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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6   와하비즘과 사우디아라비아 건국기 [109]
와하비즘과 사우디아라비아 건국기
누구나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밤에 꿈을 꾸는 사람은 밝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그 꿈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반면에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몹시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눈을 활짝 뜬 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행동한다. - T.E. Lawrence -


1. 이븐 압둘와합, 큰 뜻을 품고 떨쳐 일어서다

무함마드 이븐 압둘와합(1703~1792)은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수도인 리야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30km 쯤 떨어진 우아이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과 조부도 이슬람 판관(Qadi)와 이슬람법 해설자(Mufti)를 지낸 바 있어 이븐 압둘와합은 가학을 전수받아 어린 나이부터 이 분야에 재능을 나타낸다. 좀 더 커서는 메디나, 바스라 등으로 가서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로부터 사사하고 또 논쟁하며 학문을 닦았다. 그의 학풍은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나 이븐 타이미야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이윽고 일가를 이루는 단계에 도달한다. 이에 그는 큰 뜻을 펼치고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보니, 그가 보기에 상황은 개판이었다. 고향 사람들, 즉 아라비아 반도의 베두인 유목민들이 믿는 이슬람은 고도로 토착화되어 있었다. 주발라 지역에는 자이드 이븐 알카탑(제2대 정통칼리프 우마르의 형제로 순교자임)의 무덤을 숭배했고, 다르리야 지역에서는 조상의 무덤에 사당을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후바이라 계곡에 있는 다라르 이븐 아즈와르 사당은 성지가 되어 있었고, 발리다툴 피다 지역의 고목(古木)은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기도 장소로, 만푸하 지역의 한 종려나무는 결혼생활로 고민하는 이들이 찾아와 비는 곳이 되어 있었다.

이에 이븐 압둘와합은 크게 떨쳐 일어나 이런 온갖 이단을 일소하고 꾸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전개한다. 그는 정력적인 설교자이자 선동가여서 곧 따르는 제자들이 늘어났다. 그는 제자들을 몰고 다니며 지역 주민들의 토속신앙의 중심지이던 고분이나 묘당을 이단으로 규정해 차례차례 파괴하는 한편, 이슬람법을 엄격히 적용해 간통을 저지른 남녀를 돌로 쳐 죽였다.

그러자 갑작스레 자신들의 생활을 개조당하게 된 지역 주민들의 불만이 치솟았다. 또한 성인들의 묘당을 관리하면서 참배객들이 쓰는 돈을 수입원으로 삼아온 지역 유지들에게도 이들의 종교개혁운동은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이븐 압둘와합의 제자들 또한 기세등등했다. 자신들은 진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이에 현지 통치자들은 이븐 압둘와합과 제자들 편을 들 것인지 아니면 현지 관습의 편을 들 것인지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아이나의 통치자는 고민 끝에 결국 이븐 압둘와합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통고하게 된다.


2. 이븐 사우드, 복룡을 만나다

쫓겨난 이븐 압둘와합은 남서쪽으로 25km쯤 내려온 곳에 있는 다리아 지역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의 통치자가 바로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로, 현 사우디아라비아 왕조의 직계 조상이다. 이븐 사우드는 형제들을 이끌고 압둘와합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그는 미신이나 우상숭배 같은 온갖 이단을 격렬히 비난한 뒤 이슬람을 바로 세우려면 일위일체의 유일신 사상 엄수, 선행장려 악행퇴치, 성전(jihad)의 세 가지 방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이븐 사우드는 숙고 끝에 이븐 압둘와합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고 그가 펼치고 있는 꾸란의 가르침과 예언자의 언행과 전통에만 근거한 통치이념과 이슬람 사상에 입각해 국가를 통치하겠다는 협정(Bayat)을 맺는다. 1740년의 일이었다.

