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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강만수,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삼성경제연구소, 2005 (593페이지, 24,000원)


이 책은 일단 은퇴 후에 자기 공직생활의 교훈을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씌여진 책이기 때문에 정책에 대한 시각이 상당히 직설적이다. 그런 만큼 현 정부의 실세로 엄청나게 말이 많은 강만수 장관의 시각을 읽으려면 이 책에서 출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우선 책을 좀 훑어보면서 이 책이 왜 흥미로운지를 확인해 보겠다.


1) 지식경제부의 설립

다음은 그가 통상산업부 차관(96-97) 재직 시절 느낀 교훈인데, 여기서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과학기술부를 통합해 지식경제부를 만들게 된 근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대통령의 정책 구상에 대한 장관의 영향력은 "경선 때도 그렇고 요즘도 그렇고 모든 정책 아이디어는 그를 통해 버무려지고 수선된 뒤에야 이 후보에게 보고된다"는 인물평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지난 30년간 수출주도의 고성장 경제를 이끌어온 견인차의 하나였던 통상산업부였지만 수입이 자유화되고 산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침 없이 침’을 놓아야 하는 부처였다. 많은 일을 해야 하고 책임도 있지만 과거에 있었던 수입허가나 수출금융 같은 정책수단이나 권한이 이미 사라졌다.
당시 삼성자동차의 인가가 문제되었는데 통상산업부가 공장 설치를 허가한 것이 아니라 외자도입법에 의한 기술도입 계약의 신고를 수리한 것이었다. 외자도입법에 의한 기술도입의신고도 재정경제원의 권한을 통상산업부에서 위임받은 것이다.

현대자동차가 추진했던 하동 해안의 철강공장은 건설교통부의 공유수면매립법의 허가, 포항제철이 추진했던 광양의 화력발전소는 환경부의 대기환경보전법의 허가를 통상산업부가 반대하는 방법이 수단이었다. 그것도 협의를 하지 않고 허가를 내주는 경우 법률상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보철강사건이 터지자 책임문제가 거론된 통상산업부는 당진 제철소를 인가한 것이 아니라 코렉스공법 기술도입신고를 수리한 것밖에 없었다. 기술도입신고는 철강담당과장의 전결로 처리한 것이었다. 무리한 사업을 막지 못했다는 여론과 주무부서로서의 책임을 면할 수 없어 취임한 지 3개월 만에 안광구 장관이 물러났다.

통상산업부에서 일하면서 정보통신부, 과학기술부 등과의 업무중복으로 마찰도 있었고 효율성에도 문제가 많았다고 느꼈다. 통상산업부는 IT산업과 기술개발의 주도권을 놓고 정보통신부, 과학기술부와 소관다툼을 했다. 벤처기업의 육성을 두고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장관이 경제기획원은 아너러블(honorable)하고, 재무부는 파워풀(powerful)하고, 상공부는 컬러풀(colorful)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통상산업부는 산하 단체가 많고 행사에 참여할 곳도 많아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은데 과거 상공부 시절의 화려함도 사라진 통상산업부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공유수면매립법이나 대기환경보전법 같은 남의 침이나 빌려와야 하는 통상산업부를 그대로 두는 것은 조직과 인재의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능에 따라 수평적으로 재조정하고 정책추진의 거부점(veto point)을 최소화하기 위해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과학기술부, 문화관광부로 분산된 산업지원 기능은 하나의 부처 ‘경제산업부’로 통합하는 것이 효율적이라 생각한다. 산업정책 부서 간의 거부점이 너무 많으면 낭비가 많고 효율적인 산업정책의 추진이 어렵다. 원래 통상산업부의 기능이었던 통상업무는 ‘경제산업부’로 되돌려야 한다. 통상마찰에서 수세적인 경우는 미국의 USTR 같은 독립적인 통상기구가 전략적으로 불리하다는 의견이 많다. 우리는 공세보다 수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정경제부는 재정금융 이외의 경제정책 업무와 물가업무를 ‘경제산업부’로 이관하고 예산업무와 합쳐 재무부를 부활시키는 것이 어떤가 한다. 세입기능보다 최일선 종합행정기관의 성격이 강해가는 관세청과 산업통계를 주로 하는 통계청은 업무의 성격상 ‘경제산업부’ 산하로 이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pp.396-398)

어떤가, 좀 흥미가 생기지 않는가?

이번엔 다른 것을 하나 살펴보자.


2) "펀더멘틀에 문제없다."

97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들 이 표현을 기억할텐데, 당사자의 입장은 이렇다.

경상수지 개선과 경제 구조조정을 위한 대책을 추진한 것은 펀더멘틀은 문제가 있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확실히 펀더멘틀은 문제가 있었고 특히 경상수지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틀은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하게 된 배경에는 한국 경제의 잠재적 측면과 대외신인도 유지를 위한 전략이라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째, 잠재력 측면에서는 교육수준과 국민의 근면성에서 한국은 동남아와 다르고 구조조정을 통해 재도약의 발판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였다. 성장률, 물가지수, 실업률은 큰 문제가 없었고 경상수지도 환율과 관세율의 적절한 조정과 경제의 기본틀을 조정함으로써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둘째, 대외신인도의 유지를 위한 전략 측면에서는 외국금융기관들이 급속하게 자금회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의 펀더멘틀은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으로 그 말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부도지경에 몰린 기업이 은행을 찾아가 ‘우리기업은 가망이 없지만 떼일 셈 치고 돈 좀 빌려달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주가가 실제가치보다 저평가되어 있다’고 말한 것도 외국인 주식투자의 썰물을 막아보자는 안간힘으로 보면 된다.

내부에서도 펀더멘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솔직히 말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 주장을 하는 간부를 불러 펀더멘틀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도인 것은 사실이지만 외환사정이 날로 어려워가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한 다음 어떻게 대처하겠느냐고 물었다.

