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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2   중국의 ‘주박呪縛’ [40]
2009/08/09   미얀마의 상자형 건물 [15]
2009/07/23   미얀마-북한 군사 협력 문제 [47]
2007/10/12   미얀마 사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반응에 대한 두 가지 견해 [25]
중국의 ‘주박呪縛’
다음은 1998년에 발표된 쿠니 아키라(久仁昌)의 「중국의 주박中國の‘呪縛’」을 초벌번역한 것이다. 이미 십 년이 넘은 글이지만 오늘날의 중북관계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시기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면 개혁개방을 권해본 중국도 참조.


중국의 ‘주박呪縛’

등소평을 격노시킨 김정일

근래의 중북관계는 1983년 6월 김정일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한 이래 김일성 시대의 중북간 「피로써 다져진 우호관계」 대신, 중국의 등소평과 김정일 사이의 상호 부정적인 원망과 불신, 근심 위에 구축되어 왔다. 우선 이 점을 확실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983년 6월 1일부터 12일까지의 비밀 방중을 끝내고 귀국한 김정일은, 그 즉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제7차 회의(6월 15일~17일)를 소집하여 많은 출석자들 앞에서 귀국보고를 하면서, “중국 공산당에는 이제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있는 것은 수정주의뿐이다. 중국이 국시로 삼고 있는 「4개 현대화」 노선도 「자본주의로의 길」, 즉 수정주의 노선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격렬한 비판과 비난을 전개하였다.

회의 참석자가 많았기 때문인지 이 이야기는 며칠 지나지 않아 중국 측에도 전해졌고, 6월 하순에 이르러서는 중국 측이 그 내용을 모두 알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혁명 활동에 있어 김정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선배로 수많은 업적을 가진 중국의 최고지도자를 하필이면 「수정주의자」라고 꾸짖고 「4개 현대화」마저 「수정주의」 노선이라고 못 박은 것이다. 이에 등소평은 격노하여 측근에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로 인해 중국의 앞날이 위협받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군……”이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 때 등소평은 김정일을 가리켜 ‘황취랑黃嘴郞’([아직도] 부리가 노란 녀석;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과연 「문자 쓰는 나라」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표현이라 하겠다. 아무튼 혁명가로서 확고한 실적을 갖고 있는 등소평에게 이름도 없는 일개 「풋내기」 김정일이 혁명가가 가장 싫어하는 「수정주의자」 딱지를 붙였을 뿐 아니라, 중국이 국시로 삼고 있는 「4개 현대화」 노선까지 「수정주의노선」으로 규정했다는 것은, 등소평의 전 인생과 중국의 혁명업적을 통째로 부정한 것임에 다름 아니었다.

등소평의 당혹과 분노는 어느 정도였을까. 그 김정일이 맹방 북한의 다음 권력자로서 등장하리라고 예상되는 상황에서 등소평이 가슴 속에 당혹스러움과 위구심을 느낀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김정일은 이렇게 북한의 차기주석후계자로서 첫 해외방문인 비밀 중국방문 단계에서 중국과의 사이에 기본적으로 미묘한 위구심과 걱정, 불신감을 잉태한 막을 열고 말았던 것이었다.

등소평은 1997년 2월 19일 천수를 누린 끝에 사망했지만, 김정일에 대한 그의 위구심과 염려, 불신감은 등소평 이후 세대로의 이행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등소평 유언」이라고 할 만한 역할로 한층 증폭되어 북한 사정에 어두운 남은 중국지도부 간부들 사이에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봉추도棒棰島의 중북 극비 수뇌회담

김정일의 비밀 방중을 둘러싼 이러한 문제에 대해, 심각한 토의를 거듭한 중국 지도부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① 중국이 4개 현대화를 실현하기까지는 앞으로 수십 년이 소요된다.
② 그 동안 주변정세가 안정적이고 평화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김정일이 지도자로 등극할 경우에는 한반도 및 동아시아 정세의 안정이 그림의 떡이 되어버릴 우려가 있다.
③ 이와 관련하여, 김정일을 아무리 설득해도 진정으로 이해와 협력을 얻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렇다고 하면 중북관계의 역사적 경과를 잘 알고, 인간적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김일성 주석과 잘 협의하여 한반도의 앞날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방향으로 조건지워나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등소평이 주도권을 쥐고 김일성에게 「중북수뇌회담」의 조속한 개최 의사를 피력하게 되었다.

