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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중북관계
2010/08/15   이왕 왔으니 개혁개방 이야기나 들어 보시게 [44]
2010/07/15   서해에 출현한 소련군 [61]
2010/07/13   중국의 징벌: 서서히 목 조르기 [69]
2010/07/13   작년 사례 [13]
이왕 왔으니 개혁개방 이야기나 들어 보시게
물가를 안정시켜 개혁을 빠르게 진행하자
담화: 덩샤오핑
일자: 1988년 5월 19일

우리 당의 제13차 대표대회와 전국인민대표대회 제7기 제1차 회의의 정신은 모두가 지금보다 진일보하게 사상을 해방시키고 생산력을 해방하는 것입니다.

물가를 해방시켜야 개혁이 빠르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물가문제는 역사가 남겨놓은 것입니다. 지난날 물가는 모두 나라에서 정했습니다.

예를 들면 식량과 여러 가지 부식품은 오랫동안 수매가격이 아주 낮았습니다. 이 몇 년간 몇 번 올리긴 하였으나 여전히 비교적 낮습니다. 그런데 도시의 판매가격은 높일 수가 없었습니다. 수매가격과 판매가격이 거꾸로 서니 나라에서 보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치법칙에 어긋나는 이 일은 한편으로는 농민들의 적극성을 동원시킬 수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에서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되는 것입니다. 해마다 물가 보조금에 쓰는 지출이 몇백억이 됩니다. 따라서 나라의 재정수입은 경제건설에 투자되는 게 적고, 더구나 교육, 과학, 문화사업 발전에 쓰는 것은 더욱 적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가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부담을 벗어버리고 가벼운 몸으로 전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는 고기, 계란, 야채, 설탕 네 가지 부식품 가격을 풀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먼저 한 걸음 내디딘 셈이지요. 중국에서는 ‘다섯 관문을 넘기어 여섯 명의 적장을 죽인’ 관공(關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관공보다 더 많은 ‘관문’과 ‘적장’이 있을 것입니다. 한 관문을 넘긴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아주 큰 모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부식품 가격이 풀리니 다투어가면서 물건을 사들이는 사람도 있고 의논이 분분합니다. 불만에 찬 말도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인민대중들은 중앙을 이해합니다. 이 결심은 반드시 내려야 합니다. 지금 넘은 이 고비가 성공할 수 있겠는지는 오늘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공하기를 희망합니다. 성공하자면 매 한걸음 전진할 때마다 모두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부지런히 일하고, 대담하면서도 세심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그때마다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발견하면 조절하고 실제 상황에 부합되게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가개혁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어려움을 맞받아 반드시 처리해야 합니다. 전당과 전국인민들에게 이것이 아주 어려운 사업이고 완전무결한 방침과 방법은 없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하고, 우리가 봉착한 것은 모두 새로운 사물들이고 새로운 문제이므로 경험은 우리 스스로가 창조해야만 함을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라고 했습니다. 물가를 풀어주고 개혁을 빠르게 하는 것이 정확한가 아닌가의 여부는 실천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순조로운 상황도 있고 위험한 상황도 있습니다. 다행이 이 10년 동안 중국에 만족스러운 발전이 있었고, 인민생활도 개선되었습니다. 그리고 위험에 적응하는 능력도 어느 정도 증대되었습니다. 나는 늘 동지들에게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더 대담해지라고 합니다. 소심해서 이것저것 두려워하다 보면 길을 걸을 수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중국 경제의 발전 속도는 그렇게 느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1988년에 풍랑이 일게 될지 모르지만, 속도는 여전히 10%를 초과할 것입니다. 매일 풍랑 속에서 전진하는 상황이 되겠지만, 네 배로 늘리는 임무는 틀림없이 완수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 상황이고 전망입니다.



이는 『덩샤오핑 문선 제3권』에서 가져온 것인데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인솔한 북한 군사대표단을 접견했을 때 한 담화의 일부이다. 개혁개방을 권해본 중국에서도 다룬 바 있지만, 1980년대 중국은 이렇게 북한 대표단이 올 때마다 - 설령 그것이 경제와는 별 관련없는 군사대표단이더라도 - 귀에 못이 박히게 개혁개방을 하라고 요구했음을 잘 보여준다. 덩샤오핑이 장관급에 불과한 오진우를 만나준 것 자체가 중국 측의 배려인지라, 북한 대표단은 뭐라 말도 못한 채 묵묵히 개혁개방 실무에 관한 강의를 듣고 돌아갔을 게 뻔하다.
by sonnet | 2010/08/15 12:18 | 정치 | 트랙백 | 덧글(44)
서해에 출현한 소련군
최근 중국의 반응을 통해 다들 중국이 서해에 다른 강대국 군대가 출현하는 것을 엄청나게 꺼린다는 점을 잘 확인하셨으리라고 봅니다. 이제 북한과 중국 사이엔 이 문제가 어땠는지 한 번 살펴 보기로 하지요.

