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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소련군
2008/12/03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 의료(잠정판) [88]
2006/11/21   러시아 시가전 전술의 변화: 그로즈니 전투의 여파 [15]
2006/11/21   시가전에서 러시아제 장갑차량의 취약성(재탕) [20]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 의료(잠정판)
지속할 수 없는 노력 (루스) 에서 트랙백

요즘 바빠서 글을 쓸 틈이 잘 나지 않는군요. 다음은 예전에 쓰다가 시간이 없어서 내버려 둔 것인데, 끝없이 내버려두게 되는 것 같아서 대충 번역된 부분만 정리해서 올리는 것입니다. 저는 의학이나 군 의무체제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번역이 이상할 수 있습니다. 오류가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언제든지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볼드체 강조는 번역자가 추가한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했던 소련 제40군의 의무지원에 대한 개괄로 글란츠 대령의 논평으로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0년간 [아프간 파병] 소련군에 복무한 사람은 총 64만 2천여 명인데, 아프간 전쟁에서 소련군의 사망자와 실종자는 1만 5천여 명이다. 이들의 사인은 각 가정에 구체적으로 통보되지도 않았다. 또한 469,68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최종적으로 각자 고향으로 복귀한 전체 병력의 73%에 육박하는 것이다. 더욱 경악할 만한 것은 질병을 앓은 환자의 숫자(415,932)로서, 이중 장티푸스(Typhoid Fever) 환자가 31,080명, 간염(Hepatitis) 환자가 115,308명이었다. 이 숫자는 단순히 많고 적음을 떠나서 소련군의 위생과 그들 병영생활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숫자는 현대적인 군대와 현대적인 약이 있는 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복귀한 병사와 소련 국민들 사회에 제기된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1)


이어서 소련군 자신의 평가입니다. 이 문건은 자체평가이기 때문에 상황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뒤의 (이 책을 번역했던) 미군의 논평은 이와 대조적으로 매우 신랄합니다.

의무지원: Yu. G. Avdeev 대령 (*2)

아프가니스탄에 진입함에 따라, 소련파견군 장병들의 건강과 생명은 커다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는 그들이 전투에 노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험준한 지형, 극단적인 기후, 위생상태, 역학 상황에 노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발 1,500-1,800m 이상의 고도에 병사들이 오래 노출됨에 따라 그들은 고산병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름에 주간 기온은 그늘에서도 45-50℃에 이르렀다가 밤이 되면 떨어졌다. 겨울에는 사람들이 덥고 건조한 곳에서 춥고 얼어붙는 곳을 오가야 했다.
이에 더해 인력과 물자를 이러한 지형에서 이동시키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도로망이 발달되지 않아 수송과 처리 능력을 제한했다. 계곡과 협곡은 떨어져 있어 서로 만나지 않았으며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도 없어, 의무지원인력과 장비가 이동하는 것을 심각하게 제한했다. 산과 골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긴 비탈을 따라 좁은 길이 굽이쳐 나 있는데, 이는 차륜형 의무수송차량이 시속 10-15km 이상으로 이동할 수 없게 만들었다. 험준한 지형, 햇볕에 말라비틀어진 대지의 단조로운 풍경, 엄청난 흙먼지, 낮 시간 동안 끊임없이 불어대는 (‘아프간’이란 별명의) 바람과 모래폭풍에 따른 제한된 시야는 의료지원, 그리고 종종 부상자 수색의 효율을 떨어뜨렸다. 이러한 지리나 고도의 요소들은 응급처치나 의료 후송에 타격을 주었고, 병사들의 눈과 폐를 해쳤다.
또한 독사가 대량으로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부단한 경계가 필요했고, 대대 의무반까지 해독제 공급을 보장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는 전반적인 전구 환경이 묘사되는데, 그 중에 아프간이란 나라 특성상 앰뷸런스를 사용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지적됩니다. 뒤에서 이 문제는 계속 다루어집니다.


이 나라의 위생수준과 역학적 상황은 심각했으며, 주민 전반에 걸쳐 심각한 의학적 문제의 만연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는 심각한 장 질환들, 티푸스, 파라티푸스, 바이러스성 간염, 결핵, 나병, 말라리아, 수두 등이 포함된다. 이는 소련 장병들의 건강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이 야전에서 생활하거나 신체 저항력이 약화되었을 때 특히 그랬다.
한 지역에 병력을 집중시키게 되자 전염병이 크게 창궐했다. 1986년 가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 준비를 하던 첫 번째 소련군 6개 연대가 이 나라 각지에서 철수해 임시로 한 곳에 집결하였다. 그러자 바이러스성 간염이 창궐해 6개 연대 전체를 휩쓸었다. 환자의 수가 폭증했고, 결과적으로 전염병 격리병동으로 쓰이던 의료시설에 평소의 서너 배의 부하가 걸렸다. 심지어는 전문 야전병원(신경과, 안과, 이비인후과)들도 전염병 담당으로 변경되었다. 오직 외과, 마취과, 집중치료병동만이 이런 업무변경을 피할 수 있었다.

글란츠 대령이 지적한 것처럼 전염병 문제가 지독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런 데서 미군과 소련군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할까요. 아프간에 가서 미군도 꽤나 고생을 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런 꼴은 보이고 있지 않지요.