1983년 8월 등소평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여름휴가로 해수욕 계획을 세우고, 중국 당정간부들의 휴양지인 북대하北戴河로 향했다. 여름에 북대하로 가는 것은 의례적인 것이었으므로, 예민한 외국의 중국관찰자들의 이목을 끌 일도 없을 터이다. 객가(客家) 출신의 등소평다운 신중한 태도가 여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8월 19일 갑자기 그가 대련大連시의 리조트 봉추도 호텔에 나타났다. 마침 이 호텔에 투숙해 있던 일본인 상사원이나 기타 투숙객들은 급히 체크아웃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이유를 묻는 과정에서 호텔 직원들에 대한 사전 준비가 미흡한 탓에 극비 회담 개최 사실이 탄로 나고 말았다.

물론 회담이 끝난 후, 호텔 측에서 등소평의 방문을 기념하여 등소평과 김일성이 서로 담소하고 있는 대형사진을 호텔 로비에 걸었기 때문에 더 이상 「비밀회담」은 비밀이 아니게 되었지만…….

같은 날, 즉 8월 19일 김일성도 극비리에 이 호텔에 도착하여 양측간의 수뇌회담이 실현되었다. 나중에 중국 측으로부터 흘러나온 정보에 의하면, 그 정황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즉 등소평은 같은 해 6월, 김정일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의 「비우호적인 태도」, 특히 귀국 후 당중앙위원회에서의 중국에 대한 비판·비난에 관해 상세하고도 솔직하게 언급하고 「이것은 중국으로서는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고 엄중히 지적함과 동시에 중국 지도부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정황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양국의 역사적, 전통적 우호관계와 혁명적 우정에 호소해 양국 장래의 불안 요소를 해소하도록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또한 그 자리에서 북한 측이 중국의 「4개 현대화」노선을 지지하고 이에 동조해 북한 경제의 향상과 활성화에 힘써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아들 김정일의 평소 행동양식을 잘 알고 있는 김일성은, 중국 측의 지적에 반론의 여지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듣고는, “김정일에게 잘 알아듣도록 타이르고 조만간에 다시 방문하게 할 테니, 그때 잘 타일러 달라”고 간청하여 등소평의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사죄를 위한 중국 재방문은 김정일로서는 참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설득에 대해 “중국이 수정주의의 길을 걷는다 해도, 그것은 중국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들 마음인 것이다. 「주체사상에 의한 일색화」를 목표로 하는 우리나라가 중국이 말하는 대로 할 필요는 없으며, 수정주의를 엄격하게 구별해서 그 침투를 단호히 배제해야만 한다.”고 항변하면서 중국 재방문을 반대했다고 한다. 이것이 후에 김정일 주변에서 구호가 된 「우리 식」의 출발점이지만, 그 상당 부분은 중국의 행보에 대한 반목과 반발, 반항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이런 불효자 같으니라고!” 아버지 김일성의 일갈

하지만 사죄를 위한 중국 재방문 건은 김일성의 설득으로 성사되게 되었다. 김일성은 “애비인 나는 네가 잘 될 수 있도록 어떠한 수치도 견디고 있는데, 너는 그것도 모르느냐! 이런 불효자 같으니라고! 이제 와서 등소평과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김정일의 중국 사죄방문은 1983년 9월에 이루어졌다. 이때 김정일은 지난번과는 달리 등소평이 자리를 권해도 자리에 앉지 않고 시종일관 선 채로 등소평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중국 측도 김정일을 설득하기 위해서 심천 경제특구를 시찰하게 하는 등 「4개 현대화」 이론과 실제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였고, 김정일도 나름대로 언행을 삼가하였다. 그 결과, 중국 측은 “이번 김정일의 중국 방문에서는 「적극적 반응」을 느낄 수 있었다”고 평양에 통보함으로서 일단 김정일에 대한 승인의 뜻을 표명함으로써 김일성을 안심시켰다.