이리하여 사우드 가문의 유목부족 무력에 와하비파 이슬람부흥 이데올로기가 처음으로 결합된다. 사우드 가문 수장은 와하비즘을 수용하고 종교개혁가로부터 종교수장 '이맘'의 호칭을 인정받았고, 반대로 그는 종교개혁가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서 이 관계를 더욱 탄탄하게 보강했다. 이들의 결합은 곧 놀랄만한 파괴력을 가진 것으로 드러난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이유로 와하비파 근본주의 이슬람 전파에 반대하는 주변 부족장과의 마찰이 심화되자, 이들은 지역을 방어하고 지지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성전(Jihad)를 선포한다. 그리고 주변의 오아시스와 마을들을 차례차례 정복하여 영토를 넓혀 나간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래 속해 있던 나즈드 지방(아라비아 반도 중부)을 정복한 후, 이슬람의 양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한 히자즈 지역까지 점령해 판도를 한껏 넓힌다. 이것이 제1 사우디국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븐 압둘와합의 행보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었다. 즉 그릇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앞에 유일신의 뜻을 바르게 전하고자 하는 새로운 종교지도자가 나타나지만, 고향에서 박해를 받고 쫓겨나는데, 후에 세력을 키워 자신들을 쫓아낸 자들을 정복하고 가르침을 널리 펴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종교적 열정으로 동기부여된 아랍인들의 탁월한 정복 능력까지도.

다리아 지역의 작은 부족국가에서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 제1 사우디국

여기서 잠깐 이븐 압둘와합의 주요 가르침을 정리해 보자.
첫째, 예언자 무함마드를 통해서 계시된 꾸란을 일점일획도 수정되거나 변질되거나 보완되지 않은 원본대로 믿는 정통 이슬람이어야 한다.
둘째, 꾸란과 예언자의 전통을 통치이념으로 한 이슬람국가를 건설하고 지구촌 방방곡곡에 이슬람을 전파한다.
셋째, 우상숭배와 미신과 다신론 생각에서 완전히 해방된 일위일체의 유일신 사상으로 무장해야 한다.
넷째, 무슬림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전통을 답습하고(Ittibaa) 그분과 관련되지 않은 이단(Biddah)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다섯째, 이슬람의 네 개 법학(Fiqh)파의 학설을 모두 존중하고 준수해야 한다. 그 중 한 법학파의 학설만을 맹목적으로 모방(Taqlid)해서는 아니 되며, 네 개 법학파의 학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검증된 정통 언행록의 가르침에 모순될 때는 어느 학파의 학설에 우선권을 두어서도 아니 된다.
여섯째, 무슬림 각 개인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이슬람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일곱째, 점령이나 침략을 통해서 이슬람법을 적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꾸란의 가르침과 예언자의 전통에 따라 성전을 준비하는 것은 권장사항이다.


(*) 사우드-와하비 동맹은 실제로는 정복사업에 매진해 왔고, 이를 통해 그들 식의 교리 해석을 강제하였다.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을 대변함에 틀림없다는, 와하비들의 종교적 열정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1802년, 타협을 모르는 와하비 전사들은 이라크 나자프에 있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무덤과 카르발라에 있는 후사인 이븐 알리 무덤을 습격해 파괴했다. 성인의 묘당 숭배 따위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쉬아파의 세계관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진정한 후계자들이자 그들이 모시는 이맘들 중 첫 번째와 세 번째 이맘이었다. 그 덕에 이듬해에는, 원한을 품은 쉬아 암살자의 손에 제1 사우드국의 제2대 이맘 압둘아지즈가 척살되기도 한다.


3. 오스만 술탄은 크게 노하고, 무함마드 알리는 사우드 일족을 정벌하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 사우드 가문이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한데 이르러 시대의 흐름은 역풍으로 바뀌게 된다. 원래 사우드 가문이 자리잡고 있던 나즈드 지방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복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단지 명목상으로만 그러했다. 나즈드는 기본적으로 거대한 사막지역으로 소수의 오아시스와 집락에 의존해 살아가는 유목민들의 세계였다. 이런 척박한 고장을 군대를 보내어 점령하고 직접 통치한다는 것은 투르크인들에 있어 전혀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였다. 따라서 오스만 술탄들은 나즈드의 유목민 부족장들이 자기들끼리 치고받으며 지내는 정도는 어지간하면 내버려 두어 왔다.

