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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무훈
2009/12/04   마오쩌둥의 문화정책과 그 이후(1) [57]
마오쩌둥의 문화정책과 그 이후(1)
원래는 한 편의 글로 쓰려고 했던 것인데, 어떤 사건이 있었다 정도가 아니라 디테일을 다루려다보니 끝없이 길어져서 몇 편으로 쪼개기로 했습니다. 지금 예상으로는 4~6회 정도 분량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나라를 세우면 응당 「문자의 옥」을 일으키는 법,
지식인을 산 채로 파묻어 제왕의 위엄을 보이노라

開国應興文字獄, 坑儒方顕帝王威

- 楊憲益(1915-2009) -



『무훈전』 비판(1951년)

마오쩌둥의 문예비판은 해방구 시절이던 1942년의 연안문화정풍운동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겠지만, 어쨌든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대륙을 석권하고 중공정권을 수립한 후의 첫 문화비판운동은 영화 『무훈전(武訓傳)』을 표적으로 하여 개시된다.

무훈(武訓, 1838-1896)은 청말 산동성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무칠이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렵게 생활하였는데, 젊어 머슴 생활을 하다가 주인이 그가 글을 모르는 것을 이용해 속이고 굴욕을 주자 글을 배워야겠다는 깨달음을 얻고 평생 구걸과 폐품수집 등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30여년 후, 그간 모은 돈으로 학교(崇賢義學)를 열자, 그 뜻에 감복하여 많은 기부금이 답지하게 되고, 제2, 제3의 학교를 열게 된다.

무훈의 이런 인상적인 이야기는 청대 말기에서 중공정권 수립(1949) 사이에 아주 높게 평가되었고, 중국 교육의 모범으로 추앙되었다. 1930~40년대에는 무훈을 기리는 시, 산문, 전기 등이 잇따라 발표되었고, 무훈의 이름을 딴 학교들이 수십 곳 설립되었을 정도이다. 특히 미국에서 듀이에게 배우고 귀국해 중국 대중교육운동에 헌신했던 타오싱즈(陶行知, 1891-1946)는 무훈의 높은 뜻을 오늘에 되살려 중국 향촌 교육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신무훈정신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이런 배경 아래서 1951년 초, 당대의 명감독 쑨위(孫瑜)가 극본과 감독을, 유명 배우 자오단(趙丹)이 주연을 맡은 전기영화 『무훈전』이 개봉된다. 이 영화는 무훈에 대한 그간의 평가를 큰 무리 없이 따르고 있었으며, 완성도도 높아 전국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이를 관람한 궈모뤄(郭沫若) 같은 공산당계 지식인들은 "무훈이라는 민중교육의 영웅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저우언라이(周恩来), 주더(朱徳) 같은 중국공산당 고위 간부들 또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다소 불안한 점도 있었다. 문예보에 실린 "교훈이 되기엔 부족한 무훈", "타오싱즈 선생이 표창한 무훈정신에는 적극적인 역할이 없음을 논함" 등의 비판이 무훈이라는 소재가 새로운 공산통치의 대의와 합치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기 때문이다.

5월 16일 『인민일보』에 중앙선전부 부부장 저우양(周揚)의 영화 '무훈전' 비판이, 이어 20일에는 "마땅히 영화 '무훈전' 비판에 주목해야 한다"라는 사설이 실린다. 이 사설은 무훈전이 부르주아 개량주의의 표본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걸식을 통해 학교를 세운 것은 봉건지배계층에 허리를 굽히는 투항주의이자 추악한 고행주의이며 따라서 무훈은 '봉건적 문화의 선전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민일보라는 매체의 위상과 그 단정적인 논조는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미 저우언라이나 주더 등이 호의적으로 평가한 영화에 대해 이처럼 혹독한 평가가 내려졌다는 것은 최고위층의 개입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예상대로 이 사설은 사전에 마오쩌둥이 직접 감수한 것이었다.

