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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수출주도산업화
2008/08/04   수출주도정책으로의 전환 [73]
수출주도정책으로의 전환
이승만 정부 시절 환율수준과 원조 규모에 대한 갈등(Crete) 에서 트랙백


1. 들어가면서

이런 견해가 나오는 것은 앞서 제시한 50년대의 상황들과 또한 당시 정부가 추진했던 ‘자립경제’ 원칙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오는 표현입니다. 당시 우리 정부의 입장은

국내소비를 기본적으로 국내생산으로 충족
아직 부족한 초과수요는 물자의 해외 수입으로 해결
수입 대금은 수출의 확대를 통해 자력 조달

으로 대표되는 ‘자립경제’ 건설이 목표였는데, 이 당시는 전쟁으로 국내 산업 시설 대부분이 파괴되는 절대 생산 부족의 상황이었죠. 따라서 뭔가를 생산해서 수출하는 것이 우선이기 보다는 국내 소비를 충족시킬 국내 생산 시설 확충이 급선무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출의 필요성은 국내 부족 물자의 수입 대금 마련 창구라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이었죠. (Crete)

빙고! 이런 결론을 토론 상대방으로부터 이끌어내기 위해서 지금까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모릅니다. 앞으로는 토론이 한결 쉬워질 것 같군요. 저기다 한 줄만 덧붙이면 완벽할 것 같습니다.

원조를 많이 받아 ‘자립경제’ 건설이 목표



2. 전환의 중요성

제가 이 토론의 서두에서 "남한의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은 무상원조를 받아서라기 보다도 무상원조를 끊어나간 데 요점이 있다"(sonnet)란 주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상원조가 줄어듦과 동시에 "원조경제에서 수출경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경제성장은 주로 성공적인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의 결과물이라는데 폭넓은 합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승만 정권기의 원조의존적 수입대체 산업화가 왜 수출주도 산업화로 바뀌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왜?

그림 1. 이승만 정권기에는 내수지향 수입대체 전략이 주로 채택되었으나 박정희 정권이 안정을 찾는 시점이 되면 이미 수출주도 성장전략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과연 전환기(빗금 친 부분)에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정책전환이 이루어졌던 것일까?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위 그림은 이승만 경제정책을 매우 높게 평가하는 토론 상대자의 입장을 배려하기 위해 검토 대상이 될 전환기의 범위를 최대한 넓혀 잡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보다 전통적인 학계 주류의 시각은 다음 그림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림 2. 전환기를 보다 좁게 잡는 전통적인 학계의 시각.
이 해석대로라면 역사적인 정책 전환에 있어 이승만의 가능성은 거의 사라지게 된다.



3. 인물 중심의 세 가지 "도식적" 설명

우리가 지금까지 진행해 온 토론이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 시작한 점도 있고, 사람들이 보통 인물과 그의 정책, 실적 등을 구분해 판단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후광효과) 때문에, 짧고 단호하게 이야기하기로 한다면 세 가지 구도가 떠오르게 됩니다.


그림3-1. 이승만 주도 전환 가설

우선 첫 번째 가설은 이승만이 수입대체전략을 주로 취하긴 했지만 그것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런 것 뿐이고, 전후복구 등 당장 아쉬운 것만 극복하고 나면 수출주도전략으로 전환을 진행할 예정이었거나 실제로 진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가설이 입증될 수 있다면 4.19로 이승만이 물러나지 않더라도 수출주도성장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고, 그 결과 한국 경제성장의 가장 중요한 공로는 이승만이 독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림3-2. 장면 주도 전환 가설

두 번째 가설은 이승만은 수입대체전략을 추구했던 것이고, 4.19로 이승만을 몰아내고 나서야 기존의 수입대체전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이승만이 정권을 더 오래 잡고 있었더라면 (결과적으로 20세기 후반에 별 재미를 못본 것으로 입증된) 수입대체전략이 더 오래 추진(보라색 점선)되어 우리의 경제성장은 방해를 받았을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또한 제2공화국기에 기본적인 노선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고 박정희는 이것을 이어받아 충실히 집행했다는 해석도 내려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결론을 입증할 수 있다면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경제성장에 대한 공로를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두 독재자에게 최소한만 돌려도 되는 것입니다. 장면의 경제정책을 발굴해 가능한 높게 평가하려는 시도에는 이런 숨은 의도가 종종 발견됩니다.


