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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제2차세계대전
2014/05/28   일상에서 비상으로 [22]
2008/08/11   "그렇게 바보일리는 없다"는 가정 [93]
일상에서 비상으로

전 세계의 강대국이 모두 뛰어들어 싸웠던 제2차 세계대전, 이 전쟁에서 가장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했던 것이 독일군이었다는 데는 광범위한 동의가 이루어져 있다.

잘 알려진 군 사가(軍 史家)인 판 크레펠트 또한 이를 지지하는 저서를 남긴 바 있다. 그는 독일군 신화의 허상을 깨겠다고 연구에 뛰어들었다가 독일군의 저력을 확인하고 전향한 사람도 있을 정도라면서, 독일군의 전투력에는 장비의 질적 우수성이나, 뛰어난 전략 같은 것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T.N.두푸이의 다음과 같은 논평을 인용한다.

결국 연합군이 최후의 승자가 되었지만 독일군이 일관하여 숫자가 훨씬 많은 연합군과 싸워 이겼음을 기록은 보여주고 있다. 개인 대 개인을 비교하면 독일 육군 병사들은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영국군이나 미군을 상대하여 그들이 당했던 것보다 50% 더 높은 손실을 계속 가하였다. 이것은 독일군이 공격하든 방어를 하든 항상 마찬가지였으며 숫적으로 적거나 부분적으로 우세하였을 때, 공중 우세를 달성하였거나 그렇지 못하였을 때, 이겼거나 패하였을 때에도 항상 그러하였다.

크레펠트는 그 비밀을 독일'군'을 구성하고 있는 일련의 독특한 조직문화에서 찾는다. 지휘원칙, 교리, 상벌, 군행정 등 모든 것이 전투효율의 극대화를 중심으로 잘 짜여져 있어서 놀라운 조직의 응집력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리한 상황에서 탁월하게 싸울 뿐 아니라, 반대로 압도적으로 강한 적에게 둘러싸여 모든 희망이 사라진 상태에 몰려도 무너지는 대신 끝까지 적에게 큰 피해를 주며 버티는 저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이 정도면 조직으로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단한 독일군의 첫 작전에 대해, 당시 독일군 3군단 정보참모였던 폰 멜렌틴은 흥미로운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은 독일 병사들에게 “피를 흘리는 전쟁을 맛보게 했고”, 그들에게 실탄을 가지고 하는 실전과 평화시 기동훈련과의 차이점을 일깨워 주는데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개전 초기에 아무리 잘 훈련된 부대라 할지라도 전투 상황 하에서 얼마나 “두려움을 갖게 되고 흥분하기 쉬운가”를 나는 알았다. 저공을 나는 항공기 한 대가 군단 전투 사령부 상공을 선회할 때 모든 독일 병사들은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들고서 사격을 가했다. 한 공군 연락장교는 모든 사격을 중지시킨 후, 흥분된 병사들에게 이것은 독일의 지휘용 항공기인, Fieseler Storch라고 소리치며 뛰어 다녔다. 잠시 후 항공기가 착륙하고 독일군 근접항공지원담당 공군 장군이 내렸다. 그는 이 우스꽝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 했다.

객관적이고 거시적으로 보면 훈련 및 장비가 모두 부적절했던 폴란드군은 쉬운 상대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독일은 2차대전의 첫 교전국이었던 폴란드를 아주 가볍게 제압했다. 하지만 지금 살펴본 것처럼 당사자들 개개인도 꼭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일상에서 비상으로의 전환, 특히 갑작스런 전환은 매우 어렵다. 훈련만 하다가 전쟁에 투입된다거나, 일상적인 생활을 하다 갑자기 사고를 맞이한다든가 하는 일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이렇게 갑작스런 전환과 신속히 해내야 할 과제가 함께 주어지면, 그 문제에 직면한 개인이나 조직은 대단한 어려움을 겪게 되고 객관적으로 보면 매우 쉬워보이는 일조차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보통이 된다.

어떤 일에 대해 사후적으로 이렇게 혹은 저렇게 했어야 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리고 그런 것을 지적하는 것도 평가와 반성을 위해 중요한 과정이긴 하다. 하지만, 그러한 지적사항 하나하나가 비상사태 때 실제로 다 지켜질 수 있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상당히 가혹한 판단이다. 종합적인 평가에는 일상에서 비상으로의 전환이 가져오는 엄청난 충격이 충분히 고려될 필요가 있다.


