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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전시공산주의
2008/08/18   넵만과 꿀라끄 처리 논쟁에 비추어본 친일청산 [92]
넵만과 꿀라끄 처리 논쟁에 비추어본 친일청산
넵만과 꿀라끄에 대한 이야길 간단히 써 보겠다고 했으니 정리해 보도록 하지요.

소련 초기는 경제정책의 대전환을 중심으로 보면 전시공산주의, 신경제정책(NEP), 5개년계획의 시작 이런 단계로 넘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NEP 말기에 NEP를 계속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갖고 소련 내부에서 아주 중요한 정책논쟁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제가 이번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참고가 된다고 보는 부분입니다.


전시공산주의(1918년 중반~1921년 중반)

이 시기는 기본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입니다. 독일에게 막대한 양보를 하고 간신히 휴전조약을 맺고 나자 대규모 내전이 터지고 서방 연합국들도 간섭에 나섬으로서 신생 볼셰비키 정권은 큰 위기에 빠집니다. 이들은 정권을 잡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기회가 오자 덥석 정권을 장악한 것이라 많은 시행착오를 겪습니다.

혁명 직후에 볼셰비키들은 생디칼리즘적 성향을 많이 보입니다. 말하자면 군대나 직장에서 봉기를 일으켜 장교와 경영자들을 몰아낸 후, 병사 위원회나 노동자 위원회를 만들고 선거로 지휘부를 뽑아 운영하자는 것이지요. 이 방식은 일단 볼셰비키에 반하는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널리 선전됩니다.

그러나 레닌은 곧 이 방식으로는 일이 잘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게다가 평시면 또 모르겠는데 적백내전이 한창인 중에는 물자동원의 필요성이 절대적이었던 거지요. 결국 레닌은 규율을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닥치고 위에서 임명한 책임자에게 절대복종하란 겁니다.

부하린, 라데크, 오볼렌스키 등 볼셰비키 좌파들은 이와 같은 레닌의 결정에 반발합니다. 그들은 레닌이 상명하복의 규율 뿐 아니라 물질적 동기나 성과급 지급, 부르즈와 전문가들을 후한 조건으로 고용하도록 할 것 등을 강조한데 대해서 분노하면서 레닌이 국가자본주의로 선회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얼굴 두꺼운 레닌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받아치는데, 이 때 등장한 말이 저 유명한 「좌익소아병」입니다. 현 상황이 어떤지 뭣도 모르면서 얼라들처럼 칭얼댄다는 거지요. 이에 열불난 레닌의 추종자들도 레닌이 과거에 했던 말들을 쓸어 모아 반격합니다. 『국가와 혁명』에서는 노동자보다 전문가가 봉급을 더 많이 받아서는 안 된다고 쓰지 않았나? 노동자통제를 찬양하지 않았나? 이걸로 노동자들을 이해시킬 수가 없다 등등. 그러나 역시 레닌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식량이 너무 부족해서 군대와 도시가 굶어죽을 지경이고, 농민들이 식량을 팔지 않으려 하자 ‘식량독재’라고 불린 최후의 수단이 등장합니다. 노동자부대와 경찰을 투입해 꿀라끄(부농)들이 숨겨놓은 식량을 몰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빈농들을 부추겨 부유한 이웃들을 터는데 동참하게 유도합니다. 그리하여 곡물몰수는 농촌에서의 계급전쟁과 병행해 진행됩니다. 물론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수많은 민란을 일으켜 맞섭니다.

또한 이 시기는 미친 듯이 화폐를 찍어낸 결과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나 곧 화폐경제가 마비됩니다. 노동자들은 현물로 급여를 받았고, 기업과 기업들도 대금결제를 생산물을 서로 주고받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볼셰비키 중 일부는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악을 상징하는 화폐를 폐지할 기회가 절로 찾아온 것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이 시기의 주요한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적 제조업을 금지하려는 시도. 거의 모든 공업의 국유화. 국가가 모든 생산물을 전쟁 목적으로 배정
(2) 효과는 없었으나 종종 실시된 사적 상거래 금지
(3) 농민이 보유한 잉여농산물 압수
(4) 국가가 부분적으로 화폐를 폐지. 배급할 것이 있으면 무료배급
(5) 이 모든 요소들을 테러와 몰수, 징발 등으로 굴러가게 만들려는 노력

이 시기에 엄청난 혼란 속에서 공업생산량은 전쟁 이전의 30% 수준에 턱걸이하고, 농업생산량도 추락합니다. 백군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되자 이번에는 사방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크론슈타트에서는 수병들이 봉기를 일으킵니다.

