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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맨하탄계획
2006/08/29   맥마흔 법과 영국 핵개발 [8]
맥마흔 법과 영국 핵개발
영미 핵협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예전에 작성해 두었던 영미 군사기술 협력에 대한 가장 유명한 사건인 영국의 핵개발과 맥마흔 법에 대한 이야기를 올려둡니다.


핵개발의 시작
영국은 세계 최초로 안보적 차원에서 핵무장 욕구를 가졌던 국가였다. 1938년 독일의 물리학자 Otto Hahn과 Lise-Meitner가 핵분열현상 발견에 성공함으로써 독일이 원자탄 개발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지도자들은 원자탄 개발을 국가의 존망이 달린 중대한 문제로 인식하고 어떻게 해서든 독일보다 먼저 원자탄을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1940년 4월 보수당 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내각 산하에 『모드 위원회(Maud Committee)』를 설치하여 원자탄 개발의 가능성을 검토하도록 은밀히 지시하였다. 과학자들로 구성된 모드 위원회는 연구결과 보고를 통해 원자탄 개발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며 독일과의 전쟁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더욱이 “원자탄이 개발되기 전에 전쟁이 끝나더라도 그와 같은 결정적인 가능성을 가진 무기를 보유하지 않는다면 어떤 국가도 위험에 처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원자탄개발 노력은 헛된 일이 아닐 것”이라고 함으로써 핵무기가 국가안보와 국제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효과적 수단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모드 위원회의 보고는 영국의 초기 핵개발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영미간의 초기 신경전, 그리고 합의
1941년 8월 원자탄 제조 가능성을 확신한 모드 위원회의 보고가 워싱턴에 전해진 후 미국은 영국에게 원자탄 공동개발·생산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원자탄 개발기술 분야에서 미국을 능가하고 있었으며, 미국과 합작할 경우 영국의 주도권을 상실할 우려가 있었고 핵기밀 유지가 곤란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미국의 공동개발·생산 제의를 거부하였다. 그 후 1942년 10월 미국의 핵개발연구사업이 90%의 공정을 보임으로써 영국보다 앞서게 되자, 미국으로서는 영국과의 합작연구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영국이 오히려 소련에게 핵기밀을 누설할 것을 우려하여 이번에는 미국이 영국에게 핵정보 제공을 제한하였다.
그 후 처칠 수상은 영·미간의 불신과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원자탄 공동생산에 필요한 사항을 미국에 제의하였으며, 결국 1943년 8월 19일 처칠 수상과 루즈벨트 대통령은 퀘벡에서 비밀 핵협력협정을 통해 원자탄 공동연구·생산에 합의하게 되었다.


전후 영국의 사정
2차대전의 종전으로 상당한 군축을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여전히 대규모의 육군과 세계 제2의 해군, 그리고 기술적으로 앞선 공군을 보유한 전승국으로서 세계 3대 강대국중의 하나라는 국제적 지위와 국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미국과 더불어 전후 국제정치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배적 지위를 유지할 전망은 밝지 못했다. 극동지역에서 영국이 오랫동안 누려왔던 우월한 정치·경제적 지위는 2차대전 중 일본의 도전과 팽창정책, 그리고 이 지역의 민족주의운동에 의해 와해되었고, 특히 전후에는 구식민지체제를 타파하려는 민족주의운동이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영국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다. 동유럽, 이란, 터키, 그리스 등 지역에서도 영국은 팽창하는 소련의 영향력을 저지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한편, 2차대전으로 인하여 침체된 영국의 국내경제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미국도 그 때까지도 영국과 서유럽이 산업을 복구하도록 도와줄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전후 영국의 핵개발
따라서 영국은 소련의 세력팽창을 저지하고 실추된 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핵무기 개발에 달렸다고 판단하고, 2차대전 직후부터 더욱 본격적인 핵개발에 뛰어들었다.

영국은 이미 모드 위원회의 보고 및 미국과의 전시 핵협력을 통해 핵개발에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약 40명의 영국 과학자들이 2차대전 중 미국의 원자탄 제조계획인 맨하탄 계획(Manhattan Project)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우라늄 농축 및 원자탄 제조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이미 습득했고, 미국도 긴밀한 전시 핵협력을 전후까지 연장할 것에 동의했기 때문에 영국은 사실상 배타적인 핵국가 클럽에 참가할 수 있는 잠재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핵개발 측면에서 볼 때 1946년은 영국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다. 이 시기에 영국은 원자력법 통과, 원자력 이용에 관한 연구·실험을 수행하는 시설인 Harwell과 핵분열물질을 생산하기 위한 조직 설립 결정, Risley 원자력 연구소 설립, Springfields 우라늄 처리시설 설립 및 Amersham 방사화학센터 설립 등을 통해 적극적인 핵개발기반 조성에 착수하였다.


