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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이 전하는 이라크전의 교훈
근대 역사교육은 대충해도 된다는 여러분들께. (Luthien) 에서 트랙백
(Commented by 겔라예프 at 2008/03/24 20:55 에 대한 코멘트도 겸함)

...거 비슷한 이야기를 40년 전에도 들은것 같은데. 제 착각일까요?라고 하셨는데, 사실 국가지도부 레벨에서 볼 때 베트남전과 이라크전의 삽질 사이에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공통점이 있다. 이 글에서는 그 공통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베트남 전쟁의 11가지 실패요인

베트남전 실패의 주요 책임자 중 하나로 악명높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사임한지 28년 만인 1995년 『회고: 베트남전의 비극과 교훈』(In Retrospect: The Tragedy and Lessons of Vietnam)이란 회고록을 내어, 베트남전에서 자신들의 실책을 자아비판하였다.

베트남전에 관한 의사결정에 참여했던 우리 케네디-존슨 행정부 사람들은 우리가 이 나라의 원칙과 전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따라 행동했다. 우리는 이들 가치에 비추어 결정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무서운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음 세대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Robert McNamara with Brian VanDeMark, In Retrospect: The Tragedy and Lesson of Vietnam, New York:Random House, 1995, pp. xx-xxi


그리고 베트남전에서 벌어진 오판과 실책을 11가지로 정리하며 베트남전의 교훈은 냉전 이후의 세계에도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때때로 냉전 이후의 세계는 과거의 세계와 너무 달라져서 베트남전의 교훈이 적용될 수 없다거나 21세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베트남에서의 경험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의 실수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어야 한다. 베트남에서 우리가 맞은 재앙에는 11가지 주요 원인이 있다.

1. 우리는 적들(북베트남과 베트콩, 이들은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았음)의 지정학적 의도를 줄곧 오판했고, 그들의 행동이 미국에게 가져오는 위협을 과대평가했다.

2. 우리는 남베트남 민중들과 지도자를 우리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구와 그를 위해 싸우겠다는 결의를 보았다. 우리는 그 나라의 정치세력들을 완전히 오판했다.

3. 우리는 민중(이 경우 북베트남과 베트콩)에게 그들의 신념과 가치를 위해 싸우다 죽어가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민족주의의 힘을 과소평가했고,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곳곳에서 계속 그러고 있다.

4. 친구와 적에 대한 우리의 오판은 한결같이 현지인들의 역사, 문화, 정치, 그리고 현지 지도자들의 됨됨이나 성향에 대한 우리의 뿌리 깊은 무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베를린, 쿠바, 중동 등을 둘러싸고 종종 벌어진 대결에서, 토미 톰슨, 칩 볼렌, 조지 케난 같은 사람들의 조언을 얻을 수 없었더라면 우리는 소련을 상대로 비슷한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을 것이다. 이 노련한 외교관들은 소련이란 나라, 그 나라 민중, 그 지도자들에 대해, 그리고 왜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며 그들이 우리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연구하는데 수십 년을 보내왔다. 그들의 조언은 우리의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베트남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고위공직자들에게 그러한 조언을 제공할 [중량급] 남아시아 전문가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5. 우리는 비정규전으로 싸우는 결의에 찬 민족운동과 맞부딪치게 될 경우, 근대적 하이테크 군장비와 부대, 교리가 갖는 한계를 인식하는데 실패했고, 그 후로도 줄곧 그랬다. 또한 우리는 완전히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감정과 생각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우리 군사전술을 적응시키는 데도 실패했다.

6. 우리는 남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대규모 군사개입에 나서기 전에, 그런 행동의 장단점에 대해 의회와 미국 대중을 완전하고 솔직한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이는데 실패했다.

7. 그러한 개입에 나서고 예기치 못한 사태전개가 계획을 어긋나게 만든 뒤에도 우리는 대중적인 지지를 획득하는데 실패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왜 우리가 일을 그런 식으로 처리했는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복잡한 사건들에 대해, 그리고 생소한 환경과 해도 없는 바다에 직면해 방향을 바꾸어야 하게 된 나라가 어떻게 이 문제를 건설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대중들을 이해시킬 준비를 하지 않았다. 한 나라의 가장 근원적인 힘은 그 나라의 군사적 강대함이 아니라, 국민의 단결에 있는 법이거늘, 우리는 그것을 유지하는데 실패했다.

8. 우리는 미국 지도자와 미국 시민들 모두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안보가 직접적인 위험에 처하지 않았을 경우, 무엇이 다른 민족 혹은 다른 나라에게 최선인지는 국제적 포럼에서 공개적 토론이라는 시험을 거쳤어야만 했다. 우리는 이 세상 모든 나라를 우리 자신이 생각한 이미지대로, 또는 우리가 선택한대로 만들 신이 주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9. 우리는 우리나라의 안보가 직접적인 위협에 처한 경우가 아니라면, 국제사회에 의해 완전한 (즉 단순히 요식행위가 아닌) 지원을 받는 다국적군과 공동일 경우에만 미국이 군사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지 않았다.

10. 우리는 국제문제에 있어서도 인생의 다른 측면들과 마찬가지로 당장 좋은 해결책이 없는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데 실패했다. 모든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을 품고, 직면한 난제들을 해결하면서 평생을 보낸 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는 특히 인정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불완전하고 엉성한 세상에 몸을 맞추어 살아가야만 하기도 한다.

11. 이들 많은 오류들의 기저에는 장기간에 걸쳐 상당한 제약 하에서 군사력을 사용하는데 따르는 막대한 위험과 비용 -다른 무엇보다도 인명손실- 과 맞물린 지극히 복잡한 일련의 정치 군사적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행정부 최고위층을 조직하는데 실패한 우리의 잘못이 깔려 있었다. 이것이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이 직면한 유일한 과제였다면, 그러한 조직의 약점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가 직면한 다른 광범위한 국내적, 국제적 문제들과 공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남아시아에서의 우리 행동 -목표, 대안적 정책의 위험과 비용, 실패가 명백해 졌을 때 정책을 변경할 필요성 등- 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행정위원회에서의 논쟁으로 대표될 수 있는 강도와 철저함을 갖고 분석하고 논의하는데 실패했다.

이들은 근본적인 우리의 주요 패착이었다. 개별적으로 나열해 놓긴 했지만, 이들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있었다. 한 분야에서의 실패는 다른 실패의 원인이 되거나 실패를 심화시켰다. 각각은 끔찍하게 얽혀 들어갔다.

McNamara, 같은 책, pp.321-322



2. 교훈은 오늘날의 이라크전에도 유효

이는 남아시아와 베트남이란 단어를 중동과 이라크 정도로만 바꾸면 지금의 상황에 아무 차이 없이 맞아들어가는 내용들이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바꾸어 보자.

3. 우리는 민중(이 경우 북베트남과 베트콩중동 무슬림)에게 그들의 신념과 가치를 위해 싸우다 죽어가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민족주의[와 종교]의 힘을 과소평가했고,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곳곳에서 계속 그러고 있다.

4. 친구와 적에 대한 우리의 오판은 한결같이 현지인들의 역사, 문화, 정치, 그리고 현지 지도자들의 됨됨이나 성향에 대한 우리의 뿌리 깊은 무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베트남이라크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고위공직자들에게 그러한 조언을 제공할 [중량급] 남아시아중동 전문가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리고 다른 항목들은 심지어 그런 걸 바꿀 필요가 없이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5. 우리는 비정규전으로 싸우는 결의에 찬 민족운동과 맞부딪치게 될 경우, 근대적 하이테크 군장비와 부대, 교리가 갖는 한계를 인식하는데 실패했고, 그 후로도 줄곧 그랬다. 또한 우리는 완전히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감정과 생각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우리 군사전술을 적응시키는 데도 실패했다.

9. 우리는 우리나라의 안보가 직접적인 위협에 처한 경우가 아니라면, 국제사회에 의해 완전한 (즉 단순히 요식행위가 아닌) 지원을 받는 다국적군과 공동일 경우에만 미국이 군사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지 않았다.


여기 예를 들지 않은 다른 요소들도 현 이라크전 상황에 잘 맞아들어가기는 매한가지이다. 이렇듯이 남아시아의 베트남과 중동의 이라크라는 문화, 민족, 종교가 모두 다른 극히 이질적인 두 나라에서 벌어진 사태에서 발견되는 기묘한 일치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3. 문제는 미국 자신에게

그것은 맥나마라가 지적하는 실패의 원인이란 베트남이나 이라크라는 나라 때문에 생긴 것이라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두 전쟁의 공통점이었던 미국이라는 나라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2. 우리는 남베트남이라크 민중들과 지도자를 우리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구와 그를 위해 싸우겠다는 결의를 보았다. 우리는 그 나라의 정치세력들을 완전히 오판했다.


이러한 맥나마라의 지적은 이라크전의 실패요인을 분석했던 패트릭 랭의 결론과 완전히 동일하다.

하지만 어떻게 잘 교육받고, 부유하며, 강력한 미국인들이 (이라크 전쟁이라는) 그렇게 끔찍하고 파멸적인 일련의 실수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 우리, 미국 대중들이 문제의 원천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외교 정책은 모든 사람들은 미국인처럼 되고 싶어한다는 관념을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 소위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라는 것은 외계에서 날아든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은 다 똑같다라는 널리 퍼진 미국인들의 신념에 대한 자아회복 선언에 불과하다.