1980년대 북한은 대소교역이 전체 교역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소련에 밀착합니다. (북한 무역의 문제 참조) 물론 실질적으로는 대부분 원조였죠. 바늘 가는데 실 가는 법이라고 하듯이, 두 나라는 군사적으로도 밀착하게 됩니다.

그 대신 북한은 소련에게 중·소 사이에서 ‘전략적인 우위’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다. 소련과 북한의 해군 합동훈련, 남포, 나진, 청진항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 것, 캄란 만(灣) 소련기지의 활성화를 위해서 북한을 통해 연결할 수 있는 비행루트를 제공한 것, 또 소련 공군의 정보비행과 공격훈련 연습을 위해서 소련의 TU-95 BADGER(sic.) 정찰기, TU-95 BEAR G 폭격기 TU-95 BEAR D 해상첩보기에게 원산에서 남포를 거쳐 서해로 나갈 수 있는 북한영공 횡단권을 주었다. 특히, 소련 항공기가 북한영공을 통해서 중국을 정찰비행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은 중국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이 점은 아마 김일성도 정치적으로 치밀하게 계산을 했을 것이다.

소련 폭격기의 북한영공 통과는 군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련의 전략적인 고려가 크게 작용했다. 미·소 대결이 치열한 상황 하에서 소련은 미국 주도하에 대한해협에서 쓰시마해협이 봉쇄되었을 경우를 대비한 ‘대안적인 교통로’로서 북한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확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캄란 만을 연결하는 전략 교통로가 대한해협-쓰시마해협에서 차단될 수 있는데 이를 빠져나가는 방법은 북한영공을 통과하는 것뿐이었다.

만약 캄란 만의 소련군을 지원하려면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의 발진이 필수적이고, 그러자면 북한영공을 통한 새로운 루트의 개척이 또한 필연적이었다. 또 북한을 이용함으로써 소련의 극동 군사기지와 다낭-캄란 만을 직선으로 연결하여 비행거리와 비행시간 단축, 연료소모량 절약 등 소련 공군의 작전능력을 대폭 향상시킬 수도 있다. 동시에 한국과 중국의 중요 군사기지에 대한 항공정찰이 가능해졌고, 일본의 대소(大蘇) 군사활동 탐지능력을 현저히 약화시킬 수 있었다.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진한 전투기가 일본의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고 황해를 지나 동남아시아 쪽으로 비행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일본이 조기경보 레이더의 등급을 대폭 향상시키지 않으면, 소련의 군사 비행활동을 탐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의 남서해상 교통로는 소련의 공군력 앞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pp.156-157)


이렇게 생긴 전략정찰기가

이렇게 날아다니며 정찰하게 된 것.


그리고 나서 곧 이루어진 호요방의 신의주 방문시 김일성-김정일과의 대담 중의 한 대목.

김일성: 최근에 와서, 우리가 소련과 교류비행(상호방문비행)을 하고, 소련의 고위층이 북한을 방문하는 등 소련과의 관계 긴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중국에 대한 혈맹관계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으니, 이 점 이해하기 바란다. 또 나진항을 소련에 조차해 주었다고 하는데, 유사시에 사용하도록 한 것이지, 평상시에 소련군을 주둔하도록 한 것은 아니다.
호요방: 우리는 오해도 우려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소련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환영하고 있다. 북조선도 군사비를 축소하고, 경제건설에 힘써 줄 것을 우리는 바라고 있다.(pp.184-186)



