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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농업개혁
2010/05/24   뙈기밭 처리. [67]
2010/01/23   김정일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뒤따를 수 있을 것인가? [83]
2010/01/21   "다자이에서 배우자", 화궈펑, 개혁개방 [62]
뙈기밭 처리.
북한 뙈기밭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간단히.

2009년에는 뙈기밭도 협동농장에 강제로 귀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뙈기밭은 주민들이 개별적으로 야산이나 강하천 인근의 토지를 경작해 먹던 토지로서, 2002년 7.1조치와 더불어 경작면적을 400평까지 공식 허용해준 토지이다. 토지 정리 과정에서 김정일의 “뙈기논들도 깨끗이 정리하라”고 지시[141]함에 따라 이미 많은 뙈기밭이 줄어들었고, 개인이 부치는 토지는 부동산 실사과정에서 그 실태가 전면적으로 조사되었다.[142] 북한 당국은 2008년에 개인이 경작하는 뙈기밭을 회수하려다가 반발에 부딪쳤고, 2009년 봄부터는 다시 협동농장에 강제로 귀속시키는데, 이유는 농민들의 영농물자 훔쳐가기 현상과 농업의 자본주의화, 협동농장 자체의 생산성 저하 때문이라고 전해졌다. 주민들이 다시 일궈낸 개인 경작지는 이렇게 주기적으로 국가에 의해 환수되었다.

[141] “우리가 토지정리에 손을 댄 바에는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의 뙈기논들도 다 깨끗이 정리하여야 합니다.” 김정일, “알곡생산을 결정적으로 늘여 토지정리의 위대한 생활력을 높이 발양시키자”(평안남도 토지정리사업을 현지지도하면서 일군들과 한 담화, 2004.3.16), 『근로자』, 2005년 제3호, 4쪽.
[142] 북한은 부동산 실사과정에서 “농업 토지는 지목별로 등록된 관리자별로 농업부문 경리, 기관·기업소 경리, 개인이 부치는 토지로 구분하여 실사”하였고 “개인이 부치는 토지는 농촌주민세대가 부치는 터밭을 포함”하되, “울타리 안의 터밭은 주민지구토지에 포함”시켜 실사하였다. 『부동산실사지도서』(2006.3), 제13조.

한기범. “북한 정책결정과정의 조직행태와 관료정치 : 경제개혁 확대 및 후퇴를 중심으로(2000~09).”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경남대학교 , 2010년 2월, pp.211-212


즉 개인 경작지의 확대를 허용하면 농민들이 점점 더 자기 밭에만 신경을 쓸 뿐 아니라 협동농장의 영농물자까지 땡겨다 쓰기 때문에, 단속을 안 할 수 없다는 것인데, 결국 협동농장을 해체해서 농민에게 분배해 주지 않는 한, 이런 개인경작지가 계속 확대되어 농업개혁으로 이어지기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겠습니다.

북한에 제일 좋은(그래서 일찍부터 개간된) 토지들은 모두 협동농장에 있는데, 거기 들어갈 농민들의 노력이 원래 잘 쓰이지 않던 짜투리 땅으로만 몰린다면 전반적인 효율향상을 기대한다는 건 무리겠지요.
by sonnet | 2010/05/24 12:45 | 정치 | 트랙백 | 핑백(2) | 덧글(67)
김정일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뒤따를 수 있을 것인가?
"다자이에서 배우자", 화궈펑, 개혁개방의 말미에서 간단히 언급했었던 중국과 북한의 비교에 관한 보론. 앞선 글이 중국의 사례를 설명하는 글이었다면, 이번 글에서는 북한을 중심으로 각 사례에 중국을 대비하는 방식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의 글을 읽지 않으신 분은 가능하면 이 글을 보기 전에 앞의 글을 먼저 읽어주시는 것이 이해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1. 비판과 수정 가능성

앞선 설명을 본 분이라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겠지만, 김정일이 주체사상과 기타 김일성 시대의 유산들을 다루는 방식은 덩샤오핑이 아니라 화궈펑이 마오쩌둥 사상을 다루는 방식과 흡사하다. 돌아가신 주석님이 말씀하신 것은 '뭐든 옳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아무리 선의에서 출발한 것이라 하더라도 김일성의 유산을 수정하려는 시도는 어떤 것이든 즉각 대역죄로 몰릴 위험을 무릅써야만 하는 결과가 되었다. 현재 북한 사회나 제도에 김일성의 교시나 유산과 연관되지 않은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개혁안은 어떤 것이든 대역죄가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김정일은 자기 아버지의 어록을 해석할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교황과도 같은 존재여서, 그가 직접 나선다면 어떤 부분에 대한 수정은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일이 관심을 갖고 해당 분야를 직접 들여다 보기 전까지 개혁이 이루어지기란 아주 어렵다.

예를 들어 어떤 실무 조직이 회의 끝에 자신들이 담당한 사안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옛날 김일성의 교시를 폐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해 보자. 이들은 우선 이 결론을 김정일에게 보고해 승인을 얻어야만 한다. 그런데 만약 김정일이 이 결론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 화를 낸다면, 이들은 모두 큰 재앙을 각오해야만 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의 교시를 비난한 '반당음모'를 꾸민 '종파분자들'이 되는 건 순식간의 일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실무 조직이 내린 결론에 불만을 갖거나 그 구성원 중 어떤 이를 미워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꼬투리를 잡기에 절호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김정일이 이들에 대해 받아 본 것은 정상적인 보고가 아니라, 신랄한 고발장과 그 '음모'의 증빙자료 뭉치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족과 일신의 안위를 걱정한다면 어지간해선 이런 보고를 하느니 복지부동하게 살아가는 편이 훨씬 현명한 선택인 셈이다. 그럼 이제 이런 평가를 뒷받침할만한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 농업과학원 연구원으로 지내다 숙청되어 탈북한 이민복은 1980년대 중반의 '박철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85년 당시 과학원 지질학연구소 실장이었던 박철은 식량난 타개책으로서 ‘농장포전 개인책임관리제’라는 논문을 작성하여 중앙당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인 즉 간부를 포함한 전농장원의 개개인에게 논밭을 맡겨서 생산관리를 행한다는 것이다. 이 제안은 중앙당의 과학담당비서 김환, 농업담당비서 서관히, 정무원총리 강성산 등을 비롯하여 북한 지도부 내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군급 이상 농업간부들의 토론에서도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철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련의 움직임은 김일성의 주체 농법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혹독한 비판을 받고 주요 관련인사가 처분되거나 사상투쟁의 대상이 되어 사라진다. 이후 누구도 감히 자영농 지향의 농업개혁을 건의하지 못하였다.

박철 사건 직후 김일성은 본인 명의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여기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제도는 섰으나 사회주의건설이 완성되지 못하였으며 착취제도는 청산되었으나 자본주의 복구의 위험이 남아있는 그런 사회는 완전히 승리한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면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한 처방으로 ‘협동적 소유의 전인민적 소유로의 전환’, ‘인민정권의 강화’, ‘사회주의 제도의 공고화’ 등의 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박철과 같은 제안을 봉쇄함과 동시에 당시 중국이나 소련의 농업개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김일성의 이 선언은 과거 마오쩌둥의 주장과 흡사한 구석이 많다. 사회주의화 이후의 자본주의의 귀환에 대한 경고는 마오쩌둥의 단골메뉴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협동적 소유의 전인민적 소유로의 전환'은 농업합작사에서 인민공사로의 전환, 즉 대약진운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약진운동이 대재앙으로 끝나고 그 피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류샤오치나 덩샤오핑, 천윈 등 실용주의자들은 '경제법칙'이나 '객관적 조건'을 강조하며 삼자일포(三自一包) 정책, 즉 농가의 텃밭(自留地), 농가부업, 자유시장을 확대해 농민들의 '자본주의적 성향'을 활용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집단화된 토지를 재할당해 각 농가가 알아서 경작하게 하는 단간풍(單幹風) 등도 심하게 단속하지 않았다. 이를 부르주아 수정주의 노선, 즉 자본주의의 부활로 본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숙청한다. 마오쩌둥 사후에 돌아온 덩샤오핑 등이 이 정책을 다시 추진했을 때는 천융구이 같은 화궈펑파들이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로 가기 위해서는 집단농업을 고수 강화해야 한다고 반대했던 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이다.