미국인들은 우리의 세계관에 맞춘 상상 속의 이라크를 쳐들어갔다. 우리는 모든 이라크인들 안에는 낡은 허물을 벗고 빠져나오려는 미국인이 들어앉아 있다고 확신하며 이라크에 쳐들어갔다. 우리가 꿈꿔왔던 이라크에서 우리는 폭군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구식 삶으로부터의 해방자로 환영받을 터였다. …

우리에게도 불행하고 그들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은 진짜 이라크가 아니었다. … 잘못된 이라크 속에 뛰어든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서도, 미국인들은 진짜 이라크인들은 우리 꿈 속의 이라크인들처럼 행동해야 하며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고집스럽게 우겨댔다. 그 결과는 좌절과 낙담, 그리고 이라크인들의 '광기'에 대한 분노였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꿈을 따라 행동하면서, 이라크 총리 누리 알-말리키의 시아 종파 정부가 국가를 '단결'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고, 말리키가 만인을 위한 공공선을 추구하는 이라크의 조지 워싱턴 같은 사람이라고 상상하고 있다.

Patrick Lang, 이라크 전쟁은 우리에게 우리 실체에 대해 말해준다, Foreign Policy, 2007년 2월


미국이 이런 특성을 갖고 있다는데는 전쟁의 비판자들 뿐 아니라 주도세력인 네오콘들도 동의한다.

미국을 그 팽창주의의 오랜 역사로부터 탈선시키려고 노력해온 사람들의 문제는, 전세계적 변혁의 가능성에 대한 미국인들의 신념 -메시아적 충동- 이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의 보다 지배적인 개성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나라의 건국 원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미국의 정력적인 야심과 그들의 정당성에 대한 압도적인 인식의 결합이 낳은 건강한 자식이기도 하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라크에서의 어려움이 미국인들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메시아주의와 야심에 반대하도록 만들 것으로 믿고 기대한다. 역사는 그들의 편이 아니다.

Robert Kagan, 우리의 '메시아적 충동' , 워싱턴포스트, 2006년 12월 10일


그리고 이것은 맥나마라가 자기 책의 서문에서 밝혔던 점이기도 하다.

베트남전에 관한 의사결정에 참여했던 우리 케네디-존슨 행정부 사람들은 우리가 이 나라의 원칙과 전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따라 행동했다. 우리는 이들 가치에 비추어 결정을 내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무서운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민주당 정권이었던 케네디-존슨 행정부에서도 이러한 메시아적 충동미국의 원칙과 전통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은 이라크전 또한 단순히 네오콘의 문제라든가 정권이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넘어가면 해소된다고 속단할 문제가 아님을 시사한다.


물론 맥나마라가 지적한 다른 오류들도 이러한 사고방식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미국인들은 "모든 사람들은 미국인처럼 되고 싶어한다"고 고집스럽게 믿기에, 다른 나라 사람들도 미국인들 못지 않게 고집이 세고 그들의 신념과 가치 수호에 단호할 수 있다는 것을 납득하기 힘들어 했고,

3. 우리는 민중(이 경우 북베트남과 베트콩중동 무슬림)에게 그들의 신념과 가치를 위해 싸우다 죽어가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민족주의[와 종교]의 힘을 과소평가했고,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세계의 곳곳에서 계속 그러고 있다.


첨단기술과 문명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5. 우리는 비정규전으로 싸우는 결의에 찬 민족[및 종교]운동과 맞부딪치게 될 경우, 근대적 하이테크 군장비와 부대, 교리가 갖는 한계를 인식하는데 실패했고, 그 후로도 줄곧 그랬다. 또한 우리는 완전히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감정과 생각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우리 군사전술을 적응시키는 데도 실패했다.


이 세상에는 강대한 미국의 힘으로도,

8. 우리는 미국 지도자와 미국 시민들 모두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 우리는 이 세상 모든 나라를 우리 자신이 생각한 이미지대로, 또는 우리가 선택한대로 만들 신이 주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낙천적이고 진취적인 개척자 정신으로도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10. 우리는 국제문제에 있어서도 인생의 다른 측면들과 마찬가지로 당장 좋은 해결책이 없는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데 실패했다. … 때때로 우리는 불완전하고 엉성한 세상에 몸을 맞추어 살아가야만 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점은 극복하기 불가능한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보통의 미국인들이 가진 상식이나 신념, 윤리도덕관의 굴레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강인한 의지력과 신중함, 유연한 사고방식 같은 비범한 자질이 필요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대의민주정 하에서 선출된 권력인 정치지도부가 국민 다수가 가진 상식이나 신념, 윤리도덕관과 상반되는 정책을 밀고나가야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를 말이다.


4. 성공 사례의 검토: 걸프전

그렇다면 이런 실패사례와는 상반되는 제3의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

쿠웨이트를 침공 점령했던 이라크를 격퇴한 걸프전(1991년)은 널리 성공한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이라크전(2003년)은 전혀 다른 환경에 위치한 베트남과 아주 유사한 경로를 밟아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진 반면, 동일한 중동 지역에서 동일한 상대인 이라크와 싸웠던 걸프전은 어떻게 성공으로 마무리지어진 전쟁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걸프전 당시 미국 지도자들 또한 당시 자신들의 정책판단에 대한 견해를 남겼다.

많은 아랍 동맹국들이 예상했고 우리 자신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사담의 패배가 그의 권좌를 무너트리지 못한 것은 실망스러웠다. 부시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의 운명은 이라크 민중에게 달렸다고 여러 차례 선언했었다. 종종 그는 사담의 제거가 환영받을 것임을 시사했지만 아주 실질적인 이유에서 봉기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민중 반란이나 쿠데타가 사담 정권을 전복시키길 기대했지만, 미국이나 현지 국가들은 모두 이라크란 국가가 쪼개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우리는 페르시아 만 지역 한복판의 장기적 세력균형에 대해 우려했던 것이다.
사담 제거를 시도하려고 지상전을 이라크 점령으로 확대하면, 일을 진행하는 도중에 목표를 변경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정책지침을 어기고, 욕심을 부리다 수렁에 빠져들게 되어(mission creep), 예측 불가능한 인적 정치적 비용을 유발하게 될 것이었다.
그를 체포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파나마에서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던 노리에가도 찾아낼 수 없었다. 우리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실질적으로 이라크를 통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연합군은 즉시 붕괴되고, 분노한 아랍 국가들이 전열에서 이탈하며 다른 동맹국들 또한 철군하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그러한 상황 하에서 우리는 냉전 이후 세계에서 침략행위를 다루는 패턴을 정착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 오던 중이었다. 그대로 밀고 들어가 이라크를 점령함으로서 일방적으로 UN 결의를 뛰어넘게 되면, 우리가 정착시키기를 희망했던 침략행위에 대한 국제적 대응 관례를 파괴하게 될 것이었다.
우리가 그러한 침공 코스를 밟는다면, 생각건대 미국은 아직도 극도로 적대적인 땅에서 점령세력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이는 극적으로 다른 -그리고 아마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George H.W. Bush and Brent Scowcroft, 왜 우리는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지 않았는가, Time, 1998년 3월 2일

이들의 논리는 아주 간단하다. 더 좋은 결과를 노릴 수도 있었겠지만, 잘못될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필요최소한의 일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런 생각 배후에는 이전에 마지막으로 해 본 대규모 전쟁이었던 베트남전이 어떻게 망했는지가 강하게 깔려 있었다. 언론은 8년간의 전쟁으로 단련된 역전의 용사 백만 이라크군이라며 적을 과장했으며, "모병제 군대의 평화는 첫 총성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같은 극도로 비관적인 여론이 분분했다. 심지어는 후에 이라크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리처드 체니나 폴 월포위츠 등도 이 당시에는 이라크를 완전히 점령하는 후의 이라크전 같은 작전을 지지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미국 사회가 풀이 죽어있었던 것이다.

냉전의 종식과 걸프전의 (제한적이지만) 완벽한 승리는 이제 위축되어 있던 미국 시민들의 기를 살리고, 잠복해 있던 전통적인 메시아적 신념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었다. 성공의 역설이 찾아올 환경이 갖추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에 걸프전의 승리의 비결이 그 목표를 엄격히 제한한 데 있었음은 깨끗하게 잊혀지고 말았다. 결국 걸프전의 설계자들이 우려하던 사태는 이라크전에서 몽땅 터져나오고야 만다.


5. 국민을 속이다

다시 맥나마라의 회한으로 돌아가 보자. 베트남전은 또 무엇이 잘못되었던가?

6. 우리는 남아시아중동 지역에서 미국이 대규모 군사개입에 나서기 전에, 그런 행동의 장단점에 대해 의회와 미국 대중을 완전하고 솔직한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이는데 실패했다.


이라크전의 개전과정을 곰곰히 돌이켜보면, 누구나 이 전쟁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가 매우 불명확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원래 이라크전의 개전 명분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1. 이라크는 알-카이다와 연계, 협력하고 있다.
2. 이라크는 비밀리에 대량파괴무기(WMD)를 개발하고 있다.


이러한 명분은 진지한 관찰자들을 코웃음치게 만들었다.

부패한 세속 독재자 사담 후사인은 순니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인 알 카이다가 지독하게 미워하는 존재 중 하나였고, 사담 후사인의 입장에서도 알 카이다는 자신의 정권안보를 위협하는 악질 반체제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사담과 오사마가 서로 협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중동정치에 정통한 전문가 집단 사이에서는 극히 의문스러운 이야기에 불과했다.

WMD개발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라크 침공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이라크에서 니제르에서 천연우라늄 500톤을 구매하려 했다는 증거는 엉성한 위조문서로 드러났고, 이라크 망명자(암호명 Curveball)가 제공한 생물무기 개발 정보 또한 정보원의 신빙성이 의심스럽다는 것이 이 정보원을 보호하고 있던 독일 정보기관의 정식 입장이었다.

