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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목수정
2009/04/10   '노블리스 오블리주'라... [108]
2009/04/04   대중들의 반응에 대한 한 가지 설명 [105]
'노블리스 오블리주'라...
내 글을 지목해 논한 목수정때리기와 진보 혐오증 (가브리엘) 에 트랙백

그러나 이 예시는 적절하지 않다. 첫째 정명훈은 동종업계의 종사자라는 동지적 지위에 있다. 특히나 폐쇄적인 음악계에서는 더더욱 이러한 지위는 강조된다. 둘째, 정명훈은 대한민국에서 막대한 금전을 벌어들이며, 각종 혜택과 후원을 받는 사회적 명사로서 공인의 의무가 있다. 즉 보수주의자들이 항상 강조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있는 것이다. 오블리주는 권리가 아닌 의무를 말한다.

… 정명훈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국립오페라단 합창단의 폐지와 그들의 부당한 해고에 귀기울이고 동참해야할 의무가 있다. "유일한" 국립오페라단 합창단의 폐지는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의 후퇴를 의미하며, "부당한" 경제의 논리에 최소한도로 보장해야할 예술, 나아가 문화의 영역이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문학적, 사회적 의미를 정명훈이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명을 거절하였다면 이것은 그의 존경받는 예술가로서의 지위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공인으로서의 지위에서 요구되는 "의무의 유기"인 것이다. 이것은 특정 종교에 포교될 의무와 돈을 빌려줄 의무가 없는 개인의 거절의 문제가 아니라, 즉 개인에 불과한 당신(독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불의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동참하여야 하고 발언하여야 할 공인,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명사로서의 의무의 문제이다. (가브리엘)



일단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구속력 있는 의무가 아니다.

정명훈이 갚아야 할 돈이 있고, 목수정이 갚기로 한 날에 돈을 받으러 갔다고 해 보자. 이런 사안에서는 정명훈이 이 돈을 갚을지 말지를 결정할 권리가 없다. 그에게는 정해진 날에 돈을 갚아야 할 의무만 있는 것이다. 반면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그런 의미에서는 의무가 아니다. 그건 사회적 명사라면 자신이 속한 사회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권장사항 정도에 불과하다.

정명훈에게 이런 저런 방법으로 사회를 도울 수 있는 기회 100번이 있을 때, 100번 다 도와야 그것이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지키는 것일까? 사람마다 기준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다섯 번이나 열 번 정도 도왔다면 그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100번 중 어떤 다섯 번을 도울지 고르는 것은 정명훈의 선택이다.

이처럼 노블리스 오불리주가 적용될 사안은 기본적으로 당사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어린이들에게 특히 관심이 있으니 어린이들을 돕는 데 집중하겠다는 식으로 할 수도 있고, 기부금을 내되 반드시 특정 종교단체를 통해서만 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을 돕는 게 바람직하고 어떤 것을 도울 마음이 일어나는지는 전적으로 그의 마음에 달렸다.

물론 100번의 기회가 있을 때 한 번도 돕지 않는다든가 하면 그건 '좀 너무하지 않느냐'라는 평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특정 사안 하나에 대해 거절했다고 해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운운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비판이다.



게다가 소위 진보 진영이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기대어 주장을 전개하는 것도 상당히 기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고귀한 자(noble)는 그에 상응하게 고귀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이 개념은 사회가 엘리트 그룹의 자존심(혹은 허영심)을 인정해 주는 대신, 그들에게 상응하는 봉사를 요구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어느 정도 사회적 기여를 하는 사람들을 노블하게 대접해 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 그룹은 본질적으로 평등주의적 성향이 강해 그런 관념을 받아들일 생각이 별로 없다고 판단해 그런 이야길 꺼낸 적이 별로 없는데, 원한다니 노블리스 오블리주 같은 것이 통용되는 전통적 관념의 세계에서 남에게 부탁을 하는 전범이 어떤 것인지 묘사해 보겠다.


삼국지의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인 삼고초려를 보자. 이 이야기에서 유비는 당시 무명의 서생이던 제갈량을 자기 진영에 초빙하기 위해 두 번의 헛걸음을 하고도 직접 다시 찾아가는 성의를 보인다. 그런 광경을 보며 그간 유비에게 충성을 다하느라 죽을 고생을 한 부하들은 입이 잔뜩 튀어나왔음은 물론이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장비다.

“형님은 생각을 잘못하셨소. 그까짓 촌놈이 무슨 크게 어진 선생일리 있습니까. 이제 형님은 가실 필요 없습니다. 그자가 만일 오지 않으면 내가 오랏줄로 결박지어 끌고 오겠습니다.”

유비는 장비를 간신히 뜯어말려 세 번째로 제갈량의 집을 찾아가지만, 제갈량은 낮잠을 잔다며 나와 맞지도 않는다. 장비는 화가 치밀어 관운장을 보고 외친다.

