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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공화정
2008/11/26   이행의 문제 [41]
이행의 문제
글을 읽다 생각난 의문 (밀리네스) 에서 트랙백

이 글에서는 우선 트랙백 해온 글의 의문에 간략화된 형태로 답한 다음, 그와 연관된 문제 한 가지를 다룬다. 보통은 일반인들이 익숙한 예를 들려고 하는 편인데, 트랙백 해온 분께는 SW개발의 비유가 익숙하리라고 예상되어, 본문 중에 그러한 예를 일부 사용하였다. 가능한 쉽게 쓰려고 하였으나 이 점에 대해서 읽는 다른 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1. 문제의 간단한 검토

왜 왕정시대에서 민주주의시대로 바뀌었을까? 왕정에 근원적 모순이 있어서 민주주의로 바뀐것일까? 아니면 왕정을 지키고자 하는 그 모든 보수주의적인(sonnet님 말을 빌자면 과거의 진보를 지키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여 왕정시대가 무너진 것일까?

인간의 이성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사회구성원들의 지식 평균량이 많아지는것은 가능하다. 지식 평균량이 늘어나는 속도는 처음에는 느리지만 어느 임계점을 넘게 되면 급격하게 높아진다.

금속활자가 발명되고 일어난 르네상스 혁명
증기기관등으로 인해 지식의 전파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자 일어난 산업혁명

그럼 그 이전의 시대에 근원적인 모순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시스템이 근원적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스템이 사회구성원의 평균지식량을 못따라잡음에 따라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 생각한다.

[…] 따라서 내가 지지하는 것은 다음의 방식이다.
컨텍스트가 서서히 변화 하는 곳에서는 과거의 방식을 존중해 가며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는 보수주의자의 방식을 따른다. 하지만 컨텍스트가 급격하게 변화 하는 곳에서는 컨텍스트의 변화를 최대한 파악하려 노력하며 그 컨텍스트에 맞는 새로운 모델을 찾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는 진보주의자의 방식을 따른다. (밀리네스)

서유럽에서 왕정에서 민주정으로의 변화는 두 가지 유형, 즉 혁명 등으로 신속히 왕정을 폐지한 후 공화정을 수립한 유형과 국왕이라는 껍데기를 놔둔 채 점진적으로 권력을 의회로 옮겨나간 끝에 입헌군주정 형태로 정착된 유형을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첫째 유형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와 둘째 유형의 대표인 영국을 비교해 보도록 하자.

(기술 진보가 가속화된 중요한 사회현상이었던) 산업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영국이 프랑스보다 앞서면 앞섰지 뒤쳐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앞서 제기된 가설과는 잘 맞지 않는 현상이다. 즉 '컨택스트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산업혁명의 선도국가인 영국이 가장 진보적인 대책을 택해야 할 것 같은데, 실은 가장 보수적인 방법을 택했으며, 결과적으로도 원만히 민주정으로의 전환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례 하나로 일반화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적인 접근법으로도 큰 변화의 필요에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는 충분하다.

어쨌든 컨택스트의 변화가 크다면 그만큼 더 큰 진보가 요구된다는 것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관점이며, 아마도 어떤 "다음 단계"(*1)에 도달한 후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면 그 말이 옳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양적으로) 큰 진보가 요구된다고 생각되더라도 (속도 면에서) 빠른 진보를 추구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전략이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사실 빠른 진보의 추구가 나쁜 전략이 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하는 근거가 몇 가지 있다. 그렇다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은 언제 설득력을 갖게 되는가?


2. 이행의 문제(1): 중단 없는 서비스

살던 집을 재건축하기로 했다고 생각해 보자. 이럴 경우 두 가지 대조적인 접근법을 취할 수 있다. 우선 낡은 집을 허물어 버린 후, 바닥부터 출발해 완전히 새 집을 짓는 방법이 있다. 반면 집의 일부를 수리한 후 그 일이 끝나면 다음 부분을 수리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방법을 취할 수도 있다.