다만 엄청난 예산을 쓰는 CIA를 비롯한 수많은 정보기관과 무시무시한 첩보위성을 부리는 미국인 만큼 뭔가 믿는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느낌은 있었다. 화학무기 개발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고 과거에도 제조 사용한 적이 있었던 만큼, 이라크를 점령하고 샅샅이 뒤지면 꿍쳐놓은 화학무기 비축시설 하나쯤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많은 전문가들은 그런 가능성까지 무시했다가 틀려서 자신의 명성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신통찮은 화학무기 약간이 진정한 개전사유가 되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WMD개발이 진정한 문제라고 한다면 공격의 순서가 완전히 잘못되어 있었다. 악의 축 3개국의 WMD개발 진도는 북한>이란>이라크의 순서일 것이라는 것이 WMD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WMD가 임박한 위험이라면 왜 가장 진도가 더딘 나라부터 공격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 이 모든 명분은 엉터리로 드러났다.

사실 미국 행정부 최고위층이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있다. 이라크 침공 9개월 전, 영국의 토니 블레어 내각에서 회람된 한 극비 메모를 보자.

C[영국 대외정보부(SIS) 부장; 역주]는 최근에 가진 워싱턴 회담에 대해 보고했다. [워싱턴 측에서는] 상당한 태도의 변화가 있었다. 군사행동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부시는 테러리즘과 WMD로 엮어 군사행동을 통해 사담을 제거하고자 한다. 하지만 정보와 사실들은 이 정책에 짜맞춰지고 있다. NSC는 UN을 통할 참을성도 없고 이라크 정권의 기록에 대한 증거들을 공개할 열의도 없다. 워싱턴에서는 군사행동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거의 논의되고 있지 않다.

C reported on his recent talks in Washington. There was a perceptible shift in attitude. Military action was now seen as inevitable. Bush wanted to remove Saddam, through military action, justified by the conjunction of terrorism and WMD. But the intelligence and facts were being fixed around the policy. The NSC had no patience with the UN route, and no enthusiasm for publishing material on the Iraqi regime's record. There was little discussion in Washington of the aftermath after military action.

Downing Street Memo, 2002년 7월 23일


부시 대통령이 그러한 결심을 한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적어도 내걸린 대의명분은 진짜 이유가 아닌게 확실하다. 그러니 적어도 미국 의회와 대중들에게 진정한 전쟁의 목적에 대해서 완전하고 솔직하게 설명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마 이라크 침공이 걸프전처럼 수월하게 끝났더라면 이 모든 문제는 "좋은게 좋은거다. 어쨌든 사담 후사인은 악당 아닌가? 우리는 그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었다"라는 말로 덮이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좋게좋게 끝나지는 못했지만.


다시 맥나마라의 요점으로 돌아가 보자.

7. 그러한 개입에 나서고 예기치 못한 사태전개가 계획을 어긋나게 만든 뒤에도 우리는 대중적인 지지를 획득하는데 실패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왜 우리가 일을 그런 식으로 처리했는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복잡한 사건들에 대해, 그리고 생소한 환경과 해도 없는 바다에 직면해 방향을 바꾸어야 하게 된 나라가 어떻게 이 문제를 건설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대중들을 이해시킬 준비를 하지 않았다. 한 나라의 가장 근원적인 힘은 그 나라의 군사적 강대함이 아니라, 국민의 단결에 있는 법이거늘, 우리는 그것을 유지하는데 실패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라크전의 개전사유는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 맥나마라의 교훈에 따르자면 계획이 어긋난 것이 분명해졌다면 지금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왜 우리가 일을 그런 식으로 처리했는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물론 부시 행정부는 그렇게 나오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 2기 들어서는 물타기 세 번째 명분이 소리높여 천명되었다.

3. 민주주의를 확산시킨다.

민주주의의 확산, 물론 좋은 이야기이다. 성공할 수 있을 때만.
그런데 많고 많은 후보국 중에 왜 하필 이라크인가? 왜 처음 침공 때는 그 이유를 분명히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는가? 지금까지는 일을 왜 그런 식으로 처리했는가?

전혀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즉 부시 행정부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왜 우리가 일을 그런 식으로 처리했는지"를 의회와 국민에게 설명해줄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음은 명백하다. 베트남전의 악습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전쟁비용 문제에서도 반복된다.

부시행정부가 집권하기 전부터 네오콘들, 예를 들어 폴 월포위츠는 사담 후사인의 이라크를 봉쇄하는데 끊임없이 비용이 들어가므로 너무 값비싸다고 비판하며, 사담 정권을 값싸게 전복시킴으로서 결과적으로 이러한 지출을 절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개시될 당시 백악관은 약 500~600억 달러의 전비가 들 것이란 추정치를 제시하였다.

실제는 어떤가? 이라크전 5주년인 현재, 국방성이 지출한 전비만 6천억 달러가 넘어가며 장기적으로 총 전쟁비용 추정은 1조 2천억~1조 7천억 달러(의회 예산국), 2조~3조 달러(Stiglitz 외) 등의 수치가 제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백악관의 추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작다는 의견이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있었다. 예를 들어 예일대 경제학과 교수인 윌리엄 노드하우스는 1조 9천억 달러쯤 들수도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그의 비관적인 예상이 맞은 셈이지만, 이런 문제는 의회와 대중들의 눈 앞에서 결코 진지하게 토론된 적이 없었다.


6. 적에 대한 오판

사실 사담 후사인과 알 카이다가 손을 잡고 있다는 설득력 없는 명분이 국민들에게 먹혔다는 사실은 의회와 오피니언 리더, 국민들도 이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뜻한다.

9.11 테러의 충격에 얼이 빠지고 겁먹은 미국민과 의회는 그들은 알 카이다가 왜 그들을 공격했는지,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이 중동 및 제3세계에서 어떤 명성을 쌓아왔는지 등에 대해 객관적이고 심도깊은 분석을 통해 대응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 결과 시덥잖은 이유를 붙여 부시행정부가 벌인 중동에서의 커다란 모험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한 것이다.

이 점은 다시 한번 맥나마라의 자아비판을 떠올리게 한다.

1. 우리는 적들(북베트남과 베트콩, 이들은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았음알카이다, 이라크, 이란)의 지정학적 의도를 줄곧 오판했고, 그들의 행동이 미국에게 가져오는 위협을 과대평가했다.


물론 적의 사고방식과 의도에 대한 가장 큰 오판이 부시 행정부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7. 결론: 앞으로의 이라크전에 대한 교훈

자 이제 마지막으로 아직 진행중인 이라크 전쟁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마지막 교훈을 살펴보자.

주어진 이러한 "명백한" 사실에 근거할 때, 나는 우리가 디엠 대통령의 암살로 들썩이던 1963년 말이나, 남베트남에서 정치 군사적 취약성의 증대에 직면했던 1964년 말에서 1965년 초 사이에 철수할 수 있었고 철수해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 표에 정리해 놓았듯이 철군이 정당화될 수 있는 최소한 세 번의 기회가 더 있었던 것이다.

McNamara, 같은 책, pp.319-320


맥나마라는 돌이켜 보건대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야 함을 시사하는 판단근거가 명백히 나타났고, 그것도 몇 차례에 걸쳐 그랬다고 회고한다. 맥나마라를 위시한 케네디-존슨 행정부 지도자들은 그 때마다 어떻게든 성공시킬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는 하면된다(can do) 정신으로 계속 판돈을 올려가며 확전의 길을 걸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국에는 미국에 뼈아픈 상처를 남겼을 뿐이다.

한편 윌리엄 오덤 장군은 이라크 전에 있어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2003년 여름에 전쟁이 꼬이기 시작한 이래, 시아, 수니, 쿠르드 간의 합의가 이라크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신화가 떠올랐다. 맨 처음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그러한 돌파구를 열어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선거가 끝나도 평화와 안정이 찾아오지 않자 헌법 승인 국민투표가 만병통치약이라고 주장되었다. 그것도 실패하자 우리가 그저 쓸만한 총리감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지금도 이라크 연구반(ISG)은 이러한 성배를 찾고 있다. 그러나 성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William E. Odom, 이라크에 대한 여섯 가지 잔혹한 진실, 허드슨 연구소, 2006년 12월 11일

어떤 작전이나 이벤트를 완수하면 지금까지의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국회의원 선거, 국민투표, 새 내각 구성 등에 매달렸지만, 그 기대는 번번히 오판으로 드러났고, 그때마다 한번 더를 외쳐왔다는 것이다.

현임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자기 임기 끝까지 이라크전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이상, 선택은 아직 미정인 다음 미국 대통령의 손에 달리게 되었다. 현 미국 대선 예비후보 중에 당선 후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철수를 내거는 인물은 아직 없기 때문에 새 미국 대통령이 들어와도 전쟁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손절매란 것은 언제나 고통스럽고, 또한 그 시점에서는 불확실한 것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잘못된 시점에 손을 털게 되면 그나마 건질 수 있는 몫까지 다 날려버릴 수가 있다. 자원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지금 중동은 함부로 손털고 나올 수 있는 곳이 못된다. 불안한 균형이라도 재건해 놓고 빠져나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끝으로 한 가지 불안요소가 더 있다.

