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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대한민국임시정부
2018/05/13   광복 후 미군정 3년간의 중경임시정부에 대한 당대인의 관점 [8]
2007/08/25   임정폭격론 (장준하) [17]
2007/08/12   백의사 대북타격작전 [16]
광복 후 미군정 3년간의 중경임시정부에 대한 당대인의 관점
이 글은 (단독으로 완성을 목적으로 한 글이 아니고) 간단한 의견과 그렇게 생각한 근거를 기재한 메모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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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정국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순수하게 도의적인 계승은 사실 심각하게 논의되지 않았고 독립적인 주제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중경임시정부와 그 구성원들이 멀쩡히 살아 있었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세력이었기에, 이들이 향후 건설될 민족국가에서 어떤 지위와 권력을 차지하느냐가 첨예한 현실정치문제였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도통(?)은 현실정치에서 중경임정세력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놓고 동원되는 도구(명분) 중의 하나였다.

중경임시정부를 떠받들어 새 나라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임정봉대론이라고 불리는데, 초기에는 한민당+중경임정계의 논리였고, 국내정치 분화가 진행되고 나서는 이승만과 한민당이 떨어져나가 한독당의 주장이었다가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좌파 계열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했다.

한민당이 중경임시정부 추대운동을 벌인 데 대해서는 일제시기의 행위 때문에 민족한테 내세울 것이 없어 정치적 상징조작으로 중경임시정부를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명이 통설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 하나만으로 한민당이 중경임시정부 추대운동을 벌인 것은 아닌 것 같다. 보수적 정치세력인 한민당이 받들어 내세울 수 있는 우익 독립운동세력은 한독당이 주류인 중경임시정부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점 못지 않게 앞서 살펴본 대로 송진우측이 8·15 이전부터 중경임시정부를 추대하려고 했던 데에는 중경임시정부에 대해 과대하게 기대를 하여,[88] “해외 임시정부가 들어와 정권을 집행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 상당히 작용을 하였다. 송진우측은 실제로 중경임시정부가 연합국한테 승인을 받았고, 수만의 독립군을 거느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가능성도 초기에는 어느 정도는 있었던 것 같다. 한민당의 중경임시정부 추대의 이유는 9월 8일 나온 한민당 발기인 성명서에 잘 나타나 있다.

오호라 사도여. 군등은 현 대한임시정부의 요인이 기미독립운동 당시의 임시정부의 요인이었으며, 그 후 상해사변, 지나사변, 대동아전쟁 발발 후 중국 국민정부와 미국정부의 지지를 받아 중경, 워싱턴, 싸이판, 오키나와 등지를 전전하여 지금에 이른 사실을 모르느냐. 동 정부가 카이로회담의 3거두로부터 승인되고, 상항 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사실을 군등은 왜 일부러 은폐하려는가.

즉 중경임시정부는 기미운동 당시의 임시정부 법통을 이어받았고 연합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았으며, 중국, 미국, 싸이판, 오키나와 등지에서 독립을 위해 혁혁하게 싸웠기 때문에 중경임시정부를 추대하여야 한다고 중경임정 추대의 이유를 밝혔다. 연합국이 중경임시정부를 승인하였다는 것은 이 이후에도 계속 주장되었는데, 그것은 이승만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이승만은 귀국한 이틀 후인 10월 18일 한민당 선전부장 함상운에게 “중경임시정부는 이미 중·불 등 연합국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미국도 미구에 승인할 것을 언명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여, 한민당은 즉시 이를 삐라로 만들어 살포하였다. 한민당 등 우익측은 후에 반탁투쟁에서도 그러하였던 것처럼, 중경임정을 환영하는 자는 애국자로, 반대하는 자는 ‘비국민’처럼 선전하였고, 중경임정 추대를 반대한다고 하여 여운형과 건준을 몹시 비난하였다.[92]

[88] (…) 중경임시정부는 스스로를 과대선전하였는데, 그것은 귀국 후에도 나타나, 귀국한 다음날의 기자단 회견에서 엄항섭은 광복군의 실세는 400~600명 밖에 안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총세가 1만이 된다고 말하였다.
[92] 이만규, 앞책, 227쪽. 이만규는 허언과 중상모략으로 중경임정 추대운동을 벌여 우익이 민중을 속였다고 주장하였는데, 당시처럼 정보가 차단된 사회에서는 중경임정에 대한 과대선전은 민중한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서중석,1991:269-270]