1921년 2월, 이에 레닌은 중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체제의 생존을 위해 노선전환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신경제정책(NEP)

1921년 3월, 제10차 당대회 회기 중에 강제적인 식량징발을 보다 온건한 식량세로 바꾸기로 합니다. 현물로 부과되는 식량세는 전년도의 징발목표의 절반을 조금 넘는 정도로 크게 낮춰집니다. 이에 따라 세금만 내고 나면 농민들은 나머지 생산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며, 시장에 나가 팔수도 있게 됩니다.
일단 이런 식으로 사적 상거래가 허용되자 자유로운 물품교환의 욕구는 너무 필사적이라 눈덩이처럼 부풀어 거의 모든 분야로 확대됩니다. 사적 상인들이 출현하고 유통망도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당이 변화의 필요를 인정했을 때는, 후퇴의 정도가 징발을 상품교환으로 바꾸는 정도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시작했었지만 결코 거기서 끝나진 않았던 것이지요. 레닌은 1921년 10월의 연설에서 이 생각이 오류이며 환상이라고 솔직히 인정합니다. 유일한 길은 상거래이며, 국가와 당은 거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라고. 당 내에서는 여전히 반발이 있었지만 레닌은 유창한 변설로 이를 제압합니다.

기업 측면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일단 국영화된 많은 중소기업들이 민간에게 현물 혹은 현금을 받고 임대됩니다.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수공업 생산을 수행할 수 있고 (10~20인 이하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소규모 공업체를 설립할 수 있다’란 인가도 떨어집니다. 이 조치에 따라 사적 기업이 급속히 늘어나는데, 수만 개의 영세기업은 제외하더라도, 1923년 10월이 되면 10인 이상을 고용하는 이런 임대기업이 5,700개에 이르고, 1925년에는 200~1000명을 고용하는 보다 큰 기업도 수십 개가 생겨납니다.

이러한 신경제정책은 일반적으로 NEP라고 불렸으며, 이 정책 아래서 부유해진 ‘개인 영리자’는 ‘넵만(nepma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집니다.

넵만들은 서툰 공산당 관리자들보다 기민해서 더 후한 값을 치르고 원료를 확보한다든가 하는 융통성을 발휘해 시장을 리드해 나갑니다. 국영기업들도 이런 경쟁에 노출되면서 경영에 어느 정도 개선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상업 부문에서는 1923년이 되자 모든 소매거래의 75%를 개인이 장악합니다. 또 다른 통계를 볼 것 같으면 1922년 모스크바의 경우 넵만은 순도매거래의 14%, 도소매 혼합거래의 50%, 소매의 83%를 통제한 반면, 협동조합은 10%, 국가는 7%에 불과했습니다. 단 1년만의 결과로서는 엄청난 것이지요.

당연히 이런 생산과 상업거래를 지원할 수 있는 안정된 화폐의 도입도 요구되었고 자본주의의 사악한 색종이를 폐지하자는 구호는 쑥 들어갑니다.

심지어 레닌은 외국 자본가를 불러들여 특권을 주어 유전이나 삼림벌채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까지 세웁니다. 외국 자본가들은 신중해서 거친 볼셰비키가 언제 공장을 압수할지 모른다고 생각해 투자를 거의 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한편 1924~25년간의 수출은 21~22년의 9배에 이르고, 농업생산량은 처음으로 1차대전 이전의 수준에 근접합니다.

농업 문제는 매우 복잡한데, 농민은 볼셰비키 체제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 그들은 지주의 땅을 빼앗아 나눠 가졌기 때문에 백군 같은 지주세력이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반면 현 볼셰비키 체제는 그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한 전력을 갖고 있었지요. 더 큰 문제는 농민은 한 치라도 더 많은 땅을 가지길 원하고, 암소나 돼지도 가질 수 있기를 무척 바라고 있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부자가 되고 싶었던 거지요. 문제는 그렇게 되면 그는 저 무시무시한 계급의 적, 인민의 흡혈귀 꿀라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꿀라끄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만 일하면, 농업생산이 증가될 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진짜 딜레마 중 하나였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공업화를 위해서는 도시를 먹여 살릴 잉여농산물이 필요한데, 빈농은 자기 한 가족 추스르기도 힘겨운 존재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잉여농산물은 중농 이상, 그리고 주로 부농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NEP기에는 농업생산을 되살리기 위해 꿀라끄들에게도 전례 없이 온건한 정책이 취해지게 됩니다.