지금 생각해도 무엇이 위기해결에 도움이 되었는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펀더멘틀에 문제가 있는데도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고 비극이었다. (pp.438-439)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장관은 한 가지로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 꼭 틀린 말은 아니다. 장관이 다시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돌아온 것 자체가 우울한 일이니까, 우리도 크게 따지지 말고 각자 자기 주관을 갖고 현상을 해석해 주면 될 것 같다.

이런 식으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해하는데 대한 힌트를 이 책에서 무수히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이제 좀 더 현재진행형인 사건에 대한 힌트를 살펴보자.

(외환위기가 일어난 1997년) 상반기에 경상수지가 연간목표를 넘어섰는데도 “원화가치의 가파른 하락으로 인해 외환시장이 출렁거리지는 않도록 하겠다”는 한국은행의 헛소리는 끊임없이 평가절상하여 물가를 안정시키려는 중앙은행의 속성상 이해가 된다. 평가절상을 하는 만큼 다른 부분에서 통화를 흡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움이 중앙은행에는 있다. 과거 재무부는 통화를 담당하는 이재국과 국제수지를 담당하는 국제금융국이 항상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나는 국내금융과 국제금융을 함께 체험했다. 정부가 물가를 잡기 위해 환율을 억제했다면 헛발질이었다.

대내균형을 나타내는 물가안정은 중앙은행의 임무이고 표를 의식하는 정치권의 속성이다. 정부는 대외균형을 유지할 의무가 있고 대내와 대외 균형이 상충할 때는 비난을 무릅쓰고 대외균형을 선택해야 한다. 특히 경상수지가 감내하기 힘든 수준으로 악화될 때는 그렇다. 모든 나라에서 외환업무를 중앙은행에 맡기지 않고 정부가 직접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선진국에서 물가관리는 통화관리를 통한 중앙은행의 주 임무이다.

1993년에서 1996년까지의 8% 단일관세율과 원화의 평가절상은 ‘최악의 정책조합(the worst policy mix)’이었다. 8% 단일관세율은 국내 소비재산업의 경쟁력을 잃게 하여 폭발적인 수입을 유발하는 반면, 상대적으로 높은 원자재 관세율로 수출경쟁력도 저하시켰다. 고평가된 환율은 수입만 하면 장사가 되는 반면 수출의 가격경쟁력을 더욱 저하시켰다. 최악의 두 정책이 동시에 조합됨으로써 1994년부터 국제수지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1996년 상반기에 벌써 연간 전망 적자를 넘어선 위기 상황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의 결정적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환율과 관세율은 수출, 수입, 임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강력하고 당시로서는 유일한 변수였다. 경제가 위기로 치달아 가는데 환율은 버려두고 ‘세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호기를 부린 사람들은 우리를 슬프게 했고, 환율을 안정시킨다고 노력한 사람들[즉 한국은행]의 빗나간 정책들은 우리를 절망케 했다. (pp.378-379)

1996년 경상수지 적자 237억 달러는 정부가 갖고 있는 가장 강력한 정책변수인 환율을 방치함으로써 물가와 성장률에 희생된 것이다. 대내균형을 위해 대외균형이 파괴된 것이다. 경상수지가 감내하기 힘든 수준으로 악화될 때 정부는 대외균형을 선택하고 외환시장에 개입해야 한다.

[…] 모든 나라에서 외환업무를 중앙은행에 맡기지 않고 정부가 직접 맡고 있다. 환율과 외환보유고를 중앙은행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이것은 정부의 임무를 포기하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임무는 물가안정이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환율을 평가절상하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정상적일 때 통상적인 업무는 몰라도 대외균형이 깨지게 될 때는 환율을 중앙은행에 위임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시장에 맡겨서도 안 된다. (pp.421-422)

이것이 우리 장관이 갖는 1997년 외환위기 사태에 대한 시각이고, 그는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다짐을 갖고 현직에 돌아온 것이다.
인터넷 상에서는 이명박 정부를 비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외환위기의 재래를 외치면서 사람들을 겁주려는 경향을 종종 볼 수 있는데, 나는 그게 별로 그렇게 굴러갈 것 같지 않다. 물론 현재는 전세계적 경제위기가 진행중이므로 우리에게도 위기가 찾아올 가능성은 많이 있다. 그러나 국제수지가 문제가 되면 물가나 성장률을 희생해서라도 국제수지를 최우선으로 지킨다는 분명한 각오를 다진 사람이 버티고 있는데 과연 국제수지가 문제가 되어 무릎을 꿇는 일이 생길까? 문제가 생긴다면 그가 희생시키기로 마음먹은 다른 것 쪽에서 나올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글 안에 나타나는 한국은행에 대한 시각도 짚고 넘어갈 가치가 있다.
책 본문 중에 길게 언급되지만 강만수 장관은 한국은행과 악연이 깊다. 한국은행법 개정을 놓고 한은과 정부가 격돌한 89년, 95년, 97년 세 차례의 전투에 깊게 관여했으며, 특히 첫 전투에는 주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외환위기에 대해서도 일부 한은에게 책임이 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그러니 한은과의 관계에서 종종 불협화음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이 책에는 본인의 주요 업적으로 부가가치세 도입의 실무자로서 고생한 이야기가 길게 언급되는데, 법인세, 상속세, 소득세 등 대부분의 직접세를 크게 낮추거나 없애야 한다는 내용이 책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것과 합쳐 그의 조세정책관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우리의 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경제관이나 정책관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궁금증을 풀 수 없었던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by sonnet | 2008/12/08 19:23 | | 트랙백 | 덧글(124)
시장원리주의의 종말
7~8년 전에 번역해 두었던 "Mr. Yen" 사카키바라의 글입니다. 저는 속칭 '신자유주의'라는 용어가 매우 모호하다고 느껴서 보통 시장 원리주의(market fundamentalism)이란 용어를 선호하는데, 사카키바라의 글은 그 개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장원리주의의 종말(The End of Market Fundamentalism)
* 필자: 사카키바라 에이스케(榊原英資)
* 출처: Asiaweek
* 일자: 1999년 2월 5일

