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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덩샤오핑
2017/12/02   중앙고문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의 연설(鄧小平) [7]
2010/08/15   이왕 왔으니 개혁개방 이야기나 들어 보시게 [44]
2010/07/12   중국의 ‘주박呪縛’ [40]
2010/05/28   개혁개방을 권해본 중국 [202]
중앙고문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의 연설(鄧小平)
중앙고문위원회는 새로운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실제 상황의 필요에 따라 건립된 것이고, 당의 중앙지도기구의 신구교체에 따른 하나의 새로운 조직형태입니다. 다시 말해 중앙위원회를 더욱 젊어지게 하고 연로(年老)한 동지들이 제1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계속하여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려는 데 목적을 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문위원회가 과도적인 성질을 띤 조직형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정부나 당에 가장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정년퇴직제도를 세우는 일입니다. 제11기 3중전회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우리는 당과 국가의 지도직무상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종신제를 폐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실제로 세계의 많은 국가들에서 우리보다 더 잘 해결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 지도간부들의 노쇠현상은 아주 심각하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거의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 정부와 우리 당은 활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문위원회라는 과도형식의 조직을 채택한 것인데, 이러한 조직은 우리의 실제 상황에 비추어볼 때 비교적 적합하고 합당하며 순조로운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보입니다.

따라서 이번의 일은 신구교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상당히 큰 진전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10년이란 시간을 들여서라도 이런 과도형식을 통하여 합당하며 순조롭게 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정년퇴직제도를 점차 세운다면 이는 아주 큰 성과를 얻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는 앞으로 우리나라의 발전에도 아주 훌륭한 작용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10년 후나 길어도 15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 고문위원회를 취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10년 동안에 2기는 필요할 것입니다. 1기는 좋을 것 같지 않습니다. 너무 촉박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고문위원회가 오늘 방금 성립되었는데 머지않아 취소할 것이라고 선포하니 이 조직이 과도적인 성질을 띄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생활과 역사의 변증법을 존중해야 합니다.

고문위원회가 어떻게 일을 진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론적으로 말해서 새로운 당장에 따라 일을 하면 될 것입니다. 즉 중앙고문위원회는 중앙위원회에 대한 정치적인 조수와 참모의 기능을 할 것이라고 당장은 규정하였습니다. 중앙고문위원회 위원은 중앙전체회의에 옵서버로 참가할 수 있고, 고문위원회 부주임은 정치국회의에 옵서버로 참가할 수 있으며, 필요시에는 고문위원회 상무위원도 정치국회의에 옵서버로 참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중앙고문위원회 부주임과 상무위원의 직위는 중앙정치국 위원에 해당합니다.
중앙고문위원회는 중앙위원회의 지도하에 일을 진행하게 되는데 임무는 네 가지가 있다고 당장은 규정하였습니다.

첫째는 당의 방침과 정책을 제정하고 이를 집행하는 데 대하여 건의를 하고 자문을 해준다
둘째는 중앙위원회에 협조하여 중요한 문제들을 조사 처리한다.
셋째는 당 내외에서 당의 중대한 방침과 정책을 선전한다.
넷쨰는 중앙위원회에서 의뢰하는 다른 임무들을 맡아한다.

이상과 같이 원칙적인 규정은 다 되어 있는데, 문제는 이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몇 가지로 정리하여야만 하는데, 그 중에는 우리 사업기구의 설치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구를 크게 하여 세우지는 말 것을 건의합니다. 간소화시켜서 몇 사람만으로 해도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고문위원회의 일상사업은 박일파(薄一波) 동지가 주재하여 처리하고, 나는 부담을 덜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두 오랜 동지들이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고문위원회가 주의해야 할 첫번째 일은 바로 중앙위원회의 일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오랜 동지들은 자각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옛날의 상급자들이고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안면이 넓고 파워가 셉니다. 오히려 중앙위원회의 성원들보다도 더 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중앙위원회의 성원들은 점점 더 젊어지고 날이 갈수록 우리들과 차이가 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태도가 올바르면 그들이 일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또한 그들의 일을 도와주는 데도 이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다면 나쁜 영향만을 미칠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중앙위원회의 일을 방해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중앙정치국이나 서기처의 일도 방해하지 말아야 하고, 그 산하기관의 일도 방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동지들이 어느 성의 상황을 알아보러 갔을 때, 제멋대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먼저 성실하게 조사와 연구를 해야 하고 하급자들의 실제 경험을 듣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혹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성위원회나 혹은 어느 기층조직을 통해 처리케 하고 그들을 돕는 방법을 택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문제를 그들 스스로가 해결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경험을 전수해 주거나 도와주며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해야지 호령을 친다거나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고참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말들은 힘을 가지고 있어 그들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으므로 신중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러한 문제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장온(章蘊) 동지가 복건성에 가서 두 달 가량 일을 보았었는데, 그분이 거기서 보여준 행동은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의 한 표본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고문위원회 성원들은 군중과 유대관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음과 같이 구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건강이 나쁜 동지들을 제외하고 조금이나마 일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분들은 기층의 한 부문과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느 한 공장이나 어느 학교나 혹은 과학연구기관이나 지위(地委) 혹은 현위(縣委), 심지어는 어느 농촌의 기층조직을 찾아가서 상황을 조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한다면 당중앙의 참모나 조수 역할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를 일단 맺게 되면 그들을 일깨우는 강연자가 되어 군중과 만나고 당원들과 만나서 우리나라의 상황과 우리 당이 매 시기마다 채택한 정책방침, 그리고 국제적 상황과 우리의 대외정책을 제때에 그들에게 알려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강연을 통해 그들과 유대관계를 갖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전수해 주고 도와주는 것이며 그들을 영도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연의 내용은 지금의 문제도 말할 수 있고 역사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말할 때 우리만큼 자격이 있는 사람도 적습니다. 모두들 몇 십 년씩 혁명을 한 우리들이기에 혁명담 같은 것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는 당의 우수한 작풍을 지켜나간다는 면에서도 솔선수범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정신적인 문명 건설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고 봅니다. 우리 같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기층사회에 내려가면 모두들 우리를 존중하고 생활도 잘 보살펴주겠지만, 우리 자신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중앙고문위원회가 어떻게 일을 보고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새로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랜 우리 동지들이 이러한 문제를 잘 처리해 나가리라고 믿어 마지않는 바입니다.