의무지원은 아프가니스탄의 열악한 의료체제로 인해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의료 인력의 심각한 부족, 낮은 전문 훈련 수준, 불충분한 의약품과 의료시설이 의무지원을 방해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카불의 아프간 중앙병원에서 2~3개월 간 소련군 위생병과 동등한 수준의 훈련을 받은 아프간인은 장교로 임관해 의료행위를 할 수 있다. 이 나라의 개업의들에는 수의사로 훈련받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파라 주에 있는 신단드 병원의 원장은 수의사로 훈련받은 고참 대위였다. 따라서 소련 의무병과, 특히 독립 의무대대와 야전병원의 전문가들은 현지 의료 시설에 의약품, 소련제 물자, 도구를 제공하는 한편, 실습 서비스, 기술적 지원, 심전도, X레이 검사 등을 제공하고 현지 주민들에게 자문과 도움을 주어야 했다.
아프간 최고사령부의 간청에 따라 아프간 군 인력과 그 가족들은 군 야전병원과 제40군의 독립 의무대대들에서 검사와 치료를 받았다. 할 일의 범위와 양은 늘어만 가는 상황에서, 이는 소련파견군의 의무병과에 추가적인 부담을 지웠다. 이 또한 진료의 질을 떨어뜨렸다.

현지 의료수준이 지독히도 나빴기 때문에, 소련군은 현지 의료시설을 활용할 수 있기는 커녕, 자신들의 부족한 자원을 현지 동맹군들에게 나눠 줘야 할 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소련이 서유럽을 쳐들어갈 경우 기대하던 것과는 천양지차였지요.


사단 의무대대와 다목적 군 야전병원이 병자와 부상자들에게 수준 높은 군 의학을 제공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이들은 주요 병력 집결지에 배치되는 한편, 전문치료시설들은 카불에 집중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도합 일곱 군데의 주요 의료시설이 있었다. 우선 카불에는 400침상 규모의 군 병원과 500침상 규모의 전염병 군 병원이 있었다. 이는 둘 다 중앙병원이라고 불리었으며 전문적인 치료를 제공하도록 지정되어 있었다. 이들 시설은 인공 신장을 갖춘 혈액 투석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 심각하게 아픈 환자들은 An-26M "Savior" 고정익 프로펠러 경항공기와 Mi-8MB "Bisector" 의료 후송 헬리콥터를 이용해 아프가니스탄 각지로부터 이들 중앙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또한 카불에는 군 병원 한 곳과 군 구강학(stomatology) 병원 한 곳이 있었으며, 수혈센터(이들은 또한 신단드의 군 다목적 야전병원에 분소를 가지고 있었음), 병리학/해부학 실험실, 법의학 실험실도 있었다. 카불은 소련군 전사자들을 장례지내기 위해 고국으로 후송하는 (“검은 튤립”이라는 별칭을 가진) An-12 항공기가 출발하는 장소기도 했다. 카불에는 위생과 전염병 통제를 실시하고 의료 정찰을 수행하는 위생-전염병 통제 분견대도 있었다. 그리고 약품과 의료 보급품을 담당하는 의무보급창과 병원과 치료시설들을 지원하는 중앙 약제국이 있었다.

두 번째로 큰 의료시설 집결지는 파라 주의 신단드에 있었는데, 이곳은 시멘트 활주로를 갖춘 잘 만들어진 비행장에 붙어 있었다. 덕분에 전력의 재보급을 방해받지 않았으며, 병자와 부상병들을 카불이나 소련의 병원으로 후송할 수 있었다. 신단드에는 350침상 규모의 군 다목적 병원이 있었다. 독립 의무대대 하나와 위생-전염병 분견대(SEO), 약국, 이동 구강학 수술팀이 신단드에 주재하고 있었다.

칸다하르에는 의무 중대 하나가 소련군 여단을 지원하기 위해 175침상 규모의 군 종합병원을 운영하였다.

쿤두즈 주의 의무지원은 180침상 규모의 전염병 군 야전병원에 기반하고 있었다. 독립 의무대대 하나가 주둔지의 환자들을 위한 치료를 제공했다. 또한 쿤두즈에는 이동 구강학 수술팀, 이동 X선 반, 위생-전염병 분견대가 각각 하나씩 있었다.

풀이쿰리에는 200침상 규모의 군 종합 야전병원과 의약품 저장소가 있었다.

바그람에는 400침상 규모의 군 전염병 야전병원과 독립 의무대대가 있었다. 이곳에는 또한 전염병이 유행할 경우 1,000침상을 수용할 수 있는 회복 센터도 있었다. 이곳은 카불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의료시설이었다.

잘랄라바드에는 200침상 규모의 군 전염병 야전병원이 있었는데, 독립 차량화소총여단의 의무중대에 의해 운영되었다.

약 10만명 정도의 주둔군 규모에 비춰 볼 때 이 규모가 적정한지 저는 전문지식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실제 운용실태를 모른다면, 단순히 병상수만으로 야전병원을 평가하는 것은 한계가 있겠지요. 게다가 양적 기준 달성에 특히 예민한 소련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어쨌든 전반적으로 전염병 관련 시설의 비중이 높다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의무부대들은 군급 제대의 정규 편제보다 상당히 많은데 실전 투입에 따라, 상당수가 추가로 배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조국전쟁 때와 비교하면 병사를 후송하는데 걸린 시간은 짧아졌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2차대전 중에는 61.7%의 부상병이 부상당한 후 6시간 이내에 사단 진료소(DMP)나 이동야전외과병원(KhPPG)까지 후송될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90%의 부상병이 그 시간 이내에 후송되었다. 부상당한 후 후송되는데 24시간이 넘게 걸린 부상병은 단 2%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보통 전투 상황의 어려움에 따른 것이었다.

동무들은 대조국전쟁때보다 훨씬 좋은 서비스를 받고 있소!


