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는 큰 폭의 증산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민 개인이 피부로 느끼는 쌀의 수급 상황은 더 나빠졌다. 국민소득이 조금씩 높아지면서 보리쌀의 소비가 급격히 감소하고 쌀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쌀 수요 증가분이 쌀 생산 증가분을 앞지르자 정부는 쌀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62년 가을에는 벼의 흉작으로 추곡 생산이 600만 석이나 줄어들었고, 쌀값은 한때 전년 대비 400퍼센트나 솟구쳐 가마당 5,000원 선에 이르렀다. 또한 북한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쌀을 지원해 주겠다는 정치 선전을 개시하면서, 1962년의 쌀 파동은 박정희에게는 정권 초기의 위기가 되었다.
쌀 부족으로 인한 정국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1962년 11월 ‘혼분식 장려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곡 판매상은 백미만 따로 파는 것이 금지되고 반드시 2할씩 잡곡을 섞어 팔아야 했으며, 음식점에서도 2할의 잡곡을 섞어 밥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 의무가 되었다. 또한 학교나 관공서의 구내식당에서도 백미를 사용하지 못했고, 가정에서도 잡곡 혼식이 권장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963년에는 분식 장려운동이 한층 강화되었다. 여름 농산물 흉작까지 겹치자 7월에는 점심시간에 쌀로 만든 음식의 판매가 일체 중지되었다. 또한 1963년 2월 26일에는 “탁주 제조자에 대한 원료 미곡의 사용 금지 조치”(재무부 고시 제313호)를 발동하여 연말까지 한시적으로 쌀을 이용한 양조를 금지하였다. 이 조치는 소폭 변경과 연장을 거듭한 끝에 1966년 8월 28일부터는 아예 백미를 주조에 사용하는 것을 전면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쌀 자급 달성을 선언한 1977년 말까지 쌀을 이용한 양조는 금지되었고, 밀막걸리가 그 빈자리를 메웠다. 한편 1964년 8월부터는 육개장과 설렁탕 등 음식점에서 파는 탕반류에 쌀의 함량을 절반으로 줄이고, 잡곡을 4분의 1, 그리고 국수를 4분의 1 혼합 조리하도록 하였다. 설렁탕에 소면을 넣어먹는 것은 이때 비롯된 것이다. 1969년부터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무미일(無米日)’로 지정하여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 민간의 식당에서도 혼식 판매가 사실상 강제되었다. 그뿐 아니라, 밥그릇의 크기도 줄이도록 해 쌀 소비 감소를 유도했다. 이 “혼분식 강제 정책”에 의해 종래의 밥그릇보다 작은 스테인리스스틸제의 밥공기를 보급함에 따라 거기 담긴 밥을 “공기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70년대 역시 쌀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통일벼 보급을 통해 쌀 생산량이 큰 폭으로 늘어났지만, 쌀 소비량의 증대가 증산량을 앞질러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혼·분식 장려나 무미일 제도 등을 통해 극단적으로 쌀 수요를 억제했지만, 경제성장으로 생활비에서 쌀값 비중이 낮아지면서 쌀 수요의 증가를 막을 수 없었다. 1974년 쌀 생산량은 1973년에 비해 5.5퍼센트 늘어났지만,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23킬로그램에서 6.5퍼센트 늘어난 131킬로그램이 되었다. 이는 정부가 식량자급을 위한 적정 소비량으로 상정한 120킬로그램을 크게 상회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쌀 소비를 강제적으로 감소시키려 했다. 혼·분식 장려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1974년 12월부터 쌀을 엿이나 과자 원료로 쓰는 것을 금지하고, 떡을 만들 때 잡곡을 30퍼센트 이상 섞으며, 소매 쌀의 도정비율도 7분도(70퍼센트)로 낮추고 심지어 학교에서 도시락을 3할 이상 잡곡을 섞어 싸 오지 않은 학생들은 도시락을 먹지 못하도록 하는 등 쌀 소비 억제를 위해 다양하고 극단적인 정책을 동원했다.
김태호. 2017.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1판 파주: 들녘. pp.244-245
(감염병 위기로 인해서 정부가 비일상적으로 민간 생활의 많은 부분까지 규율하게 되면서) 시대를 뛰어넘어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 같기도. 위기가 지나간 후 우리의 생활에는 과연 어떤 흔적이 남게 될 것인지…