대논쟁

1925년에 이르면 NEP가 성공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확실해졌지만, 그와 함께 중대한 문제가 같이 떠오릅니다. NEP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볼셰비키의 대의에서 벗어나는 길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볼셰비키들의 전형적인 생각을 살펴봅시다.

피르소프(1923)
“… 불가피하게 NEP, 곧 사회주의를 향한 우리의 움직임의 첫 단계가 나타났습니다. NEP는 우리에게 혐오스럽고 불쾌할지도 모르지만, 불가피한 것이죠. 그것은 양보이며 우리의 이상에서 한 발 후퇴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과거로부터 후퇴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이죠.”

라린(1925)
“그(부하린)는 우리에게 결코, 즉 15년 내지 20년 안에는 꿀라끄와 반(半) 지주들 및 상층 부르주아 계급을 몰수하거나 착취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약속을 할 수 없습니다. … 우리는 때가 되면 대규모 사적 기업들을 몰수하고 착취할 것입니다.”


이 당시 볼셰비키들 사이에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었습니다.

우선 볼셰비키 우파의 좌장 격으로 부하린이 있습니다. 그는 NEP는 최소 한 세대 이상 계속되어야 하며, 농민들에게 완력을 쓴다는 것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 정치적으로야 빈농을 지지하는 게 옳을지 몰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잉여농산물은 중농과 부농에게서 나오며 결코 이들을 적대시해선 안 된다. 농민이 부유해지고 성숙해지면 사회주의에 부합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내겁니다.
“모두 부자가 되자.”

다음엔 볼셰비키 좌파가 있는데 여기엔 트로츠키와 프레오브라줸스키 등이 있습니다. 프레오브라줸스키는 소련은 착취할 식민지도 없고 농민을 수탈할 수도 없지만, 공업화를 위해 필수적인 사회주의적 축적이 어디선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제일 만만한 NEP의 핵심인 사적 거래 부문을 착취해서 이런 자본을 만들고 더 빠른 공업화를 진행하자고 주장합니다. 또한 우파가 꿀라끄들에게 너무 너그럽다면서 이들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의 주류는 NEP의 전제에 머물러 있어서, 심정적으로는 좌파를 지지하지만 일단은 우파의 편을 드는 경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스탈린이 있는데, 스탈린은 일단 우파인 부하린과 손잡고 트로츠키와 좌파를 쓸어버린 다음, 좌파의 논리로 무장해서 부하린을 박살냅니다.
그리고 이제 모든 반대자가 사라지자 최고의 강도로, 볼셰비키 좌익 반대파가 주장하던 것보다도 몇 배 더 무시무시하게 농촌을 전력으로 공격해서 약탈하고 집단화를 강행한 후, 그 결과물을 갖고 전쟁준비에 적합한 중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게 됩니다. 스탈린의 농업집단화와 중공업 올인 정책은 무시무시한 희생을 낳았지만,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함에 따라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내용을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해, 역사의 요약은 이 정도로 하고 앞선 토론과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가지요.

제가 앞선 논쟁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한 점은 근래 친일을 아주 넓게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친일을 좁게 정의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글 말미에서 따로 다루겠습니다)

* “일제 하 기득권층에게 기득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지금까지도 외양을 달리하면서 계속 기득권층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하는 아주 큰 원인”
* “이승만 정권이 부농과 사업자로 이루어진 친일 세력의 지지로 성립”
* 좀 심하게 가면 “제국주의 일본에 협력했던 사람들, 그들과 유사한 사고체계, 즉 제국주의 일본의 정책 방향에 동조하고 협력하는 정권을 … 그 이후 지금까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제외하곤 모든 정권의 기본적인 방향성이 (인적구성의 다수와는 무관하게) 결국엔 일제국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 같은 주장도 나오게 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너무 심한 과장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견해들은 “친일파의 후손들이 현재의 한국사회 기득권층을 차지하고 있다”라는 인식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가져오는 감정적 결과는 다음 논평이 아주 잘 보여줍니다.