참고
Von Mellenthin, F. W. Panzer battles, 1939-1945.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1956. (민평식 역. 『機甲戰鬪』. 서울: 병학사, 1986. pp.20-21)
Creveld, Martin van. Fighting Power: German and U.S. Army Performance, 1939-1945. Greenwood Press, 1982. (주은식 역, 『전투력과 전투수행』. 서울: 연경문화사, 1994. p.15)
by sonnet | 2014/05/28 15:05 | 정치 | 트랙백 | 덧글(22)
"그렇게 바보일리는 없다"는 가정
그루지아-러시아 전쟁 (corwin)에서 트랙백

밸리에 올라온 이런 이야길 읽고 있으려니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이 자신의 어릴 적을 회상하며 썼다는 동시 한 편이 떠오른다.

아플 적이면 침대에 누워
두 베게 사이에 머리를 묻고
장난감이란 장난감을 양 옆에 늘어놓고
하루종일 행복하게 지냈지.

때로는 한 시간 동안이나
나의 주석 인형들이 행진하는 걸 보곤 해
형형색색의 군복과 무기를 든 채
이불 사이로 언덕을 넘어

때로는 함대의 내 배들을
이불 위 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때로는 나무와 집들을 꺼내서
이 모든 도시를 짓기도 하지.

나는 베게에 걸터앉은
위대한 거인
앞에는 골짜기와 평원
아 즐거운 이불의 땅


- 『이불의 땅』(The Land of Counterpane) -


전쟁에 임해서 이처럼 양쪽의 군대를 모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면 전쟁하기가 좀 쉬우랴마는, 그런 일은 혼자서 하는 놀이에나 가능하다. 이번 남오세티야 전쟁은 장난감 병정놀이가 아니거니와, 러시아군 또한 샤카슈빌리의 병정놀이에 등장하는 주석인형일리 없다.


또한,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루지아쪽에 승산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삼척동자도 예측 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루지아 역시 그걸 몰랐을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질 전쟁을 왜 시작 했는가? 간단히 말해서 잃을건 별로 없고, 얻을 건 확실하기 때문이다. (corwin)

그런 의미에서 다른 직접적인 증거 없이 정황 추리에만 의존하는 이런 식의 예측이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면, 사실 아돌프 히틀러야말로 그러한 역할에 어울리는 주인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독일 군부의 절대 다수는 새로운 총력전은 독일측에게 크게 불리한 정도를 넘어 파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군사고문들은 독일이 또다시 새로운 세계대전을 감행하는 것은 절대 시기상조이며 전쟁 발발과 동시에 대재앙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히틀러에게 수차례 경고했다. (p.49)

폴란드를 침공하기 14일 전, 토마스 육군소장이 “전시경제의 기반 여건상 독일은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내놓자 국방군 총참모장 카이텔 장군은 그를 제지했다.
“[히틀러는] 내게 독일이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소. 히틀러의 견해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은 부패한 평화주의자들이고 영국도 타락하여 폴란드를 실제로 도와주지는 못할 것이오. 그리고 미국도 영국을 대신해 화염속 장작 같은 폴란드를 구하기 위해서 단 한 명의 병사도 유럽으로 보내지 않을 것이오. (pp.54-55)

전쟁 발발 시점까지도 독일 해군은 아직 재건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건조 중이던 전투함과 중순양함을 제외하면 이들은 겨우 3척의 소형 전함과 수척의 구축함, 그리고 57척의 잠수함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 9월 초 대서양 방면으로 즉각 투입 가능한 전력은 2척의 전함과 23척의 잠수함뿐이었다. 해군 총사령관 라에더 제독은 전쟁 발발 시 절망적일 정도로 약세인 독일의 해군 전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독일 해군은 장렬히 전사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p.50)

Frieser, Karl-Heinz., Blitzkrieg-Legende. Der Westfeldzug 1940, Oldenbourg Wissenschaftsverlag GmbH,1995 (진중근 역, 『전격전의 전설』, 일조각, 2007)


물론 히총통에게도 나름의 계산이 있기는 했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결정했을 때 이번에도 서방국가들이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1939년 8월 22일 히틀러는 오버잘츠베르크에 있는 그의 산장에 소수의 고위급 장성들을 소집해 비장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현재 국제 정세상 영국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도 (출산율 저하로) 병력이 부족한 상태이며 군비도 빈약하다. 포병만 해도 매우 노후하다. 프랑스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다. […]
다시 말해, 영국은 사실상 폴란드를 지원할 수 없다. […] 적들의 군사적 개입은 불가능하다. […] 적들은 나의 위대한 결단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적들은 하찮은 벌레새끼에 불과하다. 나는 뮌헨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Frieser, 앞의 책, p.53

그는 자신의 계산을 과신했기 때문에 상식적인 조치마저도 금지시키곤 했다.