이 문건은 1999년 1월 22일, 일본 대장성 재무관(차관) 사카키바라씨가 도쿄 외신기자클럽에서 연설한 내용이다. 여기 드러난 관점은 개인의 것이며 일본 정부의 공식입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그 유명한 “자유방임주의의 종말”이란 글을 발표했던 것은 1926년의 일이었습니다. 그 이래 역사는 대공황, “뜨거운” 전쟁과 냉전, 브레튼우즈 체제의 성립, 미국 달러의 금태환 정지, 오일 쇼크, 정보통신기술의 혁명 등을 거쳐 왔습니다. 20세기 말에 맞이한 현 상황은 한바퀴를 완전히 돌아 1920년대 말의 상황과 무척 유사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대영제국의 패권(Pax Britannica) 아래서 1870년부터 1913년 사이에 자리를 굳혔던 고전적인 금본위체제는 적어도 GDP에 대한 국경을 넘은 상품과 서비스, 자본의 유통 비율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현 시대의 그것을 능가하기까지 하는 상당한 수준의 경제적 통합을 달성했습니다.

1919년에 발표한 새로운 시대를 연 소논문 “평화의 경제적 귀결”에서, 케인스는 당시의 보통 영국 사람들에게 있어 글로벌리제이션 혹은 세계 경제의 통합이란 “그것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을 제외한다면, 정상적이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불변의 것으로 이런 방향으로부터의 이탈이란 몰상식하고 끔찍하며 피해야만 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기록했습니다. 1910년대에 유행했던 이와 같은 글로벌리제이션과 자유방임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은 1990년대의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나날이 커져만 가는 강력한 신념으로 재현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정보통신혁명이 국제거래, 특히 국제금융거래를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글로벌리제이션은 금본위시대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기는 합니다. 이러한 가상거래의 속도와 복잡성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3년 이전에 존재했던 국경을 넘나드는 국가들 간의 강력한 상호의존성과 결부된 자유방임 이데올로기의 횡행은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빨아들여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글로벌리제이션과 결합된 대처-레이건 시대 이후의 시장 원리주의(market fundamentalism)의 우세와 매우 흡사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지난 20여 년간에 걸친 시장원리주의의 물결이 금본위시대의 자유방임주의처럼 지탱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될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입니다. 예를 들어 조지 소로스는 시장원리주의는 1913년 이전에 보여주었던 사회 정치적 제도들에 대한 시장의 승리처럼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던 것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소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불건전하며, 계속 굴러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금융시장이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며, (세상에는) 시장 세력들의 고삐를 풀어놓는다고 해서 충족될 수 없는 사회적 요구사항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국제자본체제를 불건전하고 지탱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시장원리주의입니다. 이는 비교적 최근에 벌어지기 시작한 사태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국제자본의 이동은 제한되었고 브레튼우즈 체제는 자본이동이 부재한 상태에서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설치되었습니다. 각종 규제는 점진적으로 축소되어 왔으며, 1980년 무렵에 마가렛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권력을 잡고 나서야 시장원리주의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된 것입니다.”

“자유방임의 종말”이란 케인스의 선언이 이루어진 후 반세기가 넘도록 민간국제자본의 이동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국제적 자본 중개의 부흥은 1970년대 발생한 두 차례의 오일 쇼크 후에야 벌어지기 시작한 (새로운) 현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소로스의 말은 옳습니다. 자유방임 이데올로기의 최신판인 「시장원리주의」는 대처, 레이건, 콜 같은 신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실현되었고, 이는 런던이나 뉴욕 같은 금융시장이 글로벌 자본주의의 핵이 되도록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금융자본 중심의 시장원리주의의 점진적인 침식은 1994~95년의 멕시코 위기와 1995년의 아르헨티나 위기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1982년의 멕시코 위기와는 달리, 이들 위기에서는 미국 이자율과 달러 가치의 급등 같은 외부 요소들이 위기를 촉발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1994~95년 위기 당시 다른 명백한 외부 요인은 없었습니다. 미국 시장을 포함한 제반 국제상황은 안정되어 있었으며,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의 경제개혁은 국제사회에 의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일부 경제학자들, 예를 들면 루디거 돈부시 같은 이들은 1997년의 아시아 (외환)위기처럼 과대평가된 통화가 직접적인 요인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1994년에서 1998년에 걸친 위기를 통해 실질환율의 과대평가는 공황을 촉발시킨 요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또한 1994년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의 단기부채는 그들의 외환보유고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특히 1995년 초의 수개월 안에 갚기로 되어 있던 약 280억 달러 가량의 미 달러화 표시 단기 공공부채(tesobonos)는 당시 60억 달러밖에 없던 외환보유고 수준을 훨씬 넘는 것이었습니다.

1997년 중반 태국, 인도네시아, 남한의 민간 단기부채와 외환보유고 사이에도 비슷한 상황이 존재했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이는 민간의 단기 부채로 누적되어온 공공부채가 아니었습니다.

