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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김영삼
2009/11/24   4자회담의 최후 [185]
2007/06/18   선거 후 파티 [13]
2007/03/29   큭 겁먹고 뒈졌군 [28]
2007/01/11   YS와 핫라인 [9]
4자회담의 최후
제 미발표 원고의 일부인데, garry씨가 하도 평화회담 평화회담 하면서 노래를 부르기에 해당 부분만 잘라서 답하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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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4월, 클린턴과 김영삼은 제주에서 정상회담을 갖는다. 두 정상은 공동발표문[1]을 통해 "한반도에서 안정되고 항구적인 평화를 확립하는 일은 한국인의 과제"이며 "남북한이 주도"해야 하므로 "미국과 북한간의 별도 협상은 고려될 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4항)하고, 대신 한미 양 국은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남한, 북한,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의(5,6항)한다. 이 회담은 현재의 정전협정을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래 반 세기 전의 휴전협정은 단순히 전투행위를 중단할 뿐이고 주요한 정치적 문제들은 이후 개최될 평화회담에서 다루어지기로 되어 있었다. 이런 회담은 1954년에 한 번 개최된 적이 있는데 바로 결렬되고 말았었다. 북한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끈질기게 미국과의 양자협상을 통한 평화회담을 요구해 오고 있었다. 이제 제네바 기본합의를 통해 핵문제도 일단 봉합해 놓았고 하니 뭔가 변한 점이 있는지 북한의 진의를 탐색해 볼 기회였다.

이리하여 수 차례의 실무접촉과 예비회담을 가진 후, 1997년 12월부터 제네바에서 제1차 4자회담이 개최된다. 이 회담에서 북한은 오로지 미국과의 협상과 주한미군 철수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미국은 주한미군 문제는 "상호 안보동맹에 기초해 한미간에 결정될 사안이지 다른 나라와 협상할 문제가 아니"라고 일축했다. 한국과 중국도 이런 북한의 태도에는 부정적이었다. 북한 측 수석대표 김계관은 "적들이 단합되어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합의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로 그들의 관점을 잘 요약했다.[2]

결국 4자회담은 여섯 차례의 회담을 통해 변함 없는 북한의 옛 모습만 확인하고 끝나 버렸다.
북한은 4자회담 참석 후 한·미·중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의제를 제기해 회담 자체가 무용하도록 만들었다. 한·미·중은 평화체제가 수립되기 전까지는 현재의 정전체제가 유지되어야 하고,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을 위해 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쉬운 것부터 논의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소의제를 먼저 정하고, 소의제에는 주한미군 철수, 미·북 평화협정 문제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며, 분과위원회를 구성한다고 해도 사전에 미·북 문제를 협의할 수 있다는 점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3차 본회담에서 분과위 구성에 합의했으나, 이후 북한의 주장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북한은 처음부터 4자회담에 진정성이 없었다. 2차 본회담 북한 차석대표인 이근은 사적인 자리에서 한국대표에게 “우리가 이번 4자회담의 판을 깰 텐데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마라.”고까지 언급했다.
4자회담에 참석한 바 있는 한국 실무대표는 “북한은 기본적으로 ‘4-2’ 방식을 고수했다. 중국은 한·미에 대단히 동정적이었다. 그리고 예비회담에서는 우리를 지지하는 적극적 자세를 보였으나, 막상 본회담이 진행되자 북한의 주장에 막혀 별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중국은 1999년 8월 제6차 본회담의 의장국을 맡았다. 중국이 마련한 한반도 평화협정 초안에는 한·미가 선호하는 ‘군사적 신뢰구축’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의 비토로 결국 누락되었다. 북한이 북·미 양자협상 채널을 여전히 최우선시함에 따라 4자회담의 효용성은 소실되었다. 결국, 우리는 4자회담에 대한 기대를 접고 남북대화 추진 쪽으로 선회했다.”라고 회고했다.[3]

북한은 늘 한반도 평화체제를 원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4자회담은 아주 좋은 틀이었을 것이다. 남북합의의 이행을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이 보증해 주는 것이기에, 혹여 미국이나 남한이 북한을 속이려 할 경우에는 중국이 이를 견제해 줄 것이었다. 하지만 4자회담의 결렬을 통해 우리가 재확인한 것은 그들은 미북 양자회담과 미군철수를 원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1] 한미정상회담 공동발표문, 1996년 4월 16일
[2] Downs, Chuck., Over the Line: North Korea's Negotiating Strategy, AEI press, 1999
(송승종 역, 『북한의 협상전략』, 한울, 1999, p.391)
[3] 최명해, 『중국·북한 동맹관계: 불편한 동거의 역사』, 오름, 2009, pp.393-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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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의 … Garry's comment(6).