국내에 중경임정의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아 과장되어 있었고, 거기 편승해야 하는 한민당 같은 국내우익의 사정도 있었던 것이다. 한 편 좌파의 반대논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임시정부 추대에 대한 좌익의 반발 또는 반대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선공산당은 해방 직후에는,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철쇄하에서 악전고투하며 구사일생해온 것은 노농대중이고, 이 노농대중이 금일 국가적 독립과 민족적 해방의 주체자가 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국내 혁명세력을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 두고, 인민공화국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여운형은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중경임정 추대 운동을 반박하였다. 그는 임시정부는 30년 간 해외에서 지리멸렬하게 유야무야 중에 있던 조직이니 국내의 기초가 없어 군림이 불가하다는 점, 연합국한테 승인되지도 될 수도 없다는 점, 미주, 연안 시베리아, 만주 등지의 혁명단체 중에는 임시정부보다 몇 배가 크고 실력 있고 맹활동한 혁명단체가 있으며 그네들 안중에는 임시정부가 없다는 점, 국내에서 투옥되었던 혁명지사가 다수인데, 안전지대에 있었고 객지고생만 한 해외 혁명가 정권만을 환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 중경임정을 환영하는 자들은 혁명 공적이 없는 자들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는 것이고 건준의 정권수립권을 방해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 중경임정만 환영하는 것은 해내해외의 혁명단체의 합동을 방해하고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오라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중경임시정부 추대를 반대하였다. [94]

[94] 자세한 것은 이만규, 앞책 225~227쪽 참조. 해방 직후 여운형은 장덕수에게 “설산, 나도 상해에 있어 보았지만, 임정에 도대체 인물이 있다고 할 수 있겠소. 누구누구하고 지도자를 꼽지만, 모두 노인들뿐이고 밤낮 앉아서 파벌싸움이나 하는 無能無爲한 사람들뿐이요. 임정요인 중 몇 사람은 새 정당이 수립하는 정부에 개별적으로 추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임정의 법통을 인정할 수 없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82.6.11. “비화 미군정 3년”).

[서중석,1991:270-273]


일본이 패전하자 독립국가 건설이 매우 빨리 그리고 쉽게 될 거라는 막연하고 희망적인 기대가 해방 직후 조선인들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후대의 우리가 보면 당연히 무리한 이야기지만, 정서적으로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은 든다.

김구, 김규식, 이시영 등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이 1차로 11월 23일 귀국하고, 2차로 12월 2일에 홍진, 조성환, 조소앙, 김원봉 등이 귀국하였을 때 한국인들의 중경임시정부 요인에 대한 기대는 컸다. 해방 직후 바로 독립이 될 줄 알았는데, 독립의 실현은 계속 미뤄지고 있었고, 38선의 장벽은 투터워져갔으며, 점차 좌우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민족의 장래에 불안이 커가고 있었다. 그래서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였을 때 기대를 많이 가졌지만,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민족적 단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이제 중경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기대를 걸게 되었다. 민족 대단결의 임무가 중경임정 요인들에게 지워진 것이다.

[서중석,1991:275-276]


즉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고, 또 한 달 후에는 김구에게 기대를 건 것인데 그것도 한 달 정도 지나자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12월은 해방된 해의 마지막 달이었기에, 그리고 해방 이후 불길한 상황이 계속 나타났기 때문에, 민중은 불안 속에서 해가 가기 전에 어떤 돌파구 – 희망이 보이기를 원했다. 이 시기에 정치적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력은 말할 것도 없이 중경임시정부측이었다. 그런데 중경임시정부측은 인민공화국이 ‘양보’치 않았기 때문이라지만, 12월 하순 모스크바3상회의 결의와 관련되어 신탁통치문제가 보도될 때까지 뚜렷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고, 대체로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중경임시정부 요인 귀국 후의 어두운 정치상황을 안재홍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126]

임시정부 귀국 1주일이 지나 벌써 민중은 불안을 품었고, 1개월이 되어서는 초조하였었다. …… 임시정부 내 좌방세력이 포섭되어 있으니만치 좌우협상이 상당히 되려니 하였으나, ‘인공’은 스스로 양보치 않고, 임정은 민족주의진영 총지지의 기세도 있어 법통으로 굳게 지키어 스스로 걸어내려와 타협할 수 없으매, 인공측이 주장하는 양자 동시 해체, 평지 재건식의 논법과는 조합(調合) 될 수 없었다.
[서중석,1991:280-281]


시간이 흐르고...

