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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김일성
2010/08/16   오늘의 한마디(김일성) [40]
2010/07/15   서해에 출현한 소련군 [61]
2010/05/31   북한의 관료정치와 경제개혁 [96]
2010/05/28   개혁개방을 권해본 중국 [202]
오늘의 한마디(김일성)

[제1차 북핵위기가 진행 중이던 1993년 10월, 미 하원 외교위원회 동아태 소위원장이던 애커만 의원이 이끄는 소규모 의회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났다. 면담이 일단락되고 식사가 진행되던 중] 대표단 중 한 명이 구소련의 스탈린이 그에게 1950년 남침을 부추겼느냐고 물었다. 김일성은 질문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몇 분 동안 곰곰 생각에 잠겼던 그가 미소를 띄고 말했다.

“스탈린은 내 친구요. 그는 죽었소. 그가 편안하게 쉬도록 놔둡시다.”



Quinones, Kenneth. North Korea's Nuclear Threat "off the record" Memories, 미출간
(노순옥 역, 『2평 빵집에서 결정된 한반도 운명 : 북폭이냐 협상이냐』 서울: 중앙M&B, 2000. p.238)



… 1년 후 김일성은 드디어 '내 친구'를 만나러 삼도천을 건너게 되는데,
스탈린이 묻지 않았을까, "니가 내 친구냐, 엉?"
by sonnet | 2010/08/16 12:00 | 한마디 | 트랙백 | 덧글(40)
서해에 출현한 소련군
최근 중국의 반응을 통해 다들 중국이 서해에 다른 강대국 군대가 출현하는 것을 엄청나게 꺼린다는 점을 잘 확인하셨으리라고 봅니다. 이제 북한과 중국 사이엔 이 문제가 어땠는지 한 번 살펴 보기로 하지요.

1980년대 북한은 대소교역이 전체 교역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소련에 밀착합니다. (북한 무역의 문제 참조) 물론 실질적으로는 대부분 원조였죠. 바늘 가는데 실 가는 법이라고 하듯이, 두 나라는 군사적으로도 밀착하게 됩니다.

그 대신 북한은 소련에게 중·소 사이에서 ‘전략적인 우위’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제공했다. 소련과 북한의 해군 합동훈련, 남포, 나진, 청진항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한 것, 캄란 만(灣) 소련기지의 활성화를 위해서 북한을 통해 연결할 수 있는 비행루트를 제공한 것, 또 소련 공군의 정보비행과 공격훈련 연습을 위해서 소련의 TU-95 BADGER(sic.) 정찰기, TU-95 BEAR G 폭격기 TU-95 BEAR D 해상첩보기에게 원산에서 남포를 거쳐 서해로 나갈 수 있는 북한영공 횡단권을 주었다. 특히, 소련 항공기가 북한영공을 통해서 중국을 정찰비행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은 중국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이 점은 아마 김일성도 정치적으로 치밀하게 계산을 했을 것이다.

소련 폭격기의 북한영공 통과는 군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련의 전략적인 고려가 크게 작용했다. 미·소 대결이 치열한 상황 하에서 소련은 미국 주도하에 대한해협에서 쓰시마해협이 봉쇄되었을 경우를 대비한 ‘대안적인 교통로’로서 북한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확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캄란 만을 연결하는 전략 교통로가 대한해협-쓰시마해협에서 차단될 수 있는데 이를 빠져나가는 방법은 북한영공을 통과하는 것뿐이었다.

만약 캄란 만의 소련군을 지원하려면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의 발진이 필수적이고, 그러자면 북한영공을 통한 새로운 루트의 개척이 또한 필연적이었다. 또 북한을 이용함으로써 소련의 극동 군사기지와 다낭-캄란 만을 직선으로 연결하여 비행거리와 비행시간 단축, 연료소모량 절약 등 소련 공군의 작전능력을 대폭 향상시킬 수도 있다. 동시에 한국과 중국의 중요 군사기지에 대한 항공정찰이 가능해졌고, 일본의 대소(大蘇) 군사활동 탐지능력을 현저히 약화시킬 수 있었다.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진한 전투기가 일본의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고 황해를 지나 동남아시아 쪽으로 비행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일본이 조기경보 레이더의 등급을 대폭 향상시키지 않으면, 소련의 군사 비행활동을 탐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의 남서해상 교통로는 소련의 공군력 앞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pp.156-157)


이렇게 생긴 전략정찰기가

이렇게 날아다니며 정찰하게 된 것.


그리고 나서 곧 이루어진 호요방의 신의주 방문시 김일성-김정일과의 대담 중의 한 대목.

김일성: 최근에 와서, 우리가 소련과 교류비행(상호방문비행)을 하고, 소련의 고위층이 북한을 방문하는 등 소련과의 관계 긴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중국에 대한 혈맹관계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으니, 이 점 이해하기 바란다. 또 나진항을 소련에 조차해 주었다고 하는데, 유사시에 사용하도록 한 것이지, 평상시에 소련군을 주둔하도록 한 것은 아니다.
호요방: 우리는 오해도 우려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소련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환영하고 있다. 북조선도 군사비를 축소하고, 경제건설에 힘써 줄 것을 우리는 바라고 있다.(pp.184-186)



출처: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서울: 나남, 2004.
by sonnet | 2010/07/15 14:55 | 정치 | 트랙백(1) | 핑백(1) | 덧글(61)
북한의 관료정치와 경제개혁
북한의 행태에 대한 평가나 분석은 북한을 하나의 단일한 행위자처럼 의인화해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김일성/김정일의 의지가 그대로 체현되는 과정처럼 그려진다.