힐러리는 평화협정을 북과 체결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6.25가 종결되는 것이니 자연히 미군 재배치와 남북의 군비통제가 딸려 나오고, 그럼 남북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해야 하니 이미 6.15에서 정의한 '남북은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 한 2국가 2체제의 남북연합까지 논의가 딸려 나오는 것이 당연한 논리적인 수순인 것입니다.

임동원은 빠르면 내년부터 남북연합에 대한 남북미중러의 논의가 시작될테인데, 이때에 분단의 고착화로 가지 않으려면 남북이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출처)

흐흐.. 굴비두름처럼 사건이 딸려 나오는게 꼭, 우리 삼촌이 돈을 벌면 나에게 사업자금을 꿔 줄 것이고, 사업자금만 있으면 난 가게를 차릴 텐데 장사를 하면 물건은 날개돋힌 듯이 팔릴 것이고, 그래서 돈이 생기면 집을 살건데, 또 그 집 값이… 하는 패턴이로구만요.

꿈은 꿈일 뿐이고… 위에서 제가 정리한 것처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한 다자논의를 시작하면 북한과 나머지 모든 나라들의 입장이 상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거야 두말할 나위 없이 북한이 억지를 쓰기 때문이죠. 북한이 억지쓰는게 어디 어제 오늘의 일입니까?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남북이 같은 소리를 내야 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건 일방적으로 남한이 북한 입장을 맞춰 따라갈 때나 가능한 겁니다. (만약 북한이 남한 입장에 맞춘다면 모두의 의견이 크게 차이나지 않을테니 사실 남북한이 입을 맞출 필요도 없는 셈)
by sonnet | 2009/11/24 12:15 | 정치 | 트랙백 | 핑백(4) | 덧글(185)
선거 후 파티
다음은 36년 전인 1971년 7월 9일, 윌리엄 포터 주한 미 대사가 국무부에 보고한 기밀(해제) 전문인데, 한국 정치에 있어서의 미국 대사의 영향력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뒤집어 말하면 미국 대사가 한국 정치가 돌아가는 얼개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오래 된 사건이지만 이 모임의 멤버였던 YS와 DJ(그리고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동세대라고 할 수 있는 JP) 등은 바로 얼마전까지도 현역으로 한국 정치를 주무른 실력자들인 만큼, 사실 그렇게 옛날 이야기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얼마 전에 소개했던 릴리 대사의 회고와 연결해서 생각해 보셔도 재미있을 법 하다. 87년은 대충 현재와 이 사건이 있었던 71년의 중간쯤 되는 시기인데, 그때 미국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선거 후 파티: 또는 신문발행인이 한국 같은 풍토에서 살아남는 지름길

“얼마 전 대통령 선거 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고뇌에 대해 한번 언급한 적이 있다. 『동아일보』의 선거 보도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학생들과 중앙정보부가 동시에 『동아일보』를 공격해 댔을 때의 일이다. 물론 학생들의 위협이 덜하긴 했지만, 『동아일보』의 발행인 집안이 고려대학교에 지원금을 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학생들이 『동아일보』를 위협했던 것은 보다 공정하고 균형 잡힌 보도를 해달라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동아일보』는 공정 보도에 가장 근접해 있는 언론이며, 따라서 김상만 발행인이 선거 이후 중앙정보부와 빚게 될지도 모를 마찰을 사전에 방지해보려는 것은 충분히 수긍과 동정이 가는 일이다.

선거가 끝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발행인이 편집국장을 통해 내게 그의 걱정거리를 전해 왔다. 정부와 대립한 것 때문에 선임 편집위원을 교체하라는 압력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내가 의아해 하자,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면서 예를 들어주었다. 김상만 발행인의 메시지를 내게 전달해 준 바로 그 편집국장이 사실은 이보다 덜 심각한 이유였는데도 2년간이나 런던에 쫓겨나가 있었다는 것이다. 발행인은 이런 일로 내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가 꼭 알고 싶어하는 것은, 선거도 끝나고 해서 서울 근교에 있는 발행인 별장에서 작은 모임을 마련했는데 혹시 내가 참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김상만 사장은 그 모임에 몇몇 정치인들을 초대하겠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이 오는가? 내가 궁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편집국장이 명단을 꺼내놓았다. 이후락, 정일권, 김성곤, 김대중, 이철승, 김영삼, 『동아일보』 선임 편집자 2명.