“저 선생이란 것이 어찌 저리도 오만한가. 우리 형님이 댓돌 아래에 저렇듯 공손히 서 계시는데, 높이 자빠져서 자는 체하고 일어나지 않는구나. 둘째 형님은 구경이나 하십시오. 내 이 집 뒤에다 불을 지를 테니 그래도 저것이 일어나나 안 일어나나, 어디 두고 봅시다.”

… 좀 거만하게 굴며 몇 번 튕긴다고 집에다 불을 지르고 오랏줄에 결박지어 제갈량을 끌어왔으면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를 "만약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면, 예술가적 양심마저 버린 그를 비난하면 된다. 결국 찾아가서 잃을 것은 없다고 판단"(목수정)과 대조해 보기 바란다.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로서 목수정은 장비만도 못하다. 목수정 본인의 주장을 들어보면 다혈질이긴 해도 솔직함이 매력인 장비에게는 없는 음침함이 있기 때문이다.

"화풀이 만으로 이렇게 독한 글, 앞으로 피곤한 일이 아주 많아질 이런 글을 쓸 만큼 에너지가 넘치지 않습니다. 더 큰 용도가 분명히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설픈 입장에서 서명하는 대신, 이렇게 화끈하게 자신을 커밍아웃해 준 정명훈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 하고 있답니다. … 이러한 그의 참모습을 공개하고, 전선을 더 분명히 하고자 했던 것" (목수정)

지금 장난하나? 부탁을 하러 간 것인가 아니면 함정을 파러 간 것인가? 유비가 제갈량이 건방지다고 잡아다 족쳤으면 연의에서 유비는 어떤 사람으로 그려졌겠는가? 이 삼고초려 일화가 그 오랜 세월을 전해지며 그처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그 내용이 감동적일 뿐더러 전통적인 사회관에서 부탁을 하는 이상적인 방법론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정명훈은 대한민국에서 막대한 금전을 벌어들이며, 각종 혜택과 후원을 받는 사회적 명사로서 공인의 의무가 있다. 즉 보수주의자들이 항상 강조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있는 것이다. 오블리주는 권리가 아닌 의무를 말한다.

… 정명훈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국립오페라단 합창단의 폐지와 그들의 부당한 해고에 귀기울이고 동참해야할 의무가 있다. "유일한" 국립오페라단 합창단의 폐지는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의 후퇴를 의미하며, "부당한" 경제의 논리에 최소한도로 보장해야할 예술, 나아가 문화의 영역이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문학적, 사회적 의미를 정명훈이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명을 거절하였다면 이것은 그의 존경받는 예술가로서의 지위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공인으로서의 지위에서 요구되는 "의무의 유기"인 것이다. (가브리엘)


자, 저런 태도를 유비가 취했다면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나는 한 황실의 종친인 유비다. 내가 황상의 밀지를 받잡고 역적 조조를 치기 위해 얼마나 동분서주해 왔는지 그대도 잘 알리라 믿는다. 지금 한조는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 그대도 글줄이나 읽었다 하면 스스로 한조의 두터운 은혜를 입은 신하임을 잘 알 터. 마땅히 출사해 나를 도와 한실 중흥에 일조하리라 믿는다"라는 편지를 손건이나 미축 같은 별볼일없는 인물들에게 들려 보냈다고 해 보자. 사실 이 편지가 언급한 대의는 후에 제갈량이 평생을 바쳐 추구한 것 그 자체이다. 그럼 제갈량이 유비 밑으로 달려와 일했을 것 같은가?



함흥차사 설화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이성계는 태종 이방원이 보낸 사자를 만나기 싫어서 오는 족족 죽여버리지만, 도저히 그렇게는 대할 수 없는 인물인 무학대사를 보내자 꺾이고야 만다. 전통적인 세계에서 부탁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의 격이나 그들이 몸으로 드러내는 성의는 그 메시지 만큼이나 중요하다. 상대를 감동시켜 움직이려면 상응하는 인물과 태도가 필요한 법이다.

내켜하든 내켜하지 않든 정명훈 정도의 명사(앞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주장한 쪽에서 그가 대단한 명사이니까 그만한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었다)를 꼼짝없이 움직이게 만들기에 목수정은 전혀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다. 인선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인사가 찾아가면 상대는 내용은 둘째 치고 나를 우습게 본다고 받아들일 뿐이다. 이게 무슨 똥폼이냐고? 지금 이건 '노블'에게 상응하는 의무를 요구하는 데 대한 이야기라는 점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진보신당에 정명훈을 버선발로 뛰어나오게 할 정도의 거물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노회찬이라고 하자. 비서가 "저, 선생님… 노회찬 (전) 의원님께서 선생님을 꼭 뵙고자 서울서 날아오셔서 지금 로비에서 몇 시간 째 기다리고 계십니다"라고 말을 전한다면 어땠을까? 나는 정명훈의 반응은 상당히 달랐을거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그 정도 성의를 보였는데 씹는다는 것은 주류 사회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상대는 상당한 성의를 표시했고 공은 정명훈의 코트에 떨어져 있다. 그리고 여기서 결례를 범하면 정치인 하나를 평생 적으로 삼게 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삼고초려에서 장비와 관우가 투덜대었다는 점은 앞서 지적한 바 있다. 관우가 조조에게서 받았던 대접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이들은 초일류 무장이며 전국구 명사이다. 유비는 본인도 거물이지만, 이들까지 달고 가서 몇 배로 성의를 보였던 것이다.