이어 당은 신속히 무훈의 고향에 인민일보와 중앙문화부의 합동조사팀 '무훈역사조사단'을 투입하여 약 한 달 간의 현지조사를 진행한 후 1951년 7월 23~28일 간에 걸쳐 인민일보 지면에 장장 4만 5천자 길이의 『무훈역사조사기』를 연재한다. 이 보고는 무훈을 대지주, 고리대금업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무훈이 운영한 학교 학생 대부분은 지주, 부농, 상인 계급 출신이고 빈농 출신은 하나도 없었으며 이는 무훈과 무훈학교의 계급적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이 조사는 처음부터 무훈에게 뒤집어씌울 죄목을 찾아내기 위한 짜고 치는 게임일 뿐이었다.

이렇게 인민일보가 공격의 깃발을 높이 흔들자, 중앙에서 전국 각급 기관에 이르기까지 무훈전 비판의 대대적인 행렬이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제일 요란했던 것은 교육계로 당시 교육부장이던 마쉬룬(馬敍倫) 이하 23명의 교육관계자들이 '과거 무훈을 무비판적으로 찬미했던' 과오에 대한 자아비판을 발표하고, 51년 5월부터 그해 말까지 전국의 200만 초중학교 교사들을 동원해 무훈전 비판을 통해 교육과 혁명의 관계를 논하는 토론 학습회를 진행한다. 앞서 무훈전에 찬사를 보냈던 궈모뤄나 티엔한(田漢) 같은 저명 지식인들 또한 인민일보 지상에 자아비판을 게재해야 했음은 물론이다.
『무훈연구자료대전』(1993)의 관련자료 정리: 1951년의 비판 열풍을 잘 보여준다.

무훈전 비판은 사회주의적 인간형 확립을 위한 사상개조를 목표로, 이후 계속될 중국의 사회주의 문화운동의 틀을 제시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기존에 널리 인정되어 왔던 교육관에 별 생각없이 동조하는 행동에 철퇴를 가한 후, 대대적인 캠페인을 따라 당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지식인들과 인민대중이 따라오게 강제함으로서 중국공산당의 사상지도를 통한 사회주의 노선 추구를 확고히 하겠다는 것이다.


위핑보와 『홍루몽연구』 사건(1954년)

위핑보(兪平伯, 1900-1990)은 청대의 유명한 고증학자인 유월(兪樾)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중국 고전의 깊은 소양을 쌓았으며 1919년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곧 동 대학 교수로 취임한 직후부터 소장학자로 활발한 학술활동을 펼쳤다. 그는 또한 시인이자 산문작가로서 중국 현대문학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연구자로서 그가 손댄 분야는 매우 넓어 『讀詩經禮記』, 『唐宋詞選釋』 등 詩詞曲 분야에도 다양한 저술을 남긴 바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중국 고전문학작품은 홍루몽이었다.

위핑보가 학계에 뛰어든 1920년대 초는 홍루몽 연구에 커다란 변화가 일던 시기였다. 1921년 문호 후스(胡適)가 『홍루몽고증紅樓夢考證』를 발표하고, 뒤이어 위핑보가 1923년 『홍루몽변紅樓夢辨』을 내놓으면서, 이들이 선보인 새로운 홍루몽 연구는 청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홍루몽 연구(舊紅學)와는 일선을 긋는 새로운 학파라는 뜻으로 신홍학(新紅學)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후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게 되자(1949년) 후스는 미국으로 망명하고, 위핑보는 대륙에 남아 인민공화국에 합류하는 길을 선택한다. 따라서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대륙 제일의 홍루몽 연구자라고 할 수 있었다.