아하, 무슨 말인지 이제 알겠다. 멋진 파티가 되겠는데. 당신 보스는 정말 기가 막힌 사람이다. 국회가 열리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서로 상대방 선거 운동을 비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동아일보』의 보도) 이 초대를 받아들이리라는 것을 발행인은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단 말인가? 편집국장은 내가 이해해 줄 것 같아 솔직하게 말하겠다면서, 다른 손님들에게는 내가 초대하는 것으로 알리겠으며 각자에게 다른 손님들 명단도 다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단정적으로 말하기를 ‘한국인을 이해하신다면’ 이 파티의 참석률은 분명히 100%일 것이라고 했다. 나는 김대중 씨는 자동차 사고 후에 아직도 병원에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편집국장은 그도 올 것이라고 선언하듯 말하면서, 이후락 씨가 온다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중앙정보부의 부장님이신데,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나요? 그럼요, 편집국장의 대답이었다. 그러면, 이후락 씨가 전에도 김 사장의 별장에 갔었나요?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올 겁니다. 그런 걸 좋아할 겁니다. 부인들도 초대하나요? 물론 아니지요. 한국 남자들은 부인이 옆에 잇으면 마음놓고 쉬지를 못합니다. 어어? 그렇다면 이 소모임은 결국 ‘미국’ 대사가 만드는 게 되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만약 이후락 씨가 참석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선거기간에 당신이 쓴 사설 때문에 『동아일보』가 매질을 당하지는 않게 된다는 걸 뜻하는군요. 저희 사장님 생각이 바로 그겁니다. 나는 대답했다. 좋습니다, 가지요.

나는 『동아일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선 나는 김상만 발행인을 좋아했고 또 하나는 한국인의 심리전이 펼쳐지는 모험의 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파티는 취소되는 것인가요? 전부 오겠다고 할 겁니다. 재미있을 거예요.

편집국장은 이틀 후 내 사무실에 다시 왔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잘 되었다는 것이었다. 병원에 있는 김대중 씨나 이후락 씨도 다 참석한다는 겁니까? 물론이지요. 다른 참석자의 명단을 보고 나더니 단 한사람도 참석하지 않겠다는 말은 안 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발행인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부인들은 초대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부인들은 아닙니다. 그 대신, 여자들은 올 겁니다. 호, 여자라? 그렇다면 산기슭에서 기생들을 희롱하며 노는 것이란 말인가? 아니요, 기생은 아닙니다. 김상만 사장이 텔레비전 여배우들을 좋아하지요. 하지만 그 여자들은 파티에서 접대만 할 겁니다. 몇 시에 시작하나요? 오후 다섯 시부터입니다.
자, 이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김상만 발행인이 이후락 씨를 잠깐 어리둥절하게 만들기 위해 정교하게 짜여진 한국판 시나리오에 내가 출연하는 것이다. 결과? 누가 알겠는가! 어쨌든 좋다. 다들 참석하게만 된다면 흥미진진할 것이다.

6월 2일 편집국장과 나는 덕소로 향했다. 덕소는 발행인의 별장이 있는 곳이다. 우리는 서울 남쪽의 산자락을 50분 가량 달려서 한 기차역 앞에 섰다. 아주 평범한 간이역이었다. 역 앞에는 놀랍게도 미니스커트 차림을 한 여덟 명의 젊은 아가씨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편집국장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여기서 파티를 하는 겁니까? 저 여자들은 누구인가요? 나는 그들이 발행인의 별장에 갈 차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차 문을 잠그면서 저 여자들을 우리 차에 태우면 안 된다고 말했다. ‘갑시다.’

