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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중국문학
2010/03/25   고육계로서의 자아비판: 정치산문 『수상록』의 전략 [13]
2010/03/24   정치산문 [20]
2010/03/01   바진(巴金) 수상록 선집 비교 [4]
고육계로서의 자아비판: 정치산문 『수상록』의 전략

비루는 비루한 자의 통행증 卑鄙是卑鄙者的通行证
고상은 고상한 자의 묘비명 高尚是高尚者的墓志铭


- 베이다오(北島), 『회답』(1976) -

새가 죽음에 이르면 그 울음소리가 구슬프고 鳥之將死 其鳴也哀
사람이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 말이 선해진다 人之將死 其言也善


-『논어』 태백편 -



중국의 원로 작가 바진(巴金)은 문화대혁명이 끝난지 조금 후인 1978년 말부터 홍콩의 『대공보』에 ‘수상록隨想錄’이라는 칼럼을 연재한다. 1978년 12월 1일에 씌어진 제1편 「망향을 이야기한다談望鄕」부터 1986년 8월 20일에 집필한 「후펑을 그리며懷念胡風」까지, 8년에 걸쳐 발표한 총 150편의 수필을 묶어 다섯 권으로 간행한 것이 바진의 수필집 『수상록』이다.


『수상록』의 주제는 명백하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서문에서 잘 밝혀 두었다.

붓을 잡고 나서 갖가지 제목들을 접하며 이러저러한 일들에 대해 왈가왈부하였지만, 내 생각은 오히려 하나의 테두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10년 대재난이라고 부르는 문화혁명이다. 그 단어를 언급만 해도 존경심에 소리 높여 “만세!”를 외쳤던 시절이 내겐 있었다. 8년간의 회고, 분석과 해부를 거쳐 나 자신을 바로 보게 되었고, 자신을 통해 주위 사람들과 주변의 일들에 대해 다소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붓은 늘 나의 상처를 건드렸다. 처음 원고지에 붓 가는 대로 글을 적어 먼 곳에까지 원고를 부친 것도 우정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또 그 글들을 발표하면 내 자신의 정신적 부담을 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훗날에서야 10년 동안 외양간에서 살았던 나에게는 사람들을 넋 나가게 만들었던 그 대사기극을 폭로하여 후손들에게는 절대로 그런 재난을 겪지 않게 해야 하는 책임이 있음을 차츰 알게 되었다. ("합정본 신서문")

이 자체는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으며 사실 꽤 진부한 동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뭔가 남다른 데가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좀 해보자.

소위 회고담이나 회고록 류를 읽어보면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이런 류의 책들은 백이면 백, 잘 된 일에 있어서는 자신의 기여를 강조하고, 또한 잘못된 일의 경우엔 그 의미를 축소하거나 그 때 나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상세하게 해명하는 자기합리화의 경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수상록』은 이 패턴을 뒤집음으로서 고도의 전략적 글쓰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저자 자신이 문혁의 주요 피해자인 만큼, 평범한 사고방식을 따른다면 『수상록』 또한 나를 괴롭혔던 문혁의 참상을 고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바진은 그런 진부한 방법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건국 후 문혁 발발 이전까지의 17년 동안 끊임없이 벌어져 왔던 지식인 박해운동 과정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끈기있게 반복해 자아비판한다. 자신은 덩퉈(鄧拓)나 후레이(傅雷), 텐자잉(田家英)처럼 거대한 불의에 직면해 결연히 자결해서 삶을 마감한 것도 아니고, 후펑(胡風)처럼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감옥에 갈 지언정 끝까지 버티는 대신, 다른 대부분의 지식인들처럼 문혁이 자신을 덮쳐 올 때까지는 기본적으로 정부(당)에서 내려오는 노선에 순종하며 따라갔다는 것이다.

공산 치하에서 자아비판은 흔한 형식이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주위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이제 그는 강요 없이도 자발적으로 자아비판을 강행한다. 아니 말려도 한다. 왜인가?

그는 자신의 그러한 태도가 친구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밝힌다.

한 친구는 유명한 잡문가인데 편지에 쓰길,'자신이 과거에 진리라고 여겼던 거짓말에 대해 나는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네. 자네도 그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길 바라네 … 이후에 자기가 그런 류의 글을 다시는 쓰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 나는 그런 보증수표는 끊지 못하겠네."

