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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닉슨
2007/09/22   미국-프랑스 애증의 핵협력 관계 [28]
미국-프랑스 애증의 핵협력 관계

핵실험까지의 험난한 길

2차대전 중 미국은 「맨하탄 프로젝트」를 통해 당대의 초병기 원자폭탄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고 이로 인해 세계는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달라진 정치군사적 환경을 맞이하게 된다.
이 때 연합국으로서 이 프로젝트에 동참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당연히 기술이전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물론 같은 연합국이던 소련에게는 비밀이었지만 그것은 공산국가이니까 그런 것이고 자신들은 서방 국가인 만큼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착각에 불과했다.
우선 미국은 전후 국제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전시협력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를 동등한 강대국으로서 취급하지 않음으로써 이들 국가들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게다가 1946년 8월 미 의회는 핵물질과 핵기술의 해외 이전을 금지하는 맥마흔 법안을 전격적으로 통과시켜 핵무기를 독점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미국의 오만한 태도와 일방적인 조치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큰 충격과 굴욕을 안겨주어 이들이 독자적 핵개발을 자극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사실 영국의 경우 처칠 수상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직접 만나 ‘전후의 핵협력’을 약속받았던 터여서 루스벨트 사후에 일어난 이런 배신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결국 영국은 치를 떨며 독자핵개발에 나선 끝에 1952년 원폭실험에 성공해 핵보유국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우리는 미국인들과 협력을 할 수 없었다. 그 어리석은 맥마흔 법안은 우리가 그들과 협력하는 것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그들은 자기들은 어른이고 우리는 어린아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만 잘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영국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

“우리는 이걸(핵무기) 가져야만 한다. 나야 상관없지만, 나는 방금 내가 당한 것처럼 이 나라의 다른 어떤 외상이 미 국무장관에 의해 농락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 아무리 엄청난 비용이 들더라도 우리는 지금 당장 이걸 가져야 한다.” -영국 외상 어네스트 베빈-

한편 프랑스의 경우는 상황이 훨씬 나빴다. 프랑스는 2차대전 중 독일에 패해 본국이 점령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맨하탄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고 3류 취급을 받았다. 즉 핵개발 전 과정에 참여한 영국 과학자들과 달리 프랑스 과학자들은 핵폭탄 제조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중수로와 플루토늄 분리 업무에만 부분적으로 참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망명정부를 이끌던 드골은 핵개발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있어 영미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았고, 힘없는 설움을 곰씹으면서 앵글로-색슨의 차별대우에 대한 반감을 키워 나갔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10월, 드골은 수상 직속으로 프랑스 원자력위원회(CEA)를 설립해 핵기술 확보에 나서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전후복구가 절실했고 영미에 비해 뒤쳐져 있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주로 기반기술과 핵물질 확보에 주력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큰 장애물이 다가왔다. 미국-영국-캐나다 3국이 워싱턴에서 회동을 갖고 전 세계 우라늄 공급을 통제하는 협정을 맺은 것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핵개발 능력은 큰 타격을 받을 뻔 했지만, 다행히 국내에서 대규모 우라늄광을 발견하는데 성공해 한숨을 돌리게 된다.

1956년 새로운 위기가 찾아왔다. 영국과 프랑스가 합작으로 운영하던 수에즈 운하 회사를 이집트가 전격적으로 몰수해 국유화해 버린 것이다. 분노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되찾기로 결심하고 이스라엘을 끌어들인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침공하면, 뒤이어 수에즈 운하 통항의 보호를 명분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군대를 진주시켜 이를 되찾는다는 계산이다. 허약한 이집트군을 상대로 작전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나 소련이 뒤늦게 뛰어들어 공개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위협했다. 즉각 휴전하든가 핵로켓을 맞을 각오를 하라는 것이었다.