문제는 결국 친일행각을 속죄했다기 보다는 삼대가 잘먹고 잘살아 오고 있는 꺼삐딴 리의 무리들에 대한 대중의 증오 아니겠습니까. 증오를 발산할 기회를 만들어 주는데 그토록이나 인색했는데도 이만큼 잘 버텨온 지배층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얀까마귀)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앞서 설명한 대논쟁이 친일청산에 대한 논쟁의 일반형태를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NEP를 계속할 것인가 말까를 놓고 1920년대 중반에 볼셰비키들이 벌인 대논쟁은 기본적으로 이념적 대의와 현실이익 사이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념적인 측면에서 볼 때 NEP같은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서 넵만(사적기업인)과 꿀라끄(부농)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낳은 것은 그들이 꿈꾸어 왔던 대의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주제로 바꾼다면 ‘舊친일파들을 활용해서 국가건설이나 경제성장에 이용한 결과 그들이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살게 된다면 이 얼마나 부조리한 일이 되겠는가’ 쯤 되겠군요.

이들 볼셰비키들은 기본적으로 대의에 상당히 충실한 사람들입니다만, 그들이 NEP로 가게 된 이유는 앞서 본 것처럼 전적으로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였습니다. NEP기의 성적이 그처럼 좋아 보이는 것은 그 앞 시기가 워낙 나빴기 때문인 점도 있지요.

그러나 일단 NEP가 예상 이상의 성공을 거두자 볼셰비키 내부의 의견은 둘로 갈라집니다. 전시공산주의 시절, 좌파였던 부하린이 방향을 뒤집어 우파의 좌장으로 등장하는 것이 전형적인 예지요. 반면 다른 볼셰비키들은 부하린이 말하듯이 최소 한 세대 이상 NEP를 밀어주자는 주장은 ‘당이 NEP 부르즈와지의 부속물’로 변하게 되는 길이라고 느낍니다. 이 말은 일리가 있는데, 당의 대의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유형의 지도자인 덩샤오핑이 비슷한 노선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간 결과가 공산당이 지배하긴 해도 실제로는 천박한 자본주의 국가가 되어버린 현재의 중국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볼셰비키들의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는 것이겠지요.

부하린은 ‘정치적으로야 빈농을 지지하는 게 옳을지 몰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잉여농산물은 중농과 부농에게서 나오며 결코 이들을 적대시해선 안 된다’라고 지적했지요. 이 말은 지금 논의에 나오는 단어로 바꾸면 ‘정치적으로야 다 처벌하는 게 옳을지 몰라도 자본과 기술, 행정경험은 舊친일파에서 나오며 결코 이들을 적대시해선 안 된다’쯤 될 겁니다. 그러니 볼셰비키들에게 이 말이 얼마나 불쾌하게 들렸는지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최소 한 세대 이상 NEP를 밀어주자는 주장을 ‘당이 NEP 부르즈와지의 부속물’로 변하게 되는 길이라고 받아들인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것은 이승만이 친일청산을 포기한 결과 이후의 여러 정부들이 모두 기본적으로 舊친일파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정부다라는 관념과 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전시공산주의 시기에 규율을 강화한다거나, NEP로 넘어간다는 중대한 결단을 내리고 당의 방향이 “노선에서 이탈해 우경화”하는데 반대하는 당내 좌파들의 반발을 언제든지 찍어 누를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레닌의 역할도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이는 거물급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성이 드높은 이승만이 왜 舊친일파를 상대적으로 쉽게 덮어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저의 설명이기도 합니다. 김성수나 송진우 같은 친일경력 시비에 휘말리기 쉬운 인물들은 아마 이런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폭넓게 정의된 친일파™에서 친일파란 당대의 유산계급 전체에 가깝습니다. 앞선 글의 코멘트에서 뽑아 온 다음 문장들은 그런 특성을 잘 보여줍니다.

* “일제 하 기득권층에게 기득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지금까지도 외양을 달리하면서 계속 기득권층으로 남아있을 수 있게 하는”
여기서 ‘일제 하 기득권층’은 친일파와, ‘외양을 달리 한…기득권층’은 친일파 후손과 별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일제 하 기득권층이라 해도 여기에는 적극적 친일파, 소극적 방조자들에서 국내파 민족지도자들까지 폭넓은 사람들이 들어 있겠지만 말입니다.

