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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문화대혁명
2020/06/23   2월 역류 [3]
2010/04/24   오늘의 한마디(Upton Sinclair), 그리고 여러 마디 [57]
2010/04/16   오늘의 한마디(巴金) [24]
2010/03/25   고육계로서의 자아비판: 정치산문 『수상록』의 전략 [13]
2월 역류
1967년 2월에 들어 인민해방군 장성들은 문혁의 진행 상황에 대해, 특히 여러 혁명 원로들이 홍위병들에게 박해를 받는 모습과 상하이에서 정권 탈취가 일어난 일을 목격하면서 강한 불만을 표출하였다. 그러던 중 2월 11일과 16일에 저우언라이가 화이런탕에서 정치국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떄 예젠잉과 쉬샹첸 등 장군들이 문혁의 문제점을 비판했고, 동석했던 캉성과 천보다가 문혁을 옹호하면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당신들이 당과 정부에 난리를 일으키고, 공장과 농촌에 난리를 일으키는데, 그렇게 하면서 당신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문화대]혁명은 당의 영도가 필요 없어? 군대도 필요 없어? 상하이의 정권 탈취 이후에 상하이 공사(公社)라고 이름을 바꾸었어. 그런데 이처럼 큰 문제, 국가 체제에 관련된 문제를 정치국에서 토론도 하지 않고 당신들 마음대로 명칭을 바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야?” (예젠잉의 말)

“예젠잉 원수(元帥),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네!” (천보다의 빈정거리는 말)
“군대는 무산계급 독재의 기둥(支柱)이야. 당신들은 군대에서도 난리를 일으키는데, 그렇다면 기둥이 필요 없다는 거야! 설마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필요 없다는 말이야? 그러면 콰이다푸(蒯大富: 칭화대학의 홍위병 지도자)를 데려다가 군대를 지휘하지 그래?” (쉬샹첸의 말)

“군대는 당신 쉬샹첸의 것이 아니야! 당신이 무슨 대단한 사람이야?” (캉성의 반박)

이어서 2월 16일에 저우언라이가 주재하는 정치국 간담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그런데 회의 직전에 원로 장군인 탄전린(譚震林)이 크게 화를 내면서 혁명 원로들을 핍박하는 문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다른 장군들도 탄전린의 비판에 가세하여 문혁 세력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당신들은] 항상 무슨 군중, 군중 하는데 당의 영도는 있어? 당의 영도가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군중이 자기를 해방하고, 자기를 교육하고, 자기를 혁명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형이상학(形而上學)이지! 당신들의 목적은 노간부(老幹部)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야. 당신들은 노간부를 하나하나 패 없애고 있어. 노간부가 하나 하나 정리되면, 40년의 혁명은 집이 망하고, 사람이 흩어지며, 처(妻)는 떠나고 자식은 흩어지는 신세가 돼 버려, (……)
나는 평생 울어 본 적이 없는데, 최근에 세 번이나 울었어. 우는데 울 곳이 없어서 비서 앞에서도 울고, 아들 앞에서도 울었어. (……) 정강산(井崗山)[최초의 혁명 근거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당신들이 한 번 검토해 봐.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마오 주석에 반대한 적이 있는지. 나는 나를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전체 노간부를 위해서, 전체 당을 위해서 이러는 거야.

정치국 간담회에서 도저히 비판에 맞설 수 없었던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왕리는 그날 바로 「2월 16일 화이런탕 회의」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마오쩌둥에게 전달했다. 마오는 이를 보고 2월 18일에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여 탄전린 등 원로 장성들을 격렬히 비판했다. 마오는 한바탕 연설을 하고는 곧바로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중앙 문혁소조는 당의 8기 11중전회의 결정을 집행하는 것이야. 착오는 100분의 1, 2, 3 정도고 100분의 99는 정확해. 중앙 문혁을 반대하는 사람은 내가 그 누구라도 굳건히 반대할 거야! 당신들이 문혁을 부정하려고 하는데, 그렇게는 안 될 거야. 예췬 동지! 린뱌오에게 말해. 린뱌오의 지위도 안정적이지 않다고. 어떤 사람이 린뱌오의 권한을 빼앗으려고 하니 준비를 잘 하라고, 이번 문혁이 실패하면 나와 그[린뱌오]는 베이징을 떠나 다시 정강산에 올라 유격전을 전개할 것이야.