“모든 유형의 근대적 (대량)파괴병기를 보유한 더 강력한 나라로부터 공격받게 될 경우 영국의 입장은 무엇인가? 우리는 침략자를 분쇄하고 동방에서 평화를 재수립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결의를 굳혔다.” -영국 총리 이든에게 보내는 소련 총리 불가닌의 라디오 성명-

공개적인 모욕을 받았지만 핵능력에서 소련의 상대가 안 되는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호의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국도 이들의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 불장난을 돕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뒷짐만 진 채, 파운드화에 가해지는 외환공격을 방치해 영국을 괴롭혔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굴욕적인 철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이익이 자국의 이익과 배치될 때는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핵공갈에 굴복하거나 미국의 정책결정에 순종하도록 강제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었다.

“영국은 본토에서 (발사해) 스탈린그라드와 모스크바 지역에 있는 12개의 도시를, 그리고 사이프러스 기지에서 크리미아 지역에 있는 또 다른 12개의 도시를 초토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2년 전인) 수에즈 위기 당시에는 이런 능력을 갖지 못했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주요 강대국이 된 것이다.” - 한 영국 보수당 하원의원 -

이듬해인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리자 이들의 위기감은 커져만 갔다. 소련이 대륙간탄도탄으로 미국을 협박할 수 있게 된 이상, 미국이 동맹국을 위해 스스로 핵공격을 뒤집어쓸 희생정신을 발휘할 것 같지가 않았다. 영국은 수폭실험을 성공시켜 다시 한번 프랑스를 떼어 놓았다.
점점 더 뒤쳐진다는 초조함, 무시당하는 굴욕, 핵개발에 드는 막대한 자금 사이에서 골머리를 썩이던 프랑스는 상상하기 힘든 행동에 나선다. 비밀리에 숙적 서독에게 접근해 핵무기 공동개발을 제의한 것이다. 서독이 프랑스의 핵개발 프로젝트에 자금과 기술을 지원하면, 완성된 핵무기에 대한 지분을 보장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서독은 전범국의 굴레 때문에 핵무기에 대해 군침만 흘리던 터라 즉각 이 떡밥을 물게 되고, 1958년 국방예산에 유럽미사일연구소에 제공하는 서독의 분담금으로 위장한 20억 마르크의 비자금을 계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극우파의 쿠데타에 이어 집권한 드골은 이 프로젝트를 취소해 버린다. 드골이 보기에 독일에게 핵폭탄을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힘은 군사력이며, 군사력은 오늘날 핵력이다. 핵무장 없는 서독은 다른 동맹국의 군대를 위한 취사병이나 보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서독의 운명은 그것으로 결판날 것이다.” -서독 국방장관 프란츠 스트라우스-

한편 미국은 1958년 맥마흔 법을 개정하면서 수폭까지 완성한 영국의 핵개발을 기정사실로 인정해 포괄적인 핵협력을 보장하는 이른바 ‘영·미 특수관계’를 허용한 반면 프랑스에게는 핵무기 개발에 실질적인 진전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핵협력을 거부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프랑스가 이를 자국을 물먹이려는 앵글로색슨의 야합으로 받아들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드골은 NATO를 개편해 미-영-불 3두 체제로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미국은 프랑스 같은 2류 강대국 따위와 권력을 나눠가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드골은 다시 한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력으로 핵무장을 달성하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결과적으로 명백한 점은 우리 프랑스는 전적으로 프랑스의 국가이익을 위해 어디에서나 즉각 동원될 수 있는 군사력, 즉 독자적 핵타격력이 필요하고, 이것을 수년 내에 반드시 달성하여야 한다. 군사력의 기본이 핵무장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제조하든 혹은 돈으로 구입하든 간에 그것은 우리 수중에 있어야 한다. …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독자적 핵전력을 갖추지 못하면) 더 이상 유럽의 강대국도 주권국일 수도 없고 통합된 위성국에 지나지 않게 된다.” -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 -

드디어 드골 치하에서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 의지가 공개적으로 표명되기 시작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다른 나라들의 외교적 압력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소련의 반대는 물론이고, UN총회에서 프랑스의 핵실험 추진 포기를 종용하는 결의안이 채택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셈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핵무기를 기필코 보유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나라를 저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60년 2월, 마침내 드골 정부는 전세계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제리에서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하게 되었다.