낡은 집을 허물고 바닥부터 새 집을 짓는 방법은 옛 집의 문제점들을 신속히 일소할 수 있다는 굉장한 장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이 방법을 더 매력적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왜 옛 집의 단점을 더 오래 겪어야 하는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가 필요할까?

낡은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을 경우, 거기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숨은 가정이 하나 있다. 즉, 그 집에 살던 가족은 새 집이 완공될 동안 어딘가 딴 곳으로 이사를 가 당분간 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딴 곳에 가서 살 데가 없다면? 온 가족이 철거한 집 옆에서 몇 달 동안이나 노숙을 하게 되지 않을까? 노숙 기간 동안 환경이 양호, 즉 날씨가 맑고 따뜻하다면 텐트를 치고 버텨 볼 수도 있겠지만, 폭풍우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면?

재건축 때와는 달리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구조나 체제를 손볼 경우, 대부분의 사회구성원은 그 기간 동안 자신이 속해 있던 사회를 떠나 안정적인 다른 사회에 피신해 있을 수가 없다. 다소 불만족스러운 점이 있더라도 어느 정도 우리를 지켜주던 기성 체제는 철거되었는데,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새 체제는 아직 동작하지 않을 경우, 사회구성원 다수는 예측불가능한, 그리고 위험한 환경에 장기간 무방비로 노출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집의 일부를 조금씩 수리해 나가는 보수적 방법을 택하는 중요한 이유가 드러난다. 그것은 새 집(혹은 부분적인 수리를 여러 차례 거쳐 새롭게 거듭난 집)이 완공될 때까지, 즉 이행의 시기 동안에도 그 집이 제공하는 기본기능(주거)를 계속 제공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3. 이행의 문제(2): 개발 상의 난점

이제 SW 개발의 비유를 통해 다른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당신은 정치체제™ 2.0(혹은 '사회체제™ 2.0'라도 좋다) 개발을 새로 맡게 된 프로젝트 매니저(PM)이다. 노련한 PM답게, 즉각 현황파악에 착수한 당신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우선 정치체제™의 기존 시스템(ver.1.7.3pl39)은 낡아빠진(legacy) 시스템 답게 프로그램 소스코드가 남아있지 않다. 지금까지 거쳐간 시스템 관리자들이 대를 이어 전수해 온 자료란 것을 넘겨받아 검토해본 결과, 시스템의 대략적인 동작원리와 구조 정도는 알 수 있지만, 그 조차도 완벽과는 거리가 먼 것임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최근 몇 년간 적용된 패치에 대해서는 소스코드가 남아 있지만, 바이너리 패치가 적용될 각 서브시스템의 소스코드가 남아있지 않아서 그 가치는 그리 높다고 할 수가 없었다.

혀를 차면서도 "이 정도 쯤… 예상 못한 바는 아니야"라고 생각한 당신이지만, 다음 문제를 듣게 되자 안색이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체제™는 특수한 메인프레임 호스트에서 실행되기 때문에, 별도의 개발용 호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새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면 기존의 프로그램을 내리고 그 자리에서 작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새 실행파일을 컴파일하기만 해도, 기존 프로그램의 실행은 중단된다.(*2) 전임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일을 했냐고 묻자, 그들도 지금까지 모두 그렇게 일했다는 답이 당연하게 돌아온다. 예상되는 문제점은 종이 위에서 이루어지는 기획단계에서 잡아야 마땅한 것 아니냐면서.


자, 이 일을 어떻게 한다??

SW개발자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사회과학을 기반으로 한 대부분의 정책 기획과 구현은 이런 수준으로 집행된다. 이론적 지식, 도구, 경험 축적의 수준이 모두 SW개발자들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게 열악하다.

자, 어찌 되었든 주어진 현실은 현실이다. 당신에게 이 일이 맡겨진다면 이 일, 정치체제™ 2.0개발을 어떤 식으로 진행하고 싶은가?