11. 이들 많은 오류들의 기저에는 장기간에 걸쳐 상당한 제약 하에서 군사력을 사용하는데 따르는 막대한 위험과 비용 -다른 무엇보다도 인명손실- 과 맞물린 지극히 복잡한 일련의 정치 군사적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행정부 최고위층을 조직하는데 실패한 우리의 잘못이 깔려 있었다. 이것이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이 직면한 유일한 과제였다면, 그러한 조직의 약점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가 직면한 다른 광범위한 국내적, 국제적 문제들과 공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남아시아에서의 우리 행동 -목표, 대안적 정책의 위험과 비용, 실패가 명백해 졌을 때 정책을 변경할 필요성 등- 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행정위원회에서의 논쟁으로 대표될 수 있는 강도와 철저함을 갖고 분석하고 논의하는데 실패했다.


대개의 유권자는 국내경제문제를 외교안보 문제보다 중요시한다. 걸프전에 승리하고서도 경기후퇴의 유탄을 맞아 재선에 실패한 조지 H.W. 부시 대통령의 전례는 그 좋은 예이다.

이제 미국 경제는 심각한 경기후퇴에 직면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되든지 간에, 부시 대통령처럼 이라크 문제를 최대의 국정현안으로 붙들고 있을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경제문제와 씨름하는데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라크 전쟁이 다른 현안에게 우선권을 빼앗긴다면 그만큼 그 정책의 성공 가능성은 낮아질 것이다.

by sonnet | 2008/03/30 16:27 | 정치 | 트랙백(1) | 핑백(3) | 덧글(41)
네오콘은 현실주의인가 이상주의인가? (2)
네오콘은 현실주의인가 이상주의인가?의 코멘트에 대한 답변

한 10일 전부터 방문해 주고 계신 인형사 씨께서 무려 도전자를 자처하시면서 답변을 촉구하고 계시는지라 이어서 얼마간 의견을 적어보기로 한다.

그런데 내 짐작으로 이 분은 다음 글의 필자가 아닐까 한다.
이라크 점령과 한국모델 (dcinside)
이 글의 코멘트에 내 글에 대한 링크가 달려 있고, 이곳의 리퍼러가 기록된 직후부터 이 분의 방문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논조도 비슷한 것 같고 말이다.

어쨌든 이번 글에서는 약간의 개념 정리를 하고 나서 네오콘의 활동을 경쟁자들과 비교해 이상주의적 속성을 보인다고 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행위자의 의도는 일정하게 정의된 국가이익의 추구이며, ...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희생으로 그 희생을 훨씬 초과하는 이익을 달성할 수 있는 방향으로 현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할 때, 그런 현상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현실주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형사)

이 질문은 합리적행동자모델(RAM) 상에서 국익 추구란 조건을 달아 현상변화 추구도 현실주의일 수 있다는 답을 유도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숨겨진 조건들이 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이상주의자란 어떤 특징을 보이는 사람들일까 하는 점을 검토해 보자.

1) 목표
먼저 이상은 현재 완성된 형태로 구현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 더 추구할 것이 없고 지키기만 하면 끝이므로)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이상, 이상을 성취할 시점을 미래의 언젠가에 두는 것도 당연하다. 완전한 이상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에도 미래에는 이상에 보다 다가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행동
의미있는 이상주의자이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이상추구를 향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상을 꿈꾸지만 실천이나 이념 전파의 노력은 없는 몽상적/칩거형 이상주의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현실정치/정책 측면에서는 무의미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3) 긍정적 편향
이상주의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상추구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향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또한 이상실현에 대한 긍정적 편향과 이상추구행위는 서로 positive feedback하는 관계이다. 이상실현의 가능성을 크게 볼 수록 이상추구행위를 할 동기가 커지는 것이고, 이상추구행위에 열심인 사람은 자신이 이상실현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만약 반대로 믿는다면 어떻게 될까? 미래로 갈수록 현실이 날이 갈수록 이상실현에서 멀어진다고 믿으면 현실변혁적 이상추구행위는 의미가 없으며, 현상유지가 최선의 전략이 될 터이다. 이 말은 첫번째 가정인 '이상은 미래시점에 있다'는 것과 공존하기 힘든 개념이다.

요약
1) 목표: 미래 시점에 목표로서의 이상 설정.
2) 행동: 구체적인 이상 추구의 경향성과 노력
3) 긍정적 편향: 이상추구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 평가

즉 이상주의자는 이상이 실현되길 희망하고, 이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실현이 가능하며 반대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쉽다고 믿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정반대는 아닐지라도 주로 상호대립적인 개념으로 쓰이지 상호병립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이상주의자일수록 덜 현실주의자라는 식의 용법이 자연스럽지, 이상주의자이며 동시에 현실주의자라는 용법은 부자연스럽다는 말이다.

즉 현실주의자는 이상주의자의 여집합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1) 목표
앞서 이상주의자는 어떤 것이든 분명한 목표(이상)가 미래시점에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했었다. 그럼 현실주의자는 어떤 사람들일까. 목표가 과거 어느 시점에 있어서 과거를 재현하려는 복고주의자일까? 아니면 현재가 최고라고 생각해서 현상유지를 지상명제로 삼는 사람들일까? 이런 개념들은 실제로 현실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잘 맞지 않는다.
이상주의자와 확연히 구분되면서 실제의 현실주의자에게 잘 맞는 설명은 미래 시점에 존재하는 목표(이상)의 존재, 그 도달 가능성이나 도달 방법에 대해 상대적으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란 것이다.

2) 행동
목표(이상)의 존재, 그 도달 가능성이나 도달 방법에 대한 확신부족은 현실주의자의 행동을 이상주의자에 비해 더 조심스럽고 보다 시행착오적 탐색에 의존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산 꼭대기에 보물이 묻혀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상주의자)은 가능한 빠른 방법으로 산을 오르려 하겠지만, 이 산 어딘가에 보물이 묻혀있는 것까지는 들었지만 그게 어딘지 모르는 사람(현실주의자)이라면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보물을 묻어놓을 만한 곳이 없나 관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부정적 편향
목표(이상)의 존재, 그 도달 가능성이나 도달 방법에 대한 확신부족은 자동적으로 부정적 편향을 낳는다. 이상은 허상일 수도 있고, 이상추구의 길이 험난할지도 모르며, 그 와중에 예기치않게 뭔가 긁어부스럼을 만들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상에 대한 신념의 부족은 자동적으로 리스크회피 성향을 증대시키게 된다.
즉 현실주의자가 현상유지를 선호한다 하더라도, 그 이유는 현재가 쏙 마음에 들어서라기 보다 미래가 더 나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약
1) 목표: 미래 시점에 존재하는 목표(이상)의 존재, 그 도달 가능성이나 도달 방법에 대한 확신부족
2) 행동: 조심스럽고 시행착오에 의존하는 탐색
3) 부정적 편향: 이상추구에 따른 리스크를 이상주의자보다 중시


이번에는 우리가 묵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분석틀인 합리적행동자모델을 살펴보자.

토마스 셸링은 자신의 합리적 행위란 (감정적 행위에 대비되는) "이성적 행위라는 의미만이 아니다. 의식적으로 득실을 따지는 계산과 그 계산의 기초가 되는 명시적이고 내부적 일관성이 있는 가치체계에 근거하는 행위라는 의미"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때 정책결정자들이 모든 상황과 그에 대응하는 모든 대안, 각 대안으로부터 초래될 모든 결과를 정확히 평가해서 최선의 정책을 정한다면, 사람이 다르더라도 동일한 결론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능력에 한계가 있어 제한된 시간 내에 부분적인 정보만 갖고 자신의 주관적 판단기준 -가치관, 신념, 이미지- 등을 반영해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정책을 정한다면, 결론은 매우 다양해질 것이다.
전자를 포괄적 합리성, 후자를 제한된 합리성이라고 하는데, 현실세계의 정책결정은 물론 제한적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에 따라 이루어진다.

앞서 지적한 편향들은 그러한 제한적 합리성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편향의 발생원인은 미래의 불확실함과 평가의 여러가지 주관적 요소에서 찾을 수 있다.

"컵에 물이 반 잔이나 남았다/반 잔 밖에 남지 않았다."

이와 같이 현재에 대한 평가도 사람마다 어느 정도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내일 저 컵의 물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는 훨씬 큰 불확실성이 있다. 이는 미래가 갖는 본질적인 특성이고, 이 불확실성에 대한 평가는 합리적 판단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갈리기 마련이다.

"내일 비가 와서 컵에 물이 가득 찰 것이다"
"내일 햇볓이 쨍쨍 내리쬐어 대부분 말라버릴 것이다."

두번째로 확률의 객관적 측면에 대해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 확률의 의미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같은 승률의 도박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평가는 같을 수가 없다. 위험회피적인 사람도 있는가 하면 위험선호형도 있는 법이다.

세번째로 이러한 평가는 서로 다른 가치들에 대한 주관적인 가치부여와 결부되어 있다. 예를 들어 90%의 유인로켓발사성공율과 (나머지) 10%의 인명손실가능성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과연 이 로켓을 발사할 것인지를 놓고 둘을 저울질하려면 주관적인 가중치와 공분모가 적용되어야 한다.


자 이제 앞서 받았던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행위자의 의도는 일정하게 정의된 국가이익의 추구이며, ...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희생으로 그 희생을 훨씬 초과하는 이익을 달성할 수 있는 방향으로 현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할 때, 그런 현상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현실주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형사)

미래의 희생, 이익, 가능성은 모두 앞서 이야기한 불확실성에 대한 평가나 주관적인 가중치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는 부분이다. 희생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이익은 "훨씬 초과", 가능성은 "존재". 이러한 전제들은 이미 긍정적 편향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즉 이 질문 안에는 행위자의 강한 낙관적 판단 경향이 이미 들어 있다. 저런 경향을 강하게 보이는 행위자라면 이미 이상주의자일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물론 논리적으로만 보면 낙관론이 곧 이상주의는 아니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낙관적 현실주의자와 비관적 이상주의자가 맞붙는 정책논쟁이 있는지를 직접 찾아보면 그것은 실제로는 무척 드문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추상적인 이야기를 길게 했기 때문에 현실에서 이것이 얼마나 맞아들어가는지 한번 살펴보자.