그때 『동아일보』의 선임 편집위원인 미스터 리가 역 안에서 더 많은 아가씨들을 데리고 나왔다. 그는 차로 다가오더니 이 아가씨들을 태우고 온 미니 버스가 고장이 나서 꼼짝 못하고 있으니 아가씨들을 좀 태워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편집국장에게 안 된다고 거절했다. 파티 장소에 카메라 기자들이 있을 텐데, 『동아일보』가 아가씨들을 (역에) 그냥 두고 왔다고 비난을 받든 말든 어쨌든 내가 같이 별장에 도착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편집국장은 그렇게 하겠다면서 별장에 도착해 위스키를 좀 마시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고 말했다. 도대체 아가씨가 몇 명이나 이 잔치에 동원되었느냐고 묻자, 편집국장은 정확한 인원은 모르겠지만 꽤 많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 미니스커트 아가씨들과 동승을 거절한 것은 잘 한 일이었다. 5분여 후 산자락을 따라 잘 다듬어진 잔디밭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카메라맨들이 사진을 찍어댔다. 그날 행사의 초청자인 김 발행인과 악수를 나누자마자 편집국장은 대사가 역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 아가씨들과 동승하길 거절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발행인과 정일권·이후락·김성곤·김영삼 씨 모두가 걱정을 하면서 운전기사들에게 빨리 가서 아가씨들을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다채롭고 흥미로운 세 시간이었다. 날씨도 좋았고, 아담하면서 보석 같은 한국식 집도 정다웠으며 접대 또한 융숭했다. 박 대통령의 측근 참모들을 비롯해 그곳에 참석한 김대중 씨 등은 불과 얼마 전의 선거에서 서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 자제해가며 술을 한잔씩 나누고 화기애애하게 한자리에서 어울렸다. 그런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내게 무척 유익한 기회였다. 그들은 정치 이야기를 나누었고, 몇몇씩 모여 그룹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파티 도중에 잠시 동안이기는 했지만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경호원들이 기자들을 쫓아내는 자그마한 소란이 있었다. 그들은 『중앙일보』 기자들이었다. 평소 지시에 따라 경호원들은 기자들에게 주먹세례를 퍼부으면서 발길질을 해댔고, 기자들은 빈 포도주 병으로 위협을 받고 나서야 언덕 아래에 쫓겨 내려갔다. 손님들은 계속해서 파티를 즐겼다. 이튿날 『중앙일보』는 파티가 끝난 뒤 허섭쓰레기만 남은 별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이날의 파티 모임을 헤드라인으로 장식했다.

밤 9시, 김상만 발행인과 이후락 씨는 서로 얼싸안았다. 나는 이 모습을 지켜본 다음 참석자들에게 전원의 이 목가적인 풍경과 이별할 때가 되었으니 나는 이만 자리를 뜨겠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듣더니 참석자들은 모두 당황해 했다. 이 산 언덕 위의 어둠 속에 자기들만 남겨놓겠다는 것이냐고 농을 하면서 가지 말라고 나를 붙들었다.

정일권 전 총리가 한국식 해결책을 제시했다.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대사의 말에는 동의하지만, 만약 대사가 혼자 집으로 돌아간다면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이 저녁을 즐기기가 정치적으로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신민당 사람들도 모두 이에 동의했다. 정일권 총리는 논리적이고 건전한 유일한 해결책은 우리가 모두가 함께 유명한 요정인 청운각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고 말했으나 그들은 같이 가자고 강권했다. 나는 결국 품위를 지키는 선에서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이후락 부장은 고맙다면서 ‘이후 진행될 파티는 포터의 평화 파티’라고 선언(?) 했다.

1시간 10분 후 나는 기생집에 와 있었다. 장소는 청운각이 아니라 이후락 부장의 사무실 근처에 있는 다른 요정이었다. 별장에 같이 있었던 아가씨들은 우리와 동행하지 않았다. 사실은 나중에야 몇몇 사람들이 아가씨들 얘기를 해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아가씨들은 아무런 교통편도 없이 그냥 별장에 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가씨들 문제 때문에 우리 파티가 방해를 받지는 않았다. 다음날 아침 『동아일보』의 신문 배달 트럭이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이튿날 『중앙일보』는 별장의 모임이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며, 성숙한 한국 정치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썼다. 나도 이 말에는 100% 동감이다.