나 역시. '당시에는 용기가 없었'지만, 이후에는 과연 용기가 생길런지? 그는 아주 솔직하게 '그런 보증수표는 끊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나라고 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진실을 말하면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할 수 없다. 그도 역시 할 수 없을 것이다. (79. 세 번째 "진실을 말함")

바진은 자신이 기회주의적으로 '비루한 자의 통행증'을 끊고 당의 표적이 된 다른 지식인들을 비난하는데 동참하고, 속으로는 자신이 표적에서 벗어났음에 안도했던 많은 보통 사람들 중 하나라고 말한다. 이를 털어놓고 반성하면서 그는 "나는 나 자신의 일을 이야기할 뿐이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굳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할 필요가 있을까? 그들이 찔리다 못해 편지를 보내어 그만 하면 어떠냐고 제안해 올 정도이니까.

'강아지 바오띠'는 이런 전략의 전형적인 예다. 잘 보면 이 이야기에서 홍위병들은 바진네 개를 죽이라고 한 적이 없다. 흉흉한 분위기가 연출되자 어떻게든 재앙을 피하려고 바진 가족이 머리를 굴리는 과정에서 알아서 기느라고 자신을 잘 따랐던 개를 희생시킨 것일 뿐이다.

문화대혁명 와중에 많은 지식인들이 이런 식으로 친구나 동료, 스승이나 제자를 팔아치웠다. 야심가나 기회주의자여서 그런 경우도 적지 않지만, 양심적인 사람들도 많이들 동참했다. 내가 그를 팔지 않으면 나도 그의 일당으로 몰려 타도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준명문학' 편에서 바진은 자신도 비슷한 상황에서 《불야성》의 작가 커링(柯靈)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고 밝힌다.

이렇기 때문에 문혁에서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강아지 바오띠'는 그냥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들의 치부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자 아주 불편한 글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바진이 자신을 겨냥해 욕을 했더라면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변명이라도 해 볼텐데, 그런 것도 아니다. 반박은 더더욱 할 수가 없다. 바진은 겉으로는 철저하게 '내가 나쁜 놈이다, 나는 반성한다. 남의 일은 모르겠다. 나는 반성한다'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진은 전략적 글쓰기, 자신의 심신을 괴롭혀 남들에게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고육계로서의 자아비판'을 강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루쉰의 잡문을 비롯해서 현대(당대) 중국 작가들에게는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 정치성 짙은 산문을 써온 오랜 전통이 있는데, 바진의 『수상록』 또한 독창적인 전략을 구사한 정치산문의 한 형태인 셈이다.
by sonnet | 2010/03/25 12:17 |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3)
정치산문

강아지 바오띠(小狗包弟)

바진(巴金)


한 달 전, 베이징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나는 사람들이 한 예술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예술가와 강아지에 관한 것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예술가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웃집에서 기르던 강아지와 매우 잘 지내서, 자주 먹을 것을 푸짐하게 주었다고 한다. 문혁 기간 중 그 도시에 무력 싸움이 발생하자, 예술가는 두려워져 다른 곳으로 가서 한동안 숨어 지냈다. 얼마 후 그가 돌아왔는데, 아마도 붙잡혀 돌아온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가 ‘외국과 내통한’ 반혁명 분자라고 그를 비판했는데, 그가 인정하지 않자 바로 호되게 두들겨 패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고, 방망이로 내리쳤다. 그의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흘렀을 뿐만 아니라, 다리 하나도 부러졌다. 비판대회가 끝났을 때 그는 걸을 수조차 없었다. 독재정치 대오는 그를 끌고 거리를 돌면서 조리돌림을 시켰는데, 옷은 찢어져 구멍이 나고 온몸은 피와 진흙 투성이였으며, 입에서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를 알던 사람도 반죽음이 된 그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강아지 한 마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달려 나와, 아주 기쁜 듯이 그를 향해 나아갔다. 강아지는 다정하게 짖으며 그의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냄새를 맡고 혀로 핥고 발톱으로 그의 몸을 어루만졌다. 다른 사람이 강아지를 내쫓으려고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려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강아지는 끝까지 그의 곁에 남으려 했다. 독재정치 대오가 큰 방망이로 강아지의 뒷다리를 때려 부러뜨리자, 강아지는 몇 차례 슬프게 짖으며 다친 몸을 이끌고 고통스럽게 떠나갔다. 땅 위엔 핏자국이, 예술가의 낡은 옷에는 강아지 발톱 자국이 남았다. 예술가는 몇 년 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 그 뒤에 그가 한 첫 번째 일이 바로 고기 몇 근을 사서 그 강아지를 보러가는 일이었다. 그의 이웃 사람은 그에게, 강아지는 그날 구타를 당해 다친 뒤 집으로 돌아와 아무것도 먹지 않고 3일을 슬프게 짖다가 죽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내가 길렀던 강아지가 생각났다. 그렇다. 나 역시 강아지를 기른 일이 있다. 1959년의 일이다. 당시 한 지인이 베이징으로 전근되어 온 가족이 이사 가게 되면서 자신이 기르던 강아지를 내게 선물로 주었다. 우리 집에는 잔디가 있어서 개를 기르기 알맞은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허락했고, 내 아들 역시 대단히 기뻐했다. 강아지가 왔다. 누런 털을 가진 일본 품종의 강아지였는데, 아주 깨끗하고 재주도 있었다. 무슨 요구가 있으면 곧 폼을 세우고 두 앞발을 나란히 한 채 쉬지 않고 절을 해댔다. 이 재주는 내 친구가 훈련시킨 게 아니었다. 그 강아지는 내 친구 말고도 스웨덴인 옛 주인이 있었다. 그에 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상하이를 떠나 귀국할 때, 강아지를 집 임대권을 지닌 사람에게 선물로 주었고, 그래서 강아지는 내 친구 것이 되었다. 강아지가 그 친구에게 올 때, 외국어 이름이 있었는데, 그것의 음역은 ‘스바오띠斯包弟’였다. 우리는 이 이름을 줄여 ‘바오띠包弟’라고 불렀다.

