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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규제정책
2008/11/11   보론(1): 철밥통의 역할, 또는 진보의 딜레마 [34]
보론(1): 철밥통의 역할, 또는 진보의 딜레마
요즘 개인적으로 바빠서 많이 늦어졌군요. 이하는 일전에 쓰겠다고 이야기했었던 두 개의 보론 중 하나인,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근원적 모순론에 대한 몇 가지 의견입니다.


1. 근원적 모순론

지난 글에서 자세히 다루었지만 재확인하는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근원적 모순론은 다음과 같은 시각을 말한다.

전후 자본주의는 그 기간 동안 정상적으로 잘 작동하였다기보다는 주로 임시변통적인 변수에 의해 "예외적으로" 작동하여왔다고 할 수 있다. … 몇몇 특수한 변수가 운 좋게도 그때그때 시장의 위기를 지연시켜왔다. 그리고 그 모순은 지금 폭발한 것이다. (foog)

그리고 이런 시각에서 자연스럽게 유도되는 문제가 뿌리깊으므로 본격적이고 커다란 변화가 필요하다란 관점이 따라오게 된다.


2. 금융위기 돌아보기

우선 이번 금융위기에 대한 베리 아이켄그린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자.

나는 이번 위기가 지난 몇 십 년간 펼쳐져 온 주요 정책결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미국의 경우, 두 번의 중요한 결정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70년대에 증권중개인에게 지불하는 수수료를 자유화한 것이다. 두 번째는 1990년대에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겸하는 것을 금지한 글래스-스티걸 법의 규제를 제거한 것이다. 중개수수료가 정해져 있던 시절, 투자은행은 증권거래만 중개해 주고서도 편히 먹고 살 돈을 벌 수 있었다. 수수료 규제를 자유화했다는 것은 경쟁과 박한 이윤을 의미했다. 글래스-스티걸 법을 폐지하게 되자, 투자은행이 움켜쥐고 있던 전통적인 밥그릇을 상업은행들이 파먹어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맞서, 투자은행들은 복잡한 파생금융증권을 차입 후 매각하는 길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자금을 차입해서 그들의 수익을 유지하기 위한 사업에 쏟아 부었다. 이는 증권화를 통한 차입 후 매각 모델과 막대한 레버리지의 사용이라는, 위기의 첫 번째 원인이 일어나게 하였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일련의 전개는 기본적으로 사리에 맞아 보이는 정책결정에 따라온 의도치 않은 귀결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규제완화는 소액투자자들이 주식을 더 저렴하게 거래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혜택을 보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조건들은 같지가 않았다. 특히 이러한 정책전환에 의해 더 위험한 활동으로 떠밀려간 투자은행들이 규제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은 재앙을 향한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글래스-스티걸 법을 폐지한 것도 근본적으로는 사리에 맞는 선택이었다. 금융복합기업을 허용하는 것은 금융기관들이 그들의 사업을 다각화할 수 있게 해주고, 상업은행과 합병할 수 있게 허용함으로서 투자은행이 불안정한 단기자금시장 대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예금을 사용해 그들의 사업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모델은 유럽에서 지난 몇 세기 동안이나 그 생존성을 입증한 바 있으며, 최근 뱅크오브아메리카가 메릴 린치를 매입한 데서도 드러나듯이 그 장점은 미국에서도 명백하다.

하지만 복합기업화가 완성되려면 시간이 걸린다. 단기적으로 메릴은 다른 투자은행들과 마찬가지로 배팅을 두 배로 올릴 수 있게 허용되었다. 이 회사는 감독기관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 채로 남았다. 독립 업체이다 보니 이 회사는 시장의 요동에 취약하였다. 결국 전체 금융시스템을 위협할 만큼 커다란 위기가 필연적인 복합기업화를 재촉하도록 만들었다.

