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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반우파투쟁
2010/06/09   낙점! [97]
2010/02/03   오늘의 한마디(周揚) [32]
2009/12/15   마오쩌둥의 문화정책과 그 이후(3) [60]
낙점!
전국에서 지식인 55만 명을 숙청했던 중국의 반우파투쟁(1957) 당시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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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전국에 우파로 낙인찍힌 자는 몇 십만에 달한다고 한다. 우파로 분류할 자들이 너무 많아 위에서 아래까지 각 단위별로 일정한 비율을 내어 숫자를 확정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한 대학에 몇 명을 우파로 분류하며, 무슨 과에는 몇 명, 무슨 반에 몇 명, 그리고 그 숫자는 몇 명을 초과하면 안 되는 것 등이었다.
어떤 단위의 한 책임자는 자신에 의해 우파로 몰렸던 한 동료에게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너를 우파로 몰지 않으면 내가 우파로 몰려야만 했으니! 그렇지 않으면 인원수를 채우지 못하게 되고!”
그 외에도 정말 웃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는 또 있다. 어떤 단위에서 우파 인원수 1명이 모자라 책임자 3명이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였지만 마땅한 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시간은 자꾸 지나고 회의는 쉬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그 중 1사람이 화장실에 소변을 보러 가게 되었다. 회의실에 남은 2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모아 말했다.

“저 사람으로 결정하자!”

결국 그가 우파로 몰리고 말았다고 한다.

출처: 郭良玉 저, 문용성 역. 『고깔모자를 쓴 지식인』. 부산: 곤오원, 2001. pp.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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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一. 커다란 오줌보는 근성가이의 필수품!

記二. 저런 식으로 위에서 TO가 정해져 내려오는 현상은 마오 주석이 숙청을 벌일 때 입버릇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우리 편)인데 한 10%(또는 3%나 5%) 쯤의 나쁜 사람들이 그 속에 섞여들어와 있다'는 식으로 구도를 깔기 때문이다. 이것은 엄격히 말하면 10%를 채우란 이야긴 아니지만 내가 책임을 맡은 부서에서 그보다 현저히 많거나 적으면 내가 불성실한 당원이 될 염려가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실질적인 목표치처럼 작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1957년 3월에 있었던 "지식인의 사상 개조와 정풍(整風) - 중국공산당 전국 선전사업 회의에서의 연설"이란 마오쩌둥의 언급 일부를 살펴보면 이런 식이다.

둘째는 우리냐라 지식인의 상황에 관해서다. 중국에 대관절 지식인이 얼마냐 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누구는 어림하길, 각종 지식인, 고급 지식인과 보통 지식인을 포함하여 대략 5 백만 명가량이라 했다. 이 5 백만 가량의 지식인 중 절대 다수는 애국적이며,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을 사랑하며, 인민을 위해 복무하고자 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위해 복무하고자 한다.

소수의 지식인은 사회주의 제도에 대해 그렇게 환영하지 않고, 그리 반겨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사회주의에 대해 아직도 회의를 지니고 있으나, 제국주의 앞에서는 그들 역시 애국적이다. 우리나라에 대해 적대적 감정을 지닌 지식인은 극히 소수이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의 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국가를 좋아하지 않으며, 그들은 구 사회를 그리워한다. 기회만 닿으면 그들은 소동을 피울 것이고, 공산당을 전복시키고 구 중국을 회복하려 한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조아지 두 노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노선 사이에서 고집스레 후자의 노선을 가려는 사람들이다. 이 후자의 노선은 실제로 실현 불가능하며, 그리하여 그들은 실제로는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에 투항을 준비하는 사항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정치계, 상공계, 문화 교육계, 과학 기술계, 종교계에 모두 존재하며, 이들은 다소 극단적인 반동 인물이다. 이련 사람들은 5백만 가량의 지식인 가운데 대략 1내지 3퍼센트를 차지한다. 절대 다수의 지식인, 5백만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정도 상에서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사회주의 제도를 옹호하는 사람들 가운데, 아마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 제도 아래서 어떻게 일하고 많은 새로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처하며, 어떻게 답할 것이냐 하는 데 대해서 여전히 그리 분명치 않을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강령성 문건인 "문혁 16조"에도 동일한 구도, 즉 95%의 좋은 사람(우리편)과 5%의 반동이라는 구도가 제시된다.