물론 유일영도체제를 확립하고 절대권력을 휘두른다는 점에서 김정일은 국내적으로 주변 어떤 나라의 지도자들보다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이에 견주려면 오늘날의 지도자로는 어렵고 과거 스탈린, 마오쩌둥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지도자라고 해도 권력의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라면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가 좋은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성공적인 전제군주 중 하나로 손꼽히는 청나라의 옹정제가 절대왕정을 실천하려다가 겪은 한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옹정제가 독재정치를 하는 데 보다 큰 강적은 … 관료기구 그 자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옹정제가 기를 쓰며 애달아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관료들은 걸핏하면 냉담한 눈으로 이를 방관하였고 툭하면 비판을 가하려 하였다. …

군주는 정치상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어떤 유력한 관료라도 말 한마디로 침묵시킬 수 있고 또 파멸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관료 개개인에 한정된 것이지 관료계급 자체에 대해서는 아니다. 옹정제의 노력으로도 관료조직의 극히 일부분만을 겨우 뜻에 맞게 고칠 수 있었을 뿐 관료제도 그 자체는 엄연히 온존해 있었다. 이렇게 불사신의 비법을 지닌 관료계급 사이에서 인기를 잃는 것은 청조를 위하는 일이 아니다. 관료의 사욕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어 자본과의 결합을 허락함으로써 청조가 이들의 이익과 일체화되는 것이 청조를 영속시키고 만주인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일 것이다.[宮崎市定,2001:199,204]

즉 대신 하나를 짜르는 것은 식은죽 먹기지만 관료계급 전체를 전멸시키고 생판 다른 사람들로 대체한다든가 하는 식으로는 일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외교관을 짜르고 다른 외교관을 장관으로 임명한다거나, 어떤 장군을 짜르고 다른 장군을 임명하는 정도로는 그 나물의 그 밥에서 골라 뽑은 이상, 전체로서는 상당한 연속성이 남게 된다.

이런 문제들은 옹정제 뿐 아니라 고금의 많은 최고지도자들을 좌절케 한 바 있다. F.D.루즈벨트의 말을 들어보자.

재무부는 조직이 방대한데다 업무영역도 넓고 고유의 관행에 깊이 물들어 있어서 이들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행동이나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 그러나 재무부는 국무부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직업외교관들의 생각이나 정책, 행동에 모종의 변화를 가져오려고 한번 시도해보라. 그러면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재무부와 국무부를 합쳐도 그 ‘해~군’(海軍)의 상대는 되지 않는다. …‘해~군’에서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는 것은 마치 깃털 침대를 때리는 것과 같다. 오른 주먹으로 때리고, 왼 주먹으로 때리고, 녹초가 되도록 두들겨 패고 나서 돌아서면 때리기 전이나 다름없이 멀쩡한 그 빌어먹을 침대 말이다.[Allison&Zelikow,2005:227-8]

이런 상황에서 많은 최고지도자들은 정부 내의 여러 파벌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거나, 어떤 파벌에 힘을 실어줌으로서 무리수를 쓰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사실 국가의 의사결정에 이런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의견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그리고, 북한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고, 어느쪽이 득세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고 대외환경에 따라 강경, 온건이 득세하게 되죠. (lime)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의 행태를 분석할 때, 북한 내부를 블랙박스화 해서 단일 행위자처럼 다루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정부 정책결정과정의 내면적 관점들을 전통적인 합리적 행위자 분석법과 종합해 유명해진 앨리슨의 설명을 들어보자.

제2모델[조직행태]과 제3모델[정부정치]에 따른 분석은 제1모델[합리적 행위자]의 분석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한다. 제1모델의 경우 한 전략분석가가 책상 앞에 앉아서 미국과 소련의 국가적 차원의 수익과 비용을 계산한다. 한 나라가 내린 가치극대화를 위한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리적인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분석능력이 필요하다. 조직의 역량과 산출을 강조하는 분석, 또는 개인간의 흥정에 초점을 둔 분석을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일부 분석가(특히 게임에 직접 참가하는 경기자)들은 자기 나라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3모델을 이용하고 다른 나라의 행동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제1모델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자국의 경우 정보가 많고 타국의 경우 정보가 적기 때문인데 이는 곧 어느 설명을 택하는가는 정보수집의 비용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Allison&Zelikow,2005:469]