* “이승만 정권이 부농과 사업자로 이루어진 친일 세력의 지지로 성립”
부농과 사업자, 바로 꿀라끄와 넵만이죠. 이런 지칭은 부농과 사업자중에도 친일파가 있다기 보다는 이들이 전반적으로 친일 [기득권 유산] 계급을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친일파를 넓게 잡게 되면 일단 청산대상의 숫자가 굉장히 커질 뿐만 아니라 친일청산이 곧 계급투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폭넓은 친일청산은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한 신생독립 후진국에게는 쓸만한 인재가 거의 남지 않게 된다는 문제를 남길 수밖에 없지요.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꽤 잘 살지 않는 이상 고등교육을 받거나 외국 유학이라도 다녀올 정도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총독부 산하의 하급관리나 하급교원 같은 것을 하고 있으면 더더욱 친일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볼셰비키에게 꿀라끄와 넵만을 일소한다는 것은 똑같은 문제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들은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아도 계층집단 중 소련에서 가장 생산성이 뛰어난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일까요?
부하린처럼 그냥 쓸모있으니까 활용할까요, 아니면 프레오브라줸스키처럼 쥐어짜서 악의 대가를 치르게 할까요. 이도 저도 아니면 그 중간의 어디 적당한 절충점을 찾을까요?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 소련의 역사를 보면 교묘한 정략으로 반대파를 일소한 스탈린은 그다운 우악스러운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우선 단 7주 만에 전 농민의 절반을 집단화합니다. 이때 꿀라끄와 뽀드(準)꿀라끄들은 집단화에 끼워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거 시베리아로 추방됩니다.

스탈린이 왜 이렇게 폭압적인 조치를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레빈의 설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단순히 꿀라끄들의 재산을 뺏아 중농과 빈농에게 분배할 경우, 조금 지나면 그중 제일 잘 사는 자가 꿀라끄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1등을 죽이면 2등이 1등이 되고, 다시 그를 죽이면 3등이 1등이 될거라는 거지요. 그러니 눈앞에서 꿀라끄들을 비참하게 다루어 군기를 잡은 후, 나머지는 한 방에 꼴호스(협동농장)에 몰아넣어 더이상 개인농이 될 수 없게 못을 박으면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점을 시사합니다. 일단 넓게 정의된 친일파™란 개념을 채용해 무찌르자 친일파를 추구하고 나면, 처음에 소수의 친일파만 처벌하더라도 곧 차상위 계층이 청산대상으로 부각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개념적으로는 그들도 친일파이긴 마찬가지기 때문에 일단 최상위가 제거되고 나면 그들이 다시 친일파의 수괴들로 비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탈린의 경우에는 당과 정부, 군대가 모두 볼셰비키화 되어 있고, 꿀라끄나 넵만과 관계가 적었기 때문에 그나마 이런 행동을 집행할 물리적 수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군정에서 물려받은 정부는 경찰, 관료 모두 일제시대와 많은 연속성이 있었고 군대도 그다지 믿을만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럼 오직 한 가지 대안이 남을 뿐입니다.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가 있고, 명분이 좋으니 대중동원운동을 일으켜 기성관료조직을 밖에서 두들기는 것이지요. 바로 마오쩌둥이 난동을 부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造反有理)라는 구호를 앞세워 써먹은 방법입니다. “삼대가 잘먹고 잘살아 오고 있는 꺼삐딴 리의 무리들에 대한 대중의 증오” 같은 것을 해소하는데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만, 한번 발동을 걸면 통제가 지독하게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가면 좀 심한 비유가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넓게 정의된 친일파™란 개념을 진심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도달하게 될 논리적 귀결이기도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요즘 대중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넓게 정의된 친일파™란 개념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1) 규정 자체도 적절치 않고
2) 집행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며
3) 억지로 집행하려면 사회를 완전 뒤흔들어 놓아야 하는데
4) 그 결과 신생국가건설을 위해 필요한 희소한 자원을 왕창 잃어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개념으로 친일파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한 마디로 큰 실수입니다. 하지만 실용적으로 친일파를 충분히 좁게 정의할 경우 “친일파의 후손들이 현재의 한국사회 기득권층을 차지하고 있다”는 인식은 성립하기 힘들어지게 됩니다. 잘 해 보아야 “현재의 한국사회 기득권층 일각에는 친일파의 후손들도 소수 끼어 있다”가 한계겠지요.