“위대한 프랑스 만세! 오늘 아침 이후로 프랑스는 더욱 강력하고 자랑스런 국가가 되었다” -핵실험 성공 소식을 발표하며,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

이리하여 프랑스는 드디어 핵보유국 클럽에 발을 딛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베트남에서의 패배와 식민제국의 점진적 해체, 2류 강대국으로의 추락과 미소 양대 초강대국으로부터의 무시, 영미 앵글로-색슨 동맹으로부터의 차별 등 프랑스가 겪고 있는 온갖 문제들에 대한 즉각적인 탈출구를 제공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프랑스의 핵전략

여기서 비례억지전략이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핵전략에 대해 조금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프랑스의 핵무장을 둘러싸고 관심의 초점이 된 것은 독자적 핵무장 그 자체보다도 프랑스 정도의 소규모 핵전력으로 과연 미국이나 소련 같은 초강대국을 상대로 어떻게 억지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란 점에 있었다.
이에 대한 프랑스, 특히 드골주의자들의 대답은 간단하다.
프랑스가 상대의 대도시 한두 군데를 물귀신처럼 붙잡고 지옥에 떨어질 만큼 독종이라는 것을 상대가 믿게만 할 수 있다면 상대국은 자국이 입을 손해를 고려하면 프랑스를 멸망시켜 봐야 남는 게 없다고 여겨 전쟁을 꺼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빈약한 핵전력의 위협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단 핵전쟁이 시작되면 즉각 보유한 핵무기를 몽땅 상대의 대도시에 쏟아 부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죽일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일단 전술핵무기처럼 아무리 사소한 규모로라도 일단 핵이 사용되기 시작되면 협상으로 전쟁을 멈출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배수진을 치는 전략이다. 즉 유사시가 되면 프랑스 민족과 국가의 확고한 자살은 기정사실인 셈이었다.

“물론, 우리가 발사할 수 있는 핵무기의 파괴력은 미국과 소련이 발사할 수 있는 핵무기의 파괴력에 비해 수적으로 동등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 사실, 어떤 인간도, 어떤 국가도 단 한 번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잠재적 적에게 치명적 손상을 가할 수 있고, 그렇게 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러한 의지가 (잠재적 적에게) 충분히 인식된다면, 억지는 그 즉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1964년 프랑스의 핵전략을 공표하며, 샤를 드골-

게다가 핵공격을 받아 수도를 위시한 주요 대도시가 파괴되기 시작할 경우, 그 초강대국은 살아남은 핵전력을 총동원해 마찬가지 방법으로 상대방 진영에 속하는 모든 나라의 대도시를 공격할 것으로 믿어졌다. 즉 프랑스의 핵전략은 일단 발동될 경우 프랑스 민족의 옥쇄는 물론이요, 인류의 파멸을 가져올 최종전쟁의 방아쇠를 당기는 효과를 갖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조금 극단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당시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전면핵전쟁에 대한 견해는 오늘날 대중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재래전이든 핵전쟁이든, 어떠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 만일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에 대해 전쟁을 시작한다면, 아마 3억 명 이상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 세월은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아기들을 낳으며 일할 것이다.” - 마오쩌둥, 1957년 -

“우리는 1천 2백만 명밖에 없다. …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모두 다 죽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사람들은 한 명도 남지 않을 것이다.” -마오의 연설을 듣고, 체코공산당 서기장 안토닌 노보트니-