해방 후 3년 동안 김구가 주축이 된 임정봉대세력은 여러 가지 시도를 했지만 결국 현실정치에서 실패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 부분은 필요하다면 내용을 좀 보강할 수도 있으나, 꼭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임시정부 세력이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성사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앞선 안재홍의 말에서 드러났던 본국 국민들의 꿈과 희망과는 달리, 임정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실력자이자 끝판왕이 아니었던 것이다. 임정귀국세력은 그냥 좀 큰 하나의 우파집단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경 임시정부의 정치적 유산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현실정치세력이 재야에 버티고 있는 것은 새 집권세력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이러한 정치노선에 대한 당시 남북 양 정부의 평가는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남한의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암살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정보장교였던 김창룡 등이 작업한 안두희의 위작 『시역의 고민』에는 암살의 진정한 이유가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1948년 10월의 여순반란 사건, 1949년 5월의 표무원·강태무 대령 월북 사건, 국회 프락치 사건 등 중요한 사건에 모두 김구와 한독당을 연결시켰다. 특히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노선을 격렬하게 공격하였고, 여전히 김구가 북한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한국독립당은 ‘공산당보다 더 미운 당’이요, 김구는 ‘용서할 수 없는 이적행위자’였다.
여기 공공연히 국가를 중상하고 국시를 훼방하며 국책을 반대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이적행위자가 있다! 그는 바로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이시요, 국부이시요, 애국자이신 김구 선생이시다. 이 이가 김구 선생이시기 때문에 정부 아니 우리의 엄연한 법도 손을 못 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김구가 암살된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백범관을 묵인하는 묘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김구씨를 살해한 동기에 관하여서도 공표하고 싶은데, 그것은 발표할 때가 되면 반드시 공표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때 모든 사실을 일반인 앞에 공개해 놓는다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그 생애를 조국독립에 바친 한국의 한 애국자에 대한 추억에 불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진순,1997:343-344]



참고자료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by sonnet | 2018/05/13 19:31 | 정치 | 트랙백 | 덧글(8)
임정폭격론 (장준하)

일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중경 폭격을 자원, 이 임정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 설욕의 뜻이 아직 불타고 있다면 어떻게 임정이 이렇게 네 당, 내 당 하고 겨누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 임정국무회의가 베푼 만찬 석상에서, 장준하 -

by sonnet | 2007/08/25 12:46 | 한마디 | 트랙백 | 핑백(1) | 덧글(17)
백의사 대북타격작전
앞선 글에서 백의사(白衣社)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어서 부연.

3. 우익의 북한 타격정책

1946년 모스크바삼상회담의 소식과 국가수립 문제의 부각은 정권적 차원에서 남북문제를 인식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남한 우익의 경우 반탁운동이 그러하듯이 김구의 임시정부가 북한의 정권기관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모스크바삼상회담의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이란 조항도 그러하거니와, 북한지역에서 임시인민위원회란 준국가기구의 출범은 유일한 정부의 대표성을 주장하던 김구와 임시정부의 권위를 손상시키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46년 초반 우익진영은 반탁운동의 일환으로 운동원을 북한으로 파견하여 ‘대북타격정책’을 실행하였다. 이러한 타격정책에는 이승만도 관여하였지만,[61] 「김구-신익희」로 이어지는 임정계가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백시영·강응용 등은 임정의 반탁포고문을 가지고 월북하였으며[62], 반탁학련에서 윤한구·최중하 등으로 구성된 ‘대북반탁공작대’ 7명은 북한으로 가서 조만식을 만나고, 반탁결의문에 서명을 받아와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에 전달하기도 하였다.[63]
임정계의 대북정책을 주도한 것은 내무부의 조직국과 정보국이었으며, 이들은 또한 신익희의 정치공작대와 연결되어 있었다. 임정의 대북공작은 일종의 특수공작으로 다음 「잠행행동(潛行行動)」의 준비 방책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다.