몇 가지 취약성의 징후가 증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사건, 정치적 불확실성, 혹은 대기업의 파산 등이 공황을 촉발시킬 때까지, 멕시코에서 남한에 이르는 이들 위기는 시장참여자들과 분석가들에 의해 예측되지 못하였습니다. 대출에 대한 리스크 프리미엄은 낮게 유지되었으며, S&P와 무디스 같은 신용평가기관들은 위기가 시작될 때까지도 국채에 대한 높은 평가를 유지했습니다. 많은 분석가들과 자본가들은 위기가 터져 나올 때마다 고도의 투명성이나 적절한 정보공개의 부재가 리스크를 적절히 평가할 수 없도록 방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 증거와 자료들은 실질환율, 민간부문의 단기대외부채, 경상수지, 금융부문 대차대조표 같은 관련 정보가 대부분 가용했음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들이 시장의 리스크 평가에 적절히 반영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특히 헤지펀드나 연금펀드 같은 비은행권 금융기관들의 행태를 본다면, 누구나 (제3세계) 신흥시장 리스크에 대한 합리적이고 상세한 계산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군중심리가 지배적이라는 결론으로 기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소위 “합리적”인 계산이라던 LTCM 같은 사례에서는 어떤 안정된 균형이 당연히 존재한다고 가정했던 그들의 모델이 엉터리였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 위기의 세부사항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면, 사람들은 시장의 신뢰가 갑자기 뒤집어질 때마다 다양한 강도와 기간에 걸친 주기적인 공황이 발생하는 것은 자유화된 국제자본시장의 본질적인 불안정성이 보내오는 청구서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멕시코와 남한 위기는 이들 국가들이 OECD에 가입하여 그 기구의 자본자유화의 규칙에 따르기 시작한 직후에 벌어졌다는 것을 적시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1993년 이후에 이루어진 다섯 아시아 국가들 -남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의 자본계정의 상당한 자유화 조치 후, 1994년에서 1996년 사이의 3년간 대략 2,200억 달러에 달하는 민간자본이 이 지역으로 유입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시장 신뢰의 갑작스런 변심에 따라 1997년에 벌어진 자본의 역류는 대략 1,000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어떠한 나라나 지역도 장밋빛 환상에서 공황으로 급락한 시장 정서가 일으킨 민간자본흐름의 거대한 역류를 견뎌낼 수는 없습니다.

시장원리주의의 중심에는 왈라스의 일반균형모델 내지는 신고전파 패러다임을 널리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범위의 경제, 제한적 합리성, 비대칭 정보, 그 외 각종 시장의 불완전성 같은 관점에서 그런 모델들의 포괄적 적실성에 의심을 표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자화된 개인 그리고 이들 원자화된 개인과 기업들 사이에 어떤 안정된 균형이 달성될 수 있도록 거래를 중재하는 시장에 어떤 종류의 합리성을 가정하는 학설이 여전히 정통교리로 남아 있습니다.

조지 소로스는 최근 그가 내놓은 책에서 합리성과 원자성을 그가 정의한 “실패가능성”(fallibility)과 “반사성”(reflexivity)이라는 개념과 대조시킵니다.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소로스의 정식화는 사회와 역사에 대해 우리가 가진 상식적인 이해와 더 잘 들어맞습니다. 일단 우리가 개인들의 합리성과 원자성을 가정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즉각 어떠한 사회적 상호작용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정지된 세계로 뛰어들게 됩니다. 우리는 자료들을 그저 조잡하고 간단한 수학적 모델로 분석할 수 있는, 움직일 수 없고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객체로만 관찰하게 됩니다. 따라서 경제학은 역사와 사회가 결여된 채 자연과학의 고전적인 형태를 모방한 조잡한 과학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어떤 사람이 인류의 지식은 극도로 제약되어 있으며, 우리가 그 어떠한 데이터나 분석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미래는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건 사회적인 것이건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을 용인한다면 우리는 케인스가 자신의 글에서 지적했던 대로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경제적 악은 리스크와 불확실성과 무지의 소산”이라고 손쉽게 결론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경제적 주체들의 한정된 지식과 제한된 합리성, 그리고 시장에 관여하는 주체들의 기간 간 상호의존성과 동시성을 고려한다면, 시장이 언제나 경제주체들로 하여금 안정된 균형으로 향하도록 인도한다고 결론짓기는 지극히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왈라스의 일반균형이론의 설정 아래서 고전파 혹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경매관리인이 있어 시장에서 다양한 경제적 거래들을 성사시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공공 인프라스트럭처가 순조롭고 적절하게 동작하게 해준다고 상상함으로서 이들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정합니다. 이때 비대칭 정보, 독점, 기만과 사기 같은 문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경매관리인은 “시장”을 운영하는데 있어 전지전능하다고 가정되기 때문입니다. 제도, 정치, 사회, 시장 사이에서 벌어지는 근본적인 문제들은 여기서 단순히 사라진 것처럼 치부됩니다.

1940년대 칼 폴라니가 적절히 지적했던 것처럼, 19세기의 자유방임체제는 시장 메커니즘의 필요에 사회가 몸을 맞추도록 강요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자유방임체제에서는 “경제가 사회적 관계들 속에 포함되는 대신, 사회적 관계가 경제체제 안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유방임체제는 20세기 초부터 점차 해체되어 경제적 사회적 혼돈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폴라니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시장 메커니즘의 필요에 사회가 몸을 맞추어야 했기에, 시장 메커니즘이 가진 기능의 불완전성이 사회적 본체에 무거운 부담이 누적되도록 만들었다”고.