맥마흔 법과 영국의 분노
이처럼 영국의 핵개발 의욕이 고조된 상황에서 미국 의회가 핵무기를 독점하기 위해 1946년 8월 핵무기와 관련된 핵물질과 핵정보·기술의 다른 나라 이전을 금지하는 맥마흔 법을 전격적으로 통과시킴으로써 영국은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2차대전 중 처칠 수상과 루즈벨트 대통령 간에 비밀리에 체결된 ‘전시 및 전후의 핵협력 협정’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핵협력 단절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의 일방적 조치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낀 애틀리 정부는 수상, 재무상, 외상, 내무상, 국방상 등을 중심으로 내각 내에 ‘국방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독자적 핵전력개발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심사숙고 끝에 애틀리 정부는 1947년 1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혹은 믿음으로 독자적 핵전력개발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1) 대영제국이 와해되고 경제력이 회복되지 못하더라도 핵무기 보유는 영국이 과거 대영제국을 통치하던 시기에 누리던 강대국으로서의 역할과 영향력을 보장할 효과적 수단이 될 수 있다.

2) 영연방에 배치되어 있는 영국의 통상전력만으로는 서유럽과 영국 본토에 대한 소련의 세력팽창과 공격 가능성을 줄이고 아직도 남아있는 영연방을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핵무기의 개발이 절실히 필요하다.

3) 영국 지도자들은 세계안보에 적극 개입하지 않는 미국의 고립주의 전통과 1, 2차 세계대전 때 서유럽 방어에 실패한 미국과의 경험을 상기하여 전후에 미국이 또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함으로써 영국이 불확실한 국제환경에 혼자 내버려질 가능성을 두려워했는데, 독자적 핵무기개발은 그러한 위험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미국의 고립주의 회귀를 방지할 뿐만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원조도 이끌어낼 수 있는 ‘자위 수단’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애틀리 정부가 독자적 핵전력개발을 강력히 추진한 배경에는 맥마흔법 통과로 영국이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무시당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정치적 고려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한다. 1952년 핵실험에 성공한 이후 애틀리 수상은 독자적 핵전력개발을 결정하게 된 배경과 영국인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우리는 미국인들과 협력을 할 수 없었다. 그 어리석은 맥마흔법은 우리가 그들과 협력하는 것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은 어른이고 우리는 어린아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이러한 인식은 1946년 10월에 개최된 『국방 소위원회』가 엄청난 비용 때문에 영국이 우라늄 농축시설의 건설을 막 포기하려던 찰나에 뒤늦게 도착한 베빈(Bevin) 외상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이것(핵무기)을 가져야만 한다. 나로서는 개의치 않지만, 나는 방금 내가 당한 것처럼 이 나라의 다른 어떤 외상이 미 국무장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다. · · · 아무리 엄청난 비용이 들더라도 우리는 지금 당장 이걸(핵무기) 가져야 한다.

이처럼 애틀리 정부는 핵무기를 강대국이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으로 생각했으며, 무엇보다도 미국으로부터 상처 입은 영국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독자적 핵전력개발을 결정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영국의 노력은 애틀리 내각을 뒤이은 보수당 정부에도 그대로 이어져 1952년에 원폭실험, 1957년엔 수폭실험에 성공하게 된다.(참고로 소련은 각각 1949년과 1953년)


새로운 불씨
한편 미국은 50년대 중에 맥마흔 법을 두 차례 수정하면서 대외 핵무기기술 협력의 물꼬를 트게 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련도 이미 아는 것을 동맹국에게 비밀로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런 핵협력은 어디까지나 영국에게만 국한되는 것이었다. 이는 영국과 대등한 대우를 요구한 프랑스에게는 굴욕적인 경험이었으며, 결국 이에 반발한 프랑스의 독자핵전력 건설과 NATO 통합군 탈퇴라는 초강수로 나타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시작하면 또 길어지므로 다음 기회에......

(이 글은 이호재, 오재완 공저, "유럽의 핵정책", 고려대학교EU연구센터 의 영국편 첫부분을 영미군사기술 협력이라는 관점에 맞추어 약간 편집한 것입니다)
by sonnet | 2006/08/29 01:09 | 정치 | 트랙백 | 핑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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