(1982년 9월 13일)
김승일 역, 『등소평 문선』, 범우사, 1994, pp.26-30


나라를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는 확신 하에, 어떻게든 정년제의 정착을 추진했던 덩샤오핑과, 이 일을 결국 끝까지 제대로 하지 못했던 소련의 사례가 대비되는 장면. 동료들의 반대가 극심해서 그 후로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개인적인 권위로 찍어누르고 뚝심으로 버티면서 어떻게든 최소한의 암묵적 규칙(67세면 유임, 68세면 은퇴)은 정착시키는 데 성공.

여담이지만 후진타오도 퇴임하면서 원로의 개입을 차단하자는 주장을 했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고 전해짐. 마오의 권위는 모든 걸 엎고 문화대혁명도 만들 수 있고, 덩의 권위는 사후까지 이어지는 최소한의 규칙은 세울 수 있으나 후의 권위는 존재하지 않음을 잘 보여줌. 앞으로 시가 이 규칙을 엎을 힘이 있을지 궁금함.

공산당 일당독재임에도 의외로 장수하는 이유가 임기제가 지켜져서 독재의 폐혜가 어느 정도 완화가 되기 때문인데, 이 규정이 앞으로도 계속 지켜지는냐가 중국 정치의 미래를 결정지을 거라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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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의 분위기는 다음 기사들을 참조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위키백과)
시진핑의 걸림돌? 中共十老 (주간조선, 2012.11.19)
중국공산당 19차 당대회 참관기 (주간조선, 2017.10.23)
by sonnet | 2017/12/02 16:29 | 정치 | 트랙백 | 덧글(7)
이왕 왔으니 개혁개방 이야기나 들어 보시게
물가를 안정시켜 개혁을 빠르게 진행하자
담화: 덩샤오핑
일자: 1988년 5월 19일

우리 당의 제13차 대표대회와 전국인민대표대회 제7기 제1차 회의의 정신은 모두가 지금보다 진일보하게 사상을 해방시키고 생산력을 해방하는 것입니다.

물가를 해방시켜야 개혁이 빠르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물가문제는 역사가 남겨놓은 것입니다. 지난날 물가는 모두 나라에서 정했습니다.

예를 들면 식량과 여러 가지 부식품은 오랫동안 수매가격이 아주 낮았습니다. 이 몇 년간 몇 번 올리긴 하였으나 여전히 비교적 낮습니다. 그런데 도시의 판매가격은 높일 수가 없었습니다. 수매가격과 판매가격이 거꾸로 서니 나라에서 보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치법칙에 어긋나는 이 일은 한편으로는 농민들의 적극성을 동원시킬 수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에서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되는 것입니다. 해마다 물가 보조금에 쓰는 지출이 몇백억이 됩니다. 따라서 나라의 재정수입은 경제건설에 투자되는 게 적고, 더구나 교육, 과학, 문화사업 발전에 쓰는 것은 더욱 적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가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부담을 벗어버리고 가벼운 몸으로 전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는 고기, 계란, 야채, 설탕 네 가지 부식품 가격을 풀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먼저 한 걸음 내디딘 셈이지요. 중국에서는 ‘다섯 관문을 넘기어 여섯 명의 적장을 죽인’ 관공(關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관공보다 더 많은 ‘관문’과 ‘적장’이 있을 것입니다. 한 관문을 넘긴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아주 큰 모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부식품 가격이 풀리니 다투어가면서 물건을 사들이는 사람도 있고 의논이 분분합니다. 불만에 찬 말도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인민대중들은 중앙을 이해합니다. 이 결심은 반드시 내려야 합니다. 지금 넘은 이 고비가 성공할 수 있겠는지는 오늘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공하기를 희망합니다. 성공하자면 매 한걸음 전진할 때마다 모두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부지런히 일하고, 대담하면서도 세심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그때마다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발견하면 조절하고 실제 상황에 부합되게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물가개혁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어려움을 맞받아 반드시 처리해야 합니다. 전당과 전국인민들에게 이것이 아주 어려운 사업이고 완전무결한 방침과 방법은 없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하고, 우리가 봉착한 것은 모두 새로운 사물들이고 새로운 문제이므로 경험은 우리 스스로가 창조해야만 함을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라고 했습니다. 물가를 풀어주고 개혁을 빠르게 하는 것이 정확한가 아닌가의 여부는 실천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순조로운 상황도 있고 위험한 상황도 있습니다. 다행이 이 10년 동안 중국에 만족스러운 발전이 있었고, 인민생활도 개선되었습니다. 그리고 위험에 적응하는 능력도 어느 정도 증대되었습니다. 나는 늘 동지들에게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더 대담해지라고 합니다. 소심해서 이것저것 두려워하다 보면 길을 걸을 수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중국 경제의 발전 속도는 그렇게 느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1988년에 풍랑이 일게 될지 모르지만, 속도는 여전히 10%를 초과할 것입니다. 매일 풍랑 속에서 전진하는 상황이 되겠지만, 네 배로 늘리는 임무는 틀림없이 완수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 상황이고 전망입니다.