Barry Eichengreen, 경제 위기의 해부학, 2008년 9월 22일

아이켄그린은 경쟁 촉진이나 금융복합기업화 같은 멀쩡한(또는 적어도 그렇게 보였던) 정책개혁의 결과가 훗날 예기치 못했던 위기를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정책의 의도치 않았던 귀결(unintended consequence)이 문제이며 그런 것은 "언제나 예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분석은 근원적 모순론에게는 매우 불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실수로 사고가 일어났다고 치면 실수를 '근원적 모순'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울러 아이켄그린은 "탐욕과 부패를 이번 위기의 원인으로 강조하는 것은 사태를 악화시킨다. 우리는 인간 본성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투자자들을 덜 탐욕스럽게 만들 수는 없다."라며 당연하지만 진부한 결론에 화살을 돌리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는데 이 역시 근원적 모순론의 한 가지 버전에 쐐기를 박는 이야기이다.

사실 이번처럼 큰 위기의 원인이 된 요소에 대해 선선히 '멀쩡한(해 보였던) 정책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상당히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한 번 검토를 해 보자.

아이켄그린이 지적한 첫번째 요인은 경쟁촉진정책이었다. 이건 사실 볼 필요도 없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한 번 짚어보자.
우선 앞 글에서 살펴본 바 있었던 후생경제학의 기본정리처럼 경제학에는 경쟁정책을 강력히 지지하는 이론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 정리가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은 경쟁을 촉진하는 정책을 지지한다. 그것은 독점이나 과점처럼 경쟁이 없거나 미약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비효율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증권회사들이 경쟁 없는 담합 가격으로 '철밥통'을 꿰차고 고객들을 후려가며 후한 수수료 수익을 챙기고 있다면 그것을 그냥 놔둬야 하겠는가?

두 번째 요인인 금융복합기업화 허용은 어떤가? 이것은 사실 현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이번 금융위기로 상종가를 찍고 있는 논객이라 할 수 있는 노리엘 루비니는 골드만 삭스나 모건 스탠리 같은 초대형 투자은행은 하루 빨리 다른 대형 상업은행과 합병해야만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 또한 아이켄그린이 말한 것과 동일하다. 즉 투자은행이 불안정한 단기자금 차입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치명적인 만큼, "불안정한 단기자금시장 대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예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왜 멀쩡해 보이는 정책이 이번 참사를 부르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을까?

자 이제, 지금까지 읽었던 투자은행 사태에 대한 설명과 아주 흡사하게 보이는 다른 이야기 하나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것은 1980년대 말에 벌어졌던 또 다른 금융위기인 저축대부조합(S&L) 사태에 관한 것이다.