미국의 대외정책을 놓고 키신저/스코우크로프트 대 체니/럼스펠드/월포위츠 진영 간의 노선투쟁에는 이러한 현상과 전망에 대한 대립되는 편향이 잘 드러난다.

포드 행정부 기간 논쟁의 핵심은 … 미국의 힘에 대한 평가, 즉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이었다. 베트남전 패배 이후 미국은 과연 쇠퇴하고 있는가? 미국은 해외개입을 축소해야만 하는가? 미국민들은 공산주의에 맞서 싸워온 노력들을 포기하고 부득이 소련과의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키신저의 대외정책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일련의 답변에 기초한 것이었다. 키신저는 베트남전 패배 이후 모스크바와의 타협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프레드 이클레는 “키신저는 미국이 베트남전으로 인해 약화됐으며, 국가적인 분위기가 군비 통제와 데탕트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은 키신저가 미국과 미국의 미래에 대해 너무 암울한 견해를 갖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일부는 키신저를 독일 염세주의 철학자인 오스왈드 슈펭글러(Oswald Spengler)와 비교하기도 했다. 카터 행정부 시절 국가안보 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는 “키신저는 슈펭글러리안이었다. 그는 미국이 쇠퇴하고 소련이 우위에 서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책은 이들과 거래를 함으로써 이들의 힘을 견제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말했다.
[인용자 주: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의 저자이다.]

키신저는 비록 이런 비난들을 거부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비판은 정당한 것이었다. 그는 소련이 실제 우위를 점해가고 있다고 믿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미국 쇠퇴의 불가피성을 수용한 것처럼 보였다. 키신저의 최측근 중 한 명인 윈스턴 로드(Winston Lord)는 1977년 한 인터뷰에서 “키신저는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측근인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에 따르면, 키신저는 미국이 독자적으로 국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미국의 능력을 과대평가해 왔다고 생각했다. 키신저 자신은 미국민들이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이후 소련과의 대결 정책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키신저의 이런 견해들은 1970년대 중반의 정치적인 분위기에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 그러나 럼스펠드, 체니, 월포위츠, 그리고 공화당의 보수주의 우파들과 민주당의 신보수주의자들은 키신저의 암울한 비전을 거부했다. 이들은 점차 키신저나 민주당의 맥거번 추종자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해 나갔다. 이들의 시각에서 볼 때 미국은 결코 쇠퇴기에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에 근거한 비전을 채택하거나 소련과 새로운 타협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포드 행정부 시절에 출현한 이 같은 철학적 분열상은 20세기 말을 지나 21세기 초까지 지속됐다. 2002년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에 대한 공격 여부를 결정하려고 했을 때, 일단의 공화당 내 비판론자들은 미국이 힘의 한계를 깨닫고 신중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 같은 비판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사는 키신저의 직계였던 스코우크로프트였다. 반면 군사행동을 지지한 대표적인 인사들은 체니와 럼스펠드, 그리고 월포위츠였다.

Mann, James., Rise Of The Vulcans: The History of Bush's War Cabinet, New York:Viking Adult, 2004
(정인석 권택기 역, 『불칸집단의 패권형성사』, 박영률출판사, 2005, p.99~100)

즉 오늘날에 와서는 일방주의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미국이 독자적 행동으로 국제문제를 요리할 수 있으며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네오콘 진영의 생각은 베트남전의 패배와 달러의 금태환 폐지, 오일 쇼크, 스태그플레이션 등 전반적으로 어두웠던 70년대에도 포기된 적이 없으며, 어떤 한 시대에 주어진 현황에 대한 판단에서 도출된 전략이라기 보다는 이들의 신념과 이상, 세계관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독자적 행동으로 국제문제를 다룰 미국의 능력은 과대평가되어 있다는 키신저의 70년대 관점은 네오콘 그룹을 열받게 만들고 치열한 정치투쟁을 벌이게 했던 것이다.
물론 키신저도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의 증대된 역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키신저의 논리는 상황이 변화했으니 나도 따라 변한다는 상황의 논리이지 네오콘과 같은 당위의 논리는 아니라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다른 차이점도 있다.

허버트 사이먼의 표현을 빌리자면 합리적 행위자는 그 의도에 있어 합리적(intendedly rational)이라고 한다. 즉 결과까지 합리적이라고 보장되는 것은 아닌 셈이다. 실제로 제한적 합리성(현실) 하에서는 계획이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의도치 않은 귀결(unintended consequence)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구체적인 사안별로 이 의도치 않은 귀결의 규모와 파급력이 어느 정도일지를 예측하는 것이다. 그 규모와 파급력이 너무 클 것으로 예상되면 계획을 변경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으며, 작을 경우에는 예비비 등을 미리 배당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등으로 대응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주의자들의 업무처리방식과 이상주의자들의 업무처리방식은 이러한 의도치 않은 귀결에 대한 대비가 아주 대조적이다.

우선 걸프전에서 보여준 스코우크로프트의 입장을 살펴보자.

(아버지) 부시는 백악관 상황실에서 베이커, 체니, 스카우크로프트 및 파월과 회동했다.
“우리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라고 스카우크로프트가 운을 떼었다. “방어-억지 전략을 계속하느냐, 아니면 공격 전략으로 넘어가야 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입니다.”
부시와 스카우크로프트가 가장 강경하게 공격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베이커는 훨씬 느긋하고 신중한 까닭에 의회 및 대중의 태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등 비판은 했으나, 그도 더 이상 소극적인 태도는 보이지 못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체니는 부시측이 대통령이 공언한 쿠웨이트 해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체니는 성공이 확실하지 않은 한 어떠한 군사행동도 권고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공격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간다고만 말했다. 국제적인 제휴는 무한정 계속되기에는 너무나 약하고, 그 협정도 미묘한 것이다.
파월은 인내한다는 것이 대세가 아님을 알았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는 제재전략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파월은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자신의 폭넓은 정치적 조언을 묵인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미 대통령에게 제재전략을 옹호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더낫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실제로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파월에게 전반적인 정치적 조언을 요구하지 않고 있었다.

Woodward, Bob., The Commanders, Simon & Schuster, 1991
(이광식 역, 『사령관들』, 중앙출판사, 1991, p.353-354)

아들 부시의 이라크전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데서 연상되는 것과는 달리, 걸프전에 관한 한 스코우크로프트는 확고한 매파였다. 그러나 잘못되어 수렁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해 처음부터 강력히 한계선을 긋고 이긴 것이 확실해진 뒤에도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았다. 사실 2003년의 이라크전 반대는 이때의 한계선을 재천명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그의 우려는 정확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시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의 운명은 이라크 민중에게 달렸다고 여러 차례 선언했었다. 종종 그는 사담의 제거가 환영받을 것임을 시사했지만 아주 실질적인 이유에서 봉기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민중 반란이나 쿠데타가 사담 정권을 전복시키길 기대했지만, 미국이나 현지 국가들은 모두 이라크란 국가가 쪼개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우리는 페르시아 만 지역 한복판의 장기적 세력균형에 대해 우려했던 것이다.
사담 제거를 시도하려고 지상전을 이라크 점령으로 확대하면, 일을 진행하는 도중에 목표를 변경하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정책지침을 어기고, 욕심을 부리다 수렁에 빠져들게 되어(mission creep), 예측 불가능한 인적 정치적 비용을 유발하게 될 것이었다.
그를 체포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파나마에서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던 노리에가도 찾아낼 수 없었다. 우리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실질적으로 이라크를 통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연합군은 즉시 붕괴되고, 분노한 아랍 국가들이 전열에서 이탈하며 다른 동맹국들 또한 철군하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그러한 상황 하에서 우리는 냉전 이후 세계에서 침략행위를 다루는 패턴을 정착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 오던 중이었다. 그대로 밀고 들어가 이라크를 점령함으로서 일방적으로 UN 결의를 뛰어넘게 되면, 우리가 정착시키기를 희망했던 침략행위에 대한 국제적 대응 관례를 파괴하게 될 것이었다.
우리가 그러한 침공 코스를 밟는다면, 생각건대 미국은 아직도 극도로 적대적인 땅에서 점령세력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이는 극적으로 다른 -그리고 아마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부시&스코우크로프트, 왜 우리는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지 않았는가, Time, 1998년 3월 2일


이어서 콜린 파월을 살펴보자. 파월은 레바논에 섣불리 파병했다가 폭탄 테러로 수백 명의 해병대원을 잃고 황황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은 그저 우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말벌들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해서 천년 묵은 말벌의 소굴에 손을 집어넣은 것이다. … 적어도 부모나 부인, 혹은 자손들이 왜 자기 가족이 죽어야 했느냐고 물을 때 그들을 쳐다보고 분명한 대답을 줄 수 있을 때까지는 인명을 담보로 삼아서는 안된다.

Powell, Colin L., My American Journey, 1995
(류진 역, 『콜린 파월 자서전』, 샘터, 2001, pp.468)

레바논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당시 국방장관 와인버거는 새로운 군사정책 가이드라인을 밝히게 되는데, 이는 그의 군사보좌관 파월에게 전수되어 후에 파월 독트린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된다.