이는 『덩샤오핑 문선 제3권』에서 가져온 것인데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인솔한 북한 군사대표단을 접견했을 때 한 담화의 일부이다. 개혁개방을 권해본 중국에서도 다룬 바 있지만, 1980년대 중국은 이렇게 북한 대표단이 올 때마다 - 설령 그것이 경제와는 별 관련없는 군사대표단이더라도 - 귀에 못이 박히게 개혁개방을 하라고 요구했음을 잘 보여준다. 덩샤오핑이 장관급에 불과한 오진우를 만나준 것 자체가 중국 측의 배려인지라, 북한 대표단은 뭐라 말도 못한 채 묵묵히 개혁개방 실무에 관한 강의를 듣고 돌아갔을 게 뻔하다.
by sonnet | 2010/08/15 12:18 | 정치 | 트랙백 | 덧글(44)
중국의 ‘주박呪縛’
다음은 1998년에 발표된 쿠니 아키라(久仁昌)의 「중국의 주박中國の‘呪縛’」을 초벌번역한 것이다. 이미 십 년이 넘은 글이지만 오늘날의 중북관계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시기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면 개혁개방을 권해본 중국도 참조.


중국의 ‘주박呪縛’

등소평을 격노시킨 김정일

근래의 중북관계는 1983년 6월 김정일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한 이래 김일성 시대의 중북간 「피로써 다져진 우호관계」 대신, 중국의 등소평과 김정일 사이의 상호 부정적인 원망과 불신, 근심 위에 구축되어 왔다. 우선 이 점을 확실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1983년 6월 1일부터 12일까지의 비밀 방중을 끝내고 귀국한 김정일은, 그 즉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제7차 회의(6월 15일~17일)를 소집하여 많은 출석자들 앞에서 귀국보고를 하면서, “중국 공산당에는 이제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있는 것은 수정주의뿐이다. 중국이 국시로 삼고 있는 「4개 현대화」 노선도 「자본주의로의 길」, 즉 수정주의 노선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격렬한 비판과 비난을 전개하였다.

회의 참석자가 많았기 때문인지 이 이야기는 며칠 지나지 않아 중국 측에도 전해졌고, 6월 하순에 이르러서는 중국 측이 그 내용을 모두 알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혁명 활동에 있어 김정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선배로 수많은 업적을 가진 중국의 최고지도자를 하필이면 「수정주의자」라고 꾸짖고 「4개 현대화」마저 「수정주의」 노선이라고 못 박은 것이다. 이에 등소평은 격노하여 측근에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로 인해 중국의 앞날이 위협받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군……”이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 때 등소평은 김정일을 가리켜 ‘황취랑黃嘴郞’([아직도] 부리가 노란 녀석;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과연 「문자 쓰는 나라」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표현이라 하겠다. 아무튼 혁명가로서 확고한 실적을 갖고 있는 등소평에게 이름도 없는 일개 「풋내기」 김정일이 혁명가가 가장 싫어하는 「수정주의자」 딱지를 붙였을 뿐 아니라, 중국이 국시로 삼고 있는 「4개 현대화」 노선까지 「수정주의노선」으로 규정했다는 것은, 등소평의 전 인생과 중국의 혁명업적을 통째로 부정한 것임에 다름 아니었다.

등소평의 당혹과 분노는 어느 정도였을까. 그 김정일이 맹방 북한의 다음 권력자로서 등장하리라고 예상되는 상황에서 등소평이 가슴 속에 당혹스러움과 위구심을 느낀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김정일은 이렇게 북한의 차기주석후계자로서 첫 해외방문인 비밀 중국방문 단계에서 중국과의 사이에 기본적으로 미묘한 위구심과 걱정, 불신감을 잉태한 막을 열고 말았던 것이었다.

등소평은 1997년 2월 19일 천수를 누린 끝에 사망했지만, 김정일에 대한 그의 위구심과 염려, 불신감은 등소평 이후 세대로의 이행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등소평 유언」이라고 할 만한 역할로 한층 증폭되어 북한 사정에 어두운 남은 중국지도부 간부들 사이에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봉추도棒棰島의 중북 극비 수뇌회담

김정일의 비밀 방중을 둘러싼 이러한 문제에 대해, 심각한 토의를 거듭한 중국 지도부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① 중국이 4개 현대화를 실현하기까지는 앞으로 수십 년이 소요된다.
② 그 동안 주변정세가 안정적이고 평화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김정일이 지도자로 등극할 경우에는 한반도 및 동아시아 정세의 안정이 그림의 떡이 되어버릴 우려가 있다.
③ 이와 관련하여, 김정일을 아무리 설득해도 진정으로 이해와 협력을 얻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렇다고 하면 중북관계의 역사적 경과를 잘 알고, 인간적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김일성 주석과 잘 협의하여 한반도의 앞날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방향으로 조건지워나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등소평이 주도권을 쥐고 김일성에게 「중북수뇌회담」의 조속한 개최 의사를 피력하게 되었다.

