От Ильича до Ильича
by sonnet 2006 이글루스 TOP 100 2007 이글루스 TOP 100 2008 이글루스 TOP 100 2009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 100 2011 이글루스 TOP 100
rss

skin by 이글루스
태그 : 마르크스주의
2020/12/01   자유주의-보수주의-마르크스주의 [2]
2009/09/18   마르크스주의와 도덕 [53]
2007/04/27   오늘의 한마디(Karl Marx) [11]
자유주의-보수주의-마르크스주의
현대의 신자유주의는 상당 부분 고전적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메아리에 다름 아니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게 시장은 계급과 불평등, 그리고 특권을 제거하기 위한 탁월한 수단이었다. 필요 최소한의 개입은 불가피하지만, 그 이상의 국가개입은 경쟁에 기초한 교환의 평등화 과정을 방해하고, 독점과 보호주의, 그리고 비효율성을 창출할 따름이다. 국가는 계급을 고무하는 반면, 시장은 잠재적으로 계급사회를 해체할 수 있다(Smith, 1961, II, 특히 pp.232-6). [1]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이라고 하지만, 그들도 구체적인 정책을 놓고 선택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한 목소리를 낸 것이 거의 아니었다. 낫소 시니어(Nassau Senior)와 후기 맨체스터 학파의 자유주의자들은 스미스에게서 엿보이는 자유방임적 요소를 강조하는 한편, 어떤 형태로든 화폐관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보호에 대해서는 반대의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이들과 달리 존 스튜어트 밀(J. S. Mill)과 ‘수정 자유주의자들’은 어느 정도의 정치적 규제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렇지만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은 예외 없이 평등과 번영으로 가는 길은 최대한의 자유시장과 최소한의 국가간섭으로 포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 의견을 같이하였다.

시장 자본주의를 열광적으로 찬양하는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의 태도는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정당화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그들이 논박하고자 했던 현실은 국가가 절대주의적 특권과 중상주의적 보호주의, 그리고 만연하는 부패를 옹호하고 있던 현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자유와 기업가 정신이라는 그들의 이상(理想)을 극력 억압하고 있던 통치체계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이론은 혁명의 이론이 되었던 것이며, 이런 시각에서 보면 우리는 아담 스미스가 때때로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같은 맥락에서 읽히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2]

많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는 아킬레스 건으로 등장하였다. 자본주의가 소자산 소유자들의 세계로 머물러 있던 한에서는, 사유재산 그 자체도 민주주의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딱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출현하였으며, 이들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민주주의는 사유재산의 특권을 제한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이 보통선거권을 두려워한 데에는 그럴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보통선거권은 분배투쟁을 정치화하고, 시장을 왜곡하며, 비효율성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시장을 침탈하거나 파괴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보수주의 정치경제학자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도 모두 이러한 모순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양자는 말할 필요도 없이 정반대의 해법을 제시하였다. 보수주의의 입장에 서서 자유방임주의에 대해 가장 일관된 비판을 가한 축은 독일의 역사학파들, 특히 프리드리히 리스트(Fredrich List)와 아돌프 바그너(Adolph Wagner), 그리고 구스타프 슈몰러(Gustav Schmoller) 등이었다. 이들은 시장의 적나라한 화폐관계가 경제적 효율성을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 내지 최선의 방안이라는 생각을 거부하였다. 보수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은 가부장제와 절대주의야말로 계급투쟁이 없는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데 있어 있을 수 있는 최선의 법률적·정치적·사회적 외피라고 보고, 이러한 가부장제와 절대주의가 영속하는 것을 자신들의 이상(理想)으로 상정하였다.

