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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일본안보전략
2010/07/29   새우와 고래들 [82]
새우와 고래들
일본의 장기적인 안보전략 변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미국, 일본, 중국이라는 주변 강대국들의 변화 그리고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우리의 안보환경 및 안보전략 간의 관계를 조금 짚어보고자 한다.

의외로 이런 주제를 일반인에게 전달할 수 있게 쉽게 써내려간 경우가 많지 않은데, 강성학의 단행본 『새우와 고래싸움: 한민족과 국제정치』(서울: 박영사, 2004.)이 이 주제에 대해 보기 드물게 짧고 명료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이 내용을 소개하고 약간의 해설을 붙이도록 하겠다.


1. 미국 전진배치 군사력의 후퇴와 일본의 재부상 간의 상관관계

뿐만 아니라 한반도는 더 이상 군사·전략적으로 별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라고 본다. 미국은 예전에도 한반도를 군사·전략적으로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애치슨라인이 나왔고, 맥아더의 판단도 비슷했다. 다만 한반도는 냉전시대의 정치적 의미에서 중요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항공모함과 정밀 유도 미사일을 통해서 언제든지 미국이 원하는 곳을 정확하게 가격할 수 있는데 굳이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반도는 더 이상 미국에게 전략적인 재산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군사적 취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사실 그동안 동북아에서 미국의 역할은 자국의 국가이익에 관련된 역할 이외에도, 상당 부분 전략적으로 일본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 지역에 힘의 균형이 이루어졌다면 미국은 멀리 떨어져서 그저 통상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북아에서 미국이 군사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들이 무장 해제시킨 일본의 지정학적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 동안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전략적 정책의 상당 부분은 본래 일본이 스스로 담당해야 했던 영역과 많이 중복되어 왔다.

이제 미국은 하나 둘씩 이 지역에 대한 역할을 스스로 맡으라면서 서서히 일본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러한 부담의 공유를 비용부담에서 시작했다가, 새로운 가이드라인이 합의되면서 일본이 전통적으로 이 지역에서 가지고 있었던 군사·전략적인 역할까지도 하나씩 일본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세계지도를 놓고 미국에서 이 지역을 볼 때에 지리적으로 길게 이어지는 일본과 동남아시아만 안전하다면 일본 너머에 있는 한반도는 별로 군사·전략적인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한반도와 한국의 안전은 일본의 안전에 관계되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이 미국인들의 입장이었다. 즉 한반도는 미국에게 있어 사실상 일본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가치가 있을 뿐이었다. 미국은 한국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일본이 원래의 지정학적, 군사전략적 역할을 맡게 된다면 미국은 더 이상 냉전시대와 같이 모든 것을 소련의 위협과 연관시켜 이 지역을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것들은 최근에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pp.43-45)

전시작전통제권 논란이 벌어졌을 때, 노무현 정부의 지지자들이 펼친 한 가지 논리는 그건 미국이 바라는 바이고, 주한미군은 붙잡아도 감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미연합사를 해체하고 '작전통제권 이양'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며, 시대에 순응해 이에 대한 찬반보다는 어떻게 이양받을 것이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대해 보수 측도 "기본적으로 미 행정부는 전시 작전통제권을 항구적으로 보유할 의사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데 이견이 없다.(박용옥 인터뷰 참조) 다만 보수 측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우리가 요구해 그들이 남아있는 것인데, 그렇게 '뺏아갔던 걸 되찾겠다' 내지는 '갈테면 가라'는 식의 태도를 취해 상황전개를 부추기는 것에 커다란 불만을 표출했다.

하지만 이 당시 한국 국내의 논의에서 주한미군의 감축이나 연합사, 작전통제권 이양 등은 한미 간의 쌍무적인 틀에서만 이야기되었을 뿐, 그것이 가져올 동북아의 전반적 군사적 균형의 조정, 특히 일본의 상대적 역할 변화에 대해서는 거의 공론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한국의 시야는 자기중심적이고 좁았던 것이다.

이는 미국의 동북아 논의에 있어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아니 '언제나' 중국/일본의 부수적 존재였던 것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중국 또한 일찍부터 이 점에 대해 넓은 전략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 미중수교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주한미군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 빈 자리를 일본이 메우는 것을 중국은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던 것이다.



2. '동북아 균형자' 신드롬의 재검토

그렇다면 미국만 변한 것인가? 미국만 변한 것이 아니라 한국도 변했다. 한국에서는 두 가지 변화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강대국 신드롬’이고, 또 하나는 ‘민족주의 감정의 분출’이다. 갑자기 돈을 벌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졸부처럼, 지금 대한민국은 마치 스스로 강대국처럼 행동하고 우리도 강대국가 중의 하나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가 강대국가들 사이에서 그들 간의 중재나 조정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지도자들까지 나오게 되었다.

원래 조정자 혹은 균형자 역할은 자기가 어느 편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전체적인 힘의 균형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 자, 즉 강대국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다시 말해 강대국이 아니면 균형자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근래의 6자 회담에서도 중국은 강대국이기 때문에 균형자 내지는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중재역할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그런 역할을 다른 국가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가 강대국가로 자처하고 강대국들에게 우리가 당신들과 무엇이 다르냐면서 완전한 평등을 요구하고 있다. 국내 사회에서도 완전한 평등을 이루지 못한 우리가 바로 초강대국 미국에게 완전한 평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pp.45-46)

쉽게 말해서 중국과 일본 같은 '고래'들이 서로 주먹을 흔들면서 "너 그따위로 할래? 한 번 붙어 볼테냐!"라고 외쳐댈 때, "아니, 다들 왜 그래. 좀 조용히 있어!"라고 외치며 끼어들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존재가 균형자이다. 이런 일을 해내려면 균형자의 개입이 흥분한 고래들조차 일단 멈춰서 상황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할 정도의 위세를 갖춰야 한다. 따라서 균형자는 막강한 힘을 가진 강대국들만이 해낼 수 있는 역할인 것이다. 고래가 새우 싸움을 말릴 수는 있어도 새우가 고래 싸움을 말리기는 거의 불가능한 법이 아니겠는가.


