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은 다시 붓을 집어 들고 얌전하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곧 저쪽에서 벤 로저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아이들 중에서도 특히 그 아이에게 놀림받을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벤의 발걸음이 삼단뛰기를 하듯 가벼운 것으로 보아 기분이 좋고 마음이 들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벤은 사과를 먹는 틈틈이 선율적인 환성을 길게 지르고는 곧이어 나지막한 저음으로 딩-동-딩-동-동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증기선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벤은 톰에게 가까이 다가오면서 속도를 늦추고 길 한복판에 자리 잡고 서더니 몸을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이며 육중하고도 위풍당당하게 뱃머리를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돌려서 멈추었다. […]
그러는 동안에도 톰은 회칠을 계속했다. 증기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벤이 잠깐 동안 톰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이렇게 입을 땠다.
“야! 너 정말 딱하게 됐구나!”
그러나 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칠한 곳을 마치 화가가 그러듯이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가볍게 붓으로 덧칠하고 나더니 금방 하던 대로 다시 잘 칠해졌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는 동안 벤이 톰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 섰다. 톰은 사과가 먹고 싶어 입에 침이 고였지만 꾹 참고 일에만 몰두했다. 그러자 벤이 말했다.
“저런, 친구야. 너 지금 일을 해야 되는 거야, 응?”
톰은 갑자기 몸을 뒤로 홱 돌리며 대꾸했다.
“야, 너 벤이로구나! 네가 오는 걸 보지 못했거든.”
“어때? 나 지금 헤엄치러 가는 중이거든. 너도 함께 가고 싶지 않니? 하지만 물론 너는 일을 해야 할 테지. 안 그래? 물론 일을 해야 하겠지!”
톰은 잠깐 동안 벤을 빤히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일이라니 뭐가?
“어럽쇼, 그럼 이게 일이 아니고 뭐니?”
톰은 다시 회칠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글쎄, 하기야 일이라면 일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 어쟀든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 일이 톰 소여의 마음에 썩 든다는 거야.”
“이봐, 설마하니 이 일을 좋아하는 척하는 건 아니겠지?”
톰은 쉬지 않고 계속 붓질을 했다.
“좋아하냐고? 글쎄, 내가 이 일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아이들한테 담장에 회칠할 기회가 어디 날마다 있는 줄 아니?”
톰의 이 말에 상황이 달라졌다. 벤은 사과를 베어 먹던 동작을 멈추었다. 톰은 점잖게 멋을 부려 가며 앞뒤로 붓질을 하고, 몇 발짝 뒤로 물러서서 칠한 것을 바라보다가, 여기저기 덧칠을 한 뒤 다시 그 결과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벤은 톰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면서 점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자기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굴뚝같아졌다. 마침내 벤이 이렇게 말했다.
“톰, 나도 좀 해 보자.”
톰은 잠깐 생각한 뒤 그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안 돼…… 안 된다고, 벤. 아무래도 안 되겠는걸. 너도 알다시피, 폴리 이모가 이 담장에 대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거든. 특히 사람들이 다니는 길거리 쪽에 있는 담장에 대해선 말이야. 하지만 뒤쪽 담장이라면 나나 이모나 별로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래 맞아, 이모는 바로 길거리 쪽 담장에 대해 꽤 까다로우셔. 여간 주의를 기울여서 칠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 이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아이는 아마 1000명에, 아니 2000명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할걸.”
“설마…… 그게 정말이니? 자, 한 번만 하게 해 줘. 아주 조금만 말이야. 만약 내가 너라면 네 부탁을 들어줄 거야, 톰.”
“벤, 나도 그러고 싶어. 정말이야. 하지만 폴리 이모가…… 글쎄 짐이 이 일을 하고 싶어 했지만 폴리 이모가 허락하지 않으셨거든, 시드도 하고 싶어 했지만 역시 이모가 못하게 하셨고.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이제 알겠지? 만약 네가 이 담장을 칠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너처럼 조심해서 칠할께. 그러니 나도 좀 해 보자. 있잖아, 이 사과 속을 너한테 줄께.”
“정 그렇다면, 이곳을…… 아냐, 벤, 아무래도 안 되겠어, 혹시나……”
“그럼 이 사과 몽땅 다 줄께!”
톰은 얼굴 표정으로는 마지못해 붓을 넘겨주는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얼른 건네주고 싶어 안달이었다. 이리하여 늦게 도착한 증기선 빅미주리호가 뙤약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회칠을 하는 동안, 현역에서 은퇴한 화가는 가까운 그늘 아래 있는 나무통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달랑거리며 사과를 먹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음에 나타날, 벤보다 더 어리석은 녀석들을 어떻게 하면 골탕 먹일까 하고 궁리했다. 걸려들 녀석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사내아이들이 곧이어 나타났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톰을 놀리려고 왔다가 마침내는 담장을 칠하고야 말았다. 벤이 녹초가 되었을 무렵 톰은 이번에는 빌리 피셔한테서 손질이 잘 되어 있는 연(鳶)을 받고 일을 맡겼다. 그 녀석마저 기진맥진하자 다음에는 조니 밀러한테서 죽은 쥐 한 마리와 쥐를 매달아 빙글빙글 돌리는 데 쓰는 노끈 한 개를 받고 일을 시켰다. 이런 식으로 아이들이 바뀌면서 한 시간 또 한 시간이 흘렀다. 아침나절에는 아무 것도 없이 빈털터리였던 톰이 오후 서너 시쯤이 되자 그야말로 엄청난 재산가가 되었다. 앞에서 말한 물건 말고도 공기알 열두 개, 입에 물고 손가락으로 튕기는 구금(口琴)의 일부, 안경처럼 볼 수 있는 푸른색 병유리 조각, 대포 모양의 실패, 어떤 자물쇠에도 맞지 않는 열쇠 하나, 백묵 조각, 유리 병마개, 양철로 만든 병정, 올챙이 몇 마리, 폭죽 여섯 개, 애꾸눈 새끼 고양이 한 마리, 놋쇠 문고리, 개 목걸이(물론 개는 딸려 있지 않지만), 칼의 손잡이, 오렌지 껍질 네 조각, 그리고 쓰지도 못할 다 망가진 창틀이 손에 들어 왔던 것이다.
톰은 그러는 동안 줄곧 걱정 근심 없이 편하게, 그것도 많은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또한 담장을 세겹이나 칠할 수 있었다! 만약 흰 회반죽이 떨어지지만 않았더라면 톰은 온 마을 아이들을 완전히 빈털터리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톰은 이 세상이 그렇게 공허하지만은 않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행동에 관한 중요한 법칙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즉 어른이건 아이건 어떤 물건을 갖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려면, 그 물건을 손에 넣기 어렵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점이다. […]
톰은 자신의 재산이 엄청나게 불어난 것을 두고 얼마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나서 담장 칠하는 일이 모두 끝났다고 보고하기 위해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Twain, Mark. 1876. The Adventures of Tom Sawyer.
(김욱동 역. 2009. 『톰 소여의 모험』. 1판 서울: 민음사. pp.3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