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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노덕술
2008/08/20   '반공으로 친일을 가리는'게 아니지요. [74]
'반공으로 친일을 가리는'게 아니지요.
친일파 떡밥을 한번 물어볼까요? (자그니)에서 트랙백

"'반공으로 친일을 가리는' 행태"라는 지적은 사실을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이 말은 친일이 몸통이고 반공이 몸통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인데, 실제로는 그 반대여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서는 친일전력자라도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친일을 보호함으로써 정치적으로 큰 손해를 볼 줄 익히 알면서도 반민특위와 충돌한 것입니다.

이 시기를 심도있게 다루는 박명림의 노작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몇 부분 인용해서 그렇다는 것을 보이도록 하지요. 이 책은 이승만에게 충분히 비판적인 책이고, 이 책을 읽으면 이승만을 공격하는데 유용한 근거를 아주 많이 발굴해낼 수 있으니 저와 입장이 다른 분들이라도 읽어 두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이승만 역시 친일세력이 체제의 골간이자, 좌파를 제압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에, 이들을 비호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가 이들을 감싼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의 기여라는 발생적 기원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들의 적극적 반공투쟁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이들을 제거하고 북한과 맞설 자신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자주 대북 자신감을 표출하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남한이 북한보다 허약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민중적 수준에서는 북한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정부와 군대는 이를 이기기 어렵다고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기원과 원인』, 나남출판, 1996, p.449


이승만이 핵심적으로 비호하려고 했던 세력은 최남선이나 이광수 같은 저명한 문화계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이승만에게 아무 쓸모가 없었죠. 일제시대의 거부인 화신백화점의 박흥식같은 자산가들은 물론 문화계 인사들보다는 유용했겠지만, 이들도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지 않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기득권층=자산가 계급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이승만의 목적이 아님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이승만 이후의 대통령들인 박정희나 전두환은 집권 직후 한번씩 재벌을 손봐주면서 길들이기에 나서는데, 이승만도 친일청산을 명분으로 이러한 방법을 쓰지 못할 이유는 없지요. 체포되자 이승만이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을 면담해가면서 구해내려고 했던 핵심인사는 친일경찰인 노덕술이었습니다.

다음은 언론에 보도된 김상돈의 의회에서의 발언이다. 이것을 『국회 속기록』에서 인용하지 않고 신문에서 인용하는 것은 의도적이다.

우리 위원회에서 비상한 노력을 계속하던 차에 대통령이 부르시기에 반민특위활동을 무슨 원조나 하여주시려는가 보다하고 기쁜 마음으로 찾아갔다. 그랬더니 기대와는 천양지차로 노덕술을 석방하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노덕술을 석방할 수 없다고 말하였더니 그래도 노덕술은 경찰기술자이며 공훈이 있는 자이다. 이 사람이 없이는 신생국가의 치안유지가 안된다고 말하며 다시금 석방을 요청하기에 나는 민주주의국가에서는 그러한 기술이 필요치 않다고 거절하였다. 그랬더니 대통령은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당신들이 그대로 나가면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다고 말하였다. … 대통령은 특위활동 때문에 치안이 혼란상태에 빠졌다고 말하였는데 그렇다면 제주도사건을 비롯하여 전남반란사건, 38선의 혼란상태 이 모두가 다 반민특위의 고문 난타 때문에 그렇다는 말인가? 대통령의 담화는 부당한 것이며 다시 는 대통령이 신생국가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꿈에라도 그러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20]

[20] 2월 17일 제 33 차 본회의 발언, 『서울신문』 1949년 2월 18일. 대통령의 담화에 대한 반민특위의 공식 반박담화는 같은 날짜, 같은 신문에 실려 있다.

