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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다큐멘터리
2015/05/08   무플보다 악플 [14]
2007/02/23   대국굴기를 보며 하상을 떠올리다. [10]
무플보다 악플

오늘날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마케팅에 유리한 대중문화나 정치적 이슈에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영화들은 영화 자체로 또는 마케팅 과정에서 할리우드의 관심을 자극하고 논쟁을 일으키키가 좋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슈퍼 사이즈 미>일 것이다. IDP 디스트리뷰션이 배급한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미국에서 1150만 달러라는 박스오피스 기록을 세웠다. 사실 맥도날드 음식을 먹고 사는 것이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은 특별한 메시지도 아닌데 말이다.

모간 스퍼록(Morgan Spurlock) 감독이 6만 5000달러만으로 제작했다고 알려진 <슈퍼 사이즈 미>는 미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해체했다는 점에서 관객들의 큰 공감을 받았다. 맥도날드 측에서는 특별한 반응을 자제하며 영화에 관심을 표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영화사는 마케팅 과정에서 맥도날드의 친숙한 이미지를 적극 부각하였다. IDP 디스트리뷰션은 MTV가 이 영화의 광고를 안 내보내려 한다며 언론에 이슈화시키기도 했는데, 결국 광고는 나가게 되었다.


논쟁으로 가장 유명한 영화는 이라크 전쟁을 비판한 <화씨9/11>일 것이다. 이 영화의 단계적 시장진입 전략은 순발력 있는 대표 마케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에 대한 첫 기사는 2004년 5월 월트 디즈니가 회사에 안 좋은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계열사인 미라맥스에게 이 영화의 배급 금지를 요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작되었다. 사실 디즈니가 이를 금지했다는 것은 놀랄 만한 뉴스가 아니다.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소비자의 비난이 계열사의 이익에 미칠 영향을 염려하기 때문에 선동적인 콘텐츠에는 원래부터 접근하지 않으려 한다.

이후 <화씨9/11>은 부시 정부에 적대적인 유럽에서 주최하는 칸 영화제(Cannes Film Festival)에 나가면서 완벽한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 영화가 칸에서 열렬한 성원을 받자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배급사들은 필름을 구입하려고 아우성이지만 미국 내에 개봉을 막는 적들이 있다고 말하였다. 같은 해 6월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무브온(MoveOn.com)을 비롯한 정치 단체들은 개봉 첫 주 극장으로 가서 풀뿌리 마케팅의 본보기를 보여주자고 촉구하였다.

<화씨9/11>의 제작비는 600만 달러라고 알려져 있지만, 계속되는 홍보의 힘으로 이 영화의 박스오피스는 미국에서만 1억 1900만 달러에 달했다. 그 때까지 극장에서 개봉한 다큐멘터리 중 최고 기록인 2200만 달러를 압도적으로 깬 수치였다. 이전 최고 기록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또 다른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으로, 2002년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바 있다.

두 다큐멘터리 영화 모두 영화제 수상을 통하여 신뢰를 높였고 덕분에 매체에 많이 노출될 수 있었다. <슈퍼 사이즈 미>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화씨9/11>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Marich, Robert, "Marketing to Moviegoers", Focal Press, 2005
(김상훈, 안성아 역, 『영화마케팅 바이블』, 북코리아, 2009, pp.375-377)

by sonnet | 2015/05/08 21:26 | 문화 | 트랙백 | 덧글(14)
대국굴기를 보며 하상을 떠올리다.
최근 EBS에서 방영된 중국 관영 중앙텔레비전(CCTV)의 역사 다큐멘터리 「대국굴기」(大國崛起)는 단번에 20년 전에 같은 방송국에서 만들었던 다큐멘터리 「하상」, 그리고 다시 20년 전에 씌여졌던 연극평론 「역사극 '해서의 파직'을 평하다」을 떠올리게 하였다.

다음은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기 전인 1988년 6월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 「하상」에 대한 평가이다. 이 프로그램의 성격이 「대국굴기」와 얼마나 닮아 있는지 한번 보기 바란다.