의무병들은 부상자를 운반하고 모으기 위해 표준 의무 들것을 사용하였다. 환자와 부상자들은 BTR, BMP 또는 LUAZ-967 차륜형 야전 앰뷸런스를 이용해 전장으로부터 후송되었다.
환자나 부상자의 장거리 수송을 위해서는 UAZ-452A 혹은 AS-66 앰뷸런스가 이용되었다. 아울러 격오지의 중상자는 의무대에 있는 8기의 특별 장비된 Mi-8 "Bi-Sector" 의무후송 헬리콥터 중 하나를 사용해 긴급 후송 비행으로 이동시킬 수도 있었다.
그리고 비행 중 기내에서 외과수술과 집중치료를 제공하면서 환자와 부상병을 수송할 수 있는 An-26M "Savior" 고정익 의무 후송 항공기도 있다. “구세주”의 승무원에는 의사, 마취과 의사, 간호원, 마취과 간호사가 포함되어 있다.
[…]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의견은 항공기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환자와 부상자를 후송하는데 더 효율적인 수단이라는 것이다. 특별 장비된 Mi-8 "Bi-Sector" 헬리콥터 외에도, 화력지원과 수색 구조 헬리콥터도 의무후송을 수행했다. 그리고 응급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모든 비행에 연대 의사 한 명을 동승시키는 것을 규정으로 하였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이유로 앰뷸런스의 가치가 낮았고, 제40군이 보유한 의무헬기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프간의 소련군은 가능한 모든 헬기를 이 임무에 활용하게 됩니다.


의무지원은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의 삶과 작전적, 전술적 성취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의 노력의 목표는 군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동시에 분쟁 전 기간에 걸쳐 여러 문제들은 결코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주로 여러 가지 질병을 예방하는 것과 병사들에게 빠르고 수준 높은 응급처치를 제공하는 것과 관련된 일들이었다.
이와 같이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의 메인터넌스와 후방지원은 엄격하고 광범위한 시험을 통과하였다. 다양한 분야에서 그들은 최고 수준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성공과 아울러 결점도 있었다. 이러한 결점들은 군의 일상생활과 전투행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결점의 대부분은 메인터넌스와 후방 지역 지원 업무의 물질적-기술적 기반이 취약했고 인력 훈련의 수준이 불충분함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향후 진지한 조사와 대책이 요구된다.

이 글의 결론인데, 뭔가 좀 두리뭉실한 내용(우리는 열심히 했다. 그러나 문제도 있었다)이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미군 측의 강평으로 보충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 논평: 중병은 이 장에서 묘사된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전 소련 병사 중 67.09%가 중병으로 입원하였다. 바이러스성 간염, 콜레라, 이질, 아메바증, 티푸스, 파라티푸스, 기타 수인성 질병들이 제40군 장병들을 휩쓸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병사 중 2.33%가 전사했고, 8.67%가 부상을 당한 적이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제40군에게 있어 질병은 전투보다도 훨씬 더 큰 문제임이 분명했다.
전쟁 초기 몇 년 동안 대부분의 부상은 총탄에 의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자헤딘은 박격포와 지뢰를 손에 넣게 되었고, 파편상을 입는 소련 부상병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소련의 의료지원 절차가 개선됨에 따라, 목숨을 건지는 소련군 중상자들이 점차 늘어났다. 주요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헬리콥터 후송과 특별수술팀을 준비시키고 이들을 최대한 전방으로 진출시키는 것이 중상으로 인한 사망자를 줄이는데 특히 효과적이었다.
소련군의 의무지원은 아프간 전 지역에 걸쳐 잘 분포되어 있어서, 소련 병사들은 필요할 때, 의사의 도움을 가까이서 받을 수 있었다. 소련 부상병들은 연대 의무실까지 앰뷸런스로 후송되도록 되어 있었다. 특별히 준비된 소수의 의료 후송 헬리콥터가 치명상을 입은 환자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게릴라전의 본질상 앰뷸런스를 타고 간다는 것은 기습공격을 당하고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별 후송 헬리콥터건 더 흔한 돌아가는 수송 혹은 보급 헬리콥터에 실어서건 간에, 점점 더 많은 부상병들이 헬리콥터로 후송되게 되었다. 의료진은 이런 일반 헬리콥터에 자주 동승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서 헬리콥터가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날아가는 동안 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다.



출처
1. Glantz, David M., "Introduction," in Grau, Lester W.(ed,), The Bear Went Over the Mountain: Soviet Combat Tactics in Afganistan, Washington:National Defense Univ. Press, 1996, xiv.
(허남성, 임석훈 역, 『산맥을 넘은 불곰: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군 전투전술』, 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 2003, xv-xvi)

2. Grau, Lester W. and Gress, Michael A.(eds,), The Soviet Afghan War: How a Superpower Fought and Lost, University Press of Kansas, 2002, pp.295-303
by sonnet | 2008/12/03 10:42 | 정치 | 트랙백(1) | 핑백(2) | 덧글(88)
러시아 시가전 전술의 변화: 그로즈니 전투의 여파
시가전에서 러시아제 장갑차량의 취약성(재탕)에서 부연을 위해 트랙백
앞선 글과 마찬가지로 포트 레이번워스 소재 미국 해외군사연구국(FMSO)의 러시아군 전문가 래스터 그라우 중령(ret.)의 글입니다.