즉 우리 편 의사결정은 (나도 참여해서 내막을 잘 아니까) 관료조직들 간의 흥정 등의 방법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정작 적의 의사결정에 대한 견해를 말할 때는 (놈들의 내부 사정은 잘 모르니까 내부 사정을 몰라도 설명을 내놓을 수 있는) 합리적 행위자 모델로 돌아가서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북한의 정책을 분석할 때 특히 중요하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정보를 수집하기 어려운 나라들 중 하나이며, 정부 내부나 최고위층의 정책결정과정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북한의 내부에 대해 신뢰성 있는 정보를 얻기 힘들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내부 세력들 간의 흥정과정에 대해서 다룰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싶어하는 주제에 대한 최근의 흥미로운 연구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기범의 박사학위논문인 “북한 정책결정과정의 조직행태와 관료정치 : 경제개혁 확대 및 후퇴를 중심으로(2000~09)” 이다.(사실 이 블로그의 최근 몇몇 포스팅에서 그 중 일부를 인용하여 소개한 적이 있기도 하다)

박사학위논문은 보통 젊은 연구자가 독립된 학자로서 내놓는 첫 작품인 만큼 그 의욕은 대단하더라도 수준이 꼭 높다고 장담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이 경우는 좀 다르다. 한기범은 국정원 대북파트에서 20년 이상 근무하고 제3차장(대북담당)을 지낸 장년의 분석가이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황장엽 등 고위급 탈북자들의 신원을 관리하고, 이들을 debriefing하여 정보를 수집한다. 아무래도 민간의 개별 연구자들보다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접근성, 시간, 자원 모든 면에서 유리한 입장일 수밖에 없다.

탈북자들은 빈손으로 남한에 왔고, 자신이 알고 있는 북한에 대한 정보가 바로 자신의 몸값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을 부풀리려는 경향이 있다. 관직에 몸담았던 탈북자의 경우는 더 그렇다. 게다가 외부와의 교류가 부족한 사회에서 성장한 관계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기능이 외부 사회 기준으로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경우도 심심치않게 발견된다. 따라서 이들의 증언 중 어떤 것이 얼마나 믿을만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한기범은 다른 사람들로서는 쉽게 도전하기 힘든 북한의 정책결정과정을 분석하는데 월등히 유리한 경력의 소유자라고 하겠다. 물론 이 논문은 공개된 자료들에 입각해 쓰여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국정원에서 쌓은 경험이 공개된 자료들 중 어떤 것이 얼마나 신뢰할 만하며 어떤 것을 논거로 선택할지를 평가하는데 사용되었다고 기대해볼 수 있다.


이 논문은 분량이 상당(350쪽)한데 관심 있으신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면 될 것 같고, 하여간 한기범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북한 내각이 2004년에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가 2005~2006년 사이에 저항에 직면해 개혁이 좌초되고, 그 후 퇴행이 진행된 것(2008)은 쉽게 말하면 당, 정부(내각), 군 사이의 밥그릇 싸움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1990년대 경제침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과감한 경제개혁’을 독려하였고, 개혁성과가 부진하자 뒤늦게 내각에 경제관리 권한을 확대해 주었으며, 시장경제 문제로 내각과 당이 갈등을 빚자 처음에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다가 결국은 당을 지지해 주었다. 그는 정책의 입구와 출구를 관리할 뿐 집행과정에서 제반 문제점을 주도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내각은 경제개혁을 주관하면서 처음부터 혁신적인 안을 내놓지 못하고 전형적인 ‘조직행태’를 보였다(2002-03). 권력기관의 눈치를 보면서 ‘과거 개혁경험’들을 짜깁기했고, 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표준행동절차’의 급조로 혼란을 초래했으며, 점증하는 일선 현상의 ‘본위주의’를 효율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내각이 급진적인 시장 경제를 추진(2004)한 것은 개혁 부작용이 누적되어 조직 존립의 위기를 인식한 이후였으며, 경제 활성화를 위해선 근본적 개혁 외에는 길이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시장경제로의 개혁은 정치문제로서 당의 영향력을 위축시키는 조치였다. 당은 내각간부의 비리를 조사하는 한편 김정일에게 그간 경제정책의 문제점을 보고하여 개혁세력을 무력화시켰다(2005-06). 나아가 당은 김정일에게 ‘시장 = 비사회주의 서식장’으로 인식(2007)시켜 그의 개혁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경제개혁 전면 후퇴’ 선언(2008)을 유도하였다. 이처럼 내각은 ‘특수경제 축소’를 위해, 당은 내각의 ‘과잉 정치화’ 차단을 위해 경제개혁의 폭과 속도를 놓고 북한 권력층 내부에서 ‘관료정치’가 전개되었다. 다만, 정책의 ‘흥정과 타협’이 지도자를 매개로 하여 거래된 것은 수평적 협조 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북한적 현상이었다.[한기범,2010:x]