「하상」

몇몇 지식인들이 신권위주의론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을 때 또 하나의 논쟁이 「하상」(河殤)이라는 제목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하상」은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을 통해 1988년 6월 전국에 방영되었다. 겉보기에는 관련이 없는 것 같았지만 이 두 논쟁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둘 다 관심의 초점이 중국 근대 인텔리겐치아의 가장 오래된 관심사인, 지식인의 정치적 역할에 모아져 있었다. 또한 둘 다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을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던 정치적 파벌투쟁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두 논쟁 모두 자본주의의 물질적 승리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덩샤오핑이 ‘사회주의 민주’의 기치를 내걸고 권좌에 오른지 겨우 10년이 지난 지금, 중국지식인의 생활에서 사회주의 관념이 얼마나 현실과 무관한 것이 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상」은 아름다운 영상과 열정적인 내레이션을 통해 중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전면적이고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5·4시대의 급진적인 반전통주의로부터 영감을 얻은 제작진은 전통적 가치의 악영향이 천년에 걸친 중국의 무기력과 근대적 후진성을 낳은 주요 원인이라고 암시했다. 정태적이고 파괴적인 황허는 「하상」에서 중국역사에 대한 은유였다. 중국은 사회경제 질서가 폭력적 힘에 의해 정기적으로 와해되면, 불변하는 낡은 가치체계와 부합하는 낡은 기초 위에서 질서가 재건되는 그런 역사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2천년에 걸쳐서 중국 봉건 사회가 유지해온 ‘극도의 안정’은 오히려 창조성을 억압하고 경제발전, 특히 자본주의적 발전을 저해하는 중국역사의 저주였다. 중국문화와 중국문명의 요람인 황허는 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내향적인 사회 -- 오직 자기 자신과 숨 막히는 전통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는 사회 -- 의 뿌리깊은 보수성과 낙후성을 상징한다.

「하상」에서 황허의 안티테제는 힘차게 약동하는 푸른 바다로서 이는 근대의 과학·공업·민주주의의 역동적인 고향인 자본주의 서양의 외향적인 대양문화(大洋文化)의 상징이다. 1919년 ‘전반적인 서구화’를 주장했던 5·4선조(1권 2장 참조)들과 같이, 「하상」의 제작진도 중국과 중국문화에 결여된 모든 것을 서양 제국(諸國)에서 발견했다. 따라서 중국이 모방해야 할 서양의 이미지는 아주 낭만적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고 싶다 하더라도 이들은 5·4세대와 결코 같을 수 없었다. 5·4인텔리겐치아는 서양의 과학과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동시에 서양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파괴성 역시 잘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서양 여러 나라의 진보성과 반동성을 구별하기 위해 번민하고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 딜레마를 해결해주는 이론으로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발견했던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70년 뒤 이른바 이들의 후계자들은 근대중국사 속에서 서양이 선생이었을 뿐 아니라 억압자였다는 고통스러운 딜레마를 무시했다. 그 대신 중국에서 자행된 외국 제국주의의 오랜 착취의 역사를 활력 넘치는 ‘푸른’ 문명과 정태적인 ‘황색’ 문명 사이의 ‘문화적 충돌’로 축소시켰다.

「하상」 제작을 추진한 지식인들은 제국주의에 대한 5·4세대의 인식을 더 이상 공유하지 않았듯이,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도 5·4세대와 달랐다. 5·4지식인들이 선진국가의 물질적·지적 업적을 흠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서양 근대문명 수용은 서양의 과학 및 민주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자본주의 경제체제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사회주의 사회가 근대 서양문화의 가장 선진적인 형태로서 조만간 출현할 것이라는 주장이 5·4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와 달리 1980년대 말의 ‘서양’은 더욱 신성하고 문제가 없는 것처럼 그려졌다. 중국에서 근대과학과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꽃피우기 위해서는 발전된 자본주의 경제의 건설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국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전망을 환영하는 듯이 보였고 덩샤오핑의 시장개혁과 공식 이데올로기(훌륭한 마르크스주의의 외피 아래 자본주의의 진보성을 찬양하는 것) 역시 그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하상」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레이터의 촌평은 의미심장하다. “카를 마르크스가 오래전에 예언한 자본주의의 조종(弔鐘)은 아직도 울리지 않고 있다.”

