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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정상사고
2014/09/08   재난에 대한 단상(1) [29]
재난에 대한 단상(1)
요즘 이런 저런 사고/재난에 대한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아서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서너 회 정도에 나누어 해볼까 한다. 최근의 실제 사례에 대해선 각자 입장대립이 강고할 수도 있으니까 가볍게 다소 막연한 사례로부터 시작해 보자.

다음은 사회학자 Charles Perrow의 책 Normal Accidents 서문에서 가져온 예시이다.


어떤 하루

오늘 당신은 오전에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 있다. 당신의 배우자는 유리 커피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은 채 먼저 집을 나섰다. 당신이 확인했을 때 커피는 이미 다 말라버렸고, 주전자에는 금이 가 있다. 매일 아침 꼭 커피를 마셔야 하는 당신은 찬장을 뒤져서 드립식 커피 메이커를 찾아낸다. 당신은 시계를 보며 물이 끓기를 기다리다가 급히 커피를 들이켠 후 서둘러 집을 나선다. 그러나 주차장에 가서야 차 열쇠와 아파트 열쇠를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당신은 평소 비상시에 대비하여 보조 열쇠를 문 옆에 숨겨두지만(이는 ‘여분redundancy’이라는 안전장치에 해당한다) 오전에 집에 들러 책을 가져갈 친구에게 줘 버렸다. 그래서 ‘여분 경로redundant pathway’가 사라져버렸다.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당신은 그냥 세워놓는 일이 많은 이웃 할아버지의 차를 빌리기로 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하필 지난주에 제너레이터가 고장 나서 수리를 맡겨 놓은 상태다. 당신은 열쇠와 직접적으로 연계되지 않은 독립적인 ‘비상수단’으로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제 남은 수단은 대중교통뿐이다. 이웃 할아버지는 파업 때문에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고 알려준다. 전화로 택시를 불러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버스 파업과 택시의 부족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당신은 면접관의 비서에게 어렵게 사정을 설명하고 날짜를 뒤로 미룬다. 물론 당신은 그날 아침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합격할 확률은 대단히 낮다. 그렇다면 이 ‘사고’의 주요 원인은 무엇일까?

1. 인간적 실수(커피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놓거나 열쇠를 집에 두고 나온 것)?
그렇다( ) 아니다( ) 불확실( )
2. 기계 고장(이웃 할아버지 차의 제너레이터 고장)?
그렇다( ) 아니다( ) 불확실( )
3. 환경(버스 파업과 택시 부족)?
그렇다( ) 아니다( ) 불확실( )
4. 시스템 설계(열쇠를 안에 둔 채 잠글 수 있는 문이나 비상시 가용 택시의 부재)?
그렇다( ) 아니다( ) 불확실( )
5. 절차(유리 주전자에 커피를 데우는 것이나 평상시보다 일찍 일어나지 않은 것?)
그렇다( ) 아니다( ) 불확실( )

Perrow, Charles. Normal Accidents: Living With High-Risk Technologies. 2nd Ed.,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9.
(김태훈 역,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 서울: 알에이치코리아. 2013, pp.14-15)


이어지는 저자의 견해와 해설을 듣기 전에 잠깐 멈춰서 자신의 생각을 점검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모든 문항에 대해 ‘아니다’ 혹은 ‘불확실’을 선택했다면 나와 같은 입장을 취한 것이다.

첫 번째 문항에 ‘그렇다’라고 대답했다면 다발적 장애에 따른 사고에 대해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조사위원회와 같은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 위원회는 사고와 관계된 모든 사람, 특히 운용자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반면 원전 건설사인 밥콕 앤 윌콕스Babcock and Wilcox는 운용자들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문항에 ‘그렇다’라고 대답했다면 스리마일 섬 원전을 운영한 메트로폴리탄 에디슨Metropolitan Edison과 같은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들은 밸브에 문제가 있어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하면서 밥콕 앤 윌콕스를 고소했다.

네 번째 문항에 ‘그렇다’라고 대답했다면 원자력규제위원회Nuclear Regulartory Commission의 의뢰로 제어 체계를 분석한 에섹스Essex와 같은 입장을 취한 것이다.

사실 최선의 대답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사고의 원인은 시스템의 복잡성에 있다. 설계, 설비, 절차, 운용자, 환경 같은 각 요소의 장애는 개별적으로는 사소하다. 완벽한 것은 없기 때문에 개별적 장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개별적 장애를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차 열쇠를 집에 두지 않았거나 이웃 할아버지의 차가 고장 나지 않았다면 버스 파업은 당신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택시가 있었다면 이웃 할아버지 차의 고장은 별로 문제 되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면접이 아니었다면 교통수단이 없다는 것은 대수롭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아침이었다면 깨진 커피 주전자는 단지 짜증나는 일에 불과할 뿐 서두르다가 열쇠를 둔 채 집을 나서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개별적 장애는 사소하고 비상수단이나 여분 경로를 지니지만 다른 장애와 상호작용을 일으킬 경우 문제가 악화된다. 사고는 다발적 장애의 상호작용에 기인한다. 우리는 때로 버스 파업이 일어나고, 열쇠를 안에 둔 채 문을 잠그고, 보조 열쇠를 친구에게 빌려줄 것을 예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리란 예상은 못 한다. 그래서 비서에게 면접 시간을 지키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머피의 법칙이 작용하면 잘못될 수 있는 일은 잘못되기 마련이다.

앞서 예로 든 ‘사고’의 원인은 개별적 장애가 아니라 세상의 상호작용성과 긴밀한 연계성에 있다. 우리는 대개 세상의 내재적 연계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 장애가 발생하지 않거나 다발적 장애 사이의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별개로 여겼던 요소들(커피와 빌려준 보조 열쇠, 버스와 제너레이터)이 긴밀하게 연계된다. 상호작용성을 지닌 시스템이 긴밀하게 연계될 때 드물기는 하지만 ‘정상’ 사고가 발생한다. 이러한 사고의 발생이 정상인 이유는 잦거나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정상 사고는 드물게 일어나고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정상 사고가 발생하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고는 시스템의 내재적 속성이 때로 일정한 상호작용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정상이다.


저자는 여러가지 요소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측면을 강조한다. 그것은 각 요소들을 연결하는 소위 "구조"일 수도 있지만, 설계자나 운용자 입장에서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명징하고 간략화된 뼈대로서의 "구조"의 특성과는 좀 다르다. 좀 다르게 표현하자면, 설계자나 운용자는 구조를 잘 모르는 미지의 복잡한 장치 위에 막연히 올라타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요소가 각자 일정한 기여를 하고, 요소들간의 관계까지 거기에 추가되면 딱부러지게 사고 원인을 밝히기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대신 흔히 말하듯이 사고 원인의 규명이 "사회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 저자의 생각이 꼭 옳은 것이 아니고 그와 다른 판단을 한 여러분들의 생각이 옳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인용문 중간에도 등장하지만 스리마일섬 사고조사위원회부터가 저자와 다른 판단을 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다음 편에서 좀 더 이야기해보기로 한다.
by sonnet | 2014/09/08 18:11 | 정치 | 트랙백 | 핑백(2) | 덧글(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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