어떤 한 유력한 보수주의 학파는 사회복지와 계급화합, 그리고 충성심과 생산성을 동시에 보장해줄 ‘군주제적 복지국가’(monarchical welfare state)를 제창하기도 하였다. 이 모델에서 효율적인 생산체제를 가능케 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규율이다. 국가와 공동체, 그리고 개인의 미덕들을 조화시키는 면에서 권위주의적 국가가 시장의 혼돈에 비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이다. [3]

보수주의 정치경제학은 프랑스 혁명과 파리코뮌에 대한 반동으로서 출현하였다. 그것은 노골적으로 민족주의적이고 반혁명적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향한 충동을 억압하려는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수주의 정치경제학은 사회적 평준화를 두려워하였고, 위계질서와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를 선호하였다. 지위와 신분, 그리고 계급은 자연적이고 주어진 것이지만, 계급 갈등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민일 우리가 민주주의적인 대중 참여를 용인하고, 귄위와 지위에 따른 경계선들이 해체되도록 허용할 경우, 그 결과는 사회질서의 붕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사람들을 원자화하는 시장의 효과를 혐오했을 뿐만 아니라, 시장이 평등을 보장해준다는 자유주의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하였다. 돕이 지적하고 있듯이(Dobb, 1946), 자본축적은 사람들로부터 사유재산을 박탈해가며,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계급분화의 골이 갈수록 깊어지는 사태를 조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분화로 인해 갈등이 첨예화함에 따라 자유주의 국가는 자유와 중립성의 이상을 벗어던지고, 유산계급을 옹호하고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는 바로 이것이 계급지배의 토대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뿐만 아니라 복지국가에 대한 현대의 논의 전반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자본주의가 창출하는 계급분화와 불평등이 과연 의회 민주주의에 의해 해소될 수 있는 것인지, 있다면 또 어떤 조건 하에서 해소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사회주의를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데 이렇다 할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은 의회주의가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에 다름 아니거나, 레닌이 시사한 것처럼, 단순한 ‘입씨름 장’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Jessop, 1982). 이러한 분석 시각은 현대의 마르크수주의에도 대부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은 또한 사회개혁이라는 것은 서서히 붕괴해 가는 자본주의 질서를 떠받치는 버팀목에 다름 아니라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사회개혁은 정의상 해방을 추구하는 노동계급의 열망에 화답하는 대응 전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4]

정치적 권리들이 대폭 확장되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주의자들은 의회주의에 대한 좀더 낙관적인 분석을 마음으로부터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론적으로 가장 정교한 업적을 낸 연구자들은 아들러(Adler)와 바우어(Bauer), 그리고 에두아르트 하이만(Eduard Heimann) 같은 오스트리아-독일 계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하이만(1929)에 따르면, 보수주의적 개혁을 추진하게 된 동기는 노동동원을 억압하기 위한 열망 외에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이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들은 일단 도입되고 나면, 모순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즉 노동자들이 일단 사회권을 향유하게 되면, 계급권력의 균형은 근본적으로 변해버린다. 왜냐하면 사회임금은 시장과 고용주에 대한 노동자들의 의존을 약화시키고, 따라서 그것은 잠재적인 권력자원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하이만에게 사회정책은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에 자본주의와 대립되는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사회정책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대치하고 있는 전선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트로이의 목마라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 관점은 최근의 마르크스주의에 이르러 다시 활발하게 되살아나고 있다(Offe, 1985; Bowles and Gintis, 1986).

위에서 개관한 것처럼, 사회 민주주의 모델은 근본적인 평등을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경제의 사회화가 필요하다는 정통파의 논리를 반드시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후에 전개된 역사적 경험은 의회주의를 통해서 사회화를 추구한다는 목표는 현실적으로 달성될 수 없다는 점을 입증해 주었다. [5]

사회 민주주의가 평등과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지배적인 전략으로서의 의회주의적 개혁을 수용하게 된 것은 두 가지 근거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첫째는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적 시민으로서 효과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자원과 건강, 그리고 교육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근거는 사회정책은 해방을 위한 도구일 뿐 아니라 경제적 효율성을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Myrdal and Myrdal, 1936). 마르크스의 논리에 따를 때, 이러한 논거에서 복지정책의 전략적 가치는 그것이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의 지속적인 발전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데 있다. 그러나 사회 민주주의 전략의 강점은 또한 사회정책이 권력동원을 촉진하기도 한다는 데 있다. 복지국가는 빈곤과 실업, 그리고 완전한 임금 의존성을 제거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정치적 역량을 강화시켜주고, 노동자들의 정치적 단결을 저해하는 사회적 분열을 완화해 준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 민주주의 모델은 현대 복지국가 논의를 이끌어가는 지배적인 가설들 가운데 하나를 낳은 아버지인 셈이다. 그 가설이란 의회주의적 계급동원이야말로 평등과 정의, 자유, 그리고 연대라는 사회주의적 이상들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
[1] 아담 스미스는 자주 인용되기는 하지만 읽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의 저작들을 좀더 자세히 검토해보면 자본주의의 혜택을 거의 광적으로 찬양하는 태도를 애써 억누르려는 뉘앙스와 일련의 유보를 읽어낼 수 있다.