덩샤오핑 시대 말기의 지식인, 적어도 「하상」에 표현된 관점을 공유한 사람들과 5·4인텔리겐치아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문화적인 반(反)전통주의이다. 두 경우 모두 당장의 사회적·정치적 폐단을 전통적 가치의 악영향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들의 문화적 반(反)전통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서로 달랐다. 5·4운동 당시에는 전통이 사회적 보수주의와 관련되어 있었고, 반동적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애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혁명 이후 시대에는 중국을 짓눌렀던 짐이 전통이 아니라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이 가져온 스탈린주의 관료기구였다. 중국의 병을 ‘봉건적’ 문화의 악영향 탓으로 돌리려는 것은, 혁명 이후의 체제에 중국사회를 괴롭혀온 문제에 대한 면죄부를 주려는 일종의 사상적 술책이었다. 따라서 5·4 시대에 사회적으로 급진적이었던 문화적 반전통주의가 70년 뒤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산당 정권의 보수적인 방어수단으로 부활했다. 오늘날 중국이 안고 있는 병폐의 원천을 전통문화에서 찾는 가운데 「하상」의 제작진(이들의 후원자는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이었다)은 덩샤오핑주의 국가의 공식 이데올로기의 주요 논지 가운데 하나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즉 현재 공산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는 공산주의 혁명이 낳은 새로운 사회정치적 질서에서가 아니라 잔존하는 중국의 봉건성에서 주로 기인한다는 주장이다. 자오쯔양과 달리 공산당 정권의 고위관료들은(그들 중 상당수는 문화적으로 보수적이었다) 문화적 반전통주의의 정치적 유용성을 인식할 만큼 통찰력이 예리하지 못했다.

「하상」은 1919년을 눈에 띄게 부각시킨 반면 1949년을 무시했다. 사실 서양에 중국을 ‘개방’하려는 저우언라이·덩샤오핑·자오쯔양의 노력을 찬양한 것 말고는 중국 공산주의 혁명이나 인민공화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암암리에 마오주의 혁명은 중국의 정체적인 역사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것으로, 기껏해야 그 ‘봉건적’ 후진성을 반영하고 영속화했을 뿐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공산주의 혁명과 마찬가지로 그 혁명을 만든 사람들 역시 대부분 무시되거나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농민은 시대에 뒤떨어진 전통과 ‘봉건적’ 사상의 사회적 전달자라고 비난받았다. 한 유명한 외국 학자는 「하상」을 이렇게 평했다. “농촌사회는 절망의 모습이 역력했다. 유일하게 인터뷰에 응한 한 농부는 슬하에 자녀를 몇이나 두었냐는 질문에 중국을 인구과잉으로 만들었다며 자책했다.”

근대 중국의 비참한 상태와 근대중국이 짊어지고 있는 역사와 전통의 모든 짐에도 불구하고 「하상」은 중국이 마침내 천년간의 ‘극도의 안정’을 깨고 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며 끝을 맺는다. 우선 이제는 분명하고 보편적인 모방의 대상인 서양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라는 유토피아가 존재했다. 이는 마지막 회에 ‘푸른색’이라는 제목 아래 상당히 매력적으로 묘사되었다. 게다가 중국에는 덩샤오핑주의 정책인 자본주의 시장개혁을 통해 이 모델을 추구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암묵적이기는 하지만 분명하게 추켜세웠던 것은 자오쯔양과 그의 연해 발전전략이다.