20세기 말인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상황은 이와 매우 흡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19세기 자유방임주의의 최신판인, 시장원리주의는 많은 나라의 사회에 시장 메커니즘을 강요하고 있으며, 잘못 동작하는 시장들이 다양한 사회 정치적 문제들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체제전환중이거나 신흥 경제권에서 그럼 문제가 현저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1998년 8월 17일 발생한 러시아 위기는 매우 상징적입니다. 러시아 사회와 통치체제를 시장 메커니즘에 적합하도록 개조하려던 7년간의 소위 “개혁”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충분히 발달된 시장경제로 변신하는 대신, 러시아는 사실상 경제거래의 상당 부분이 물물교환을 통해 이루어지는 제2경제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입니다. 인도네시아 또한, 1997~98년 사이 IMF 프로그램 하에서 시장 메커니즘을 신속히 도입할 것을 강요당한 후, 현재 그 사회정치체제를 시장체제에 맞추기 위한 매우 괴로운 과정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1997~98년의 [아시아 외환] 위기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배운 한 가지 교훈은 그것이 환율이든 이자율이든 간에, 가격의 자유로운 움직임이 반드시 시장에서 균형을 회복시켜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많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만약 환율 -예를 들자면 인도네시아의 루피 화- 이 충분히 평가절하된다면, 수요공급은 그 지점에서 균형을 이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기는커녕, 많은 경우 시장은 그대로 붕괴되고, 환율은 끝없이 떨어졌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다수의 균형점이 존재하는 경우라고 부르면서, 일단 우리가 한 균형점 근처를 벗어나버리면, 우리는 대혼돈 혹은 대폭발 상황으로 내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체제는 균형점 근처를 제외하면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이지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유변동환율제는 위기상황에서 상황을 안정시키기는커녕, 외환거래만 붕괴시키게 될 것입니다. 똑같은 현상이 몇몇 위기상황에서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이자율을 끌어올릴 경우에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높은 이자율은 국내외 자금의 수요와 공급의 안정적인 균형점을 이끌어내는 대신, 그저 광범위한 금융거래의 붕괴만 불러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이 바로 1997년 말에서 1998년 초에 걸쳐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복수의 균형점의 존재와, 균형점 근처를 벗어날 경우에 발생하는 불안정성은 일반적으로 시장의 근본적인 특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현상은 금융시장에서 특히 심합니다. 따라서 소위 과열-붕괴 순환이란 어떠한 금융 시장에서도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나 아시아의 금융 버블은 꼭 거시경제정책 단독의 실책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실패가능성을 지닌 시장참여자들이 다른 참여자들과 불완전한 통찰력을 갖고 상호작용하는 곳인 시장이 만들어내는 자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양호한 거시경제정책과 함께 적절한 정보공개와 투명성을 확보한다고 해서 이런 유형의 위기를 반드시 예방할 수 있게 된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 지난 수년간 우리가 배운 점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1990년 4월, 존 윌리엄슨은 1980년대의 부채 위기 당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게 부과된 조건들을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이름으로 규정했습니다. 이 컨센서스는 그 이래 G-7 국가들과 국제 금융기구들이 1990년대에 글로벌 경제를 관리하기 위한 작업원칙으로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이 컨센서스를 열 가지 정책 지침으로 정리하고 논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컨센서스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시장과 건전한 통화”라는 구호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해두면 충분할 것 같군요.

우리가 지금까지 이 컨센서스의 자유로운 시장이라는 측면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해왔기 때문에, 이제 건전한 통화에 대해 간단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1980년대와 그 이전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몇 차례 경험했기 때문에, 정책 당국에게는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것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다루기 위한 이론으로서 통화주의는 가장 적절한 거시경제적 틀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따라서 1980년대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정책논의를 할 때, 통화주의적 사고방식이 그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IMF의 금융 프로그램들은 그 이론적 기원에서 상당히 통화주의적이었거니와 IMF의 사고방식의 주춧돌이기도 했습니다. 이 프로그램들은 1960년대부터 IMF의 서반구 담당부서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이 부서가 미주대륙, 주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담당했던 것(과 IMF의 정책이 통화주의적인 성향을 띄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습니다.

통화주의적 사고방식을 확산시킨 견인차로 작용한 또 다른 사태전개는 유럽 통합, 특히 유럽 화폐들의 통합이었습니다. 이들 국가들 간의 인플레이션율과 이자율의 수렴은 화폐통합의 핵심이었습니다. 따라서 재정적자의 축소와 견실한 통화정책을 통한 반 인플레이션 정책은 유럽 통합 정책의 열 가지 핵심 요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통합과정의 핵심국가는 바로 독일이었는데, 이 나라는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처럼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악몽을 유산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다고 칩시다. 하지만 통화주의가 하이퍼인플레이션이나 잠재적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맞서기 위한 기본 틀이라는 수준을 벗어나 거시정책관리의 만능 이론으로까지 숭배되면, 문제는 재발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내 사무실을 방문했던, 국제통화기금의 한 국장은, IMF에서 그가 벌였던 어떤 실험에 대해 우스갯소리처럼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한 컨설팅 보고서에서 해당 국가의 이름을 지워버린 다음 그 문서를 자기 부서의 전문가들에게 회람시키고, 그들에게 그 나라의 이름을 맞춰보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나라는 비교적 작은 아시아의 한 개발도상국이었습니다. 그 보고서는 통화 공급, 국내 신용, 예산적자, 부채-서비스 비율 같은 워싱턴식 전문용어들로만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걸 보고 그 나라의 이름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신고전주의든 통화주의든 간에, 만능 이론을 개발도상국 경제에 맹목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국제기구나 정부 또는 민간 채권자들의 지배적인 관습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개발도상국들은 그런 처방을 거부할 경우 시장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을 우려해, 교조적인 규칙들이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것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던 면도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워싱턴” 컨센서스란 워싱턴에만 있는 컨센서스가 아니라, G-7 및 다른 IMF-세계은행 회원국들, 채권자뿐 아니라 채무자, 그리고 시장참가자들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완벽한 공조는 문제의 국가에 대한 과도하게 낙관적이었다가 비관적으로 돌변하는 기대를 상호 강화하였습니다.

