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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베트남전
2011/04/01   오늘의 한마디(Richard Nixon) [22]
2010/06/24   장지량 회고록 "F-4 팬텀 도입 비사"의 추적 [52]
2009/08/04   오늘의 한마디(陳毅) [55]
2009/01/23   오바마 취임: 장기 추세 전환의 서곡인가 [46]
오늘의 한마디(Richard Nixon)

대통령이 된 뒤에도 6개월 동안 전쟁이 계속되면 그것은 나의 전쟁이 된다.

- 리처드 닉슨 -



지금쯤이면 오바마가 깊게 체감하고 있는 말일 듯


출처는 Tuchman, Barbara. 조석현 역, 『바보들의 행진 : 3천 년을 이어온 오만한 통치자들의 역사』, 파주: 추수밭, 2006. p.540
by sonnet | 2011/04/01 20:22 | 한마디 | 트랙백 | 덧글(22)
장지량 회고록 "F-4 팬텀 도입 비사"의 추적
앞선 글에 붙은 덧글을 보니 한국의 F-104 도입 관련에 흥미를 보이시는 분들이 많군요.

이하는 몇 년 전에 쓰려고 시도하다가 흥미를 잃어서 내버려둔 것인데 조금만 다듬어서 그냥 공개하기로 합니다. F-104도입 건과 관련해서 관심이 있으신 분들에게는 다소나마 참고가 되시지 않을까 합니다.





제트전투기 F-4 팬텀은 미해군 전투기로 출발해 공군, 해군, 해병대 3군이 모두 사용하게 된(각군의 경쟁관계 상 해군 전투기가 공군에 채택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임) 독특한 이력의 항공기로, 5천 기 이상 생산된 베스트셀러 기종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 공군에 있어 제트전폭기 F-4 팬텀은 어떤 신화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미군의 신예 주력기를 일본보다 먼저 도입했고, 그렇게 선택한 전투기가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팬텀의 도입과정에 대해 당시 공군참모총장이던 장지량 예비역 중장(85)은 다음과 같은 회고를 남기고 있다.

* 빨간 마후라 -89- 팬텀기 구입 내막 (국방일보, 2005년 10월 10일)

이야기의 요지인 즉 길을 잘못들 염려가 있었지만 나와 박대통령은 팬텀이 좋은 비행기인 것을 진작에 파악하고 강하게 요구해 그걸 받아냈다는 것이다. 그러자 반대 진영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로 맞섰다.

* 67년 팬텀기 도입 때도 미국 ‘압력’ (한겨레, 2005년 10월 10일)

즉 그 때 팬텀의 도입이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은 반박하지 않겠지만, 그런 것 보다는 (좋지 못한 물건으로 덤텡이 씌우려던) 미국의 압력를 주목해 보라는 것이다.

사실 진영논리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신경질적인 반격이 등장하는 것도 놀랍지는 않다. 또한 이 주제에 대해서 박정희와 M-16 같은 '미담'이 무척 많이 만들어지고, 반복유포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회고담 역시 '미담'류에 들어가는 만큼 읽어보면 뭔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적지 않다. 왜 그런지는 이제부터 설명하겠다.