같은 책, p.450

주요 일간지에 이렇게 실리면 정치적 타격이 막대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요. 박명림에 따르면 "토지 개혁이나 친일파 문제, 각료들의 비행,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적 보도에 있어 전간기는 보기 드문 언론자유의 시기"라면서 "친일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과 의회가 충돌할 경우 대통령의 담화와 그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국회의원의 주장이 같은 크기로 실렸다"고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에게는 그만큼 절실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48년질서에서 분단과 통일의 문제는 상쇄적이었다. 불행히도 현실은 북한수용과 통일을 주장하는 세력이 소수였고 반공 반북의식으로 남한을 강화하여 북한을 타도하자는 세력이 다수였다. 이는 현실조건의 반영이자 국토완정을 주장하는 북한의 대응물이었다. 남한의 단정 노선을 강화해 주고 정당성을 부여해 준 요인의 하나는 먼저 분단으로 갔던 북한의 선택이었다. 단정세력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분단의 논리와 반공주의를 강화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중들이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반공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설명은 진실의 절반만을 말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와의 생사투쟁적 대결을 끝내고 정부가 수립되었고, 또 그들과 그러한 대결을 지속하고 있는 상태에서 평화통일주장은 지배적이지 않았다. 평화통일 주장보다는 반공통일 주장이 더 강력하게 받아들여지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친일세력 숙청문제는 전혀 달랐다. 표면적으로 이것은 이념 문제와도 분리되어 있어 보였다. 또 토지개혁 같은 구조적 변환을 가져오는 것도 아닌 문제로 보였다. 달리 말하여 사람을 자르고 가두는 문제였기 때문에 효과도 훨씬 더 즉각적이고 선명하였다. 민주화 과정에 5공 청산과 군부권위주의 청산이 마치 커다란 사회적 구조변화를 가져온 듯 보였던 과대포장 효과는 제도와 구조의 변화보다 인적 청산이 갖고 있는 일종의 사회적 집단착시였던 것이다. 한국의 정치문화는 가장 근본이 되는 이슈가 쟁점화되면 세부적인 내용과 정책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따지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사회적 합의인 친일세력 숙청을 거부한다는 것은 이승만 정부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도덕적 명분보다는 현실적 이득을 취하였다. 이 선택은 남한이 이 문제를 수용할 수 없었던 48년질서의 구조와 그 속에서의 지배체제의 성격을 함께 보여준다. 그것의 수용은 곧 1948년질서의 붕괴 내지는 상대 공산주의국가에 이니셔티브를 양도함을 의미했다. 반공체제를 지탱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친일파도 숙청하고 반공도 강화하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이 생사투쟁적 대결을 진행 중인 이승만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이승만의 선택은 현실적으로 두 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하나는 도덕적 비난이었고 다른 하나는 체제의 강화였다. … 48년질서에의 참여문제에서 이승만과 김구는 참여와 참여거부로 결별하였는데 이때 전자는 현실주의로 선회하였고 후자는 도덕주의를 고수하였다. 친일숙청문제는 이러한 대립의 세 번째 의제였다.

같은 책, pp.460-462



이 문제는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가 헌법 문제로 한민당의 김성수를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김성수 씨는 양원제, 내각책임제에는 곧바로 찬성하였으나 농지개혁에는 약간 망설이는 빛을 보였다. 자신 지주이고 또 지주출신자들이 많이 집결된 정당의 대표자이니 나로서는 처음부터 예기했던 반응이었다. 그래 나는 … 제1차세계대전 후 동구제국이 농지개혁을 단행한 이야기를 하고 그것 없이는 농민이 공산당으로 쏠리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음을 역설하였다. … 김성수 씨는 ‘농지개혁만이 공산당을 막는 최량의 길’이라는 내 말에 ‘그것도 그렇겠다’하면서 결국 농지개혁에도 찬성하였다.

같은 책, pp.477-478

이는 공산당을 막는데 필요하다는 요구는 지주들이 토지개혁에 관한 내용을 헌법에 넣는데도 동의하게 만들 정도의 파괴력이 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런 것은 그저 빈 말로 하는 일이 아니지요.


이들은 반민특위가 진행되던 당시에도 실제로 격렬히 싸우고 있었습니다.