여담이지만, 이 시기에 북한은 그간 취해온 「한국의 전두환정권은 남북 대화의 상대로 삼지 않는다」는 태도를 바꾸어, 1983년 10월 8일 중국 지도부에 대해 남북한 및 미국이 참여하는 「3자회담」 개최와 관련된 대미중재, 알선을 의뢰하였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비밀수뇌회담에서 북한에 대한 중국 측의 끈질긴 정책 「각인刷り込み」 노력의 성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등소평과 김일성 사이에는 일정한 양해에 도달하였지만, 등소평·중국과 김정일 사이에는 여전히 무엇 하나 양해가 성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83년 6월의 비밀 방중으로부터 봉추도 극비수뇌회담을 거쳐 다시 「사과」방문에 이르는 일련의 경위와 결과라는 등소평의 ‘문중 어른’식의 간섭은 아버지 김일성에 대해 김정일이 품고 있는 열등의식을 더욱 자극하여 김정일에게 씻기 어려운 등소평·중국에 대한 반발, 반목을 고착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훗날 한중수교에 대한 반발(1992년), 중국을 배제한 대미접근정책, NPT 탈퇴선언(1993년) 및 준전시상태와 같은 정책으로 치닫게 되어, 그 결과 김일성과의 대립이 잦아져 김일성의 사망(1994년)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등소평이 김정일에게 품고 있던 위구심과 우려는 금방 현실로 나타났다. 즉 김일성이 중국에 대해 「3자회담」의 대미중재를 의뢰한 다음 날인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의 수도 랑군(현 양곤)시 아웅산 묘지에서 바로 그 「3자회담」의 상대인 남한의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북한 특수공작부대 소속 군인 3명에 의한 폭탄테러사건이 자행되어, 참석해 있던 한국각료 4인을 포함한 16명이 폭사하고, 버마인을 포함한 다른 1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는 중개·알선역을 맡은 중국의 체면을 뭉개버린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테러 후 자폭을 시도하다가 부상을 입고 체포된 범인 진모 소좌와 강명철 대위의 자백과 기타 증거로 볼 때, 김정일의 직접 지시에 의해 실행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강력히 이를 부인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중국에게 미얀마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발휘해 사건의 진상을 얼버무리고 추궁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자의적인 국제 테러사건으로, 중국이 바라는 주변정세의 안정화를 크게 위협한데다가, 중국으로 하여금 미얀마에 대한 압력문제를 놓고 국제테러리즘에 가담할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난감한 입장에 서게 만들었다. 중국은 결국 북한의 요구를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한 분노와 노여움을 가슴속 깊이 새기게 되었을 것이다.


중국이 제시한 ‘대북한정책 6개항’

그 등소평이 1994년 7월 김일성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김정일에게 주었다고 하는 「중국의 대북한정책 6개항」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북경 측이 급히 파견한 「중국 당·정부 조문대표단」(그 중 한 사람은 「등소평 판공실 주임」이란 직함을 갖고 있는 인민해방군 총정치국 부주임인 왕서림王瑞林)이 평양으로 휴대하고 가서 조선노동당에 전달한 것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경제발전과 국가건설이라는 김일성의 유지를 승계하는 것을 확고히 지지한다.
② 한반도의 「비핵화」를 희망한다.
③ 구실을 만들어 군사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한다.
④ 이러한 것들이 지켜진다면 중국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북한의 경제개혁을 지지하고, 북한으로부터의 원조확대 요청에 응한다.
⑤ 김일성의 유지를 계승한다면 중국과 북한의 양당, 양국, 양인민의 우호발전을 다시 한번 표명할 용의가 있다.
⑥ (어느 한 편이 공격을 받을 경우, 다른 한 편의 자동참전조항을 포함한)중북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에 대해 중국은 양국의 전통적인 우호와 지역의 평화안정이라는 입장에서 수정 의견을 낼 용의가 있다.
(홍콩 『신보信報』1994년 7월 22일자)