박철 사건이 이미 좀 오래된 사건이라고 느낄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제 2009년에 일어난 함흥화학공대 토질조사 연구소 사건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 연구소는 환경오염 문제를 조사하고 대책을 세울 목적으로 설립된 연구기관이었다. 이들은 과거 이 대학에서 근무한 바 있는 최태복 노동당 교육과학 및 국제담당비서가 방문하자 그 동안의 연구조사 논문과 세포당원 명의의 편지를 직접 전달했다. 그 내용인 즉 '사실상 우리나라(북한)가 중국의 산업물 쓰레기장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평양시 수돗물조차도 먹는 물로는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최태복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장군님께 직접 전달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이 편지를 전달받은 노동당 중앙위는 10여 일 후 '토질조사 연구소'를 해산하고 연구소 당세포에 대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검열을 진행했다. 편지를 올린 간부들과 주동자들은 함경남도 보위부에 체포되었다. 이들에게 씌워진 죄목은 종파행위였다.

이 사건은 북한이라는 사회에서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최고지도부에 건의를 한다는 행위가 여전히 인생을 걸어야 하는 일임을 잘 보여준다. 그 건의가 선의의 뜻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었다. 박철 사건 이후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북한의 이런 측면은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의 유산을 비판하고 수정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 전 국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중간관리나 관련 전문가들 같은 광의의 지배층연합 내부에서만이라도 그런 길이 열려야 한다.

다시 중국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업적을 재평가해 공적이 70%, 과오가 30%이며, 전반 20년은 좋았으나 후반 20년은 과오가 많았다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기준을 김일성에게 적용한다면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한 것에서부터 북한을 건국하고 1960년대 전반까지 빠른 전후복구와 경제성장을 보인 데까지를 업적으로 잡고 그 이후 북한의 몰락에 대한 책임 대부분은 과오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게 가능하겠는가?

중국에선 개혁개방 초기 단계에서 적어도 이정도 평가는 들을 수 있었다.
… 특히 마오쩌둥 동지를 비롯한 중앙과 당의 적지 않은 지도자들이 승리 앞에 오만해지고 우쭐해지고, 공을 서두르고 [인간의] 주관적 의지와 주관적 노력의 작용을 과대 평가하여, 진지한 조사연구와 시험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총노선이 제출되자 곧 경솔하게도 ‘대약진’운동과 농촌의 인민공사화 운동을 일으켰던 때문에 높은 지표, 마구잡이 지휘, 허풍, ‘공산풍’ 등을 주요한 특징으로 하는 좌경적 착오가 심각하게 팽배하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묻겠는데 이게 가능하겠는가? 한 북한 연구자는 이렇게 논평한다.
통상적으로 정책의 변화는 새로운 통치권자의 독자성, 전임자와의 차별성을 강조할 때 나타나는 것인데 김정일은 줄곧 계승성을 주장해 왔을 뿐 한번도 차별성을 강조해본 적이 없다. 북한당국은 김정일이 당총비서에 추대된 이후에도 김일성의 모든 정책노선을 수정함이 없이 승계, 추진할 것이라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여 왔다. 북한의 관영 평양방송은 1997년 10월 5일 <영광넘쳐라 조선노동당> 제하의 정론에서 “서방 언론들은 어버이 수령님 서거 후 김정일 장군이 선행노선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개혁과 개방의 정책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분분하였지만 김정일동지의 정치는 김일성주석의 정치철학 그대로이며 노선 또한 김일성주석 시대의 그것과 0.001mm의 편차도 없는 수평선상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정현수,1999:122]


2. 대중동원운동의 위상

공산주의 국가, 특히 중국과 북한에서 대중동원운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기본적인 방법론이다. 그들은 위로부터의 제시되는 혁명적 목표를 쟁취할 수 있는지 여부가 사회구성원들의 혁명역량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동원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다룬 바 있는 '다자이(大寨)에서 배우자' 운동도 그렇고, 대약진운동이나 홍위병도 전형적인 대중동원운동이라 할 수 있다. 「운동」의 목표는 매우 다양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이슈가 표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약진운동은 경제발전을 목표로 한 운동이고, 신민가운동은 문예 창작을 목표로 한 운동, 문화대혁명은 당 관료들을 공격하는 운동이라는 식이다.

이렇게 「운동」이라 함은 많은 사람들이 집단행동을 통하여 일정한 정책을 실시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러한 운동에는 대체로 공격의 대상이 있다. 자연을 정복하거나 통제하는 것도 대상이 되고 권력구조나 자본주의사상 또는 태도도 대상이 된다. 이 후자의 경우 「군중운동」도 교육적인 효과를 갖고 때로는 반대자들을 숙청하는 효과도 갖는다. [안병준,1984:69-70]

이런 운동을 실시하려면 운동에 어울리는 간부가 필요하다. 운동의 지도이념을 깊이 학습하고, 상징과 조작, 선전선동에 능하며 대중을 조직해 운동의 지향점을 향해 다그치고 몰아가는 그런 적극분자들 말이다. 운동이 추진되고 힘을 받는 시기에는 이들이 득세한다. 중국에서는 이런 간부들을 「홍(紅)」이라고 부르며 실무지향적 관료집단인 「전(專)」과 구별했다.

문제는 경험적으로 볼 때 「홍」과 「전」은 상극이고, 개혁개방은 바로 「전」이 대표하는 노선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전이 홍을 철저하게 두들겨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도록 짓밟아 놓고 나서야 개혁개방이 제대로 추진될 수 있었다. 반대로 홍 노선이 강성하던 시절에는 아주 사소한 개혁을 추진하는 것도 힘들었고, 「전」 노선을 지지했던 개개인들을 종종 파멸로 몰아갔다.

북한 연구자들은 주체사상을 비롯한 김일성노선 전반에서 마오쩌둥을 모방한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특히 "인간중심론", 즉 물질적인 조건이나 동기부여 대신 사상개조와 정신력을 강조하는 마오쩌둥식 군중노선과 북한의 대중운동은 판박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약진운동」과 김일성의 「천리마 운동」간의 유사성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김일성은 늘 물질적 욕구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 생산의 진정한 자극제라고 주장해왔다. "영웅적인" 노동자들의 역량을 불신하는 "보수주의와 소극주의"에 의하여 대중의 "무진장한 창의력과 재능"이 억압되어 왔기 때문에 이것을 풀어놓기만 하면 "대중의 창의력과 열성과 재능"이 발휘되어 생산이 급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잠재력'을 동원해서 써먹겠다는 정책은 천리마운동 뿐 아니라 청산리정신, 속도전, 3대혁명 소조운동 등 북한의 각종 대중동원운동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핵심요소이다.



그럼 앞서와 마찬가지로 김일성은 이미 죽은지 오래고 천리마운동은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2000년대 들어서도 북한의 신년사에서 천리마운동 이야기가 계속 발견된다(예를 들어 2005년, 2009년)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겠다. 대중동원의 홍 노선은 여전히 북한의 주요노선으로 남아있다는 증거이다.

이번에는 김정일을 중심으로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김정일은 1961년에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이래 황태자답게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는데, 이때 그는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의 핵심보직들을 타고 올라갔다. 김정일이 북한의 후계자로서 자리를 굳힌 1974년 경, 그는 당 중앙의 조직비서 겸 선전선동 비서였다.