레이건이 재당선된 후 와인버거는 11월 28일,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연설했다. 나는 '언제 미국 전투 병력을 해외에서 활용할지를 고려할지'에 관해 그가 제안한 기준들을 직접 듣기 위해 동행했다.
(1) 우리[미국]나 우리[미국]의 동맹국의 중대한 이해가 위태로울 때 투입한다.
(2) 투입하게 될 경우 이기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3) 뚜렷한 정치적, 군사적 목표가 있을 때에만 투입한다
(4) 전쟁이란 가만히 있는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목표가 바뀌면 병력 투입에도 변화를 줄 수 있어야 한다.
(5) 미국 국민과 의회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경우에만 투입한다.
(6) 최후의 방편으로서만 미국 병력을 투입한다.
간단히 말해, 국가의 이해가 위태로운 지경인가 물어서 대답이 예라면 들어가서 이기고, 그렇지 않으면 바깥에 머문다는 것이다.

Powell, 『콜린 파월 자서전』, pp.412-413)

한번만 살펴보년 이 독트린이 별 국익이 걸리지도 않았는데 말려들어서 피를 본 레바논 파병이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도 장기전으로 치달은, 그러면서도 결국 승리하지 못한 베트남전 같은 전례를 극력 피하기 위해 설계된 원칙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슈워츠코프는 공격작전에는 자신의 휘하 병력의 대략 두 배 수준은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두 배의 공군기의 출격, 해군 항공모함은 3척에서 6척으로 두 배, 해병과 육군 지상군도 두 배,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제7군을 원한다.”고 그는 말했다.
제7군은 가장 훈련이 잘 되고 좋은 장비를 갖춘 3개 사단, 즉 2개의 최신 탱크사단과 1개의 기계화사단으로 구성된 미국의 유럽 지상방위의 중핵이었다. 제7군의 증파는 바르샤바 조약의 위협이 유럽에서 실질적으로 사라지기 전인 1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아찔한 요구였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와 바르샤바 조약의 붕괴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만약에 대통령이 공격 작전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제7군을 보내줘야 할 것이라고 슈워츠코프는 말했다.
파월은 자신이 그 요구를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 술 더 떠서, 병력 증강을 가능한 한 대규모로 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에는 제7군과 더불어 훈련된 1개 육군사단이 주둔하고 있다. 제1 기계화 보병사단을 보내주면 어떻겠냐고 파월은 제안했다. 슈워츠코프는 동의했다.

Woodward, 『사령관들』, p.344

여기서 합참의장 파월은 현지사령관이 좀 과도하게 병력을 요구하는 듯 싶은데도, 거기에 한층 더 넉넉하게 얹어주는 행동을 보여준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깨끗하게 처리하고 성공적으로 빠져나온다는 구호로 유명해진 파월 독트린의 적용인 셈이었다.

합참의장 파월은 부시 행정부 내에서 조속한 종전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닉슨과 레이건 행정부에서 일했던 대외정책 전문가 프레드 이클레가 쓴 『모든 전쟁은 반드시 끝나야만 한다(Every War Must End)』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있었다. 이클레는 장군들이 군사책략이나 전술뿐 아니라 어떻게 전투를 종결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일본군은 진주만 공격을 위한 훌륭한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어떻게 미국과의 전쟁을 끝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이 책을 너무나 좋아했던 파월은 ‘사막의 폭풍(Desert Storm)’ 작전을 전후해 이 책의 일부분을 스코우크로프트와 체니, 합동참모들에게 복사해 돌렸다. 파월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우리는 곧 달성될 제한된 목적을 위해, 제한된 권한으로, 제한된 전쟁을 치르고 있다. 나는 책임 있는 사람들은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지를 생각하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걸프전 당시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Mann, 『불칸집단의 패권형성사』, p.243

이런 행동 또한 성공적으로 빠져나오기에 대한 파월의 엄청난 집착을 잘 보여준다.



이번에는 네오콘 진영의 이라크전 대응을 살펴보자.

1998년, 이들은 「미국의 신세기 프로젝트」(Project for the New American Century; PNAC)란 단체를 통해 클린턴 정부에 공개서한을 내어 후세인 정권 붕괴를 촉구한 바 있다. 즉 집권 전부터 이라크를 표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가 강력했던 것이다.

이후 집권은 하였으나 9.11 테러가 발생하기 전의 미국 정치 지형에서 미군의 대규모 직접 침공 계획은 역시 지지를 받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런 정치적 상황에 맞추어 이라크 공격을 후원하는 움직임은 존재했다.

2001년 초여름, 펜타곤의 기획부에 부임한 한 직업 관료에게 INC가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는 쿠데타에서 중대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가설을 평가하는 작업이 맡겨졌다. 울포위츠와 페이스를 중심으로 한 매파가 이미 승인한 가설이었다. 그 직업 관료는 쿠데타가 있은 후 찰라비가 이라크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환영받을 것이란 그들의 가설도 아울러 분석했다. 이 평가에 정통한 한 관리는 … “이런 분석은 ‘잘못될 수 있는 것’에 대한 연구였다. 만약 아흐마드 찰라비가 이라크 국민에게 예상처럼 환영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찰라비와 그 동료들이 사담을 전복시킬만한 역량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떤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인가? 등에 대한 연구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책결정자들은 그다지 걱정하는 듯하지 않았다. 그 관리가 분석결과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한 동료를 통해 펜타곤의 새 지도부는 잘못될 가능성보다 긍정적인 방향에서 생각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또한 그 연구에 따른 대안의 모색은 실패를 전제로 한 계획이라며 무시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Hersh, Seymour M., Chain of Command: The Road from 9/11 to Abu Ghraib, New York: HarperCollins, 2004
(강주헌 역, 『지휘계통: 9.11테러에서 아부그라이브까지』, 세종연구원, 2004, pp.240-241)

그리고 9/11 테러 직후, 이들은 반사적으로 이라크를 겨냥했다.

(테러 다음날인) 9월 12일 아침, 국방부의 관심은 이미 알 카에다에서 멀어지기시작했다. CIA는 이번 테러가 알 카에다의 소행이라고 의사를 분명히 표명했지만, 럼즈펠드의 심복인 폴 울포위츠는 이 주장에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 9월 12일 오후가 되자 럼즈펠드 장관은 우리의 대응 조치 범위를 확대해 ‘이라크’를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파월 국무 장관은 알 카에다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지원세력이 생기자 나는 조금 안심이 되며 콜린 파월과 차관인 리치 아미티지에게 감사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논의에서 뭔가 잘못된 점이 있습니다. 알 카에다의 공격을 받고 그 대응으로 이라크를 공격한다면 이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응하려고 멕시코를 침공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나는 강력히 의견을 개진했다.
파월은 고개를 흔들며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고 말했다.
정말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회의가 끝난 후 럼즈펠드 장관은 아프가니스탄에는 근사한 폭격 목표가 없고, 더 좋은 목표가 있는 이라크를 폭격해야 한다며 불평을 늘어 놓았다. 처음에 나는 럼즈펠드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Clarke, Richard A., Against All Enermies: Inside the White House's War, Free Press, 2004
(황해선 역, 『모든 적들에 맞서: 이라크 전쟁의 숨겨진 진실 』, 휴먼앤북스, 2004, pp.63-64)

이들이 아무리 대단한 음모가라 하더라도 그 혼란 속에서 여러 네오콘 멤버들 간에 조율된 활동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이 시기 이들의 행동은 평소 소신을 반영한 반사적인 행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들) 부시 대통령 본인이 이런 흐름의 일원이었다.

12일 저녁에 비디오 회의 센터를 떠나 상황실에 오니 대통령이 와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 듯했다. 그는 우리 중 몇 명을 붙잡고 회의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대통령은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능한 한 빨리 모든 상황이 정상으로 되돌아오도록 노력해주길 바랍니다. 모든 것을... 사담이 이 짓을 했는지 알아봐주십시오. 어떤 방식이로든 그가 이 일과 연관되었다는 점을 밝히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앞선 회의가 생각났다. 믿어지지 않지만 이라크를 공격해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대통령 각하, 이번 공격은 알 카에다의 소행입니다."

"알아요. 알고 있지만 사담이 연관되었는지 밝혀보세요. 한번 찾아보세요. 사소한 단서라도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시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대통령의 견해를 존중해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동안 알 카에다를 후원하는 국가가 있는지 여러 차례 조사를 했지만 알 카에다는 이라크와 아무런 실질적 연계가 없었습니다. 이라크의 역할은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예멘처럼 미미합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이라크와 후세인을 조사해보세요." 대통령은 화난 듯 퉁명스럽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리사 고든 해거티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대통령이 나가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Clarke, 『모든 적들에 맞서 』, p.65

조직에서 보스가 먼지가 나올 때까지 계속 털게 시키면, 없는 먼지라도 누가 만들어 오는 법이다. 물론 사담 후사인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털어서 먼지 안 나올 부류는 아니었다.

