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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보수당
2012/01/08   오늘의 한마디(Frederick Edwin Smith) [9]
2011/11/01   놈들이 너무 큰 것 같소 [69]
오늘의 한마디(Frederick Edwin Smith)

토리즘은 계약의 자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간섭받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계약의 자유를 허용하는 정책이 국가의 관점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농업임금의 경우 자유방임정책은 공장법의 경우에서처럼 사람들에게 해로운 결과를 낳았고 그래서 국가는 자기 보존을 위해 개입하게 된 것이다.

- F. E. Smith, 보수당 사회개혁위원회, 1913년 -



출처: 김명환. “보수당 사회개혁위원회와 프레드릭 에드윈 스미스”. 『영국의 위기와 좌우파의 대안들 : 사회주의 보수주의 파시즘(1880~1930년대)』. 1판. 서울: 혜안, 2008. 139-159. p.156.
by sonnet | 2012/01/08 19:52 | 한마디 | 트랙백 | 덧글(9)
놈들이 너무 큰 것 같소
"대부분 국가에서 복지는 보수가 주도했다." (파리13구) 에서 트랙백.

나도 위 글의 기본관점에 동의하는데, 보수가 수호하려는 가치인 체제 안정과 연속성을 지키기 위해, 가끔씩 선제적으로 경제적 혜택을 제공해 혁명의 김을 빼버린다는 접근은 보수진영의 오래된 책략이었다. 그런데 이와는 좀 다른 이유로 보수진영이 복지관련 입법을 주도한 사례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보수가 어떤 관점에서 정책을 채택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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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내내 영국 의회는 농촌의 토지보유세력을 대변하는 Tory/보수당과, 도시의 신흥 상공업자세력을 대변하는 Whig/자유당이 대립하는 양당체제였다.

그런데 도시 부르주아의 투표권 확대가 중심이었던 1832년 개혁법을 놓고 토리는 상원(귀족원)의 비토권을 중심으로 격렬히 반대했으나 휘그는 이를 밀어붙여 통과시킨다. 그러자 이듬해 토리당은 이듬해 미성년자 공장 노동에 대한 감시와 규제를 강화하는 1833년 공장법을 주도해 성사시킨다.

보수당은 왜 그들과 별 관계없어 보이는 노동관계 입법을 주도했는가? 토리는 1932년 개혁법을 도시 상공업자 세력이 지주 세력을 공격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분노했었다. 그래서 공장주들이 아파할 만한 법안을 만들어 보복한 것이다. 1844년의 공장법에도 이와 비슷한 두 세력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보수당 내부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 수 있다. 1844년 필 정부가 입법화한 공장법Factory Act은 고용할 수 있는 어린이의 연령을 8살에서 9살로 올렸고 9-13세 어린이들의 노동 시간을 하루에 6시간 반으로 줄이도록 했다. 그런데 보수당 내의 토지소유계급을 대표하는 의원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과 젊은이들의 노동시간을 하루 10시간으로 단축하는 방향을 추진했다. 이러한 조치는 인도주의적인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상공업자에게는 매우 불리한 법안이었다. 여성과 젊은이들이 10시간 근무하고 퇴근한 이후에 나머지 성인 남성 인력만으로 공장을 가동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과 내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농업적 이해기반을 갖는 의원들의 주도에 의해 이 법안은 통과되었다. 당초부터 추진해오던 원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필은 사임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의지를 보였다. 몇일 뒤 근소한 차이로 공장은 필 내각의 원안 그대로 의회를 통과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상공업자의 부상과 이에 대한 토지소유계급의 견제와 반발이 만만치 않았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강원택,2008:61-62]


보수당의 이런 판단은 그럴만한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 중 하나였던 곡물법 파동은 이 정책을 둘러싼 보수-자유 양 당 사이의 정책적, 계급적 대립을 잘 보여준다.

보다 심각하고 이후까지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곡물법 문제였다. 곡물법은 1815년 토리 내각 하에서 입법된 것으로 영국에 수입되는 곡물에 대해 관세를 물리도록 한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농업에 이해관계를 갖는 토지소유계급에는 유리했지만, 값비싼 곡물을 소비해야 하는 상공업자들에게는 매우 불리한 법안이었다.

1838년 공업지역의 상공업자들이 맨체스터에 반곡물법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반곡물법 연맹은 상공업자인 리처드 콥든과 존 브라이트, 제임스 윌슨 등이 이끌었다. 제임스 윌슨은 1843년 지금도 발간되고 있는 유명한 〈이코노미스트〉 지를 창간하였는데, 발간사에서 윌슨은 곡물법 폐지를 약속했다. 콥든과 브라이트는 영국 산업에서 상공업이 망하면 토지소유계급의 이익 역시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곡물법 연맹은 매우 활발한 활동을 벌였고 공업 중심 지역을 넘어서 시골에까지 그들의 활동을 확대해 갔다. 보궐선거에서 반곡물법 연맹의 후보들은 선전했고 1843년 농촌 지역인 솔즈베리에서는 45퍼센트의 득표율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의 활동에 자극받아 1844년에는 반연맹자들라고 불린 곡물법 찬성주의자들의 운동단체도 생겨났다. 곡물법 폐지를 둘러싼 논쟁이 사회적으로 매우 격렬하게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 곡물법 폐지를 둘러싸고 보수당 내부에서 논쟁과 갈등이 지속되었지만, 1846년 6월 곡물법 폐지 법안은 최종적으로 통과되었다. 보수당 의원 가운데 241명이 반대표를 던졌지만 곡물법 폐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휘그 의원들은 곡물법 폐지에 찬성했다. 곡물법 폐지를 둘러싼 논란 속에 보수당은 매우 깊은 상처를 남기며 분열했다. 보수당 의원들 가운데 필 수상의 입장을 지지하는 자유교역론자의 수보다 곡물법 폐지에 반대하는 보호주의자들의 수가 더 많았다.[강원택,2008:62-63,65]