러시아 시가전 전술의 변화: 그로즈니 전투의 여파
* 필자: Lester W. Grau (Foreign Military Studies Office, Fort Leavenworth)
* 출처: INSS Strategic Forum, number 38, July 1995

도시에서의 전투는 어떤 군대에게도 쉬운 선택이 아니며 병참과 가용인력에 대한 과도한 요구를 발생시킨다. 소련 시가전 전술은 외국 영토에서 수행되는 대규모의 고속공세작전을 보완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방어되지 않는 적 도시는 행군하여 탈취하고, 방어되는 적 도시는 우회할 계획이었다. 적은 자기네 도시를 파괴하는데 동참할 의사가 없는 외국의 정규군이므로, 도시가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보느니 무방비 도시로 선언하는 것을 선호할 터였다.
시가전에 대한 소련군의 이러한 가정은 오늘날의 정치 군사적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도시가 파괴되면 그들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는 비정규군이 구소련의 영역 안에서 러시아군에 맞서 싸우고 있다.
최근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서 벌어진 전투는 러시아 시가전 전술을 고쳐 쓰도록 만들었다. 러시아군의 첫 공격은 대재앙으로 끝났지만, 러시아군은 자신을 추스른 끝에 결국 그 도시를 탈취하였다. 그 이래, 러시아군은 느리게나마 효율을 개선하고, 군을 재교육하며, 전투를 종결짓는데 집중해왔다. 많은 것이 잘못된 이래, 러시아인들은 그 전투의 교훈을 연구하고 자신들의 시가전 전술을 갱신하는 중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과는 달리, 러시아 언론은 이 전투의 진행에 대한 많은 소식을 보도하였다. 저자는 이들 기사와 참전병사와 기자들과의 대화도 참고하였으나, 이 글은 주로 Aleksandr Frolov, "Soldaty na peredovoy i polkovodtsy v Mozdoke"(전선의 병사와 모즈도크의 지휘관들), Izvestia(뉴스), 1995년 1월 11일, 4면; A. Kavashin, (심각한 시련을 겪은 끝에 부대는 성숙한 전투능력을 획득), Krasnaya zvezda(붉은 별), 1995년 3월 2일, 3면; Sergey Leonenko, "Ovladenie gorodom"(도시 탈취), Armeyskiy sbornik(육군 다이제스트), 1995년 3월, 31-35쪽 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처음에 무엇이 잘못되었던가?

러시아 육군은 돈도 없고 지원도 거의 받지 못했다. 육군은 연대 혹은 사단 급 야전훈련을 2년 이상 하지 못했으며, 대부분의 대대들은 야전훈련을 1년에 한 번 하면 다행이었다. 대부분의 대대들은 병력이 정원의 55% 이하였다.
러시아 청년의 약 85%가 징집을 연기하거나 면제받았기 때문에, 육군은 범죄기록, 건강 장애, 정신적 무능력 등의 문제를 가진 징집병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육군은 장교용 관사도 부족하고, 병사들을 적절히 먹이고 월급을 주는데 어려움을 겪어 왔다. 러시아 군은 적절한 지원 기지도 없이 온갖 어중이떠중이 부대를 긁어모아 체첸을 침공하였다. 체첸인들이 자기 땅을 지켜내자, 러시아군이 처한 현실이 온 세상에 알려졌다.

러시아가 침공하기 전에, 체첸 현 정부에 대항하는 체첸 반군은 러시아군에 의해 훈련, 보급, 지원을 받았다. (85명의 러시아 병사를 포함한) 5,000명의 체첸 병력과 170대의 러시아 전차가 프라하나 카불에서 했던 식으로 돌진하여 그로즈니를 탈취함으로서 체첸 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실패했고 시가전에서 67대의 전차를 잃었다.
기습 기회를 되찾기 위해 재편성하며 기다리는 대신, 러시아군은 체첸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러시아군에는 완편 사단이 없었기 때문에, 소부대들을 규합해 합성 부대를 만들어 싸우러 보냈다. 보병전투차량에는 승무원은 있어도 승차보병이 부족하거나 없었고, 몇몇 경우에는 병사들이 없어서 장교가 운전을 하기도 했다.
그로즈니 시의 상황에 대한 첩보도 결여되어 있었다. 대축척 지도는 단 몇 장밖에 가용하지 않았으며, 전술지휘관을 위한 지도는 아예 없었다. 도시는 포위 봉쇄되지 않았고, 체첸 정부는 전투 중에도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1994년 섣달 그믐날에) 러시아군이 처음으로 그로즈니를 포위하려고 시도했을 때, 그들은 충분한 지원 보병 없이 전차와 보병수송차만 갖고 그렇게 하려고 하였다.
가용했던 보병은 한 덩어리로 투입되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동료 병사들의 성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들은 경찰 작전의 일부로 투입된다는 지시를 받았으며 몇몇은 무기도 없었다. 많은 병사들은 그로즈니로 달려가는 종대의 보병수송차 안에서 잠을 잤다. 전차병들에게는 기관총탄이 지급되지 않았다.
이 돌격의 엉성한 준비상황은 그달 초에 1개 공수연대로 두 시간이면 그로즈니를 접수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국방장관 파벨 그라체프 장군의 오만함을 반영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행군으로 시 중심부를 장악하고 정부권력을 접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그로즈니로 돌진해 들어갔다. 이는 적이 미약하고, 방어를 준비할 시간이 없으며, 완전한 기습을 달성할 수 있을 때만 사용되었던 소련/러시아의 기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하나도 만족되지 못했다.

시가지에서 선행한 하차 보병의 엄호가 없는 전차와 보병수송차는 측면이나 상부를 향해 사격하는 대전차 사수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첫 러시아 장갑차량 종대는 시가로 밀려들어갔다가 그대로 체첸 사수들에게 박살이 났다. 결국 러시아군은 120대 중 105대의 전차와 보병수송차를 잃고, 한 집 한 집 소탕해 나가는 긴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퇴각하였다.