이어지는 불화

프랑스는 핵실험을 성사시키면 미국으로부터 라이벌 영국과 대등한 대우와 기술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사실 핵실험을 성사시킨 후에도 실용적인 핵전력을 완성하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절실한 문제였다. 그러나 물론 그런 기대는 오판으로 드러났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뒤를 이은 케네디-존슨 행정부 내내 미국은 프랑스와의 핵기술 협력을 거부했다. 새 행정부의 핵심 참모들부터가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프랑스처럼 작고 허약한 초기단계의 핵전력을 보유한 제3국은 실질적인 도움도 못되면서 위기가 고조될 때 소련으로 하여금 선제공격을 가해 미리 제거해버리도록 할 유혹만 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프랑스처럼 이판사판식 핵전략을 가진 나라는 미소간의 전면핵전쟁의 방아쇠를 당길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외국과의 핵기술 협력에 대해 대통령에게 자문을 제공하도록 되어 있는 미국원자력위원회(AEC) 또한 프랑스와의 협력에 부정적인 분위기였다. 그들은 프랑스는 정권이 불안정하고, 프랑스 원자력위원회(CEA)에는 소련 첩자들이 침투해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영국이 핵기술 뿐 아니라 스카이볼트나 폴라리스 탄도탄 같은 핵탄두 운반수단까지 미국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드골에게 이런 논리는 명백한 차별을 가려보자는 얄팍한 술수일 뿐이었다.

게다가 케네디 행정부가 기존의 대량보복전략을 대체할 새로운 핵전략으로 유연반응전략을 들고 나오면서 갈등이 한층 깊어졌다. 유연반응은 대량보복이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킬 파멸적인 핵전쟁을 피하기 위해 재래식전쟁은 재래식으로, 전술핵무기는 전술핵무기로 맞서면서 각 단계마다 협상으로 전쟁을 종결시킬 기회를 엿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볼 때 유연반응전략이란 소련 핵전력의 성장과 대륙간탄도탄의 실용화에 따라 미국 본토도 핵공격을 받을 수 있게 되자, 미국이 몸을 사리며 파리나 본을 위해 뉴욕을 희생시킬 생각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에 불과했다. 미국은 초반에 서유럽의 미국 동맹국들과 동유럽의 소련 동맹국들이 핵공격을 대신 뒤집어쓰는 동안은 버티다가 미소 양국의 본토에 전화가 옮아 붙을 때쯤 되면 휴전을 모색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새로운 미국의 핵전략이 곧 NATO의 핵전략이 되는 것이 당연시되는 상황에서 유연반응전략은 프랑스의 핵전략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앞서 설명한 대로 프랑스의 핵전략은 기본적으로 대량보복전략의 변형으로 프랑스의 소규모 핵공격이 미소 양국의 대량보복 핵공격의 방아쇠를 당기는 뇌관 역할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소량의 핵무기만 갖고도 프랑스는 초강대국의 의사결정권을 탈취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의 핵협력 거부와 서유럽 방위보장에 대한 불신은 프랑스의 돌출행동으로 나타났다. 프랑스는 1966년 NATO통합군에서 탈퇴하고 NATO사령부와 외국군을 프랑스 영토에서 축출하며, 미국의 지원 없이 완전히 독자적으로 핵전력을 확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한 중공을 승인하고, 모스크바를 방문하며, 소련의 영향권 안인 폴란드 및 루마니아에 러브콜을 보내는가 하면,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해 원조를 제안하는 등 제3세력으로서의 독자행보를 활발히 펼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행보는 미소 양대 초강대국의 영향을 배제하고 동·서유럽을 아우르는 「유럽인의 유럽」을 만들어 미국과 소련에 필적하는 제3의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는 드골의 야심과 관련이 있었다. 물론 이 제3세력의 두목 역할이 「위대한 프랑스」에게 주어진 천명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NATO는 프랑스의 독립과 국익에 배치된다. 우리가 NATO 회원국이 된 것은 소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소련이 공격해 올 것으로 믿지 않는다. … NATO는 이제 더 이상 동맹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종속체제이다. 프랑스가 독립성을 회복한 이후에 가서는 프랑스가 서방국가들의 어떤 동맹에 참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책임져주는 미국과 같은 상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샤를 드골-