이 6개항은 중국이나 북한 모두 공식적인 확인을 피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중에 「김일성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것과 같이 큰 이견이 없는 항목도 있지만, ②의 「한반도의 비핵화」라든가 ③의 「군사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 같은 김정일이 추진하는 정책에 명백히 반하는 항목도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 「6개 항」에 포함된 중국의 북한경제지원도, 「김일성의 유지」를 계승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만큼, 말하자면 김일성이 죽고 드디어 김정일이 「등극」(즉위)하는 정세 속에서 「등극을 위한 통과의례」이며, 김정일이 북한의 실권자로서 아시아 정치마당에 등장하는데 있어 일종의 「수갑, 족쇄」를 채우기 위해 중국 측이 부과한 “주박呪縛”(주술로 꼼짝 못하게 함)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은 현재 등소평이 평생의 꿈으로서 추진해 온 홍콩의 반환을 1997년 7월 1일에 실현하고 아시아 「신흥공업국NIES」의 모범생인 홍콩 경제의 역동성을 중국경제에 끌어안은 여세를 몰아 아시아 전역에 걸친 지도권을 확립하고 세계경제, 정치사회에 파고들어 장래 세계의 중심국으로 발돋움하기를 꿈꾸고 있다. 이러한 등소평의 꿈은 1997년 9월의 제15기 당대회를 거쳐 새롭게 편성된 총서기 강택민(국가주석), 이붕(수상), 주용기, 이서환, 정관근, 호금도 등 신지도부진용에도 정확히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정일 정권을 원만히 발족시키기 위해서는 평양의 내부사정과 더불어 중국과의 사이에 쌓이고 쌓인 정책의 괴리를 전면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중국의 “주박”은 「김일성의 유지의 준수」를 명분으로 삼고 있는 만큼 「유훈통치」를 외치고 있는 김정일 정권에게 있어 저항하기 어려운 무게를 갖고 있다.

1996년 가을 이후, 중국 측으로부터 몇 차례나 「수뇌회담」 제안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피해왔다고 하는데, 회담개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중국과의 정책조정 -결국은 중국이 요구하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지만- 이, 김정일 체제 그 자체를 흔들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참고: 다음 단행본을 저본으로 이용하였으며, 한국어 번역판을 참조하되 가능한 직역에 가깝게 옮겼다.
關川夏央, 惠谷治, NK會 編. 『北朝鮮の延命戰爭 : 金正日·出口なき逃亡路を讀む』. 東京: ネスコ, 1998. pp.176-184
(김종우, 박영호 역, 『김정일의 북한, 내일은 있는가 : 김정일, 비상시 탈출로를 읽는다』 서울: 청정원, 1999. pp.184-191)
by sonnet | 2010/07/12 09:14 | 정치 | 트랙백 | 핑백(1) | 덧글(40)
미얀마의 상자형 건물

그 동안에도 미얀마가 핵무기나 탄도탄 등과 관련해 뭔가 수상한 일을 추진중인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많이 있었고, 그와 관련해 북한과의 협력관계도 의심을 받아 왔다.

Revealed: Burma’s nuclear bombshell (Sydney Morning Herald, 2009년 8월 1일)

그런 와중에 미얀마의 망명자들 두 명이 미얀마의 핵개발에 대해 구체적인 폭로를 내놓아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었다. 많은 사람들이 저 기사에 등장하는 묘사를 힌트로 삼아 상업용 위성사진으로 미얀마의 해당 지역을 뒤지기 시작했다. 개중 제일 먼저 관심을 끈 건물이 이것이다.