하지만 이들이 히자즈까지, 특히 이슬람의 양대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하게 되자 이야기는 달라진다. 1517년 살림 1세가 맘루크조를 멸하고 이집트에 총독을 두어 다스린 이래,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전 무슬림 세계의 종주국이었고 역대 오스만 술탄은 칼리파로서 무슬림 세계의 정신적 수장이었다. 또한 이 이집트 정복을 통해 술탄 살림 1세는 종교적으로 귀중한 〈성스런 두 성지의 봉사자khadim al-haramayni as-sharifayni〉란 칭호(laqab)를 얻게 된다. 참고로 이는 현 사우디아라비아 왕의 공식 직함이기도 하다. 이 칭호의 가치를 느껴보기 위해 1980년대 중반 사우디의 파하드 왕이 이 칭호를 자신에게 붙이면서 했던 연설을 잠시 살펴보자.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알라 하나님의의 이름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왕으로 취임한 이래 왕이란 칭호 대신 줄곧 희망해 왔던 ‘두 신성한 사원의 수호자’라는 칭호로 대체할 수 있게 된 것은 나의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이 명칭은 공식 칭호로 채택될 것이며 왕실회의에서 이 새로운 칭호사용에 관한 행정절차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전세계 무슬림의 중요 의무인 성지순례를 안전하게 보장한다는 것을 통해 해당 군주는 호교자로서 강력한 종교적 권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오스만 술탄의 특권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도전하는 신흥 세력으로서 사우드-와하비 동맹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한 와하비 전사들은 자기들 동네에서 해왔던 식으로 '이단'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또한 멀리서 성지순례차 찾아온, 그들과 다른 관습을 갖고 있는 무슬림들을 탄압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순수한 권선징악일 뿐이었지만,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유사한 갈등, 즉 올바른 종교적 실천, 순례객과 관련된 경제적 이익, 해당 지역의 패권 등을 둘러싼 갈등이 분출되었다. 이는 〈성스런 두 성지의 수호자〉가 제 역할을 하는 이상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직접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는 대신 사실상 독립을 누리고 있던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를 시켜 이들을 치도록 했다. 이에 그는 아들들에게 군대를 주어 사우드 일족 정벌에 나선다. 이것이 오스만-사우드 전쟁(1811~1818)이다.

여러 해에 걸친 싸움 끝에 이집트 총독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는 나즈드 지방의 거점들을 차례 차례 무너뜨리며 진격해 사우드 집안의 본거지 다리아를 포위한다. 다섯 달에 걸친 포위 끝에 결국 사우드 가문이 항복하자, 그들은 다리아를 파괴하고 지도층을 포로로 잡아갔다. 사우드의 마지막 군주 압둘라 빈 사우드와 여러 와하비 종교지도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로 이송된 끝에 처형된다.
나지드 정벌: 이브라힘 퍄사가 이끄는 이집트군의 진격로


4. 사우드 가문은 다시 일어나고, 라시드 가문이 사우드를 치다

이리하여 제1 사우드국은 멸망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우드 집안의 끝은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의 국력은 19세기 내내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고, 나즈드 지방은 여전히 이익은 없고 지키기는 힘든 척박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제국은 큰 일이 터지지 않는 이상 이 지역을 대충 방치하면서 부족들간의 경합을 교묘히 부추겨 관리하는 옛 정책으로 회귀한다.

살아남은 사우드 일족과 이븐 압둘와합의 후손들(이제 알 쉐이크 가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됨)은 사우드-와하비 동맹을 재정비한 다음 왕국 부흥에 나선다. 이들은 파괴된 다리아에서 남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리야드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이전과 동일하게 와하비 성직자들로부터 '이맘' 칭호를 제수받아 사용했다. 이것이 제2 사우드국(1824~1891)이다. 이들은 나즈드 지방의 상당부분을 회복하지만, 지난번 망국에서 아픈 교훈을 얻어서인지, 아니면 단순한 능력부족이었는지는 몰라도 히자즈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공격하는 것은 삼간다.
전성기의 제2 사우드국


19세기 후반 들어 제2 사우드국은 형제간의 내분으로 심각하게 약화된다. 그리고 이 틈을 노려 경쟁 세력, 즉 나즈드 북부에 자리잡은 샴마르 부족알 라시드 가문이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1884년 알 사우드/알 셰이크 동맹은 알 라시드 가문에게 크게 패한다. 승자인 무함마드 이븐 라시드는 사우드 가문을 복속시키고 그들이 리야드의 통치자로 남아있게 허용했다. 1891년 사우드 가문의 압델 라흐만은 라시드 가문에 대항해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만, 참패하고 쿠웨이트로 탈출한다.

제2 사우드국과 경합한 알-라시드 군주국. 그들의 중심지는 보다 북서쪽의 하일이었다.