아시아 위기는 이러한 워싱턴이 만들어낸 과도한 낙관주의가 공황으로 돌변한 좋은 사례인 것 같습니다. 아시아, 특히 동남아시아는 어떤 면에서 글로벌 자유방임 유형의 금융과 상업 거래에 잘 어울리는 지역이었습니다. 동남아는 워싱턴이 주도하는 글로벌리제이션을 전통적인 그들 자신의 글로벌 상업주의 구조와 접목시켜 왔습니다. 8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아시아는 이슬람, 인도, 중국 상인들이 펼치는 세계 상업 활동의 중심지였고, 나중에는 베네치아, 네덜란드, 영국 상인들도 뛰어들었습니다. 따라서 그곳에는 금융 및 상업 양 면에서 국제 거래를 위한 인적 네트워크가 이미 갖춰져 있었으며 중국과 인도 같은 역외 국가들도 새롭게 떠오르는 국제시장에 신속히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외환 위기 이후 우리는 워싱턴 컨센서스와 공명한 아시아적 전통이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품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시장은 아시아에 워싱턴 컨센서스를 실현함에 따른 이익이 클 것이라고 믿었으며, 아시아에 대한 낙관론은 계속되어 그 결과 1993년부터 1996년 사이에 거대한 자본의 유입이 일어났습니다.

아시아 상업주의와 금융과 통신기술의 글로벌리제이션의 결합이 가져온 주요한 측면 하나는 그것이 경제 구조의 겉면만 건드리면서 제조업 기반을 약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인프라나 제조업 보다는 금융센터 건설과 같은 서비스업과 부동산 산업에 프로젝트들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육과 근로자들의 현장교육훈련, 기업의 조직 개선 등이 뒤처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노동생산성과 효율 향상은 실질실효환율의 상승에 영향을 받는 수출산업에서조차 신통치 않다는 점을 폴 크루그먼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지적했습니다. 한때 갖고 있던 낮은 임금에 따른 경쟁력은 빠르게 소멸되었고 급등하는 사무실 비용 또한 상대적인 경쟁력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아시아 외환 위기는 워싱턴에 있는 국제기구들이 워싱턴 컨센서스를 일방적으로 부과해서 발생한 것만은 아니며, 이 지역의 거품을 만들고 결국 그 지역의 거품을 터지게 한 아시아 국가들을 포함한 전세계가 시장 메커니즘에 대해 과도한 낙관론을 품은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1997년 7월 이후 아시아에서 진행된 G-7국가와 국제기구들에 의한 위기관리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으며, 적어도 초기단계에서는 그랬다는 주장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전세계의 기성 관리들은 여전히 통화주의적 경향을 가진 신고전파 패러다임을 믿고 있었으며 그것이 초기 단계에 재정 통화 정책에 대한 처방이 너무 엄격했던 것과 국제기구들로 하여금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단시간 내에 이루기 힘든 비현실적인 구조개혁을 요구하도록 한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 자신이 국제기구들의 의사결정과정에 직접 참여했었고 내켜서 한 것은 아니라도 결과적으로 [국제기구들이] 권고한 것에 대해 동의했었기 때문에, 저는 그런 일이 일어난 데 대해서 남들을 비판할 입장이 못 됩니다. 다만 저는 제가 앞으로 이와 비슷한 상황에 다시 직면하게 된다면, 일을 다르게 처리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은 새로운 국제 금융 체제에 대한 미야자와 대장상의 1998년 12월 15일 연설에서 명백히 공표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 저는 오늘날 새로운 국제 체제와 개발 전략 모두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립이 강력히 요구된다고만 말씀드려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국제 금융 체제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우리가 직면한 마지막이자 아마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세계화에 대한 것일 겁니다. 지난 10여 년간 세계화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앞서 제가 지적했던 것처럼 1990년대의 세계화의 원동력이 된 정보통신기술의 혁명은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다수파라고 생각되는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 또는 세계화의 궁극적 목표는 즉 진정 글로벌한 자본주의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글로벌 자본주의란 실질적인(virtual)인 수준에 머무를 수도 있겠지만 바람직한 것이거나 적어도 컴퓨터와 통신기술의 혁명적인 발전 때문에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현재의 세계금융시장이 더 긴밀히 통합되었고, 24시간 내내 실시간 가상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혹자는 우리가 이미 글로벌 자본주의 하에 있다고, 적어도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그렇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권국가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지난 1,20여 년 사이에 시장에 대한 주권국가의 직접 개입 수단은 상당히 쇠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정책과 포고는 어떤 근본적인 형태로 시장에 영향을 줍니다.

다니엘 예르긴과 조셉 스타니올라우 같은 필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프로세스를 정부와 시장 간의 싸움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사실일까요? 제가 보기에는 정부와 시장을 대체관계라기보다는 보완적인 관계라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맞습니다. 어떤 사람이 시장 원리주의자의 관점과 공산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둘은 대체물로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1945년 이래의 전개는 그런 관점에서 분석될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한 세기를 단위로 삼는 더 긴 역사적 시각에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역사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 장기지속이나 순환주기들, 그리고 구조라는 세 가지 시간단위가 있다고 합니다. 1945년 이래 50년 정도의 기간은 구조라는 단위를 갖고 분석하기에는 너무 짧으며, 순환주기나 순환주기의 일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저의 잠정적인 관점은 1930년대에서 1990년대 후반까지의 시기는 대공황 이후의 강한 정부개입의 시기에서 시장 원리주의의 시기로 가는 장기순환주기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주장한 것처럼, 미국의 강한 영향 하에서 있던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시장 원리주의의 시기는 영국의 패권 하에 있던 1870년에서 1913년 사이의 시기와 유사한 것처럼 보입니다. 1870~1913년 사이의 금본위제 대신, 우리는 지난 20여 년 동안 실질적으로 미국 달러 본위 하에 있었습니다. 이제 문제는 이러한 새로운 버전의 자유방임체제, 즉 팍스 아메리카나가 컴퓨터 통신 혁명의 뒷받침을 받아 21세기에도 계속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의 답은 여러분도 짐작하시듯이 부정적인 쪽입니다.