2001년 12월, 찰라비는 부시 행정부에 새로운 전쟁계획안을 제시했다. 공중폭격만이 아니라 수천 명의 미군 특수부대원까지 동원되는 계획안이었다. 그 밖에도 이 계획안에는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 1980년대에 이라크와 지루한 전쟁을 벌였던 이란의 참여를 가정한 것이었다. …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INC는 이라크에 침투하는 즉시 중포(重砲) 기지를 확보하고 이라크 임시정부의 창설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때 부시 행정부가 곧바로 임시정부를 인정하기로 약속되었다. 이라크 국민의 거의 3분의 2가 시아파다. 따라서 미국과 INC는 시아파를 잠재적 동맹자라 생각했다. 그 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랬던 것처럼 강력한 공습을 시작하고, 수천 명의 특수부대원을 이라크 남부에 공수시킨다. 그와 동시에 쿠르드족의 지배 하에 있는 지역들, 즉 북부의 INC 지지자들도 사담 후세인을 공격할 태세를 갖춘다. 그리고 반군은 이라크 군부를 신속히 공격한다. 그럼 사담 후세인은 정예군을 남부로 보내 미군을 상대해야 하는지, 아니면 모든 세력을 바그다드 인근에 집결시켜 북쪽에 내려오는 반군을 상대해야 할 것인지 진퇴양난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공격계획은 퇴역 육군 4성 장군인 웨인 다우닝(Wayne Downing)과 전(前) CIA 관리로 무보수로 INC의 고문역을 맡았던 두안(‘듀이’) 클래리지의 도움을 받아 작성된 것이었다.
……
찰라비의 새로운 전쟁계획안은 펜타곤 특별기획국의 조언에 따라 덧붙여지고 수정된 후 폴 울포위츠의 승인을 받아 연합참모본부에 평가를 의뢰했다. 일각에서 냉담한 반응을 보이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배운 교훈과 그 교훈을 사담 후세인에게 적용하는 방법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Hersh, 『지휘계통』, p.244-246

아프간 전쟁이 급박히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 때, 펜타곤 한 켠에서는 새로운 이라크 작전안이 연구되고 있었다. 9/11 이전의 쿠데타 유발 계획과는 달리 이번 계획은 아프간 전쟁계획을 거의 그대로 이라크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기간의 투쟁으로 전투력이 입증된 약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아프간과는 달리 찰라비의 망명자 단체 이라크 국민회의(INC)는 기껏해야 수백 명 정도의 병사 밖에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였다. 미국의 공군력이 지렛대가 되어 주려 하더라도 기본 자본이 하나도 없으면 이야기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폴 울포위츠와 리처드 펄을 필두로 부시 행정부 안팎의 매파들은 미국이 무력시위를 벌이면 이라크 내에서 사담 후세인에 반대하는 반란이 즉각 일어나 불길처럼 확대될 것이라 주장했다. 2002년 초 내가 펄에게 이런 주장에 대한 의견을 묻자, 펄은 이라크군이 저항하며 항전하면 내전과 혼돈이 장기화될 것이란 이라크 주변국의 우려를 일축하면서 “아랍인이라도 다른 민족과 다르지 않다. 그들도 승리자를 좋아하며 승리자와 기쁨을 함께 나누려 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걸프전에서 특수부대를 지휘했던 다우닝 장군은 펜타곤의 중화기를 동원한 복잡한 전쟁계획을 비난하면서, INC의 동료들에게 5천명이면 해낼 수 있는 일에 펜타곤이 5배나 많은 병력을 동원하려 한다고 투덜거렸다.

Hersh, 『지휘계통』, p.244-258

그러나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들에겐 별 의미가 없었다. 이런 확신 앞에 옛 동료들도 당혹해 했다.

하지만 행정부 내에서 펄을 지지하는 관리들도 장기적인 전략을 찾아볼 수 없다고 불평했다. 예컨대 조프리 캠프(Geoffrey Kemp)는 2002년 초의 인터뷰에서 “이라크를 처리하면 다른 것은 저절로 해결된다! 이것이 미국 전략의 전부다”라고 투덜거렸다. … “이라크는 자부심이 강한 나라다. 그런데 패전의 굴욕을 뒤집어썼다. 이라크 국민이 사담을 증오하긴 하지만 미국을 사랑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잠재된 민족주의가 발호할 것이다. 감춰두었던 무기를 다시 꺼내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가능성이 아랍 세계의 다른 곳에서, 즉 소규모 군대로 치안을 유지하는 라들에서 돌출될 위험이 없지 않다”라고 말했다.

Hersh, 『지휘계통』, p.263-264


대통령 또한 마음이 기울어져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2002년 1월 3일 (CIA의) 사울은 테닛과 근동과 부과장 그리고 이라크 프로그램을 수행해온 두 명의 공작요원과 부통령에게 보고하러 갔다.

사울은 어조를 부드럽게 조절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비밀작전으로는 후세인을 제거할 수 없다'고 체니에게 말했다.

테닛과 사울 일행은 그 뒤 대통령에게도 동일한 브리핑을 했다. 부시가 물었다.
"우리는 은밀한 방법으로 그것을 할 수 있소?"
"없습니다."
부시는 그때 "젠장(darn)!"이란 말이 얼핏 떠오르더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Woodward, Bob., Plan of Attack, New York: Simon & Schuster, 2004
(김창영 역, 『공격 시나리오』, 따뜻한손, 2004, pp.108-111)

국방장관도 열심히 움직였다. 아프간 전쟁에서는 CIA에 주도권을 내주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었다.

성격이 조급한 럼스펠드는 이라크 전쟁계획과 관련한 프랭크스의 첫 번째 공식 보고를 (2001년) 12월 4일 펜타곤에서 받으려고 했다.
……
프랭크스는 리뉴어트와 함께 펜타곤으로 가서 ‘짧은 시간동안 할 수 있었던 것은 작계 1003호를 땜질한 수준’이라는 말로 보고를 시작했다. 6개월에 걸쳐 40만 명을 동원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기존의 기본계획보다 병력은 10만, 기간은 1개월 단축된 것이다.
……
“나는 이 계획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요점을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여기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프랭크스와 럼스펠드의 눈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그들은 이미 이 계획은 그들이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그것은 장시간이 소요될 거요.”
“장관님, 옳은 말씀입니다. 이것을 수정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를 보면 그렇게 많은 병력이 소요될 것 같지는 않아.”
럼스펠드는 레이저 유도장치를 갖춘 첨단 정밀무기와 첩보·감시·정찰(ISR)의 향상에 따라 실제 파병 병력은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
“병력을 그렇게 많이 동원해야 된다고는 보지 않네.”
“이의는 달지 않겠습니다. 내 생각에도 우리가 그렇게까지 해야 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만, 실정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Woodward, 『공격 시나리오』, pp.68-70

중부군사령부가 오랫동안 갖고 있던 이라크 전쟁계획 OPLAN 1003-98은 원래 40만명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을 전제로 짜여져 있었다. 2003년 이라크전을 지휘했던 중부군 사령관 프랭크스 장군이 처음 제시한 작전계획도 여기에 준한 것으로 그 계획에 필요한 병력은 38만5천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들은 럼스펠드가 최종적으로 승인한 병력보다 무려 24만명이나 많은 것이었다.

(2003년) 1월 24일 금요일, 프랭크스 사령관은 최종 전쟁계획인 5-11-16-125 하이브리드 플랜을 럼스펠드 장관과 마이어스 합참의장에게 제출했다.
“이것이 바로 그 계획안입니다.”
앞으로 약간의 수정은 있을 수 있겠지만, 더 이상 계획을 짜는 일은 없을 것이다. … 2월 중순에 접어들면 총 14만 명 수준의 미군이 그 지역에 주둔하게 될 것이다. 이 가운데 7만 8천 명은 육군·해군·특수작전군으로 이루어진 지상군 병력이다.

Woodward, 『공격 시나리오』, pp.370

럼스펠드는 기술혁신이 방만한 규모의 구식 군대를 대체한다는 자신이 신봉하는 이론에 몰두해 있었다. 현지 사령관을 계속 압박하고 쥐어짜면 군살이 빠진 훌륭한 계획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 것이었다. 덤을 얹어주는 파월의 방식과는 정반대의 노선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차이가 잘 드러난다.
키신저의 일화를 살펴보면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네오콘에게 있어 이라크를 타도한다거나 기술혁신 군대가 온갖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든가 하는 목표는 이미 정해져 있고 손댈 수 없는 것이었다. 상황에 따라 목표를 추구하는 전술은 바뀔 수 있었지만, 상황이 바뀌었다고 목표를 버리는 법은 결코 없었다.
반면 현실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결과가 중요했다. 높은 목표를 잡았다가 프로젝트가 망하느니 목표를 낮추고 투입을 늘려서라도 성공을 담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의도치 않았던 귀결을 다루는 방법에 심각한 차이를 만들었다. 현실주의자들은 의도치 않은 귀결이야말로 실패의 제일 큰 원인이라고 보고 이를 최소화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반면 네오콘은 의도치 않았던 귀결에 대한 지적을 목표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 부족이나 불충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이 문제를 덮어버리고 외면하려 들었다. 이는 이상주의자들에게 보이는 전형적 자기강화의 과정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이상주의나 도덕주의에 대한 네오콘의 발언을 좀 더 검토해 보자.

위의 월포위치의 언명들도 그런 당파적 정치적 수사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가능성을 충분히 부정하지 못한다면 저 언명들은 네오콘이 이상주의자라라는 것을 보이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인형사)

일단 30여년 전에 했던 말과 그 이후의 행동에 상당한 일관성이 있다면 그것은 무시하기 힘든 이야기다.
그리고 해당 발언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전하는 것인데, 월포위츠가 자기 밑의 인턴 대학원생들과 가진 사적 토론, 즉 자기 편끼리 모인 자리에서 당파적 정치적 수사를 구사했다고 보기는 무리가 아닐까? 꼭 그렇게 해야 한다면 당파적 정치적 수사일 가능성을 제기한 사람이 입증해야 할 것이다.

사실 후쿠야마 또한 오랫동안 네오콘으로 분류된 인물로 PNAC의 멤버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인 "역사의 종말" 또한 이상주의 냄새가 물씬 나는 책으로, 전형적인 네오콘식 이념서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공개적으로 네오콘을 비판하며 전향하지만 않았다면 그는 지금도 틀림없이 네오콘으로 인정받고 있을 것이다.

