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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염응택
2007/08/12   백의사 대북타격작전 [16]
백의사 대북타격작전
앞선 글에서 백의사(白衣社)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어서 부연.

3. 우익의 북한 타격정책

1946년 모스크바삼상회담의 소식과 국가수립 문제의 부각은 정권적 차원에서 남북문제를 인식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남한 우익의 경우 반탁운동이 그러하듯이 김구의 임시정부가 북한의 정권기관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모스크바삼상회담의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이란 조항도 그러하거니와, 북한지역에서 임시인민위원회란 준국가기구의 출범은 유일한 정부의 대표성을 주장하던 김구와 임시정부의 권위를 손상시키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46년 초반 우익진영은 반탁운동의 일환으로 운동원을 북한으로 파견하여 ‘대북타격정책’을 실행하였다. 이러한 타격정책에는 이승만도 관여하였지만,[61] 「김구-신익희」로 이어지는 임정계가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백시영·강응용 등은 임정의 반탁포고문을 가지고 월북하였으며[62], 반탁학련에서 윤한구·최중하 등으로 구성된 ‘대북반탁공작대’ 7명은 북한으로 가서 조만식을 만나고, 반탁결의문에 서명을 받아와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에 전달하기도 하였다.[63]
임정계의 대북정책을 주도한 것은 내무부의 조직국과 정보국이었으며, 이들은 또한 신익희의 정치공작대와 연결되어 있었다. 임정의 대북공작은 일종의 특수공작으로 다음 「잠행행동(潛行行動)」의 준비 방책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다.

[준비 방책]
(1) 건국광인(建國狂人)을 북으로 보낼 기초 준비가 필요. (최대 위험)
(2) 자급자족에 방도를 연구할 만한 질적(質的) 인물만 필요. (수적 발전은 금물)
(3) 각 지방조직체는 그 지방 중심으로 인물경제를 운영토록 할 것. [64]

이러한 대북공작에 가장 적합한 ‘건국광인’(建國狂人)은 북한 현지의 연고가 있는 반공인사들이었다. 여기에 활용되는 것이 1945년 11월 염응택의 지도로 결성된 ‘백의사(白衣社) 결사대’의 월남 청년들이었다. 당시 백의사에는 이성렬·백시영·김형집·최기성·이희두 등으로 구성된 ‘대이북 집행부서’가 결성되어 있었다. 이 백의사가 신익희의 정치공작대에 합류하여 대북공작을 주도하였다.[65]

당시 정치공작대는 주기적으로 행동대원을 남한은 물론 북한지역까지 파견하였다. 1946년 초 파견된 대원들의 임무는 북한지역의 지도자 및 정당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 임정을 지지하는 우익조직을 구성하는 것, 주요한 공공기관의 건물을 방화 소각하고 민심을 혼란시키는 것 등이었다.[66] 북한임시인민위원회의 성립 직후 대북공작은 북한 요인 암살에 집중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46년 3월 초 백의사 결사대 출신의 ‘북한임시인민위원회 지도자 암살 시도’였다. 2월 초 이성렬·백시영·김형집·최기성·이희두 등으로 구성된 ‘백의사 결사대’는 신익희의 낙산장(駱山莊)에서 정보수집 요령과 지하활동 방법에 대한 교육을 받은 후 북한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평양역 앞 광장에서 열린 북한의 3·1절 기념행사에서 반탁운동과 북한 지도부 암살을 목적으로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소련군 노비첸코 중위가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딴 곳으로 던져 내어 실패하였다.[67] 3월 1일 ‘찰나에 고래를 놓쳤’지만 백의사 결사대의 북한임시인민위원회 지도자 암살시도는 계속되었다.[68]

3월 3일: 최용건(崔庸健) 가(家) 습격, 실패
3월 5일: 최용건 가 재차 습격, 실패
3월 9일: 김책(金策) 가 습격, 실패
3월 11일: 강양욱(康良煜) 가 습격, 그의 딸과 식모·경비보초 등을 사살[69]

백의사 결사대 중 최기성과 김정의는 체포되었고, 이희두는 사살되었으며, 이성렬만 월남하였다. 이들의 아지트에서는 「임정포고문」 1·2호가 발견되었다. 김정의는 소련군의 심문에서 임정 내무부의 정보국장 박문(朴文)이 증명서를 작성해 주었고,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김구는 이러한 계획을 비준하였지만, 직접 만나지 않아 자신의 북행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언급하였다.[70]

1946년 3월 치안이 미처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백의사 대원들의 습격은 북한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북한은 내부 치안을 다시 정비하는 한편, 김구·이승만을 “테로 강도단의 두목”으로 맹렬히 비난하였다.[71]

임정계의 반탁운동을 통한 대북타격정책은 임정법통론의 외연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북한 임시인민위원회의 실질적 타도보다는, 임시정부의 권위를 노리는 일종의 ‘외각때리기’였다. 그것은 임시정부 추종자인 ‘우국염려생(憂國念慮生)’ 이종표의 「비상정권 수립계획표」에서 “38선이 해결되면 북편 세력의 잠행 남하, 여차(如此)한 시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독립”이란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72]