당신들은 장칭, 천보다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그럼 당신 천이(陳毅)가 중앙 문혁소조 조장을 맡고, 천보다와 장칭을 체포해서 총살시켜! 나도 물러나겠으니 당신들이 왕밍(王明)을 데려다 주석을 시켜! 당신 천이가 옌안 정풍을 뒤엎으려고 하는데, 전 당이 응하지 않을 것이야. 당신 탄전린은 노당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계속 자산계급 노선에 서서 말해? (……) 나는 이 사건을 정치국 회의를 열어 토론해야 한다고 제의해.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하고, 한 달에 안 되면 두 달에 해. 정치국이 해결하지 못하면 전체 당원을 발동하여 해결하겠어.

이후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1967년 2월 25일에서 3월 18일까지 5회에 걸쳐 정치국 민주생활회(民主生活會: 간부들이 비판과 자기비판 하는 모임)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장칭, 캉성, 찬보다, 셰푸즈 등은 ‘2월 역류’의 죄를 물어 탄전린, 천이, 쉬샹첸을 집중 비판했다. 예를 들어, 캉성은 이렇게 비판했다. “이것은 (공산당 8기) 11중전회 이후 발생한 엄중한 반당(反黨) 사건이다! 이것은 정변의 예행 연습이요, 자본주의 복벽의 예행 연습이다!” 천보다의 비판도 비슷했다. “문혁에 대한 반대는 마오 주석을 우두머리로 하는 무산계급 사령부를 포격하는 일이다. 이는 위에서 아래로의 자본주의 복벽이며, 무산계급 독재의 전복이다!” 이후 비판을 받은 장군들은 현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조영남. 2019. 『중국의 엘리트 정치 : 마오쩌둥에서 시진핑까지』. 민음사. pp.200-203


대화 번역이 너무 재미있어서 옮겨 봄. 당상(黨上)황제의 대사자후가 장포스 느낌.

  • 다시 정강산에 올라 유격전을 전개
  • 왕밍(王明)을 데려다 주석을 시켜!
  • 당신 천이가 옌안 정풍을 뒤엎으려고 하는데

여기 언급되는 사건들은 모두 대륙통일 전 마오가 거병하고 집권해서 권력을 다지는 과정의 주요 사건들이라서, 마오가 문혁에 대한 도전은 곧 자신의 전체 업적에 도전한다는 의미라고 선언한 것이고...
  •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하고, 한 달에 안 되면 두 달에 해. 정치국이 해결하지 못하면 전체 당원을 발동하여 해결

될 때까지 하겠다!
by sonnet | 2020/06/23 17:14 | 정치 | 트랙백 | 덧글(3)
오늘의 한마디(Upton Sinclair), 그리고 여러 마디

모든 예술은 선전이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선전이다.
때로는 무의식적이지만, 대개는 의도적인 선전이다.

All art is propaganda. It is universally and inescapably propaganda;
sometimes unconsciously, but often deliberately, propaganda.


- 『배금예술 Mammonart』, 싱클레어(Upton Sinclair) -


이 선언은 정작 저자의 모국인 미국에서는 거의 무시당했으나, 태평양을 건너 중국에 와서는 혁명(좌익) 문예계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그 결과 궈모뤄의 유성기론(문학은 혁명 이념을 전파하는 유성기가 되어야 한다) 같은 위험천만한 주장들이 대거 양산되면서, 거의 반 세기에 걸쳐 중국문예계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문화대혁명 시기의 삼결합 창작론 등은 이런 사고방식이 극단화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지도자(=마오쩌둥)은 사상을 제시하고, 인민대중(=프롤레타리아)는 소재를 제공하고, 작가는 글쓰기 기교를 제공해 3자합작으로 창작을 하면 된다고 한다. 그 결과, 작가는 자기 사상을 작품에 표현할 수도,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삼을 수도 없게 되어 철저한 글쓰기 기계로 전락하게 된다.
이를 지키지 못한(설령 노력했더라도!) 작가들은 반동학술권위 등으로 지목되어 타도된 후, 시골에서 강제노동을 하며 생활경험도 노동자·농민처럼 개조하고, 마오쩌둥사상 학습을 통해 머리 속도 개조할 것을 요구받게 되는데... 그런데 그런 걸 무자비하게 갈군다고 창작이 잘 될 리가 없지 않겠나.


여기에는 크게 보아 세 가지 입장이 있었다.
첫째는 공산당과 그 영도를 따르는 주류 좌익 문인들의 관점이다.


그대들의 부숴진 나팔을 불지 말라. 잠시 유성기가 되어야 한다.
유성기가 된다는 것 - 이는 문예청년들의 가장 좋은 신조다.