그림3-3. 박정희 주도 전환 가설

세 번째 가설은 이승만은 수입대체전략을 추구했던 것이 분명하거니와, 제2공화국의 장면 정권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기는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이승만이 계속 집권했을 경우는 물론이요, 5.16으로 장면 정권이 전복되지 않았을 경우에도 (결과적으로 20세기 후반에 별 재미를 못본 것으로 입증된) 수입대체전략이 더 오래 추진(보라색 점선)되어 우리의 경제성장은 방해를 받았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권 초기 박정희에 대한 가장 주요한 대안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이승만과 장면은 박정희를 대신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필수불가결성이 강력히 뒷받침되는 것이지요. 박정희는 기본적으로 쿠데타로 집권했기 때문에 정권의 정통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러한 결함을 경제성장 등 다른 업적으로 합리화하려고 했습니다. 대안적 지도자들도 비슷한 경제성장을 보일 수 있다면 민주정치를 후퇴시킨 쿠데타를 역사적으로 용인해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경제성장에 대한 박정희란 인물의 필수불가결성이 박정희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그처럼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 가설은 주로 불세출의 지도자 박정희가 나타나 수출주도전략으로의 주요한 정책전환을 단호히 이루어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틀로서 사용되곤 합니다.


4. 내용의 검토(1): 이승만 정권기

자 이제 앞서 설명한 세 가지 "도식적" 설명을 염두에 두고 검토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토론을 읽어 오신 분들은 이승만의 경제정책에서 수출의 위상이란 것이 치열한 쟁점이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쟁점이었던 이유는 이승만이 수출을 확실히 밀어주었거나 앞으로 그럴 예정이었음을 보여줄 수 있다면 수출주도성장으로의 전환에 있어 그의 입지는 아주 큰 것이고 첫 번째 가설(그림 3-1)이 가장 유력한 설로 등극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 때 이 쟁점은 일단락이 난 것 같습니다. 이승만 정권기 경제정책의 기조가 "국내소비를 기본적으로 국내생산으로 충족 … 으로 대표되는 ‘자립경제’"(Crete)라는 점을 확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결론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반론이 제시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시기의 대외 수출은 제자리 걸음이었으며 이렇다 할 적극적인 수출 정책이 시행된 것도 아닙니다. 1957년부터 시행된 수출5개년계획은 구체적인 수출 증대 방안도 없이 만들어 졌으며 결과적으로 목표액의 30% 수준을 달성하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길 잃은 어린 양)


이어 이 시대에 대해 저지르기 쉬운 실수를 하나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이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아이디어란 것입니다.

1980년대 이전에는 개발도상국가에서 공업화를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대체로 수입대체중심의 공업화전략을 채택해 온 사례가 많았고, 수출에 중점을 둔 공업화전략은 오히려 예외적인 몇몇 나라에서만 실시해 왔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오면서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신생공업국가들의 수출주도형 공업화전략에 의한 경제발전 성공사례가 널리 인식됨에 따라, 최근에는 과거에 수입대체중심의 공업화전략을 채택했던 나라들도 정책개혁을 통해서 수출주도형 공업화전략으로 방향전환을 한 나라들이 많다. 따라서 최근에는 공업화전략의 유형이 수입대체중심에서 수출주도형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앞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이런[수입대체] 전략은 19세기 이후 당시의 많은 후진국가들이 선진공업국가로부터의 공산품수입을 막고 그것을 국산품으로 대체해 가는 과정을 통해서 공업화하려는 방식으로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김광석, 『한국의 수출과 공업화』, KDI, 1995, pp.22-23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수출주도형 공업화가 유력한 개발전략이 되었지만, 한국이 수출주도형 공업화에 나선 1960년대 전반에는 그것은 아주 이례적인 전략이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전반적으로 다루는 학술문헌은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 수출주도형 공업화의 특이성을 짚고 넘어갑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전후복구와 소비재 공업 재건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수출주도형 공업화로 넘어갈 예정이었다는 가정은 근거가 지극히 박약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박정희의 경제개발계획,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장면, 그리고 이승만의 경제개발계획이 사회주의 국가의 그것을 노골적으로 베꼈다"(foog)라고 생각하게 되면 더 큰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중공업화[경제계획]는 근본적으로 국가 자체의 자기완결적 경제체제를 만드는 것이 목표"(길 잃은 어린 양)인 만큼 필연적으로 자급자족형 자립경제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랬다면 도대체 왜 수출주도로 방향을 튼단 말입니까?