시가전 계획

러시아군 정보부는 체첸측이 그로즈니에 견고한 방어를 신속히 구축했다는 사실을 놓쳤다. 체첸군은 병렬적으로 진격하지만 상호지원하지 못하는 축인 러시아군 종대들을 절단하여 격파하였다.
이제 러시아군은 도시를 장악하기 위해 승차한 채로 신속히 돌격하는 전술은 이제 낡았으며, 현대적인 시가전은 신중한 점령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첫째, 상세한 정찰을 수행하는 동안, 도시는 반드시 모든 접근로를 차단하여 봉쇄해야 한다.
둘째, 도시 외곽의 핵심 시설과 건물은 준비 포격과 돌격 지점의 점령을 수반해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셋째, 도시의 주거, 산업, 중심 지역은 반드시 성공적으로 장악해야 한다.
넷째, 함정에 빠진 적 부대는 반드시 격멸해야 하며, 지뢰 제거, 무기 회수, 군사통제와 통행금지가 실시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국민이 사는 우리 도시에서 싸울 때는, 외국 영토에서 싸울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부수적 피해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전장 첩보수집

러시아군은 1:50,000과 1:100,000 지도 위에 초기 계획을 작성했다. 그들에게는 1:25,000이나 1:12,500 같은 필수적이고 상세한 대축척 지도가 없었다. 항공사진과 현황첩보도 작전계획을 세우는데 필수적이었으나, 러시아 위성은 돈을 아끼느라 꺼진 상태였으며, 항공정찰도 거의 실시되지 못했다. 하급지휘관들도 항공사진과 대축척 지도가 필요했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첩보 상황은 매우 불명확했으나 작전입안자들은 체첸인들이 도시를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를 예측하거나 기초적인 대응책을 취하는데 실패했다.
러시아군 종대가 그로즈니를 향해 접근함에 따라, 그들은 저격병이나 도로차단물 같은 도시를 사수하겠다는 체첸 측의 결의를 시사하는 징후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본격적인 전투를 준비하는데 실패하였다.
이제, 계획대로 러시아군은 도시로 진입하는 축선을 엄호하는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대형 산업시설들을 첫 번째 목표로 결정했다. 콘크리트와 석조 벽체, 지하실과 지하통로들을 가진 그러한 공장들은 길고 완강한 방어를 위해 이상적이었다.
도시 안에 들어서면 러시아군은 하차보병이 빌딩의 모든 층을 점령할 동안 모퉁이 빌딩이나 부서진 벽 뒤나 건물 모퉁이에 전차와 직사포가 배치된 것을 발견하리라고 예상했다. 저격병과 포병관측장교들은 일반적으로 고층 빌딩, 지붕, 탑 등에 배치되었다.


습격조와 습격대

소련/러시아의 전술은 시가전을 위해 습격조(storm group)와 습격대(storm detachment)를 편성하도록 되어 있었다.
습격조는 일반적으로 전차 소대, 포병 포대, 박격포 소대, AGS-17 자동유탄발사기 소대, 공병 소대와 화학대로 보강한 차량화소총중대였다. 이 부대는 엄호정리조(대전차포, 유탄발사기와 82mm 박격포로 강화된 차량화소총소대)와 장애물처리반(전투공병과 지뢰제거전차)과 함께 전진했다.
습격대(storm detachment)는 일반적으로 최소한 포병 1개 대대, 전차 1개 중대, 공병 1개 중대, 대공 1개 소대와 화염방사분대, 연막발생기반으로 강화된 차량화소총대대였다. 아울러 추가적인 포병과 항공지원이 사단 자산으로부터 가용하였다.
섣달 그믐날의 패배 후에 시가전을 위해 습격조와 습격대가 편성되었지만, 경험은 이들의 대형이 종종 반생산적이었음을 보여준다. 특별부대의 편성은 소대, 중대, 대대에 존재하던 부대의 일체성을 파괴했으며, 지휘관에게 적절히 배치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자산을 부여하였다.
편제상의 전술제대를 사용하고 필요한 곳에만 선택된 무기 체제를 보강하는 것이 더 나았다. 예를 들어, 차량화소총소대로는 습격분대와 엄호지원분대를 배치할 수 있고 차량화소총중대로는 습격소대와 엄호지원소대를 배치할 수 있다. 습격부대가 공격하기 위해 이동하는 동안, 원호지원 부대는 화력으로 적을 고착시킨다. 공격 후에는 원호지원부대는 예비병력이 된다.

러시아군은 돌격 중 아군오사를 방지하기 위해, 부대원들이 뚜렷이 식별되는 (그리고 쉽게 변경할 수 있는) 표식을 착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들은 건물을 탈취하기 위해 연막 사이로 공격하는 동안 체첸군을 고착시키기 위해 직사 포병, RPG, 자동유탄발사기와 기관총 화력을 사용했다. 그들은 돌입하기 전에 문과 창문으로 수류탄을 까넣었다. 공병은 벽을 날려 진입로를 만들었다. 2-3인으로 구성된 전투팀이 각 방을 소탕했다.
일단 건물을 탈취하면, 건물에 방어준비를 한 후 방어하였다. 하수도를 통한 접근로에는 지뢰가 매설되었고 적이 사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접근로를 따라 지뢰와 부비트랩이 설치되었다.