1983년 8월 등소평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여름휴가로 해수욕 계획을 세우고, 중국 당정간부들의 휴양지인 북대하北戴河로 향했다. 여름에 북대하로 가는 것은 의례적인 것이었으므로, 예민한 외국의 중국관찰자들의 이목을 끌 일도 없을 터이다. 객가(客家) 출신의 등소평다운 신중한 태도가 여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8월 19일 갑자기 그가 대련大連시의 리조트 봉추도 호텔에 나타났다. 마침 이 호텔에 투숙해 있던 일본인 상사원이나 기타 투숙객들은 급히 체크아웃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이유를 묻는 과정에서 호텔 직원들에 대한 사전 준비가 미흡한 탓에 극비 회담 개최 사실이 탄로 나고 말았다.

물론 회담이 끝난 후, 호텔 측에서 등소평의 방문을 기념하여 등소평과 김일성이 서로 담소하고 있는 대형사진을 호텔 로비에 걸었기 때문에 더 이상 「비밀회담」은 비밀이 아니게 되었지만…….

같은 날, 즉 8월 19일 김일성도 극비리에 이 호텔에 도착하여 양측간의 수뇌회담이 실현되었다. 나중에 중국 측으로부터 흘러나온 정보에 의하면, 그 정황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즉 등소평은 같은 해 6월, 김정일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의 「비우호적인 태도」, 특히 귀국 후 당중앙위원회에서의 중국에 대한 비판·비난에 관해 상세하고도 솔직하게 언급하고 「이것은 중국으로서는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고 엄중히 지적함과 동시에 중국 지도부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정황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양국의 역사적, 전통적 우호관계와 혁명적 우정에 호소해 양국 장래의 불안 요소를 해소하도록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또한 그 자리에서 북한 측이 중국의 「4개 현대화」노선을 지지하고 이에 동조해 북한 경제의 향상과 활성화에 힘써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아들 김정일의 평소 행동양식을 잘 알고 있는 김일성은, 중국 측의 지적에 반론의 여지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듣고는, “김정일에게 잘 알아듣도록 타이르고 조만간에 다시 방문하게 할 테니, 그때 잘 타일러 달라”고 간청하여 등소평의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사죄를 위한 중국 재방문은 김정일로서는 참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설득에 대해 “중국이 수정주의의 길을 걷는다 해도, 그것은 중국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들 마음인 것이다. 「주체사상에 의한 일색화」를 목표로 하는 우리나라가 중국이 말하는 대로 할 필요는 없으며, 수정주의를 엄격하게 구별해서 그 침투를 단호히 배제해야만 한다.”고 항변하면서 중국 재방문을 반대했다고 한다. 이것이 후에 김정일 주변에서 구호가 된 「우리 식」의 출발점이지만, 그 상당 부분은 중국의 행보에 대한 반목과 반발, 반항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이런 불효자 같으니라고!” 아버지 김일성의 일갈

하지만 사죄를 위한 중국 재방문 건은 김일성의 설득으로 성사되게 되었다. 김일성은 “애비인 나는 네가 잘 될 수 있도록 어떠한 수치도 견디고 있는데, 너는 그것도 모르느냐! 이런 불효자 같으니라고! 이제 와서 등소평과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다!”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김정일의 중국 사죄방문은 1983년 9월에 이루어졌다. 이때 김정일은 지난번과는 달리 등소평이 자리를 권해도 자리에 앉지 않고 시종일관 선 채로 등소평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중국 측도 김정일을 설득하기 위해서 심천 경제특구를 시찰하게 하는 등 「4개 현대화」 이론과 실제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였고, 김정일도 나름대로 언행을 삼가하였다. 그 결과, 중국 측은 “이번 김정일의 중국 방문에서는 「적극적 반응」을 느낄 수 있었다”고 평양에 통보함으로서 일단 김정일에 대한 승인의 뜻을 표명함으로써 김일성을 안심시켰다.

여담이지만, 이 시기에 북한은 그간 취해온 「한국의 전두환정권은 남북 대화의 상대로 삼지 않는다」는 태도를 바꾸어, 1983년 10월 8일 중국 지도부에 대해 남북한 및 미국이 참여하는 「3자회담」 개최와 관련된 대미중재, 알선을 의뢰하였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비밀수뇌회담에서 북한에 대한 중국 측의 끈질긴 정책 「각인刷り込み」 노력의 성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등소평과 김일성 사이에는 일정한 양해에 도달하였지만, 등소평·중국과 김정일 사이에는 여전히 무엇 하나 양해가 성립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83년 6월의 비밀 방중으로부터 봉추도 극비수뇌회담을 거쳐 다시 「사과」방문에 이르는 일련의 경위와 결과라는 등소평의 ‘문중 어른’식의 간섭은 아버지 김일성에 대해 김정일이 품고 있는 열등의식을 더욱 자극하여 김정일에게 씻기 어려운 등소평·중국에 대한 반발, 반목을 고착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훗날 한중수교에 대한 반발(1992년), 중국을 배제한 대미접근정책, NPT 탈퇴선언(1993년) 및 준전시상태와 같은 정책으로 치닫게 되어, 그 결과 김일성과의 대립이 잦아져 김일성의 사망(1994년)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등소평이 김정일에게 품고 있던 위구심과 우려는 금방 현실로 나타났다. 즉 김일성이 중국에 대해 「3자회담」의 대미중재를 의뢰한 다음 날인 1983년 10월 9일, 버마(현 미얀마)의 수도 랑군(현 양곤)시 아웅산 묘지에서 바로 그 「3자회담」의 상대인 남한의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북한 특수공작부대 소속 군인 3명에 의한 폭탄테러사건이 자행되어, 참석해 있던 한국각료 4인을 포함한 16명이 폭사하고, 버마인을 포함한 다른 1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는 중개·알선역을 맡은 중국의 체면을 뭉개버린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테러 후 자폭을 시도하다가 부상을 입고 체포된 범인 진모 소좌와 강명철 대위의 자백과 기타 증거로 볼 때, 김정일의 직접 지시에 의해 실행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강력히 이를 부인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중국에게 미얀마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발휘해 사건의 진상을 얼버무리고 추궁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자의적인 국제 테러사건으로, 중국이 바라는 주변정세의 안정화를 크게 위협한데다가, 중국으로 하여금 미얀마에 대한 압력문제를 놓고 국제테러리즘에 가담할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난감한 입장에 서게 만들었다. 중국은 결국 북한의 요구를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한 분노와 노여움을 가슴속 깊이 새기게 되었을 것이다.


