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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기독교
2007/08/31   소중화 모델 [29]
소중화 모델
어떤 문물이 원산지에서 해외로 전혀진 후, 오랜 시간이 흘러 본국에서는 변형되거나 소멸되었지만 그 문물을 받아들인 곳에서는 원형 그대로 잘 보존, 계승, 발전되어 세상 사람들의 찬탄을 금치 못하게 되는 일이 가끔 있다. 상국의 도가 쇠함에 편벽한 육왕을 따르는 무리들이 일어나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더란 말인가?


19세기 방식을 따르는 한국 기독교계(Koreans followed 19th-century model)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아프가니스탄에 갔던 한국인들은 주로 미국에서 만들어진 19세기 선교 방식에 따라 활동했다고 시카고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챤 센추리」의 편집장 데이비드 하임은 말한다. "미국 교회들은 전세계로 진출해서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키려고 하다가 한 세기 동안 비판을 받은 후 대부분 그러한 비판에서 교훈을 얻었습니다. … 남한 교회들은 독자적으로 일을 벌이는 오래된 독립 선교사 방식에 따라 활동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이런 식으로 일하는 미국의 주류 교회는 별로 없지요. 현지의 교회와 현지 신도들과 파트너쉽을 맺고 작은 팀을 파견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보다 협력적입니다."
50년대와 60년대에 서방의 주류 개신교계는 개발도상국의 다양한 독자적 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해외에서의 사회-정의란 대의명분 하에 활동했다. 그러나 오직 초청을 받고, 현지인들과 대등한 파트너쉽을 맺은 곳에서만이었다.

Robert Marquand, With Taliban's release of Korean Christian hostages, caution for missionaries, Christian Science Monitor, 2007년 8월 31일

사실 19세기식 미국 선교사업의 산물이 한국 교회들인지라 뭔가 배운 것을 소중하게 원형 그대로 잘 지켜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당금 천하의 형세를 보건데 우리를 제하고 소중화는 달리 없을진저.


그건 그렇고

요즘 보면 기독교 교단 측의 반응이라는 것은 일단 여론의 분위기가 심히 안 좋으니 비가 그칠 때까지 좀 수그리고 있자(일단모면파), 와 어려울 때일수록 기죽지 말고 더 가열차게 단합해 내적 단결 재고와 반격의 기회로 삼자(즉각역습파) 두 가지 견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번 기회에 외국 교회의 해외활동 기법을 벤치마킹해 실질적인 체질개선을 하려는 실용적인 움직임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실질적인 개선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개혁은 사건의 충격이 남아 있을 때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어도 될까말까한 일이다. 이 시점에도 중요한 변화를 이끌어낼 만한 위기의식과 움직임이 관찰되지 않으면 1,20년 정도로 뭔가를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예컨대 이 정도 거국적으로 욕을 먹었으면 내부적으로 지금까지의 한국 기독교계의 선교활동의 장점과 단점을 솔직하게 재검토한 뒤, 향후 선교활동의 개선방안 로드맵 같은 것을 제시해 개선의지와 평가기준을 밝혀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래야 나중에 비슷한 문제가 다시 터졌을 때, 개선하겠다는 것 중 얼마나 변한 게 있고 어떤 게 미진한지, 또한 교회 입장에서는 어떤 게 바꾸기 쉽고 어떤 게 바꾸기 어려운 근본적인 요소인지를 당사자의 시각을 충분히 반영해 평가할 것 아닌가?

문제는 결국 또 터질 것이다. 다음에 문제가 터졌을 때, 아 조직이란게 쉽게 바뀌지 않는데 교회가 그나마 그동안 노력을 꽤 했구나라는 호의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기를 희망한다.

사실 한국 교회가 믿음을 강조하는 방식은 황군에서 정신력을 강조하는 유형과 흡사해 보인다. 예를 들어 황군에서는 항공어뢰 사정거리가 짧아 피해가 우려되니 무기를 개선해야 된다는 참모의 건의를 "천황이 하사하신 무기를 받았는데도" 감투정신이 부족해 변명을 늘어놓는다고 질타하며 깔아뭉개는 식의 반응이 흔했다.
한국 교회가 모든 문제를 믿음으로 돌파할 수 있다고 늘 부르짖는 것과 뭐가 다른가?

적어도 교회는 합리적으로 업무 기법과 기술을 개선한다고 해서 믿음이나 정신력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뭔가 근본주의적 도그마가 있어 19세기에 사부가 전수해준 기술을 손대면 사문난적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문제의 핵심은 남한의 선교단체들이 최선의 조치를 취해왔는데도 불가피하게 희생이 난 것이 아니라, 그동안은 단지 운이 좋아서 넘어가다가 드디어 큰 사고가 한번 터진 것이라는 점이다.

어찌되었든 조잡한 일처리가 누적되다가 희생자가 난 것을 거룩한 순교로 포장한 다음 내부적 책임소재와 개선의 필요성을 덮으면 곤란하다. 이번에 죽은 사람들이 개죽음한 것인지 가치있는 순교를 한 것인지는 교회 외부에서 뭐라고 떠들건 향후 개신교 선교단체들의 자기개조 노력에 달렸다.

전에도 지적한 바 있지만, 교회의 선교활동 전반을 공격하는 것은 역효과만 난다고 본다. 그건 그 종교의 본질에 해당하는 문제라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사회적 문제가 발생해 세속사회가 종교단체에 압박을 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주고 몰아야 한다. 세속사회가 바래야 할 것은 상황의 개선이지 이때구나 하고 특정집단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다만 한국교회는 외국 교회들도 포기한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인 전술에 집착하고 있다는 세간의 비웃음은 내부의 개혁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데 조금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효과가 없다면 소중화가 달리 소중화가 아니라고 체념할 수밖에.


disclaimer. 이 글은 조직으로서의 남한 교회와 선교단체의 조직운영방법에 문제가 있음을 공격하는 것이지만, 종교로서의 기독교나 신도로서의 기독교인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즉 니버 목사 말대로 도덕적인 개인들이 모여도 비도덕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식의 관점이다. 그러나 독자가 교도로서 자신이 속한 교회의 무오류성과 한 배를 타겠다고 자발적으로 결정하면 그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by sonnet | 2007/08/31 18:16 | 정치 | 트랙백(3) | 핑백(2) | 덧글(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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