바오띠는 우리 집에서 7년을 지내는 동안 우리 식구들과 아주 잘 어울렸다. 바오띠는 절대 사람을 물지 않았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대문 앞에서 한동안 짖다가 우리가 한 번 부르면 곧 그 자리를 떠났다. 밤이면 울타리 밖 인도로 자주 사람이 지나갔는데, 강아지는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울타리를 향해 달려가며 짖었다. 짖는 소리가 귀에 좀 거슬렸지만 오래 짖는 법은 없었다. 바오띠는 뜰에서 놀길 좋아했지만 때로는 거실에서 손님을 접대하거나 옛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 집 안으로 들어와 절을 하고 사탕이나 과자를 달라고 하면서 손님들의 웃음을 자아낼 줄 알았다. 일본 친구는 그에게 큰 흥미를 느꼈고, 한번은(아마도 1963년이거나 그 이후의 여름이었을 것이다) 한 일본 통신사가 우리 집에 와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찍을 때 바오띠를 촬영한 적도 있었다. 또 한번은 일본 작가 유키 여사가 상하이 방문 중 우리 집에 온 적이 있는데, 일본 품종인 바오띠를 보자 대단히 좋아했다. 그녀도 도쿄 집에서 개를 기른다고 말했다. 2년 뒤 그녀는 다시 베이징에 와서 아시아·아프리카 작가 긴급회의에 참석했는데, 나를 보자 “당신의 강아지는 어떤가요?”라고 물었다. 잘 지낸다고 말해주자, 그녀는 웃었다.

나의 아내 샤오산 역시 바오띠를 좋아했다. 3년 간의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매번 문화 클럽에 가서 식사를 했는데, 그녀는 늘 종업원에게 뼈다귀를 얻어와 바오띠에게 주었다. 1962년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광저우로 가서 설을 보냈는데 여동생이 말하길, 우리들이 광저우에 있는 동안 침실문 앞에서 바오띠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아침 우리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바오띠는 우리가 돌아온 것을 보고, 특히 샤오산을 보고는 쉬지 않고 머리와 꼬리를 흔들었다. 그처럼 기뻐하며 다정하게 우리를 맞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아주 감동적이다. 나는 마치 유키 여사의 물음을 듣는 것 같았다. “당신의 바오띠는 어떤가요?”

만일 내가 다시 그 일본 여성 작가를 만날 수 있다면, 그녀는 반드시 같은 말로 내게 물을 것이다. 그녀의 관심은 줄어들 리 없었다. 그렇지만 나에겐 이제 강아지가 없다.

1966년 8월 하순, 홍위병이 거리로 나와 ‘네 가지 낡은 죄악’을 몰수할 때 바오띠는 우리 집의 무거운 짐이 되었다. 밤이면 부근의 어린아이들이 자주 문을 때리고 큰 소리로 떠들면서 강아지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바오띠가 날카롭게 짖어대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깜짝 놀라 벌벌 떨었다. 이 울음 소리가 사구를 몰수하는 홍위병을 우리 집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내가 근신 중이던 어느 날 저녁 무렵, 우리는 뜰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나에게 바오띠를 다른 곳에 보내라고 권했다. 나는 첫째 여동생에게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 시절, 누가 이런 선물을 받길 원했을까? 사람들은 병원에 증정해서 과학자들이 실험용으로 쓰도록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원치 않았다. 예전엔 바오띠가 절하는 것을 보면 곧 웃음이 나왔지만, 그 당시 기관에서 학습하고 돌아와 바오띠가 내게 절을 하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나는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사태는 날이 갈수록 긴박해졌다. 우리 이웃에는 나이든 상공업자 한 명이 살고 있었는데, 본래 어느 공장의 사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집에 살았으며, 내 뜰과는 단지 울타리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집에 ‘네 가지 낡은 죄악’을 몰수하러 갔다. 이웃집의 조그만 동정도 우리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고, 울타리 틈으로 상황들을 살펴볼 수도 있었다. 그날 밤은 부근의 어린애가 몇 차례 방문하여 바오띠와 놀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밖으로 나와 제멋대로 짖지 않았고, 붙잡혀 가지도 않았다. 나는 60여 년 이래 처음으로 가산을 차압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물건을 들고 들락날락했으며, 몇 사람은 큰 소리로 호통치고, 어떤 사람은 항아리와 단지를 내던져 깨뜨렸다. 이 광경은 정말로 두려웠다. 10여 일 간 잠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한 끝에 나와 샤오산은 바오띠를 병원에 보내기로 최종 결정했다.