카이텔을 비롯한 몇몇 장성들은 ‘서방과의 전쟁 시 군사적 상황을 구체화’하기 위한 소위 ‘전쟁 연습’을 수차례 시도했지만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이를 단호히 묵살해버렸다.

“서쪽에 대해서는 서부 방벽 안전보장 차원을 넘어서는 훈련은 일체 없어야 한다. 폴란드 문제에 관한 한 서방과의 어떠한 군사적 충돌도 피해야 하며, 있을 수도 없다. 그러한 불가능한 예측(!)에 대해 토의하다가 비밀이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정치적 협상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Frieser, 앞의 책, pp.56-57


영국이나 프랑스에게도 나름의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정치나 전쟁에서 예측의 정확도는 결코 높지 않다. 위험한 도박을 여러 차례 반복하다 보면 틀리지 않을 재간이 없는 것이다. 일단 제멋대로 내린 자신의 희망적인 예측(wishful thinking)이 헛다리를 짚게 되자 총통은 어쩔줄 몰라 했다.

1939년 9월 3일, 히틀러의 통역실장 파울 슈미트는 수상관저에서 영국의 선전포고문을 통역할 때의 싸늘하고도 묘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통역을 마치자 그곳은 침묵으로 휩싸였고 […] 히틀러는 돌처럼 굳은 채 가만히 전방을 바라보았다. 훗날 알려진 것처럼 흥분하거나 미쳐 날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자에 미동도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영원처럼 느껴진 잠깐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갑자기 히틀러는 창백한 모습으로 창가에 서 있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를 분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마치 리벤트로프가 영국의 반응을 잘못 알렸다고 지적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리벤트로프는 목멘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아마 프랑스도 머지않아 우리에게 동일한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낼 것 같습니다.’ […] 괴링은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또다시 패배한다면 과연 신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까?’”

Frieser, 앞의 책, p.49)

과연 이런 반응이 "잃을건 별로 없고, 얻을 건 확실하기 때문"에 시작한 전쟁의 모습일까?

1939년에 나치 독일이 보여준 과감한(?) 전쟁으로의 돌입은 다른 직접적인 근거를 전혀 갖지 못한 당시의 외부관찰자들에게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이런 것이었던 게다.


다음엔 미국의 사례를 보자.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중국의 개입의도나 규모를 얕잡아 보다가 졸지에 수백 km를 퇴각해야 하는 참담한 패배를 겪었다. 세계 최강의 공업국 군대가 일본군에게도 맥을 못 추던 중국 농민군에게 쫓겨난 것은 망신살이 뻗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미국이 갖고 있던 판단의 근거는 어떤 것이었던가?

우선 근거없는 호언장담이 있었다.

대통령은 10월에 어째서 그렇게 낙관적일 수 있었을까. 그가 낙관적이었던 것은 주로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가 자신 있는 다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단적으로 대통령에게 (트루먼이 그들 사이의 대화 내용을 회고한 바에 의하면) “중공군이 한국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들은 영락없이 참변을 당할 것이나, 그들이 그런 무모한 짓을 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Neustadt, Richard E., Presidential Power and the Modern Presidents: The Politics of Leadership from Roosevelt to Reagan(Rev. Ed.), Free Press, 1991
(이병석 역, 『대통령과 권력』, 효형출판, 1995, pp.220-221)


그러나 좀 더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견해가 그 뒤를 받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행위에 대한 이해가 적었던 미국은 중국의 한국전 개입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우선 당시 미국은 중국의 작전능력이나 행동반경을 과소평가했다. 미국의 주요 정책결정자들은 중국대륙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지만 그 정권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현대화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고, 특히 내부통치에 많은 난관을 안고 있기 때문에 외부에 대한 행동반경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국가이익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중·소간에 개재하는 국가이익상의 근본적 충돌요인이 중국으로 하여금 한국에 있어서의 행동을 자제하게 할 것으로 믿었다. 동시에 미국은 외국군대의 중국 국경지역 진출이나 군사적 압박이 중국의 국가이익(즉 안전과 국가위신 유지)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과소평가했다. 특히 당시 미국은 북한이 중국의 동북과 화북지역에 대한 역사적 침공통로의 위치에 있어 중국의 생존에 전략적으로 극히 중요한 관건적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고려가 없었던 것 같다.