5. 압델 아지즈는 세 번째 건국을 노리고, 와하비는 형제단을 결성하다

이리하여 제2 사우드국도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사우드 남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쿠웨이트에 망명간 압델 라흐만의 아들 중에 압델 아지즈란 소년이 있었다. 그는 쿠웨이트 군주 무바라크 알 사바의 보호 아래서 그의 노련한 통치술을 보고 배우며, 조상들의 땅을 되찾겠다는 꿈을 키워 나갔다. 그가 현 제3제국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건국왕 압델 아지즈 빈 압델 라흐만 알 파이잘 알 사우드이다.

압델 아지즈는 청년이 되자, 형제 및 사촌들을 모아 유서 깊은 유목부족의 전통을 계승해, 마적단(raiders)을 꾸린다. 그리고 라시드 가문이 통치하고 있는 나지드 지역 이곳 저곳을 히트앤드런으로 털며 돈도 벌고 전투경험을 쌓는다. 경험이 좀 쌓이고 나자, 그는 아버지의 도읍이었던 리야드를 되찾기로 결심한다. 그는 대담하게도 40인의 도적추종자만 이끌고 리야드를 기습, 라시드 가문이 임명한 태수를 죽이고 그곳을 점령한다. 그리고는 이 지역에 흩어져 있는 사우드 가문의 옛 추종자들과 알 셰이크 가문의 와하비들에게 격문을 띄워 봉기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1902년의 일이었다.

이후 10여 년에 걸쳐 압델 아지즈가 이끄는 사우드 가문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원을 받는 라시드 가문 사이에 치열한 부족 전쟁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이븐 사우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부락과 부족들을 공격해 복속시키고는, 그곳에 와하비 포교사들을 보내어 부족민들에게 근본주의적 이슬람 신앙을 전파한다. 이를 통해 사상적 통일을 노린 것이다.

그 결과 와하비식 근본주의 이슬람 신앙에 눈뜬 청년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민병대가 만들어진다. 이름하여 형제단(Ikhwan)(**). 형제단은 대단히 독특한 집단이었다. 보통 아라비아 반도의 유목민들은 자기 부족에게만 충성을 바친다. 그래서 일시적이고 취약한 부족 동맹을 통해 세력을 형성하더라도 매수와 배신, 반란이 끊이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형제단은 달랐다. 형제단 대원들은 자기 부족 사람들보다도 같은 와하비식 신앙을 신봉하는 '형제'단원들 서로에게 더 큰 충성을 보였다. 그들은 이슬람의 정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맹세한 난폭하고 결의에 찬 신앙 공동체였다.
(**) 이집트의 하산 알 반나가 설립한 '무슬림 형제단'과는 무관한 조직임

또한 아라비아의 유목민들에게 있어 습격은 일상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은 낙타를 타고 몰려와서 돈될만한 것을 약탈하지만, 불필요한 파괴나 살육은 거의 하지 않았다. 반면에 형제단은 그런 행동양식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이 보기에 부정하다거나 경건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가차없이 죽이고 부쉈다. 술, 물담배, 수놓은 비단옷, 도박, 점복과 요술 등은 금지였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약탈이 아니라 정화를 추구했다.

근대적인 것들도 흔히 비난의 대상이었다. 전화, 라디오, 자동차 등. 형제단의 구역에 트럭이 처음 출현했을 때, 그들은 트럭을 불지르고 운전수를 걸어서 도망가도록 만들었다.

압델 아지즈에게 있어 형제단과 같은 부대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남들에겐 없는 커다란 자산이었다. 베두인 유목민들의 세계에서 자기 피붙이들을 넘어 더 폭넓은 충성심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동기부여가 잘 되어 있었고 용맹했으며 싸움마다 선봉을 섰다.

하지만 형제단은 그만큼 다루기도 힘들었다. 1913년, 압델 아지즈가 아라비아 반도 동부의 하사 지역을 공격했을 때, 형제단은 기뻐했다. 그곳은 쉬아파들이 많이 사는 곳이고, 형제단은 쉬아를 배교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압델 아지즈가 하사를 점령한 후 현지 주민들에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들의 신앙과 관습을 존중하겠다고 공약하자 그들은 압델 아지즈를 비난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시작되자. 영국은 사우드 가문과 협력관계를 맺고 자금과 라이플이며 기관총과 같은 현대적 무기들을 제공했다. 그들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후원을 받는 라시드 가문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대전이 끝나자 압델 아지즈는 라시드 가문의 본거지 하일을 공격해 그들을 완전히 평정한다. 라시드 가문은 아랍인들의 미움을 받던 오스만 제국과 제휴했었기에 인기가 없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의 패배로 외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압델 아지즈는 1921년 하일을 정복한 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과 똑같이 라시드 가문의 딸을 취해 아내로 삼았다. 현 사우디아라비아 왕인 압둘라 빈 압델 아지즈의 어머니가 바로 이 정략결혼의 주인공이다. (후대의 일이지만 라쉬드 가문은 사우드 가문의 숙적이자 최후까지 저항했던 집단이기에, 압둘라는 왕위에 오르기까지 다른 왕비 소생의 왕자들로부터 상당한 견제를 받게 된다.)