[2]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1961, II, p.236)에서 스미스는 재산 소유자들의 특권과 안정을 옹호하는 국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시민 정부는 사유재산의 안전을 위해 설치되어 있는 한에서, 실제로는 부자들을 빈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혹은 얼마간의 사유재산을 소유한 자들을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3] 이러한 정통은 앵글로-색슨의 독자들에게는 사실상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영어로 번역된 문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공개적인 논의에는 물론 훗날의 사회입법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핵심 문헌은 Adolph Wagner의 『사회문제론』(Rede Über die Soziale Frage)(1872)이었다. 이러한 보수주의 정치경제학의 전통을 영어로 개관한 책으로는 Schumpeter(1954), 그리고 특히 Bower(1947)를 보라.

가톨릭 전통에 속하는 기본적인 문헌 두 가지는 두 명의 교황이 발표한 두 가지 회칙, 즉 Rerun Novarum(1891)과 Quadragesimo Anno(1931)이다. 가톨릭 사회주의적 정치경제학이라 할 이 회칙들이 내세운 주요 강령은 건강한 가족이 계급 초월적인 조합들(cross-class corporations)로 통합되고, 보충성의 원리에 의해 국가의 지원을 받는 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화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최근의 논의를 위해서는 Richter(1987)를 참조하라.

[4] 이 같은 분석 시각을 옹호한 주요 학파는 독일의 ‘국가도출’(state derivation) 학파였다. Muller and Neususs(1973), Offe(1972); O’connor(1973); Gough(1979); 그리고 Poulantzas(1973) 등의 저작들이 이 학파에 포함된다. Skocpol과 Amenta(1986)가 자신들의 탁월한 개관에서 주목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학파의 접근은 결코 단일 차원적이지는 않다. 예를 들어 Offe와 O’connor, 그리고 Gough 등은 사회개혁의 기능을 대중의 요구에 대한 양보임과 동시에 잠재적으로 모순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의회주의적 개혁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게 된 동기는 이론적 차원에 있다기보다는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독일 사회 민주주의의 위대한 지도자 August Bebel이 비스마르크의 개척적인 사회입법을 거부하였던 까닭도 그가 사회적 보호를 지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비스마르크의 개혁 이면에 숨어 있는 노골적으로 반사회주의적이고 분열주의적인 동기 때문이었다.

[5] 이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된 계기는 두 가지 유형의 경험이었다. 한 가지 경험은 1920년대 스웨덴의 사회주의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는 바, 그것은 노동계급 진영에서조차 사회주의를 향한 열망을 그렇게 절실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발견이었다. 사실 스웨덴의 사회주의자들이 사회화 추진 계획을 준비하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설치했지만, 동 위원회는 10년 간의 조사연구 끝에 사회화를 실제로 달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두 번째 유형의 경험은 노르웨이의 사회주의자들과 1936년 Blum의 인민전선 정부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급진적인 제안들을 내놓는다고 해도 투자를 철회할 수 있고 자본을 해외로 수출할 수 있는 자본가들의 능력에 의해 그러한 제안들은 쉽게 사보타주될 수 있다는 발견이었다.