꿈에 그리던 팬텀기를 보유하다

1967년 초의 일이다. 공군력 증강책의 일환으로 전투기 도입 문제가 집중적으로 거론됐다. 사실은 내가 공군 참모차장 때부터 이 문제가 논의됐지만, 군원 문제 등 어려움에 봉착해 별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이를 가시화했다.
나는 최신예기인 팬텀기(F-4)를 꼭 도입할 생각이었다. 미 공군의 주력기인 팬텀은 말 그대로 공중의 천하무적이었다. 속도·항속거리·무기탑재량 등에서 타 기종의 추종을 불허했다. 팬텀기는 2인승으로서 음속의 2.4배이며, 항속거리는 만주-몽골, 일본의 규슈 남쪽, 중국의 베이징까지 커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기 탑재력이 2차 세계대전 때의 B-17 폭격기와 비견될 정도였다.
1967년 6월, 미 공군 참모총장이 나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1년에 한 번씩 양국 공군참모총장이 순환 방문하는 것으로 내가 먼저 미국 방문길에 나선 것이다.
미 공군 사령부에서 공식 일정을 마치고 뉴욕으로 와 귀국길에 오르려는데 맥도널더글러스 사장이 갑자기 전용기를 보내 주면서 자기 회사 방문을 요청했다. 마침 이틀간의 시간 여유가 있어서 맥도널더글러스 사장의 전용기를 타고 이 회사를 방문했다.
전용기에서 내리자 맥도널더글러스 사장이 직접 영접해 조종사 준비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내 이름이 쓰여진 비행복과 장갑, 모자를 구비해 놓았다. 귀신이 곡할 정도로 모든 것이 내 사이즈와 딱 맞았다. 이들의 치밀한 계획과 로비 작전(이 때는 로비라는 용어에 익숙지 않았다)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저희 팬텀기를 한 번 타보십시오.”
나는 말만 듣던 팬텀기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기도 해서 곧바로 탑승했다. 10,000 미터 상공에 오르자 앞좌석의 주조종사가 나더러 직접 조종간을 잡아보라고 했다. 뒷좌석에 앉아 앞에 있는 조종간을 움직이는데 정말 놀라운 성능이었다. 전폭기로서 거의 완벽한 성능을 갖추고 있었다.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박 대통령이 급히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지시가 왔다. 미국 출장을 잘 다녀왔다는 내 보고를 보자마자 부른 것이다.
“장 총장, 전투기 구입은 F-102가 좋다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대통령이 F-102 기종을 직접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의아해하자 대통령이 말했다.
“실은 말이야……. 주한 미 대사와 유엔군사령관이 찾아와서 F-102기를 구입하라고 강권하는 거야. 그래야 군원 지원도 더 해 줄 수 있다고 말이야.”
만약 F-102기를 선택한다면 대단히 곤란한 공군 현대화 계획이었다. 록히드사 제품인 F-102기는 독일과 일본이 구입해 사용하고 있으나 연료소비량이 많고 엔진 고장이 잦을 뿐만 아니라 가격도 비싸 단종되는 비행기였다.
반면 맥도널더글러스사의 팬텀기는 미국과 영국·이스라엘만이 사용하는 우수한 기종이면서 값도 쌌다. 이 때문에 이란이 1개 대대(18대)를 주문해 놓았고, 이집트와 인도·터키도 도입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이 기종 도입에 미국이 제동을 걸고 있었다).
“미국 대사와 유엔군사령관은 팬텀기가 까다로워서 한국 조종사들이 조종하기가 어렵다고 하던데……?”
대통령이 올바른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아 나는 주저 없이 말했다.
“각하, 이번에 제가 팬텀기를 직접 타 보고 왔습니다. 성능이 최고입니다. 참모총장은 한 달에 한 번 밖에 유지비행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 저도 멋있게 타고 왔는데 매일 타는 조종사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요. 조종사들이 타기에 제일 좋은 전투기가 바로 팬텀기입니다.”
“그래?”
대통령이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은 저한테도 미 태평양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이 직접 찾아와서 F-102기를 구매하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비행기를 몇 대 더 주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단종되는 기종을 살 필요가 없어서 거절한 것입니다.”
“그래, 단종된다고……?”
이미 생산된 것들을 모두 팔아야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내가 미국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록히드사 측이 대사 등을 동원해 박 대통령을 움직여 보려고 한 것이었다. 비행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내가 자리를 비우면 로비를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보았던 모양이다. 이들의 로비는 이처럼 집요하고 용의주도했다.
“알았어.”
대통령도 내막을 알고는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어떤 결기가 묻어날 때 나오는 표정이다.
1967년 10월 사이러스 밴스 미 대통령 특사가 한국을 방문했다. 베트남 전 추가 파병(1개 사단 병력) 요청을 위해 미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박대통령을 예방한 것이다.
파병 협상 조건은 한국이 원하는 군사 원조를 충족시켜 준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우리 정부는 국군 현대화 작업에 필요한 3억 달러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밴스 장관은 3억 달러는 너무 많고, 1억 달러는 가능하다고 하여 서로 줄다리기가 진행 중이었다.
박대통령은 우리 측 협상 대표인 최규하 외무장관(후에 대통령)을 불러 지시했다.
“팬텀기 지원을 보장받지 못하면 회담을 깨고 나오라!”
물론 내 건의를 100% 수용한 결과였다. 대통령은 팬텀기를 지원받지 못하면 독자적으로 100대를 사겠다고 나를 청와대로 불러 언명하기까지 했다.
결국 군사 원조는 1억 달러로 낙착됐고, 이 돈에 대한 용처는 대통령이 직접 관여한다는 지침이 내려왔다.
며칠 후 국방부장관 주재 하에 합참의장, 각 군 참모총장 군무회의가 국방부에서 열렸다. 국방부장관이 대통령 친서라며 대학생 노트를 찢어서 보낸 메모를 펴 보였다.
“다들 들으시오. 최규하 - 밴스 미 대통령 특사의 회담 결과에 관한 대통령 각하의 지시 내용이오. 군원 지원액 1억 달러 중 팬텀기 1개 대대(18대) 구입비(6,800만 달러)와 비행장 개선비(500만 달러)를 포함해 7,300만 달러를 공군이 쓰고, 나머지 2,700만 달러는 육군과 해군, 해병대와 경찰이 나눠 쓰라는 지시요.”
순간 다른 참석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모아졌다. 한 마디로 좋은 인상들이 아니었다. 각 군은 서로 군원 예산을 더 가져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군이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자 모두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현대전의 개념상 공군 현대화 작업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리고 육군·공군·해군을 떠나 국가의 재산이 아니겠는가.
팬텀기 구입 계획이 확정남에 따라 공군 조종사들이 1968년 미국 연수를 떠났고, 이듬해 마침내 1개 대대가 들어왔다. 이로써 우리는 미국, 영국,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팬텀기 보유국이 되었다.
1948년 연락기 L-4기를 보유한 것을 시작으로 1950년 훈련기 T-6기, 6·25 전쟁중 전투기 F-51기, 1956년 세이버 제트기 F-86기, 1963년 F-5기에 이어 1968년 팬텀기를 보유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우리 공군 비행기 도입사와 내 공군 일생이 함께 한 셈이다. 이 모든 비행기를 조종했다는 것이 나로서도 행운이라면 큰 행운이다.
그리고 팬텀기를 도입한 1969년 이후부터는 우리 F-4 팬텀기가 RADAR에 나타나기만 하면 북한 공군기는 무조건 꽁무니를 빼면서 도망쳤다.