S&L은 금융 시장이 고도로 통제받던 시절에 번창하였던 특수한 유형의 은행이다. 다른 은행과 마찬가지로 S&L은 예금을 받고 대출을 해 주지만, 일반적으로 이자율이 더 높다. 그리고 다른 은행의 예금주들과 마찬가지로 S&L의 예금주들도 국가의 보험제도, 즉 은행이 파산할 경우 예금액을 보장해 주는 연방저축대부보험공사(Federal Savings and Loan Insurance Corporation, FSLIC)의 보호를 받는다.
은행의 예금을 보장해 주는 것이 은행주에게 위험한 유혹임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가령 우리가 은행을 소유하고 있고, 정부가 우리 은행에 예금한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손실 보전을 보장해 준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우리에게는 납세자의 돈을 갖고 도박을 벌일 멋진 기회가 생기는 셈이다. 우리는 단지 가능한 한 많은 예금을 끌어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이는 다른 은행들보다 약간 더 높은 이자율을 제시해 주면 충분하다(예금주는 우리가 정말로 그 높은 이자를 챙겨 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어떤 경우에도 자기 돈은 보호받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위험성이 높은 대부자, 즉 금리를 불문하고 선뜻 대출받으려 하지만 제대로 갚지 못할 수도 있는 개인이나 기업에 대출해 준다. 만일 그들이 갚아 준다면 우리는 예대 금리 차이만큼 돈버는 것이고, 대부자가 갚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저 은행 문을 닫고 나오면 된다. 예금주들에게는 정부가 대신 갚아 줄 테니까 말이다. 이겨서 버는 건 우리고, 져서 무는 건 납세자다.
이와 같은 유형의 유혹에는 “도덕적 위험(moral hazard)”이란 기묘하지만 그럴 듯한 이름이 붙어 있다. 금융 전문가들은 오래 전부터 예금 보장 체제를 갖춘 미국의 은행 제도에 도덕적 위험이란 문제가 잠재해 있음을 우려해 왔거니와, 1980년대까지는 은행 제도가 철저하게 규제받던 편이어서 이러한 문제가 통제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은행에 대한 규제에는 세 가지 효과가 있었다. 첫째, 은행들은 규제 당국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대부를 승인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가령 S&L들의 경우에는 업무가 주로 주택 융자금의 취급에 한정되었다. 둘째, 은행주들은 이른바 자본의 요구, 즉 위험한 곳에는 은행 자본금과 같은 자체 자금을 투입하도록 하고 예금주의 돈을 갖고 하는 도박은 덜 매력적이게 하는 근본 규칙에 따르게 되었다. 끝으로 수신 금리 인상을 제한하고 신규 은행의 진입을 어렵게 한 규정 때문에 은행업은 수익성이 매우 높은 사업이었다. 따라서 은행업자들은 수익성 높은 “독점권(franchises)”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모험을 감수하고자 하지 않았다.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과 고금리가, 비록 효율적이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작동하던 이 제도를 끝장나게 하였다. 두 자리 수의 이자율이 경쟁하는 세상에서 예금을 끌어들이자면 S&L은 더 높은 이자율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였다. 그러나 S&L은 대개 자금의 상당 부분이 저금리 시절의 장기 주택 융자금에 묶여 있었다. 결국 그들은 대출 금리보다 더 높은 수신 금리를 예금주들에게 지불해야 할 형편에 빠졌다. 1980년까지 많은 S&L들이 사실상 파산하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 예상된 연방 정부의 정책 방향은 파산한 S&L을 정리하고 예금주의 예금을 정산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에 연방 정부는 규제를 풀었다.
즉 S&L들이 스스로 파산에서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여 투기성 대출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이 정책의 결과는 예측 가능한 것이었으니, 즉 도덕적 위험의 유행이었다. S&L들은 정크 본드와 부동산 투기 자금 대출 같은 위험성 높고 대부분 성공하지 못한 부분에 투자하였다.

Krugman, Paul., Peddling Prosperity: Economic Sense and Nonsense in an Age of Diminished Expectations, W. W. Norton, 1994
(김이수, 오승훈 역, 『경제학의 향연』, 부키, 1997, pp.197-200)

놀랄만큼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이 두 이야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점은 그것이 대형 투자은행이든 저축대부조합(S&L)이든 간에, 금융기관이라면 처음부터 더 위험한 투자활동에 뛰어들 (잠재적) 기회와 동기 모두를 다들 어느 정도씩은 갖고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일련의 규제 완화 이후에 그 (잠재적) 기회와 동기가 현실화되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 크루그먼은 일종의 철밥통 역할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설명은 앞에서 본 아이켄그린의 묘사에도 잘 맞아 들어간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그런 위험한 모험에 뛰어드는 것을 미묘한 균형을 통해 억제하고 있었던 것은 투자은행들이 갖고 있던 짭짤한 수수료 수익이라든가 S&L의 (프리미엄 붙은) 영업권, 그리고 잠재적 경쟁업체 진입을 막아주던 글래스-스티걸 법 같은 소위 철밥통의 보이지 않는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3. 규제라는 도구

이번 금융 위기이건 다른 위기나 사고이건 간에 대개 문제가 생기면 부적절한 규제에 대한 비판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늘 부적절한 내지는 미비한 규제가 거론되다보니 규제강화야말로 문제 해결의 열쇠인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규제라는 도구는 실제로는 어떤 것일까?


한번 '못'을 백만 개 만들기로 했다고 생각해 보자. 정부가 다른 조건 없이 못 하나 당 10원을 주기로 했다면, 원가를 아끼기 위해 짧은 못만 만들어질 것이다. 만약 정부가 입찰조건에 못의 길이를 명시했지만 굵기는 명시하지 않았다면 가는 못이 압도적으로 많이 납품될 것이다. 이제 길이와 굵기를 모두 규정하면 생산자들은 값싼 저질 재료로 못을 만들 것이고, 그 못은 지나치게 잘 부러지게 된다.