Esping-Andersen, Gøsta. 1990. The Three Worlds of Welfare Capitalism. 1st ed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박시종 역. 2007. 『복지 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 1판 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pp.30-36)



예전에 자유민주주의 논쟁 이란 글에서 설명했던 것과 비슷한 내용
by sonnet | 2020/12/01 20:32 | 정치 | 트랙백 | 덧글(2)
마르크스주의와 도덕

우리는 우리의 도덕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의 이해관계에 전적으로 종속된다고 말한다. … 도덕은 낡은 착취 사회를 파괴하는 데 도움이 되고 모든 노동 대중이 새로운 공산사회를 건설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 공산주의자에게 있어서 모든 도덕은 이 통일적 규율 안에, 그리고 착취자에 대항하는 의식적인 집단 투쟁 안에 놓여 있다. 우리는 영원한 도덕을 믿지 않으며, 도덕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이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폭로한다. - 레닌, 1920년 -



Lukes, Steven., Marxism and Morality, New York:Oxford Univ Press, 1985
(황경식,강대진 역, 『마르크스주의와 도덕』, 서광사, 1995)

이 책은 200쪽 남짓한 소책자이지만 흥미로운 통찰을 보여주기 때문에 간단히 소개해 볼까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도덕에 대한 역설

이야기는 마르크스주의에는 도덕을 둘러싼 기묘한 모순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서 시작된다.

한편으로 마르크스주의는 도덕은 이데올로기이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계급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도덕을 법이나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 뒤에 바로 그만큼의 부르주아적 이해관계를 감추고 있는 부르주아적 편견’으로 본다.[공산당선언] 마르크스주의는 어떠한 도덕적 교화도 반대하며, 모든 도덕적인 어휘를 낡은 것으로 배척한다. 자본주의와 정치 경제학 양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와 그 계승자들의 주된 논지는 인간 소외에 대한 비판, 노동자의 열악한 상태와 자본가의 착취에 대한 신랄한 공격 등 도덕적 판단으로 뒷받침되고 도덕감정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주장으로 가득하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특징은 마르크스, 엥겔스, 카우츠키, 플레하노프, 레닌, 트로츠키 등 다양한 이론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만들어져 전세계에 보급된 정통 ML이론에서 가장 뚜렷하지만 '네오 마르크스주의'나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형들에서도 빠짐없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E.P.톰슨의 말을 빌리자면 (도덕적 가치에 대한) "마르크스와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침묵은 너무나 요란스러워 귀가 먹을 지경"이며, 페리 앤더슨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윤리학을 남기지 않았으며 그 결과 생겨난 빈틈은 그들의 사후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에 의해서도 보충되지 않았다"는데 동의한다.


역설의 해소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의 독특한 도덕관, 특히 인간의 권리에 관한 관념에서 이러한 역설을 해소할 방안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권리의 관념에 대한 개인들의 믿음"을 비웃으면서 "권리에 관한 한, 우리는 … 정치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인권과 같이 가장 일반적인 것이든 간에 공산주의는 권리[전반]에 대해 반대"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척 당혹스러운 주장일 것이기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독특한 점은 권리가 인간 삶에서 본질적이라는 점을 부인한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권리는 사람들 사이의 물질적인 관계와 여기에서 비롯된 사람들 상호간의 적대에서 생겼다’고 논한다. 이들은 권리(Recht)가 현재의 계급사회의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본다. 권리의 참된 기능은 기존 계급사회 질서를 보호하는 기능을 감추는 것이며 그 뒤에는 부르주아지의 이익이 숨어있다. 그러니 이를 폭로하고 비웃음으로서 그 가면을 벗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권리는 극복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

마르크스가 보는 권리는 사회적 갈등과 이해관계를 조절해 줌으로서 계급문제를 완화시키며 그렇기 때문에 보다 나은 혁명적 변화를 지연시키는 존재다. 이런 의미에서 권리는 '인민의 아편' 종교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를 폐지하는 것은 그들에게 참된 행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사태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환상을 필요로 하는 사태를 포기하라는 요구다.’ [헤겔법철학비판]

즉 인간을 진정으로 해방시키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하면 그간 이용되어온 종교나 권리 같은 땜질식 해법은 설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주의가 콧방귀를 뀔 때의 도덕은 현재의 도덕이고, 도덕적 의미를 함축한 주장을 할 때의 도덕은 공산주의의 도래로 성취될 미래의 도덕이라는 식으로 모순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이상인 공산주의 사회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 미래의 도덕은 실체가 없이 매우 막연한 형태로 남게 된다. 공산주의 사회는 하나의 이상향이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선배 격인 오웬, 생 시몽 등을 몽상적 유토피아주의자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은 유토피아주의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이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유토피아)를 이리 저리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몽상적 접근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즉 미래를 멋대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역사의 전진운동을 관찰함으로서 이미 존재하는 미래의 씨앗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지배하는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이들은 '과학' 아닌 '몽상'을 강력히 거부하게 되고, 그 결과 마르크스 주의 내부에서 공산주의 사회에 도래할 해방의 도덕이 미래 사회에 대해 갖는 함의는 전연 검토되지 못하게 된다.