비밀핵협력 관계

1969년 정권을 잡은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과 그의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는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소모적인 미국-프랑스 관계를 개선해 볼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닉슨과 키신저도 미국의 핵전략에 대해 유럽의 2류 동맹국들의 간섭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프랑스의 핵무장을 방해하려는 것은 아니며 서구진영의 안보에 기여하고 있음을 인정해 줄 용의가 있었다.
사실 프랑스 정당 치고 프랑스의 핵보유를 반대하는 곳이 없었다. 심지어는 공산당조차도 그랬다. 미국이 뭐라고 한들 프랑스가 핵을 포기할리 없는 이상, 프랑스의 핵전력이 가능한 빨리 생존성을 갖추어 더 이상 소련의 선제공격을 유혹하지 않고, 너무 많은 자금을 소요해 프랑스의 통상전력을 약화시키지 않도록 돕는 것이 서방 전체의 안보를 증진시키는 길이라고 그들은 판단했다.
1974년 오타와에서 열린 NATO 외무장관 회담에서 회원국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핵전력이 연합국의 억지능력을 전반적으로 강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 합의했다. 미국이 프랑스의 핵전력이 쓸모있다고 처음으로 인정해준 순간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동맹국들에게 더 큰 안보책임을 맡기는(괌 독트린) 것인 동시에, 소련과의 데탕트, 중미수교, 베트남전의 종결 등과 맞물린 닉슨 행정부의 새 세계전략의 일부였다.

1973년 6월, 닉슨-브레즈네프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 키신저는 프랑스 외무장관 미셸 조베르를 초청해 운을 띄웠다. 프랑스가 잠수함발사탄도탄(SLBM)을 다탄두(MIRV)화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다. 프랑스는 미국 기술자들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혹시 관심이 있는가?
조베르는 즉각 미국이 어떤 문제든 도움을 준다면 환영할 것이라고 답했다.

사실 키신저는 미국 법이 핵기술 이전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법을 우회하기 위한 Negative Guidance라는 편법을 만들어냈다. 이 수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구체적인 핵무기 설계에 관련된 문제일 경우, 일단 프랑스 기술자를 미국 기술자와 만나게 해 준다. 그럼 프랑스 기술자가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어떤 식으로 해결하려 하는지에 대한 구상을 묘사한다. 그러면 미국 기술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 측이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짚어준다. 이런 방식으로 구체적인 기밀 정보를 언급하지 않은 채 기술지도를 함으로서 미국 측 기술자는 범법자가 되는 위험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의회가 법을 제정한 의도를 어기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이 사업에 관계했던 미국 측 관계자들은 이 방식을 「스무고개 방식」이라고 불렀다.
「스무고개 방식」은 핵물리학 패키지에 관련된 것에만 적용되었다. 미사일 같은 핵무기 운반체제에 관련된 기술 이전은 법적 규제가 아니라 정책 판단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소련 미사일방어 체제와 표적정보 같은 첩보자료의 공유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종류의 정보든 간에 그것을 프랑스 측에 제공하려면 미국 정부의 다양한 관료와 전문가 집단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내야 했다. 닉슨과 키신저는 자신들의 정책에 대한 관료조직의 소극적인 대응이나 반대로 애를 태우곤 했다.

죠르쥬 퐁피두 대통령은 미국 측의 제안을 크게 환영했다. 사실 그 자신이 오래전부터 미국과의 협력관계를 추구해 오고 있었던 차였다. 그는 미국이 이미 개발한 기술과 중복되는 것을 프랑스가 다시 개발하기 위해 돈과 시간, 그리고 재능을 퍼부어야 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한 미국 측 관련자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드골 집권기에 프랑스 지도부에 속한 여러 사람들, -물론 드골 본인은 빼고- 즉 그들이 하려고 하는 일의 진정한 비용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지름길을 찾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퐁피두는 실무 문제를 타진하기 위해 그 해 9월 국방장관을 미국에 파견했다. 그러나 그는 빈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기밀이 철저하게 준수된 탓에 프랑스 국방장관이 만난 펜타곤 사람들은 키신저와 조베르 간의 비밀대화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조베르는 이듬해 4월 퐁피두가 죽은 후 사임하면서 키신저가 단지 립 서비스를 한 것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핵협력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 양 측의 모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사업의 진행에 대해 알고 있었다. 프랑스 측은 미국 측에게 이 사업에 대해 가르쳐 주어도 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지정했다. 심지어는 외무장관인 조베르의 이름도 거기 오르지 못했다.
이 사업이 시작될 때, 퐁피두의 심복인 자크 코슈스-모리제가 워싱턴 주재 프랑스 대사였다.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앙드레 지로나 병기조달본부장 장-로랑 델페치가 이끄는 사절단이 워싱턴을 드나들었지만, 대사 외에 대사관에 그 내용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후 역대의 프랑스 대사들도 핵문제에 관련된 모종의 일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몰랐다.

