개의 마드라사(종교학원)를 건립하고 재정적으로 후원하였다.

국경지대의 마드라사들은 공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에 이슬람 이데올로기의 철책선을 형성하였다. 차츰 지아는 지하드를 전략으로서 옹호하게 되었다. 그는 1980년대 초에 아프간 국경지대에 모여든 이슬람 전사들의 무리를 비밀 전술병기로 보았다. 그들은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신앙심은 신을 믿지 않는 소련 점령군의 우월한 화력을 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레이건 대통령에게 “아프간 젊은이들은 필요하다면 맨손으로라도 소련 침공군과 맞서 싸울 것이오.”라고 장담하였다.

그는 카불의 공산주의자들이 분쟁의 대상인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국경지대를 놓고 파슈툰 독립운동가들을 부추기지 않을까 우려했다. 파슈툰 족은 아프가니스탄의 지배적인 종족집단이었지만, 파키스탄에는 아프가니스탄에 사는 것보다 더 많은 파슈툰 족이 살고 있었다. 독립운동이 성공하는 날에는 파키스탄이 한마디로 산산조각날 판이었다. 소련이 침공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약 백만 명의 아프간 난민이 파키스탄으로 넘어와 사회불안을 야기했다. 소련과 아프간 비밀경찰은 파키스탄 영내에서 테러 작전을 벌이기 시작해, 멀리는 내륙의 신드 주까지 진출했다. 그곳은 부토 집안의 거점이어서 반 지아 운동의 온상이었다. KGB의 아프간 요원들은 카라치, 이슬라마바드, 페샤와르, 퀘타에 거점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교수형당한 부토의 아들 중 하나인 무르타자와 손을 잡고 그가 파키스탄 여객기를 하이재킹하도록 도왔다. 지아는 인도 정보부도 관여하고 있을 거라고 의심했다. 만약 소련의 후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이 아프가니스탄의 통제권을 장악한다면, 파키스탄은 북쪽과 서쪽에는 소련, 동쪽에는 인도라는 두 적대적인 정권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될 판이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지아는 소련을 꼼짝 못하게 묶어두기 위해 하이버 패스 저편까지 아프간 지하드를 전파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슬람 원리에 입각해 싸우는 전쟁은 국내에서 지아의 정치적 입지를 개선시키고 파슈툰 민족주의의 분출을 딴 곳으로 돌리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Coll, Steve. Ghost Wars: The Secret History of the CIA, Afghanistan, and Bin Laden, from the Soviet Invasion to September 10, 2001. 1st ed. Penguin Press HC, The, 2004. pp.60-62

파키스탄도 그렇고 사우디아라비아도 그런데, 그 나라들은 옛날에 정치이슬람운동이 강했다가 조금씩 문명개화세속화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케말이나 나세르가 뜨던 시절엔 정치이슬람운동이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습니다.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근대화를 희망하면서 이슬람부흥운동을 복고적이라고들 생각했었죠. 하지만 정치 이슬람은 20세기 중후반에 이런저런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강화되고 또 성장하면서 과거보다 훨씬 강해졌습니다. 그에 비례해 아랍사회주의 같은 세속주의 운동은 힘을 잃어 갔죠. 저는 개인적으로 달이 차면 기울듯이, 새로운 세속주의 운동의 물결이 등장하면서 정치이슬람이 도로 서서히 쇠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아랍의 봄'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건인데, 그것이 정말 제가 예상하는대로 흘러갈지는 한 10년 정도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by sonnet | 2011/05/22 03:16 | 정치 | 트랙백 | 덧글(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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