김정일은 이제 경제분야에도 손을 뻗게 되는데, 이 때 자신이 당의 조직, 선전 부문을 장악하고 있었던 탓인지 '경제 선동'이라는 분야를 개척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김정일의 경제지도를 상징하는 「속도전」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사회주의 노력경쟁운동이었다.

김정일이 속도전을 지휘하기 시작한 것은 1974년 2월의 「70일 전투」였다. 『조선중앙연감』 75, 76년도판은 70일 전투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영광스러운 당 중앙'(김정일의 별칭)의 지도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김정일이 간행을 주도한 『조선전사』제33권에는 이를 김정일의 중요한 업적이라고 강조하였다.

70일 전투는 공업생산량을 70% 늘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많은 문제를 빚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공식문헌에서 한동안 '당 중앙'의 활동에 대한 서술이 사라진다. 2차 7개년 계획이 시작된 78년에 김정일은 다시 '경제선동' 분야에 복귀해 「1백일 전투」 「수송혁명 200일 전투」 등을 지휘한다. 이 운동들도 단기적인 성과는 올렸으나 설비 혹사, 원료나 자재 공급의 불균형 등 극심한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이 100일 운동에 대해서는 김일성도 『김일성 저작집』 제 36권에서 비판을 가하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김정일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정무원의 경제 간부들을 비판하는 등 책임전가이긴 하지만 말이다.

82년 들어 김정일은 다시 김책제철소의 궐기모임을 시작으로 「80년대 속도 창조 운동」을 추진해 "천리마 대고조의 기세로 80년대 속도를 창조하자", "모두 다 80년대의 김혁·차광수가 되자"는 구호를 앞세워 경제발전을 위한 대중동원운동을 펼친다. 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는 「공화국 창건 40돌을 맞으며 사회주의 건설에서 새로운 대고조를 일으킬 2백일 전투」를 벌이는데, 이때 북한 언론들은 이 2백일 전투 발기를 김정일의 지도에 의한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2백일 전투가 끝나자 이번에는 「전국영웅대회」를 개최하여 다시 한 번 2백일 전투를 강행할 것을 호소한다.

이런 게 잘 될 리가 없었다. XX일 전투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단기간에 아주 높게 설정된 목표를 수행하도록 다그치는 운동이다. 필연적으로 운동이 끝난 후 참여자들은 탈진상태가 되고, 각종 후유증이 크게 남기 마련이다. 그런데 100일도 아니고 200일 전투를 한 다음 200일 전투를 또 한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400일이면 1년도 넘는 긴 시간이다.

이제 시계를 최근으로 돌려 보자. 작년(2009년)에 북한은 150일 전투를 대대적으로 추진했고, 150일 전투가 끝나자 바로 이어서 100일 전투를 거듭 진행했다. 그리고 새해 들어서도 김정일의 「속도전」행보는 계속되고 있다. 김정일의 새해 첫 공개활동은 자강도의 희천발전소 건설장을 시찰하고 '희천속도'를 강조한 것이었다.
노동신문은 '희천속도는 오늘의 대고조 진군의 위력한 추동력'이라는 제목의 개인 필명 논설을 통해, 희천발전소 건설장에서 군인들이 창조했다는 '희천속도'는 "선군천리마를 타고 강성대국으로 비약해 나가는 오늘의 대고조 시대를 추동하는 위대한 사회주의 건설속도"라고 주장했다.

'희천속도'라는 말은 지난해 9월 김정일 위원장이 이 발전소를 시찰하면서 군인 건설자들의 공사 속도를 "선군정치의 기초인 혁명적 군인정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천리마속도, 희천속도"라고 평가한 데서 비롯됐다.

150일전투는 김정일판 「천리마운동」임을 잘 보여주는 포스터


이 외에도 김정일의 대중운동은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다자이에서 배우자"의 천융구이나, "레이펑(雷鋒) 동지에게서 배우라"처럼 모범적 행동을 하는 숨은 영웅을 찾아내 이를 모방하자는 것으로는 정춘실 운동을 들 수 있다.

각급 정부와 사회조직에 청년 전위대를 투입해 조직을 장악하고 당 정책을 침투시킨다는 3대혁명소조운동은 또 다른 유형의 대중운동이다. 3대혁명소조운동은 김정일이 사회 요소요소에 김정일 친위대를 박으면서 권력세습의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운동이기 때문에, 앞으로 김정일이 3대 세습을 추진한다면 이에 상응하는 모종의 운동을 벌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김정일 본인이 대중동원의 홍 노선과 깊게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한 사회에서 대중동원노선을 비판한다는 것은 죽은 김일성을 비판하는 정도가 아니라 살아있는 김정일을 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럼 이를 다시 중국과 비교해 보자. 덩샤오핑은 자신이 집권(11기 3중전회)하기 조금 전에, 벌써 이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치고 있었다.
…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보수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 이익도 중시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소수의 선진[혁명] 분자들은 그뿐이겠지만 광범위한 군중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한동안은 그것으로 되겠지만 장기간은 통하지를 않는다. 혁명정신은 아주 귀중한 것이어서, 혁명정신이 없으면 혁명적 행동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혁명정신은 물질적 이익을 기초로하여 생겨나는 것이므로, 희생정신만을 강조하고 물질적 이익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관념론이다.

개혁개방을 위해서는 우선 김정일이 공개적으로 이런 주장을 펼쳐 전 사회에 보급해야만 한다. 김정일이 이런 주장을 펼치면서 동시에 150일 전투를 다그칠 수 있을까?


3. 관찰가능성

조금 다른 문제를 생각해 보자. 혹시 이러한 변화들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을 것인가? 즉 북한은 지독한 폐쇄사회이므로 북한 권력 핵심부는 이미 조용히 개혁개방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지만, 겉으로는 알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선례도 중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80년 7월부터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이나 혁명역사박물관에 있던 마오쩌둥의 거대한 초상들이 조용히 철거되고 천안문 위의 초상 한 장만이 의례상 남게 되었다. 전국 도처의 모택동 어록비니 각종 초상화들도 차츰 광고판으로 바뀌었다. 이는 만인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우상파괴였다.

1981년 1월 관영통신 『신화사』는 문혁 시기의 아비규환을 그리며 마오쩌둥 초상의 먼지를 털던 한 노동자가 초상의 목을 잡은 것이 '암살혐의'를 받아 '반혁명현행범'으로 투옥된 사례, 다섯 살 짜리 어린이가 마오쩌둥 배지를 강아지 목에 걸고 놀던 것이 목격되어 모자가 '혁명적' 처벌을 받은 사례, 마오 어록 글자 한 자를 틀린 식자공, 마오쩌둥 구호를 틀리게 부른 빈농, 마오쩌둥의 사진이 실린 낡은 신문지를 휴지통에 넣은 공무원 등 당에 대해 "악랄한 공격을 가한 … 계급의 적"으로 몰린 사례 등을 고발했다. 이 또한 전 국민이 보는 아래 진행된 명백한 우상파괴였다.

1980년대 초 중국 대중들이나 외국 관찰자들은 이런 현상을 통해 중국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좋은 예는 '진리표준논쟁' 같은 당 기관지와 관영언론을 통한 노선투쟁이나 신노선홍보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핵무기 개발 같은 것은 대중에게 숨겨서 몰래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회내부의 변화를 추진하면서 일반대중들이 모르게 일을 벌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대중이 지도부가 시키는 대로 하고 싶어도 일단 알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노선전환 자체는 권력층 내부에서 비밀리에 정해졌더라도 일단 정해진 것은 관영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새 노선을 교육하고 그 방향으로 대중을 몰아가는 것이 공산국가들의 전형적인 운영방식이다. 공산권 연구의 기본이 관영언론 모니터링인 것도 그때문이다. 북한 또한 그간의 행태로 볼 때, 중요한 결정이 지도부에서 내려졌다면 이를 어떤 형태로든 선전할 것이다.