한편 형제단은 이 전쟁을 종교적 대의에서 일탈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사우드 집안의 부차적인 정치적 목표를 위해 동원되는 대신, 하사의 쉬아파를 '처리'하거나,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정복하기 위해 히자즈로 진격하고 싶어했다. 형제단 간부 중 한 사람은 이렇게 회고했다. "1920년, 이맘[압델 아지즈]이 하일을 포위하는 것을 보고, 나는 처음으로 우리가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형제단 지도자들은 1924년 히자즈를 공략할 때 압델 아지즈가 부과한 제약에도 반대했다. 전투 중에 형제단은 압델 아지즈의 조심스런 경고를 무시하고 메카와 메디나로 밀고 들어가서, 그들의 관점에서 신성모독이라고 생각되는 사당들을 파괴하고, 그들과 다른 관습을 가진 무슬림 성지순례자들을 탄압했다. 이쯤 되자 많은 사우드 일족과 왕의 측근들이 통제불능의 지하드 전사들을 진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하지만 왕은 형제단은 나의 아이들이고, 그들을 벌주는 대신 잘 포용하고 올바른 길로 갈 수 있게 지도하는 것은 자신의 의무라고 답했다. 그들의 의도는 좋은 것이니, 언젠가는 그들도 개선될 것이라면서.

왕은 형제단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보려고 노력했지만 두 세력의 갈등은 깊어만 갔다. 형제단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히자즈를 정복하는데 선봉에 섰음에도, 정복지의 통치에서 배제되는 데 불만을 품었다. 왕이 자기 일족들을 배치한 것은 정실주의 인사이자 믿음에 대한 배신이었다. 성지 메카와 메디나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믿는 순수한 이슬람 방식으로 정화되어야 했다. 하지만 왕이 보기에 형제단 간부들을 히자즈 행정관으로 배치한다는 것은 불씨에 기름을 붓는 행위였다.

또 히자즈의 정복이 끝나자 형제단은 와하비파의 가르침을 이웃나라들로 더 퍼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도 영토를 더 넓히는 것을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형제단이 겨냥한 이웃 나라들 -트랜스요르단, 이라크, 쿠웨이트- 은 하나같이 대영제국의 보호 하에 있었고, 이들을 공격하다가는 신생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대영제국과의 전쟁에 빠져들 우려가 있었다. 왕은 습격을 금지했지만 형제단은 개의치 않았다. 이들은 낙타를 몰고 1922년과 24년에는 트랜스요르단을, 1927년에는 이라크를, 1928년에는 쿠웨이트를 습격했다.

왕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족 병력을 끌어모으고, 울레마들로 하여금 외교정책은 왕의 고유권한임을 뒷받침하는 파트와(율법해석)을 발표하게 했다. 1929년 3월, 왕과 형제단은 서로의 군대를 집결시켜 사빌라에서 결전을 벌인다. 낙타 기병대로 돌격해 오는 형제단을 향해 왕은 영국제 기관총으로 응수했다. 형제단은 이 전투에서 괴멸당하고 만다.


6.건국 후:경건한 이들은 뿌리를 찾아나서고 높으신 분들은 달래려 힘쓰다

사빌라 전투를 통해 사우디 왕은 종교적 급진주의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하지만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와하비 사상은 그들의 건국이념이었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사우디 통치세력은 종교적 급진주의 세력을 조종하려고 하기도 하고, 탄압하기도 하고, 때로는 키워주기도 하면서 씨름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근본주의 이슬람의 도전을 받을 때마다 사우디 왕가가 보여온 반응이다. 외부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근본주의 이슬람 세력이 종교적 가치에 대한 정권의 불충실함을 공격할 때마다, 정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가능하면 근본주의 이슬람 편을 드는 경향이 있었다. 대결은 맞서 싸우는 것 외에 도저히 답이 없는 경우에만 일어났다.