그나마 못은 간단한 물건이기 때문에, 기능명세를 상세히 적기 위해 노력한다면 어느 정도까지는 문제를 따라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동차처럼 좀 더 복잡한 상품의 경우, 아무리 많은 기능명세를 적어주더라도 모든 특성을 완벽히 기록할 수는 없기 마련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재량의 여지, 즉 비용절감의 여지가 생기고 그로 인해 이 상품이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데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런 일이 바로 소련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구소련 연방정부는 공산주의 원리대로 중앙경제계획에 의해 정부의 경제관료들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대체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시장경제의 소비자들과 같이 브랜드 이름이 상품 품질 유지에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소련 경제 전문가인 골드먼(Marshall Goldman)은 1960년 Journal of Political Economy에 발표한 논문에서 소련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소련에서 생산목표는 오직 수량이나 가치기준으로만 설정되기 때문에 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종종 품질은 희생되곤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련 정부에 의해 고안된 한 가지 방법은 상품의 의도적 차별화이다…. 같은 업종 또는 같은 정부부처 산하의 기업들을 구별하기 위해 각 기업에 각각 다른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다. 가능한 모든 경우에 기업들은 자기들이 생산한 물건이나 그 포장에 ‘생산지 표시(production mark)’를 부착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Goldman은 이에 대한 소련 마케팅 전문가의 분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 생산지 표시는 불량 생산품이 발견되었을 때 생산책임자를 가려내기에 매우 좋은 방법이었다. 이 때문에 이 표시방법은 생산품의 품질을 관리하는데 아주 유효한 수단이다…. 상표는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상품을 선택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것은 다른 기업들이 자신의 상품 품질을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어 향상시키도록 압력을 가하는 효과를 낸다.

Goldman은 이에 대해 “이것은 마치 자본주의 옹호론자가 쓴 것과 같은 자유시장 경제적인 관찰”이라고 쓰고 있다.

Mankiw, N. Gregory., Principles of Economics, Dryden Press, 1998
(김경환,김종석 역, 『맨큐의 경제학』, 교보문고, 1999, pp.379-380)

자 이제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앞선 예에서 (소련) 정부가 길이나 굵기 같은 못의 기능명세를 규정했던 것은 정부가 상품에 특정한 규제를 가한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상표를 붙이도록 한 조치도 규제이니까 말이다.

물론 소련이 다는 아니었다. 중국인들 또한 이런 문제를 겪었는데, 그들은 "위에 정책이 있다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는 법이다"(上有政策 下有對策)란 말로 이 현상을 잘 표현한 바 있다.

이처럼 못 이야기가 가르쳐주는 교훈은 규제란 것에는 시장 못지 않게 예상 외의 길로 우회할 방법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회로를 찾아서 하나씩 막아버리면 어떨까? 앞서 자동차의 예를 들어 말했던 것처럼, 우회로를 모두 찾아 막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분석을 위해 가상적으로 완벽한 기능명세, 완벽한 작업매뉴얼, 또는 완전한 규제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자.

어떤 제품을 만들 때 그 완벽한 기능명세를 따르게 하여 어떤 재량의 여지도 없게 만든다면, 이 제품은 개선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어버린다. 완벽한 작업매뉴얼은 그 일을 아무리 많이 해 보았더라도 업무 개선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며, 완전한 규제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 길은 설령 택할 수 있더라도 택하면 안되는 길이다.

게다가 규제에는 규제를 집행하는 데 따르는 나름의 비용이나 노력이 필요하다. 규제는 준수와 위반 여부를 감시할 수 있어야만 실효성을 가질 수 있다. 이와 같은 감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데는 적지 않은 노력이 든다. 따라서 개개의 규제는 그에 수반하는 노력과 규제의 효과를 따져 이익이라고 생각될 경우에만 신설될 수 있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해 보면 규제란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시장 경쟁과는 꽤 다른 특성(중요함)을 갖긴 하지만, 그것도 기본적으로는 방대한 선택지 중 일부의 기대값을 바꿔놓는 인센티브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4. 파괴적 경쟁