여기서 북한의 정부구조를 잠깐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원래 전형적인 공산국가는 공산당이 정부와 군을 확고하게 틀어쥐고 감독하게 되어 있다. 이는 북한도 마찬가지로 김일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은 키잡이, 정권기관은 노젓는 이"였다. 그러나 김정일이 정권을 물려받고 국방위원장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선군통치'를 펼치면서 이 구조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군이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내각의 위상은 한 단계 더 밀려나게 된다. 내각은 원래도 당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조직이었으니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조치라 하겠다.
[그림 1] 북한의 권력구조 변화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인 박봉주 총리의 '개혁'은 김정일이 일시적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고는 하나 총리가 담당하는 '내각', 즉 가장 힘이 없는 기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북한 경제는 몇 개의 차별화된 구획으로 나뉘어진다는 것이 널리 인정된다. 분류 가짓수는 학자에 따라 2~7개 정도로 다양한데,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여기서는 4단계 정도로만 나눠 보겠다. 이때 북한 총리는 북한 경제 전체를 담당하지 못하고 오직 내각 경제만 담당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북한 경제가 엉망진창인지라 산업의 가동률 또한 형편없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원을 우선적으로 배정받는 특권 경제 부문(당경제와 군수경제)은 가동률이 상대적으로 높기 마련이다. 이들 뒤에는 당과 군이라는 힘 있는 기관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가 엉망진창인데, 희소한 자원과 우량기업소들을 특권경제 부문에 우선적으로 빼앗기고 빈 쭉정이들만 잔뜩 떠안다보니 일반 경제를 담당하는 내각으로서는 아주 죽을 맛이었을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내각은 김정일의 관심을 얻었다는 것을 무기로 특권경제 부문의 축소를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김정일은 내각의 조치들 중 비교적 쉬운 것은 승인하면서도 특권경제를 정리하는 것만큼은 꺼렸다. 예를 들어 일찌기 7.1조치를 기획했던 '6.3 그루빠'의 경우에도 특권경제 축소를 상신하였으나 거부한 바 있다.[한기범,2010:112] 사실 김정일이 이들에게 제시한 지침은 “국방공업을 우선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라”는 것이었다. 즉 특권경제의 우선적 요구를 공인한 셈이다. 이는 이론화를 거쳐 이른바 ‘선군시대 경제건설 로선’으로 확립된다.[한기범,2010:149-50]


[박형중 외,2009:85-6]도 한기범과 비슷한 견해를 제시한다. 내각이 특권경제의 축소 문제를 놓고 기득권층과 충돌했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나누어 줄 수 있는 독점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역권이다. 소위 ‘와크’의 배분은 궁극적으로 김정일의 관할 사항이다.

북한에서 석탄수출 건은 내각과 군부 사이에 전통적 갈등대상 중의 하나였다. 내각은 난방 및 전력생산을 위해 석탄수출 중단을 주장해왔다. 군부는 석탄수출을 통한 외화획득을 군사비 충당의 중요 원천으로 간주해 왔다. 과거에는 석탄수출 권한이 내각, 당, 군부 등에 분산되어 있었다. … 과거 박봉주와 군부 간의 갈등 중의 하나도 석탄수출문제였다. 2005년경 박봉주는 수출 중단을 결정했고, 2006년 10월 핵 실험 이후 군부가 이를 번복했다.[박형중 외,2009:85,92]


결국 당/군의 특권경제와 내각의 한판 승부는 특권경제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당은 내각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이들의 재기 가능성까지 효과적으로 봉쇄했다.

당과 군은 경제개혁 초기 7.1조치나 시장장려에 대해 방관자적 입장이었다. 이들 권력기관들로서는 내각의 조치로 별반 이해관계가 충돌될 것이 없었고 이권개입의 여지가 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박봉주가 총리로 등용되면서 그에 대한 지도자의 신임이 증대되자 당은 내각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해 왔다. 당은 내각이 시장경제를 추진하자 반격에 나섰다.(2005) 경제개혁과 당적지도 간의 조화문제를 제기하면서 경제관리에 대한 간섭을 확대하는 한편, 개혁정책의 문제점과 내각 간부들의 비리를 조사하여 김정일에게 보고하였다. 김정일은 총리를 신임은 하나 그의 지나친 개혁속도에 의구심을 가진 상태에서 당이 내각의 ‘실정’을 잇달아 보고하자 경제개혁에 대한 입장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당은 지도자를 보다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내각의 경제정책 주도권을 회수하고 국가양곡전매제 실시, 개인 소상공업 금지 등 개혁속도를 조절하는 한편 내각을 집중 검열하여 개혁성향의 간부들을 퇴진시키고 박봉주 총리에 대한 직무정지를 유도해 냈다.(2006)

당은 경제정책 주도권을 회복하기 나서도, 경제개혁에 대한 지도자의 ‘도박사’와 같은 미련을 떨쳐버리기 위해 ‘돈벌이의 폐해’ 사건들을 부각시켰다.(2007) 당은 중국과의 ‘눅거리’(값싼) 상품 교역사건, ‘구호나무’ 벌목 밀매사건, 간부들의 시장장세 횡령사건 등을 ‘비사회주의 사건’으로 평가하고, 사회 전반에 돈벌이에만 급급한 나머지 ‘국가이익’은 안중에 없으며, 시장이 자본주의 서식장이 되고 있다고 지도자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김정일은 적극적인 ‘시장통제’를 지시한데 이어, 경제 간부들이 ‘사상의 빈곤’에 빠져있다고 비판하면서 경제관리에 ‘사회주의 원칙’을 철저히 고수할 것을 강조하였다.(2008) 당은 ‘돈벌이’를 정치 쟁점화하여 경제개혁 의제를 퇴장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2008년 하반기에 북한 경제관료들은 내각으로부터 일선 현장에 이르기까지 ‘사상투쟁’으로 분주했으며, 김정일의 와병(2008.8)으로 연기된 종합시장 단속, 뙈기밭 회수, 화폐개혁 등의 역개혁 조치들은 2009년에 강행되었다. 북한의 역사상 4번째로 시도되었던 ‘경제개혁 실험 10년’은 다시 원위치되었으며, 오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주체의 강화’ 전략에 의해 또다시 잠금장치가 채워졌다.[한기범,2010:314-5]



자 이제 앞서 살펴보았던 주장을 재검토해 보자.