출처: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서울: 나남, 2004.
by sonnet | 2010/07/15 14:55 | 정치 | 트랙백(1) | 핑백(1) | 덧글(61)
중국의 징벌: 서서히 목 조르기
중국이 북한을 달래려고 노력한 이야긴 많이 소개했으니까, 이번엔 반대로 징벌한 사례를 좀 소개해 보지요. 이와 비슷한 수법으로 2003년에도 중국은 북한으로 가는 송유관을 3일간 끊은 적이 있는데, 칼집만 보여주면서 왕년의 무자비한 솜씨를 은근히 과시하는 그런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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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에는 분명한 선이 있었다. 양국 지도자 사이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든지, 국제적으로 북한이 중국의 노선과는 배치되는 행동을 한다든지, 혹은 양국간의 합의를 어기고 멋대로 행동할 때에는 언제나 강력한 ‘제재’를 가했다.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북한은 미중 관계정상화를 ‘제국주의와의 타협’이라고 보았다. 중국은 북한의 친소화(親蘇化)를 비난했고, 나진과 청진의 소련권 편입을 염려했다. 내부적으로 중국과 북한 간에는 불화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 중국은 북한의 밑바닥 실무자들까지도 참을 수 없는 고통스런 압력을 가했다. 그 대표적인 압력수단은 중국이 북한에 제공하는 원유였다.[37]

중국은 1981년 1월부터 대북한 원유공급량을 10% 감축하겠다고 반년 전부터 통고했다.[38] 시작은 언제나 이렇게 했다. 북한이 내부에서 그 압력을 견디기 위해서 안간힘을 쓸 때쯤이면, 중국은 점차 그 강도를 높였다.

→북한은 1980년 6월부터 전국에 석유 5% 절약령(節約令)을 하달했다(1980.6.3)
→그런 다음 북한 내부에서는 다시 석유 10% 절약령을 발표(1981.1) 했고,
→그러자, 중국은 1981년 5월부터 대북한 석유공급 전량을 중단한다고 발표(1981.3.20)했다.
→중국은 북한의 원유공급 증가 요청을 거절(1981.5.7)하면서,[39]
→대북 원유수출 미납금 2억 5천만 스위스 프랑을 1983년 이후 6년에 걸쳐 상환할 것을 요구했고,
→대외적으로 북한의 원유도입에 따르는 대중국 외채가 5억 달러라고 발표(1981.10.22)해 버렸다.

일단 중국이 대북한 원유공급을 중단하고 나면 그 보복은 집요하고 끈질겼다. 북한이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이리저리 형편을 재면서 ‘못 견딜 지경’까지 끌고 갔다. 결국 김일성이 직접 나서거나 최소한 총리·부총리급이 북경으로 달려가서 협상을 해야 했다.[40] 그런 점에서 1981년 1월 10일 이종옥(李鍾玉) 총리의 북경방문도 사실은 석유문제 해결을 위해서였다.[41]

그러나 중국은 이종옥 총리와의 협상에서도 석유공급 가격을 국제가격으로 할 것과 결제화폐를 스위스 프랑으로 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 총리조차도 해결을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런 상황은 북한에 대한 중·소간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릴수록 특히 심했다. 북한이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할 기미가 보이면, 중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제동을 걸었다. 1989년 5월 중·소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지고 중·소가 본격적으로 북한의 ‘어께 넘어’로 한반도 문제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때까지 북한은 중·소로부터 각기 다른 형태의 간섭과 압력을 쉬지 않고 받았다.

또 천안문 사건 이후, 미중관계가 악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중소관계가 긴밀해지자 북한은 전략적으로 일시에 ‘별 볼일 없는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북한은 중·소 사이에서 어느 쪽도 거들떠보지 않는 완전한 ‘찬밥’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중국의 대북한 원유공급 중단사태는 1990년 12월에도 있었고,[42] 1993년 2월에도 있었다.[43] 그리고 김일성 사망 3개월 후인 1994년 10월에는 다시 공급량을 크게 늘려 공급을 재개하기도 했다.[44]

중국의 원유공급 중단 사례를 분석하면 표면적으로는 경화결제를 요구한다든지 누적된 미불금 때문이라고 그 중단원인을 발표하고 있지만, 그 이면의 진정한 이유는 대부분 정치적 불만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고 일종의 ‘북한 길들이기’와 같은 ‘징벌’의 의미가 있었다.