첫 홍루몽 연구서인 『홍루몽변』을 발표한지 30년이 지난 1952년, 위핑보는 그간의 연구를 종합한 『홍루몽연구』를 내놓는다. 당의 공식 문예지인 『문예보』가 이 책에 내린 평가를 보면 당시 문예계 주류의 시각을 읽을 수 있다.
과거의 모든 홍학자들은 전부 색안경을 끼고 감추어진 것을 찾는데 주력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견강부회요 바람잡고 구름잡는 격이다. 『홍루몽연구』에서는 세밀한 고증과 교감으로 옛 ‘홍학’의 일체의 잠꼬대를 일소하였으니 이는 대단한 공적이다.
고전문학에 대한 관심이 강조되던 시대 상황과 맞물려, 그는 1954년 잡지 『신건설』에 『홍루몽간론紅樓夢簡論』을 발표할 때까지 3년 사이에 다수의 홍루몽 관련 논문을 내놓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사건은 산둥대학 중문과를 갓 졸업한 두 젊은이 리시판(李希凡)과 란링(藍翎)이 바로 이 『홍루몽간론』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이 글에서 그들은 『홍루몽간론』이 명확한 계급관점이 없이 추상적인 예술관에 의거하고 있어 『홍루몽』이 갖는 반(反) 봉건의 현실적 의의를 과소평가했다고 비판하고,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관점 특히 엥겔스의 발자크론에 비추어 볼 때, 『홍루몽』은 저자 조설근의 리얼리즘적 창작방법이 그의 낙후된 세계관을 극복하고 승리한 위대한 현실주의 작품이라고 단정하였다. 이들은 처음에 『문예보』에 투고했으나 게재되지 못하자, 모교 학술지인 『문사철文史哲』를 통해 이를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글은 곧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의 주목을 받게 된다. 장칭의 추천으로 이를 읽어 본 마오쩌둥은 이 글을 『인민일보』에 전재하라고 지시한다. 장칭은 인민일보에 이 지시를 전하였으나 신문출판총서 책임자 후차오무(胡喬木)와 인민일보 편집장 덩퉈(鄧拓) 등은 협의 끝에 인민일보 대신 『문예보』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예보』 편집장이던 펑쉬에펑(馮雪峰)은 이들의 평론 「《홍루몽간론》및 기타에 관하여關於《紅樓夢簡論》及其他」를 게재하면서 다음과 같은 해설을 붙인다.
이 글은 원래 산동대학에서 출판된 월간 『문사철』의 올해 제9기에 발표되었다. ㉠이 글의 작자는 중국고전문학을 갓 연구하기 시작한 두 젊은이들로, ㉡이들은 과학적 관점[맑시즘; 역주]에서 『홍루몽간론』이라는 위핑보 선생의 글의 논점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고자 시도하였는바, 우리는 여러분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작자의 동의를 얻어 그 글을 여기에 전재하니, 여러분들의 토론을 불러일으켜 위대한 걸작 ㉢『홍루몽』에 대해 더욱 깊고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전재할 때 작자가 약간의 오자를 바로잡고 편자가 한 두 자구를 바꾸기는 하였지만, 작자의 원래의 의견을 완전하게 보존하였다. ㉣작자의 의견은 그다지 면밀하지 못하고 전면적이지 못한 점이 분명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홍루몽』을 인식하였음은 기본적으로 정확하다. ㉤여러분 모두가 계속해서 깊이 있게 연구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이해는 더욱 심오해지고 면밀해지며 인식 역시 더욱 전반적이 될 것인 바, 『홍루몽』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나라의 모든 우수한 고전문학작품에 관해서도 그러할 것이다.

이 편집자 해설을 보면 당시 『문예보』 편집진이 자신들의 기존 입장(및 학계의 통설)과 상부의 지시를 어떻게든 절충하려고 고심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즉 이 글은 "과학적 관점[맑시즘]에서 … 비판 … 기본적으로 정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중국고전문학을 갓 연구하기 시작한 두 젊은이들 … 작자의 의견은 그다지 면밀하지 못하고 전면적이지 못"하다며 견제한 후, "계속해서 깊이 있게 연구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이해는 더욱 심오해지고 면밀해지며 인식 역시 더욱 전반적이 될 것"이라는 말로 앞으로 잘 해보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식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는 것이다.