유프라테스 강 옆의 상자형 건물이 위장된 원자로로 드러난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 건물의 정체 또한 깊은 관심을 끌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놓고 보면 이 건물은 원자로는 아니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다.


Imagery Brief on Burma (ISIS)

우선 살펴볼만한 분석은 데이비드 올브라이트의 것이다. 올브라이트는 이런 주제를 다루는 민간 분석가로는 가장 유명한 인물인 만큼, 이런 문제가 불거지면 제일 먼저 그의 웹사이트를 가 볼 필요가 있다. (길지 않으니 위 링크의 전문을 읽어볼 것을 추천)


Hibbs on the BOB (Arms Control Wonk)

IAEA도 이 건물을 검토했는데, 아니라는 쪽으로 이미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That determination, the sources said, follows from the absence of certain “overhead signatures” for a reactor in the photos and from specific information derived from firsthand knowledge of the site and its activities, deemed to be highly reliable.

‘We can conclude that it’s not a reactor with near certainty,” one Western analyst said. … Western governments and the IAEA have become familiar with data on this site over about half a year, one source said.


O'Connor on the BOB
(Arms Control Wonk)
Firstly, recall the cooling requirements for a North Korean reactor design. There is no indication of any nearby source of water, or any significant piping from such a source, to provide the necessary water needed to cool the reactor.

Sean O'Connor는 일전에 내가 블로그 추천을 한 적도 있을 정도로, 구글 어스로 지표면을 뒤지는 쪽에서는 잘 알려진 사람인데, 노가다의 달인 답게 그는 그 기사를 100% 믿지 말고 수색범위를 더 넓혀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The likely location for the covert site is further east, near the river. An area of interest (AOI) for future investigation has been marked on the following image:


2009년 9월 1일 추가
The Box in Burma: Preliminary Analysis (Verification, Implementation and Compliance)

비확산-사찰 관련 NGO인 VERTIC 소속 연구자 Andreas Persbo 또한 부정적인 분석 결과를 내놓고 있다. 그는 Landsat-7 위성의 적외선 사진을 이용해 이 건물의 열방출 내역을 검증하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의 위성 사진을 바탕으로 원자로를 격납할 수 있는 지하구조가 아닐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다. 또한 그도 자신의 IAEA 컨택트를 통해 IAEA가 이 건물을 원자로라고 보고 있지 않다는 평가를 들었다고 한다.
by sonnet | 2009/08/09 16:32 | 정치 | 트랙백 | 덧글(15)
미얀마-북한 군사 협력 문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클린턴 국무장관이 문제를 제기하는 등, 근래 미얀마-북한 간의 군사협력관계에 대한 우려[1]가 커지고 있다.

미얀마는 북한이 저지른 양곤 폭탄 테러 사건 때문에 북한과 오랫동안 단교하고 있었지만, 2007년 재수교를 전후해 두 나라는 서로에게 빠르게 접근하였다. 이 두 나라는 모두 국제 사회의 왕따로 많은 제재를 받고 있어, 외부와 협력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2007년 버마의 반정부시위가 터져나왔을 때, 이글루스에서도 많은 논평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버마 반정부 운동에 대해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분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으나, 버마의 정치상황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좋아진 것이 없다.)

대외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두 나라의 협력관계는 군용 지하시설 구축 부문이다.
미얀마 군 공병단에게 지하시설 구축 기술을 전수하고 있는 북한 전문가[2]