- 궈모뤄(郭沫若), 「영웅수英雄樹」 『창조월간創造月刊』 제1권 8기(1928년 1월) -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문학 예술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사업 전체의 일부분이며, 레닌이 말한 바와 같이 혁명이라는 기계 전체 속의 '톱니바퀴와 나사못'이다. 따라서 당의 문예 공작은 당의 혁명활동 전체에서 할당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당이 일정한 혁명시기에 규정한 혁명의 임무에 복종한다.

- 마오쩌둥(毛澤東), 『옌안 문예좌담회에서의 강연』(1942년 5월) -



두번째는 비주류 좌익 문인들의 관점이다.

나는 문예가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그것을 다른 면 - 예컨대 ‘선전’ - 에 적용하려고 한다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싱클레어는 모든 문예는 선전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혁명적 문학가들은 그것을 보배처럼 여겨 큰 활자로 찍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엄숙한 비평가들은 또 그를 ‘천박한 사회주의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 역시 천박합니다 - 싱클레어의 말을 믿습니다. 일체의 문예는 오직 남에게 보이기만 하면 그것은 선전이 됩니다. 글을 쓰지 않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개인주의적 작품이라 해도 써내기만 하면 선전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혁명에 적용하여 일종의 도구로 삼는 것도 물론 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내용을 충실히 하고 기교를 높여야지, 간판을 내걸기에 급급해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 내가 보기에는 ‘황태후 신발 가게’가 ‘황후 신발 가게’의 손님보다 더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혁명적 문학가들은 ‘기교’란 말만 하면 짜증을 냅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문예는 물론 선전이지만 모든 선전이 죄다 문예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꽃은 다 색깔이 있지만(나는 흰 것도 색으로 칩니다) 모든 색깔이 다 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혁명이 구호, 표어, 포고문, 전보문, 교과서…를 제외하고도 문예를 이용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문예이기 때문입니다.


- 루쉰(魯迅), 「문예와 혁명文藝與革命」『삼한집三閑集』 수록 -


먼저 ‘선전’이라는 커다란 글자의 제목이 있고 그 다음에야 논의를 전개하는 문학작품은 어색하기 그지없다. 직접적인 토로가 없이 부엉이처럼 교훈을 외워대는 문학은 문학이라 할 수 없다.

- 루쉰 -


예술이 비록 ‘최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최하’도 아니다. 예술을 정치적 유성기로 타락시키는 자들은 예술의 반역자이다. 예술가가 비록 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의 뒤나 따라다니는 발바리는 결코 아니다. 하찮은 이론으로 문학을 유린하는 것은 예술의 존엄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이다.

- "자유인" 후츄위엔(胡秋原), 「주구문예론阿狗文藝論」, 『문화평론』 1931년 제1기 -


작가를 유성기로 보지 말아야 한다. 좋은 음반(추상적 개념) 한 장을 그 위에 얹어야 책을 외우듯,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작가 역시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유성기로 만들지 말아야, 작가 대신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이해는 작가를 생활 속으로 밀고 들어가, 생명이 없는 공허한 외침 속에서 문학을 구해내어 혁명적 작가로 하여금 문예 작품 속의 사상이나 의식 형태란 싼 값에 자기 마음대로 빌려 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 후펑(胡風), 「고리끼 단편M.高爾基斷片」『밀운기의 풍습 소기密雲期風習小紀』-

이 중 루쉰은 공산당이 대륙을 통일하기 전에 죽었고, 후펑이나 펑쉬에펑 처럼 대륙에 남아 문예의 상대적 자율성을 주장한 문인들은 차례차례 숙청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마지막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살아남은 공산당 간부들과 문인들의 관점이다.

우리는 문예가 정치에 종속된다는 이러한 구호를 계속 제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구호는 문예를 간섭하는 이론의 근거가 되기 쉽고, 오랜 실천을 통해 문예의 발전에 이익보다는 해가 더 크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 덩샤오핑(鄧小平), 「당면한 상황과 임무目前的形勢和任務」(1980년) -


나는 문학에는 선전효과가 있지만 선전은 문학을 대신할 수 없으며, 문학에는 교육효과가 있지만 교육이 문학을 대신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문학 작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감화를 일으키고 영혼을 정화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정신을 썩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는 독자의 생활경험, 그들이 받은 교육에서 벗어날 수 없다.

- 바진(巴金), 「문학의 효과文学的作用」, 『수상록隨想錄』수록 -


당은 국민경제계획의 수립을 담당한다. 당은 농업정책을 이끌어야 하며 공업정책의 집행도 관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이 밭에 씨를 어떻게 뿌리고, 걸상을 어떻게 만들며, 바지를 어떻게 마름질하고, 야채를 어떻게 볶을 지까지 영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글을 어떻게 쓰고, 배우가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까지 일일이 영도해야 할 필요는 없다. 문예, 그리고 문예가에게는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만약 당이 문예의 너무 세세한 것까지 간섭하려 든다면 문예에게는 전혀 희망이 없으며 끝장나고 말 것이다.