누가 우리의 적인가? 누가 우리의 친구인가? 이 문제는 혁명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문화대혁명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당의 지도자는 좌파를 발견하여, 좌파 대오를 발전시키고 키워야 하며, 단호히 혁명적 좌파에 의지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운동 중에 가장 반동적인 우파를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대다수를 단결시키며, 운동을 거쳐서, 마침내 95% 이상의 간부를 단결시키고, 95% 이상의 대중을 단결시킬 수 있게 된다.
역량을 모아 한 줌의 지극히 반동적인 부르주아 계급 우파분자,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를 타격하고, 그들의 반당 반사회주의 반마오쩌둥 사상의 죄행을 충분히 폭로하고 비판하며, 그들을 최대한 고립시킨다.

by sonnet | 2010/06/09 10:26 | 정치 | 트랙백 | 덧글(97)
오늘의 한마디(周揚)

문예는 곧 시대의 기압계입니다. 계급투쟁의 형세에 크나큰 변화가
생길 때마다 이 풍향계에서 그것의 조짐을 알 수 있습니다.

文藝是時代的風雨表。每當階級斗爭形勢發生急劇的變化,就可以在這個風雨表上看出它的征兆。

- 저우양(周揚), 「문예전선상의 일장 대변론」(1958) -



문제는 마오주석이 끊임없이(不斷) 계급투쟁과 혁명이 벌어져야 한다고 믿는 영구혁명론자라는 것인데…
by sonnet | 2010/02/03 09:54 | 한마디 | 트랙백 | 덧글(32)
마오쩌둥의 문화정책과 그 이후(3)
앞서는 이론적인 논쟁을 길게 다룬 감이 있는데 이번엔 좀 가볍게 가볼까요. 참고로 본문에서 말하는 '이 시기'는 반우파투쟁까지를 말합니다.


비판받은 작품들

그런데 이토록 혹심한 비판을 받은 작품들의 내용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이 시기에 비판받은 몇몇 작품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단편소설 『우리 부부 사이我們夫婦之間』 (1950년)

도시 지식인 리커(李克)는 농촌으로 내려가 6년간 사회주의 혁명에 투신한다. 그는 그곳에서 혁명사업에 열성적인 빈농 출신의 한 여성 노동자를 만난다. 둘은 조국 해방을 위해 헌신하는데 뜻을 같이 하게 되고, 둘의 관계는 결혼으로까지 이어진다. 동료들은 이 결혼을 도시 출신의 지식인 간부와 빈농 출신 노동자의 결합, 즉 '지식인과 농공 결합의 전형'이라고 찬양한다. 해방이 되자 도시 청년 리커는 자신의 직장을 찾아 도시로 귀환하게 되고, 아내도 이와 함께 한다.

리커는 고향에 온 기분으로 동료들과 어울려 다니며 도시 생활을 만끽하나, 빈농 출신의 아내는 남편의 생활을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남편은 급료로 도시의 윤택한 생활을 즐기고자 하나, 아내는 그 돈을 고생하는 농촌의 친정에 보내기를 원한다. 그녀는 도시인들의 나태한 생활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도시 생활에 적응하기를 요구하지만, 아내는 남편이 쁘띠 부르주아 계급의 반혁명정신에 오염되었다며 비판한다. 결국 이러한 부부 사이의 균열은 이혼에 이르게 된다. 그러자 남편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부부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어 다시 사회주의혁명의 기본정신 아래서 결혼 초의 행복한 가정으로 돌아간다.