[37]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불만이 가장 노골적으로 표출된 경우는 황화(黃華)의 연설이었다. 황화는 북한 동해안 일대 소련의 군사기지 건설(나진항)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북한이 계속 소련세력을 끌어들인다면, 중국은 서슴지 않고 ‘남조선 카드’를 쓰겠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黃華, “1980년대 외교정세와 정책 및 금후의 임무 - 1980年代外交情勢政策及今後的任務”, 1980.1.25.
[38] 북경방송, 1981년 4월 11일 보도.
[39] 북경방송, 1981년 6월 25일 보도.
[40] 북경방송, 1981년 8월 28일, 허담 부총리 겸 외교부장의 북경방문도 경제 협력 요청이 주목적이라는 보도내용.
[41] 북경방송, 1981년 3월 26일. 이종옥 총리의 북경방문 목적도 석유 문제 해결에 있었다.
[42] 북한이 원유대금 결제를 미루고 있다는 이유로 중국이 석유수출 물량을 줄일 계획이라는 《일본경제신문》 1990.12.14일자 보도. 그 보도의 내용은, “중국은 매년 150만톤의 원유를 제공하고 그 대금으로 무연탄-시멘트를 수입하는 구상무역을 실시하고 있다. 중국은 원유가를 국제시세의 절반 값으로 공급하고 있으나 무연탄과 시멘트의 수출액이 원유대금에 미치지 못하고, 또 그 차액을 현금으로도 결재하지 못하는 것이 원유공급을 줄이게 된 배경”이라고 전했다.
[43] “중국 대북한 원유공급 올부터 절반 이상으로 줄여”, 《한국경제신문》 1993.2.23일자 보도. “그 동안 중국은 북한에 대해 해마다 구상무역으로 65만 톤, 외상형식으로 55만 톤 등 120만 톤의 원유를 공급해 왔으나 작년 11월 양국회담에서 중국 측이 구상무역 공급량에 한해 경화결제를 요구하여 회담이 사실상 결렬”되었음.
[44] 김일성 사망 3개월 후인 1994년 10월 중국은 다시 대북한 원유공급을 재개했다. 중국이 재개한 대북한 원유공급량 총 145만 톤 중 절반은 무상으로 또 나머지 절반은 국제가격의 반액으로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의 이런 조치는 김일성 사망 후 현재의 북한지도층을 적극 지지한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일본 쪽에서는 해석했다. 《아사히신문》서울발 보도, 1994.10.5, 《아사히신문》을 재인용한 《조선일보》의 보도. 1994.10.6.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서울: 나남, 2004. pp.48-51
by sonnet | 2010/07/13 15:10 | 정치 | 트랙백 | 핑백(1) | 덧글(69)
작년 사례
천안함 격침 사건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결정은 작년 4월에 있었던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에 대한 안보리 의장 성명(S/PRST/2009/7)의 전례에 비추어 비교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 구체적인 비교나 평가에 대해서는 다음 글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국제NGO인 International Crisis Group에서 나온 보고서 중에 이 문제를 다룬 대목이 있는데, 적절한 요약인 것 같아 한번 옮겨 보기로 한다.


A.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의장성명

4월 5일의 로켓 발사가 있은 다음 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를 어떻게 대응할지를 놓고 씨름했다. 이 로켓발사가 유엔안보리 결의 1718호를 위반한 것인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안보리 결의 1718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자국의 탄도미사일 프로그램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이러한 맥락에서 기존의 미사일 발사 유예 공약을 재확립”할 것을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일본 머리 위를 날아간 로켓의 궤적 탓에, 당시 안보리의 비상임이사국이었던 일본은 강력히 반응하고 미국과 유엔이 더 강하게 대처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오바마는 이 발사를 “유엔안보리 결의 1718호에 대한 명백한 위반(violation)이며 동북아 지역과 국제 평화와 안보에 대한 위협”이라고 불렀다. 미국이 이 문제를 안전보장이사회로 가져올 준비를 함에 따라, 중국은 평소처럼 “일단 두고 보는(wait and see)" 접근법을 취하면서 북한이 위성을 발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북한은 핵과 로켓 기술의 평화적 이용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미국이 이 문제를 안보리로 가져간데 대해 놀라지 않았지만, 모든 관련국들이 6자회담과 UN 프로세스에 매달려 있는 한 중국의 국익은 잘 보호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유엔에서라면 중국이 반대하는 조치를 남들이 피해가도록 비토권을 흔들어 보일 수 있었고, 다른 관련국들이 유엔의 틀 밖에서 행동을 추구하는 것을 단념시키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6자회담은 의장국인 중국에게 북한에 대한 국제적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 중심적 역할을 보장해주었으며, 증대되고 있는 다자 외교 정책 지향성이나 “책임감 있는 강대국”으로 보이고자 하는 열망에도 잘 부합했다. 6자회담이 꼭 핵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했지만, 이 프로세스는 협상이 계속되는 상태를 유지하고 위기가 끓어오를 가능성을 낮춰주면서 중국으로 하여금 국제적 대응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게다가 중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6자회담은 문제해결에 진전이 없는 것에 대해 남한의 국내정치나 납치 문제에 관한 일본의 과잉대응 같은 편리한 변명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6자회담은 중국의 대미관계를 상당히 호전시켜 주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서 밀어붙이기로 한 미국의 결의를 과소평가했다. 중국 대표는 미국 대표단이 취한 강한 입장에 놀랐고, 중국이 가장 약한 형태의 행동인 언론발표문(press statement)을 얻어낼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중국은 또한 로켓발사에 대한 일본의 반응도 과소평가했다. 미국은 일본 및 남한과 손잡고 “북한은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한다고 결정한다”라고 되어 있는 1718호 결의의 5절을 강조했다.