남한의 한 자료에 따르면 이후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의 충돌은 874회 에 달했다. 최초의 충돌이 있었던 49년 1월부터 매일 두 번 이상의 충돌이 이어졌음을 뜻한다. 38선은 사실상 전장이었던 것이다. 북한 측의 주장에 따르면 1949년 1월부터 9월까지 38선 전 전선에 걸쳐 남한의 침입횟수는 432회에 달했고 총 침입인원수는 4만9천 명에 달했다. 그들은 총 13개 군, 45개 면, 136개 리가 10여 차례 이상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 중에는 71회의 비행기 침입과 42회의 함대 습격도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어느 쪽의 주장을 취하든지 전투횟수가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객관적으로 말하여 공격의 횟수는 서로 비슷하였다. 어느 지역에서는 남한이 더 많았고 어느 지역에서는 북한이 더 많았다. 또 초기에는 남한이 좀더 공격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북한이 더 공격적으로 바뀌어갔다. 북한이 점점 더 공격적으로 되었던 것은 남한내륙의 게릴라투쟁을 도와주기 위한 이유 때문이었다. 38선 충돌은 황해도 옹진에서 강원도 양양까지 전 전선에 걸친 것이었기 때문에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아니었다.

유엔한위의 보고는 “게릴라 대원들이나 정보원들의 다수는 북한에서 훈련된 남한인들”이라면서 그들은 그들이 가진 지방에 대한 지식이 그들의 작전 실시와 지방불평분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있어 유리하게 작용하는 각 지방들의 전투원으로 다시 파견되었다고 분석하였다. 보고에 따르면 게릴라들은 현지보급으로 생활해야 했지만 무기와 탄약은 북한당국으로부터 받고 있었다. 여러 증거와 게릴라 심문에 근거하여 위원단은 “북한당국은 대한민국에 대하여 주의깊이 계획된 게릴라전(a carefully-planned guerrilla campaign against the Republic of Korea) 을 실제로 실행중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결론내렸다.

이를테면 9월 16일에는 게릴라가 광양에 주둔하는 군부대의 대대본부를 공격하여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군의 대대본부뿐만 아니라 인근의 광양경찰서와 지서까지 공격하여 막강함을 과시하였다. 이를 진압코자 출동한 군부대는 매복에 걸려 패퇴하였고 대대규모의 부대가 게릴라에게 패퇴하기도 하였다. 결국은 다음날 사단장이 직접 전투에 나서서야 게릴라를 격퇴시킬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군경은 39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실종되는 피해를 입었다. 11월 3일에는 진주시가 게릴라에게 공격을 당하기도 하였다. 진주시 같은 규모의 도시가 공격당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남한에 많은 충격을 주었다. 게릴라들은 진주군청, 형무소, 법원, 경찰, 해병대 부대를 동시에 공격하였고 법원과 군청은 전소되었다.

같은 책, p.620, 631, 633


게다가 이 시기는 주한미군이 철수를 결정해 진행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미군의 철수가 김일성과 스탈린으로 하여금 남침의 성공가능성을 믿게 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요. 그렇지 않아도 약하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이승만이 얼마나 초조했겠습니까?

이런 상황이 이어지다가 반민특위 문제가 있었던 바로 다음 해 6월 결국 북한의 전면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때 남한은 문자 그대로 멸망 직전까지 몰립니다. 국군이 좀 더 빨리 무너지거나 후방 교란 활동이 조금만 더 강했어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지금 없을 공산이 큽니다.

파괴적이었던 한국전쟁 이후에는 결국 그때 이승만이 반공을 위해 기를 썼던 것이 일리가 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어서, 이 문제를 갖고 이승만을 비난하기가 아주 어려워집니다.

그러니 당장 대공수사에 투입할 경험있는 인력이 광복 후 건설한 우리나라의 생존에 일조하지 못했다고 볼 이유가 있는지 잘 생각해 볼 일입니다. 반민특위 문제를 어떻게 풀었으면 좋았을지에 대한 제 의견은 앞선 글의 말미에 적어 두었으니 궁금하신 분은 그 쪽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부기
" "친일파가 '속죄의 의미로 한국 정부에서 일한'것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하시면 곤란하지요. 그것은 정확한 인용도 아니거니와, 문장을 곡해한 것이고, 실제로는 한국정부의 생존을 위해 기여했다면 조금이나마 속죄가 된 것이라는거지요. 제가 말하는 것은 결과의 논리이지 동기의 논리는 아니거든요.
by sonnet | 2008/08/20 10:40 | flame! | 트랙백 | 핑백(2) | 덧글(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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