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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동등대표권
2008/01/25   보론: 미국 연방정부와 폭력의 독점 [17]
보론: 미국 연방정부와 폭력의 독점
현대국가의 핵심 에서 자체 트랙백

앞선 글에 달린 코멘트들에서 미국의 사례가 막스 베버가 규정했던 현대 국가의 속성과 잘 맞는지 잘 맞지 않는지에 대한 논란이 조금 있었기에 약간의 보론을 덧붙이기로 하자. 여기서는 미국 헌법의 법리적 해석보다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미국의 연방(중앙)정부가 확보하고 행사한 폭력의 절대적 크기와 상대적 독점성 양 쪽의 변화가 미국 역사에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를 살펴보겠다.


1. 리틀록 위기(1957년)

사실 대부분의 정상적인 국가가 그래야 마땅한 것처럼, 미국도 2차대전 이후 중앙정부가 무력까지 동원해 지방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한 사건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중 유명한 것을 하나 꼽아보자면 흑백교육통합 문제를 둘러싸고 아칸소 주 정부와 연방정부가 한판 대결을 벌인 끝에 이후 인종차별 문제에 있어 커다란 분수렁으로 손꼽히게 된 리틀록 위기를 들 수 있다.

1957년 4월에 연방항소법원은 리틀록의 학교 당국이 마련한 흑인 학교와 백인 학교의 통합교육안을 승인했고, 대법원은 1954년에 학교의 인종차별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리틀록 교육위원회는 9월에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흑백 통합 교육이 시작될 거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주민들이 여기에 익숙해지도록 노력을 강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7년 8월에 한 주민이 지방법원에 흑백 통합 교육 중지 명령을 내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지방법원은 이 신청을 받아들였다. 연방 항소법원은 지방법원의 중지명령이 무효라고 선언했고, 법적으로는 9월 3일에 학교가 개학했을 때 흑백 통합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9월 2일에 아칸소 주지사인 오벌 포버스는 주 방위군을 파견하여 학교를 포위하게 했다. 이 군대는 주지사의 지시에 따라 시민들의 폭력적인 대응을 예방한다는 구실로 모든 흑인 학생의 등교를 막았다. 흑인 학생들이 학교 안에 들어가면 백인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주지사는 발표했다. 통합교육안을 실시할 수 없게 된 교육위원회는 연방법원 판사의 지시를 청했다. 연방 판사는 계획대로 추진하라고 교육위원회에 명령했다. 그러나 주 방위군은 연방 판사의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9월 10일에 미국 법무장관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아칸소 주지사에 대해 직무정지 명령을 내려달라는 청원서를 연방 판사에게 제출했다. 이튿날, 포버스는 아이젠하워에게 회담을 요구했다. 대통령은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당시 대통령은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회담은 9월 14일에 그곳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 회담은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났다.
9월 20일, 연방 판사는 교육위원회의 계획을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고 주지사에게 명령했다. 주지사는 군대를 철수시켰고, 다음 월요일인 9월 23일에 학교가 문을 열자 떠들썩한 군중이 경찰저지선을 돌파하여 여러 명의 구경꾼들에게 위해를 가했다. 등교한 흑인 아이들은 집으로 끌려갔다. 그날 오후, 대통령은 리틀록 시민들에게 ‘어느 누구도’ 정의를 방해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날 밤, 백악관과 리틀록 시장은 협의를 가졌다. 이튿날 아침, 아이젠하워는 아칸소 주 방위군을 연방군에 편입시켜 포버스의 손에서 군대를 빼앗는 한편, 정규군을 리틀록으로 파병했다. 명령은 회복되었고, 흑인 아이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1958년 6월에 한 학년이 끝날 때까지 그들은 학교에 다녔고, 연방군은 줄곧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Neustadt, Richard E., Presidential Power and the Modern Presidents: The Politics of Leadership from Roosevelt to Reagan(Rev. Ed.), Free Press, 1991
(이병석 역, 『대통령과 권력』, 효형출판, 1995, pp.43-44)

101공수사단 병력의 호위 하에 등교하고 있는 리틀록 센트럴 고등학교의 흑인 학생들


사실 대부분의 나라에서 폭도들로부터 학생들의 등교를 보호하는 이 정도 사건은 보통 경찰이 해결해야 할 일이지, 중앙정부군이 내려와서 해치워야 할 문제는 아닐 것이다. 주방위군과 연방군이 출동하고 군 지휘권을 다투는 사태가 발생한 것은 역시 중앙과 지방의 정치적 여론이 크게 달랐던 것에서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


2. 남북전쟁 전후(1867년)

앞서 살펴본 리틀록 사건은 결국 실력이 떨어지는 한 쪽이 비교적 조용히 굴복하고 끝났지만, 늘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90년 전, 남부 주들이 보다 실력과 자신감이 있었던 시절, 이와 같은 중앙과 지방의 갈등은 결국 남북전쟁이라는 4년에 걸친 대규모 내전으로 비화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중앙정부(북부)는 패전한 남부연맹 소속의 여러 주들을 다섯 지역으로 분할해 군정을 실시하면서 흑인의 보통선거권을 포함한 주 헌법 제정을 반대급부로 군정지역에서의 주 정부 수립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남북전쟁 이전 상황과 좋은 대조를 보여준다. 남북전쟁 이전인 1800~1860년 사이에 미국연방하원은 노예제를 금지하는 8건의 법률을 통과시켰지만, 남부 주들은 인구비례를 적용하지 않는 상원을 이용해 이 시도를 모두 저지할 수 있었다.