4. 끝으로

마지막으로 환기해 두고 싶은 점은 우리는 이미 김정일 통치를 충분히 오래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북한의 후계자로 지명된 것은 1974년의 일이다. 이후 아버지로부터 점진적으로 권력을 이양받아 1980년대 후반이 되면, 이미 연로한 아버지를 대신해 북한 통치의 실무 대부분을 관장하고 있었다. 김일성이 사망(1994)한 뒤로만 세어도 17년, 그리고 그 이전의 실질적인 통치 기간을 더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25년 이상 김정일 통치를 관찰해 온 것이다.

그러니 김정일이 그간의 추세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노선을 취할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이 주장을 뒷받침할 아주 강력한 증거, 되돌리기 힘든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경제개혁 노선 1단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조치는 농업개혁이었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에 대기근을 겪었고, 2000년 이후로도 거의 매년 기근에 대한 경고가 계속되는 나라로서 농업개혁에 대한 필요성은 중국보다도 더 크다. 그리고 농업개혁, 즉 집단농업을 포기하는 것은 공업부문의 개혁보다 상대적으로 쉬우며, 북한이 외부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실천할 수 있는 조치이기도 하다. 자력으로 실천할 수 있는 조치는 미루면서 외부의 도움을 먼저 달라고 하는 행동은 그 자체로 개혁의지를 의심케하는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중국의 농업개혁은 대중동원의 홍(紅) 노선을 폐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니 북한이 농업개혁을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이들이 과거의 유산을 버리고 개혁개방의 전(專) 노선으로 돌아섰는지를 판단할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사실 김정일과 북한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식 개혁개방은 하지 않겠다고 명확히 선언해 왔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 혹은 이 글을 참조) 김정일은 80년대부터 중국을 여러 차례 시찰했고, 중국 또한 그에게 여러 차례 자신들의 경험을 전수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내가 보기에 김정일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하지 않겠다고 잘라 말하는 이유는 그가 중국식 개혁개방의 내용과 그 어려움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어서, 북한 사회의 근본적인 부분에 메스를 대는 그런 본격적인 개혁은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이미 내렸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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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net | 2010/01/23 07:06 | 정치 | 트랙백(1) | 핑백(6) | 덧글(83)
"다자이에서 배우자", 화궈펑, 개혁개방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된 배경에 대해 정리해둘 필요성을 느껴서 간단히.


1. '다자이(大寨)에서 배우자' 운동

1964년에 시작해 1978년까지 15년 동안이나 계속된 다자이 운동은 중국 농촌에서 전개된 대중동원운동 중 가장 오랫동안 계속된 것으로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잠시 주춤해 있던 중국공산당 좌파의 신농촌 모델을 상징했다.

다자이(大寨) 부락은 산시(山西)성 타이항산(太行山) 서쪽 기슭에 위치한 총 83가구로 이루어진 작고 가난한 산촌 마을이었다. 하지만 1964년 2월 10일, 『인민일보』가 「혁명정신에 의거해 산간지역을 건설한 모범부락」이란 사설과 소개 기사, 그리고 다자이 생산대대의 당지부 서기였던 천융구이(陳永貴)의 논문 「다자이의 길大寨之路」를 실어 이 마을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별볼일 없던 이 마을은 갑자기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인민일보』 사설에 따르면 다자이 대대는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에 입각해 1963년의 대재난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치산치수에 힘써 다자이 부락의 자연환경을 변화시킴으로서 낙후된 빈촌에서 선진모델로 변화할 수 있었다고 했다. 따라서 중국 농민들은 다자이 사람들의 혁명정신을 본받아 사회주의 신농촌을 건설하기 위한 대자연과의 투쟁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융구이는 '다자이의 길'이란 '집체 노동과 지혜에 의거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며 '농민의 혁명정신을 동원해 3대 혁명, 즉 계급투쟁, 생산투쟁, 그리고 과학실험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으로 농민의 두뇌를 무장'시켜야만 토지와 기술의 변화도 가능하다고 했다.

즉 다자이 경험이란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으로 각성된 농민의 정신력으로 자연환경을 개조하고 주어진 생산조건을 뛰어넘어 부유한 물질적 조건과 사회주의 공동체의 덕성을 겸비한 유토피아적 농촌사회를 건설함을 의미했다.

1964년 12월에 개최된 제3기 전인대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농업은 다자이에서 배우라!農業, 學大寨"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전달하며 전국의 농민들과 농촌간부들은 다자이의 경험과 정신을 학습함으로서 농촌경제의 발전과 사회주의 신농촌의 건설을 달성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따라서 이듬해인 1965년부터는 전국적으로 다자이 배우기 운동이 전개되었고 전국의 농촌 중 가장 모범적인 56개 단위의 업적을 소개하는 「전국 다자이식 농업전형 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인민일보』 는 이를 찬양하는 사설에서 "마오쩌둥 사상의 붉은 깃발을 높이 쳐들고 견결하게 당의 사회주의건설 총노선을 관철, 집행하였고, 집체역량에 의거해 자력갱생의 정신을 발휘함으로서 … 자연면모를 개변하고 농업생산의 발전을 가속시켰다"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대약진운동을 상징하는 옛 구호인 '삼면홍기(三面紅旗) -사회주의건설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운동-'와의 연속성이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잠시 주춤해 있던 중국공산당 좌파는 옛 꿈을 되살리기 위해 몇 개의 새로운 모델을 발굴, 보급하려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공업은 다칭(大慶) 유전을 배우고, 농업은 다자이 생산대대를 배우자'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추진된다. 류샤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등 실용주의 세력들은 이러한 대약진운동의 재등장을 견제하려고 노력했지만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휩쓸려 모두 숙청되고 만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정신력을 강조하는 대중동원 운동과 마오쩌둥 숭배는 깊게 결합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신화통신사는 다음과 같은 뉴스를 전했다. 한 부락에서 대규모 저수지공사에 모든 부락민을 동원하여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사를 강행하였다. 그들은 "손이 부르트고 … 어께가 부을" 정도로 일을 하면서도 마오쩌둥의 저작을 학습함으로서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저수지공사로 아무런 이익을 기대할 수 없는 생산대의 사람들까지도 마오쩌둥 사상 학습의 결과로 흔쾌히 이 부락의 저수지공사에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이같은 대규모공사에 동원되어 고된 일을 하는 농민들은 "부르주아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난과 피로에 대해 불평"하겠지만 "마오쩌둥 사상으로 무장한" 농민들은 "착취계급과는 전혀 다른 고난과 행복에 대한 관점"을 가졌다면서, 농민들은 "투쟁할수록 더욱 행복해지고 강해진다"고 했다.

다자이 생산대대의 천융구이를 접견하는 마오쩌둥. 그는 다자이 운동 때문에 무려 부총리에 오르게 된다



2. 화궈펑(華國鋒)의 집권과 범시(凡是) 노선

10여 년 후, 마오쩌둥은 말년 들어 쇠약해지면서 후계자 선정에 고심한다.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당내 좌파인 '4인방' 중에는 중국 같은 거대한 나라를 맡을 인재가 없어 보였지만 문화대혁명에 반대하다 숙청당했던 노간부들인 '주자파'에게 권력을 넘기는 것도 마뜩치 않았다. 내 업적은 "중국 대륙을 통일한 것과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것 단 두 가지"라고 자부해온 마오쩌둥으로서는, 자신이 죽고 나면 문화대혁명을 송두리채 부정할 것이 뻔해 모이는 덩샤오핑 같은 우파를 기용하기는 싫었던 것이다.