이 작품은 발표 직후 『광명일보』에서 "도시 지식인과 빈농 출신의 노동자의 갈등을 사회주의 혁명의 기본정신으로 극복한 우수한 소설"이라는 격찬을 받으며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그러나 곧 "지식인 간부와 노농 간부가 결합하는 과정을 묘사하려면 결코 부부 사이의 일상생활 중의 말다툼과 화해를 통해 드러내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표현함으로서 정치주제를 저속화하였으며, 결국 소시민의 저급취미와 자질구레한 일상사의 뒷맛을 남겼을 뿐, 간부는 무능하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왜곡"되었으며 "이렇게 쓰여진 작품은 당의 요구에 따라 소자산계급사상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소자산계급사상에 의해 당을 개조하려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작가 샤오예무(蕭也牧)는 중일전쟁 발발 후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공산당 산하에서 언론인으로 줄곧 일해왔다. 하지만 이 작품이 문제가 되어 우파로 몰려 고생하다가 문화대혁명 때 핍박으로 사망하게 된다.


단편소설 『저지대에서의 전투洼地上的戰役』 (1954년)

때는 한국전쟁. 전선 가까운 한 시골마을에 의용군[중공군] 분대가 주둔하게 된다. 이들이 묵게 된 농가의 딸 김성희는 부대의 척후병인 씩씩한 청년 왕잉훙(王應洪)에게 한 눈에 반한다. 이를 눈치 챈 분대장은 왕잉훙에게 의용군의 사명을 환기하며 군율을 지키도록 엄히 당부하고, 이에 젊은 두 남녀는 서로 가슴만 태운다. 하루는 성희가 왕잉훙의 군복을 세탁해 왔는데 그 안에는 그녀가 손수 짠 양말이 들어있음을 발견한다. 그가 이를 부대장에게 솔직하게 보고하자 분대장은 즉시 돌려주라고 명한다. 그 때 상부에서 급히 정찰을 나가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출동 중에 왕잉훙은 그의 군복 주머니에 양말 외에도 또 한 장의 곱게 수놓은 손수건이 들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적과 조우해 전투가 벌어져 그와 분대장은 부상을 당하게 되고, 그는 그제야 분대장에게 양말을 돌려주지 못한 일과 손수건이 있었음을 보고한다. 그들은 작전을 마치고 귀환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적의 기습을 받아 왕잉훙은 전사하게 된다. 분대장은 피묻은 양말과 손수건을 성희에게 건네며 그의 전사를 알리고, 그녀는 분대장의 손을 붙잡고 오열한다.

이 작품은 발표 직후부터 독자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다른 작품에 비해 내용이 매우 신선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 경쟁작품들의 상황을 잘 말해주는 일화라 하겠다. 하여간 이 작품은 당초 "인민지원군 전사의 고도의 애국주의·국제주의와 혁명적 영웅주의 정신과을 열정적으로 찬송 … 무산계급 혁명영웅의 형상을 집중적으로 조성"한 모범작으로 받아들여졌었다.

그러나 이듬해 작가 루링(路翎, 1923~1994)이 잡지 『칠월(七月)』 동인이었던 탓에 후펑 반혁명집단의 일원으로 묶여 숙청당하자, 이 작품은 단번에 “의용군으로 전장에 나갔으면 전투에 전념해야지 군인의 본분을 망각하고 연애나 하는 반동적 행위를 묘사한 작품”이 되어 독초(毒草)로 규정되어 폐기되었다.


영화 『가족방문기探親記』 (1958년)

어린 시절 지주의 채찍질을 당하며 큰 티엔강(田剛)은 이제 성공해 당의 부국장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3년이나 고향의 아버지에게 편지도 돈도 부치지 않는다. 애가 탄 아버지는 북경으로 올라와 자식을 찾는다. 그러나 아들은 관료티를 내면서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고향에서 찾아온 마을 사람들 만나기를 거절하고, 일이 있어 출근하지 못한 공무원을 대신해 아버지가 사무실을 청소하고 있으려니 이를 모른 체 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마침내 아버지는 아들이 대중과 유리된 심각한 사상 작풍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아버지는 헤어질 때 옛날 지주가 아들을 치던 채찍을 꺼내어 여러 사람들 앞에서 대중과 유리되어 근본을 잊은 간부가 되었음을 엄히 꾸짖은 후, 의연히 고향으로 돌아가 사육원으로 일한다.