박두복,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원인,” 『한국전쟁과 중국』, 백산서당, 2001, p.158

이러한 평가들은 사실 어느 정도씩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대륙 통일 직후의 중국이 내정이 안정되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사실 중국공산당 지도부 내에서는 참전반대 의견이 대세를 이루었고, 마오쩌둥은 내심 중공군 사령관으로 내정해 두었던 린뱌오가 참전을 반대하자, 다른 사령관을 황급히 물색해야 했다.
'중·소간에 … 국가이익상의 근본적 충돌'이 있다는 것도 통찰력 있는 관찰이었다. 이 점은 후에 중소분쟁을 통해 가시적으로 확인되었고 키신저는 이를 이용해 두 나라 사이에 쐐기를 박는 전략을 추진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상당한 근거가 있는 판단조차도 결과적으로 종종 틀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옳은 판단이었을 뿐 문제에 관련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분야에서의 예측력은 이처럼 제한되어 있다. 그리고 전쟁 같은 중대사에서 이런 오판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곤 한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오판은 미국 지도부만 벌인 것이 아니었다. 그 반대편에 있던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도 초반의 운좋은 승리에 눈이 멀어 오판을 거듭했다. 중국 역사가들조차도 이 점을 비판한다.

중국군대는 우연히 두 차례 매우 성공적인 기동전을 진행시켰다. 모스크바나 평양은 모두 이에 고무되어 마오쩌둥에게 그 전략을 철저히 실행해 줄 것을 요구했고, 마오쩌둥 본인 역시 맹목적으로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인천상륙에 성공한 미국이 적을 가볍게 본 것과 같이 중국지원군의 최초 전과는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전략방침의 정확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때 현실환경과 객관적 조건은 마오쩌둥이 설정한 전략방침의 성공을 어렵게 하는 것이었다.

沈志華,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결정에 대한 평가,” 박두복 편, 『한국전쟁과 중국』, p.265


전쟁이 상상 밖으로 순조로워지자 그는 미국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그의 적 섬멸의 욕심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11월 초에 지원군의 제1차전역이 막 끝났다. 소련의 무기장비는 도착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미군 4,5개 사단을 전멸시킬 계획을 제안했다. 심지어 “미군은 장제스군보다 전투력이 떨어진다”고까지 했다. 11월 중하순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를 포함해서 그는 자신 있게 적에게 한두 차례 큰 타격을 주면 우리는 방어에서 진격으로 바뀔 수 있고, 따라서 중국은 정전건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楊奎松, “중국의 한국전 출병 시말,” 박두복 편, 『한국전쟁과 중국』, p.311

당연한 이야기지만 미군이 장제스군보다 전투력이 떨어질 리가 없었다. 중공군이 거둔 대승은 주로 미군이 교만하게 적을 무시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지 자신의 실력으로 거둔 것이 아니었다. 사실 현지사령관인 펑더화이는 한계를 절감하고 이정도에서 딴 돈을 현금화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었다.

펑떠화이는 [1951년] 1월 27일 마오쩌둥에게 전보를 보내 정전을 생각하도록 건의하였다. “제국주의의 내부 모순을 증가시키기 위해, 중조 양군은 유기한 정전을 지지한다, 인민군·지원군은 오산-태평리-단구리 선으로부터 북쪽으로 15 내지 30 킬로미터 철수했다고 방송할 수 없습니까? 동의한다면 베이징에서 방송해주십시오. […] 적이 계속해서 북침하면 우리는 전력을 다해 출격해도 1개 사단 이상은 소멸할 수 없습니다. 교두보의 진지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곤란합니다. 출격하면 정비·훈련계획은 파괴되어 버립니다. […] 적의 북진을 저지하지 못하면, 정치적으로 서울·인천의 포기를 허용하지 않으면 각 부서는 반격하도록 몰리게 됩니다. 그러나 각 방면에서 고려할 때 매우 무리한 일입니다.”