도시 전투는 중단 없이 계속되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새 부대와 적절한 예비병력이 필요하였다. 소련군은 시가전에서 4:1의 병력 우세를 원했었다. 그로즈니 전투에는 약 6만명의 러시아군과 1만2천명의 체첸군이 참전했는데, 러시아군은 점령한 모든 건물에 수비 병력을 배치해야 했기 때문에 러시아 측의 5:1 우세조차 때때로 충분치 못하였다.


전술, 전기와 절차

소련/러시아 전술은 시가전에서 전차가 돌격을 선도하고, 보병전투차와 하차보병이 그 뒤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전차 종대는 기본적으로 시가 도로를 따라 헤링본(herringbone) 대형으로 이동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전술은 러시아 전차포의 부앙각 제한 때문에 다층건물의 상층부나 지하실에 위치한 표적들과 교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갑차량을 위협하는 대전차 병기가 빽빽하게 깔린 그로즈니에서 싸우기에는 전적으로 부적절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ZSU23-4나 2S6같은 대공포는 그러한 표적들에게 유효하였다.
공격 헬리콥터도 건물 상층부에 위치한 병기와 저격병들에게 사용되었다. 헬리콥터는 탈취한 고층건물 뒤에 숨었다가 ‘뛰쳐나와’ 이들 표적과 교전했다.
그로즈니에서 전차와 병력수송차는 기갑반(bronegruppa)을 구성해 탈취한 지역을 봉쇄하고 역습전력으로 이용되며 후방시설을 방호하고 적의 대전차화기의 사정거리 밖에서 전진하는 보병을 지원하는데 사용되었다.

러시아군은 아군의 전차와 보병수송차량을 방호하는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들을 보병 뒤에 위치시키고 장갑판에서 25~30cm 떨어트려 철망으로 일종의 우리를 쳤다. 이들 우리는 RPG-7 대전차 유탄발사기의 성형작약탄두를 막을 수 있었다.
체첸측은 상부 및 측후면에다 RPG-7 대전차로켓의 일제사격을 퍼부어 장갑차량을 격파하기 위해 차량 엔진 소음이 들리는 쪽으로 대전차 헌터-킬러 팀들을 전개하였다. 러시아군은 이들 대전차특공조에 대항해 사방 모든 접근로에 병력를 매복시키고 나서 미끼로 장갑차량을 미끼로 준비된 장소로 보내는 수법을 익혔다.

그로즈니에서의 시가전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은 양의 수류탄, 연막수류탄, 폭발물과 (미국의 LAW와 유사한) 1회용 대전차유탄발사기를 필요로 하였다. 보병 개개인에게는 건물에 진입하기 위한 갈고리달린 로프가 필요했다. 돌격하는 보병에게는 경량 사다리 또한 극히 유용했다. 훈련된 저격병은 핵심적인 존재였으나 공급이 부족했다.

전차에 탑재 혹은 탈거된 서치라이트는 도시에서의 야간돌격에 매우 유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탐조등(과 조명탄)은 일시적으로 적의 야시장비를 무력화하고 적 사수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이들은 돌격 중 아군오사를 줄이는 한편, 적에 대한 심리적 공격 효과를 만들어냈다.


포병

러시아군은 통상적인 포병 사격은 도시로 접근하는 동안, 그리고 도시 외곽을 점령하는 동안 사용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나면 러시아군은 대부분의 자주포를 전차와 보병에 대한 직사화력지원에 투입했다. 대량의 포병사격이 부대가 통과해 전진하려는 바로 그 지역을 폐허로 만들기 때문에 직접사격이 바람직했다. 직접사격은 포, 곡사포, 다연장로켓발사기, 82mm Vasilek 자동박격포에 의해 수행될 수 있었다. 러시아군이 그로즈니에 도착했을 때, 그들에게는 화력지원조정관과 전방항공통제관이 거의 없었다. 차량화소총부대 장교들은 간접포병사격을 수정하는데 숙달되어 있지 않았지만, 직사화력을 조준하고 수정하는 것은 금방 해낼 수 있었다.


공군력

러시아군은 다수의 고정익 항공기를 운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로즈니에서 제한된 전술적 가치만을 가졌다. 그들은 포병이 사거리 내로 이동하는 동안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들은 정밀공격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전폭기들의 공격은 커다란 “무차별 사격” 지대에 집중되었다. 고정익 항공기는 도시 밖의 표적을 공격할 때 더 큰 가치를 제공하였다. 공격 헬리콥터는 훨씬 큰 가치가 있었으나 점령된 건물을 방호벽으로 삼아 교전지역 사이를 날아다녀야 했다.


연막과 최루 가스

연막과 백린탄은 그로즈니에서 극히 유용하였다. 폭발 후 불타는 백린탄은 연막 차장을 만드는데, 시가전에서의 이동에는 연막이 필수 불가결했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사격한 포탄 혹은 박격포탄 네다섯 발에 한 발이 연막이나 백린소이탄이었다. 러시아군은 백린 연막이 유독하며 방독면을 간단히 통과한다는 부수적 이점도 깨닫게 되었다. 백린탄은 어떠한 조약에도 금지되어 있지 않다. 최루 수류탄 또한 그로즈니 전투에서 극히 유용하였다.