[준비 방책]
(1) 건국광인(建國狂人)을 북으로 보낼 기초 준비가 필요. (최대 위험)
(2) 자급자족에 방도를 연구할 만한 질적(質的) 인물만 필요. (수적 발전은 금물)
(3) 각 지방조직체는 그 지방 중심으로 인물경제를 운영토록 할 것. [64]

이러한 대북공작에 가장 적합한 ‘건국광인’(建國狂人)은 북한 현지의 연고가 있는 반공인사들이었다. 여기에 활용되는 것이 1945년 11월 염응택의 지도로 결성된 ‘백의사(白衣社) 결사대’의 월남 청년들이었다. 당시 백의사에는 이성렬·백시영·김형집·최기성·이희두 등으로 구성된 ‘대이북 집행부서’가 결성되어 있었다. 이 백의사가 신익희의 정치공작대에 합류하여 대북공작을 주도하였다.[65]

당시 정치공작대는 주기적으로 행동대원을 남한은 물론 북한지역까지 파견하였다. 1946년 초 파견된 대원들의 임무는 북한지역의 지도자 및 정당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 임정을 지지하는 우익조직을 구성하는 것, 주요한 공공기관의 건물을 방화 소각하고 민심을 혼란시키는 것 등이었다.[66] 북한임시인민위원회의 성립 직후 대북공작은 북한 요인 암살에 집중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46년 3월 초 백의사 결사대 출신의 ‘북한임시인민위원회 지도자 암살 시도’였다. 2월 초 이성렬·백시영·김형집·최기성·이희두 등으로 구성된 ‘백의사 결사대’는 신익희의 낙산장(駱山莊)에서 정보수집 요령과 지하활동 방법에 대한 교육을 받은 후 북한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평양역 앞 광장에서 열린 북한의 3·1절 기념행사에서 반탁운동과 북한 지도부 암살을 목적으로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소련군 노비첸코 중위가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딴 곳으로 던져 내어 실패하였다.[67] 3월 1일 ‘찰나에 고래를 놓쳤’지만 백의사 결사대의 북한임시인민위원회 지도자 암살시도는 계속되었다.[68]

3월 3일: 최용건(崔庸健) 가(家) 습격, 실패
3월 5일: 최용건 가 재차 습격, 실패
3월 9일: 김책(金策) 가 습격, 실패
3월 11일: 강양욱(康良煜) 가 습격, 그의 딸과 식모·경비보초 등을 사살[69]

백의사 결사대 중 최기성과 김정의는 체포되었고, 이희두는 사살되었으며, 이성렬만 월남하였다. 이들의 아지트에서는 「임정포고문」 1·2호가 발견되었다. 김정의는 소련군의 심문에서 임정 내무부의 정보국장 박문(朴文)이 증명서를 작성해 주었고,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김구는 이러한 계획을 비준하였지만, 직접 만나지 않아 자신의 북행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언급하였다.[70]

1946년 3월 치안이 미처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백의사 대원들의 습격은 북한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북한은 내부 치안을 다시 정비하는 한편, 김구·이승만을 “테로 강도단의 두목”으로 맹렬히 비난하였다.[71]

임정계의 반탁운동을 통한 대북타격정책은 임정법통론의 외연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북한 임시인민위원회의 실질적 타도보다는, 임시정부의 권위를 노리는 일종의 ‘외각때리기’였다. 그것은 임시정부 추종자인 ‘우국염려생(憂國念慮生)’ 이종표의 「비상정권 수립계획표」에서 “38선이 해결되면 북편 세력의 잠행 남하, 여차(如此)한 시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독립”이란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72]