그리고, 북한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고, 어느쪽이 득세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고 대외환경에 따라 강경, 온건이 득세하게 되죠. (lime)

북한 지도층 내부에 얼마간 입장이 다른 세력들이 존재하여 관료정치를 통해 '金心'을 움직여 정책을 수행해 나간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는 내용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대외환경에 따라 어떤 파벌이 힘을 얻는가가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앞선 논의에서 우리는 2004-2005년 사이의 북한 박봉주 내각의 개혁 시도가, 미국 부시 행정부 1기에 터져나온 제2차 북핵위기나 중국관헌의 양빈 체포로 무산된 신의주 특구 등을 고려하면 너무 늦게 시작되었고, 이명박 때문에 중단되었다고 보기에는 거꾸로 이미 그 몇 년 전에 중단되었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즉 대외환경이란 원인은 개혁의 시작과 좌초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반면 [한기범,2010]이나 [박형중 외,2009]는 모두 북한 내부적 원인, 즉 '본위주의'(부처이기주의)나 당정군 사이의 밥그릇 싸움을 지목하여 이 문제를 보다 매끄럽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한 대외환경 요인 대신 북한의 내부정치적 요인을 지목하는 것이 훨씬 그럴듯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내각은 당의 관여가 줄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당·군의 ‘특혜적’ 경제 사업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경제를 관리해야 했고, 정치논리의 제약 하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내각이 주도하는 북한의 경제개혁은 이 같은 구조 속에서 추진되었다. 내각으로서는 한편으로는 기회였으나,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개혁을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위기였다. 지도자가 ‘내각책임제’를 강조하였으나 경제개혁 초기에 다른 조직들과의 수평적 관계에서 내각의 권한을 확대해 주지는 않았다. 내각은 내각의 산하 생산단위들에 대한 수직적 관리책임만을 의미할 뿐이다. 내각은 ‘경제관리개선 조치’로 계획경제에 시장기제를 부분적으로 보완하도록 허락받았으나 비대한 상부 경제관리구조를 돌파하는 것은 내각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지도자는 부하의 역량을 신장시켜 주거나 일할 수 있는 조건을 개선해 주지 않고 내각에 임무를 맡겼다가 뒤늦게 그 한계를 깨달았다. 만약 지도자가 국방위원회의 역할 강화와 버금가게 내각의 능력 신장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북한의 경제개혁 실험의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한기범,2010:55]



끝으로...

김정일은 궁극적으로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만, 그 결정에 대해 결코 책임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정책결정은 해당 관련 기관이 김정일에게 제기하는 제의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제의서가 실제 정책화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김정일이다. 그런데 유일사상 10대 원칙은 ‘수령의 무오류성’을 명기하고 있다. 그 정책이 성공하면, 그 공로는 그 정책이 실행되도록 허가한 김정일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만약 실패하는 경우에는 그 제의서의 제안자가 정책실패의 책임을 지는 식의 구조이다. 제의서 체계는 의사형성과 결정, 그리고 책임의 과정을 왜곡한다. [박형중 외,2009:85-6]



참고

Allison, Graham T., Zelikow, Philip D., Essence of Decision: Explaining the Cuban Missile Crisis (2nd Ed.), New York:Longman, 1999 (김태현 역, 『결정의 엣센스』, 모음북스, 2005)
宮崎市定. 『雍正帝 : 中國の獨裁君主』. 東京: 岩波書店, 1950(1999)
(차혜원 역, 『옹정제』. 서울: 이산, 2001.)
박형중, 조한범, 장용석. 『북한 ‘변화’의 재평가와 대북정책 방향』. 서울: 통일연구원, 2009.
한기범. “북한 정책결정과정의 조직행태와 관료정치 : 경제개혁 확대 및 후퇴를 중심으로(2000~09).”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경남대학교 , 2010년 2월