바오띠를 보내버린 뒤,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개 짖는 소리를 들을 수도, 바오띠가 나를 향해 절을 하고 나를 따라 집으로 들어서는 모습도 볼 수 없었지만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짐을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가 수면제의 힘으로도 오랫동안 잠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나도 모르게 바오띠가 떠올랐다.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하는 동안 내가 짐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무거운 것을 젊어졌음을 느꼈다. 나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머리와 꼬리를 흔들고 연이어 절을 하던 강아지가 아니라, 해부대 위에 굽혀져 뱃가죽이 열린 바오띠였다. 강아지 바오띠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해부를 당하는 느낌이었다. 한 마리 강아지를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나는 수치를 느꼈다. 스스로를 보전하기 위해 나는 바오띠를 해부대 위로 보냈다. 나는 스스로를 경멸했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이처럼 부끄럽게 10년 대재난 가운데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참고 견디어내는 고난의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한편으론 스스로를 책망하고, 다른 한편으론 스스로를 보전하려 했으며, 일가족이 자신과 함께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애썼다. 나 자신도 마침내 바오띠가 돼버렸다. 그래도 내가 해부대 위에서 죽지 않은 것은, 행운이 따라준 덕분이었다.

꼬박 13년 5개월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이 건물에 살고 있으며, 매일 이른 아침이면 메마른 풀이 깔린 뜰을 산책한다. 예전의 대나무 울타리는 틈이 없는 벽돌 담장으로 바뀌었다. 이웃집에는 주인이 몇 가구 늘었으며, 높은 담 벽에 창문 두 개를 만들어 때로는 쓰레기를 내버리기도 했다. 애초에 세워놓은 포도나무 지렛대는 벌레에 좀이 슬어 이미 오래 전에 무너져버렸고, 포도나무 넝쿨도 뽑혀버렸다. 오른편 모퉁이에는 커다란 정화조 하나가 늘었는데, 바로 옆에 있는 5층 건물로부터 옮겨온 것이다. 꽃나무 여러 그루가 없어졌고, 꽃을 피우지 못하는 나무가 늘어났다.

나는 지난날 함께 산책하던 사람을 그리워한다. 푸른 풀이 요처럼 깔려 있을 때 그녀는 허리를 굽히거나 땅 위에 앉아 잡초를 뽑곤 했으며, 점심 전후로는 바오띠와 함께 놀았다. 나는 마치 한바탕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온 동산의 상처는 나의 마음을 기름 솥에 넣고 졸이는 것 같았다. 내 자신이 과거 10년 동안의 고통스런 생활을 끝맺음하여 마음의 빚을 갚지 않는 한, 이와 같은 마음 졸임에 결말이 있을 리 없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의 앞날도 잘 보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10년도 견디며 살았다.

설령 거짓말이 만연한 시기였을지라도,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더군다나 오늘 나는 사람들의 조소가 두렵지 않기 때문에 “바오띠를 그리워하며, 그에게 사죄하고 싶다.”고 말하려 한다. (1980년 1월 4일)
by sonnet | 2010/03/24 19:38 | 문화 | 트랙백(1) | 핑백(1) | 덧글(20)
바진(巴金) 수상록 선집 비교
중국 작가 바진(巴金)이 만년에 쓴 수필집 『수상록隨想錄』은 총5권으로 각 권에는 30편의 수필이 수록되어 있다. 출판시장 사정상 이걸 완역해 내놓기는 어려웠던 듯, 국내에는 이 중 일부만 뽑아 한 권으로 편집한 선집 형태의 책이 2종(『파금수상록』과 『매의 노래』) 출간되어 있다. 당연히 두 책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은 동일하지 않은데, 필요한 내용을 찾아 보는데 다소 불편함을 느꼈던 관계로 한 번 정리해 보았다.

(클릭하면 확대)

참고로 저작권이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상록 중국어 전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by sonnet | 2010/03/01 03:30 |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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