따라서 어느 쪽이든지 간에 수입대체전략이 진행되고 있었다면 다른 명시적인 근거가 없는 한 그것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위 가설에서 보라색 점선 화살표)고 추론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기에 후대의 수출주도전략으로 연결될 만한 접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 원조의 점진적 감소(1958년부터)
* 미국과의 협의 하에 부흥부 「3개년 계획」의 준비 => 후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위한 연습
* 긴축정책을 통한 재정안정화와 인플레이션의 감소(1958~60년). 대신 생산이 침체됨

그러나 앞서 다룬 수입대체와 자립경제에 비하면 그 위상은 미미한 것입니다. 또한 균형성장전략, 원화의 과대평가와 복수환율제, 무력한 수출지원책도 수출주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5. 내용의 검토(2): 장면 정권기

이 점은 앞선 글의 4절과 5절에서 자세히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어떤 분은 제가 장면을 높게 평가한다고 하시던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홉 달 치고는 그럭저럭 잘했네"란 것이지, 진짜 대단히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 정권의 정책이 좋고 나쁘고를 따지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라 깊이있는 평가를 하기란 어렵습니다.

다만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자기정당화의 일환으로 이 정권을 부당히 공격한 면은 있습니다. 이 시기에 준비되던 정책을 이어받고는 자신의 공적으로 삼는다든가, 앞 시대를 과도하게 무능과 혼란의 시대로 규정(그래야 쿠데타의 명분이 서니까)한 측면은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일부 명예회복을 시켜준다 정도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정도가 온당한 시도가 아닌가 합니다.


6. 내용의 검토(3): 박정희 정권 초기

앞서도 한 번 언급했지만, 박정희 지지자들에게서는 "불세출의 지도자 박정희가 나타나 수출주도전략으로의 주요한 정책전환을 단호히 이루어냈다"는 명제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얼마나 믿을만한 것일까요?


1962년 1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시행할 때에는 혁명공약에서 표방한 바와 같이 자주경제 재건을 위해 ‘자립화정책’을 추구했다. 5·16군사정변 세력이 국회를 해산하고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유원식 최고위원(쿠데타 당시 대령, 1961년 8월10일 준장 진급)이 최고회의 의장 자문위원이던 민간 경제학자 박희범 서울대 상대 교수와 함께 ‘내포적 공업화 전략’을 마련했다. 이들 자력갱생파이자 ‘급진파’의 경제 살리기 방안은 ‘자립경제를 지향하는 자주적 공업화 전략’이었다.

박희범식 내포적 공업화 전략은 외향적이며 개방적인 수출지향적산업화전략과는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렇지만 자본이 부족했던 한국 정부가 이러한 내포적 산업화 발전 전략을 추진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며 기업가와 관료가 반대한 탓에 계속 추진하는 것이 불투명해졌다.

이완범, 한국경제 도약의 지렛대, 박정희의 수출 드라이브, 신동아, 2007년 2월

이처럼 군사정부는 우선 장면 정부의 「5개년계획」을 가져와 거의 그대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출범시키는 한편, 당시까지 시대의 대세(?)이자 상식이던 ‘자립화정책’을 추구합니다. 이대근도 1,2차 5개년계획은 사실 수출지향적이라기 보다 수입대체적인 성격으로 보아야 한다(『한국무역론』 3장)고 지적한 바 있는데,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1차 5개년계획」이 수출지향적이지 않았다는 또 다른 증거는 「1차 5개년계획」의 수출목표는 매우 낮아서 목표를 너무 쉽게 초과할 수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경제성장에 대한 수입대체와 수출확대의 기여도를 분석한 것을 보면, 수출확대의 우월성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세간에 나도는 족보와 실제는 반대였던 것이지요.
Krueger, Anne., "무역·외원과 경제발전", p.124


그렇다고 중화학공업부문으로 수입대체를 확대하는 정책도 국내시장의 협소와 그런 수입대체사업에 있어서의 방대한 자본소요를 감안할 때 실현가능성이 없었다. 여기에 더하여 당시의 미국 원조가 급속히 감축되어 갔기 때문에 국제수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외환을 벌어야 할 여건에 있었다. …

