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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오가르코프
2006/09/26   아프간 출병: 소련군 참모본부의 견해 [8]
아프간 출병: 소련군 참모본부의 견해
앞서 포스팅했던 아프간 전쟁의 전개에서는 서방연합군의 병력이 너무 적어 '소탕 후 확보'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는 점을 지적했었다.

그렇다면 1979년에 아프간을 침공했던 소련군의 판단은 어떠했을까? 예전에 정리해 놓았던 글인데 참고 삼아 올려놓기로 한다.

이 글에서는
1) 아프간 파병 병력은 왜 그 정도 규모로 결정 되었는가
2) 아프간 파병 소련군이 경비 임무에 주로 투입되었던 이유
3) 파병 결정을 놓고 벌어졌던 소련군 내부의 논쟁

을 살펴본다.

이 내용은 『소련의 아프간 전쟁 -출병의 정책결정과정-』(이웅현, 고려대학교 출판부)의 p.18-19 및 p.310-319를 편집만 새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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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소련군 철병이 완료된 후 소련군 지상군사령관 발렌틴 바렌니코프 장군(출병 당시 참모본부 중앙작전총국장)은 『아가뇩』지 등과의 인터뷰에서 1979년을 되돌아보면서 “당시 참모본부의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와 [제1참모차장] 아호로메예프를 포함한 대부분의 참모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개입의] 정식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는 군대의 파견에 반대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12월 6일, 카불로부터 소환되어 온 소련 군사고문단장 고렐로프 장군을 만난 오가르코프는 “아프가니스탄의 군부대가 우리 병사들에게 총을 쏠 가능성은 없을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출병의 정식결정이 내려진 것이 12월 12일이므로 오가르코프는 출병결정의 마지막 순간까지 정치지도부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참모본부 중앙작전총국 부국장이던 마흐무드 가레에프 장군도, “당시 참모총장이던 오가르코프 원수가 소련군의 투입에 반대했다는 점은 입증할 수 있다”고 단언하면서, 정치지도부가 참모본부의 전문적인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에 관하여 “정치적 과정의 연장인 군사적 문제가 마치 정치적 목표나 과제와는 별개로 결정될 수 있는 것처럼 취급되었다 … (군 지도부의 의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정치지도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해서 군의 주도 운운하지만) 정치지도부는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용기를 지녀야 하며, 1941년의 실패에 있어서의 스탈린의 행동과 같이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련 참모본부는 왜 반대했을까?
계속해서 바렌니코프의 말을 들어보자.

“참모본부가 군사개입에 반대한 이유는 7만 5천 명 정도의 병력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안정시키는 것은 무리이며, 오히려 소련군의 진주가 적의 움직임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참모본부 중앙작전총국 국장 발렌틴 바렌니코프)

“당시 참모본부의 간부들이 강조한 아프가니스탄 출병의 비합리성의 근거는, 만일 군 투입에 관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면 ‘4-5개 사단의 한정적 분견대가 아니라 30-40개 사단의 대규모 병력으로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는 지역’이 다름 아닌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반군의 세력이나 아프가니스탄 정규군의 저항가능성까지 고려하면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는 데에는 소련 군사력의 상당한 부분을 쏟아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우려였다.”
(참모본부 중앙작전총국 부국장 마흐무드 가레에프)


이와 같은 증언은 비 참모본부 계열인 외무부측 인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참모본부의 사람들은 …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군의 투입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반대의견은 정치적인 고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프로페셔널로서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경험을 떠올린 결과로서의 반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력으로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럽 및 중국과의 국경에 배치되어 있는 소련군의 병력을 끌어 내지 않을 수 없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쪽의 태세를 약화시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던 것이다.”
(외무차관 코르니엔코)


그러나 결국 참모총장의 전문적인 의견은 단지 하나의 의견으로만 남게 되었다.
역시 그 시점은 명확히 하고 있지 않지만 코르니엔코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참모본부의 좌절을 묘사하고 있는 당시 소련공산당 국제부 차장 체르냐에프는 자신의 회고록 『고르바초프와 함께 한 2000일』에서, 개입에 대한 단호한 반대의 의견서를 제출한 참모본부의 장군들을 호출한 국방상 우스티노프가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군인이 정책의 결정에 왈가왈부하게 되었는가?”라고 질책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고 상세한 작전계획을 신속하게 제출하라”고 명령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른 참모본부의 장군들도 비슷한 이야길 전한다.