북한의 지원을 받아 작업이 진행중인 건설현장

이 외에도 얼마 전 금지 물자를 실은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 상선 '강남 1호'를 미 해군이 끈질기게 추적하자, 이 배가 미얀마 입항을 포기하고 북한으로 되돌아가버린 사건[3]도 다들 잘 기억하고 계시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무엇보다도 우려하는 것은 이렇게 겉으로 잘 드러나는 협력관계 외에 북한이 핵기술을 미얀마에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오래 된 것으로, 미얀마의 핵에 대한 관심에 국제사회가 주목하기 사작한 것은 2002년[4], 미국이 북한-미얀마 간의 핵 커넥션을 의심한 것은 적어도 2005년[5]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근에 북한을 방문한 민간 연구자에게 북한 관리가 "우리가 아프리카 같은 곳에 우리 핵무기를 퍼트린다면, 미국의 힘은 상대적으로 쇠퇴할 것"[6]이라고 주장했다는 보도가 소개되기도 했는데, 이런 발언은 처음이 아니다. 북한은 과거에도 미국을 궁지로 몰기 위해 핵확산을 시도하겠다고 위협[7]하곤 했다. 게다가 북한은 이스라엘이 파괴한 시리아의 '알 키바르' 원자로 건축에 협력한 것으로 지목[8]받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을 종합해 볼 때, 북한이 시리아에 핵기술을 전파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심하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미얀마에서 다시 한 번 도박을 시도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할 만한 상황인 셈이다.




[1] Gray Denis D., Is Myanmar going nuclear with North Korea's help? Associated Press, 2009년 7월 21일; 황재훈, 北-미얀마 핵커넥션 의혹 재부상, 연합뉴스, 2009년 7월 22일
[2] N. Korean Engineers Assist Burmese Tunneling Projects, Irrawaddy Publishing Group, 2009년 6월 25일
[3] 이하원, 미(美) 감시막혀 도로 북(北)으로… '강남호 굴욕', 조선일보, 2009년 7월 7일
[4] Burma announces nuclear plans, The Nation, 2002년 1월 14일
[5] Chongkittavorn, Kavi., WASHINGTON ON BURMA: Rangoon ‘could destabilise region’, The Nation, 2005년 4월 11일; 이 소식은 조성부, "북한-미얀마 협력 핵심은 미얀마 핵능력 향상", 연합뉴스 를 통해 국내에도 보도되었다.
[6] Abe, Amii., North Korea Entering a New Phase: 'We Are Not Interested in the U.S. Anymore', Nautilus Institute, 2009년 7월 16일
[7] 김대영, 디트러니 "北 핵물질 이전 협상 시사 도발적", 연합뉴스, 2005년 5월 4일
[8] Wright, Robin., Warrick, Joby, Purchases Linked N. Korean to Syria, Washington Post, 2008년 5월 11일; 미국 정부는 이 시리아 시설이 북한과 연계되어 있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北-시리아 '핵커넥션' 백악관 성명 全文, 연합뉴스 2008년 4월 25일, "시리아 정권은 지난 2007년 9월6일까지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원자로를 동부지역 사막에 비밀스럽게 건설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양한 정보를 토대로 북한이 시리아의 비밀스런 핵활동에 협력한 것으로 확신한다. 우리는 지난해 9월6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리아의) 원자로가 평화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믿고 있다."
by sonnet | 2009/07/23 07:01 | 정치 | 트랙백(1) | 핑백(1) | 덧글(47)
미얀마 사태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반응에 대한 두 가지 견해
미얀마 사태가 일단 소강상황으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회에서 이런 제3세계 정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아주 적은데, 이번에는 TV로 전해진 시위 풍경이 광주사태를 연상케 한 탓인지 의외로 관심이 높아서 나를 꽤 놀라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사태 때와 미얀마 사태에 대한 한국인들의 여론이 왜 이정도 차이가 있어야 하는지 보편적 원칙 하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고 본다)

어쨌든 반짝 관심은 식고 블로그 같은 인터넷 여론은 물론이고 연합뉴스를 제외한 주요언론의 관심에서도 확실히 멀어진 상태인데, 이 시점에서 한번 따져보고 싶은 논점이 있다. 그것은 이 사태에 대한 한국정부의 반응에 대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늘 그렇듯이 국내정치지형을 따라 두 가지 상반되는 견해가 제기되었데 흥미로웠다.