앞서 우리는 서방경제가 시장 경쟁을 이용해 효율을 개선하려다가 의외의 일격을 얻어맞는 모습을 보았고, 이번에는 공산경제가 명령/규제를 이용해 생산량을 확보하려다 쓴 맛을 본 것을 확인했다. 이러한 정책의 역사는 우리에게 우울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그것이 간접적으로 시장을 이용하건, 직접적인 규제를 이용하건 상관없이 정책은 상당한 확률로 예기치 못한 귀결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유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이 시장 경쟁이나 다른 시장을 이용한 인센티브이건, 명령이나 규제를 이용한 (다른 형태의) 인센티브든 간에, 폭넓은 재량의 여지를 남겨 준 이상 그런 가능성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앞 절에서 다룬 '완전한 규제'처럼 모든 다른 길을 폐쇄해 길을 외통수로 만들면 또 모를까.

좀 더 음울한 경우도 있다.
때때로 격렬한 경쟁을 이용한 인센티브는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고전적인 예로는 도서관에 가서 경쟁자들도 봐야 할 중요한 책의 페이지를 찢어버리는 대학원생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일제고사 논란과 영국 교육의 3T에 등장하는 학생성적을 조작하는 교사도 그런 경우이다. 소련에도 비슷한 예가 있다. 노력영웅을 앞세워 경쟁을 강화하고 생산량을 늘리려던 스타하노프 운동이 추진되자, 곧 괴한들이 노력영웅을 으슥한 곳으로 끌고가 테러를 가하는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저 놈 때문에 우리가 고생하게 되었다"고 받아들인 후 "튀면 재미없다"란 메시지를 전달하려한 다른 노동자들의 대응이었다.

앞서 살펴본 투자은행이나 S&L의 경우 정책결정자들은 경쟁은 강화하면서도 이들의 투자행태는 여전히 중립이 지켜지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많은 다른 사례들에서처럼 그렇게 입맛대로 잘 굴러가지는 않았을 뿐이다.

조금 생각해지면 분명해지는 것이지만 앞서 언급한 철밥통 역할론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고전적인 '채찍과 당근'에서 당근의 역할을 지적한 데 불과하다. 채찍은 늘리고 당근은 없앤 후 일이 더 잘 진행되기를 바랐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디에서나 있음직한 진부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5. 진보의 딜레마

아이켄그린의 설명을 따르자면, 미국의 거대 투자은행들이 일거에 몰락하게 된 원인은 과거 건전한 개혁정책이라고 생각되었던 모종의 진보의 도입에 있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당시 우리에게 가용한 지식으로는 그 정책이 불합리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 개혁정책들은 실로 단독으로는 건전한 것들이었다. 다만 우리가 잘 모르는 복잡한 시스템 안에 그런 개혁정책들을 집어넣자 그것이 꽤 긴 기간 동안 다른 요소와 미묘한 상호작용을 한 끝에 끝내 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 관점이 진보에게 던지는 함의는 아주 골치아픈 것이다.

진보의 핵심 개념은 인간의 이성을 이용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이성적인 판단 수준이 상황을 개선할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잘 될때까지 시행착오를 거듭해 볼 수 밖에 없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지만, 시행착오에 따르는 고통이나 위험이 지금 우리가 겪는 것처럼 클 경우엔 시행착오를 여러번 해보자는 주장은 지지를 끌어내기가 어렵다. 여기서도 역시 현상을 강하게 성토하면 성토할수록 시행착오에 나서자고 설득하기가 힘들어진다.

또한 현상에 대한 불만은 언제나 진보의 강력한 추동력이었다. 그런데 이 경우 불만족스러운 현상을 강력히 성토한다는 것은 (과거의) 진보적 시도의 잘못을 두들기는 것이 되어서 자승자박이 된다.