양 측에서 이 사업의 초점은 양국 대통령과 그 심복들 -워싱턴의 NSC와 파리의 엘리제궁- 이었다. 따라서 이 사업은 양국 정상 간에 강력한 유대를 만들어 냈지만, 실무적으로 많은 문제를 발생시켰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일이 느리게 진행되었습니다. NSC가 펜타곤을 두들겨 패서 일을 시킬 수는 없었거든요.” 미국 측 담당자의 이야기다.

이 사업에 관계된 사람들도 극소수였지만, 전체를 아는 사람은 훨씬 적었다. 프랑스 과학자들은 자신이 맡은 부분을 빼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모든 지시사항은 원자력위원회의 병기본부장이 독대를 통해 하달했다. 그나마 사업의 전체상을 아는 사람들은 사업의 정치적 측면을 다루는 간부들이었지만, 이들은 기술적 세부에 대해서는 아주 피상적인 것 밖에 몰랐다.

전면적인 기술협력이 이루어졌던 영국과의 핵기술 협력과는 달리 프랑스와의 비밀핵협력은 구체적인 핵무기 설계를 주고받거나 하지는 못했다. 법적 뒷받침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스무고개 방식」을 통해 많은 정보가 전해졌다.
프랑스측은 핵탄두의 소형화와 전자기차폐에 대해 지도받았다. MIRV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핵탄두를 소형화하는 기술이 필수적이었다. “MIRV를 위한 초소형 핵탄두를 만드는 데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여섯 가지 접근방법이 있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이 돌아가고 어떤 것이 돌아가지 않는 것인지 미리 말해준다면 큰 도움이 되지요.”
전자기차폐는 먼저 폭발한 핵탄두로부터 방사되는 전자기파를 맞고 다른 탄두가 망가지지 않게 하는데 필요했다. 이는 실제 핵실험의 경험을 통해서만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예에 가까웠다. 따라서 프랑스 과학자들은 미국이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실제로 지하핵실험을 할 때, 그 근처에 그들의 부품과 장비를 갖다놓을 수 있는 비밀 허가를 받았다.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프랑스가 실제 핵실험 횟수를 줄임으로서 얻는 개발비를 절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프랑스의 핵실험이 가져올 정치적 악영향을 줄일 수 있다고 보았다.

프랑스는 대기권 핵실험을 금지하는 「부분핵실험금지조약」에 가입하지 않았다. 미국, 소련, 영국은 지하핵실험을 할 예정이었지만, 후발주자인 중국과 프랑스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방사성물질이 대기권에 흩어질 수밖에 없지만 프랑스는 사하라사막에서 그냥 지상 핵실험을 계속했다.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이 쇄도했다. 미국은 프랑스의 핵실험 때문에 모든 핵보유국이 싸잡아 욕을 먹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리는 모두 프랑스가 땅속에서 핵실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우리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게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심지어 미국은 네바다에 지어놓은 지하 핵실험장에 와서 실험을 하고 가라고 제안했다. 영국은 진작부터 네바다 핵실험장을 빌려 쓰고 있었다. 프랑스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유를 밝힌 적은 없었지만 핵실험장을 빌려 쓰는 것은 프랑스의 핵무기의 완전한 독립성이란 이미지에 타격이 되기 때문일 거라고 미국 측은 추측했다. 물론 정확한 핵실험을 위해 제공해야만 하는 핵폭탄에 대한 상세 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꺼려서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프랑스가 네바다 핵실험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함에 따라, 미국은 핵개발을 담당하는 리버모어와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의 인력을 파견해, 프랑스가 남태평양 무루루아에 건설하는 핵실험장에 기술지원을 제공했다.