요즘 큰 사회문제로 지적되는 것 중 하나가 최근 들어 계층간 이동이 과거보다 훨씬 힘들어져서 계층분화가 고착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입니다. 이 말은 뒤집어보면 과거 20세기 후반의 한국사회는 계층간 이동이 지금보다 훨씬 쉬웠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또한 한국전쟁의 사회적 의의 중 하나로 널리 꼽히는 것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던 구체제 질서를 치명적으로 파괴했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계층간 이동을 쉽게 한 중요한 요인입니다.
이렇게 보면 상대적으로 계층간 이동이 쉬운 시대를 지나 왔는데도 친일파의 후손이 의연히 기득권층을 장악하고 있다는 인식은 그만큼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반민특위와 좁게 정의된 친일파

이제 끝으로 앞선 글의 토론 도중에 떠오른 좁게 정의된 친일파™라는 다른 부류에 대한 이야길 해보겠습니다. 이 논의는 앞서 언급한 넓게 정의된 친일파™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논의는 기본적으로 반민특위 문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즉 반민특위는 제한된 기간에 아주 악질적인 소수의 친일파들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 때 반민특위의 활동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면 오늘날 같은 친일논쟁은 없었을 것이다라는 가설입니다.

또한 이 논의는 문제가 되는 친일파의 성격도 많이 달라집니다.
앞선 넓은 정의에서 친일파란 결국 ‘나쁜 놈들이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이 문제인지라 주 표적은 [물려받거나 여러 가지 기득권의 이점으로 쌓은] 재산이 됩니다. “친일파 후손 누가 몇 십 억짜리 땅을…” 뭐 이런 식이 많은 거지요. 반대로 친일파 후손 누가 망해서 가난하게 산다 그러면 아마 “거 봐라 꼴좋다”하고 넘어가겠지요.

반대로 좁은 정의는 주 표적이 독립운동을 탄압한 경찰에 걸립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덕술 같은 사람입니다. 이승만은 정권안보를 위해 경찰을 잡아들이는 문제에는 매우 민감하게 대응해 반민특위와 충돌하게 되는데, 이런 것이 문제라는 거지요. 이들은 경찰, 군인, 관리이긴 해도 자산가는 아닌지라 앞서 말한 재산문제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후손이 재산이 있다고 쳐도 그게 일제시대에 치부한 것의 결과가 아니라면 뺏을 명분이 마땅치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선 글에 달린 코멘트에 답하면서 몇 차례 언급한 것처럼, 반민특위가 악질적인 소수의 친일파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임무를 완료할 수 있다면 그렇게 했어야[이승만이 방해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세 가지 정도 덧붙이기로 하지요.
우선 저는 반민특위가 성공적이었어도 친일청산 문제는 여전히 계속 나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개 제한적인 결과를 낸 조사활동이 끝나면 늘 불만을 갖고 재조사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즉 반민특위가 성공적이었다면 그것이 친일청산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되었을지 아니면 더 본격적인 조사를 촉구하는 도화선이 되었을지 그런 것은 알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반민특위가 활동하던 1949년은 이승만 정부의 반공경찰과 남로당이 서로의 뒤통수를 치기위해 기를 쓰고 있던 전반적으로 치안이 불안한 시기입니다. 그 전해 10월에는 여순반란이, 그 다음 해에는 한국전쟁이 터지지요. 즉 이승만 정부의 정권안보가 무너졌을 경우, 다음 대한민국 정부가 생겨날 수나 있을지 예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즉 이승만이 정권안보를 위해 친일경찰을 재활용했다고 하면 그냥 권력욕의 결과이고 단순한 비난의 대상이지만, 이승만 정권이 주저앉고 나서 곧 대한민국이 소멸해 버릴 가능성이 적지 않게 있다면 이건 그렇게 간단히 말할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반민특위는 부적절했다든가 이런 것은 아니고, 짧게 한 번은 했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승만 측도 무작정 사보타주만 하는 대신 법안 제정 과정부터 적극적으로 개입해 경찰 문제는 뒤로 미루는 정치적 타협을 하고 나머지 부분을 먼저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정치력을 발휘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이 그런 훌륭한 의회주의적 리더십의 소유자인지는 의문이지만 말입니다.
by sonnet | 2008/08/18 22:37 | flame! | 트랙백(1) | 핑백(2) | 덧글(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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