첫째, 사회주의의 사망 이후 한동안 보장된 것처럼 보이던 미국의 지배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기반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얼마간은 유럽 통합 때문이고, 다른 얼마간은 근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잠재적 반미 감정 때문입니다. 둘째, 가장 중요한 점인데, 글로벌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세계는 중대한 규모의 소동을 오랫동안 견뎌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 딜레마는 자유롭게 굴러가는 글로벌 시장과 주권국민국가 사이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대니 로드릭은 칼 폴라니를 인용해 이 점을 아주 간결하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폴라니의 불후의 통찰력은 시장이란 사회적, 정치적 제도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한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의 결과를 규제하고, 안정화하고 정당화하는, 세 가지 기능을 제공하는 제도들이 없다면 시장은 살아남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굴러가는 사회라면 어디든 불공정 경쟁이나 사기를 규제하는 기구, 호황-불황의 경기순환을 완화해주는 통화와 재정 기관, 그리고 시장이 만들어낸 결과가 위험과 보상의 분배에 관한 한 사회의 선호와 합치되도록 도와주는 사회보험체제를 갖고 있는 이유이다.”

사회 정치적 기관이나 정부는 시장을 보완하고 지원하는 것이지, 시장과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 대 시장의 문제를 규제 대 경쟁이라는 식으로 바꿔놓아선 안됩니다. 정부는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며, 금융시장은 적절한 감독이 있을 때만 잘 동작하며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시장의 산출물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글로벌한 차원에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우리가 단순히 이러한 글로벌한 기관들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책 독립성을 가진 주권정부들을 가진 이상, IMF나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들은 완전히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글로벌 자본주의를 보완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논리적으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정책공조란 것은 어느 정도는 글로벌리제이션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만, 주권이 존재하는 이상 글로벌 자본주의를 완전히 보완하기엔 역부족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쇠퇴하는 미국의 헤게모니는 오늘날 존재하는 공조의 수준을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 정부나 미국 혹은 다른 단일 국가가 지배하는 세계 제국을 갖지 못하는 이상 글로벌 자본주의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논리적 결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는 미국이 금융 제국에 근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20세기 말에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분명히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는 어떤 형태로건 국민국가나 국민국가들의 연방이 남아있을 거라고 간주해야만 하며, 글로벌 자본주의의 해외거래는 구속될 필요가 있고 정보공개, 감독, 신중한 규제와 완전한 통제를 통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해치는 일방적인 주권행동을 제약하기 위해 금융과 무역 양 분야에서 공통의 국제규칙이 수립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효과적인 경쟁을 유지하는데 주의가 기울여져야 하는 것이지, 시장 참여자들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보장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정책공조는 국내외의 전문가들로부터 나오는 실질적이고 전문적인 조언 못지않게 정치적인 레벨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주권국가의 정치적 의지는 글로벌한 정책 결정이 필요할 때도 존중되어야만 합니다. 이는 정책공조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정보혁명 이후의 시대에 공조의 필요성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만, 공조는 공조로 남아있어야지 강압이 되면 안 됩니다.

넷째는 셋째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만, 유효한 공조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각 국가들의 자본주의 구조 간의 상이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장은 그 국민국가의 사회 정치적 제도 속에 효과적으로 포함될 필요가 있으며, 그런 제도들은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여러 자본주의 형태들 사이의 상이점은 남게 됩니다. 각국의 자본주의는 합의된 국제적 규칙과 규제에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만, 다른 나라의 국내적 규칙이나 규제에 동화될 필요는 없습니다. 세계 전체는 그 참가국들이 공통의 국제적 규칙을 받아들이는 한 참가국들의 체제적 다양성으로부터 이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21세기에 갈망하는 것은 각자의 고유한 문화와 사회경제적 체제를 지닌 각 지역과 국가를 상호 연결하는 글로벌 세계체제입니다. 다양성 속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은 다음 세기를 향한 저의 이상이며, 저는 이러한 글로벌 네트워크로 연결된 다양한 문명들의 공조가 시장 원리주의 같은 단일 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부과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by sonnet | 2008/10/24 11:09 | 정치 | 트랙백(2) | 핑백(4) | 덧글(43)
오늘의 한마디(Guillermo Calvo)

그깟 사소한 잘못에 어째서 그처럼 무자비한 처벌이 내려져야 했는가?
Why was so large a punishment imposed for so small a crime?

- 1990년대 일련의 신흥시장 외환위기를 검토하고는
콜럼비아 대학 경제학 교수, Guillermo Calvo -


칼보의 질문은 잠재적으로 97년 외환위기(IMF사태)에 대한 평가에 엄청난 함의를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큰 벌을 받은 걸 보면 뭔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는가보다라고 막연히 생각하면서 누가 잘못했는가와 무엇을 잘못했는가라는 질문에만 집착해 왔다. 그런데 사실은 죄와 벌의 관계가 합리적이지 않아 우리가 가벼운 잘못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큰 벌을 받았다거나 혹은 누구는 비슷한 잘못에 대해서도 아주 가벼운 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게다가 잘못은 다들 저질렀는데 재수가 없어서 나와 몇몇만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분노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되지 않겠는가.

참고자료:
Petty Crime and Cruel Punishment: Lessons from the Mexican Debacle (Guillermo A. Calvo, Enrique G. Mendoza)
Emerging Capital Markets in Turmoil: Bad Luck or Bad Policy? (Guillermo A. Calvo)
by sonnet | 2008/03/26 18:59 | 한마디 | 트랙백 | 핑백(1) | 덧글(11)
변동환율제 이야기(2)
앞선 글에서는 변동환율제의 특성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다는 사례를 간단한 그래프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그런 사례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출범한 변동가능한 고정환율제인 브레턴우즈 체제 시절, 변동환율제의 지지자(예를 들면 밀턴 프리드먼)들은 변동환율제가 현행 브레턴우즈 체제보다 훨씬 우수한 특성을 가진 제도라고 생각하고 이를 강력히 지지하였고, 그들의 주장은 그럴듯하게 보였다.