결론

그로즈니 시가전의 실상은 소련군이 계획했던 시가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지형, 상황, 적이 모두 달랐다. 그로즈니는 우회할 수가 없었다. 러시아군은 그로즈니를 구하기 위해서 그 도시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에 직면하였다. 러시아군은 또한 136년 전에 체첸을 굴복시키기 위해 싸웠을 때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문제에 봉착했다. 체첸인들은 도시, 마을, 촌락 하나하나를 요새로 탈바꿈시켜 러시아군 종대에 심각한 사상자를 야기했다.
두 경우 모두, 러시아군은 초반에 서투른 모습을 보였지만 적응하였고, 결국에는 시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최근 전훈은 러시아군 시가전 전술에 통합되었다.
by sonnet | 2006/11/21 21:49 | 정치 | 트랙백 | 덧글(15)
시가전에서 러시아제 장갑차량의 취약성(재탕)
시가전에서 러시아제 장갑차량의 취약성: 체첸의 경험

필자: Lester W. Grau (Foreign Military Studies Office, Fort Leavenworth)
출처: Red Thrust Star 1997년 1월

1994년 12월, 러시아군은 연방에서 이탈한 체첸 공화국을 침공, 그대로 진격하여 체첸 수도 그로즈니를 포위하려고 시도했다. 이 시도가 실패한 후, 러시아군은 최종적으로 이 도시를 점령할 때까지 신중히 한 집 한 집 소탕을 했다.[1] 의기소침한 러시아 징집병력은 더 원숙하고 열성적인 체첸군에게 호되게 경을 치렀고 전쟁은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분쟁의 첫 달 동안 러시아군은 수리 불가능한 전투손실로 225대의 장갑차량을 잃었다. 이것은 전역에 초기 투입된 장갑차량의 10.23%에 달한다.

러시아인들은 이들 225량의 차체를 Kubinka 시험장으로 후송하여 분석하였다. 1995년 2월 20일, 기갑국 국장인 A. Galkin 소장은 이 조사결과를 발표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국방장관도 회의에 참석했다.[2] 회의 결과는 러시아 국방장관으로 하여금 가스 터빈 엔진을 장비한 전차의 취득을 중단하게 만들었다.[3]

아울러 이 분석은 체첸 대전차 전술과 시가전에서 러시아 장갑 차량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체첸 대전차 전술

체첸군은 소련과 러시아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고, 대부분의 체첸 병사들은 소련군에서 복무하였다. 15-20명으로 구성되는 체첸 하급 전투그룹은 다시 3-4명 1조로 이루어진 전투세포로 나뉜다. 이들 세포들은 대전차사수 1명(보통 RPG-7이나 RPG-18 견착 대전차로켓으로 무장), 기관총 사수 1명, 그리고 저격수 1명으로 구성된다.[4] 추가적인 인원은 탄약을 운반하거나 보조 사수 역할을 한다. 체첸 전투그룹은 이들 세포를 대전차 헌터-킬러 팀들로 배치했다. 대전차사수가 장갑 표적과 교전하는 동안, 저격병과 기관총 사수는 지원 보병을 고착시킨다. 팀들은 지하, 1층, 2층, 3층에 배치된다. 일반적으로 다섯이나 여섯 헌터-킬러 팀이 동시에 한대의 장갑차량을 공격한다. 치명타는 일반적으로 차량 상부, 후면과 측면에 대해 이루어졌다. 또한 체첸인들은 화염병을 차량 상부에 투척했다.[5] 체첸 헌터-킬러 팀은 시가지 도로상의 차량 종대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시도하였다. 대열 선두와 후미의 차량을 파괴함으로서 종대를 함정에 빠뜨리면, 전멸로 연결시킬 수 있다.

러시아 전차 주포는 지하실과, 2, 3층에 자리 잡은 헌터-킬러 팀에 대처하기에는 앙각과 부각이 부족했고, 대여섯 팀으로부터의 동시공격은 탱크 기총의 유효성을 무력화하였다. 러시아군은 장갑차량 종대에 ZSU 23-4와 2S6 트럭 탑재 대공포를 붙여, 상대하기 곤란한 이들 헌터-킬러 팀들에 대응하였다.[6]

초기 러시아군 차량 손실은 부적절한 전술, 적군의 과소평가, 전투태세의 미비가 겹친 데 따른 것이었다. 러시아군은 그로즈니를 포위하여 증원군을 차단하지 않은 채로 그로즈니로 돌입했다. 그들은 하차하지 않은 채 행군하여 들어가 도시를 탈취할 생각이었다. 병력 부족 때문에 러시아군 종대 들은 혼성 부대로 구성되었고 대부분의 병력수송차는 거의 하차하지 않은 채로 이동했다. 이들 최초의 종대들은 학살당했다.

러시아군이 재편성됨에 따라 그들은 더 많은 보병을 데려왔고, 한 집 한 집, 그리고 이 블록에서 다음 블록으로 도시를 통과해 체계적인 진격을 시작했다. 러시아군이 전술을 변경하자 장갑 차량의 손실도 감소했다. 러시아 보병이 선도해 이동하고 장갑 전투 차량은 지원이나 예비가 되었다. 몇몇 러시아 차량은 몰로토프 칵테일이나 폭탄 뭉치로부터 차량을 보호하는 한편 대전차유탄발사기의 성형작약을 막아내기 위해, 동체장갑으로부터 25-30센티미터 떨어뜨려 철망 울타리를 둘러쳤다. 러시아군은 선택된 지역의 접근로 상에 매복한 후, 체첸 헌터-킬러 팀들을 격파하기 위한 미끼로서 차량들을 돌입시키기 시작했다.[7]


러시아 장갑차량의 취약점들

견착 대전차무기와 대전차유탄이 막대한 양의 장갑차량을 주저앉혔고, 격파된 차량 각각은 평균 세 발에서 여섯 발의 치명타를 맞았다.[8] 체첸 대전차사수는 연료탱크와 엔진을 노리는 것을 선호했다. 다음 그림의 회색 부분들은 90%의 치명타가 일어난 지점을 나타낸다.