by sonnet | 2010/05/31 12:09 | 정치 | 트랙백(3) | 핑백(4) | 덧글(96)
개혁개방을 권해본 중국

1980년대 전반 중국은 자국의 개혁개방을 진행하면서, 동맹국 북한에게도 개혁개방 노선을 따를 것을 여러 차례 권했다. 북한은 점차 소련 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며, 양국 지도부는 자주 정상회담을 가졌다. 중국은 북한 지도자들과 회담을 가질 때마다 응분의 원조를 제공하여 양국 관계에 기름칠을 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의 대화는 동상이몽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김일성: 우리도 중국의 개혁개방을 배워서 실시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호요방: 현 시대에서는 어떤 나라도 쇄국정책을 실시하고서는 발전할 수 없다. 하루 빨리 개방정책을 실시하되, 당신들의 실정에 맞도록 적절히 하라.
김일성: 중국은 현재 남조선과 직접 접촉을 하는데, 앞으로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호요방: 간접교역이나 국제적 체육행사 등 비공식 관계만을 유지하려고 한다. 우리가 남조선과 비공식 접촉을 한다고 해도 당신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김일성: 중국은 서울올림픽에 참가할 것인가.
호요방: 아직 검토 중이다.
조자양: 당신들이 개방정책을 실시한다고 말했듯이, 우리는 이를 하루 빨리 실시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본다. 현 정세 하에서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경제건설에 치중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김일성: 우리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남조선이 먼저 북침을 한다면, 중국은 우리를 지원해 주겠는가.
조자양: 남조선은 미국의 동의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다. 우리가 미국과 손을 잡고 있는 한 북침은 없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만약 남조선에서 먼저 북침한다면, 지원군을 보내겠다.
김일성: 우리가 제안한 3자회담에 대해서 미국과 협의해 보았는가.
조자양: 미국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3자 회담에 응하도록 종용했으나 미국이 응하지 않고 있다. 우선, 남북 직접대화를 하는 것이 좋으리라 보는데, 당신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김일성: 평양에 돌아가 충분히 검토하겠다.

‘김일성 중국방문시 호요방-조자양과의 대담기록’, 1984년 11월 27일 [오진용,2004:152-3]

이처럼 중국은 북한보고 개혁개방을 하라고 거듭 권하지만, 북한은 개혁개방보다도 남북경쟁이나 안보문제에 관심이 있는 것이 역력했다. 이런 분위기는 반 년 후의 다음 정상회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최근에 와서, 우리가 소련과 교류비행(상호방문비행)을 하고, 소련의 고위층이 북한을 방문하는 등 소련과의 관계 긴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중국에 대한 혈맹관계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으니, 이 점 이해하기 바란다. 또 나진항을 소련에 조차해 주었다고 하는데, 유사시에 사용하도록 한 것이지, 평상시에 소련군을 주둔하도록 한 것은 아니다.
호요방: 우리는 오해도 우려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소련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환영하고 있다. 북조선도 군사비를 축소하고, 경제건설에 힘써 줄 것을 우리는 바라고 있다.
김일성: 우리도 중국 측 의견에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미국에 의해서 남조선에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고, 북침 준비훈련(팀 스피릿 훈련)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군사력 증강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남조선에서 북침 준비훈련을 아니하고, 군비를 먼저 축소한다면 우리도 병력을 감축할 용의가 있다.
호요방: 미국에 의한 북침은 없을 것이다. 경제건설에 치중하도록 하라. 그래야 앞으로 남북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다.

“호요방의 신의주 방문시 김일성-김정일과의 대담”, 1985.5.4. [오진용,2004:185]

김일성이 소련 카드를 슬쩍 흔들어 보이지만, 중국은 꾹 참고 그런 건 괜찮다며 계속해서 개혁개방과 경제건설을 주문하고 있다.


1983년 후계자로 공인된 김정일이 처음으로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덩샤오핑이 직접 나서서 젊은 김정일에게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얻은 경험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중국의 특성은 낙후되고, 가난하고, 지방은 넓고, 인구는 많아서 매우 복잡하다는 점이다. 어떤 한 가지 문제를 처리할 때, 어떤 경우에도 최소한 천만 명 이상 1억의 인구가 관련이 된다. 예를 들면, 1978년 11월 우리가 우선 농촌 문제를 처리하려고 할 때, 농민 문제는 전국 인구의 80% 이상이 관련된 문제였다(그러니 얼마나 복잡했겠는가). 그러나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실천을 통해서 증명이 됐지만, 우리가 처리한 농촌 문제는 거의 완벽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같은 의미에서 노동자 문제, 간부 문제, 지식인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노선이나 정책적인 문제에서 좌우의 주장이 서로 부딪히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떤 때는 서로 싸우기까지 했다.
이번 인민대표대회에서 보고한 정부공작보고에서도 기본건설 투자항목 문제도 처리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우리는 지방의 입장만을 고려할 수만은 없다. 단지 지방의 입장만을 생각한다면, 국가가 계획적으로 추진하려는 큰 사업들은 모두 돈이 없어서 추진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여러 분야에서 많은 문제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지속적으로 정책을 조정해야 하고 이들 정책들의 결과가 다른 연관분야에 미치는 영향을 잘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지금 우리의 노선, 방침, 정책은 모두 정확하게 추진되고는 있지만, 아마 이후에도 우리는 실수를 할 것이며, 다시 한번 과오를 저지르는 일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두 가지 큰 일에 모든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하나는 경제계획을 잘 처리해서 4개 현대화의 핵심 문제를 ‘실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간부들을 점차 청년화(靑年化)하고 지식화(智識化)하는 문제이다.

등소평은 이처럼 중국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겪는 문제들을 얘기했다. 등소평의 말 속에는 젊은 김정일에게 하고 싶은 간곡한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개혁·개방에 관한 문제보다는 중·북한 양국관계에 더 관심을 보였다. [오진용,2004:103-4]


좋든 싫든 간에 북한은 대규모 원조를 제공하는 주요 동맹국 중국의 거듭되는 요구를 딱 잘라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북한은 개혁개방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합영법을 만들고, 중국에 개혁개방을 따라하기 위한 대규모 시찰단을 보내기 시작했다.