장지량 구술, 이계홍 정리, 『빨간 마후라: 하늘에 등불을 켜고』, 서울:이미지북, 2006, pp.298-302

이것은 앞에서 소개했던 신문연재본이 아니라 이후 발간된 단행본 수록 내용이다. 세부적인 오류는 이후 출간본에서 수정되었을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둔 것인데,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이제 간단한 오류에서부터 시작해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부분으로 차례차례 넘어가 보기로 하자.

"밴스 장관" : 우선 사이러스 밴스는 당시 국방부 부장관(Deputy Secretary of Defense)이었다. 그가 (국무)장관이 된 것은 10여년 후인 카터 행정부 때의 일이다. 이런 고위급 관리들의 경력을 확인하는 것은 아주 쉽기 때문에 회고록 편집자의 분발이 요구된다 하겠다.

"록히드사 제품인 F-102기는 독일과 일본이 구입해 사용" : 이 구절에 등장하는 전투기는 F-102가 아니라 F-104인 것으로 보인다. F-102는 컨베어(Convair)사의 제품이기 때문이다. 소위 센츄리 시리즈(F-10X 번호)의 전투기 중 F-104라면 록히드 제품이 맞으며 서독과 일본이 사용했다는 조건에도 부합한다. 참고로 F-102는 터키와 그리스에 수출된 바 있으나 서독과 일본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인터뷰어/편집자의 확인을 통해 수정되었어야 하는 부분으로 보인다.

"1967년 10월 사이러스 밴스 미 대통령 특사가 한국을 방문" : 1967년 10월에 또다른 방문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것은 내용으로 볼 때 1968년 2월의 방문을 말하는 것 같다.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

"대통령은 팬텀기를 지원받지 못하면 독자적으로 100대를 사겠다고 나를 청와대로 불러 언명" : 허세로라도 이런 말이 실제로 있었는지, 아니면 창작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한국의 경제사정 상 "사겠다"는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미국 측 기본 사료집이라고 할 수 있는 FRUS의 해당 부분을 찾아보면 "Six squadrons of F-4s"를 박정희가 밴스에게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로 받은 것은 1개 대대(18기)이지만, 6개 대대면 확실히 100여 기가 된다. 따라서 위에서 나온 "사겠다"는 "달라고 했다"의 와전으로 보인다. (밴스의 한국 방문은 다음 글 참조)


비교적 중요하지 않을 수 있는 이런 점들을 미리 말한 이유는 이 회고록의 내용이 어느 정도 정확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필자의 인상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함이다. 이제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한 부분으로 나가보도록 하자.