이런 -테스트베드가 전혀 없는- 개발환경이 주어지고, 게다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구 시스템의 서비스를 최대한 계속 제공해야 할 필요가 중요하다면, 그 개발방법은 필연적으로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SW의 예가 잘 와닿지 않는 사람이라면, 제약회사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겠다. 제약회사가 실험실 수준에서 연구된 어떤 신물질을 생산해 엄격한 신약시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전 국민에게 먹인다면, (설령 그 약이 큰 해를 끼치지 않는다 해도) 맞아죽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책은 대개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고 집행된다. 학계에서 말로 하는 논의와 전국적인 집행 사이에 체계적인 임상시험에 해당하는 것이 존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보수주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가 국가의 결함을 다룰 때, “삼가 아버지의 상처를 치료하는 심정으로, 경건한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을 품고”(to the faults of the state as to the wounds of a father, with pious awe and trembling solicitude) 접근해야 한다라고 목청을 높였던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4. 이행의 문제(3): 정보와 학습 측면

이 논점은 스티글리츠가 공산권 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함에 있어서 중국의 점진적인 이행이, 러시아의 급격한 이행보다 성공적이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잘 정리한 바 있다.

(이) 주장은 학습에 초점을 둔다.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개인적 차원과 조직적 차원의 학습이 이루어진다. 개인들은 시장의 신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사회는 어떠한 기구가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는지 알아야 하고, 조직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점진적 이행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이러한 학습과정을 용이하게 한다. 첫째, ‘정보의 과부하’ 문제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체제에 과도한 요구가 부과될 때 효율성이 저하되게 된다. 모든 교사들에게 친숙한 일반적 원리가 있다. 학습 재료는 소단계별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 오늘 배운 것은 내일 체화된다는 것, 앞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다음 단계의 문제를 푸는 것은(적어도 쉽게 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둘째, 점진적 이행은 급격하고 급속한 변환에 의해 불가피하게 조직이 파괴될 때 나타나는 정보의 손실을 피할 수 있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진화는 혁명보다 낫다. 조직은 개인들이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보이는 상대적 역량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다. 이행의 과정에서 업무 분담이 바뀌더라도, 앞 단계에서의 정보는 다음 단계에서도 유용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정보를 지니고 있는 것이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보다 낫다.

Stiglitz, Joseph E., Whither Socialism?, MIT Press, 1994
(강신욱 역, 『시장으로 가는 길』, 한울 아카데미, 2003, pp.383-385)

이것은 사회제도의 설계(구현)자가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본 관점이라는 점이 좀 다르다. 사회에 변화가 일어날 경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1) 변화에 맞추어 자신의 지식과 업무수행방법을 학습하고 바꿔야 한다.
(2) 변화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을 바꿀 것인지 적절히 예측해야 한다.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나면 일단 나의 학습이 불충분해 따라가는데 문제가 생기기 쉽다. 두번째로는 다른 사람들도 같은 문제를 겪기 때문에, 남들의 행동을 예측한다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러면 사회가 돌아가는데 문제가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5. 속담: "급할수록 돌아가라"

기술발전이나 사회진보 같은 진보의 개념들이 사용될 경우, 그 진보는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atomic operation처럼 다루어질 때가 많다. 즉 논의의 편의를 위해 '진보 이전'과 '진보 완료'라는 두 상태를 비교하거나 둘 사이를 징검다리를 건너뛰듯 옮겨다님으로서 그 두 상태 사이에는 마치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생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상태 사이에 존재하는 이행과정에는 진보의 폭에 상응하는 시간과 여러 가지 실무적인 난점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이행의 문제를 진지하게 붙잡고 씨름할 경우, 급한데 멀리 돌아가는 길처럼 보였던 보수적인 접근법의 장점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1. 이 예에서는 영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정, 즉 여성과 저소득층을 포함한 전 성인 인구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한 입헌군주정에 도달한 단계라고 임의로 정의해볼 수 있다.
2. 예를 들어 solaris(sparc)에서 실행 중인 바이너리 파일을 overwrite해 보기 바란다.
by sonnet | 2008/11/26 23:54 | 정치 | 트랙백 | 덧글(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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