후차오무와 덩퉈 등 언론 관계 당 간부들이 이 글을 『인민일보』 대신 학술지인 『문예보』로 옮겨 실은 이유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에 따르는 듯 하면서도 은근히 이 문제를 축소해 덜 눈에 뜨이는 곳으로 옮김으로서 조용히 다루려고 했던 것이다.
《중국, 당-정부의 문화기구》

그러자 마오쩌둥이 직접 칼을 뽑아들었다. 1954년 10월 16일, 그는 《'홍루몽연구' 문제에 관한 서신》이란 문건을 중공중앙정치국과 기타 관련자들 앞으로 보내 비판운동을 독려한다.
위핑보를 반박하는 글 두 편을 첨부하였으니 읽어들 보기 바란다. 이것은 30년대 이래의 이른바 홍루몽연구에 권위 있다는 작가의 그릇된 관점에 대한 첫 번째 진지한 공격의 시작이다. 저자는 두 명의 공산청년단원이다. 그들은 먼저 《문예보》에 편지를 보내 위핑보를 비판하여도 좋은지를 물었으나 본척만척 무시당했다. 그들은 부득이 그들의 모교인 산동대학 선생에게 편지를 써서 지지를 얻었고, 또한 그 학교 간행물인 《문사철》에 《홍루몽간론》을 반박하는 그들의 글을 실었다. 문제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누군가가 《인민일보》에 이 글을 게재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기화로 논쟁이 일어나 비판이 전개되었으나, 일부 사람들의 여러 가지 이유(주로 “하찮은 신인(小人物)의 글”이라는 이유와 “당보(黨報)는 자유논쟁의 장소가 아니라는 이유”)로 인해 반대를 받아 실현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타협이 이루어져 《문예보》에 이 글의 전재가 허락되었다. 이후 《광명일보》의 《문학유산》란에 위핑보의 《홍루몽연구》라는 책을 반박하는 이 두 청년의 글이 발표되었다. 보아하니 이 고전문학영역에서 30여 년간 청년에게 해독을 끼쳐왔던 후스(胡適)파 자산계급 유심론에 반대 투쟁을 전개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이 일은 두 명의 “소인물”이 시작했으나 “대인물”들은 왕왕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더러 자주 저지했으며, 그러한 대인물들은 자산계급 작가들과 유심론 측면에서 통일전선을 이야기하고 기꺼이 자산계급의 포로가 되었다. 이는 영화 《청조비사》와 《무훈전》이 상영될 때의 상황과 거의 비슷하다. 애국주의 영화라 칭해졌으나 실제로는 매국주의 영화인 《청조비사》는 전국에 상영된 후 오늘까지 비판되지 않았다. 《무훈전》은 비판되었지만 지금껏 교훈이 나오지 않았고, 이러던 차에 다시 위핑보의 유심론을 용인하고 “소인물”의 생기 넘치는 비판문장을 가로막는 기괴한 일이 발생했다는 데 주의해야만 한다. 위핑보 등과 같은 자산계급 지식인에 대해서는 당연히 단결의 태도를 취해야 하기는 하나, 청년에게 해독을 끼치는 그들의 착오사상은 비판해야 하며 그들에게 투항해서는 안 된다. (강조는 필자)

마오쩌둥은 『문예보』의 편집자 해설이 크게 불쾌했던 것이 분명하다. 과학적 관점[맑시즘]에 맞춰 쓴 글을 하찮은 신인(小人物)이라고 폄하하고 "이른바 권위있다는" 대인물들을 감싸고 돌면서 자산계급(부르주아) 유심론의 포로가 되었으니, 이에 맞서 투쟁하라는 지시였다.

이처럼 마오쩌둥은 중국의 최고권력기관인 중공중앙정치국을 향해 위핑보의 『홍루몽연구』 비판을 도화선으로 삼아 당시 문화·사상계에 널리 자리잡은 기성 관념 (소위) "후스(胡適)파 부르주아 유심론에 반대 투쟁을 전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것도 『무훈전』의 선례를 거론하면서 말이다.