이 글의 요점이자, 근래의 언론보도에서 쟁점이 되기도 했던 것은 F-104 구입 로비를 물리치고 F-4를 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의 FRUS를 보면 F-104를 거론하는 부분은 찾아볼 수가 없는 반면, F-4를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부분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Memorandum From the Under Secretary of State (Katzenbach) to President Johnson / February 5, 1968.

Give South Korea 25-50 F-4 fighters for air defense at a cost of $75-150 million.

FRUS를 읽어보면 미국 지도부에서는 전투기를 줄 거냐 말거냐, 혹은 몇 대나 줄 거냐(금액이 중요)하다는 선택지는 있었던 것 같지만 기종은 그 전부터 별 논의 없이 F-4로 내정되어 있었던 듯한 느낌을 준다. 경쟁하는 기종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특히 67-68년도 중에는 그랬던 듯하다.

"주한 미 대사와 유엔군사령관이 찾아와서 F-102(104)기를 구입하라고 강권"했다는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한국 현지에 나와 있는 미국의 최고위 대표들인 포터 대사나 본스틸 사령관이 F-104를 밀고 있었다면, 미국 지도부가 받은 보고서에도 그에 상응하는 무슨 내용이 있어야 정상 아닐까? 추천기종이 F-4 대신 F-104라든가, 둘 중 하나를 고른다든가 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물론 FRUS는 주요 사료들을 골라 수록한 편집본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거나 하위직 인사들이 관련된 문서들이 빠질 수는 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황상 의심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 문제를 놓고 주변에 상의한 결과, 좀 더 이른 시기, 즉 이승만 정부 말기에서 장면 정부 정도의 시기에라면 F-104 도입계획이 있었을 거라는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근거해 좀 더 찾아본 결과 공간사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개요

한국공군은 1955년 최초로 F-86F 전투기 5대를 도입한 이래 비행부대 「제트」화를 추진하여 1956년에는 1개 비행단을 「제트」화하였다. 그러나 한국공군의 주무기인 F-86F는 1958년에 이미 미 공군에서 퇴역하였으므로 부품의 생산 능력이 없는 우리로서는 보유기의 유지와 수리에도 많은 애로를 겪게 되었으며, 북괴공군이 대량의 MIG-17기와 MIG-21(MIG-21 14대, MIG-17 390대, 63~65 북괴현황, 공본정보부 발행 1971.9) 등 우수한 전폭기를 보유하게 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공군은 신기종은커녕 보유항공기의 폐기 등으로 전력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이에 신예 항공기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군원에 반영하는 한편 고위층에 대한 역설과 건의 등을 거듭한 결과 1960년에 처음으로 미고문단이 작성한 군원계획서에 F-104G 전폭기 도입계획이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비행부대 창설과 동기 인수준비 중이던 1962년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방미귀국보고서에서 미 국무부의 대외 원조정책 변경으로 F-5A전폭기가 피원조국 군원무기로 결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F-5A 전폭기는 전천후전폭기가 아닌 주간전폭기이므로 우리의 기대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비원으로 돌리고 우선 동기를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계속 F-104G 전천후요격기 또는 그 이상의 항공기를 보유하고자 노력하였다. 1965년부터 F-5A 전폭기를 도입하기 시작하자 낙후된 F-86F 전투기의 비행대대들을 연차적으로 기종전환하는 한편 북괴의 남침에 대비하여 전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교육과 훈련에 정진하였다. ……