권력승계가 임박하자 4인방과 주자파의 갈등은 첨예해진다. 1976년 1월, 2인자이던 저우언라이 총리의 죽음이 다가오자, 4인방 측은 그 자리에 왕훙원(王洪文)을, 주자파 쪽은 덩샤오핑을 밀었다. 이때 마오쩌둥은 어느 한 쪽에게 권력을 넘기는 대신, 다소 의외의 선택을 내린다. [마오쩌둥의 고향인] 후난(湖南)성 제1서기와 공안부장을 지낸 후 국무원 부총리로 있던 화궈펑을 총리서리로 임명한 것이다. 화궈펑은 4인방과 주자파 양 파벌과 모두 거리가 있는 비교적 눈에 덜 띄는 인물이었고,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심도 확고했다. 하지만 4인방과 주자파 양 파벌은 모두 불만이었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추도식을 계기로 문화대혁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해 천안문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자 4인방은 그 배후에 덩샤오핑이 있다고 공격해, 덩을 실각시킨다. 저우언라이가 죽고 여덟 달이 지난 9월 9일, 드디어 마오쩌둥이 사망한다.

마오 사후의 권력장악을 겨냥해, 4인방은 자신들의 수족인 선전선동조직을 동원해 목청을 높였다. 한편 화궈펑은 이런 세몰이를 묵묵히 지켜보며 조용히 반격을 준비했다. 그는 마오쩌둥의 경호실장이던 왕둥싱(汪東興)의 협력을 얻어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4인방을 일망타진한다. 한 달 후인 10월 6일의 일이었다.

이렇게 덩샤오핑이 실각한 상태에서 4인방을 제거함으로서 화궈펑은 일단 당 내에서 마오쩌둥의 후계자 자리를 굳힌다. 화궈펑은 당 정치국에서 마오쩌둥의 유언을 강조하며, 당 주석 겸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임명된다.

마오쩌둥이 화궈펑에게 남겼다는 유언 "자네가 맡아준다면, 나는 안심이다"(你辦事,我放心)를 주제로 한 선전화. 벼락승진한 화궈펑으로서는 좋든 싫든 마오쩌둥의 권위를 계속 업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화궈펑은 중공 권부에 뿌리가 깊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도 마오쩌둥의 권위를 계속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문건을 잘 학습해 요점을 파악하자學好文件抓住綱」이라는 글을 『인민일보』, 『홍기』, 『해방군보』 등에 일제히 게재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마오 주석이 결정내린 모든 정책을 우리는 굳게 지키며, 마오 주석의 모든 지시를 우리는 끝까지 어김없이 따르자"(凡是毛主席作出的決策,我們都堅決維護. 凡是毛主席的指示,我們都始終不渝地遵循.)

화궈펑 노선을 상징하는 이 문장을 흔히 두 개의 범시(两个凡是)라고 부른다. 화궈펑은 이렇게 마오쩌둥 노선의 유일한 정통 후계자로 자처하는 동시에, 4인방 체포로 구심점을 잃어버린 문혁 수혜세력을 규합하여 자기 수하에 거두었다. 이들이 소위 '범시파'로, 여기에는 화궈펑, 왕둥싱, 우더(吳德), 천시렌(陳錫聯), 지덩쿠이(紀登奎), 천융구이(陳永貴), 니즈푸(倪志福), 장핑화(張平化), 궈위펑(郭玉峯) 등이 포함된다.

문혁 수혜세력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당정 간부 다수에게 지독한 박해를 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어둠이 있으면 빛도 있는 법, 문혁의 와중에도 반사이익을 본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화려한 경력을 가진 고위 간부 상당수가 숙청당했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빠르게 승진한 젊은 중간간부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운이 좋아서, 혹은 줄을 잘 댈 수 있었던 탓에 능력 이상으로 승진한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 일부 인사들은 너무 빨리 승진한 탓에 '헬리콥터' 승진이니 '로켓' 승진이니 하는 뒷말이 나돌기도 하였다.

마오쩌둥이 죽고 나자 그간 박해를 받았던 많은 옛 간부들이 복권을 기대했고, 또 실제로 당의 요직으로 복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간 문혁의 혜택을 보았던 신흥 간부들 입장에서는 위협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업적과 경력 대부분은 문혁에 충성하고 문혁에 공헌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혁이 폐기되고 잘못된 노선이었다는 평가가 새로 내려진다면 그들의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또한 홍(紅)과 전(專) 사이의 갈등도 있었다. 홍(紅)은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혁명적 지도자, 대중노선을 걷는 간부, 고도로 이념화된 인간형으로 선전과 대중동원의 특기를 갖고 대중들을 이끌어 이데올로기가 제시한 이상사회 건설을 추구하는 유토피아적 공산당원을 말한다. 반면 전(專)은 관리지향적 전문가, 직업 행정가, 고급기술을 소유한 기술자로 작업을 전문화하고 자원을 효과적으로 분배하고 효율적으로 조직하는 실용주의적 공산당원을 의미했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이상적인 공산당원은 홍과 전을 겸비한 인재여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이란 어느 한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어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홍과 전의 갈등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은 홍이 전을 압도한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문혁 희생자들은 덩샤오핑이나 천윈(陳雲), 펑전(彭眞)처럼 전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던 반면, 문혁 수혜세력은 대부분 그동안 마오쩌둥이나 4인방에 동조해 홍을 따랐던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4인방'이 제거되었다고 해서 간단히 홍 노선을 버릴 수는 없는 처지였다. 같은 이유에서 이들 문혁 수혜세력을 거두어 자기 세력으로 삼은 화궈펑 또한 함부로 홍 노선을 버릴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결국 화궈펑이 이끄는 범시파의 노선은 홍의 이념추구 노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덩샤오핑으로 대표되는 개혁파의 노선은 전의 실용주의 노선의 연장선상에 있는 셈이었다. 범시파는 문혁희생자들의 부활을 저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신격화된 마오쩌둥의 권위에 의존하고자 했다. "마오 주석이 결정내린 모든 정책을 우리는 굳게 지키며, 마오 주석의 모든 지시를 우리는 끝까지 어김없이 따르자"는 범시파의 구호는 이를 잘 보여준다.

화궈펑은 "당과 군부, 그리고 인민 내부에 대혼란을 조성한" 4인방을 제거한 후 마오쩌둥 사상에 입각하여 "안정과 단결을 실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고히 하여 천하대치(天下大治)"를 실현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에 따라 화궈펑은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선언하고 대신 정치안정과 경제건설을 가져올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20여 년 전,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가졌던 연설 「10대관계론」을 편집, 출판하여 이론적 지침서로 삼았다. 이어서 야심적인 10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20세기 내에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4개 현대화'를 이루어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10개년 계획은 이념 주도, 정신적 요소의 강조, 대중동원 등 전통적인 마오쩌둥 방식을 상당부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 정책을 마오쩌둥 시기의 대약진운동과 유사하다 하여 신약진(新躍進) 혹은 서방과의 교류도 허용한다는 점에서 양약진(洋躍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77년 5월 9일 중국 공산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화궈펑은 “공업은 다칭(大慶)을 배우고. 농업은 다자이(大寨)를 배우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프롤레타리아독재의 혁명을 계속 추진할 것을 외쳤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른 문제도 많았지만, 계속혁명론이나 10대관계론 같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옛 마오쩌둥 방식을 통해 4개 현대화를 실현하겠다는 생각 자체에 무리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오쩌둥의 심복인 '4인방'을 비판하면서도 '공업은 다칭 유전을 배우고, 농업은 다자이 마을을 본받자!' 같은 낡은 슬로건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오쩌둥 숭배를 끌고가려 했던 것이 화궈펑의 모순이었다



3. 덩샤오핑(鄧小平)의 복권과 실사구시(實事求是) 노선의 승리

일단 4인방이 제거되자, 문혁 시기에 억울하게 쫓겨난 인사들을 복권시켜주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 중에서도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주자파'의 최대 거물인 덩샤오핑이였다.