첨부: 중앙일보 보도 기사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후 처음으로 여야의 정치 지도자들이 모인 이날 회동은 6월 5일 미 의회 증언을 위해 워싱턴으로 가는 포터 주한 미 대사의 환송식을 위해 한 일간지 발행인이 덕소에 있는 자신의 빌라에서 주선한 것이다.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이날 모임은 오후 6시에 시작하여 오후 8시 30분에 끝이 났으며, 새 임기의 국회 운영이나 여야 화해를 위한 심각한 얘기가 오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한 참석자는 이런 류의 모임은 솔직하고 흉금을 털어놓는 대화의 통로를 넓히는 기회가 되어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이번 모임은 여야간의 향후 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괄목할 만한 이정표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날 모임은 참석자 전원이 가까운 참모들이나 동료들조차 모르는 가운데 비밀리에 추진된 회동으로, 모임에서 오간 대화 내용의 정확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김 발행인: 이 모임을 주선한 목적은 본국에 가는 포터 대사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한 가지 목적에서입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포터 대사: 여야 지도자들과 함께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김성곤: 제 얼굴은 원래 까맣습니다만, 얼굴들이 타신 걸 보니 선거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 짐작이 갑니다.
김대중: 김 의장께서는 선거구에 자주 가시지도 않았으면서 당선이 되셨는데, 무슨 비결이 있으십니까?
김성곤: 저야 현역으로 계속 활동을 하고 있었으니 그렇다 치고, 이철승 씨는 현역에서 10년이나 물러나 있었는데도 큰 표 차이로 당선이 되셨으니, 이거야말로 오래된 비법을 다시 살려 내셨다는 걸 말하는 것 아닙니까?
김영삼: 저 개인적으로는 이효상 국회의장이 낙선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아마 지역주의를 거론하신 것이 악재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김성곤: (사진을 찍으면서) 김대중 씨 손에 붕대가 감겨 있는 걸 보면 누구나 오늘이 몇일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굳이 사진에 날짜를 집어넣을 필요는 없겠습니다(모두 웃음).
김 발행인: 국민들이 오늘 모임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우리 정치에서도 오래 지속되기를 바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후락: 저는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오늘 모임에 대해 한마디 할 것이 있다면, 음식이 아주 맛있다는 겁니다.
김대중: 오늘은 모든 것이 신선해 보입니다. 특히 이 시골 풍경이 좋습니다.
김성곤: 자 신선한 정치를 위해 건배합시다.
친밀감 넘치는 대화는 오후 8시까지 계속되었고, 이후 모두 서울 시내로 떠났다. 2차 모임은 시내 모처에서 마련되었는데, 신민당 인사들은 정중히 거절하고 각자 행선지로 향했다. (틀렸음) 선거 후 여야 지도자들의 처음 만남인 이날의 회동을 누가 제안했는지가 흥미로운 점이나, 김 발행인이 먼저 결정한 것인지 혹은 포터 대사가 초청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자문을 해서 이루어진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김종필 씨도 초대를 받긴 했으나 이날 모임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는 이흥환, 『미국 비밀 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 삼인, pp.186-192 이다.

참고로 인터넷 상의 다른 곳에서도 이 텍스트의 번역본을 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신동아, 오마이뉴스(1), 오마이뉴스(2) 등.
by sonnet | 2007/06/18 15:54 | 정치 | 트랙백(1) | 덧글(13)
큭 겁먹고 뒈졌군
지난번 글 레이건 대 고르바초프(1987)에서 여러 분들이 'YS와 김수령이 만났더라면'이란 가능성에 대한 언급을 해 주셨는데 거기에 대해서라면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이 난다.

김영삼 대통령도 김일성 사망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론이 있었다. 김일성을 만나고 온 후 카터는 김일성이 건강해 보이더라고 말했지만, 김 대통령은 나이 80이 넘으면 건강하다가도 갑자기 쇠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바로 그의 부친의 일이었다. 김일성이 굳이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정상회담을 앞둔 심적 부담이 노쇠한 몸에 치명타를 가했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김일성은 김영삼 대통령을 맞대면하는 것이 두려워 죽었다는 것이었다.
[20]. 전직 한국 관리와의 인터뷰(2001)

Witt, Joel S., Poneman, Daniel B., Gallucci, Robert L.,
Going Critical: The First North Korean Nuclear Crisis, Brookings Institution, 2004
(김태현 역, 북핵위기의 전말: 벼랑 끝의 북미협상, 서울, 모음북스, 2005, pp.312)

불현듯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는 것은 저 03스러움의 포스인가.
by sonnet | 2007/03/29 16:09 | 만담 | 트랙백(1) | 덧글(28)
YS와 핫라인
1차 북핵협상을 주제로 한 당시 미국 협상대표 갈루치의 회고록에는 YS에 대한 묘사가 가끔 나온다. 전형적인 유형은 다음과 같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처음부터 카터의 방북이 대북압력전략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카터의 CNN인터뷰로 그가 걱정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고 불쾌해했다. 게다가 김 대통령은 그가 가장 싫어한 일, 즉 한국이 뒷전으로 밀리는 일이 또 다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바로 워싱턴에 전화를 걸었다. 갈루치가 기자회견할 때 남북대화를 언급하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 통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 대통령이 화가 나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다는 것을 미국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터 전대통령이 상황을 기정사실로 만들기 전에 빨리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한국과 상의할 시간이 없었다고 해명성 전화를 했다. 다행이 이것이 통했다. 그리고 백악관과 청와대에 핫라인을 설치하여 양국 정상이 언제든지 보안통화가 가능하도록 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처음 사용하려고 했을 때 이 핫라인은 고장이 났다고 한다.)

Witt, Joel S., Poneman, Daniel B., Gallucci, Robert L.,
Going Critical: The First North Korean Nuclear Crisis, Brookings Institution, 2004
(김태현 역, 북핵위기의 전말: 벼랑 끝의 북미협상, 서울, 모음북스, 2005, pp.283)

by sonnet | 2007/01/11 10:59 | 만담 | 트랙백(1)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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