중국이 제시한 ‘대북한정책 6개항’

그 등소평이 1994년 7월 김일성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김정일에게 주었다고 하는 「중국의 대북한정책 6개항」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김일성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북경 측이 급히 파견한 「중국 당·정부 조문대표단」(그 중 한 사람은 「등소평 판공실 주임」이란 직함을 갖고 있는 인민해방군 총정치국 부주임인 왕서림王瑞林)이 평양으로 휴대하고 가서 조선노동당에 전달한 것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경제발전과 국가건설이라는 김일성의 유지를 승계하는 것을 확고히 지지한다.
② 한반도의 「비핵화」를 희망한다.
③ 구실을 만들어 군사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한다.
④ 이러한 것들이 지켜진다면 중국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북한의 경제개혁을 지지하고, 북한으로부터의 원조확대 요청에 응한다.
⑤ 김일성의 유지를 계승한다면 중국과 북한의 양당, 양국, 양인민의 우호발전을 다시 한번 표명할 용의가 있다.
⑥ (어느 한 편이 공격을 받을 경우, 다른 한 편의 자동참전조항을 포함한)중북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에 대해 중국은 양국의 전통적인 우호와 지역의 평화안정이라는 입장에서 수정 의견을 낼 용의가 있다.
(홍콩 『신보信報』1994년 7월 22일자)

이 6개항은 중국이나 북한 모두 공식적인 확인을 피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중에 「김일성의 유지를 계승」한다는 것과 같이 큰 이견이 없는 항목도 있지만, ②의 「한반도의 비핵화」라든가 ③의 「군사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 같은 김정일이 추진하는 정책에 명백히 반하는 항목도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어찌되었든 간에 이 「6개 항」에 포함된 중국의 북한경제지원도, 「김일성의 유지」를 계승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만큼, 말하자면 김일성이 죽고 드디어 김정일이 「등극」(즉위)하는 정세 속에서 「등극을 위한 통과의례」이며, 김정일이 북한의 실권자로서 아시아 정치마당에 등장하는데 있어 일종의 「수갑, 족쇄」를 채우기 위해 중국 측이 부과한 “주박呪縛”(주술로 꼼짝 못하게 함)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은 현재 등소평이 평생의 꿈으로서 추진해 온 홍콩의 반환을 1997년 7월 1일에 실현하고 아시아 「신흥공업국NIES」의 모범생인 홍콩 경제의 역동성을 중국경제에 끌어안은 여세를 몰아 아시아 전역에 걸친 지도권을 확립하고 세계경제, 정치사회에 파고들어 장래 세계의 중심국으로 발돋움하기를 꿈꾸고 있다. 이러한 등소평의 꿈은 1997년 9월의 제15기 당대회를 거쳐 새롭게 편성된 총서기 강택민(국가주석), 이붕(수상), 주용기, 이서환, 정관근, 호금도 등 신지도부진용에도 정확히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정일 정권을 원만히 발족시키기 위해서는 평양의 내부사정과 더불어 중국과의 사이에 쌓이고 쌓인 정책의 괴리를 전면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중국의 “주박”은 「김일성의 유지의 준수」를 명분으로 삼고 있는 만큼 「유훈통치」를 외치고 있는 김정일 정권에게 있어 저항하기 어려운 무게를 갖고 있다.

1996년 가을 이후, 중국 측으로부터 몇 차례나 「수뇌회담」 제안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피해왔다고 하는데, 회담개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중국과의 정책조정 -결국은 중국이 요구하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지만- 이, 김정일 체제 그 자체를 흔들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참고: 다음 단행본을 저본으로 이용하였으며, 한국어 번역판을 참조하되 가능한 직역에 가깝게 옮겼다.
關川夏央, 惠谷治, NK會 編. 『北朝鮮の延命戰爭 : 金正日·出口なき逃亡路を讀む』. 東京: ネスコ, 1998. pp.176-184
(김종우, 박영호 역, 『김정일의 북한, 내일은 있는가 : 김정일, 비상시 탈출로를 읽는다』 서울: 청정원, 1999. pp.184-191)
by sonnet | 2010/07/12 09:14 | 정치 | 트랙백 | 핑백(1) | 덧글(40)
개혁개방을 권해본 중국