和田春樹, 『朝鮮戰爭』, 巖波書店, 1995
(서동만 역, 『한국전쟁』, 창작과비평사, 1999, p.217)

마오쩌둥은 왜 오판한 것일까?

마오쩌둥은 전략에 조예가 깊어 국민당과의 수십 년 투쟁에서 … 승리를 거두었고, 저우언라이 역시 … 걸출한 외교능력을 과시한 바 있는데, 어째서 한국전쟁에서는 사지에서 군사적 목표를 거두지 아니하고 외교전선에서도 그와 같은 행동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 원인은 첫째로 중국혁명이 승리하자 마오쩌둥은 세계혁명을 지원하는 더욱 원대한 포부와 이상을 갖게 되었고, 둘째로 미군이 의외로 “일격에도 버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소련공군의 적시 참전이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필승의 신념을 갖도록 했고, 셋째로 소련, 북한이 가한 압력이 그로 하여금 눈앞의 성공에서 물러날 수 없도록 했으며, 넷째로 이제 막 산에서 내려와 대도시로 들어간 중국의 지도자들에게 국제무대에서의 외교경험과 지식이 부족했던 것 등이다. 다른 해석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이때 마오쩌둥의 마음속의 궁리는 분명했고 그가 중국군대를 위해 설정한 전략방침은 비현실적이었다.

沈志華, 같은 글, pp.271-272

센즈화는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말인즉 너무 쉬운 승리를 보고 간이 부었고 그것이 평소부터 품고 있던 이데올로기적 망상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양쿠이쑹 또한 비슷한 이야길 전하고 있다.

엄격히 말해 마오쩌둥이 미국을 바다로 쫓아내려고 전쟁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실패는 미군이 강하다는 인상을 남겨 주었다. 출병 전 쌍방의 장비와 화력의 차이에 대한 우려는 지원군에게 “미·영군은 잠시 피하라(가능하다면)”고 재삼 당부하게 했으며, 남한군을 먼저 공격하고는 “미국과 외교담판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지원군의 처음 승리는 마오쩌둥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그는 한반도에서 그의 ‘종이호랑이’론과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긴다는 혁명철학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는 양군의 장비·화력 등의 차이를 잊고 ‘정의의 군대’의 역량을 믿었다. 부대의 용감성과 민첩한 전술에 의지하면 “아군은 고도로 우월한 장비와 제공권을 가진 미군에 승리할 수 있다”고 보고, 병력을 집중해 일거에 미군을 섬멸하고, 심지어 몇 개 사단의 주력을 섬멸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심리에서 마오쩌둥은 본래 중국에 극히 유리한 외교 조정안인 UN안을 거절했다.

楊奎松, 같은 글, p.316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센즈화와 양쿠이쑹은 이러한 결정이 중국에게 정치, 군사, 경제, 외교 모든 면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만든 명백한 오판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한국전쟁이 미국에게 자괴감을 안겨 주었다면, 중국 역시 전쟁의 승리자는 아니었다. […] 전쟁의 결말은 중국이 기대한 목표[북한의 구원]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런 목표는 이미 2년 반 전에 실현되었다. 문제는 중국이 이후 2년 반 동안이나 […] 불필요한 대가를 치었으며, 그 실제 효과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중국 측의 병력손실은 절대다수가 중국이 유엔의 제의를 거부해 미군이 반격을 개시한 이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결국은 중국이 한국전에 참전한 동기와 목적은 본래는 합리적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마오쩌둥이 이를 위해 세운 전략방침은 오히려 현실조건과 괴리된 것이었다. 중국 정책결정의 근본적인 과오는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 시의적절하게 휴전할 기회를 놓친 것에 있는데, 이는 미국이 38선을 넘을 때 저지른 정책적 과오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과오의 주요인은 자신의 역량을 과도하게 평가한 데 있다. […] 결국 한국전은 중국과 미국 쌍방에게 승자가 없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沈志華, 같은 글, pp.272-279



예로부터 전쟁의 대가들은 이런 불확실성을 거듭 강조해 왔다.