이러한 줄거리를 따라 영화가 촬영되던 중 반우파투쟁이 시작되고, 신문 지상에 폭로된 이른바 '우파의 언행' 중에 공산당원을 육친도 몰라보는 놈들이라고 모멸한다는 사례가 등장한다. 간이 콩알만해진 제작진은 고민 끝에 줄거리를 이렇게 바꾼다.

사실 아들 티엔강은 전쟁 시절에 이미 희생되었는데,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상심할까 봐 그의 옛 전우가 아들인 척 가장하여 티엔강의 이름으로 지금껏 편지와 돈을 보내어 왔다. 그런데 이번에 아버지가 자식을 보러 북경에 올라오는 바람에 들통이 난다.

안타깝게도 급히 내용을 뒤집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비판을 피해가지 못한다. 개봉된 영화는 "전쟁을 대하는 모종의 암울한 심리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비판을 얻어맞던 와중에 원래 각본은 달랐음이 드러나게 되고, 이제 수정 전의 극본이 "바로 우파분자가 공산당을 모멸하는 이야기"라는 죄목이 더해진다. 결과적으로 수정 전후의 각본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작가는 "원한의 정서를 가지고 이 극본을 썼으며, 그 의도 및 효과는 실질적으로 도시와 시골의 모순을 확대시키고 당과 농민 사이에 감정의 골을 만든" 게 틀림없다는 결론을 얻어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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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례들은 앞서 우리가 살펴 본 일련의 비판 운동의 희생자들의 성격을 잘 드러내 준다. 공산사회에서 벌어진 이런 필화사건들을 주마간산격으로 소개하게 되면, 우리는 흔히 희생자들이 작가적 양심 내지는 정의감을 잘 억누르지 못하고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철퇴를 맞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는 상당히 다르다.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실제로 박해받은 작품 중 상당수는 당이 추상적으로 제시한 방향을 구체화하여 사회주의적 미담을 써내려고 있는 힘껏 노력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트집이 잡혀 곤욕을 치른 경우였다.

(또한 일이 이렇게 흐를 수 밖에 없는 다른 이유도 있다. 공산국가에서는 당이 모든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소설, 시, 영화 그 무엇이든 간에 발표가 되었다는 것은 당이 임명한 편집자의 선별을 일단 넘어섰다는 의미다. 지하출판물이 아닌 이상 체제를 적나라하게 공격하는 내용은 우선 논외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당은 추상적인 지침만 주고 일단 작가들이 그것을 구체화하도록 내버려 둔 후, 당의 입맛에 꼭 맞는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을 골라내어 후자에 잔혹한 철퇴를 가하는 방법을 반복함으로서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의 지도자들)은 문화예술이 특정한 정치적 목표에 복무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당은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인 창작을 직접 할 능력은 없다. 그러니 일단 추상적인 목표만 제시한 후, 나온 결과물들을 보고 선별하는 것이다. 작가들은 이 선별 과정을 보면서 당이 명시적으로 제시한 추상적 목표에서 생략된 세부적인 사항들을 눈치껏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큰 희생은 따르겠지만.

그리고 당은 이것을 뒷받침할 기술을 하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비판하고 벌주는 것이었다. 이것 하나 만큼은 이골나게 해 봐서 잘 아는 방법이었고, 세계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을 경쟁력을 갖고 있었다.

선별 과정에서 발생하는 희생은 논외로 치고, 문제는 당(의 지도자들)이 예술적 성취와 정치적 목표를 높은 수준으로 조화시킬 수 있는 그런 섬세한 균형감각이나 감식안을 갖고 있느냐였다.
by sonnet | 2009/12/15 16:42 | 정치 | 트랙백 | 핑백(1) | 덧글(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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