그들의 주장은 얼마나 맞았을까? 금환본위제가 완전히 포기되고 변동환율제로 전환한지 15년이 지난 시점인 1987년, MIT의 Rudiger Dornbusch와 버클리의 Jeffrey Frankel이 이 문제를 전반적으로 검토한 결과를 내놓았는데 결론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변동환율제는 이론상 어떻게 동작할 것이라고 가정되었는가

(1) 환율은 거시경제 펀더멘탈과 대등한 정도로 안정적일 것이라고 가정되었다.
(2) 국가들은 다양한 정책과 다양한 인플레이션율을 가질 것 같았다.
(3) 무역불균형은 더 작아질 것이고, 따라서 보호주의로 가자는 정치적 압력도 줄어들 것이다.
(4) 경제위기가 국제적으로 전파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그 결과 국제적 정책공조의 필요성도 줄어들 것이다. 위에 언급한 항목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정책의 독립성 증대는 변동환율체제의 핵심 덕목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5) 각국 중앙은행은 외환보유고를 더 적게 가져도 될 것이다. 왜냐면 그걸 써야 할 일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6) 환율은 장기적으로 구매력평가지수(PPP)로 평가되는 상대가격수준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7) 상품가격의 경직성은 실질환율이 장기균형으로 회귀하는 것이 그렇게 빠르지는 않을 거라는 점을 함축한다.
(8) [미래에 대한] 투기는 불안정화보다는 안정화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9) 기대는 합리적이다.
(10) 외환선물시장 및 환위험을 헤지하기 위한 다른 수단들이 개발되어, 수출입업자와 국제투자가에게 변동환율제로 이행하는데 따르는 환위험 증대에 대한 방어책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2. 변동환율제는 실제 운영 결과 어떤 제도임이 드러났는가

(1) 환율은 제멋대로(inexplicably) 움직인다.
(2) (예상과는) 반대로 더 큰 정책공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최소한 표면적으로라도.
(3) 각국의 국민저축률의 차이는 대체적으로 보아 1973년 이후에도 그 전과 비슷하게 경상계정의 차이로 반영되긴 했지만, 미국은 전례없이 큰 규모로 해외에서 차입함으로서 1980년대에 재정적자를 늘려 나갔고, 기록적인 무역적자는 미국 내에 새로운 보호주의적 압력을 형성했다.
(4) 통화정책 공조 강화에 대한 관심이 널리 표명되고 있기는 하지만, (각국 통화정책의) 국제적 전이과정의 본질에 대한 합의가 없다. 따라서 공조를 한다쳐도 협조적인 통화팽창이 될지 그렇지 않을지에 대한 동의가 없다.
(5) 중앙은행들은 (여전히) 대규모의 외환보유고를 유지하고 사용했다.
(6) 구매력평가지수는 단기적으로 완전히 실패했을 뿐 아니라 장기추세를 입증하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7) 오버슈팅 이론이 적어도 다른 경쟁이론들보다는 실질환율의 전반적인 움직임을 설명해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단기적 움직임은 전연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때때로 실제 결과는 환율이 "오버슈팅 균형을 (다시) 오버슈팅하곤 했다"
(8) 외환시장을 안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투기는 거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9) 대부분의 단기적 변동은 뉴스에 관계없이 따로 노는 것처럼 보였다. 시장은 뉴스보다는 노이즈에 더 민감히 반응하는 경향을 보였다.
(10) 외환시장의 거래물량은 엄청나게 커졌다. 그 대부분은 실물거래는 물론 중기 혹은 장기투자와도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 Dornbusch Rudiger,, Frankel, Jeffrey., The Flexible Exchange Rate System: Experience and Alternatives, NBER working paper No.2464, Dec. 1987


즉 이들의 결론은 실제로 운영해 본 결과 변동환율제는 지지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끝내주게 좋은 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변동환율제가 실제로 1950년대와 60년대 지지자들이 주장했던 것 만큼 좋은 제도였다면, 우리는 아마 97년 외환위기를 겪지 않았을 것이며, 만에 하나 겪었더라도 그 충격은 아주 경미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외환통제를 풀고 시장거래로 전환하던 시절, 듣던 이야기는 선진국 제도인 변동환율제의 미덕에 대한 장미빛 이야기 뿐이었다. 그 때 누가 그 제도가 우리를 묵사발내는데 사용되는 쇠망치로 변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경고했단 말인가?

물론 한 만병통치약이 진짜가 아니었다고 해서 당장 뛰쳐나가 또 다른 만병통치약을 찾아 산과 들을 헤메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새 만병통치약도 실제 결과가 이론적이고 이상적인 예상만 못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처럼 옛 약장수들의 참담한 기록을 돌이켜 봄으로서, 옛 약장수가 심은 긍정적 환상을 걷어버리고, 새로운 약장수를 냉정히 평가할 수 있는 눈을 키울 수 있는게 아닐까.

사실 여기 소개된 관점은 이미 20년 된 것이다. 90년대의 남미와 아시아 외환위기를 계기로 이 당시 돈부시 같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현행 제도가 더 취약하든가, (원래는 그렇지 않았더라도 국제금융거래의 성장에 따라) 더 취약해졌다는 견해가 보다 힘을 얻는 것 같다.
by sonnet | 2008/03/25 15:30 | 정치 | 트랙백(1) | 핑백(2) | 덧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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