보오, 보불전쟁의 승리를 감독한 프러시아군 총참모장 大몰트케는 전쟁계획이란 적과 최초 접촉할 때까지의 과정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일이 그 이전에 세웠던 계획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는 것이다. 폰 클라우제비츠도 전쟁에는 불완전한 상황판단, 혼란과 마찰이 있기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전쟁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전쟁을 아는 사람 사이의 변화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인가를 얘기하는 것은 어렵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곳에서 작용하고 있는 요인을 정의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전쟁에서의 모든 것은 대단히 단순하다. 그런데 너무나 단순한 이것이 오히려 더 어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 어려움은 누적되어 전쟁을 아직 보지 못한 자는 상상도 못할 마찰이 있다. […] 전쟁에 있어서 탁상의 계획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소한 사정 때문에 일체가 최초의 어림보다 낮거나, 소정의 목표에 미달하는 것이 통례이다.
[…] 전쟁에서의 행동은 마치 저항이 많은 매체 속의 운동과 비슷하다. 예컨대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간단한 보행이라는 운동일지라도 물 속에서는 쉽게, 그리고 정확히 할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쟁에서도 보통 평범한 힘을 가지고는 중간 정도의 성적을 얻기도 불가능하다.
[…] 더욱이 한 마디 첨가해 둘 것은 어떠한 전쟁에도 반드시 여러 가지 많은 특수한 현상이 수반되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암초가 많은 미지의 바다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총명한 장수라면 그러한 것을 예상할 수는 있지만, 육안으로 그것을 확인할 수가 없다. 장수라고 할지라도 전쟁에 임한다는 것은 마치 어두운 밤의 바다를 항행하는 것과 같다.

Clausewitz, Karl von., Vom Kriege, 1832
(이종학 역,『전쟁론』, 일조각, 1974, pp.70-73)



그렇다면 그루지야의 합리적 선택을 지지하는 논거는 무엇이었는가.

또한, 올림픽 기간을 고른 것은 무엇보다도 광고 효과 때문이었을 것이다. […] 동시에 이 사건을 계기로 서방에 그루지아의 친서방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른 경제적, 정치적 실리 효과는 이번 사건만 안정적으로 해결된다면 매우 크리라고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corwin)

광고효과라…. 현재 국제사회에는 그루지야의 짧은 전쟁보다 더 관심을 끌만한 전쟁이 여럿 있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의 관심은 3개월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그 정도 시간은 이번에 피해를 입은 그루지야군의 전력복구에 드는 시간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이번 전쟁은 샤카슈빌리 대통령의 무정견을 폭로한데 불과하다. 현 시점에서 서유럽 국가들 중 그루지야에서 러시아와의 새로운 대결을 바라는 국가는 하나도 없다. 게다가 미국은 이미 발빼기 힘든 두 개의 전쟁에 휘말려 있고, 이란과 북한이라는 두 나라의 핵개발 문제를 다루는데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대선 직전이라 효과적인 대응이 어렵다. 이번 시점은 의도적인 전개를 위해서는 결코 좋지가 않은 선택이다.

결국 이런 해석은 우선 '그루지야도 바보는 아닐 것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그 전제를 참으로 만드는 해석을 무리해서라도 찾아나간 것이다. 즉 목표에 맞춰 답을 찾는 과정을 밟은 셈이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강을 건너면 너는 위대한 제국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모호한 델포이 신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한 이래, 국가지도자들이 전쟁과 관련된 상황을 오판한 것은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우, 상대가 겁먹고 물러나기만을 기대하면서 치킨게임을 벌이다가 세계대전의 방아쇠를 당긴 세 명의 황제 - 독일의 빌헬름 2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프란츠 요제프,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 가 있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의 제국은 모두 무너졌다. 미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수정구가 있었다면, 이들 중 누가 감히 그런 전쟁에 뛰어들었겠는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신속한 승리를 믿었던 사담 후사인이나 그의 적수 이맘 호메이니 또한 모두 오판에 오판을 거듭했다. 이들 역시 미래의 참담한 결과를 알았더라면 그런 모험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사례는 끝없이 발굴해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외교안보군사 문제에 관한 한 일국의 지도자가 그렇게 바보일리 없으니 몇 수 앞을 내다보며 사태의 전개를 예측한 후 행동에 나섰을거라는 주장은 과도하게 합리적인 생각이며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지지될 수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라면 Patrick Lang 대령이 좋은 말을 남겨준 바 있으니 그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기로 하자.


No. It's stupidity. Never underestimate the power of stupidity.

by sonnet | 2008/08/11 11:26 | 정치 | 트랙백(3) | 핑백(3) | 덧글(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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