중국은 강한 어조의 의장성명을 제안함으로서 결의가 채택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채택된 의장성명은 그것이 탄도미사일이었는지 우주발사체였는지 명기하지 않은 채, 그 사건을 막연하게 “4월 5일의 발사”라고만 묘사한 중국이 제시한 4월 9일자 초안에 기초한 것이었다. 미국과 중국 모두 이러한 타협을 자국의 승리라고 받아들였다. 의장성명은 또한 이 발사가 1718호 결의를 위반한 것이며 향후 탄도미사일 기술을 사용한 어떤 발사도 기존의 안보리 결의의 위반이 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의장성명은 북한에게 향후 탄도미사일 기술을 사용한 어떠한 발사도 실시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1718호 결의에 의한 기존의 제재 조치들을 실질적으로 증대 강화할 것을 허용했다. 미국과 일본은 심의 결과에 만족했으며, 특히 단호한 결론에 기뻐했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형식은 강하고 효과적인 대처(내용)만큼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라고 논평하였다.

의장성명의 강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구속력이 있는 결의를 구속력이 없는 의장성명으로 대체하고 ‘위반(violation)’이라는 말이 성명에 나타나지 않도록 해준 것으로 북한에 대한 의리는 충분히 지켰다고 느꼈다. 중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의장성명은 중국의 핵심 이익 중 어떤 것도 위태롭게 하지 않았다. 6자회담은 영향 받지 않은 채로 남았고, 의장성명에 지역 안정을 위협할만한 조치는 포함되지 않았다. 의장성명이 채택되자, 중국의 유엔대사 장예수이는 이번 대응은 균형과 신중함이라는 두 측면에서 중국의 요구사항을 만족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의장성명에 대한 중국대사의 지지와 묘사는 북한을 강타했다. 중국이 미국과 일본의 대응 강도를 예상하는데 실패했던 점을 본다면, 이는 아마도 의도치 않게 북한으로 하여금 그들이 로켓발사에 대해 유엔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거나 혹은 앞으로 달려 나가도 된다고 느끼게 만들었을 수 있다.


B. 6자회담으로부터의 탈퇴

북한은 그들의 적법한 권리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응해 이루어진 의장성명의 강한 어조에 격분했다. 의장성명이 발표된 다음 날, 북한은 UN이 자신들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하고, 6자회담으로부터의 영구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은 또한 “모든 수단을 다해 자위를 위한 핵억지력을 증강할 것”이며, 자신들이 보유한 모든 플루토늄을 무기로 전환하고, 영변 핵 시설의 가동과 대륙간탄도탄 실험을 재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관점에서 보자면 6자회담은 5개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 이중 잣대를 적용해 북한을 털어먹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로켓 발사에 대한 관련국들의 단합된 행동은 이러한 시각을 강화했다. 북한은 특히 중국과 러시아의 대응에 당황했으며 이를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북한은 [구속력이 있는] 결의 대신 구속력이 없는 의장성명으로 만들어준 중국의 역할을 무시하고 대신 강한 어조에만 집착했다. 위성 발사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은, 북한의 즉각적인 6자회담 탈퇴에 더해 핵실험으로까지 이어졌다.

중국 외교관들은 북한이 6자회담 참석을 거부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북한의 그러한 행동이 영구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북한이 6자회담 제2단계의 의무에 따라 불능화 과정에 있던 핵시설을 재건하리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의 대응이 이해할 수 없이 강렬하며 “북한이 UN과 6자회담에 맞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Shades of Red: China’s Debate over North Korea. International Crisis Group Asia Report 179, 2 Nov. 2009. pp.2-4

by sonnet | 2010/07/13 09:18 | 정치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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