‘사인방’은 문예에 지독하게 간섭한 끝에 연기자가 몸에 걸친 허리띠 하나, 천 쪼가리 한 장까지 참견했다. 그 결과 8억 인민이 즐길 수 있는 문예라고는 겨우 8편의 혁명모범극이 남았을 뿐이다. 이런 꼴을 보고서도 우리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단 말인가?


- 영화배우 자오단(趙丹)의 병상 유언, 「너무 구체적으로 지도하려 들면, 문예는 희망이 없다管得太具體, 文藝沒希望」, 『인민일보』 1980년 10월 8일 -

이처럼 문화대혁명이 끝난 다음, 죽도록 고생해 본 문예계 인사들이 이구동성으로 토로하는 견해는 문학예술이 선전효과가 있긴 해도 엄연한 한계가 있으며, 너무 그 효과를 우려먹으려고 쥐어짜면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외양간에서 가축 취급을 받으며 10년 동안 같이 굴렀던 당 고참 간부들도 그 점에는 동감이었다. 이것은 결국 앞서 소개한 루쉰의 입장을 고통스럽고 "오랜 실천을 통해 … 증명"한 셈이라 하겠다.

혁명모범극 『沙家浜』 : 문화대혁명이 만들어내려고 했던 새로운 무산계급 문화의 '예시'.
옛문화를 무자비하게 때려부수긴 했지만, 그것을 대체할 새 문화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예술가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더 그랬다. 결국 몇 편의 '예시' 이상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by sonnet | 2010/04/24 12:16 | 한마디 | 트랙백(1) | 핑백(1) | 덧글(57)
오늘의 한마디(巴金)

열 살 때, 『악비전』을 읽었을 때부터 풀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악비를 죽인] 진회는 어떻게 그런 큰 권력을 갖게 되었을까? 이번에 항저우에서 서호의 풍경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해설자가 악비묘를 소개하면서 풍파옥의 죄인들을 언급할 때, 진회 앞에 송 고종의 이름을 덧붙였다.
이것이 바로 정확한 해답이다.

- 바진(巴金), 『수상록』 중 「86. 사고의 방향」-

by sonnet | 2010/04/16 12:45 | 한마디 | 트랙백 | 덧글(24)
고육계로서의 자아비판: 정치산문 『수상록』의 전략

비루는 비루한 자의 통행증 卑鄙是卑鄙者的通行证
고상은 고상한 자의 묘비명 高尚是高尚者的墓志铭


- 베이다오(北島), 『회답』(1976) -

새가 죽음에 이르면 그 울음소리가 구슬프고 鳥之將死 其鳴也哀
사람이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 말이 선해진다 人之將死 其言也善


-『논어』 태백편 -



중국의 원로 작가 바진(巴金)은 문화대혁명이 끝난지 조금 후인 1978년 말부터 홍콩의 『대공보』에 ‘수상록隨想錄’이라는 칼럼을 연재한다. 1978년 12월 1일에 씌어진 제1편 「망향을 이야기한다談望鄕」부터 1986년 8월 20일에 집필한 「후펑을 그리며懷念胡風」까지, 8년에 걸쳐 발표한 총 150편의 수필을 묶어 다섯 권으로 간행한 것이 바진의 수필집 『수상록』이다.


『수상록』의 주제는 명백하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서문에서 잘 밝혀 두었다.

붓을 잡고 나서 갖가지 제목들을 접하며 이러저러한 일들에 대해 왈가왈부하였지만, 내 생각은 오히려 하나의 테두리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10년 대재난이라고 부르는 문화혁명이다. 그 단어를 언급만 해도 존경심에 소리 높여 “만세!”를 외쳤던 시절이 내겐 있었다. 8년간의 회고, 분석과 해부를 거쳐 나 자신을 바로 보게 되었고, 자신을 통해 주위 사람들과 주변의 일들에 대해 다소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붓은 늘 나의 상처를 건드렸다. 처음 원고지에 붓 가는 대로 글을 적어 먼 곳에까지 원고를 부친 것도 우정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또 그 글들을 발표하면 내 자신의 정신적 부담을 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훗날에서야 10년 동안 외양간에서 살았던 나에게는 사람들을 넋 나가게 만들었던 그 대사기극을 폭로하여 후손들에게는 절대로 그런 재난을 겪지 않게 해야 하는 책임이 있음을 차츰 알게 되었다. ("합정본 신서문")

이 자체는 그다지 놀라울 것이 없으며 사실 꽤 진부한 동기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뭔가 남다른 데가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좀 해보자.