2. 신기종 도입계획 추진경위

한국공군은 1955년 최초로 F86F전폭기를 도입한 이래 비행부대의 「제트」화를 추진하여 1956년에 제10전투비행단을 완전히 「제트」전폭기로 교체함으로써 현대공군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한국공군의 주무기인 F86F 「세이버」전폭기는 급속한 기종전환이 진행되는 선진제국의 항공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열세하였다. 1947년 10월에 시험비행을 마친 F-86F전폭기는 1951년 한국전쟁에 처음으로 참가한 이래 적 MIG-15전투기와의 공중전에서 그 위력을 과시하였으나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후속 신예기로 대체되었다. 미국에서는 1958년 일선에서 완전히 퇴역했으므로 부품의 자체생산 능력이 없는 한국공군에서는 보유기의 유지와 정비에도 많은 애로가 있었으며, 북괴공군이 MIG-17 및 MIG-21 전폭기 등을 보유하게 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한국공군은 적보다 우수한 전투력을 보유하기 위해서는 기종전환이 시급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한국공군에서는 1950년대 말부터 미군당국에 신기종 공급을 요청한 결과 1960년 3월에 처음으로 주한 미합동군사고문단이 작성한 군원계획서에 F-104G항공기 도입계획이 포함되게 되었다. (공군 企秘 제22호 참모총장→국방부장관 항공기 도입계획 개요 1963.4.15) 동 계획서에 의하면 65회계년도가 도입시기로 되어 있었는데 1960년 6월로 도입시기가 앞당겨져 63회계년도로 변경되었다. 한국공군은 동 계획서에 의거하여 항공기 인수 준비에 착수하였다.

1962년 5월 미고문단 군원계획에 F-104G 18대를 1963 회계연도에 지원키로 반영된 것을 근거로 동년 6월 한국공군에서는 F-104G 비행부대 창설계획을 수립하였다. 1963년 8월에 초도도입될 것을 예상하고 1963년 2월까지 새로운 비행대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962년 11월 당시 방미귀국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미 국방성의 대외군사원조정책의 변경에 따라(기체가 작고 경량이며 「엔진」이 2개인 관계로 모든 작동이 민첩하며 제작비와 연료소모량이 좋다는 등의 이유로) 한국공군에 지원할 항공기가 F-104G전폭기가 아니고 노드롭(Northrop)사의 신제품인 F-5A전투기임을 확인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공군에서는 주간전투기보다는 전천후전투기인 F-104G를 획득하기 위하여 한국정부를 통하여 외무국방분과위원장으로 하여금 주한미대사에게 협조를 종용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미국 측에서는 1963년 1월 24일 미 고문단에서 발송한 「한국공군63회계년도군원허가표」(FY63 Funded Program Item-ROKF)에서 F-5A전폭기 지원계획을 구체화하였고 다시 1963년도 제1차 한미합동회의(1963.2.1 주한미공군사령부 주최)에서 이를 재확인하고 동년 2월 6일 부로 주한 미공군사령관이 한국공군 전력목표에 대한 서한(Force Objectives for ROKAF)을 참모총장인 장성환 중장에게 보내옴으로써 이미 계획된 F-104G훈련계획은 취소되고 대신 F-5A전폭기 훈련계획이 인가되었다.
※ F-5A전폭기 도입에 관한 계획업무는 기획국 군사연구과에서 담당하였고 도입에 따른 제반 준비, 훈련, 부대전개, 항공기 인수, 배치, 후방지원 등 계획업무는 작전국 작전과에서 담당하였다.

3. 도입계획 내용
1963년 1월 24일자로 발송된 미고문단 공문 대한민국 공군 63회계년도 군원인가표(FY-63 Approved MAP ROKAF)에 따르면 F-5A 도입계획은 다음과 같다.

가. 초도도입
1963회계년도 중에 한국공군에 F-5A전폭기로 장비할 1개 비행대대를 창설하고 1965 회계연도에 동 비행대대의 무기로 18대의 F-5A전폭기를 공급한다. (※완전한 1개 비행대대를 새로 증강하는 것)

나. 기종전환
기존 5개 F-86F 비행대대를 1968회계년도까지 F-5A전폭기로 기종전환키로 결정하였는데 도입시기는 1965회계년도에 1개 대대분, 1966회계년도에 2개 대대분, 1967회계년도 및 1968 회계연도에 각각 1개 대대분이 도입되고, 각 교체대대는 2년 전부터 교체준비를 하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미 계획된 F-104G 훈련계획은 취소되고 대신 F-5A 훈련계획(AFSM, Letter F-5 initial Training Plan, 25 July, 1962)이 인가되었다. 이에 따라 1964년 5월 6일부터 미국 「아리조나」주 「윌리암스」(Williams) 공군기지에서 박선국 중령 외 3명이 F-5A 조종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12월 8일에 조종교육을 수료한 후 귀국하였으며, 또 동년 8월 5일부터 2차로 정태웅, 정홍식 소령이 같은 기지에서 조종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1965년 3월 26일 수료 후 귀국하였다.