1983~85년 동안 북한에서는 중국의 개방정책 현장 학습을 위한 대규모 시찰단을 계속해서 파견했다. 그 규모는 대단했다.[65] 중앙의 당·정부 차원은 물론이고, 각 도(道) 그리고 시(市)와 기업소의 행정간부들에게까지 ‘중국을 배우자’는 열기가 확산되었다. 심지어 청년 친선참관단 500명을 세 팀으로 나누어서, 중국의 11개 도시를 돌며 기업의 현장을 참관했다.[66] … 1985년까지 이런 식의 ‘중국 따라배우기 운동’은 계속됐다. 그러나 실제 북한의 개혁 조짐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고, 대외개방은 계속 겉돌고 있었다.

[65]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1983~85년의 기간 동안 북한의 각 분야 실무자들 5천 명 이상이 중국의 개혁·개방 도시와 기업의 현장을 시찰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66] 1985년 8월 23일부터 9월 10일의 기간 동안 북경방송과 평양방송은 연일 이 참관단의 활동을 보도했다.[오진용,2004:110]


이처럼 언뜻 보기만 해도 북한의 움직임이 상당했기 때문에 외부 관찰자들은 북한이 중국을 따라 개혁개방을 시도할 지 많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 움직임을 끌어내기 위해 공을 들였던 중국은 북한 지도자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중국은 일찍부터 북한이 중국식 ‘개방’을 따라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북한의 젊은 지도자 김정일의 행동에 대한 평가와도 관련이 있었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의 경직된 ‘주체사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점과 개방 이후 나타나는 북한 사회의 다양한 변화에 대해서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의 지도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호요방은 1984년 7월 5일 중국을 방문한 미야자와 기이치 전(前) 일본 외상을 면담한 자리에서 북한의 개방을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큰 노력을 하지 않는 한, 발전은 없어 보인다. 김일성, 김정일이 다같이 중국이 취하는 개방정책과 경제활성화정책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부터 찬양하고 있다. 그 예로 북한은 각 도(道)의 최고 책임자 50명을 중국에 보내 상해 등 주요 도시를 시찰시킨 바 있다. 그러나 중국의 개방정책을 북한이 자국 내에서 실시할지 여부는 솔직히 호요방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평가했다.[67]

[67] “1984년 7월 6일자, 교도통신의 보도. 1984년 7월 5일 북경발 지지통신의 보도. 북한이 계속 대규모 시찰단을 중국의 주요 개방 도시로 파견해서 많은 기업현장을 직접 시찰하도록 하고 있으나, 북한이 중국식 개방을 답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중국의 대다수 실무자들도 상당히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호요방의 이런 의문은 중국 측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다.[오진용,2004:110-1]


북한의 개혁 시도(혹은 시늉)은 오래 가지 않았다.

호요방의 북한에 대한 이런 평가는 정확했다. 김일성은 일본잡지 《세카이》(世界)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절대로 외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외자를 받아들여 경제를 건설하면, 예속경제가 되고 맙니다. 나라의 정치 독립뿐만 아니라, 경제 독립도 중요합니다.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에 예속되면, 정치적으로 예속됩니다. 우리는 경제건설에서 외자를 받아들여 단번에 높이 뛰어오르려 하지 않으며, 자체의 힘으로 한 단계 한 단계씩 톱아(높이) 오르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68]

[68]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일본 정치리론 잡지 《세카이》(世界) 편집국장이 제기한 질문에 주신 대답”, (1985.6.9) 《근로자》, 1985년 8월호, pp.15-16.[오진용,2004:111]

이 수령의 선언이 '합영법'을 만들고 1년 만에 나온 이야기라는 것을 기억해 두자.


일전에 김정일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뒤따를 수 있을 것인가?란 글에서 '박철 사건'이란 것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사건이 바로 이 때 벌어진 일이다.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북한 농업과학원 연구원으로 지내다 숙청되어 탈북한 이민복은 1980년대 중반의 '박철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85년 당시 과학원 지질학연구소 실장이었던 박철은 식량난 타개책으로서 ‘농장포전 개인책임관리제’라는 논문을 작성하여 중앙당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인 즉 간부를 포함한 전농장원의 개개인에게 논밭을 맡겨서 생산관리를 행한다는 것이다. 이 제안은 중앙당의 과학담당비서 김환, 농업담당비서 서관히, 정무원총리 강성산 등을 비롯하여 북한 지도부 내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군급 이상 농업간부들의 토론에서도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철의 제안으로 시작된 일련의 움직임은 김일성의 주체 농법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혹독한 비판을 받고 주요 관련인사가 처분되거나 사상투쟁의 대상이 되어 사라진다. 이후 누구도 감히 자영농 지향의 농업개혁을 건의하지 못하였다.