노무현 정부 때 튀어나와 모든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동북아 균형자'론은 강성학이 지적하듯이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품어온 강대국 콤플렉스의 발작적인 출현이었다. 그것이 그처럼 엉성했던 이유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엉성한 것이었어도 대한민국 건국 이래 60여 년간 유지해 왔던 전통적인 안보전략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제시된 것이라는 점은 평가해줄 만한 가치가 있다. 사실 그간의 전통적 안보전략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에 우리는 거기에 이름을 붙여 부른 적도 별로 없었다.

'동북아 균형자'론의 등장은 전통적 안보전략의 지지자들에게 '젊고 새로운 도전자들' 앞에서 (그간 너무 당연해서 묵시적으로 넘어가도 되었던) 전통적 안보전략의 전제와 논리를 드러내어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과제를 던져주었다.



3. 전통적 안보전략의 숨겨진 이름

그렇다면 과연 어떤 국가에 편승할 때에 우리의 미래가 있겠는가? 냉전체제의 해체 후 국가 간 편승을 위해서는 과거와는 달리 아주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하게 되었다. 이제 무임승차나 일방적인 시혜의 시대는 끝났다. 어느 국가에 편승하든, 우리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중 상대적으로 가장 적은 대가를 요구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아직까지는 미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앞으로도 한국이 미국에게 우호적이고 가까운 나라로 간주되고 안전을 보장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로 여겨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과거에는 우리에게 원조를 주기 위해서 미국의 의회지도자들과 국무성, 그리고 대통령까지도 한국은 미국에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야 의회에서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법안이나 군사원조법안이 통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정말 우리가 미국에게 중요한 존재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미국인들이 탐낼 만한 것은 사실 거의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미국을 더 필요로 하는가 아니면 미국이 우리를 더 필요로 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매우 냉정하게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pp.52-53)

전통적 안보전략에 아직 합의된 이름은 없지만 나는 이 전략을 '동북아 편승자'론이라고 부르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기본논리는 '새우'에게는 균형자 같은 사치스러운 역할을 할 여지가 없으며, 일단 누구에게 붙을지를 결정한 다음 그 뒤로는 주로 어떻게 잘 붙어있을지를 궁리하고 실천하는 것이 안보전략의 실천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4. 우리는 결코 밀로스 인이 되지 않겠다

강성학 같은 이의 결론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이들은 이런 결론이 너무 비관적이고 희망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염두에 두는 어떤 예화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등장하는 밀로스 회담(이하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가능하면 꼭 읽어볼 것)이다. 이런 상황이 국제정치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생각하기에 그는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최종적으로는 스파르타가 승리하게 된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전체를 읽고 난 다음에 우리가 느끼는 것은 아테네 제국이 멸망하고 마침내 정의가 승리했다고 하는 만족감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매우 슬픈 감정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아테네인들이 최종적으로 멸망했지만 그것은 ‘정의의 승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의도 바로 이 전쟁의 희생물이었다. 아무도 밀로스인들을 구하지 못하였으며, 이 약소국가는 완전히 멸망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테네가 최종적으로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은 이미 죽어버리고 노예로 팔려버린 밀로스인들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스파르타가 승리하면서 그리스세계가 이제 스파르타의 제국이 되었지만, 아테네의 제국주의 정책이나 스파르타의 제국주의 정책은 사실상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전쟁 중에 스파르타는 ‘아테네로부터 그리스인들의 해방’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동맹국들을 독려하였으나 정작 전쟁에 승리한 다음에 스파르타가 다른 약소국가들에게 취했던 정책은 과거의 아테네가 취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강압적이고 억압적이었다. 약소국가에게 승리의 기쁨은 사실상 어느 곳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투키디데스의 교훈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여기에는 전쟁의 원인, 과잉 팽창의 문제점, 그리고 민주국가에 있어서의 선동정치의 위험성, 부적절한 정치지도자가 적절한 정치지도자를 대체했을 때 당면하게 되는 위험성 등등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삶의 한계와 그 궁극적인 비극성을 보게 된다. 이 역사책을 읽고 나면 다시 한번 인간이란 무엇이고 정치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되묻게 되는 것이다. 전쟁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정치의 한계를 목격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에 관해서 지나치게 기대해서는 안 되며, 지나친 기대는 반드시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고 말 것이라는 투키디데스의 교훈을 우리는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이처럼 정치, 특히 국가 간의 국제정치를 비관적인 관점에서, 혹은 비극성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국제정치학에서 이른바 ‘현실주의’라고 하는 패러다임의 시조가 되었다.(p.301)




당신네 옆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면에서 코끼리와 잠을 자는 것과 같다. 아무리 친하고 길들여져 있다고 하더라도 … 그 사람은 코끼리가 한번씩 킁킁거리고 실룩거릴 때마다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Living next to you is in some ways like sleeping with an elephant. No matter how friendly and even-tempered is the beast, if I can call it that, one is affected by every twitch and grunt.

- 워싱턴을 방문해 프레스클럽에서 가진 연설(1969)에서, 캐나다 수상 트뤼도(Pierre Trudeau) -


by sonnet | 2010/07/29 11:35 | 정치 | 트랙백 | 핑백(4) | 덧글(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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