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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중재
2020/09/10   삼방일량손(三方一兩損) [7]
삼방일량손(三方一兩損)
개입 정책의 이상 에서 셀프 트랙백


‘삼방일량손’은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얘기다. 어느 날 미장이가 세 냥이 든 돈주머니를 주웠다. 미장이는 주머니 안에 같이 들어 있던 도장을 보고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고는 주인인 목수에게 돈을 주려고 찾아갔다. 그런데 목수는 그 돈은 이제 자기 것이 아니라며 도로 가지고 가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미장이도 “돈이 탐나서 돌려주러 온 게 아니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오오카에 치젠이라는 뛰어난 재판관이 두 사람을 불러들였다. 그런 다음 재판관은 자기 품에서 한 냥을 꺼내어 세 냥에 보태어, 두 사람에게 각각 두 냥씩 나누어 주었다. 두 사람 다 세 냥 들어올 것이 두 냥으로 줄었기 때문에 한 냥씩 손해다. 재판관도 한 냥을 내주어서 한 냥이 손해다. 이렇게 세 사람이 한 냥씩 손해 보는 삼방일량손으로 골치 아픈 중재가 끝이 났다는 얘기다.

이와 비슷한 조정 기법이 에도시대까지는 활용되었던 모양이다. 키와타케 모쿠아미가 지은 가부키 〈세 명의 키치사, 유곽에서의 첫 거래〉에 ‘경신탑’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에는 키치사라는 이름이 같은 세 사람이 등장한다. 여장을 한 도적 키치사가 창기를 죽이고 돈 백냥을 빼앗는다. 이 장면을 목격한 애송이 악당 키치사가 “그 돈을 나한테 순순히 건네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두 사람이 칼을 빼들고 서로 돈을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이는데, 이들보다 더 노회한 악당인 화상 키치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해 “내게 맡기고 칼을 물려주시게”라며 말을 꺼낸다. 두 사람이 일단 싸움을 멈추고 칼을 거두자 화상은 이렇게 말한다.

“두 사람은 백 냥을 내놓게. 내놓지 않겠다고 옥신각신하다 소중한 생명을 버릴 셈인가. 이번만큼은 내가 중재를 설 테니 싫어도 내 말을 들어보게. 서로 다투는 백 냥을 둘로 나누어 낭자도 오십 냥, 도령도 오십 냥씩 싸움을 만류한 내게 주지 않을 텐가? 그 대신에 내가 양팔을 내놓으면 오십 냥치고는 값이 더 나가는 거지만, 칼을 빼어 그대로 칼집에 꽂는 건 사내의 수치니 내가 양보함세. 양 팔을 베어 백 냥 어치를 맞춰주게나.”

이 말을 듣고 두 사람은 화상의 팔을 칼로 베고 이어서 자기들의 팔도 베어 세 사람의 팔에서 흐르는 피를 모아 나눠 마시고 의형제가 되었다는 얘기다.

나는 이 이야기를 청년 시절 카와시마 타케요시 선생의 『일본인의 법의식』에서 읽었는데, 일본인의 조정술이 고도의 정치기술을 요한다는 것을 알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이 이상한 조정술에 대해 카와시마 선생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 분쟁의 해결 방법은 화상 키치사가 말하듯이, 다툼을 ‘원만하게 수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즉, 조정의 성격을 띤 중재는 분쟁 당사자 중 어느 쪽이 옳은지를 밝히는 것 – 현대 법에 의한 재판은 이를 목적으로 하지만 – 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화상 키치사가 말하듯 ‘원만하게 수습하는’ 것, 곧 분쟁 당사자 사이를 사이 좋은 관계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 카와시마 타케요시 『일본인의 법의식』
카와시마 선생은 이 분쟁 조정이 성공한 이유로, 중재인인 화상 키치사가 세 사람 중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악당들 사이에서 격이 높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나는 이뿐만 아니라, 화상 키치사가 제시한 조정안의 정교한 논리성에도 공의 일부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당사자든 중재자든 아무도 이익을 얻는 사람이 없는 해결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 해결은 얼핏 보면 아무리 좋게 봐도 ‘옳은 해법’은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득이 되지 않는 해법’이다. 그러나 실제로 조직에서 오랫동안 일해본 사람이라면 경험으로 이해하겠지만, 조직 안에서 눈에 띄게 이익을 얻는 사람이 없는 해법이 오히려 조직을 와해시키지 않을 수 있는 해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옳지 않은 해법’으로 합의를 이루는 편이, 당사자 쌍방이 “죽어도 내가 옳다”며 서로 주장함으로써 아예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편보다 낫다고 보는 사회적 합의가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 급속도로 사라지는 것 같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리스크 사회가 도래했다’고 알려주면서 정작 이런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대신 항상 옳은 해법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고 있다.

[…] 낙관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에 ‘올바른 해법을 계속해서 선택한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야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틀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무조건 옳아야 한다’는 유형의 주장을 한다. 만약 ‘틀리면 죽는다’는 조건이 붙는다면 사람은 ‘정답을 맞히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틀리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할 것이다.

内田 樹. 2007. 下流志向 : 学ばない子どもたち、働かない若者たち. 東京: 講談社.
(김경옥 역. 2013. 『하류지향 :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1판 서울: 민들레. pp.98-103)


앞선 낙타 사례와 달리 중재자가 개인적인 희생을 해서라도 공익을 주선하는 이야기,
그건 그렇고, 당장 대가리 깨지는 상황이 사라지면, 다들 간댕이가 붓나봄
by sonnet | 2020/09/10 20:52 | 정치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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