『공군사: 제4집(1963-1967)』, 공군본부, 1977년, pp.49-51


이 내용이라면 FRUS에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앞선 글에서 소개했던,

제469차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 요록, 1960년 12월 8일, 워싱턴

[재무]장관 딜론은 NSC 6018 문서의 재정 부록에 나오는 군사원조액은 5개년 군사원조계획에 기초한 것인데 이에 따르면 최소 필요 총액은 22억 달러라고 하였다.한국군 사단들은 현재 낡고 부적절하며 북한군 장비보다 뒤떨어진 2차대전때 쓰던 중고 무기들로 장비되어 있다. 이러한 큰 금액은 남한에 대한 군사원조가 한국군을 대규모로 재장비하고 주요 항구에 배치될 3개 대공미사일 대대를 추가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이는 질적 측면에서 북한 공군에 맞서기 위해 한국 공군을 센츄리 시리즈 항공기로 무장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한국 공군의 현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남한은 북한군을 상대로 상당한 열세에 처하게 되거나 그 차이를 메꾸기 위해 미군이 배치되어야 할 것이다.

(중략) 그러나 틸론 장관은 1962년도 대한군사원조는 아마도 위 부록에 나온 금액보다는 아마도 작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였다.(pp.709)


이에 따르면 F-104 도입계획은 1960~1962년에 있었던 것으로, 1967~1968년 시점의 F-4도입계획과는 큰 관련이 없어 보인다. 약 5년 정도의 시차가 있는 두 가지 사건을 (의도적 혹은 비의도적으로) 뒤섞어 설명한 것일까? 어쨌든 이게 F-104 도입계획의 전부라면 시점상으로 볼 때, 박정희나 장지량은 F-104도입 취소의 결정에 관여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결정은 미국 측이 내려서 한국 측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F-5는 F-104에 비해 확실히 더 싸고 열등한 항공기였다. 그러나 한국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그렇게 결정하자 그대로 결정나 버리고 말았다. 한국이 돈 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원조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싫음 받지 말든가라고 하면 끝나는 문제였다. 미국이 정말 F-4를 F-104로 바꾸고 싶었다면 비슷한 과정으로 그냥 통보하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을까 한다.


끝으로 이 회고록의 주인공인 장지량 장군은 김영환 장군의 해인사 폭격 방지의 공적을 가로챘다는 혐의로 논란을 빚어 공군이 직접 나서 조사를 벌인 끝에, 이 회고록에 등장하는 주장에 근거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는 점을 부연해 두고자 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해 확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미국이 F-104를 강매하려고 했으나 영명한 박정희 대통령과 장지량 공참총장이 이를 막았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고 생각한다. 이 주장을 반박하려면 미국의 기밀해제 문서(나 한국의 그에 상응하는 문서. 남아있다면 말이지만;;;)를 뒤져 1967년 경에 F-104의 대한 판매를 주한미대사나 유엔군 사령관이 밀었음을 보여주는 그런 근거를 찾아서 제시해야 할 것이다.
by sonnet | 2010/06/24 13:04 | 정치 | 트랙백 | 덧글(52)
오늘의 한마디(陳毅)

오늘 미국이 중국과 대전을 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미국 대통령과 미 국방부의 결정에 달렸다. 우리는 미 제국주의에 그 어떤 환상도 갖지 않는다. 미 제국주의가 한사코 우리에게 전쟁을 강요하려 한다면 일찍 쳐들어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들이 내일이라도 쳐들어오면 환영하겠다. 모든 반동파들이 그들과 함께 오라고 하라! 최종 승전할 자는 우리다. 우리는 미 제국주의가 쳐들어오기를 16년 동안 기다리느라 머리가 다 희었다. 미 제국주의가 중국대륙으로 쳐들어온다면 우리는 모든 필요한 수단을 취하여 그들과 싸워 이길 것이며 그때 전쟁에 그 무슨 한계가 있을 것인가.