1980년대 전반 중국은 자국의 개혁개방을 진행하면서, 동맹국 북한에게도 개혁개방 노선을 따를 것을 여러 차례 권했다. 북한은 점차 소련 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며, 양국 지도부는 자주 정상회담을 가졌다. 중국은 북한 지도자들과 회담을 가질 때마다 응분의 원조를 제공하여 양국 관계에 기름칠을 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대화는 동상이몽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김일성: 우리도 중국의 개혁개방을 배워서 실시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호요방: 현 시대에서는 어떤 나라도 쇄국정책을 실시하고서는 발전할 수 없다. 하루 빨리 개방정책을 실시하되, 당신들의 실정에 맞도록 적절히 하라.
김일성: 중국은 현재 남조선과 직접 접촉을 하는데, 앞으로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호요방: 간접교역이나 국제적 체육행사 등 비공식 관계만을 유지하려고 한다. 우리가 남조선과 비공식 접촉을 한다고 해도 당신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김일성: 중국은 서울올림픽에 참가할 것인가.
호요방: 아직 검토 중이다.
조자양: 당신들이 개방정책을 실시한다고 말했듯이, 우리는 이를 하루 빨리 실시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본다. 현 정세 하에서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경제건설에 치중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김일성: 우리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남조선이 먼저 북침을 한다면, 중국은 우리를 지원해 주겠는가.
조자양: 남조선은 미국의 동의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다. 우리가 미국과 손을 잡고 있는 한 북침은 없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만약 남조선에서 먼저 북침한다면, 지원군을 보내겠다.
김일성: 우리가 제안한 3자회담에 대해서 미국과 협의해 보았는가.
조자양: 미국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3자 회담에 응하도록 종용했으나 미국이 응하지 않고 있다. 우선, 남북 직접대화를 하는 것이 좋으리라 보는데, 당신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김일성: 평양에 돌아가 충분히 검토하겠다.

‘김일성 중국방문시 호요방-조자양과의 대담기록’, 1984년 11월 27일 [오진용,2004:152-3]

이처럼 중국은 북한보고 개혁개방을 하라고 거듭 권하지만, 북한은 개혁개방보다도 남북경쟁이나 안보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이 역력했다. 이런 분위기는 반 년 후의 다음 정상회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최근에 와서, 우리가 소련과 교류비행(상호방문비행)을 하고, 소련의 고위층이 북한을 방문하는 등 소련과의 관계 긴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중국에 대한 혈맹관계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으니, 이 점 이해하기 바란다. 또 나진항을 소련에 조차해 주었다고 하는데, 유사시에 사용하도록 한 것이지, 평상시에 소련군을 주둔하도록 한 것은 아니다.
호요방: 우리는 오해도 우려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소련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환영하고 있다. 북조선도 군사비를 축소하고, 경제건설에 힘써 줄 것을 우리는 바라고 있다.
김일성: 우리도 중국 측 의견에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미국에 의해서 남조선에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고, 북침 준비훈련(팀 스피릿 훈련)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군사력 증강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남조선에서 북침 준비훈련을 아니하고, 군비를 먼저 축소한다면 우리도 병력을 감축할 용의가 있다.
호요방: 미국에 의한 북침은 없을 것이다. 경제건설에 치중하도록 하라. 그래야 앞으로 남북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호요방의 신의주 방문시 김일성-김정일과의 대담”, 1985.5.4. [오진용,2004:185]

김일성이 소련 카드를 슬쩍 흔들어 보이지만, 중국은 꾹 참고 그런 건 괜찮다며 계속해서 개혁개방과 경제건설을 주문하고 있다.


1983년 후계자로 공인된 김정일이 처음으로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덩샤오핑이 직접 나서서 젊은 김정일에게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얻은 경험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중국의 특성은 낙후되고, 가난하고, 지방은 넓고, 인구는 많아서 매우 복잡하다는 점이다. 어떤 한 가지 문제를 처리할 때, 어떤 경우에도 최소한 천만 명 이상 1억의 인구가 관련이 된다. 예를 들면, 1978년 11월 우리가 우선 농촌 문제를 처리하려고 할 때, 농민 문제는 전국 인구의 80% 이상이 관련된 문제였다(그러니 얼마나 복잡했겠는가). 그러나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실천을 통해서 증명이 됐지만, 우리가 처리한 농촌 문제는 거의 완벽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같은 의미에서 노동자 문제, 간부 문제, 지식인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노선이나 정책적인 문제에서 좌우의 주장이 서로 부딪히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떤 때는 서로 싸우기까지 했다.
이번 인민대표대회에서 보고한 정부공작보고에서도 기본건설 투자항목 문제도 처리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우리는 지방의 입장만을 고려할 수만은 없다. 단지 지방의 입장만을 생각한다면, 국가가 계획적으로 추진하려는 큰 사업들은 모두 돈이 없어서 추진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여러 분야에서 많은 문제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지속적으로 정책을 조정해야 하고 이들 정책들의 결과가 다른 연관분야에 미치는 영향을 잘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지금 우리의 노선, 방침, 정책은 모두 정확하게 추진되고는 있지만, 아마 이후에도 우리는 실수를 할 것이며, 다시 한번 과오를 저지르는 일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두 가지 큰 일에 모든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하나는 경제계획을 잘 처리해서 4개 현대화의 핵심 문제를 ‘실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간부들을 점차 청년화(靑年化)하고 지식화(智識化)하는 문제이다.