임시정부의 이러한 대북타격정책도 1946년 초반기를 경과하면서 점차 소멸되어 갔다. 그것은 임시정부가 전국적 구도에서 북한의 임시위원회와 맞서기는커녕, 남한에서조차 미군정과 이승만·한국민주당에 의해 임정법통론이 위협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61] 이승만의 자신의 비서 중의 한 사람인 김욱을 월북시켜 이윤영이 서명한 조선민주당의 반탁결의문을 받아왔으며, 이로 해서 이윤영은 신상에 위협을 느껴 월북하였다(한국 반탁·반공학생운동 기념사업회, 1986, 『학생건국운동사』, 152쪽).
[62] 이들은 해공 신익희의 친필 위임장, 각자 500원씩의 여비, 임정의 반탁포고문 1·2호 등을 가지고 파견되었다고 한다(유치송, 1984, 『해공 신익희 일대기』, 460쪽).
[63] 당시 최중하 등은 출발에 앞서 경교장을 방문하여, 김구의 당부와 여비 200원을 받았다고 한다. 대북 반탁공작대의 활동은 한국 반탁반공 학생운동기념사업회, 앞의 책, 148~153쪽: 이철승, 1976, 『전국학련』. 중앙일보·동양방송, 160~67쪽 참고.
[64] 「38 북방과 38 남방을 대상한 비상정권수립」,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1996, 『미군 CIC 정보보고서』 1.
[65] 백의사와 연계된 정치공작대의 중앙본부장은 신익희였으며, 행동대장 조중서, 사령에 염응택, 부사령 박경구, 총무부장 유진산, 청년부장 조용진 등이었으며, 미 24군단 CIC와 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백의사에 대해서는 김인호, 1984, 『사선을 넘어서』, 진흥문화사, 21~27쪽; 유치송, 1984, 『해공 신익희 일대기』, 460쪽; 이기봉, 1989, 『인간 김일성』, 길한문화사, 372~402쪽 참고.
[66] (1)「조직공작에 관한 사항」; (2)「소련방 무력정비사령부 제7국 부국장 샤포쥐니고프(B. Sapozhnikov)가 소련방 중앙위원회 수슬로프(M.A. Suslov) 동지에게 보내는 전문(1946.8.22)」; (3)「1946년 김일성 암살기도 사건 진상」, 『세계와 나』 1994년 8월호. (2)와 (3)은 같은 자료인데, 이 자료는 소련 무력정치부 제7국이 평양에 들어가 김일성 암살을 시도하다 체포된 임시정부 내무부 정보국 부국장이던 金正義를 심문한 기록이다.
[67] 1983년 북한과 소련은 노비첸코를 기리는 합작영화 「영원한 전우」 2부작을 제작하였다. 3·1절 사건에 대해서는 Ivan Chistiakov, 국토통일원 번역, 「제25군의 전투행로」, 『조선의 해방』, 1987, 76~77쪽; 한국통일촉진회 편, 1970, 『북한반공투쟁사』, 167~73쪽, 반공계몽사;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앞의 책 313~25쪽 참고
[68] 한국통일촉진회 편, 앞의 책 167~73쪽; 이기봉, 앞의 책, 375~402쪽; 김인호, 앞의 책, 21~27쪽.
[69]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김구는 강양욱 목사의 인도로 평양 장대제 교회에서 옛친구 전재선(全在善) 목사의 주도로 예배를 보았다. 한 때 김구의 약혼녀였던 안신호는 백의사의 강양욱가 습격사건에 대해 질문하여 김구가 남처해했다고 한다. 정리근, 1988,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 60~64쪽.
[70] 「소련방 무력정비사령부 제7국 부국장 샤포쥐니고프(B. Sapozhnikov)가 소련방 중앙위원회 수슬로프(M.A. Suslov) 동지에게 보내는 전문」, 1946.8.22.
[71] Ivan Chistiakov, 국토통일원 번역, 「제25군의 전투행로」, 『조선의 해방』, 1987; 북조선 5·1기념공동준비위원회, 『팟쇼·반민주분자의 정체』, 1946.5.1
[72] 이종표, 「임시정부를 중심한 비상정권수립 계획표」,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1996, 『미군 CIC 정보보고서』 1.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pp.76-80


1946년 3월은 임정이 귀국한지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김일성과 그 직계(최용건/김책) 등도 어떤 사람인지 국내에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때였다. 즉 김일성이 대단한 악당이어서 특별히 테러를 할 이유는 없었다는 뜻이다. 결국 이 사건은 임정이 해방 후의 국내정치에서도 테러전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한 증거가 될 수 있는 셈이다.


그 외 나와는 기본적인 입장이 상충되지만, 다음도 참고할 만하다.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한겨레, 2007년 4월 12일,박노자)
by sonnet | 2007/08/12 00:09 | 정치 | 트랙백(1)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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