진보세력은 기본적으로 평등주의 성향이 강하고 주류사회의 질서나 권위에 대해서 도전적이며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진리를 대변한다고 확신하는 정도가 아주 강하기 때문에 이런 전통적인 개념들을 받아들이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리고 그런 점을 어느 정도 감안해서 사실 사람들은 진보세력(이나 정당)으로부터 대단히 극진한 대접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걸 당연하다거나 고맙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해는 해 주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것을 '노블'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상스럽다'(노블 대접을 안 해준다)고 느끼지만 쪼잔하게 따지기 싫어서 참을 뿐이다.

그러나 그 쪽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들이대면서 그게 구속력있는 의무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하면 황당할 수밖에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부탁을 하는 것이지, 맡겨둔 물건 내놓으라고 따지는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by sonnet | 2009/04/10 20:26 | flame! | 트랙백(5) | 덧글(108)
대중들의 반응에 대한 한 가지 설명
우리는 길을 다니다가 종종 생면부지의 사람으로부터 "도를 믿으십니까" 류의 포교 제안을 받게 된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간단히 거절의 뜻을 표하면 조용히 물러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아주 끈덕지게 따라붙어 우리를 괴롭히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 짜증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제안은 제안자에게는 지고지선한 목표인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대개 그렇지 않다. 즉 그 가치는 보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남녀노소빈부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이들에게 있어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떤 부탁을 받는 것은 일상적인 사안이다. 사소한 편의를 봐 달라는 데서부터 누군가가 돈을 빌려달라거나 혹은 보증을 서 달라고 하는 것까지 그런 일은 거의 매일 같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부탁을 하러 찾아온 쪽은 너한테는 아주 쉬운 일이니까, 옛날 학교 다닐 때 친했다든가 자주 보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촌인데, 또는 내 종교는 진리이니까 같은 이런 저런 이유로 당연히 상대가 그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부탁을 받는 쪽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부탁을 받는 쪽은 백이면 백, 부탁을 들어 주던 들어주지 않던 그건 전적으로 내 마음이며, 내가 뭐라고 결정을 내든 간에 내 결정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부탁하는 편에 설 수도 있고, 부탁을 받는 편에 설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상식은 부탁 자체가 얼마간 폐를 끼치는 행동이며 적어도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조용히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부탁을 거절했다고 상대가 앙심을 품고 해코지를 해도 그럴 수 있다가 버젓히 통용되는 사회가 된다면 그런 사회는 참으로 살기 피곤한 곳이 될 거라는 점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게 목수정-정명훈 사건에서 목수정이 많은 비판을 받게 된 이유인 것 같다.

혹자는 정명훈은 사회적인 강자이고, 목수정은 약자일텐데 강자에게 연대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요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부탁을 안 들어준다고 앙심을 품고 해코지를 한다'는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아주 보편적인 위협으로 피부에 와닿는 사례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방치하면 당장 내일부터 내게 칼이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러니 대중이 여기에 우선적으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내가 볼 때 이 에피소드는 아무도 목수정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는 형태로 소개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이다.

"(십수년 전을 회고하며) 내가 그때 오페라 합창단 문제에 국제적 지지를 얻으려고 파리를 돌아다녔더랬어요. 그러다가 여차저차해서 정명훈 선생까지 찾아뵙게 되었단 말이지. 나야 정 선생의 지지와 따뜻한 한 마디를 기대했는데, 글쎄 초면에 거친 말씀을 퍼붓더라 이거야. 내가 그 자리에서 들은 말을 다 옮기진 못하겠지만, 참, 눈물이 핑 돌더라구. 그래도 어쩌겠나. 내가 부탁하러 간 입장인걸. 서명도 못 받고 밤길을 터덜터덜 걸어 돌아와야 했어요."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조금 바꾸어 쓰기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게 느껴진다는 것은 문제의 핵심이 해코지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어째 되었던 간에 이런 사고가 터지면 무엇보다 damage control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십분 동감한다.
by sonnet | 2009/04/04 12:19 | flame! | 트랙백(2) | 핑백(1) | 덧글(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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