덩샤오핑의 복권은 단순한 엘리트들간의 파워게임이 아니었다. 이는 마오쩌둥 말기의 음울함과 문화대혁명의 광란에 질린 폭넓은 인민대중, 당 간부, 정부 관리들의 변화에 대한 소망을 등에 업고 있었다. 1977년 1월 저우언라이 서거 1주년을 맞아 천안문 광장에 1백만 군중이 운집했을 때 이런 희망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시대의 흐름을 읽은 예젠잉(葉劍英), 쉬스유(許世友), 웨이궈칭(韋國淸) 등 군부 실력자들도 덩의 복권을 지지했다.

덩샤오핑 본인도 복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한껏 몸을 낮추고 새카만 후배 화궈펑의 비위를 맞췄다. 마오쩌둥 사상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각서도 썼다.
화궈펑 동지는 마오 주석의 가장 적절한 후계자이십니다. 동지께서 이렇게 젊고 혈기왕성하시니 프롤레타리아 지배는 적어도 향후 15년에서 20년간 안정될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대대손손 정확하고 완전한 마오쩌둥 사상으로 우리의 전 당, 전 군, 전 인민을 지도함으로서 당과 사회주의의 위업 및 국제공산주의의 위업을 승리 속에서 밀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결국 1977년 7월에 개최된 중앙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이라는 예전 직위를 완전히 회복한다. 군부 지도자 예젠잉 또한 전국인민대표대회 주석으로 임명된다. 화궈펑은 여전히 당과 정부의 최고지도자로 남았지만, 옛날 마오쩌둥 같은 중량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외부 관찰자들은 이 상황을 화궈펑, 덩샤오핑, 예젠잉의 불안한 3두 체제처럼 인식한다.

덩샤오핑은 처음부터 화궈펑 밑에서 붙어 있을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덩은 복권이 되자마자 인사, 경제, 그리고 이데올로기라는 세 방향에서 허약한 화궈펑 체제에 교묘하게 구멍을 뚫기 시작한다.

우선 인사의 핵심은 문혁피해자들의 복권이었는데, 문혁피해자들이 더 많이 복권될수록 문화대혁명의 노선 견지를 주장하는 범시파들에게 불리할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범시파가 문혁피해자들을 복권시켜주지 않는다면 그만큼 범시파에 대한 불만이 더 쌓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 식으로 무자비하게 상대를 찍어누를 힘이 없는 범시파는 계속해서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했다. 이 약점을 간파한 덩사오핑은 심복인 후야오방(胡耀邦)을 당중앙 조직부장에 심어놓고 은근히 작업을 추진하며 인심을 등에 업는다.

다른 한편으로 덩은 화궈펑도 동의하는 '4개 현대화 노선'의 실행과 관련하여 파산상태인 옛 마오쩌둥식 군중동원 경제개발 노선을 은근히 흠집내면서 전(專)의 노선, 즉 실용주의파의 우월성을 부각해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마오쩌둥의 모든 결정과 지시를 맹종하자는 '양개범시'의 논리적 취약성을 걸고 넘어진다.

이때 덩샤오핑 또한 마오쩌둥의 어록을 끌어다 자신의 무기로 삼았다. 즉 "맑스와 엥겔스는 '뭐든(凡是) 옳다'란 말을 한 적이 없고, 레닌 스탈린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마오쩌둥 자신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마오쩌둥은 "누구나 일을 하노라면 착오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 '양개범시'를 말한단 말인가라는 주장이었다.

일리있는 말이었지만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마오쩌둥 어록을 감히 정면에서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자연히 '양개범시'에 대한 공격도 그다지 탄력을 받지 못했다.

이때 난징 대학 철학과 교수 후푸밍(胡福明)이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이란 논문을 집필한다. 이를 읽어본 후야오방은 이를 개혁파의 중요한 이론적 무기로 삼기로 하고 범시파의 실력자 왕둥싱의 검열을 피해 『광명일보』에 게재케 한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인민일보』, 『해방일보』에도 이를 전재케 하고, 10여 개의 지방지에도 실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일개 철학 논문이 당기관지를 비롯한 관영언론들에 우르르 중복게재되는 일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은 오직 한 가지 이유, 즉 권력의 개입으로만 설명할 수 있었다. 과거 문화대혁명이 일개 연극평론에서 시작되었던 것처럼, 당 중앙에서 대대적인 대중운동이나 권력투쟁이 시작되려 한다는 징조였다.

뒤에 '진리표준논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이 글은 마오쩌둥의 어록 그 자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은 피하면서, (마오의 어록을 포함한) 모든 것이 틀릴 수도 있음을 뒷받침하는 간명한 논리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개혁파가 이 논쟁에서 승리하면 간접적인 방법으로 마오쩌둥 어록의 절대성을 깨트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범시파는 이 글을 게재한 『인민일보』 관계자를 경질하는 등 반격에 부심했지만, 개혁파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없었다. 범시는 처음부터 죽은 이의 권위에만 의존하는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이었기 때문에, 상대의 입을 틀어막는데 실패하자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된다.

약 1년 반에 걸친 치열한 논쟁 끝에 1978년 12월, 덩샤오핑 파는 화궈펑 파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거둔다. 중앙공작회의에서 화궈펑과 왕둥싱은 양개범시에 대한 자아비판을 해야 했고, 이를 대신해 덩샤오핑의 연설인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를 추구하며, 일치 단결하여 앞을 내다 보자解放思想、实事求是、团结一致向前看」가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의 주제보고로 채택된다.

이 회의에서 정치국 확대로 천윈, 후야오방, 덩잉차오(鄧穎超), 왕전(王震) 이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고, 화궈펑파의 주력인 왕둥싱은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밀려난다. 이후 수 년 간에 걸쳐 덩샤오핑은 화궈펑 세력의 팔다리를 자르며 단계적으로 몰아내지만, 승부는 이 때 이미 결정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후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11기 4중전회(1979.09): 문혁 희생자 펑전(彭眞)이 정치국에 복귀, 자오쯔양(趙紫陽)이 정치국원이 됨.
11기 5중전회(1980.02): 문화대혁명 초기에 박해를 받고 죽은 류샤오치를 복권시키고, 덩샤오핑파의 후야오방, 자오쯔양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 반면 화궈펑파인 왕둥싱, 우더, 천시렌, 지덩쿠이가 정치국에서 밀려남. 문혁 이전의 중앙서기처를 부활시킴. 이곳 서기들은 문혁 피해자들로 채워짐.
전인대 5기 3차회의(1980. 9): 자오쯔양이 화궈펑의 국무원 총리 자리를 빼앗음.
정치국 확대회의(1980.11~12): 아홉 차례의 회의를 통해 화궈펑을 공격함. 화궈펑의 중앙위원회 주석 직위는 후야오방이, 중앙군사위 주석 직은 덩샤오핑이 빼앗음.
11기 6중전회(1981.6): 화궈펑의 당과 중앙군사위 주석 직 사임을 당이 재확인.
중공 12차 당대회(1982.9): 화궈펑 정치국에서 사임. 문혁피해그룹인 완리(萬里), 후챠오무(胡喬木), 야오이린(姚依林), 양상쿤(楊尙昆) 등 정치국 진입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의 주제보고가 된 덩샤오핑의 연설 「사상해방 실사구시…」는 계급투쟁과 계속혁명에 초점을 맞춘 마오쩌둥 노선을 대신해 경제발전과 4개 현대화를 당과 국가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과제로 설정했다는 의미에서 개혁개방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전환점으로서 11기 3중전회의 중요성은 그 전후에 해당하는 78년 2월과 79년 6월의 '정부사업(工作)보고'를 비교해보면 바로 드러난다. 이 보고는 덩샤오핑이 아니라 화궈펑이 내놓은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자.