등소평은 이처럼 중국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겪는 문제들을 얘기했다. 등소평의 말 속에는 젊은 김정일에게 하고 싶은 간곡한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개혁·개방에 관한 문제보다는 중·북한 양국관계에 더 관심을 보였다. [오진용,2004:103-4]


좋든 싫든 간에 북한은 대규모 원조를 제공하는 주요 동맹국 중국의 거듭되는 요구를 딱 잘라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북한은 개혁개방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합영법을 만들고, 중국에 개혁개방을 따라하기 위한 대규모 시찰단을 보내기 시작했다.

1983~85년 동안 북한에서는 중국의 개방정책 현장 학습을 위한 대규모 시찰단을 계속해서 파견했다. 그 규모는 대단했다.[65] 중앙의 당·정부 차원은 물론이고, 각 도(道) 그리고 시(市)와 기업소의 행정간부들에게까지 ‘중국을 배우자’는 열기가 확산되었다. 심지어 청년 친선참관단 500명을 세 팀으로 나누어서, 중국의 11개 도시를 돌며 기업의 현장을 참관했다.[66] … 1985년까지 이런 식의 ‘중국 따라배우기 운동’은 계속됐다. 그러나 실제 북한의 개혁 조짐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고, 대외개방은 계속 겉돌고 있었다.

[65]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1983~85년의 기간 동안 북한의 각 분야 실무자들 5천 명 이상이 중국의 개혁·개방 도시와 기업의 현장을 시찰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66] 1985년 8월 23일부터 9월 10일의 기간 동안 북경방송과 평양방송은 연일 이 참관단의 활동을 보도했다.[오진용,2004:110]


이처럼 언뜻 보기만 해도 북한의 움직임이 상당했기 때문에 외부 관찰자들은 북한이 중국을 따라 개혁개방을 시도할 지 많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 움직임을 끌어내기 위해 공을 들였던 중국은 북한 지도자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중국은 일찍부터 북한이 중국식 ‘개방’을 따라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북한의 젊은 지도자 김정일의 행동에 대한 평가와도 관련이 있었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의 경직된 ‘주체사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점과 개방 이후 나타나는 북한 사회의 다양한 변화에 대해서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의 지도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호요방은 1984년 7월 5일 중국을 방문한 미야자와 기이치 전(前) 일본 외상을 면담한 자리에서 북한의 개방을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큰 노력을 하지 않는 한, 발전은 없어 보인다. 김일성, 김정일이 다같이 중국이 취하는 개방정책과 경제활성화정책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부터 찬양하고 있다. 그 예로 북한은 각 도(道)의 최고 책임자 50명을 중국에 보내 상해 등 주요 도시를 시찰시킨 바 있다. 그러나 중국의 개방정책을 북한이 자국 내에서 실시할지 여부는 솔직히 호요방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평가했다.[67]

[67] “1984년 7월 6일자, 교도통신의 보도. 1984년 7월 5일 북경발 지지통신의 보도. 북한이 계속 대규모 시찰단을 중국의 주요 개방 도시로 파견해서 많은 기업현장을 직접 시찰하도록 하고 있으나, 북한이 중국식 개방을 답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중국의 대다수 실무자들도 상당히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호요방의 이런 의문은 중국 측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오진용,2004:110-1]


북한의 개혁 시도(혹은 시늉)은 오래 가지 않았다.

호요방의 북한에 대한 이런 평가는 정확했다. 김일성은 일본잡지 《세카이》(世界)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절대로 외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외자를 받아들여 경제를 건설하면, 예속경제가 되고 맙니다. 나라의 정치 독립뿐만 아니라, 경제 독립도 중요합니다.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에 예속되면, 정치적으로 예속됩니다. 우리는 경제건설에서 외자를 받아들여 단번에 높이 뛰어오르려 하지 않으며, 자체의 힘으로 한 단계 한 단계씩 톱아(높이) 오르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68]

[68]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일본 정치리론 잡지 《세카이》(世界) 편집국장이 제기한 질문에 주신 대답”, (1985.6.9) 《근로자》, 1985년 8월호, pp.15-16.[오진용,2004:111]

이 수령의 선언이 '합영법'을 만들고 1년 만에 나온 이야기라는 것을 기억해 두자.


일전에 김정일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뒤따를 수 있을 것인가?란 글에서 '박철 사건'이란 것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사건이 바로 이 때 벌어진 일이다.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북한 농업과학원 연구원으로 지내다 숙청되어 탈북한 이민복은 1980년대 중반의 '박철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85년 당시 과학원 지질학연구소 실장이었던 박철은 식량난 타개책으로서 ‘농장포전 개인책임관리제’라는 논문을 작성하여 중앙당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인 즉 간부를 포함한 전농장원의 개개인에게 논밭을 맡겨서 생산관리를 행한다는 것이다. 이 제안은 중앙당의 과학담당비서 김환, 농업담당비서 서관히, 정무원총리 강성산 등을 비롯하여 북한 지도부 내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군급 이상 농업간부들의 토론에서도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철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련의 움직임은 김일성의 주체 농법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혹독한 비판을 받고 주요 관련인사가 처분되거나 사상투쟁의 대상이 되어 사라진다. 이후 누구도 감히 자영농 지향의 농업개혁을 건의하지 못하였다.