BMD-1은 공수부대에 배치된 병력 수송차이다. 따라서 이 차량은 장갑이 얇다. 이 차량은 정면, 후면 측면과 상면이 취약하다. 포탑의 정면은 보강되었기 때문에 괜찮지만, 포탑의 뒤편은 취약하다.

다음은 보다 두꺼운 장갑을 가진 BMP-2 보병전투차이다. 여하튼 이 차량의 상면 장갑은 약하고, 뒷문 안에 있는 연료탱크와 조종수 구역이 취약하다.

BTR-70 장륜 장갑병력수송차는 BMD나 BMP와 동일한 취약점들을 여럿 보여준다.


체첸에서의 전투 첫 달에 62대의 전차가 파괴되었다. 98% 이상(약 61대의 차량)은 반응장갑으로 보호되지 않는 구역에 명중한 탄에 의해 격파되었다. 러시아군은 체첸에 T-72와 T-80 전차를 배치하였다. 전면은 장갑이 두껍고 반응장갑으로 덮여있기 때문에, 이들은 둘 다 전면 피탄에 대해 취약하지 않았다. 치명타는 반응장갑이 없는 지점들 -측면과 후면 그리고 상면, 조종수 해치와 포탑 후면, 리어 데크- 에서 이루어졌다. 분쟁 초기에, 대부분의 러시아 전차는 반응장갑을 장치하지 않고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들 전차는 반응장갑이 없으면 피해를 주거나 치명적인 정면 타격에 특히 취약했다.[10]


결론

체첸군은 대도시의 거리에서 러시아군의 장갑차량들을 격퇴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술을 발전시켰다. 그들의 전술 중 많은 것들은 시가전에서 러시아제 장갑차량(혹은 다른 유형의 장갑차량)과 맞서게 될 다른 군대에게도 채택될 수 있다.
그 기술들은 다음과 같다.

1. 장갑차량과 동반하는 보병을 제압하여 대전차 사수를 보호하기 위해, 기관총 사수와 저격수를 포함하는 대전차 헌터-킬러 팀을 조직한다.
2. 도시의 빌딩들이 기갑차량의 기동을 제한하고 갈라놓는 지점에 대전차 매복을 실시한다.
3. 차량들을 격멸구역 안에 가둬놓을 수 있도록 매복을 배치한다.
4. 장갑차량과 교전하기 위해 지하실, 1층, 2층, 3층 등에 복수의 헌터 킬러 팀을 이용한다.
RPG-7과 RPG-18 대전차 무기의 문제점은 후폭풍, 발사흔적과 사격간의 시간간격이다. 체첸군은 시간간격 문제를 각각의 목표에 대해 동시에 대여섯개의 대전차 무기로 교전함으로서 해결했다. (시가전을 위한 미래의 대전차 무기의 명백한 요구조건은 막힌 곳에서도 발사할 수 있고 눈에 잘 띄지 않으며, 여러 발 쏠 수 있고, 반동이 적으며 가벼운 무기이다. AT-4와 Javelin은 이러한 요구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5. 장갑표적의 상부, 후면, 측면을 노린다. 반응장갑으로 보호되는 정면 장갑을 향한 사격은 사수를 노출시킬 뿐이다.
6. 따라오는 대공포를 먼저 잡아라.


[1] 러시아 시가전 전술의 변화에 대해서는, Lester W. Grau, "Russian Urban Tactics: Lessons from the Battle for Grozny(러시아 시가전 전술: 그로즈니 전투의 교훈)," Strategic Forum, Number 38, July 1995.를 보라
[2] N. N. Novichkov, V. Ya. Snegovskiy, A. G. Sokolov and V. Yu. Shvarev, Rossiyskie vooruzhennye sily v chechenskom konflikte: Analiz, Itogi, Vyvody(체첸 분쟁에서의 러시아군: 분석, 성과와 결론), Moscow: Kholveg-Infoglob-Trivola, 1995, 138-139. Sergey Maev and Sergey Roshchin, "STO v Grozny"(그로즈니 기술 정비 스테이션들), Armeyskiy sbornik(Army digest), December 1995, 58에 따르면, 같은 기간 동안, 러시아 전방지원정비반은 217대의 장갑차량을 수리하였고, 정비창은 또 다른 404대의 장갑차량을 수리하였다. 이 모두가 전투에 의한 손실은 아니지만, 그로즈니에서의 2개월간의 전투 동안 장갑차량 2221대 중 846대(38%)가 일정 기간 행동불능이었다고 생각된다.
[3] Mikhail Zakharchuk, "Uroki Chechenskogo krizisa"(체첸 위기의 교훈들), Armeyskiy sbornik, April 1995, 46.
[4] "Pamyatka lichnomu sostavu chastey i podrazdeleniy po vedeniyu boevykh deistviy v Chechenskoy Respublike" (체첸공화국에서의 전투에 참가한 각급제대 인력을 위한 지침), Ameryskiy sbornik, January 1996, 37.
[5] Novichkov, 145.
[6] Ibid, 123.
[7] Sergey Leonenko, "Ovladenie gorodom"(도시 점령), Armeyskiy sbornik, 31-35.
[8] Novichkov, 137.
[9] 모든 일러스트는 Novichkov, 140-144에서 가져왔다.
[10] Novichkov, 145.

by sonnet | 2006/11/21 11:32 | 정치 | 트랙백(1) | 핑백(2) | 덧글(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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