또한 미국과 프랑스는 핵무기의 안전과 보안에 관해서도 상호 협력했다. 안전은 핵폭탄이 사고로 폭발하지 않게 하는 것이고, 보안은 합법적인 지휘계통을 통하지 않고 누군가가 핵무기를 훔치거나 발사, 폭발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 과학자와 관리들은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라든 그런 식으로 불법적으로 핵폭탄을 터트리는 사건이 발생하는 날에는 미국 핵무기의 이동과 배치를 치명적일 정도로 제한하는 규제가 만들어질 것으로 걱정했다. 따라서 그들은 핵무기에 관련된 안전장치와 지휘통제체제에 대한 기술을 공유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미국은 핵탄두 운반체제에 대해서도 도움을 제공했다. 미사일의 유도와 추진체제, 구조재, MIRV, 로켓용 고체연료 등에 대한 기술지원이 제공되었다. 60년대 중반과 80년대 초에는 핵개발에 사용될 것이 분명한 고성능 컴퓨터를 판매하기도 했다.
또한 소련에 존재하는 표적들에 대한 정보, 특히 해당 표적의 방어에 관련된 정보도 제공했다. 또한 고에너지 레이저에 대해서도 서로의 기술을 교환했다.

물론 프랑스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가 요청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한 분야 하나가 바로 대잠전 기술, 특히 소련 헌터-킬러의 추적을 어렵게 하기 위해 탄도미사일 잠수함의 소음을 줄이는 방법이었다.
미 해군은 그런 지원은 뭐든지 단호하게 반대했다. 해군의 입장 뒤에는 그들 자신의 반-대잠전 체계의 극도의 민감성이 있었다. "우리 포세이돈-트라이던트 전력의 안전이 너무나 중요하기에,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기법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느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을 겁니다." 한 민간 고위관리의 말이다.
다른 이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건 해군이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 보물입니다"