전자에서 화궈펑은 (1)문화대혁명은 "무산계급독재 상의 위대한 창거"라고 옹호, (2)"무산계급독재 하의 계속혁명"을 거듭 강조, (3)자본주의 부활 위험 경고, (4)류샤오치, 린뱌오, 4인방을 묶어 '주자파'로 규정, (5)4인방을 '극우파'로 규정했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1)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함구, (2)'무산계급독재 하의 계속혁명' 구호 사라짐, (3)자본주의 부활 위협 경고는 4인방의 주장이었음, (4)류샤오치 비난 사라짐, (5)4인방은 '극좌파'라고 말을 바꾼다. 또한 그간 끊임없이 강조해 왔던 '계급투쟁'에 대해서도 말을 바꾸어 "금후 대규모의 폭풍과도 같은 대중적 계급투쟁은 이미 필요하지 않으며 또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한 마디로 마오쩌둥 계승 노선은 완패한 것이다.



4. 마오쩌둥 격하운동과 역사재평가

덩샤오핑 집권 후에 마오쩌둥 격하운동이 벌어진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일이지만 정작 당사자는 펄쩍 뛰며 부인한다. 일례로 1983년 9월 9일자 『북경주보』를 보자. “최근 서방측의 일부 ‘중국문제전문가’들은 마오쩌둥 동지가 서거한 후의 중국에 ‘마오쩌둥 탈피(非毛化)’에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고 떠들썩하게 선전하고 있다. 이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일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非毛化’를 덩샤오핑 동지와 결부시키는 언사는 말도 안 되는 허언”이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이 글이 설명하는 마오쩌둥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좀 더 들어보자.

마오쩌둥 사상은 마오쩌둥 동지 개인의 모든 언행의 집합체가 아니라, 일련의 기본원리에 의하여 구성된 사상체계이며 맑스·레닌주의의 중국에 있어서의 적용과 발전이며, 마오쩌둥 동지를 탁월한 대표자로 하는 중국공산당원의 집단적 지혜의 결정이다. 마오쩌둥 동지가 특정한 시점, 장소, 조건하에서 말한 것을 모든 일에 들어맞추고 잘못 말한 것도 그대로 행하는 것은 맑스주의의 태도가 아니다.

이와 같은 '공식 해석'을 통해 덩샤오핑은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을 죽은 마오쩌둥 개인으로부터 빼앗아 당의 것으로 만들었다. 마오쩌둥의 행적 중에 잘 된 것은 '당의 집단적 지혜의 결정'이고, 잘못된 것은 마오쩌둥 '개인의 착오'인 셈이다. 마오쩌둥 만년의 과오는 바로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에서 이탈한 것이며, 내용을 따져보지도 않고 마오쩌둥의 아무 말이나 맹종하는 화궈펑 같은 범시파들은 "맑스주의의 태도가 아니"다. 이는 마오쩌둥을 신격화된 존재에서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으로 끌어내림으로서, 과거 마오쩌둥의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공식 해석'은 1981년 6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11기 6중전회에서 발표된 공식 과거사 평가인 「건국이래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關於建國以來黨的若干歷史問題的決議」(이하 '역사결의')를 통해 천명된 것이다. 이 '역사결의'는 오늘날까지도 국가공인의 역사해석으로 부동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은 공과가 모두 있었으나 공적이 70%라면 과오는 30%라고 하였다. 이러한 조심스러운 평가는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보다는 훨씬 관대한 것이었지만,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자이자 40년 이상 중국공산당을 통치한 최고지도자로서, 소련에 있어 레닌과 스탈린을 합쳐놓은 것 같은 위상을 갖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전면적으로 비판한 다음 레닌의 '올바른 노선'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을 전면적으로 비판할 경우, 돌아갈 '올바른 노선'이랄 것이 남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왜 중국공산당이 중국을 통치해야 한단 말인가. 마오쩌둥의 지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류투성이라면서? 중국공산당은 이런 해석을 취할 입장이 못 되었다.

덩샤오핑 자신도 이 점을 솔직하게 지적하였다.
마오쩌둥 동지가 범한 착오를 포함한 모든 오류에 대해서는 조금도 애매함이 없이 비판해야 한다 … [하지만] 마오쩌둥 동지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서거하는 날까지 줄곧 우리 당의 영수였다. 마오쩌둥 동지의 착오에 대해서 지나치게 써서는 안 된다. 지나치게 쓰면 마오쩌둥 동지에게 먹칠을 하게 되며 또한 우리 당과 우리나라에다도 먹칠을 하게 된다.

결국 덩샤오핑 체제는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것에 의해 지금까지 지도되어온 당과 국가의 정통성을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정치적 고려를 해서 다소 억지스러운 이론적 곡예를 펼친 셈이다. 그렇다면 총괄해서 공적이 70%, 과오가 30%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공적이고, 무엇이 과오라고 규정했을까?

그 기준이 되는 해는 1956년이다. 즉 대장정 중에 마오쩌둥이 당의 지도권을 확보한 후 항일전쟁을 거쳐 국민당을 쳐부수고 대륙을 통일해 인민공화국을 세우고, 기본적인 사회주의화를 마칠 때까지는 마오쩌둥이 옳았으나, 그 이후 대약진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극좌적 오류에 빠져들기 시작해 문화대혁명으로 정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5. 화궈펑에 의한 대안적 개혁의 가능성과 한계

이제 실제로는 본격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던 화궈펑 노선에 대해 좀 생각해 보자.

공정히 말해서 화궈펑은 아무런 개혁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나름의 야심찬 청사진을 제시했다. '10개년 계획'을 통해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4개 현대화'를 이루어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4개 현대화'는 개혁개방을 추진한 덩샤오핑의 목표이자 구호였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사실 '4개 현대화'는 좀 더 깊은 역사가 있다. 이는 1973년 당시 전(專)을 대표하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천명한 노선이고, 그 실무책임자는 덩샤오핑이었다. 그리고 화궈펑의 '10개년 계획'은 1975년 덩샤오핑이 감수했던 옛 '10개년 계획'을 다소 수정한 것이었다. 이 계획을 화궈펑이 들고나왔을 때 덩샤오핑이 신랄하게 공격했던 것은 다소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었다.

또한 '범시'론이 내세운 명분과는 달리, 화궈펑은 마오쩌둥 말년의 정책을 100% 그대로 따라간 것도 아니었다. 문화대혁명을 종결짓고 '4인방'을 제거한 것은 물론이고, 대약진운동 이전의 오래된 마오쩌둥의 연설인「10대관계론」을 재조명하면서 은근슬쩍 그 이후 계속되었던 마오쩌둥의 극좌적 노선을 대신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유산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선별적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40여 년 동안 중국공산당을 지배해 왔다. 그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기 때문에, 잘 뒤져 보면 그의 어록에는 오른쪽 왼쪽 앞쪽 뒷쪽 할 것 없이 다양한 방향을 가리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물론 대세는 왼쪽이었지만 말이다. 따라서 필요에 따라 적절한 주장을 선택하고 해석할 여지는 상당했다. 이는 수천 년 전 예수나 석가, 무함마드의 어록이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해석되고 설교될 수 있음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범시'의 진정한 목적은 단지 마오쩌둥이 죽은 뒤까지도 마오쩌둥의 말씀에 신성한 권위를 계속 부여한 다음, 화궈펑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지배집단만이 그 권위를 독점하려는 데 있었다. 그리고 범시가 필요했던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이 덩샤오핑 같은 개혁파의 도전을 물리치고 화궈펑 파가 계속 집권하는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접근법은 극소수의 최고지도부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의 사회구성원의 능력과 지혜를 활용하는 것을 가로막게 된다는 점이었다.


6. 중국의 농업개혁: 다자이 운동의 몰락과 집단농업의 해체

중국 개혁개방 노선의 제 1단계는 보통 덩샤오핑이 화궈펑을 꺾은 1978년의 11기 3중전회부터 84년 10월의 제12기 3중전회까지의 6년 간으로 잡는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경제적 변화는 인민공사 같은 집단농업체제를 해체하고 농업을 사실상 자영농 방식으로 되돌린 데 있었다.

