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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송유관
2010/07/13   중국의 징벌: 서서히 목 조르기 [69]
중국의 징벌: 서서히 목 조르기
중국이 북한을 달래려고 노력한 이야긴 많이 소개했으니까, 이번엔 반대로 징벌한 사례를 좀 소개해 보지요. 이와 비슷한 수법으로 2003년에도 중국은 북한으로 가는 송유관을 3일간 끊은 적이 있는데, 칼집만 보여주면서 왕년의 무자비한 솜씨를 은근히 과시하는 그런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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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에는 분명한 선이 있었다. 양국 지도자 사이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든지, 국제적으로 북한이 중국의 노선과는 배치되는 행동을 한다든지, 혹은 양국간의 합의를 어기고 멋대로 행동할 때에는 언제나 강력한 ‘제재’를 가했다.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북한은 미중 관계정상화를 ‘제국주의와의 타협’이라고 보았다. 중국은 북한의 친소화(親蘇化)를 비난했고, 나진과 청진의 소련권 편입을 염려했다. 내부적으로 중국과 북한 간에는 불화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 중국은 북한의 밑바닥 실무자들까지도 참을 수 없는 고통스런 압력을 가했다. 그 대표적인 압력수단은 중국이 북한에 제공하는 원유였다.[37]

중국은 1981년 1월부터 대북한 원유공급량을 10% 감축하겠다고 반년 전부터 통고했다.[38] 시작은 언제나 이렇게 했다. 북한이 내부에서 그 압력을 견디기 위해서 안간힘을 쓸 때쯤이면, 중국은 점차 그 강도를 높였다.

→북한은 1980년 6월부터 전국에 석유 5% 절약령(節約令)을 하달했다(1980.6.3)
→그런 다음 북한 내부에서는 다시 석유 10% 절약령을 발표(1981.1) 했고,
→그러자, 중국은 1981년 5월부터 대북한 석유공급 전량을 중단한다고 발표(1981.3.20)했다.
→중국은 북한의 원유공급 증가 요청을 거절(1981.5.7)하면서,[39]
→대북 원유수출 미납금 2억 5천만 스위스 프랑을 1983년 이후 6년에 걸쳐 상환할 것을 요구했고,
→대외적으로 북한의 원유도입에 따르는 대중국 외채가 5억 달러라고 발표(1981.10.22)해 버렸다.

일단 중국이 대북한 원유공급을 중단하고 나면 그 보복은 집요하고 끈질겼다. 북한이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이리저리 형편을 재면서 ‘못 견딜 지경’까지 끌고 갔다. 결국 김일성이 직접 나서거나 최소한 총리·부총리급이 북경으로 달려가서 협상을 해야 했다.[40] 그런 점에서 1981년 1월 10일 이종옥(李鍾玉) 총리의 북경방문도 사실은 석유문제 해결을 위해서였다.[41]

그러나 중국은 이종옥 총리와의 협상에서도 석유공급 가격을 국제가격으로 할 것과 결제화폐를 스위스 프랑으로 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 총리조차도 해결을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런 상황은 북한에 대한 중·소간의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릴수록 특히 심했다. 북한이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할 기미가 보이면, 중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제동을 걸었다. 1989년 5월 중·소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지고 중·소가 본격적으로 북한의 ‘어께 넘어’로 한반도 문제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때까지 북한은 중·소로부터 각기 다른 형태의 간섭과 압력을 쉬지 않고 받았다.

또 천안문 사건 이후, 미중관계가 악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중소관계가 긴밀해지자 북한은 전략적으로 일시에 ‘별 볼일 없는 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북한은 중·소 사이에서 어느 쪽도 거들떠보지 않는 완전한 ‘찬밥’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중국의 대북한 원유공급 중단사태는 1990년 12월에도 있었고,[42] 1993년 2월에도 있었다.[43] 그리고 김일성 사망 3개월 후인 1994년 10월에는 다시 공급량을 크게 늘려 공급을 재개하기도 했다.[44]

중국의 원유공급 중단 사례를 분석하면 표면적으로는 경화결제를 요구한다든지 누적된 미불금 때문이라고 그 중단원인을 발표하고 있지만, 그 이면의 진정한 이유는 대부분 정치적 불만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고 일종의 ‘북한 길들이기’와 같은 ‘징벌’의 의미가 있었다.

[37]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불만이 가장 노골적으로 표출된 경우는 황화(黃華)의 연설이었다. 황화는 북한 동해안 일대 소련의 군사기지 건설(나진항)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북한이 계속 소련세력을 끌어들인다면, 중국은 서슴지 않고 ‘남조선 카드’를 쓰겠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黃華, “1980년대 외교정세와 정책 및 금후의 임무 - 1980年代外交情勢政策及今後的任務”, 1980.1.25.
[38] 북경방송, 1981년 4월 11일 보도.
[39] 북경방송, 1981년 6월 25일 보도.
[40] 북경방송, 1981년 8월 28일, 허담 부총리 겸 외교부장의 북경방문도 경제 협력 요청이 주목적이라는 보도내용.
[41] 북경방송, 1981년 3월 26일. 이종옥 총리의 북경방문 목적도 석유 문제 해결에 있었다.
[42] 북한이 원유대금 결제를 미루고 있다는 이유로 중국이 석유수출 물량을 줄일 계획이라는 《일본경제신문》 1990.12.14일자 보도. 그 보도의 내용은, “중국은 매년 150만톤의 원유를 제공하고 그 대금으로 무연탄-시멘트를 수입하는 구상무역을 실시하고 있다. 중국은 원유가를 국제시세의 절반 값으로 공급하고 있으나 무연탄과 시멘트의 수출액이 원유대금에 미치지 못하고, 또 그 차액을 현금으로도 결재하지 못하는 것이 원유공급을 줄이게 된 배경”이라고 전했다.
[43] “중국 대북한 원유공급 올부터 절반 이상으로 줄여”, 《한국경제신문》 1993.2.23일자 보도. “그 동안 중국은 북한에 대해 해마다 구상무역으로 65만 톤, 외상형식으로 55만 톤 등 120만 톤의 원유를 공급해 왔으나 작년 11월 양국회담에서 중국 측이 구상무역 공급량에 한해 경화결제를 요구하여 회담이 사실상 결렬”되었음.
[44] 김일성 사망 3개월 후인 1994년 10월 중국은 다시 대북한 원유공급을 재개했다. 중국이 재개한 대북한 원유공급량 총 145만 톤 중 절반은 무상으로 또 나머지 절반은 국제가격의 반액으로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의 이런 조치는 김일성 사망 후 현재의 북한지도층을 적극 지지한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일본 쪽에서는 해석했다. 《아사히신문》서울발 보도, 1994.10.5, 《아사히신문》을 재인용한 《조선일보》의 보도. 1994.10.6.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서울: 나남, 2004. pp.48-51
by sonnet | 2010/07/13 15:10 | 정치 | 트랙백 | 핑백(1) | 덧글(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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