이제 남은 선택은 과거의 진보적 시도와 이번에 하려는 진보적 시도는 질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다(즉 "그땐 틀렸지만 지금은 다르다" 류)는 주장을 펼치는 것 정도인데, 솔직히 경제학이나 경제정책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그렇게 주장할만큼 많이 발전했느냐는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의도치 않은 귀결의 문제점을 정복(개선)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주제에 대해 미래를 정확히 예언한다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닥치고 날 믿어라'라고 할 것이 아니라면, 작은 발전이라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조차 간단지가 않다. 지난 10~20년 사이에 학계 혹은 실무에서 일어난 모종의 발전이 이번 사안에 작아도 유의미할 정도의 차이를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점을 대중에게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일이란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어쨌든 간에 기존의 설명들보다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현상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책임은 변화를 주장하는 쪽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또한 그 변화가 근본적이어서 규모나 깊이가 커야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제 철밥통을 함부로 없애면 위험하다는 결론만 갖고 그 결정이 내려지던 당시로 돌아가 보자. 어떤 식으로 반대를 옹호할 것인가? 만약 이유를 구체적으로 댈 수는 없지만 철밥통을 함부로 없애면 안된다는 주장을 하려 한다면, 마땅한 논리가 거의 없다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6. 편견(?)의 옹호

편견(prejudice)이란 말은 거의 언제나 나쁜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말을 열정적으로 옹호하고 나선 인물이 한 명 있으니, 그가 바로 18세기 영국의 보수주의 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이다.

각하, 각하도 아시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계몽 시대에도 일반적으로 우리는 배우지 않고도 습득한 느낌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고 대담하게 고백하겠습니다. 모든 낡은 편견을 버리는 대신 우리는 그것을 아주 소중히 여기며, 더욱 부끄럽게도 우리는 그것이 편견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히 여긴다는 점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더 오래 묵었을수록, 더 널리 퍼져 있을수록 우리는 그러한 편견을 더욱 소중히 여깁니다.

Burke, Edmund.,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1790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단순한 자폭인가?
이어지는 버크의 논리는 이렇다.

우리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이성만 믿고 살고 교류할까봐 두렵습니다. 왜냐면 개개인이 가진 이성의 양은 작기 때문에 전 국가와 여러 세대가 축적한 공용 자산을 각자가 활용함으로서 개인은 더 훌륭한 결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많은 사색가들은 흔한 편견을 타파하는 대신, 그 편견 안에 널려 있는 잠재된 지혜를 발견해 내기 위해 자신의 현명함을 발휘합니다. 그들이 자신이 찾던 것을 발견한다면, 실패하는 일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편견의 덮개를 날려버리고 벌거벗은 이성만 남겨놓는 것 보다는 편견을 유지하면서 거기 이성을 가미하는 방법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Burke, 같은 글

이는 결국 이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후미진 곳에 위치한 일선 부대에 의욕적인 신임 지휘관이 부임한다. 부대를 순시해본 결과, 중앙에서 주도면밀하게 작성해서 내려보낸 규정에 어긋나는 관행이 다수 발견된다. 신임 지휘관은 이런 불합리한 관행을 뿌리뽑기로 결심하고 대대적인 개혁운동에 돌입을 감행하지만, 곧 전에 없던 많은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난감함을 느끼며 사태를 면밀히 조사해본 결과, 부대장의 전임자들도 중앙이 하달한 규정을 현지 상황에 적용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현재의 변형된 "관행"들은 그들이 현실에 적응하면서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즉 여기서 이성적 이론(중앙의 규정)과 이성을 신봉하는 개혁가(신임 지휘관)은 불합리해보이는 편견(기존 관행)에 도전하지만, 곧 편견 속에는 이성이 놓치고 있던 숨은 지혜(경험적으로 축적된 현실 적응)가 많이 들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앞서 문제가 되었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댈 수는 없지만 철밥통을 함부로 없애면 안된다'는 주장을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다. 아마도 구체적인 이유를 대지 않고 주장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변화지향적 혹은 진보지향적 성향을 지닌 사람이라면 좀처럼 택할 수 없는 입장이긴 할 것이다.


