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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잃어버린 현대인(I)
내가 이익을 봄 → 나의 능력
내가 손해를 봄 → 사회가 불공정
남이 손해를 봄 → 그의 잘못
남이 이익을 봄 → 특혜

페이스북에서 본 글인데,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이런 현상은 현대인이 진정한 신(고대신)을 잃어버린 결과라고 생각함. 바꿔 말하면 저 이야기에는 (인격신으로 한정하지 않는) 신의 영역이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이 있음. 여기서 말하는 고대신이란 대략 이런 느낌의 존재임


인간이 엄두를 낼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과 능력을 소유하고
인간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는, 불가해한 논리로 움직이는
인간에게 끝없는 두려움과 경외심을 주는, 초월적인 그 무엇으로
인간이 조금이라도 기어오르면, 개미다리를 하나씩 뽑듯 가혹한 벌을 주기도 하고
설령 인간이 기어오르지 않아도, 재미로(또는 별 생각없이) 벌을 주기도 함
인간으로서는 신과 얽히지 않는 것이 최선이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신의 변덕스러움에 맡겨져 있음

꼭 이 6가지 측면이 다 갖춰지지 않아도 그중 몇 개 이상을 갖춘 고대신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존재함.

예를 들면 운명에 펼쳐놓은 함정에 걸려 파멸하는 오이디푸스 왕이라든가, 출애굽의 이집트 파라오 등도 그런 경우임.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출애굽 7:3~4)


그리고 약자인 인간의 대응전술도 잘 정리되어 있음

樊遲問知。子曰:「務民之義,敬鬼神而遠之,可謂知矣。」
… 귀(鬼)나 신(神)을 공경하되 멀리하면, 지(知)라 하겠다. (논어 옹야雍也편 22)


처음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현대인들이 믿는 신은, 닝겐들을 일단 족쳐서 두려움으로 무릎꿇리고 시작하는 그런 위대한 고대신의 본질이 거세된, 앙꼬빠진 찐빵이라고나 할까. 그러다보니 서두의 이야기처럼, 나 또는 남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 모든 원인을 (운, 우연, 신 등이 아닌) 인간에게 귀속시키는 생각밖에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상황인 것 같음.

이런 상황을 고대인들은 인간의 오만(hubris)이라고 부르며 늘 경계했었는데, (후략)
by sonnet | 2021/06/29 21:59 | 문화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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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잡지식 at 2021/06/30 00:04
전에 쓰신 판교역 환풍구 사고 관련 글이 생각나네요. 등식을 차용해오자면 고대에는 성공=신의뜻+노력+구조+기타등등.. 이었다면 현대에는 우항에서 신의 뜻이 소거됬고, 공백을 다른 무언가로 채운 결과가 현대인의 인식이겠군요.

궁금한 점은, 왜 공백을 좀 더 건전한 방법으로 채우지 못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확률과 통계, 불확실성의 원리, 그리고 유전자의 영향과 뇌의 대략적 기능은 지난 세기에 연구되어 널리 알려졌는데 말입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21/06/30 17:04
꽤 옛날 글인데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생각은 그 때 글과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한 영역히 상당히 크게 존재하고, 어느 이상은 줄일 수 없다는 것이죠.

인간이 불확실성의 영역을 모두 정복할 수 있다는 견해는 19세기까지의 '근대' 시기에 위세를 떨쳤으나, 20세기 이후의 학문의 발전은 오히려 사람들이 남은 불확실성의 영역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쪽으로 돌아섰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전공자들의 영역이 아니고 일반인들의 인식 영역에서는 여전히 근대적인 시각이 강력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스템1/시스템2 사고의 문제도 있겠고요.
Commented by paro1923 at 2021/06/30 02:37
인간은 세상의 부조리함을 깨달아야 비로소 겸손해지고 남에게는 관대해지는군요. 씁쓸한데 딱히 반박을 못하겠으니 더 씁쓸합니다.
Commented by sonnet at 2021/06/30 17:01
실패를 모르는 사람이 겸손해지긴 쉽지 않겠죠... 안타깝지만.
Commented by ㅋㅁㅌㅊ at 2021/06/30 08:38
옳은 말씀입니다. 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는 말은 짱꼴라의 말인데도 생각할 바를 전해주는군요.
Commented by sonnet at 2021/06/30 17:06
盡人事待天命 같은 것도 비슷하게 참고가 되는 이야기 같습니다. 내가 열심히 최선을 다할 이유는 여전히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래도 내 노력 너머에서 성패가 결정날 여지는 폭넓게 열려 있다는 사고방식이죠.
Commented by dd at 2021/06/30 21:17
'신'이란 개념이 '시스템'으로 대체된 느낌이군요. 예전같으면 신의 뜻이라고 간주되었을 사건들이 이제는 시스템의 책임이라고 간주되는... 물론 시스템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스템을 만든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고, 시스템이 그런것이니까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정작 시스템의 책임이 맞는지도 불분명한 상황에서요
Commented by sonnet at 2021/07/02 14:13
둘은 결국 인간이 건드리기 어려운 "신성"과, 인간의 영역인 "세속"의 차이가 크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꼭 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쨌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영역을 뭉뚱그려 다루는 방법으로 신의 영역이란 개념은 유용성이 있지 않나 싶어요.
Commented by sm2mr at 2021/07/01 21:12
연의에서 제갈량이 말했지요.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이루는 것은 하늘이라고.
Commented by sonnet at 2021/07/02 13:59
네. 동의합니다.
Commented by 야채 at 2021/07/06 07:53
신이라는 건 결국 신성을 인정받고 두려움과 공경을 받아야 하는데, 딱 유용한 영역에서만 영향력을 갖기는 어렵겠지요. 앙꼬빠진 찐빵이라는 현대의 종교들도 여러 부작용과 사회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은데, 사회적 문제에서 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확신을 주는 종교라면 결국 지금의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들과 비슷하게 흘러가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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