박철 사건 직후 김일성은 본인 명의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여기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제도는 섰으나 사회주의건설이 완성되지 못하였으며 착취제도는 청산되었으나 자본주의 복구의 위험이 남아있는 그런 사회는 완전히 승리한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면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한 처방으로 ‘협동적 소유의 전인민적 소유로의 전환’, ‘인민정권의 강화’, ‘사회주의 제도의 공고화’ 등의 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박철과 같은 제안을 봉쇄함과 동시에 당시 중국이나 소련의 농업개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박철이 이런 제안을 내놓고, 북한 간부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소개한 시대적 배경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전국에서 5천여 명의 간부를 중국에 보내 개혁개방을 시찰시키면서 뭔가 개혁에 대해서 말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일시적으로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다음과 같이 이 싹을 잘라버렸다.

이 점은 1985년 중국식 가족도급제와 농가생산책임제 도입을 주장하다 비판받고 숙청된 농업연구사 ‘박철 사건’에서 드러났다. 당시 박철의 행동을 제때에 저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 경제 담당 비서였던 김환은 정무원 부장으로 강등되었고, 비슷한 견해를 보인 당선전선동부 부부장도 비판을 받고 전보조치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북한 문헌들은 박철이 일부 사회주의 나라의 ‘개량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난하고 있다.
1980년대 중엽 일부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는 … 경제분야에서부터 개혁·개편하는 길로 나갔다. 농촌경리부분에서는 가족을 단위로 하여 생산수단을 나누어주고 세대도급제를 실시(하였다) … 우리의 일부 일군들 속에서도 다른 나라에서 실시하는 경제개혁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세우지 못하고 그에 동조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주체의 사회주의 경제관리방법을 옹호관철하는 문제는 단순한 경제실무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제도를 고수하는가(하는) … 심각한 정치적 문제였다. 김정일 동지께서는 1986년 7월 15일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하신 력사적인 담화에서 … 가족단위로 생산수단을 나누어 주고 도급제를 실시하게 되면 그것이 자본주의적 요소를 낳게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고 확언하시었다. … 농촌기술혁명이 진척되어 농업생산력이 높아진 우리나라에서 가족을 단위로 도급제를 실시하려는 것은 … 봉건말기의 분산적인 소농경리에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시며 우리는 사회주의적 농업협동경리로부터 소규모적인 개인경리로 뒷걸음 칠 것이 아니라 농촌경리를 집단주의적 경리에로 진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시었다.

이상의 인용문은 당시 경제개혁 의제가 단순히 효율성과 생산성 등 경제실무적 시각에서만 고려할 수 없는 정치적 문제임을 시사한다. 사회주의를 고수하기 위해 중국발 경제개혁 의제가 여전히 정치적 통일·단결의제에 종속되었음을 의미한다.[한기범,2009:92]

위 인용문의 출처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김정일동지 전기 2권』(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3), 468-469쪽. 즉 박철을 때려잡은 것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업적으로 홍보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북한이 2004년에 북한이 몇몇 협동농장에서 분조담당제를 실험한 것을 갖고 북한이 "개혁 개방을 할 의지가 그들에게 확실히 있었다"며 "햇볕의 통찰과 같이 북이 행동해 오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이런 것은 1980년대에 북한이 보여준 시도의 재탕이거나 그보다도 못한 사소한 제스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떡밥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는 풍조는 끊이지 않고 있다. 조지 케넌은 60여 년 전에 이미 이런 문제점을 통렬하게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러시아/소비에트만 북한/북한정권으로 바꿔 읽으면 변한 게 하나도 없음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가 우리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그들 정책의 하나 둘 쯤은 일시적으로 뒷방에 쳐넣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미국인들은 벌떡 일어나 "러시아가 변했소"라고 신나게 선언한다. 그리고 그 중 어떤 이들은 그러한 "변화"를 가져온 데 대한 공적을 챙기려고 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전술적인 행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소비에트 정책의 그런 특성들은 그들이 기원한 공리처럼 소비에트 권력의 내적 본질로 볼 때 당연한 것이며,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든 뒤로 감추어져 있든 간에 소비에트 권력의 내적 본질이 바뀔 때까지 우리와 계속 함께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러시아를 상대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이 정해진 날까지 우리 사회를 전복시키기 위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식 사업에 이미 뛰어든 상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Kennan,1947]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도자가 중국을 시찰한다거나, 몇몇 해외시찰단을 보내고 교육을 받는다든가 하는 에피소드들은 북한이 진짜로 개혁개방에 나선다는 것을 전혀 담보해주지 못한다. 이런 노이즈를 걸러내고 진정한 추세 변화를 포착하려면 좀 더 장기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전례를 돌이켜 볼 때, 보다 믿을만한 증거는 중기적(4~6년)인 변화 추세인 것 같다. 북한이 돌이킬 수 없는 개혁개방을 궤도에 올렸다는 것을 확인하려면 이 정도 기간을 잡아 덩샤오핑의 중국, 혹은 고르바초프의 소련 등이 추진한 변화와 비교하는 방법을 통해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Kennan, George F., The Sources of Soviet Conduct, Foreign Affairs, July 1947
오진용. 『김일성시대의 중소와 남북한』. 서울: 나남, 2004.
한기범. “북한 정책결정과정의 조직행태와 관료정치 : 경제개혁 확대 및 후퇴를 중심으로(2000~09).”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논문, 경남대학교 , 2010년 2월
by sonnet | 2010/05/28 10:48 | 정치 | 트랙백(2) | 핑백(3) | 덧글(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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