소위 회고담이나 회고록 류를 읽어보면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이런 류의 책들은 백이면 백, 잘 된 일에 있어서는 자신의 기여를 강조하고, 또한 잘못된 일의 경우엔 그 의미를 축소하거나 그 때 나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상세하게 해명하는 자기합리화의 경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수상록』은 이 패턴을 뒤집음으로서 고도의 전략적 글쓰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저자 자신이 문혁의 주요 피해자인 만큼, 평범한 사고방식을 따른다면 『수상록』 또한 나를 괴롭혔던 문혁의 참상을 고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바진은 그런 진부한 방법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건국 후 문혁 발발 이전까지의 17년 동안 끊임없이 벌어져 왔던 지식인 박해운동 과정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끈기있게 반복해 자아비판한다. 자신은 덩퉈(鄧拓)나 후레이(傅雷), 텐자잉(田家英)처럼 거대한 불의에 직면해 결연히 자결해서 삶을 마감한 것도 아니고, 후펑(胡風)처럼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감옥에 갈 지언정 끝까지 버티는 대신, 다른 대부분의 지식인들처럼 문혁이 자신을 덮쳐 올 때까지는 기본적으로 정부(당)에서 내려오는 노선에 순종하며 따라갔다는 것이다.

공산 치하에서 자아비판은 흔한 형식이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주위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이제 그는 강요 없이도 자발적으로 자아비판을 강행한다. 아니 말려도 한다. 왜인가?

그는 자신의 그러한 태도가 친구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밝힌다.

한 친구는 유명한 잡문가인데 편지에 쓰길,'자신이 과거에 진리라고 여겼던 거짓말에 대해 나는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네. 자네도 그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길 바라네 … 이후에 자기가 그런 류의 글을 다시는 쓰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 나는 그런 보증수표는 끊지 못하겠네."

나 역시. '당시에는 용기가 없었'지만, 이후에는 과연 용기가 생길런지? 그는 아주 솔직하게 '그런 보증수표는 끊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나라고 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진실을 말하면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할 수 없다. 그도 역시 할 수 없을 것이다. (79. 세 번째 "진실을 말함")

바진은 자신이 기회주의적으로 '비루한 자의 통행증'을 끊고 당의 표적이 된 다른 지식인들을 비난하는데 동참하고, 속으로는 자신이 표적에서 벗어났음에 안도했던 많은 보통 사람들 중 하나라고 말한다. 이를 털어놓고 반성하면서 그는 "나는 나 자신의 일을 이야기할 뿐이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굳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할 필요가 있을까? 그들이 찔리다 못해 편지를 보내어 그만 하면 어떠냐고 제안해 올 정도이니까.

'강아지 바오띠'는 이런 전략의 전형적인 예다. 잘 보면 이 이야기에서 홍위병들은 바진네 개를 죽이라고 한 적이 없다. 흉흉한 분위기가 연출되자 어떻게든 재앙을 피하려고 바진 가족이 머리를 굴리는 과정에서 알아서 기느라고 자신을 잘 따랐던 개를 희생시킨 것일 뿐이다.

문화대혁명 와중에 많은 지식인들이 이런 식으로 친구나 동료, 스승이나 제자를 팔아치웠다. 야심가나 기회주의자여서 그런 경우도 적지 않지만, 양심적인 사람들도 많이들 동참했다. 내가 그를 팔지 않으면 나도 그의 일당으로 몰려 타도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준명문학' 편에서 바진은 자신도 비슷한 상황에서 《불야성》의 작가 커링(柯靈)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고 밝힌다.

이렇기 때문에 문혁에서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강아지 바오띠'는 그냥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들의 치부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자 아주 불편한 글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바진이 자신을 겨냥해 욕을 했더라면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변명이라도 해 볼텐데, 그런 것도 아니다. 반박은 더더욱 할 수가 없다. 바진은 겉으로는 철저하게 '내가 나쁜 놈이다, 나는 반성한다. 남의 일은 모르겠다. 나는 반성한다'고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진은 전략적 글쓰기, 자신의 심신을 괴롭혀 남들에게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고육계로서의 자아비판'을 강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루쉰의 잡문을 비롯해서 현대(당대) 중국 작가들에게는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 정치성 짙은 산문을 써온 오랜 전통이 있는데, 바진의 『수상록』 또한 독창적인 전략을 구사한 정치산문의 한 형태인 셈이다.
by sonnet | 2010/03/25 12:17 |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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