박철 사건 직후 김일성은 본인 명의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여기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제도는 섰으나 사회주의건설이 완성되지 못하였으며 착취제도는 청산되었으나 자본주의 복구의 위험이 남아있는 그런 사회는 완전히 승리한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면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한 처방으로 ‘협동적 소유의 전인민적 소유로의 전환’, ‘인민정권의 강화’, ‘사회주의 제도의 공고화’ 등의 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박철과 같은 제안을 봉쇄함과 동시에 당시 중국이나 소련의 농업개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박철이 이런 제안을 내놓고, 북한 간부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소개한 시대적 배경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전국에서 5천여 명의 간부를 중국에 보내 개혁개방을 시찰시키면서 뭔가 개혁에 대해서 말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일시적으로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다음과 같이 이 싹을 잘라버렸다.

이 점은 1985년 중국식 가족도급제와 농가생산책임제 도입을 주장하다 비판받고 숙청된 농업연구사 ‘박철 사건’에서 드러났다. 당시 박철의 행동을 제때에 저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 경제 담당 비서였던 김환은 정무원 부장으로 강등되었고, 비슷한 견해를 보인 당선전선동부 부부장도 비판을 받고 전보조치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북한 문헌들은 박철이 일부 사회주의 나라의 ‘개량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난하고 있다.
1980년대 중엽 일부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는 … 경제분야에서부터 개혁·개편하는 길로 나갔다. 농촌경리부분에서는 가족을 단위로 하여 생산수단을 나누어주고 세대도급제를 실시(하였다) … 우리의 일부 일군들 속에서도 다른 나라에서 실시하는 경제개혁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세우지 못하고 그에 동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주체의 사회주의 경제관리방법을 옹호관철하는 문제는 단순한 경제실무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제도를 고수하는가(하는) … 심각한 정치적 문제였다. 김정일 동지께서는 1986년 7월 15일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하신 력사적인 담화에서 … 가족단위로 생산수단을 나누어 주고 도급제를 실시하게 되면 그것이 자본주의적 요소를 낳게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고 확언하시었다. … 농촌기술혁명이 진척되어 농업생산력이 높아진 우리나라에서 가족을 단위로 도급제를 실시하려는 것은 … 봉건말기의 분산적인 소농경리에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시며 우리는 사회주의적 농업협동경리로부터 소규모적인 개인경리로 뒷걸음 칠 것이 아니라 농촌경리를 집단주의적 경리에로 진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시었다.

이상의 인용문은 당시 경제개혁 의제가 단순히 효율성과 생산성 등 경제실무적 시각에서만 고려할 수 없는 정치적 문제임을 시사한다. 사회주의를 고수하기 위해 중국발 경제개혁 의제가 여전히 정치적 통일·단결의제에 종속되었음을 의미한다.[한기범,2009:92]

위 인용문의 출처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김정일동지 전기 2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3), 468-469쪽. 즉 박철을 때려잡은 것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업적으로 홍보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북한이 2004년에 북한이 몇몇 협동농장에서 분조담당제를 실험한 것을 갖고 북한이 "개혁 개방을 할 의지가 그들에게 확실히 있었다"며 "햇볕의 통찰과 같이 북이 행동해 오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이런 것은 1980년대에 북한이 보여준 시도의 재탕이거나 그보다도 못한 사소한 제스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떡밥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는 풍조는 끊이지 않고 있다. 조지 케넌은 60여 년 전에 이미 이런 문제점을 통렬하게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러시아/소비에트만 북한/북한정권으로 바꿔 읽으면 변한 게 하나도 없음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가 우리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그들 정책의 하나 둘 쯤은 일시적으로 뒷방에 쳐넣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미국인들은 벌떡 일어나 "러시아가 변했소"라고 신나게 선언한다. 그리고 그 중 어떤 이들은 그러한 "변화"를 가져온 데 대한 공적을 챙기려고 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전술적인 행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소비에트 정책의 그런 특성들은 그들이 기원한 공리처럼 소비에트 권력의 내적 본질로 볼 때 당연한 것이며,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든 뒤로 감추어져 있든 간에 소비에트 권력의 내적 본질이 바뀔 때까지 우리와 계속 함께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러시아를 상대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해진 날까지 우리 사회를 전복시키기 위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식 사업에 이미 뛰어든 상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Kennan,1947]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도자가 중국을 시찰한다거나, 몇몇 해외시찰단을 보내고 교육을 받는다든가 하는 에피소드들은 북한이 진짜로 개혁개방에 나선다는 것을 전혀 담보해주지 못한다. 이런 노이즈를 걸러내고 진정한 추세 변화를 포착하려면 좀 더 장기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전례를 돌이켜 볼 때, 보다 믿을만한 증거는 중기적(4~6년)인 변화 추세인 것 같다. 북한이 돌이킬 수 없는 개혁개방을 궤도에 올렸다는 것을 확인하려면 이 정도 기간을 잡아 덩샤오핑의 중국, 혹은 고르바초프의 소련 등이 추진한 변화와 비교하는 방법을 통해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Kennan, George F., The Sources of Soviet Conduct, Foreign Affairs, July 1947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서울: 나남, 2004.
한기범. “북한 정책결정과정의 조직행태와 관료정치 : 경제개혁 확대 및 후퇴를 중심으로(2000~09).”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경남대학교 , 2010년 2월
by sonnet | 2010/05/28 10:48 | 정치 | 트랙백(2) | 핑백(3) | 덧글(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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