- 미국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 중국의 입장을 밝히며, 1965년 9월 29일, 중국 외교부장 陳毅 -



李丹慧, “38도선과 17도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중·미 정보소통 비교연구,” 박두복 편, 『한국전쟁과 중국』, p.443


記一. 중국이 미국과 싸우고 싶으면, 어쨌든 미국이 중국까지는 와야 한다는 거...
記二. 천이는 마오쩌둥에게 말 시원하게 잘 했다고 큰 칭찬을 들었다고 함. 하지만 이래 놓고서 미국과 중국은 바르샤바에서 접촉을 유지하면서 서로 정면충돌하는 사태가 없도록 잘 조율함. 마오나 천이 미국과 싸울 일은 없을 거라고 계산했다는 것은 인용문을 가져온 중국측 필자도 인정하는 것임.
記三. 이런 선전선동을 겸한 화법이 요즘 북한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으시리라 생각하는데, 사실 북한의 화법 중 상당 부분은 옛 공산진영에서 상속한 것이다. 그래도 중국이나 소련은 대국의 풍모가 있는데, 북한은 그런 것 대신 상스러움이 더해졌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
by sonnet | 2009/08/04 11:22 | 한마디 | 트랙백 | 덧글(55)
오바마 취임: 장기 추세 전환의 서곡인가

1896년 이후, 현대 미국 정치는 약 40년을 주기로 공화당 주도기와 민주당 주도기를 왕복하는 패턴을 보여 왔다. 따라서 신임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을 보면서 내가 흥미를 갖고 있는 소재 하나는 이번 사건이 미국 정치의 장기 추세가 전환되는 계기인가 하는 것이다.

1. 미국 정치 장기 추세의 전이

일단 대략적인 모양을 살펴보자.

1897년 - 1932년(36년): 공화당 주도기
총 9임기 중 공화당 7회(맥킨리, 테오도어 루즈벨트, 태프트, 하딩, 쿨리지, 후버), 민주당 2회(윌슨)

1933년 - 1968년(36년): 민주당 주도기
총 9임기 중 공화당 2회(아이젠하워), 민주당 7회(프랭클린 루즈벨트, 트루먼, 케네디, 존슨)

1969년 - 2008년(40년): 공화당 주도기
총 10임기 중 공화당 7회(닉슨, 포드, 레이건, 大부시, 小부시), 민주당 3회(카터, 클린턴)

(미국의 역대 대통령과 임기는 Wikipedia에 도표로 잘 정리되어 있으니 필요하신 분은 이 곳을 참조)


물론 나는 섣부른 예언을 쏟아놓으려는 것이 아니거니와, 그냥 단순히 40년쯤 지났으니 추세가 뒤집힐 것이다라고만 말하면 부채도사와 아무 차이가 없는 짓일 터이다. 그러나 과거 추세 전환이 일어났을 때의 주요 변화를 짚어 보게 되면, 근래 일어났거나 진행중인 대형 사건들은 과거 추세 전환을 만들었던 주요 사건들에 비해 손색이 없는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 견고한 남부: 인민당 타도를 위한 적과의 동침 (1897~1932)

1873년의 농업공황을 계기로 1880년대 후반에서 1890년대에 걸쳐 미국에는 인민주의 운동이라고 불리는 급진 농민운동이 기세를 올렸다. 이들은 미시시피 강 서부의 농업지대가 주요 근거지였는데,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농작물 가격하락을 완화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금본위제를 반대하고 은화 자유주조를 정강으로 내걸었다. 단기간에 기세를 올린 이들은 콜로라도, 캔사스, 네브라스카, 오레곤, 네바다 등에서 주지사를 배출하고 주의회를 장악했으며, 연방의회에도 수십 명의 의원을 진출시켰다. 이들의 세력이 정점에 달한 것이 1896년으로, 이 해 민주당 대선후보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인민당 정강을 따른 대선 공약을 내세우고 민주당-인민당의 공동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임했다.

인민주의자들이 서부와 남부에서 기세를 올리자 기성 정당인 공화-민주 양 당의 보수파들은 경악한 나머지 인민주의자들을 확실히 묻어버릴 대전략을 실행에 옮기기에 이른다. 그것은 남북전쟁으로 대표되는 해묵은 지역-인종 갈등에 다시 불을 질러, 농업세력과 산업세력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무력화한 것이었다. 즉 남북갈등을 일으켜 동서갈등을 덮어버린 것이다.