첫번째 유형의 견해는 한국 기업이 미얀마에서 천연가스 개발사업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소극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기본적으로 (강대국의) 제3세계 착취설의 연장선에 있다. 즉 드디어 한국도 해외에서 제국주의적 이권추구, 특히 그중에서도 악명 높은 석유이권에 달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정부가 버마민중항쟁에 지지 입장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 (리장)

두 번째 유형의 견해는 한국이 북한의 인권 혹은 민주화 문제를 다룰 때 쓰는 명분이 다른 외국의 인권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룰 수 없게 만들거나 얼굴에 철판 깔고 이중잣대를 휘두르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다 찔리는게 있어서 그렇다니까. (kirhina)
이중성의 모순과 미얀마. (마나™)


적어도 두 의견은 한국정부가 소극적으로 반응한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정도면 적극적인 반응이 되는 것일까?

지금까지 한국정부의 반응이란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사건 초기에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고

1. 정부는 최근 미얀마에서 계속되고 있는 시위로 인명이 희생되는 상황이 발생한데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미얀마 정부의 자제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2. 정부는 미얀마 정부와 국민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화와 국가발전을 이룩해 나가기를 강력히 기대합니다.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EU가 주도한 다음 내용의 결의안에 공동제안자로 참여하였다.

ㅇ 평화시위에 대한 미얀마 정부의 폭력적 탄압행위 개탄 및 자제 촉구
ㅇ 아웅산 수지 여사를 포함한 정치수감자 즉각 석방 촉구
ㅇ 집회결사 및 표현의 자유 등 평화적 정치활동 제약 해소 촉구
ㅇ 국민화합, 민주화, 법치확립을 위해 제 정당 단체와의 대화 개시 촉구
ㅇ 특별보고관의 현지 상황 조사 협조 등 미얀마 정부의 유엔 인권 메카니즘에 대한 협력 요청

이것보다 강도가 더 높은 대응책은 대충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외교적 항의 표시(대사 소환에서 단교까지)
2) 경제제재
3) 군사력 투입(동티모르나 레바논 PKO에서부터 브레즈네프 독트린까지)

3번은 현실성이 없고, 1번은 효과가 없을 게 뻔하므로, 결국 경제제재를 하느냐 안하느냐가 적극적인 정책 여부를 가르는 기준인 듯 싶다.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첫 번째 견해, 즉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미얀마 사태에 소극적이란 주장은 내가 볼 때 거의 확실히 틀렸다. 이 주장을 옹호하려면 한국이 경제적 이해관계가 미미한 나라에게는 경제제재같은 적극적 정책을, 경제적 이해관계가 큰 나라에게는 침묵 같은 소극적 정책을 구사했다는 증거를 들 수 있어야 한다. 지난 20여년간 민주화/인권 관련해 문제가 된 국가는 적지 않다. 그 중 어떤 사례들을 갖고 그런 결론을 입증할 수 있을까?

두 번째 견해의 경우 이것이 사실인지를 입증할 방법은 마땅치 않지만, 인권/민주화 문제와 관련해 한국이 북한과 그 외 국가에 대해 이중기준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든 것 같다. 그렇더라도 북한 문제가 없었더라면 미얀마에 대한 대응이 더 강경했겠느냐는 솔직히 회의적이다.


근본적으로 한국은 외국에 대한 경제제재나 군사적개입 같은 중대 사안을 주도할 만한 실력이 없는 그저 그런 중간규모 국가에 불과하다. 그런 사업을 주도하는 것은 미국이나 EU, 혹은 桓國 같은 강대국의 영역이고 이들 강대국들의 간의 협조 없이는 성사될 수도 없다. 그렇게 본다면 이번 미얀마 사태에 대한 한국의 대응은 능력 혹은 역사적 선례 어느 쪽에 비추어 보더라도 소극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by sonnet | 2007/10/12 00:32 | 정치 | 트랙백 | 핑백(1) | 덧글(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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