11기 3중전회에서는 농업에 관한 「중공중앙의 농업발전에 관한 약간의 문제에 관한 결정」「농촌인민공사공작조례」라는 두 가지 결의가 내려졌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치유하기 위해 '주자파'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 추진했던 정책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1)사상투쟁을 다그쳐 농업생산을 방해하지 말 것, (2)농촌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함부로 노동력을 동원하지 말 것, (3)농가부업이나 텃밭 경작 등 허용된 활동은 모두 사회주의 경제이므로, 자본주의 딱지를 붙여 괴롭히지 말 것, (4)분배는 노력과 능력에 맞추어 하며 획일적으로 공평해선 안 됨 등을 강조하였다. 이는 그간 계속되어온 좌경 농업정책에 제동이 걸렸음을 뜻했다.

이런 역전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서두에 언급했었던 '다자이(大寨)에서 배우자'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964년에 마오쩌둥의 지시로 전국에 보급되었고, 1975년부터는 화궈펑의 주도 하에 이룩된 농업의 대대적인 발전 성과로 선전되어 왔었다. 이제 화궈펑이 몰락함에 따라 다자이 운동의 추진력도 사라진다.

앞에서 다자이 운동을 소개하면서 "자력갱생과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으로 각성된 농민의 정신력으로 자연환경을 개조하고 주어진 생산조건을 뛰어넘어 부유한 물질적 조건과 사회주의 공동체의 덕성을 겸비한 유토피아적 농촌사회를 건설"함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었다. 그런데 '농민의 정신력으로 자연환경을 개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 말은 보통 인민공사 같은 대단위 조직이 하부의 여러 생산대에 소속된 농민을 동원해 인력으로 대단위 치수공사 같은 것을 해치우는 것을 뜻했다. 이런 동원은 '혁명정신에 충만한'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되어 있었지만, 그게 자발적일 리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럼 "정신력으로 … 주어진 생산력을 뛰어넘어"가 어떤 의미인지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덩샤오핑이 주도한 11기 3중전회의 새 농업정책은 농민이 자기 농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상부조직이 농민들을 이런 부역에 동원하는 것을 규제하고, 사상투쟁을 앞세워 농민들을 다그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새 농업정책이 발표된지 두 달 후, 다자이 운동의 본거지인 산시성 당위원회는 운동을 획일적으로 보급하려 했던 행태와 당의 올바른(이번에 새로 정해진) 농업노선을 무시했던 과오를 자아비판하고, 다자이 마을이 속한 시양(昔陽)현에서는 1973년 이후 5년 동안 식량생산량을 허위보고했음을 고백하는 등, 이제 다자이 운동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다. 『인민일보』나 『홍기』 등 관영매체가 주장한 다자이 운동의 결함은 (1)사업성과가 과장됨, (2)실적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보조금을 통해 조작됨 (3)이들이 자랑한 치수사업(西水東調)는 불합리한 공사임, (4)지역 특성을 타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보급이 어려우며 억지로 모방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킴 등이었다.

결국 화궈펑이 국무원 총리 직을 사임한 후인 1981년 2월, 『인민일보』는 다자이 마을과 시양현이 「무산계급 독재하의 계속혁명」을 주장하는 「극좌파노선」을 표방해온 결과, 다자이 운동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는 중앙의 최종 판결을 전한다.

이렇게 마오쩌둥과 화궈펑의 농업정책을 상징하는 다자이 운동이 몰락하는 한편, 덩샤오핑의 새로운 농업정책인 농업생산책임제가 떠오른다. 인민공사나 다자이 운동이 대단위 조직과 집단농업, 대규모 농민동원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농업생산책임제는 개인의 경제적 동기를 활용하기 위해 더 소규모 단위에게 책임을 주려고 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상반된 전략이었다.

농업생산책임제는 작업조를 단위로 생산을 책임지는 포산도조(包産到組). , 개별 농가에게 책임을 맡기는 포산도호(包産到戶) 등 다양한 형태가 있었다. 처음에는 작업조에게 생산을 맡기고 초과생산에 따른 인센티브를 받는 포산도조만을 허용했지만, 지방에서는 곧 상부의 지시를 융통성 있게 해석해 포산도호로 넘어가는 경향이 빠르게 증가했다.

안후이(安徽)성 성위 서기 완리는 포산도조를 시범 실시하고, 이듬해에는 안휘성 전 지역에서 포산도호를 실시했다. 자오쯔양도 쓰촨성에서 포산도조를 실시해 큰 성과를 낸다. 이에 "식량을 갖고 싶으면 자오쯔양을, 쌀을 먹고 싶으면 완리를 찾아라要吃粮 找紫阳 要吃米 找万里"는 말이 만들어진다.

이에 좌파 측에서는 아예 경작지를 농가에 나누어주고 경작하는 분전단간(分田單幹) 현상이 일어난다며 격렬히 반발했다. 다자이 마을 당서기 출신으로 농업담당 부총리에까지 오른 천융구이 같은 이는 "이는 곧 우경(右傾)이다. 공유제를 파괴하고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라며 강력히 비판했다. 천융구이는 곧 해임된다.

덩샤오핑은 이런 흐름을 추인하면서 농업개혁을 계속해 나간다. 1982년 연초에 발표된 「전국농촌공작회의기요」는 농업생산 책임제는 이미 90% 이상의 농촌에서 실시되고 있으며 그 형태는 다양하다고 했다. 그리고 포산도호도 “사회주의경제의 구성부분”이라고 선언하였다.

종합적으로 보아 덩샤오핑의 농업개혁은 대성공이었다. 1978년 이전 26년간 농업 총생산량의 평균 성장률은 2.6%에 불과했는데, 1978년 이후 1988년까지 10년간의 평균 증가율은 6.5%였고, 특히 1978년부터 1984년 사이에 괄목할 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농가소득도 1978년에서 1984년 사이에 평균 2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7. 끝으로

이렇게 하여 1980년대 초까지 중국에서 덩샤오핑이 일으킨 개혁개방 노선 수립과정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흔히 공산당 1당통치를 계속 유지하면서 경제 분야의 개혁과 대외개방에 치중한 것처럼 요약된다. 그 설명이 요점을 잘 짚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개혁개방이 그저 특구나 몇 개 만든 것은 아니다. 개혁개방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국에서는 지도부 교체를 포함한 인적청산, 광범위한 사면복권, 과거사 재평가,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좌경 이데올로기와의 결별, (이전 시대와 비교해서지만) 언론과 창작 사상의 자유 대폭 확대 등이 이루어졌다. 경제적 측면만 보아도 집단농업으로부터의 탈피라는 근원적인 농업개혁과 비약적인 농업 생산성 향상이 개혁의 정당성을 강화해주었다.

그러니 "북은 이미 80년대 초 중국 수준의 개방에 돌입"했다느니, "김정일이 등소평이 될 수가 있다"느니 하는 소리는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선 개혁개방 수준에 대해서 말하자면 중국의 경우 84년쯤까지는 첫 단계 경제개혁의 핵심인 집단농업 해체가 끝난 상태였고 그 전에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광범위한 개혁과 변화가 이미 일어났었다. 중국식 개혁개방(과 그에 따른 경제발전)에서 개혁과 개방은 분리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개혁이 모든 것의 토대에 위치하고 있어 개혁 없는 단순한 개방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개혁과 변화가 없이 특구 모델만 덜렁 가져와서 심는다고 중국식 개혁개방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김정일과 덩샤오핑의 비교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다. 위에서 설명한 것을 읽어본 분들은 다들 느끼시겠지만, 김정일의 입장이나 그간 행적은 덩샤오핑보다는 화궈펑과 닮은 구석이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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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net | 2010/01/21 13:02 | 정치 | 트랙백 | 핑백(5) | 덧글(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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