곡물법 폐지에 찬성한 보수당 의원 일부는 후에 휘그와 합당하여 자유당을 출범시키게 된다. 이때 넘어간 토리 의원 중 대표적인 인물으로는 후에 수상이 된 글래드스턴을 꼽을 수 있다. 한편 곡물법 파동의 여파로 보수당은 분열되고 정권을 잃었으며 그 결과 오랜 야당 생활을 해야 했다. 보수당은 1847년, 1852년, 1857년, 1859년, 1865년, 1868년 선거에 모두 패했다. 보수당이 과반수 의석을 얻어 본격적으로 권좌에 복귀하기까지 무려 28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그 후의 이야기(2011년 11월 3일 추가)

1872년은 보수당 정치적 운명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보수당 지도부는 자유당에 대한 맹렬한 공세를 시작했고 공공 생활과 관련된 많은 법안을 입법화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했다. 디즈레일리는 자유당 정부가 비밀투표를 보장하는 투표법Ballot Act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일반 유권자의 생활수준, 특히 위생 수준을 높이는 데는 소홀하다고 비판했다.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이 더 이상 사회개혁 법안에 대해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주요 이슈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으로 전환하면서 수권정당으로서의 신뢰감을 높였다. 공장과 공공위생 관련 법안, 노조의 권리에 대한 제한적인 인정, 주택과 지방정부 개편 등 사회개혁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디즈레일리의 이러한 사회개혁에 대한 주장은 보수당이 더 이상 변화와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이 아니며 개혁법 도입으로 변화된 유권자 층에 대해 적극적으로 다가서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한편 카나본Carnarvon, 솔즈베리Salisbury, 노스코트Northcote 등 보수당 내 지도급 인사를 포함하여 도시 선거구에서 선출된 새로운 세대의 보수당 의원들은 노동조합 운동가들과의 회합 이후 보수당이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취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회동맹’New Social Alliance을 요구하기도 했다. 보수당 내의 이러한 전향적 움직임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움직임 등 도시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변화에 대응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지만 동시에 1871년 프랑스 파리코뮨Commune de Paris의 사례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보수당은 노동계급의 불만을 우려하면서 적극적인 정책의 도입을 통해 노동계급의 어려움에 대응해야 한다고 본 것이었다. 변화를 외면하거나 거부하기보다는 앞서 대처하고 양보할 것은 적절하게 양보하며 생존해 온 보수당의 대응이 여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 집권 이전 디즈레일리는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상공업에 종사하는 중산층을 비판해 왔다. 디즈레일리의 시각에서 볼 때 이들은 책임의식은 없으면서 권력만을 차지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토지소유계급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하위 계급 인구를 포함한 전체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해 왔다고 믿었다. 디즈레일리가 도시에 거주하는 노동자를 포함한 하위 계급 인구를 위한 사회개혁에 나서게 된 것도 이러한 인식과 관련이 있다. 즉 도시의 생활상태가 저렇게 나빠진 것은 바로 신흥 상공업자들이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 없이 내버려둔 탓이라는 것이다.

디즈레일리는 보수당 정부 초기 2년 동안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다양한 사회개혁 법안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공공보건 법안부터 공장 관련 법안, 일련의 교육개혁 등 디즈레일리 정부가 추진한 사회개혁 법안은 노동계급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1875년에는 공중보건법Public Health Act, 보건위생을 강조한 식품의약법the Pure Food and Drugs Act, 도시 슬럼문제 해결을 위한 직공거주법the Artisan's Dwelling Act, 굴뚝청소 작업에 어린이를 쓸 수 없도록 한 굴뚝소년법the Climbing Boys Act 등이 제정되었다. 노조의 피케팅을 허용하는 노조법the Conspiracy and Protection of Property Act 1875이나, 섬유산업 종사자의 노동시간을 하루 9시간 반으로 규정하는 1874년의 공장법, 그리고 10세 이하 어린이의 고용을 금지하는 1878년의 공장법Factory and Workshop Act 1874, 1878, 안전 항해를 위해 실을 수 있는 화물량을 제한한 상업해운법Merchant Shipping Act도 디즈레일리 정부에서 입법화했다.

디즈레일리 내각 가운데 중산 계급 출신이었던 리처드 크로스는 디즈레일리의 사회개혁의 비전을 실제 정책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세기에 통과된 사회 법안의 가장 많은 부분을 크로스가 직접 담당했다. 물론 현대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이러한 조치들은 본질적으로 그 효과에 있어서 제한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만, 당시 어렵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국가가 나서 보호하고 지원하고자 했던 사회개혁 법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많은 사회개혁 작업은 흥미롭게도 야당인 자유당으로부터는 공격을 받았는데 그들은 국가가 개인 생활이나 사회생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자유방임적 시각에서 보수당 정부를 비판했다.[강원택,2008:76-77,79-81]



출처는 모두 강원택. 『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 영국 보수당의 역사』. 서울: 동아시아연구원(EAI), 2008
by sonnet | 2011/11/01 09:47 | 정치 | 트랙백 | 핑백(2) | 덧글(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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