임시정부의 이러한 대북타격정책도 1946년 초반기를 경과하면서 점차 소멸되어 갔다. 그것은 임시정부가 전국적 구도에서 북한의 임시위원회와 맞서기는커녕, 남한에서조차 미군정과 이승만·한국민주당에 의해 임정법통론이 위협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61] 이승만의 자신의 비서 중의 한 사람인 김욱을 월북시켜 이윤영이 서명한 조선민주당의 반탁결의문을 받아왔으며, 이로 해서 이윤영은 신상에 위협을 느껴 월북하였다(한국 반탁·반공학생운동 기념사업회, 1986, 『학생건국운동사』, 152쪽).
[62] 이들은 해공 신익희의 친필 위임장, 각자 500원씩의 여비, 임정의 반탁포고문 1·2호 등을 가지고 파견되었다고 한다(유치송, 1984, 『해공 신익희 일대기』, 460쪽).
[63] 당시 최중하 등은 출발에 앞서 경교장을 방문하여, 김구의 당부와 여비 200원을 받았다고 한다. 대북 반탁공작대의 활동은 한국 반탁반공 학생운동기념사업회, 앞의 책, 148~153쪽: 이철승, 1976, 『전국학련』. 중앙일보·동양방송, 160~67쪽 참고.
[64] 「38 북방과 38 남방을 대상한 비상정권수립」,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1996, 『미군 CIC 정보보고서』 1.
[65] 백의사와 연계된 정치공작대의 중앙본부장은 신익희였으며, 행동대장 조중서, 사령에 염응택, 부사령 박경구, 총무부장 유진산, 청년부장 조용진 등이었으며, 미 24군단 CIC와 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백의사에 대해서는 김인호, 1984, 『사선을 넘어서』, 진흥문화사, 21~27쪽; 유치송, 1984, 『해공 신익희 일대기』, 460쪽; 이기봉, 1989, 『인간 김일성』, 길한문화사, 372~402쪽 참고.
[66] (1)「조직공작에 관한 사항」; (2)「소련방 무력정비사령부 제7국 부국장 샤포쥐니고프(B. Sapozhnikov)가 소련방 중앙위원회 수슬로프(M.A. Suslov) 동지에게 보내는 전문(1946.8.22)」; (3)「1946년 김일성 암살기도 사건 진상」, 『세계와 나』 1994년 8월호. (2)와 (3)은 같은 자료인데, 이 자료는 소련 무력정치부 제7국이 평양에 들어가 김일성 암살을 시도하다 체포된 임시정부 내무부 정보국 부국장이던 金正義를 심문한 기록이다.
[67] 1983년 북한과 소련은 노비첸코를 기리는 합작영화 「영원한 전우」 2부작을 제작하였다. 3·1절 사건에 대해서는 Ivan Chistiakov, 국토통일원 번역, 「제25군의 전투행로」, 『조선의 해방』, 1987, 76~77쪽; 한국통일촉진회 편, 1970, 『북한반공투쟁사』, 167~73쪽, 반공계몽사;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앞의 책 313~25쪽 참고
[68] 한국통일촉진회 편, 앞의 책 167~73쪽; 이기봉, 앞의 책, 375~402쪽; 김인호, 앞의 책, 21~27쪽.
[69]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김구는 강양욱 목사의 인도로 평양 장대제 교회에서 옛친구 전재선(全在善) 목사의 주도로 예배를 보았다. 한 때 김구의 약혼녀였던 안신호는 백의사의 강양욱가 습격사건에 대해 질문하여 김구가 남처해했다고 한다. 정리근, 1988,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 60~64쪽.
[70] 「소련방 무력정비사령부 제7국 부국장 샤포쥐니고프(B. Sapozhnikov)가 소련방 중앙위원회 수슬로프(M.A. Suslov) 동지에게 보내는 전문」, 1946.8.22.
[71] Ivan Chistiakov, 국토통일원 번역, 「제25군의 전투행로」, 『조선의 해방』, 1987; 북조선 5·1기념공동준비위원회, 『팟쇼·반민주분자의 정체』, 1946.5.1
[72] 이종표, 「임시정부를 중심한 비상정권수립 계획표」,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1996, 『미군 CIC 정보보고서』 1.


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이승만·김구 시대의 정치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pp.76-80


1946년 3월은 임정이 귀국한지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김일성과 그 직계(최용건/김책) 등도 어떤 사람인지 국내에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때였다. 즉 김일성이 대단한 악당이어서 특별히 테러를 할 이유는 없었다는 뜻이다. 결국 이 사건은 임정이 해방 후의 국내정치에서도 테러전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한 증거가 될 수 있는 셈이다.


그 외 나와는 기본적인 입장이 상충되지만, 다음도 참고할 만하다.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한겨레, 2007년 4월 12일,박노자)
by sonnet | 2007/08/12 00:09 | 정치 | 트랙백(1)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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