군사정부는 수출주도형 공업화를 위해서 처음에 환율을 단일화하기 위한 개혁을 시도하고, 또한 외환제도, 정부예산제도 및 조세제도 등의 개혁뿐만 아니라 통화개혁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시도는 처음부터 입안이 잘못되었거나, 또는 다른 정책과의 일관성결여로 인해서 실패 하거나, 오히려 유해한 결과를 초래한 경우도 있었다. 정부는 외국원조의 급감에 따르는 외환부족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 수출증대와 수입규제를 위한 적극적인 대책도 폈다. 그러나 당시의 수출진흥대책의 대부분은 1963년에 실시한 수출입링크제도를 포함해서 원화의 과대평가는 그대로 둔 채 수출에 미치는 그 부정적 효과를 상쇄시키고자 하는 임시방편적인 성격의 것에 불과했다. 수입규제도 1963년에 수출입링크제와 수량규제를 통해서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김광석, 같은 책, p.31

군사정부는 원조축소와 외환보유고 감소에 쫓기고 있었기에, 수입대체라는 족보에 교조적으로 매달릴 틈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일단 외화획득을 위한 수출증대를 위한 많은 개혁을 감행했지만 위에서 지적된 것처럼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습니다.
개혁이 한 시기나마 분명한 퇴행을 보인 경우도 있습니다. 61년 1,2월의 평가절하(장면정부)에 기반해 61년 6월에 환율단일화를 단행했는데, 63년 1월에는 이를 도로 이승만 정부 시절의 복수환율제로 돌아가 버립니다. 외환수급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전환기의 거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64년 5월에 재차 대규모 평가절하를 단행하고 나서, 65년 3월에 환율단일화를 다시 실행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특징은 군사정부가 열심히 하려는 노력은 보이는 것 같은데, 분명한 방향성이 없고 좌충우돌형 시행착오와 임시방편적 대책이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대신 어떤 원칙에 교조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시기의 정책은 한마디로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이 점이 "결코 중공업 우선노선의 뜻은 꺾지 않았"던 김일성(길 잃은 어린 양) 과의 분명한 차이점입니다. 박정희 자신도 정권 말기로 가면 점차 교조적으로 변하게 되지만, 적어도 이 시기에는 그러지 않습니다.

이 시기에는 여러가지 혼란에도 불구하고 수출 자체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순서대로 1)이승만 정권기에 오랫동안 수출이 비정상적으로 작아서, 2)환율문제가 개선되어서, 3)적극적인 수출지원책이 강화되어서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상황은 궁하기 짝이 없는데, 족보의 정답인 수입대체는 난항을 겪고 있고, 반면 기대를 적게 가졌던 수출이 생각보다 더 잘 늘어났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왜 정책전환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경험적으로 성적이 좋은 선수에게 점점 더 많은 배팅을 해 나간 결과가 수입대체에서 수출주도로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선 세 가지 인물 중심의 도식에 대한 대안으로 제가 제시하고 싶은 가설은 이렇습니다.

그림 4. 시행착오 후 정립 가설.
수출주도경제로의 전환은 박정희 집권기에 이루어진 것이나 이는 매우 혼란스러운 수 년 간의 시행착오 끝에 경험적으로 정립된 것이다.



7. 마무리지으며

박정희가 좀 더 뒤에 수출주도전략을 자신의 대표적 정책으로 내걸면서,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이 정책이 집권 직후부터 박정희 고유의 것이었던 듯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이 쿠데타의 정당화 명분이 될 수도 없습니다. 반면 이승만이나 장면 같은 그 앞의 지도자들이 수출주도전략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박정희가 그것을 물려받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그렇게 했던 것처럼 꿀꺽해서 신속히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시행착오가 많았던 이유는 물려받은 것 자체가 그다지 좋은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지적해야 할 점은 이 시기 박정희의 주요 성공 요인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단호함이 아니라 유연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의 박정희가 말기의 이승만 혹은 말기의 박정희, 또는 전 시기에 걸친 김일성처럼 경직된 인물이었다면 그도 실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by sonnet | 2008/08/04 14:57 | 정치 | 트랙백(3) | 핑백(2) | 덧글(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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