이런 네오콘의 이상주의적 선호를 드러내는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Natan Sharansky is now allied with the neoconservative camp, and he cites the Chicken Kiev speech as a typical instance of realist policymaking. A book that he wrote last year, “The Case for Democracy,” came to national attention when George W. Bush told the Washington Times, “If you want a glimpse of how I think about foreign policy, read Natan Sharansky’s book ‘The Case for Democracy.’ . . . It’s a great book.”

Sharansky argues that the United States would best serve its own interests by choosing as allies only countries that grant their citizens broad freedoms, because only democracies are capable of living peacefully in the world. In Kiev, “America had missed a golden opportunity,” Sharansky wrote in a chapter criticizing the President’s father. George H. W. Bush’s Administration, he said, “was not the first nor will it be the last to try to stifle democracy for the sake of ‘stability.’ Stability is perhaps the most important word in the diplomat’s dictionary. In its name, autocrats are embraced, dictators are coddled and tyrants are courted.”

In September, Sharansky was in Washington at the invitation of Condoleezza Rice; he gave the closing speech at a State Department conference on democratization. “Can you believe it?” he said to me just before the session. “Rice gave the opening speech and I give the closing?” Of his complicated relations with the Bush family, he said, “A few days after my book comes out, I get a call from the White House. ‘The President wants to see you.’ So I go to the White House and I see my book on his desk. It is open to page 210. He is really reading it. And we talk about democracy. This President is very great on democracy. At the end of the conversation, I say, ‘Say hello to your mother and father.’ And he said, ‘My father?’ He looked very surprised I would say this.” Sharansky went on, “So I say to the President, ‘I like your father. He is very good to my wife when I am in prison.’ And President Bush says, ‘But what about Chicken Kiev?’ ” Sharansky smiled as he recounted this story. “The President looked around the room and said, ‘Who is responsible for that Chicken Kiev speech? Find out who wrote it. Who is responsible?’ Everyone laughed.” Sharansky paused, and looked at me intently. He had a broad grin. “I know who wrote Chicken Kiev speech,” he said. “It was Scowcroft!”

Jeffrey Goldberg, Breaking Ranks, New Yorker, 2005년 10월 31일호

부시의 아버지는 소련 붕괴 당시에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에 가서 과도한 민족주의 열기를 앞세워 안정을 파괴하지 말 것을 주문한 바 있다. 샤란스키는 아버지 부시와 같은 사람을 안정을 위해 민주주의를 희생시킨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아들 부시는 그런 샤란스키의 책을 나오자마자 읽고, 극찬하고, 콘돌리자 라이스를 보내 상대하고, 백악관에 불러 직접 만났다. 아들 부시는 샤란스키가 자기 아버지를 강하게 비판할거라고 예상하면서도 그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부시와 그 자리에 있던 측근들은 그런 현실주의적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부시의 아버지와) 스코우크로프트를 다같이 비웃은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접대성 멘트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그들의 평소 생각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by sonnet | 2007/07/28 00:21 | flame! | 트랙백 | 핑백(2) | 덧글(10)
네오콘은 현실주의인가 이상주의인가?
Delenda Est에 달린 코멘트에 대해 간단히.


이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려면 Realpolitik의 사도 헨리 키신저와 부시 행정부 내에서 제일 잘나가는 네오콘 이론가였던 폴 월포위츠를 대비해 보는 것이 괜찮지 않을까 싶다.
(누구누구를 네오콘이라고 볼 것인가에 대한 확고한 합의는 없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제일 고위직에 있었던 네오콘 이론가는 폴 월포위츠라는데 별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이보다 더 고위직으로 네오콘과 가깝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리처드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정도인데 이들은 모두 학자 타입이 아니어서 이론가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월포위츠는 키신저의 소련정책 뿐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과 가설들, 그리고 역사해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월포위츠는 젊었고, 그의 견해는 당시 별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이것은 키신저에 대한 정치적 우파들의 이론적 도전을 대변하고 있었다.

1976년 여름, 여전히 군비통제군축국에서 일하던 월포위츠는 하버드대 대학원생 두 명을 자신의 인턴으로 채용했다. 이들 중 한 명이 프랜시스 후쿠야마였다. 월포위츠는 어느날 자신의 집으로 인턴들을 불러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키신저의 저서 『복원된 세계(A World Restored)』를 비평했다. 『복원된 세계』는 오스트리아 정치인 메테르니히(Metternich)가 19세기 초 유럽에서 지속적인 힘의 균형체제를 어떻게 구축했는지를 다룬 책이었다. 월포위츠는 학생들에게 이것은 좋은 책이며 키신저의 역작이지만 그가 한 가지 중요한 점을 빠뜨렸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의 영웅이 현실주의자인 메테르니히가 아니라, 도덕적, 종교적 원칙을 고수하며 나폴레옹에 맞서 강경한 정책을 추구했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1세(Alexander I)라고 지적했다.

키신저는 분명 강대국들 사이에 안정적인 평형 상태를 만들려고 시도했던 메테르니히와 그의 목표에 일체감을 느꼈다. 키신저의 대소 데탕트 정책 추구는 이 모델에 기반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복원된 세계』에서 도덕적 관심들에 대한 혐오를 드러냈다. 키신저는 “도덕적인 주장들은 절대주의의 추구, 뉘앙스의 부정, 역사에 대한 부정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월포위츠에게는 도덕적 원칙들이 안정이나 국익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다. 후쿠야마는 “키신저의 잘못은 그가 살고 있는 나라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니라, 이 나라가 어떤 보편주의적인 원칙에 헌신해 온 나라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점이라고 월포위츠가 지적했다.”고 회상했다.

월포위츠는 현존하는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보다 정치적 자유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그들은 레이건주의자들이 주장한 “대외정책의 도덕성” 조항을 수용했고, 이후 부시 행정부에서 정치적 안정보다 도덕적 가치를 선호하는 자신의 입장을 이라크 정책에 그대로 적용시켰다. 만일 후세인의 타도가 현존하는 중동의 힘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해도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자는 게 그의 논리였다. 월포위츠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도덕적 가치라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키신저는 포드 행정부 시절에 대한 회고록에서 우드로 월슨의 시각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신랄히 비판했다. 키신저는 “이들은 대외정책을 선과 악의 투쟁으로 바라보며, 평화로운 질서에 도전하는 악한 적들을 격퇴하는 것을 미국의 소명으로 생각한다. …윌슨주의자들은 도덕적 합의를 통한 평화를 추구하면서, 힘의 균형을 통한 평화는 거부한다.”고 비판했다. 키신저의 이 말은 사실 포드 행정부 시절부터 부시 행정부까지 지속되고 있는 월포위츠의 생각을 제대로 묘사한 것이었다. 월포위츠는 어느 공화당 인사보다 자신을 키신저와 정반대라고 생각했고, 사상의 영역에서는 그를 적으로 간주했다.

헨리 키신저와 데탕트 정책의 무력화는 미국 대외관계의 일대 전환점을 의미했다. 미국 대외정책을 둘러싼 논쟁의 초점 역시 급속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됐다. 럼스펠드와 체니, 월포위츠는 모두 이 같은 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반대로 이런 변화들은 이후 이들의 경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Mann, James., Rise Of The Vulcans: The History of Bush's War Cabinet, New York:Viking Adult, 2004
(정인석 권택기 역, 『불칸집단의 패권형성사』, 박영률출판사, 2005, p.97~99)

여기서 잘 드러나는 점은 현실주의자는 현 시점에 존재하는 기성질서와 안정을 중시하며 현상유지를 위해서라면 가치쯤은 타협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네오콘은 가치를 추구하며 옳다고 생각하는 이상적 목표를 위해 혼돈과 불안정도 기꺼이 수용할 의지가 있는 집단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키신저 외교의 대표작인 미중수교를 생각해보자. 닉슨이나 키신저도 마오쩌둥이 결코 도덕적인 지도자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세력균형을 위해서라면 그정도쯤은 얼마든지 눈감아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중국을 이용해 소련을 귀찮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았던 것이다.

미국 대외정책의 주도권을 놓고 이 두 그룹이 다시 맞붙은 사건이 바로 걸프전이었다.
중동의 세력균형과 기존질서의 수호라는 가치를 옹호하면서 걸프전을 주도한 것이 현실주의 그룹인 아버지 부시와 그의 국가안전보좌관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였고, 이에 대해 악당을 살려둬서 후환을 남긴 어중간한 결과라고 목청높여 공격했던 그룹이 바로 네오콘이다. 물론 이런 비판에 대해 부시&스코우크로프트 콤비 또한 강력히 반격했다. (과거에서 날아든 기소장 참조)
스코우크로프트의 멘터는 바로 키신저이며, 반면 아들 부시는 이들 네오콘과 합작해 정권을 잡고 후에 이라크 침공에 나섬으로서 아버지가 지지했던 중동질서를 뒤집었다는 점에서 범 네오콘으로 분류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네오콘이 윌슨 같은 전통적 이상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이상주의적 목표가 아니라 그 수단에 있다. 윌슨이 국제연맹이나 민족자결주의 같은 제도적, 추상적 수단에 집착했다면, 네오콘은 일이 되려면 소위 하드파워 -군사력, 경제력, 강압외교- 을 휘둘러야 한다고 보았다. 즉 윌슨이 목표도 이상적이고 수단도 이상적이었다면, 네오콘은 목표는 이상적이지만 수단은 현실적이었던 셈이다.
by sonnet | 2007/07/24 09:39 | flame! | 트랙백 | 핑백(1) | 덧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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