이리하여 현재의 도덕은 청산의 대상일 뿐이고 미래의 도덕은 감히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는 도덕 이론에 해당하는 부분이 통채로 텅 비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

혁명은 분명히 이 세상에서 가장 권위주의적인 것이다. … [혁명은] 사람들 중의 일부가 총, 칼, 대포라는 수단들 -있기만 하다면 가능한 모든 권위적인 수단들- 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승리한 당파가 헛되이 싸운 꼴이 되지 않으려면, 그 당파는 자신의 무기로 반동분자들에게 불어넣은 테러라는 수단을 통해 이 지배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권위론」-

10월 혁명으로 소련이 건국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야기되어 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은 실천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짊어지게 된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는 자신들이 만들어 나갈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해왔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와 선배들이 남긴 유산으로부터 실질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것을 거의 물려받지 못했고 그들 자신도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부분적으로는 엄혹할 정도로 그들의 혁명에 적대적 환경에 직면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빠르게 테러에 의존하게 되고 그 테러의 범위와 강도는 동지들까지도 당혹하게 만들 정도가 된다. 여기서 저자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살펴본 마르크스주의의 도덕 이론이 그들의 실천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멕시코에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와 미국 철학자 존 듀이 간에 이루어진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 대한 문답을 보자. 트로츠키는 "수단 자체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일 수 있지만… 어떤 수단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나 비난은 목적으로부터 비롯"된다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참으로 인류의 해방으로 이끄는 것은 허용될 수 있다고 대답한다. 이 목적은 단지 혁명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도덕은 필연적으로 혁명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 도덕은 종교적 독단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관념론적 물신 숭배나 지배 계급의 철학적 헌병과도 화해할 수 없게 대립한다. 그 도덕은 행위 규칙을 사회 발전의 법칙으로부터,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모든 법칙 중의 법칙인 계급 투쟁으로부터 이끌어낸다.

따라서 혁명의 적들에게는 테러의 철퇴를 휘둘러도 정당하지만, 우리 편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 트로츠키의 주장이다.

그런데 듀이는 트로츠키의 주장을 분석하면서 기묘한 점을 발견해 낸다. 트로츠키의 주장대로라면,
인류의 해방이라는 이상을 의도하고 있는 목적으로서 가지고 있다면, 이 목적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보이는 모든 수단에 대해 그 수단이 무엇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하나하나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며, 제시된 모든 수단은 그 수단이 낳을 수 있는 결과라는 분명한 기반 위에서 가늠되고 평가

되어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계급투쟁이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리고 계급투쟁이 유일한 수단이라는 견해는 수단과 결과를 상호 의존성 속에서 귀납적으로 관찰함으로써가 아니라 연역적으로 도출되었기 때문에, 그 수단 즉 계급투쟁은 그것의 실제적인 객관적 결과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없다.

어떤 역사법칙이 그 투쟁이 수행되는 특정한 방식을 규정한다는 믿음은 틀림없이 계급투쟁의 다른 방식은 배제하면서 그 투쟁을 수행하는 특정한 방식에만 광신적이고 신비적으로 헌신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듀이는 (트로츠키 같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이상이나 사회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들에 대한 합리적 평가에 대해서 헌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믿는 답, 즉 역사적 변화의 법칙으로서의 계급투쟁에 대해 헌신하고 있어서 모든 도덕적인 문제 즉 궁극적으로 획득될 목적에 대한 모든 문제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다는 우울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정리