즉 많은 의미에서 남북전쟁의 전후처리란 미국 헌법 하에서 정상적으로는 어려웠던 일들을 주먹의 힘을 빌어 정리한 사건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3. 미국 헌법제정회의(1787년)

이제 다시 80년 전인 미국 헌법 제정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미국 헌법을 초안하던 당시 다수결원칙에 대항해 소수파의 지방권력을 보장하는 문제, 즉 헌법 안에서 연방정부나 의회가 남부 주들에게 노예제 개혁을 요구할 가능성을 차단한다거나, 유권자 수에 상관없이 큰 주나 작은 주나 같은 수의 대표들을 상원에 파견하게 하는 주들의 동등대표권 문제는 첨예한 분쟁거리였다.

당시 가장 탁월한 사상가들 -제임스 메디슨, 제임스 윌슨, 알렉산더 해밀턴- 등은 다들 주들의 동등대표권 문제에 비판적이었다.

제임스 윌슨은 헌법제정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정부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 정부는 인민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주(states)라고 일컬어지는 상상의 존재를 위한 것입니까?” 메디슨 역시 작은 주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우리의 경험은 그러한 위험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 오히려 그 반대의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주의 크기가 크고 작기 때문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는 것이 아니라 각 주가 갖고 있는 상이한 조건 때문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주의 동등대표를 둘러싼 갈등에 대해 알렉산더 해밀턴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주가 개인들의 집합체라 할 때, 우리가 가장 존중해야 할 것은 주를 구성하고 있는 인민의 권리입니까, 아니면 주라고 하는 인위적 존재입니까. 후자를 위해 전자를 희생하는 것보다 불합리하고 상식에 어긋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규모가 작은 주들은 자신들이 평등(equality)을 포기한다면, 이는 곧 자신들의 자유(liberty)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러한 주장이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추구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작은 주에 산다고 해서 큰 주에 사는 사람들보다 자유를 덜 누리게 될까요.”

Dahl, Robert A., How Democratic is the American Constitution 2nd. Ed., Yale University Press, 2003
(박상훈, 박수형 역,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p, 137, 93


이런 설득력있는 주장들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작은 주 대표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는데는 확고하였다.

작은 주들이 승리하기까지 토론이 고조되면서 나타난 분위기를 살펴보자. 아래의 인용은 6월 30일에 있었던 델라웨어 주의 대표 거닝 베드포드(Gunning Bedford)의 발언이다.

큰 주들이 감히 연방을 해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작은 주들은 보다 많은 신의와 선의를 가진 외부의 동맹을 발견할 것이며, 이들과 힘을 합해 큰 주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메사추세츠 주의 러퍼스 킹(Rufus King)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친애하는 델라웨어 대표의 말에 몇 마디 논평을 하지 않고는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겠군요. …… 이 의사당에서 전례 없이 격렬하게 우리 공동의 국가에 대한 희망을 철회하고, 외국의 보호를 요청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한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 그가 마음 속으로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에 슬픔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 저로서는 그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결코 외부 세력에게 구원을 요청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Dahl, 같은 책, pp.93-94

이들은 미국 독립전쟁에서 함께 피를 흘리며 싸워온 동료들이었지만, 그런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작은 주 대표들은 수틀리면 나가서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큰 주들이 주도하는 미합중국 연방정부를 묵사발내겠다고 선언했고, 나머지 주 대표들은 헌법제정시에 이들의 협박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수틀리면 연방 깨고 나가서 한판붙겠다는 정신이 제정당시의 미국 헌법에 담긴 정신이었고, 훗날 남부연맹 독립과 뒤이은 남북전쟁의 정서적 기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어찌 되었던 이런 헌법에 남은 유산이 과연 얼마나 현대적인 것인지는 여러분이 각자 판단할 몫인 듯하다.


4. 결론

독립직후 미국의 국력이 매우 약했을 때, 중앙정부는 외세를 끌여들여서라도 내 몫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지방의 강력한 반발을 극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 그 당시 전쟁을 벌였더라도 중앙정부 지지파가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북전쟁은 그러한 세력균형이 뒤집혔음이 확인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남북전쟁 이후에는 더이상 지방정부가 무력을 갖고 겨루어 중앙정부를 굴복시키겠다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리틀록 위기는 그런 현실을 재확인 시켜준 하나의 에피소드로 간주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에서 잘 드러나듯이, 미국은 건국 이래 미국 자체의 국력이 성장하고, 그에 따라 중앙정부가 확보한 무력도 절대적인 양과 상대적인 독점도 양 측면에서 모두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길을 걸었다. 이것은 베버가 말한 현대국가로 가는 길을 미국 또한 착실히 걸었음을 잘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by sonnet | 2008/01/25 07:36 | 정치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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