프랑스의 핵개발 사업은 미국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기 때문에 수비범위는 좁았지만 질은 우수했다. “프랑스인들은 세계 최고의 인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미국 인력보다도 낫다고 봅니다.” 프랑스와의 기술협력에 직접 참여했던 전문가의 말이다.
이는 미국의 기술을 일방적으로 수입하는데 급급했던 영국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국방비의 25%를 핵개발에 쓰는 프랑스와 3%를 핵개발에 쓰는 영국은 질적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자금난에 시달리는 영국 핵개발사업과는 대조적으로 프랑스 핵개발사업은 우수한 젊은 인력들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또한 프랑스 측의 한 담당자는 재미있는 회고를 했다. 프랑스 핵개발 사업의 간부들은 하나같이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사실 미국이야말로 우리의 적이다”라는 감정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프랑스 군사력의 성장을 훼방 놓을 궁리만 하면서 국제사회에서 프랑스가 차지해야 할 정당한 지위를 가로막아 왔다는 거다.
그 반동으로 CEA는 대놓고 말은 않았지만 핵기술 확산에 동조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는 미국이 사사건건 우리 앞길을 가로막았던 데 대한 나쁜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 그래서 남들의 앞길을 가로막기 위한 카르텔에 동참하기를 꺼렸던 것이지요.”
실제로 프랑스는 핵확산의 가능성이 큰 기술과 시설의 수출에 적극적이었다. 사담 후세인이 핵개발에 사용했던 오시라크 원자로를 비롯해 남아공과 이란 등에 원자로를 판매했으며, 파키스탄과 대한민국에는 플루토늄 재처리시설 판매를 추진하였다.
“미국으로부터 기술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 이후, (미국에 대한 편견을 접고) 우리는 전 세계적 핵확산 현상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 좀 더 합리적이고 개방적으로 대화에 나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랑스가 반대급부로 미국에 제공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주로 군사/정치적인 것이었다. 프랑스는 미국이 유럽에 중거리 핵전력 -퍼싱II 탄도탄과 지상발사 토마호크- 을 배치할 때 이를 지지했다. 또한 공식적으로는 NATO에서 뛰쳐나간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게 될 경우 자국군이 NATO군, 구체적으로는 미군과 긴밀히 협조하는 작전계획을 마련했다. 프랑스군은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NATO 사령부 밑으로 들어가 싸우게 될 것이었다. 미 본토에서 보내오는 증원군은 프랑스 항구, 비행장, 병참선을 이용해 전개된다. 그리고 프랑스 핵전력은 프랑스의 핵전쟁교리가 선언하는 것처럼 소련 도시를 향해 이판사판의 일제공격을 가하게 되는 대신, NATO 핵전력과 협조된 타격을 가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협약의 결과는 놀랍고도 중요한 것이다. 프랑스의 핵전력은 과거 미국이 제공한 지원 덕분에 전시에 훨씬 더 효과적일 터였다. 또한 동시에 프랑스 핵전력은 아마게돈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훨씬 낮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재래식 작전계획을 통합함으로서 NATO는 프랑스군을 이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프랑스 영토가 제공하는 훨씬 더 깊은 종심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론

우선 프랑스 측에서 볼 때 100% 순수 독자기술에 의한 핵타격군force de frappe는 강하고 위대한 프랑스의 상징이었다. 또한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 어느 쪽에도 줄서기를 원치 않는 제3세력의 선봉장 노릇을 하는데 필수적인 프랑스 외교정책의 담보물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실은 미국의 기술지원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프랑스의 국력이 신통찮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막강한 드골주의자 세력이 포진해있는 상황에서 그런 행동은 국내 정치적으로도 자살행위였다.
게다가 퐁피두, 데스텡, 미테랑으로 이어지는 냉전시대 후반 15년 동안 미국과의 비밀핵협력을 지속해 오다 보니 좌파 혹은 우파 어느 쪽이든 이러한 비밀교류에 대한 책임을 상대방에게만 전가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럼 미국은 왜 사실상 의회가 만든 법을 어겨가면서 비밀리에 프랑스를 지원했던가?
미국은 오랫동안 프랑스에게 핵보유를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해 왔지만 적대감만 키웠을 뿐 건진 게 거의 없었다. 결국 닉슨과 키신저에 이르러 미국은 중요한 정책 판단을 내린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자존심 부분에 관한 한 프랑스에게 굴복을 강요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큰 손해를 보더라도 이 점에 관한 한 프랑스는 확고하였다. 그렇다면 비밀거래를 제안하면 어떨까? 자존심은 지켜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 판단은 곧 정확한 것으로 드러났다. 비밀이 보장되기만 하면 프랑스는 매우 적극적으로 거래에 응했고 종종 큰 양보도 할 의향이 있었다. 심지어 프랑스는 자국의 핵전략을 뜯어고쳐 미국의 핵전략과 조화되도록 만들기까지 하였다.

냉전이 끝나자 이 모든 것에 변화가 왔다. 더 이상 맞서야 할 소련은 없었다. 프랑스는 정식으로 NATO에 복귀하고 냉전시대 미국과 비밀리에 군사협력을 했음을 보도한 언론들에게 짧은 성명으로 그 사실을 인정하였다.

필자 주: 이 글은 월간 Platoon 2007년 8월, pp.82-89에 기고했던 것이다. 전재를 허락해 주신 월간 Platoon 편집부께 감사드린다.
by sonnet | 2007/09/22 23:23 | 정치 | 트랙백 | 핑백(5) | 덧글(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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