"1917년 이래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여러 가지 사회적 실험의 운명과 뗄 수 없게 연관되어 있다" "트로츠키 이래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실험들의 실패에 대해 이론을 구제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흔히 그 이론의 어휘들로 설명하려 시도해왔다. 물론 그 실험들이 실패였다는 것을 부인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는 현실사회주의가 완전한 실패로 결론나 관짝에 들어간 현재도 그대로 들어맞는 이야기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마르크스 본인이나 마르크스주의는 문제가 없으나 문제는 그것을 잘못 계승하고 집행한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폴 포트 등 후대 집권자들의 잘못일 뿐이라는 '도마뱀 꼬리짜르기' 식의 옹호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건 정말 그런 것일까? 실은 레닌이나 스탈린의 테러도 마르크스로부터 면면히 이어내려오는 마르크스주의 본류에서 기인하는 면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 가능성은 얼마나 신중하게 검토된 후 기각된 것인가?

이 책에서 언급되는 로자 룩셈부르크, 카우츠키, 트로츠키, 루카치,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은 실천적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동의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대답은 특정한 공통의 핵심적 전제를 공유한다.

저자는 이렇게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공통된 도덕관에는 독특한 함정이 있어서 그런 문제를 야기하는데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한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처음부터 도덕적 문제들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채택된 수단들에는 스스로가 도덕적 저항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그러한 접근법을 보여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이 "20세기에 압도적으로 지배적이었던 사회주의 전통의 몇몇 착각과 맹점으로부터 풀려나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으려면 이런 문제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도덕관에는 (1)결과주의(2)장기적 전망이 결합되었다는 특징이 있다고 정리한다.

(1) 결과주의: 앞서 언급했듯이 마르크스는 현재의 도덕은 계급사회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은 단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익이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칸트적 의무론이 배격되었다. 그런 의무론은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할지 몰라도 자본가와 노동자 같은, 사람들이 실제로 갖고 있는 차이를 추상화하여 감추는 기능으로 해석되었다. 즉 의무론은 기득권 보호 의도를 뒤에 감춘 채 어수룩한 사람을 속여먹기 위한 물타기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물타기가 실제로 시도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의무론이 기만적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급갈등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둔 마르크스주의에게 있어 그런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계급투쟁에 있어 적이 악용할 수 있는 수단은 철저히 거부해야 했다. 이런 관점을 밀어붙이다 보니 마르크스주의는 사람들의 도덕적 직관에 반하는 비인간적인 결과를 낳기 쉬워졌다. 결국 주류 마르크스주의 전통에는 권리를 침해하고 부정의를 범하는 것이 비록 전반적인 선에 기여한다고 할지라도 도덕적으로 그릇된 일이라는 식의 관점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다.

(2) 장기적 전망: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 행위의 올바름이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통한 인간 해방이라는 장기적 목표에 대한 기여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면, 그런 판단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듀이가 지적한 것처럼 그런 판단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기껏해야 인간 해방이라는 ‘궁극적 목표’는 세계사 속에 내재해 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사명’은 그 목표가 결실을 맺도록 하는 것이라는 교리에 대한 믿음에 기대는 식으로 회피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적 결과주의가 비합리적인 시도임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는 궁극적인 목적의 종국적인 실현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미래를 예견한다고 가정하면서도 그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는 일을 적절히 성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가상적인 목적지에 대해서는 검토하기를 거부하면서도 역사가 그 방향으로 간다는 점에 대해서는 환상적인 확신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선택한 수단에 대해 반성하기가 어렵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끝으로 공산주의 사회에 초점이 맞춰진 마르크스주의 도덕관의 초장기적 관점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당면하는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내놓을 이야기가 없었다. 마르크스주의 도덕관은 먼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를 돕기 위한 도구적 관점을 제시할 뿐 오늘날의 도덕적 문제에 대한 해법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쨌든 자신들의 현실주의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습관적으로 현재를 미래라는 널찍한 궁전으로 들어가는 보잘것없는 현관으로 여긴다는 일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현관은 끝없이 뻗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궁전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궁전의 전부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D. 맥도널드-
by sonnet | 2009/09/18 08:29 | | 트랙백(1) | 덧글(53)
오늘의 한마디(Karl Marx)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 Karl Marx(1818-1883) -

by sonnet | 2007/04/27 20:42 | 한마디 | 트랙백 | 덧글(11)
<< 이전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