형제단을 기관총으로 쓸어버린 다음 이븐 사우드 왕은 자신이 이븐 압둘와합의 경건한 원리주의를 잘 따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선행증진 악행방지부'라는 이름의 종교경찰을 신설했다. 1979년 급진무장집단이 메카의 대 모스크를 점령하고 농성하다가 섬멸된 다음에는 파하드 왕이 거액의 돈을 풀어 전국의 모스크를 개보수하고, 성직교육을 강화했다. 그 결과는 와하비파의 가르침이 사회에 한층 더 넓고 더 깊게 보급된 것이었다.

물론 정권과 협력관계(사우드 가문이 종교부문에 뿌린 엄청난 자금의 혜택을 누가 보았겠는가?)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울라마, 즉 제도권 종교계는 기본적인 이븐 압둘와합의 가르침을 그대로 계승 발전시켰지만, 실제 적용에 있어서는 다소의 융통성을 발휘하곤 했다. 적어도 통치가 가능할 정도는. 하지만 그 가르침을 전수받은 신도들 중에는 언제나 일정 비율로 그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혹은 '가르쳐준 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성실한 무슬림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배운 대로 실천되지 않는 불의한 세상과 맞서 싸우기 위해 달려나갔다.
근본주의를, 본색은 양처럼 순하고 절대적으로 착한 어떤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변질되었거나 위조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근본주의자란 성직에 몸담고 있는 관료들의 것과 똑같은 교의를 좀 더 철저하고 일관되게 따르는 사람들일 뿐이다. … 근본주의는 실용적으로 부드러워진 정통이 겪는 양심의 가책이다. - Hubert Schleichert -

사우디아라비아가 급진 이슬람 운동과 친화성이 있다는 것은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뭐니뭐니해도 사우디아라비아는 근대 들어 지하드 운동으로 건국된 유일한 국가였다. 이 기록은 사우디 자신이 대대적으로 후원했던 아프가니스탄의 반공지하드 후에 탈리반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깨어지지 않았다.

1980년대 반공 지하드를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송출된 아랍계 지하드 전사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현지인들이 숭배하는 성자 묘당 등을 공격해 현지인들과 갈등을 일으킨다. 이것은 그들이 특별히 이상한 자들이여서 벌인 일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런 일들은 이븐 압둘와합 본인부터가 몸소 실천했던 일이고 그의 가르침을 전수받은 역대 와하비들도 꾸준히 계승해온 '이슬람의 정화'의 한 과정일 뿐이었다.

사우디 성직자들은 그들이 물려받은 핵심 가르침과 정면대결해 이를 폐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하면 문제를 우회하는 방법을 권장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가르치곤 했다. '우리나라에서 성전을 벌이는 것은 안 될 말이오. 지하드는 해외에 가서 하시오.'

폭탄돌리기 게임을 계속할 경우 내 손에서 폭탄이 터질 때도 생기는 법이다. 하지만 내가 다 끌어안고 터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들은 나름 실용적이고 현명한 사람들이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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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길.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이슬람운동과 전망”. 『중동종교운동의 이해 2 : 아라비아반도와 이란 지역의 종교운동 현황과 전망』. 서울: 한울, 2005. 13-57.
Bronson, Rachel. Thicker Than Oil: America’s Uneasy Partnership with Saudi Arabi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USA, 2006.
Coll, Steve. Ghost Wars: The Secret History of the CIA, Afghanistan, and Bin Laden, from the Soviet Invasion to September 10, 2001. 1st ed. Penguin Press HC, The, 2004.
Lawrence, Thomas Edward. Seven Pillars of Wisdom. 1922
(최인자 역, 『지혜의 일곱 기둥』 서울: 웅진문학에디션 뿔, 2006.)

Wikipedia 각 항:
Abdul-Aziz bin Muhammad, Abdullah of Saudi Arabia, Al Rashid, Diriyah, First Saudi State, History of Saudi Arabia, Muhammad ibn Abd al-Wahhab, Muhammad bin Saud, Najd, Nejd Expedition, Ottoman–Saudi War, Second Saudi State, Siege of Diriyah, Sultan bin Najad, 'Uyayna, Unification of Saudi Arabia, Wahhabi


by sonnet | 2011/05/26 06:27 | 정치 | 트랙백 | 핑백(2) | 덧글(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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