보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무훈전』비판이라면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이제 중공 권력기구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맹렬한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10월 23일: 『인민일보』에 鍾洛의 「마땅히 『홍루몽연구』 안에 있는 그릇된 관점의 비판을 중시해야 한다」는 논평 게재
10월 24일: 중국작가협회 고전문학부에서 『홍루몽연구』 문제에 관한 좌담회 소집
10월 28일: 인민일보 부주필 위안쉬파이(袁水拍)가 「『문예보』 편집자에게 묻는다」로 공격
10월 30일: 『인민일보』에 저우루창(周汝昌)이 「내가 위핑보의 홍루몽 연구에 대한 그릇된 관점을 보는 법」 발표
10월 31일: 중국문학예술계연합회와 중국작가협회 주석단의 연석회의 개최(12월 8일까지 총 8회)
11월 4일: 『인민일보』에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이자 『문예보』 주필인 펑쉬에펑의 「『문예보』에서 내가 저지른 착오를 자아비판함」 발표
11월 6일: 북경대학에서 홍루몽연구좌담회 개최
11월 8일: 중국과학원 원장 궈모뤄가 『광명일보』에 「문예학술계는 자산계급사상과의 투쟁을 전개하자」 기자회견문 발표
11월 10일: 『인민일보』에 黎之가 「『문예보』 편집자의 자산계급 작풍은 마땅히 철저한 조사를 받아야 한다」 발표
12월 2일: 중앙선전부 부부장 저우양이 마오쩌둥에게 후스문제 비판의 조직계획에 대한 보고서 제출
12월 8일: 전국문학예술계연합회 주석단과 작가협회 주석단의 확대연석회의(최종) 개최. 이 회의에서 저우양, 마오둔(茅盾) 등이 비판연설하고 궈모뤄가 "3개 항 결의문" 제출

이렇게 하여 위핑보의 고전문학평론에 대한 비판은 어느 새 위핑보 개인을 벗어나 『문예보』 등에 웅거한 낡은 관념 비판으로, 다시 후스를 대표로 한 부르주아 사상 비판으로 확대되어 갔다.

궈모뤄의 「문예학술계는 자산계급사상과의 투쟁을 전개하자」를 보면, 『홍루몽연구』 비판을 고전문학 부문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문화학술계 전반으로 확대해야 하며, 역사, 철학, 경제, 건축예술, 언어, 교육, 자연과학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서 가열찬 사상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그래야만 "적지 않은 일부 고등지식분자 가운데 아직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학술계의 공자로 추앙되는 후스에 대하 전면적인 투쟁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중앙선전부 부부장 저우양이 제출한 후스 문제 비판 조직계획에 따르면 후스의 철학사상(pragmatism), 정치사상, 역사관점, 중국철학사, 문학사상, 중국문학사, 역사학과 고전문학연구에 있어 고증의 역할, 『홍루몽』의 인민성과 예술적 성취 문제, 각종 『홍루몽』연구 저작 등에 관해 등을 다루도록 되어 있어 이미 홍루몽은 뒷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1955년 2월, 위핑보가 『문예보』 지상에 「반동적 후스 사상과는 깨끗히 결별하겠다는 것을 굳게 다짐함」이란 전면적 자아비판을 발표하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나게 되는데, 그에 대한 완전 복권과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먼 훗날, 마오쩌둥이 죽고도 다시 10년이 흐른 1986년의 일이었다.

이렇게 보면 마오쩌둥이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홍루몽』이라는 고전문학연구라기보다는 그것을 지렛대로 삼은 사상개조운동이었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 또한 이 사건은 이후 마오쩌둥이 벌이는 다양한 문화 '관련' 사건들의 원형이 이미 이 시기(혹은 그 이전)에 완성되어 있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다음 편은 후펑 비판과 쌍백운동으로 이어집니다.
by sonnet | 2009/12/04 15:59 | 정치 | 트랙백(1) | 핑백(2) | 덧글(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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