우리가 버크의 입장에 대해 가부를 논하려면 단순반대논리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이런 수준보다는 좀 더 상세히 그의 입장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에드먼드 버크는 원래 왕실에 대한 의회의 독립, 미국 식민지나 인도 식민지의 통치 방식에 대한 비판 등을 주로 해왔던 휘그당의 온건 개혁파였다. 그런 그가 일거 보수주의의 거두로 떠오르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을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명예혁명을 지지하고 미국이나 인도 식민지 통치를 비판했던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버크는 무조건 변화와 진보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또한 자신이 살던 18세기 영국이 그 이전, 예를 들면 15세기의 영국보다 우월한 세계라고 믿었다는 점에서 진보의 개념을 수용하고 있기도 했다. 오히려 버크는 "변화의 수단이 없는 국가는 보존의 수단을 갖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면서 점진적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곤 하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요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보수주의가 '변화'를 수용하여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지금까지 쌓아올린 진보의 '보존'인 것이다.

버크로 대표되는 보수주의자는 사회 제도란 필연적으로 선과 악의 혼합체이기 때문에 선은 조심스럽게 보존하고 악은 조심스럽게 치유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 급진주의자들은 기존 체제에 존재하는 선을 인정하지 않고, 악을 치유하고자 하는 열정에 골몰한 나머지, 기존의 선을 좀 더 좋은 것으로 대체함이 없이 그것마저 파괴해버리고 만다. 즉 보수주의자의 눈에 급진 개혁주의자는 구질서의 장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개혁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을 과대평가하며, 새로운 질서가 가지고 있는 사변적이고 몽상적인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따라서 보수주의의 견해에 따르면 급진 개혁론자가 추구하는 사회의 기본 질서의 전면적인 개편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다만 회복할 수 없는 질서의 파괴만을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다.


7. 마무리: 던져진 질문에 답하며

앞서의 글에서 '결국 시장은 복구되어야 한다'는 스티글리츠의 글을 인용하면서 '성공적으로 균형'을 잡았다고 멘트하셨으니까 저는 그에 대한 일종의 (보론적) 반론으로서 님께 질문을 던진 것이랍니다. 정말 '결국' 시장으로 복구되어야 한다면 어떠한 시장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랄 수 있겠지요. (foog)

예를 하나 들겠다. 앨런 블라인더는 이번 위기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모기지 사태를 분석하여 개선책을 제시한 글을 발표한 바 있다. 나는 이 글의 분석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며, 개선책 제안도 그렇다. 그러나 나는 이들 개선책 제안 중 그 어떤 것도 시장경제에 대한 근본적인 요소를 빼거나 더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들은 모두 현재 불거진 문제들을 다스리기 위한 작은 수정에 불과하다.

그럼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그 개선책들 중 어떤 것이 10~20년 후에 우리가 예상치도 못했던 요소와 결합해 다른 위기를 촉발하는 원인이 될 수 있을까? 내 답은 잘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겠다는 것이다. 과거에 멀쩡해 보였던 개혁정책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을 일소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최소화하기 위해서 이런 문제는 버크가 말하듯이 "국가의 결함은 아버지의 상처를 다루듯 경건한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구질서의 미덕을 최대한 보존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제 반대로 생각해 보자. 시장의 근본적인 요소는 뭔가?
아이켄그린이 투자은행에 재앙을 가져온 첫 번째 요소로 꼽은 것은 경쟁정책이었다. 경쟁과 분권화는 분명히 시장을 움직이는 핵심 요소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특정 경쟁정책이 재앙을 촉발했다고 해서 경쟁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쟁을 빼고 다른 어떤 것을 집어넣었을 때, 시장이 지금과 같은 정도로 (혹은 그 이상) 돌아가게 될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다른 기적의 대안이 확보되지 않는 한 경쟁정책은 앞으로도 실용적인 정책대안으로 우리의 도구 상자 안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하며 물론 앞으로도 종종 사용되어야 한다.

이런 양 측면을 고려해 볼 때 위기를 넘긴다면 예전과 본질적인 변화는 없는 '시장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은 별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결론이라는 것이 내 대답이다.

이제 근원적 모순론이 답할 차례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많이 뜯어고쳐야 충분하다고 말할 것인가? '시장으로 복귀'란 표현이 무색해질 정도로 큰 변화가 과연 어떤 것인지 한번 지켜보기로 하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살짝 잽을 피하시는 모습은 조금 실망"(foog)스러운 것이 어느 쪽인지를 보여줄 테니까 말이다.

by sonnet | 2008/11/11 11:19 | 정치 | 트랙백(4) | 덧글(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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