“고위급 회의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개입이라는) 그러한 행동이 실현될 경우에 우리나라에 뼈아픈 정치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지만, 오가르코프가 듣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야기는 ‘우리 지도부에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당신들의 임무는 채택된 정치적 결정의 군사적 측면의 수행을 확보하는 일이다’라는 것이었다.”
(참모본부 중앙작전총국 부국장 가레에프)

“오가르코프, 나, 그리고 바렌니코프는 국방상에게 보고하러 갔다. 바렌니코프는 당시 소련군 참모본부 중앙작전총국의 책임자였다. 우리는 국방상에게 ‘소규모 병력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어떤 과제이든지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원래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군사력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라고 말했다. 국방상은 ‘그러면 정권의 안정은 가능한가?’하고 물었다. 우리는 ‘만일 우리 군이 카불, 헤라트, 칸다하르, 잘랄라바드의 대도시에 진주하면 정권안정은 가능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참모본부 제1참모차장 아흐로메예프)


그런데 여기서 미묘하지만 흥미로운 논점의 차이가 발견된다.
소련군 참모본부 내부에서도 두 가지 계열의 견해, 즉 “원래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군사력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라는 작전 자체에 회의적인 견해와 “4-5개 사단의 한정적 분견대가 아니라 30-40개 사단의 대규모 병력으로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라는 할 바에는 화끈하게 라는 견해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선 지면상 생략하지만, 전자의 견해는 오가르코프-아흐로메예프 라인, 후자의 견해는 소콜로프-발렌니코프 라인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소련군 참모본부는 이렇게 해서 제한된 병력 상황과 지도부의 확고한 결심 등을 고려해 “아프가니스탄 상황의 안정”이라는 것을 병력투입의 목표로 제시하였다. 결국 그런 생각대로는 잘 풀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군 부대의 투입에 관한 당시의 결정의 조건 하에서 우리 군의 주요한 목적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상황의 안정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참모본부는 그와 같은 대안을 제시했다. 즉 소련군 부대는 경비에 전념하고 전투행동에는 가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최초의 계획대로 소련군은 지역의 주민들이 반군의 습격을 막는 것을 원조하고, 그들에게 식량 등의 일차적인 생활필수품을 제공하는 일에 그쳤어야 했다 … 그러나 일련의 원인들에 의해 우리 군은 점점 전투행동에 빨려들어 갔다. 결국 소련군 제한분견대의 파견과 증강의 노선에 올라타 버린 것이다.”
(참모본부 중앙작전총국 국장 바렌니코프)

즉 발렌니코프는 “상황이 어쩔 수 없게 흘러갔다”라는 식의 변명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가레에프는 신랄한 비판을 던진다.

“최근 몇 명인가의 국방성 전직 지도자들은 신문지상에서 소련군 제한분견대의 여러 지대(支隊)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독립경비대의 역할만을 수행해야 했으며 전투행위에는 개입해서는 안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나의 견해를 말하자면) 이와 같은 뒷북치는 견해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비현실적인 것이다. 어떤 군대이든지 남의 땅 그것도 정치, 사회적인 제반 세력들이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실질적으로는 내란의 상태에 놓여 있는 땅에 들어가면서 내홍투쟁의 무대로부터 떨어져서 한 구석에 남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 군대는 4월 혁명을 통해서 집권한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된 것이지 중립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파견된 것은 아니다.
주민에 의해서 점령군의 취급을 당하고 지역의 소련군 거점 및 경비지구에 대한 공격이 발행할 경우는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만에 하나 지방의 권력기관과 함께 배치된 지역에서 소련군의 지대가 무자헤딘의 공격을 받는다면 부대의 지휘관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기본적인 군사논리로 본다면 한 번 뺀 칼을 주위에 위협적인 칼날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원래의 칼집에 다시 집어넣는 것이 간단히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실제의 상황이 그러했다. 정치가와 군인들의 다양한 최초 기도 혹은 희망과는 달리 소련군은 급속히 군사행동에 말려 들어갔다.”
(참모본부 중앙작전총국 부국장 가레에프)


위에서 살펴본 것은 결국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아프간 출병 결정은 (그 전에 상당기간 망설였지만) 최종적으로 정치지도부가 결정한 후 밀어붙인 것이다. 군부는 이에 대해 사실상 발언권이 없었다.
2. 소련 참모본부는 제한된 병력 상황 등을 고려해 “우리는 아프간 정부를 돕기 위해 상황안정(주로 경비)에만 맡으면 된다. 나머지는 아프간 정부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희망적인 가정을 하였다.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에의 교훈
아프간에 들어간 소련군은 어디서 무엇을 했나?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군이 주로 경비를 서게 된 현상은 우연이 아니라. 제대로 된 평정작전에 필요한 3,40개 사단의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 참모본부가 부득이하게 취한 대안의 결과로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던 내용이였던 것이다.

이는 빈약하게 무장한 2만명의 병력을 갖고 아프가니스탄을 어떻게 해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ISAF의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by sonnet | 2006/09/26 14:33 | 정치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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