그러나 「하상」의 작가들에 따르면, 중국의 미래에 관한 가장 큰 희망은 지식인의 지혜이다. 지식인은 민주주의와 과학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중국공산당이 실행하고 있는 시장개혁계획을 올바르게 안내해줄 수 있는, 근대화를 이룩해낼 진정한 사회적 주체였다. 지식인은 역사가 중국인민에게 준 ‘유일무이한 집단’이라고 TV 내레이터는 열정적으로 말한다. “주지와 미신을 타파할 무기를 손에 쥔 사람들이 바로 지식인들이었으며, 그들이야말로 ‘항해’문명과 직접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과학과 민주주의라는 ‘푸른’ 단물을 우리의 황색 대지에 끌어올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상」은 지적이고 예술적인 노력의 순수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이 다큐멘터리 제작은 1987년 10월 제13차 당대회 이후 공산당의 파벌투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당 지도자 자오쯔양은 「하상」의 작가들과 제작진의 중요한 정치적 후원자였다. 따라서 자오쯔양과 그의 경제정책이 이 다큐멘터리에서 칭송되고 있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자오쯔양은 「하상」의 전국방영을 보장해주기까지 했다. 1988년 6월 중순 첫 방송이 나가자 ‘원로방’과 다른 보수적 당 지도자들은 이 다큐멘터리가 ‘문화적 허무주의’를 조장한다고 비난했으며, 7월에는 당 선전부장 후치리가 더 이상 방영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자오쯔양이 직접 개입함으로써 번복되었다. 그리하여 8월 중순에 두 번째로 전국방영이 다시 허용되었고, 9월에야 당 중앙위원회는 다큐멘터리를 금지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이때에는 「하상」의 비디오테이프와 대본을 복제해서 만든 책이 이미 널리 유통되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자오쯔양이 비디오테이프 복사본을 ‘신권위주의’ 이론의 화신인 싱가포르의 독재자 리콴유(李光耀)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하상」의 방영은 학생·지식인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고취하고 나아가 1989년 민주화운동을 촉발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 덩샤오핑 정권의 지도자들이나 그 비판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이었다. 예컨대 류빈옌은 1988년의 그 다큐멘터리는(이전의 텔레비전 연속극 「신성」[新星]과 더불어) “중국사회 전체에 반향을 일으키면서 지식인이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썼다. 그리고 1989년 6월 4일의 비극 이후 공산당 지도자들은 ‘반혁명 모반’을 자극했다고 「하상」을 계속해서 비난했으며, 「하상」의 프로듀서 쑤샤오캉(蘇曉康)을 체포하려 했다. 결국 쑤샤오캉은 외국으로 망명했다.

정치의 민주적 변화를 촉진하는 것이 「하상」의 작가들의 의도였다. 한편으로 그들은 자오쯔양이 제안하는 경제적·정치적 개혁 -- 정치개혁이 아무리 제한적인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 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공산당 관료들을 우회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이를 드러내려고 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관료들은 보통 문화적으로도 보수적이었다. 따라서 근대중국의 정치생활에 스며 있는 독재적 성격을 전통 중국문화의 권위주의적 요소와 결부시킴으로써 「하상」은 대다수 공산당 지도자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그것은 ‘부르주아 자유화’라는 정치적 이단의 발로일 뿐 아니라 국가의 문화유산을 모독하는 반애국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상」이 전하는 민주주의적 메시지는 모호했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민주주의적 자질은 총서기 자오쯔양의 후원으로 인해 처음부터 손상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결국 자오쯔양은 레닌주의 정당의 지도자였으며, 덩샤오핑의 4개 주요 원칙 -- 그 중에서 공산당의 지도력이 제일 중요함 -- 을 일관되게 지지했고, 신권위주의론을 장려했다. 아울러 영화 자체도 민주주의의 미덕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서양의 부강함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상」이 가장 강력하게 전달했던 것은 지식인 이기주의적인 메시지였다. 중국의 지식인은 당연히 중국사회의 지도자이며 선진적인 서양 여러 나라의 ‘푸른 문명’을 모범으로 삼아 중국을 자본주의적으로 재건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지적·정치적 엘리트주의를 키웠던 많은 전통적 그리고 근대적 역량을 다시 강화하는 메시지였으며 대중민주주의보다는 레닌주의 및 신권위주의와 잘 어울리는 메시지였다. 서양에 대한 낭만적 환상과 중국지식인의 엘리트주의는 1989년의 위대한 민주화운동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약점이었다.

Meisner, Maurice J., Mao's China and After: A History of the People's Republic, Third Edition, Free Press
(김수영 역,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서울, 이산, 2004, pp.685-691)

이 프로그램의 진정 중요한 점은 중국 관영언론에서 이러한 다큐멘터리가 나올 때는 국가의 기존 노선을 바꾸고자 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이 그 뒤에 깔려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중국을 그처럼 떠들썩하게 만든 이유는 그 때문이다.

중국에서 공식적인 역사의 해석은 정치권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는 예전에 비림비공운동을 설명하면서 지적했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국굴기는 이름부터가 후진타오 노선을 상징하는 화평굴기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이 대국굴기를 미는 정치세력이 꼭 승리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상을 밀었던 자오쯔양처럼 얼마 버티지 못할 수도, 해서파관 논쟁으로 시작해 한 시대의 권력을 쥐고 흔들었지만 허무하게 끝난 4인방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by sonnet | 2007/02/23 10:02 | 정치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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