이 결과 민주당은 남부 주들에서 몰표를 받는 대신 북부를 위시한 기타 지역을 다 내어주고 견고한 남부를 지키는 지역정당으로 주저앉아 버린다. 민주당은 텃밭인 남부를 꽉 틀어 쥐고 인종 문제를 자기들 식으로 요리하는 권리를 확보한 대신 공화당에게 전국정치를 내어준 것이다. 이 결과 공화-민주 양 당에 존재하는 소수파들, 특히 (인민주의자들에 가까운) 서부 기반의 세력들이 일거에 몰락하게 되었다.


3. 대공황과 뉴딜 연합(1933 ~ 1968)

이런 상황은 앞서 언급했던것처럼 약 40년간 계속된다. 그러나 대공황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신음하던 미국 사회는 대안을 찾다가 소외되어 있던 민주당에 권력을 쥐어주게 된다. 대공황 수습과 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 정부의 역할이나 크기는 비약적으로 변화하고,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무려 4선을 거듭하는 기엄을 토하면서 미국 사회에는 새로운 정치질서가 수립된다.

이러한 질서가 다시 40년 정도를 굴러가지만 1960년대 들어 중요한 변화가 두 가지 일어난다.

첫째는 민권운동의 대두이다. 시대가 흐르면서 트루먼, 케네디, 존슨 같은 중앙의 민주당 지도부들은 민권운동에 점차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1964년에 민주당 주도로 민권법이 통과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견고한 남부와 민주당의 밀월 관계는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둘째는 베트남전 이슈이다. 베트남전의 전황이 악화 일로를 걷게 되면서, 국민들은 민주당의 대외정책에 대해 신뢰를 잃고, 민주당 내에서는 그 책임 소재와 향후 대책을 놓고 보수파와 진보파 간에 분열이 가속화된다. 현직 대통령인 존슨이 출마를 포기하기에 이르러 민주당은 그간의 주도권을 공화당에게 넘겨주게 된다.


4. 신보수주의의 득세(1969 ~ 2008)

1972년 선거는 민주당이 지리멸렬한 상태이며 당내 분열을 가속화하는 진보적 후보로는 전국정치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 선거에서 공화당의 닉슨은 520-17이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를 거둔다. 이어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에 힘입어 참신한 이미지를 앞세운 카터가 잠깐 정권을 잡지만, 혼란스러운 국내 정책들과 함께 이란 혁명과 맞물린 무기력한 이미지, 주한미군 철수 논쟁에서의 패배, 아프간 침공 등은 역시 안보 문제에 있어서는 민주당을 믿을 수 없다는 견해를 다시 한번 강화하게 된다. 이러한 와중에서 점차 여피화되는 민주당의 경향에 불만을 느낀 민주당 강경 보수파 일부는 공화당 지지로 말을 갈아타기도 하는데, 레이건 행정부에 입각했던 진 커크패트릭이나 후에 유명해진 네오콘 인사 리처드 펄 등이 대표적이다.

LA Times 기자인 제임스 만은 이 시대 분위기를 잘 요약하고 있다.

사실 클린턴이 승리한 주요 요인 중 하나는 냉전이 끝남에 따라 미국 유권자들이 민주당에 다시 돌아가도 되겠다고 판단할 정도로 충분히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과거 민주당의 대외정책 성적표는 베트남전 이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줄곧 민주당 후보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 제임스 만, 『불칸집단의 패권형성사』 -


이 시기의 끝에 해당하는 小부시 행정부 8년은 다들 잘 아실 터인 고로 생략하겠다.


5. 그리고 앞으로(2009 ~)

이렇게 살펴보면 아프간, 이라크 양 전쟁에서 드러난 대외정책의 난조와 대형 경제위기로 인한 국민들의 인식 변화는 그 영향력 면에서 볼 때, 과거 주요 추세 변화를 일으켰던 사건들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외적 조건은 충분하다.

이것이 실제의 추세 전환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변수가 될 것이다.

1) 오바마가 성공적으로 두 임기를 마치고 과거 루즈벨트가 했던 것처럼 새 시대의 추세를 굳힐 수 있을 것인가
2) 연이은 두 번의 선거 패배를 겪은 공화당 주류가 어떤 방향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정치 노선을 잡아 나설 것인가.

어느 쪽이든 간에 오바마가 제2의 카터가 될 것인지 제2의 루즈벨트가 될 것인지는 그의 첫 임기를 지켜봄으로서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by sonnet | 2009/01/23 17:33 | 정치 | 트랙백 | 핑백(1) | 덧글(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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